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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최근의 비평적 양상과 문제점들
임규찬 林奎燦
문학평론가, 성공회대 교수. 평론집으로 『왔던 길, 가는 길 사이에서』 『작품과 시간』 등이 있음. kclim@mail.s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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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위기론’이 문학계에 떠돈 지도 꽤나 오래됐다. 기존의 이론에 대한 거부와 결별, 그리고 새로운 이론의 공백과 부재라는 딜레마를 변화된 현실상황에 기대어 손쉽게 초월해버리는 효과적인 도구 역할을 하는 게 ‘위기론’의 한가지 특성이기도 했는데, 10여년이 넘은 지금에도 그 말을 이러저런 형태로 끌어들이는 침체된 상황이 계속되고 있으니 이제 ‘장기지속’이라 칭할 만한 우리 시대의 시공간성의 특질을 좀더 사려깊게 조감해볼 때도 된 듯하다.
실제로 나 자신을 돌아봐도 최근으로 올수록 미처 포착하기 힘든 어떤 타성들이 그런 장기지속 속에서 형성되어 있음을 문득문득 깨닫게 된다. 이번의 독서경험도 그러했다. 평론가로서 기본이 되어야 할 일상적인 글읽기의 게으름을 문제삼아 근년에 나온 평론집을 가능한 두루 읽고서 그로부터 뭔가 주제를 잡아 글을 한번 써보자고 작정한 것이 이번 글의 시작이었다. 언제부턴가 남의 평론에 별로 눈길이 가지 않더니 점점 더 평론을 읽지 않게 되고, 어느새 요즘 평론은 굳이 읽지 않아도 별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게으름이 질적 변환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히 비평적 현실에서 멀어졌는데도 현실은 별반 변화가 없는 일종의 ‘고인 물’ 혹은 ‘무풍지대’의 안온한 시간성과 공간성. 게다가 주로 소장 평론가들의 비평집을 한권 두권 읽어가다 대략 20여권에 이른 독서순례를 마친 일차적 소감이 그런 타성을 또 사후적으로 승인하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곰곰이 다시 생각해볼 때 그것은 양적인 주류성을 내세워 질적 차원의 성과에 대한 깊이있는 탐색 혹은 잘못된 경향에 대한 적극적 대결을 회피하려는 나태의 표현이었다. 중요한 것은 엉터리가 많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엉터리와 엉터리 아닌 것, 정말 진짜와 진짜에 가까운 것 등을 서로 구별하는 일인데도 말이다.
사실 모든 것이 불만스럽다고 여겨질 경우라도 그저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어떤 것도 무(無)로부터 생겨날 수는 없는 일이니, 그럴수록 모호한 현실 속으로 파고들어가 그 파편들 속에서 함께 뒹굴 자료를 끌어와야 할 터이다. 또한 최대한 쓸모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총체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으로 걸러서 한데 융합해내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이를테면 입장이 다르고 서로가 서로를 언급하지 않고 지나쳐버리거나, 그저 서로를 간단히 무시해버리면 버릴수록 그렇게 하는 것이 더욱더 절박하다는 생각이다.
물론 오늘의 비평현실 자체가 매우 복잡한 형국이라 이를 요령있게 가닥을 잡아 체계적인 구조를 내세우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개개인의 성과나 비평적 세부문제보다는 최근의 비평적 활동 속에서 보여지는 어떤 공동의 문제지점들을 꺼내 우리 시대의 비평적 공론화를 위한 의미있는 마당을 조금이라도 만들어서 ‘창조적 협동’의 단초를 얻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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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의 비평적 흐름을 논하면서 ‘비판적 글쓰기’(혹은 ‘문학권력논쟁’) 진영을 아무래도 먼저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 평단은 ‘문학권력논쟁’의 뜨거운 광풍이 휘몰아치는 크나큰 변화의 길 위에 있”1음을 말 그대로 수긍하기는 어렵겠지만, 비평가는 문학이라는 전쟁터의 전략가라는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말마따나 일정한 전쟁터를 형성해낸 그들은 비평적 실천에서나 서술의 양에서도 첫손 꼽을 정도로 집단적 흐름을 형성했다. 물론 근래에는 공격적 위세가 다소 약해졌고, 또 그들의 의도만큼 사회적 반향이나 확산이 이루어지지 않는 듯 보이기도 한다. 오히려 그들 내부에 이런저런 반성과 함께 차이 또한 서서히 형성되는 점들을 감안할 때 그들의 작업이 일반적인 문학적 위기에 대한 치유책이었다기보다는 현실의 어떤 징후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다가온다.
나 자신의 경우를 말한다면 이들의 비판은 앞서 이야기한 타성을 환기시켜주는 한 계기가 되었다. 제도적·구조적 문제들에 대한 그들의 현실적 분석과 비판에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한 사람의 비평가로서 가져야 할 자세로서 지적한 도덕성·윤리성에서 결코 나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는, 그리하여 그들이 지적한 인정주의나 패거리주의 등에 무관치 않고 그런 흔적이 실제비평에서도 반영되기도 했다는 점을 솔직히 시인한다.
그런데 최근 2, 3년 동안에 이루어진 ‘권력 비판’은 담론권력에 대한 도전이라기보다는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권위주의 질서와 기득권세력을 중심으로 한 문화집단 내의 계서적(階序的)인 차별화 관습, 상업주의 전략 등에 대한 도전의 성격이 강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제기 자체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진전에 따른 권리의 정착과 확대라는 측면에서 나름대로 수용할 여지가 있었고, 또한 우리 사회의 전반적 움직임과 맥을 같이하는 면도 있었다. 그 점에서 1990년대 이후 민족문학의 부진, 특히 ‘운동’ 차원의 부진을 생각할 때 이들의 운동적 성격은 지금의 현실에 밀착시켜 좀더 면밀하게 분석하여 끌어안을 것은 안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새로운 문예이론 혹은 문예비평적 차원에서도 그것의 현실적 근거는 충분하다. 일반적인 통념상 문학은 제도라는 사회적 굴레에서 벗어난 혹은 그것과는 상관없는 창조적 행위로 이해하기 십상이기에 문학에 대한 제도적 접근이라는 표현 자체가 상당히 어색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문학이 아무리 자유롭고 창조적인 행위라 하더라도 그 자유는 한 시대나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속되고 조건지어진 것으로서 작가의 창조적 의지 역시 문학적 제도 혹은 사회적 제도에 의해 조절되며, 제도적 속성을 갖게 마련이라는 인식에 기반하여 등장한 것이 이른바 문학사회학적 관점과 시도이다. 실제로 문학생산을 매개하는 여러가지 현상과 관련하여, 글쓰는 행위란 사회현실의 여러 국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교환과 타협의 한 소산이며, 문학작품은 개인의 자유를 통해 실현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역사의 산물이라는 점, 그 산물은 다른 물질적 활동과 같은 실천행위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그러한 제도적 인식을 수행하는 연구가 서구에서 진작부터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왔다.2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지금까지의 결과로 볼 때 전체성보다는 부분성에 갇힘으로써, 더불어 부분성의 전면적 가치화가 이루어짐으로써 매우 착종된 형상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우선 90년대 이후 문학권력, 비평권력에 대한 비판은 푸꼬(Michel Foucault)가 말한 ‘담론의 권력’ 비판과는 다른 형태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최근까지 지속된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은, 자체의 체계를 지닌 ‘권위적 담론’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잡지와 매체 등 제도적인 권력을 선점하고 있는 집단에 대한 ‘정치적인 공세’였다. 이런 ‘제도권력’에 대한 비판은 ‘담론권력’에 대한 부차적인 비판의 의미는 지닐 수 있지만, ‘담론’ 자체에 대한 비판과 ‘해체’를 통해서 새로운 담론을 생산하는 행위와는 거리가 있었다.3 사실 보편적 문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와 상상세계에서 작용하는 특별하고 개성적인 실천행위가 여럿 있는 것이며, 그런만큼 어떤 한 단위의 성격은 어디까지나 사회구조 안에서 각기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떻게 관여하고 있는가 하는 층위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정확한 분별 없이 무차별적으로 현존 문학적 단위를 일률화하여 적대시하는 것은 그들 자신을 스스로 옭죌 뿐만 아니라 내부의 다양한 편차, 따지고 보면 더 궁극적인 요소라 할 수 있는 문학과 현실에 대한 인식의 편차를 무화시킴으로써 그들 자신이 계속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봉쇄하여 ‘비판을 위한 비판’의 덫에 갇히게 만든다.
특정한 대상을 분석할 때 전체성에 대한 객관적 인식에 앞서 부분성을 전면화하는 전략은 구석구석을 쑤셔서 필요한 이것저것을 채집하여 그것으로 판을 엮는 방식이기에, 그들의 의도만큼 진정성있는 비판으로 다가서지 못하는 것이다. 대상으로 삼은 실제 작품이나 작가를 비평하는 현장에서 흔히 발견되는 문학과 사회현상의 동형적 일치 혹은 반영의 논리에 기반한 결정론적인 시각과, 또한 문학 외적인 것의 논리와 가치를 확대하면서 문학 내적인 것의 의미를 축소시키는 역사적 실증주의의 편향 역시 그런 불신을 더욱 부추긴다. 이러한 문제점은 80년대 민족문학진영의 일부에서 보인 악명높은 ‘속류사회학주의’ ‘정치주의’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없지 않다. 실제로 그들이 공격했던 평론가들(남진우·류보선·권오룡·홍정선 등)로부터 역공받는 과정을 보면, 역공하는 측이 이른바 문학성에 기반하여 아마추어리즘과 전문주의의 대립 차원에서 상대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한편 이 점은 그들이 공격대상으로 삼지 않는 다른 작가의 작품에 대한 비평에서 보이는 문제와도 관련될 것이다. 가령 하상일(河相一)의 『타락한 중심을 향한 반역』에는 김곰치의 『엄마와 함께 칼국수를』(한겨레신문사 1999)과 김종광의 소설에 대한 비평, 그리고 양왕용·이근대·이선형·전기웅·정익진의 시집에 대한 비평도 들어있는데, 이들 비평은 ‘비판적 글쓰기’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범박한 수준의 것이다.4 또한 최근 들어 그들 내부에서 자기반성하는 가운데 공통적으로 지적되는 동어반복적 논리, 도덕무장화의 문제도 이론적 깊이의 부족을 결과적으로 자인할 뿐이다.
물론 저는 제 자신의 글을 포함하여, 최근의 문학권력 논의나 문학권력을 비판하는 글에 간과할 수 없는 한계와 단점이 있다는 점을 기꺼이 인정합니다. 때로 사안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동어반복에 빠지기도 하고, 비판의 대상자에 대한 근거없는 도덕적 우월감으로 무장하여 지나치게 격앙된 윤리적 호소나 일방적인 자기주장을 전개하는 면도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권성우 『비평과 권력』, 소명 2001, 59면)
나아가 내부의 차이에 대한 최근의 인식은 이들이 어느 선, 정확히 말하면 특정목표 아래서만 함께할 수 있는 경계에 이미 다가서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조차 한다. 가령 권성우(權晟右)는 “비판적 글쓰기를 전개하는 논자 사이의 의미있는 상호비판이 제대로 전개되지 않을 때, 비판적 글쓰기는 그만큼 오만과 편견에 빠질 우려가 많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공동의 대의와 목표 아래, 비판적 글쓰기에 존재하고 있을 미세한 의견차이가 어정쩡하게 봉합될 때, 비판적 글쓰기는 언제든지 새로운 의미의 패거리주의로 변질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강준만의 김정란론에서 바로 그러한 징후가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 아닌가?)”5라고 하여 ‘미세한 의견차이’가 있는 듯 말하지만, 구체적인 분석내용을 보면 강준만(康俊晩)과 권성우 사이에, 나아가 김정란(金正蘭)과 권성우 사이에 이미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6 특히 최근에 들어올수록 그 위세가 약화되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 진영이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하여 급속히 손을 맞잡은 편의적 동맹이나 이해공동체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이런 여러 현상들을 고려할 때 이들 진영이 좀더 의미있는 전진을 하고자 한다면, 부분성에서 탈각하여 현실과 문학 전체에 대한 시각을 다각도로 추스르는 도약의 계기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진중권(陳重權)이 ‘문학권력 논쟁에서 예술사회학으로’라고 그 진로를 제시한 것도 그런 맥락에 서있다.
이 논쟁이 다소 소모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문학장에 구도를 변경시킬 새로운 문학세력이나 문학이념의 담지자가 없이 논쟁이 진행되다보니, 미시권력에 대한 비판이 문학이론이나 문학실천에서 생산적인 결과로 귀결되지 않는 것이다. 비평이나 메타비평은 내용없는 아우라의 거품을 걷어냄으로써 새로운 문학과 문학론을 낳기 위한 필요조건을 형성할 수는 있으나 그것을 낳는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왕도는 없다. 문학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오직 새로운 문학적 감성과 창조성, 그리고 자기를 지키려는 존재미학의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위기는 문학상이 아니라 문학성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진중권 「문학권력논쟁에서 예술사회학으로」, 김명인 외 『주례사비평을 넘어서』,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2, 324면)
진중권은 기본적으로 이전 시기의 문학세력이나 이념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면서 그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새로운 문학세력이나 이념’의 창출을 겨냥한다. 이 문제에 대해 여기서 상론할 형편은 못되고,7 다만 그의 문제제기 자체는 권성우나 『비평과 전망』 동인들이 처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곤경을 환기시켜준다. 사실 비판적 글쓰기 진영의 대다수가 크게 보아 도덕주의로부터 쉽사리 탈피하기 힘든 논리구조에 발이 묶여 있음은 글의 결론에서 자주 반복되는 다음과 같은 유형의 진술이 잘 보여준다.
우선, 비평가 스스로가 자신의 비평에 대한 분명한 자의식을 확립해야만 한다. 문단의 역학관계에 쉽게 떠밀리지도 않아야 하고, 인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청탁받은 글을 울며 겨자 먹기로 써서도 안될 것이며, 출판시스템의 구조적 모순에 편승하는 상업주의의 유혹에 넘어가서도 안될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비평은 스스로에 대한 엄정함 속에서 이루어져야 올곧은 자리매김을 할 수 있다. (하상일, 앞의 책 25면)
앞서 인용한 권성우의 경우에도 그렇듯이 대개가 자기비판, 자기성찰의 중요성과 함께 상호비판 등 ‘열린 대화’8를 강조하는 형태로 마무리된다. 이런 면모는 “비록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제도 그 자체를 해체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하는 해체주의적 좌익도 있다. 그러한 좌파 해체주의의 정치학은 과연 그들답게 무정부적이었다. 즉 권력, 권위, 제도적 형식 그 자체에 대한 의심인데, 그것은 또다른 자유주의의 급진적인 한 변형이다. 그러한 제도적 비평은 은연중에 도덕주의로 흐를 뿐만 아니라 형식주의적이거나 추상적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9라는 이글턴(Terry Eagleton)의 말을 되새김질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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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이후의 실제적 비평양상이나 미학적인 자질 등을 두루 고려할 때 또하나의 비평경향으로 ‘문학주의’라 지칭할 수 있는 커다란 경향을 불러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발간된 주요 잡지 창간사를 통해 90년대 비평이 어떻게 전개되어왔는가를 살핀 이광호(李光鎬)의 「보이지 않는 ‘비평의 시대’」(『움직이는 부재』, 문학과지성사 2001)는 일종의 내부자 시선에 의해 잘 정리된 이 경향의 보고서라 할 수 있어, 이를 통해 먼저 90년대 문학주의의 양상을 간단히 정리해두고자 한다. 이광호는 여기서 ‘세상이 너무 무섭게 변화’하는 시대로 90년대를 규정하고, 따라서 ‘우울한 상황 분석’에 기반할 수밖에 없음을 토로한다. 그러나 그가 주목한 상황은 전체 현실이 아닌 문화적 지각변동이다. 아울러 그는 세대론적 전략에 근거하여 90년대의 비평적 입지가 세워졌다고 보고, 사회구조적 관심의 증폭과 비평의 ‘극단적 계몽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반성적 사유’라는 가치가 내세워졌다고 파악한다. 그런데 그후에 현실적인 변화의 힘이 더욱 커져서 마침내 계몽적 지위로 대변되는 비평의 권능을 송두리째 포기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갔다고 본다. 그렇다면 오늘날 비평의 실제 양상은 어떠한가?
90년대 비평이 가장 주력한 것은 실제비평의 영역이었다. 실제비평의 풍부한 생산은 90년대 비평의 가장 현실적인 문학적 기여였다. 작품을 섬세하게 읽어야 한다는 당위는 근대비평의 기본적 조건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존중되지 못한 것이 한국문학의 현실이었고, 90년대는 상대적으로 그 조건에 충실하려는 노력이 활발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관여한다. 이론비평 혹은 더욱 권위적인 형태의 지도비평과 아카데미즘이 전 시대의 비평의 주류였다면, 이제는 작가의 개성을 존중하고 작품을 섬세하게 따라 읽는 비평이 요구된다는 논리가 가능했다. 또한 새로운 문학잡지들의 등장으로 생겨난 풍부한 지면들이 그 상당부분을 이론적 기획보다는 작가론·작품론에 할애했다는 현실적인 요인이 작용한다. 그런데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문학적 이념은 작품 자체의 가치와 문학적 다양성이라는 주제였다. (이광호, 같은 글 69~70면)
이 서술에서 알 수 있듯이 이광호는 90년대 비평을 한마디로 ‘개별 작가의 문학적 자율성의 강조’로 요약되는 ‘문학주의’와 ‘작가주의’로 규정한다. 그에 의한 분석과 전개과정에 대한 서술은 현상면에서 대체적으로 수긍할 만한 것들이다. 다만 거기에 한가지만 미리 덧붙여두고자 한다. 최근으로 올수록, 그리고 젊은 세대로 내려올수록 일련의 이론적 모색 없이 이른바 ‘문학주의’라 일컬음직한 경향에 타성처럼 기대면서 ‘실제비평’을 하는 경향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90년대 초반부터 ‘문학주의’적 입장에서 이론 모색을 지속해온 이광호·박혜경·우찬제 등의 최근 논의를 먼저 진단해보고, 다음으로 더 젊은 세대의 비평이 어떤 특징과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가를 이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90년대 초반부터 세대론의 구상 속에서 80년대적인 것을 낡고 억압적인 것으로 보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일, 즉 계급·민족·계몽에 대한 혐오증에서 탈계급·탈민족·탈계몽에 대한 열광증이 시작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 문학만의 독자성·자립성·자율성을 위해 손쉽게 이분법을 구사, 한쪽을 내려침으로써 다른 한쪽을 순결하게 만드는 전략도 진작부터 있어왔다. 그리고 그때 가장 주된 비판적 근거로 내세워지는 것이 ‘계몽성’ ‘이념’ 등이었다. 앞서 살펴본 이광호의 글에서도 처음에는 ‘극단적 계몽주의’라 하여 극단성을 문제삼다가 어느 순간 ‘계몽적 지위’로 일반화해 전체를 무력화시키는 전략을 노골적으로 구사한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부여 방식에도 주도면밀한 역사화가 숨겨져 있다. 처음에는 ‘극단적 계몽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반성적 사유’가 내세워졌다고 했다. 사실 ‘반성적 사유’란 말 자체야 나쁠 것이 없지만 이미 70년대부터 극단성에 대한 ‘중도적’ 상투어로 흔하게 동원되던 용어였다. 실제로 이광호도 ‘반성적 사유’가 4·19세대에 의해 형성된 이념으로 일종의 ‘고전적 가치’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가 ‘문학주의’로의 ‘귀환’이라고 굳이 지칭한 의도가 거기에 있다. 자연히 80년대뿐만 아니라 70년대의 민족문학·리얼리즘 역시 지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90년대 초반보다 최근으로 올수록 계몽(이념)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 이론비평과 실제비평 등 이분법의 구사를 통한 한쪽 죽이기는 더욱 상투화되는 듯하다. 우찬제(禹燦濟)는 20세기 한국소설의 큰 흐름을 살핀 「한국소설의 고통과 향유」에서 “계몽주의로부터 벗어나기, 현실의 논리를 포월하여 소설담론의 논리를 추구하기, 동일자 내지 남성 중심 서사에서 타자 지향 내지 여성성 지향으로 관심 확산하기 등 세 가지”10 길을 제시하면서, 전자를 ‘보수적인 소설관’이라 명명한다. 그러나 구체적 내용에 들어가서 그가 내세우는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모더니즘적 경향의 소설가에 대한 편애는 어느정도 감안하더라도 솔직히 혼란스럽다. “20세기 전체를 놓고 보면 대체로 보수적인 소설관이 더 많았”다면서, 그가 긍정하는 진영에 비해 비판하는 진영을 어느만큼 왜소화시키는가를 보라.
이광수류의 계몽주의 소설이나 경향소설들 그리고 그 후예들의 소설들에서 현실의 논리에 의해 담론의 질서가 위축되거나 일그러지는 양상을 우리는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꼭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 소설은 대체로 현실의 논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김동인이나 염상섭·채만식·박태원·이상·김유정·이효석·손창섭·최인훈 등을 비롯해 서정인·박상륭·이청준·이제하·이문구를 거쳐, 오정희·이인성·복거일·최윤·윤대녕·성석제에 이르기까지 여러 작가들이 현실의 논리와 맞씨름하며 비교적 담론의 질서와 논리를 추구하고자 했던 사실을 읽어낼 수 있다. (같은 책 58면)
또 박혜경(朴蕙慶)은 90년대 소설의 전개양상을 살핀 글에서 “세계 속에 인간의 의지를 세우고 인간적 주체라는 확고한 이데올로기에 따라 세계 내에서 인간의 삶을 기획하려는 계몽에의 욕망으로부터, 세계와의 소통 불가능에 대한 절망과 좌절의 지점을 거쳐, 세계에 대한 인식주체로서의 인간이라는 믿음 자체가 파열되는 지점에까지 와 있다”11라는, 이제는 익숙해진 진단을 내세우며, 계몽적인 것, 덧붙여 사실주의적 재현논리까지 한데 묶어 현대사에서 추방한다.
문학 혹은 비평의 위기론에 대한 접근도 어느덧 상투화된 듯하다.
최근 몇년 사이 유행하는 ‘시의 위기’나 ‘시의 죽음’이라는 풍문은 재고해볼 여지가 있다. 이들 개념이 단순히 최근 발표되는 시의 양적 왜소화나 질적 저하를 겨냥해서 제기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물론 정치적 상상력이 문학의 가장 중요한 자양분으로 작용하던 지난 연대에 비해 전반적으로 이데올로기적 대립구도가 약화되고 탈정치성의 기류가 지배적인 요즘, 우리 시가 사회적 영향력이나 대중적 관심의 측면에서 예전만 못하다는 인상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시의 위기’나 ‘시의 죽음’이란, 이 개념의 유행적 사용이 말해주듯, 단순히 시가 사회적 문화적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다는 현상적 측면을 가리키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니다. (…) 따라서 시의 위기나 죽음은 다른 차원에서 논의되어져야 한다. 시는 권력자나 일반대중이 외면함에 따라 그 효용가치가 다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또는 영상매체와의 경쟁에서 패배해 은퇴를 강요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 시는 그 기원에서부터 위기를 먹고 죽음을 사는 독특한 생존방식을 택해왔다. 시에게 위기는 일용할 양식이며 죽음은 일종의 운명이라 할 수 있다. (남진우 『그리고 신은 시인을 창조했다』, 문학동네 2001, 8면)
이 인용문에서 보듯이 위기론의 풍문을 비판하는 가운데 문학의 역사적·현실적 맥락을 지우고 대신 존재론적 층위로 문제를 이월시킨다. 박혜경도 「문학, 유령의 삶」에서 자신의 탈정치적 성격과 역사의식의 부재를 다음같이 채색한다.
그러므로 문학은 이제 정보의 세계로부터 이야기의 자리를 탈환해오는 양식,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이야기의 죽음을 통해 삶의 죽음을 응시하는 양식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할 얘기가 없다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마침내 한 권의 공백으로 남게 되는 책”을 위해 “문장을 하나씩 지워가는 방식”으로 문장을 토해내는 것, 그러면서도 “내게 말을 강요하는 것, 말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것, 이 아무것도 아닌 이것은 무엇인가?”라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 이제 문학은 아무것도 아닌 저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응시하는 그 절망적인 질문의 양식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절망을 향해 절망을 온전히 절망의 양식으로 되돌려주는 일, 그것이 문학이 자신의 죽음을 살며 동시에 이 세상의 죽음을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결국 문학의 죽음은 세상의 죽음과 겹쳐 있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연기(演技)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연기(延期)하는 것, 그럼으로써 자신에게 죽음을 언도한 이 세상의 죽음 또한 연기(延期)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저 자신의 죽음의 삶을 살고 있는 문학이라는 유령이 끊임없이 이 세상의 한가운데로 귀환하는 방식이며, 문학이 다시 한번, 치열하게 그 유령의 삶을 끌어안는 방식이다. (박혜경, 앞의 책 35~36면)
나아가 “문학은 이제 문화적 후위의 자리에서 문학적 전위를 실험하게 된 것이다. 문화적 주류에서 물러남으로써 문학은 자기 존재의 고유성을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12를 얻게 되었다는 역설을 동원하여 자율적 세계를 설정한다. 즉 공공영역을 넘어선 초월적 관점을 취함으로써 지적으로는 무력해지고 사회적인 주변세력으로 전락하는 희생을 치르는 대신 비평의 고결성을 보호하는 길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현실과 역사, 나아가 계몽성·이념 등은 굳이 들어설 필요가 없어졌고, 그럴 자리 또한 없어졌다. 그 대신 논자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최근에 올수록 적극 불러오는 것이 있으니 ‘문화’이다. 이는 김영하·백민석 등 젊은 작가들의 소설적 실험에 대한 그들 나름의 적극적인 수용전략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이전의 엘리뜨주의에 기반한 문학주의와 이것을 어떻게 결부시키느냐는 것이다. ‘문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측이라고 볼 수 있는 이광호는 “전위적인 예술운동은 키치의 반엘리트적이고 전복적이며 반어적인 형식을 이용한다. 이것은 모더니즘 예술이 엘리트주의에 갇혀 그 파괴력을 소진하고 규범화되는 것에 대한 반란이며, 대량으로 유포되는 문화상품에 관한 모더니즘의 숙명적인 혐오감에 대한 도전이다”라고 하여 엘리뜨주의의 또다른 미학적 변신인 아방가르드의 모더니즘에 입지점을 세웠다.13 포스트모더니즘에 별다른 경계를 하지 않고, 오히려 해체하려는 것에마저 무심히 기생하여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자율적 미학에 기대는 것도 변화된 현실에 결과적으로 적극 순응 혹은 추수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광호가 앞에서 지적한 90년대 비평의 특징들은 가장 젊은 세대라 할 수 있는 김동식의 『냉소와 매혹』, 김춘식의 『불온한 정신』, 오형엽의 『신체와 문체』, 그리고 최현식의 『말 속의 침묵』, 허정의 『먼 곳의 불빛』 등의 비평집이나, 그밖에 최근에 등단한 비평가들의 비평에도 두루 나타난다. 대부분의 비평집이 작가론·작품론으로만 거의 채워졌고, 심지어 시평론과 소설평론으로 완벽하게 세분화되는 경우까지 있다. 사실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평론집의 구성방식은 대개 앞부분에 메타비평이나 특정한 문학경향 혹은 쟁점에 대한 종합적인 진단 등 비교적 큰 문제의식을 가지고 씌어지는 글들이 포진하고, 그 뒤로 작가론이나 작품론, 혹은 소설평론과 시평론 등으로 분류되어 수록된 것이 일반적이었다. 최근의 비평집에서 큰 문제의식을 가지고 씌어진 글이 사라졌다는 것은 간단히 지나칠 사항이 아니다. 최현식(崔賢植)은 최근 문학적 환경에서 비평가로서 자신의 존재형태가 어떠한가를 솔직히 토로한다.
등단 후 쓴 글의 일부를 모아 첫 비평집을 엮는다. 모두 시에 대해 쓴 글들이니 시론집이라 해도 되겠다. 다른 장르의 작품을 전혀 다루지 못한 것은 무엇보다 나의 게으름 탓이지만, 1990년대 들어 뚜렷해진 비평의 세분화 현상에 영향받은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아쉬움은 없다. 시를 통해 타자들, 그리고 또다른 ‘나’를 문득 조우하는 즐거움이 워낙 컸으므로.
나는 이 글들을 쓰면서 어떤 일관된 체계나 주제를 크게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대개 청탁에 따라, 혹은 개인적 관심에 촉발되어 쓴 글들이라 그럴 여유도 없었지만, 우선은 개개의 시들이 말하는 바를 수굿하게 경청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상의 범위와 성격에 관계없이, 대부분의 글이 작가·작품론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최현식 『말 속의 침묵』, 문학과지성사 2002, 5면)
이런 현상은 비평가의 존재가 이제 학교나 학문 제도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반증해주는 것이고, 아울러 비평 자체가 미분화되는 만큼 왜소화되고 있음을 솔직히 보여준 셈이다. 물론 작가·작품론만 있다고 해서 그 자체가 문제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비평이란 일차적으로 작품읽기, 즉 최상의 언어활동을 통해 창조한 삶과 사회에 대한 통찰을 포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전대의 이론·이념지향성에 대한 반성의 산물로서, “한 작가의 영역은 특정의 이념적 척도로 잴 수 없는 고유한 것이며, 한 작품의 세계 역시 그 내적 논리를 이해하는 바탕 위에서 평가되어야 한다”14는 ‘실제비평’으로서의 작가론과 작품론이다.
오형엽(吳瀅燁)이 자신의 비평관을 요약적으로 서술한 대목에서 그 점을 잘 말해주고 있다.
문체를 통해 신체에 이르는 이러한 과정은 비평방식으로서 ‘미시적 이론화’라는 용어로 설명될 수 있을지 모른다. 문제 구성 및 이론화 작업은 비평의 기본임무이자 생명이다. 그러나 1980년대까지의 우리 비평은 현실의 구체적 근거 및 작품의 질료에 기반하지 않은 채 과도하게 비평이념에 집착하는 태도, 즉 거시비평의 영역에 치중한 입법비평과 지도비평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현대사의 질곡 및 모순과 맞서 싸우는 대항의 논리에 의해 이데올로기적 혹은 대사회적 비판담론이 힘을 얻어온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탈정치화되고 중층적으로 변모된 사회적·문화적 현실의 양상은 비평에 있어서도 세밀하고 정치한 미시비평을 요구하게 된다. 1990년대 이후 비평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문학을 작품의 내재적 가치를 중심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로 인해 융성한 작품론의 성과라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텍스트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해석하는 작품론의 수준에서 우리 시대의 비평은 이전의 비평이 얻지 못한 성과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오형엽 『신체와 문체』, 문학과지성사 2001, 9면)
말하자면 ‘이론비평과 실제비평’ ‘입법(지도)비평과 미시비평’이라는 이분법은 이제 협곡을 가진 두 절벽처럼 마주세워지고 있다. 그리고 은연중 한쪽을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추세이다. 그렇지만 지금 여기서 비판받고 있는 이론주의 문제가 80년대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80년대나 90년대나, 정치적 성향의 차이만 있을 뿐 줄곧 우리 평단의 한 병폐가 되어왔던 것이다. 명백히 이론과잉인 비평과 마냥 답답한 작품읽기는 제외하더라도, 이론주의를 거부한다면서도 실제로는 이론틀에 맞게 작품 내의 디테일들을 이렇게저렇게 짜맞추는 작품읽기 역시 우리가 흔하게 마주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가령 손정수와 김춘식의 비평은 그 점에서 좋은 비교대상이다.
많은 경우 글쓰기에 대한 논의의 기반이 서구의 글쓰기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되기 어렵다. (…) 열심히 서구의 이론들을 무릎을 쳐가며 읽고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며 생각을 거듭해도 정작 글쓰기에 이르면 앙상하고 상투적인 논조로 귀결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 어쨌든 이러한 문제들이 서구적 방법론에 대한 반성이라는 주장만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한 것이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서구 지향적 담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은 틀리지 않을 수는 있어도 현실적인 글쓰기의 대안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 문제는 이론의 과잉이 아니라 이론의 빈곤이다. 단순화의 유혹이 아니라 복잡성의 생산이다. (손정수 『미와 이데올로기』, 문학동네 2002, 43면)
손정수(孫禎秀)는 소장평론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자신의 이론주의적 성격을 이처럼 분명하게 드러내 보인다. 이론에 대한 관심 탓인지 동세대 비평가들에 비해 일종의 주제론에 해당되는 글들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문제는 비평의 실제가 어떠한가이다.
한편 『Believe it or Not Magazine』에는 처음엔 단순히 한마리 갖고 싶은 생각에서 고양이를 샀던 사람들이 나중엔 그 고양이로부터 사랑받는 주인이 되기 위해 부단히 전전긍긍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요람 속의 고양이 둘」). 이 경우 고양이는 단순한 애완동물 ‘나비’가 아니라 하나의 ‘신비’이다. 애초에 고양이는 주인에게 “온전히 가져보지 못했던 하나의 가족”처럼 ‘의미’의 ‘기호’였다. 그러나 인간은 곧 ‘기호’에 의해 구속당한다. 인간은 의미의 기호들에 짓눌려 그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의미’는 사라지고 ‘기호’의 지배를 받는 투명하고도 기계적인 동작만이 반복된다. 의미가 소멸된 기호들의 체계와 그 체계의 투명성 속에서 이제 “완전히 가져보지 못했던 하나의 가족”이라는 의미는 ‘신비’가 되고 만다. 즉 모든 의미를 소멸시키는 체계의 투명성 속을 무기력하고 투명한 대중이 살아가고 있는 가상현실이 곧 ‘믿거나말거나박물지’인 것이다.
백민석의 소설에서 가상현실은 꿈과 현실, 포르노와 록 음악, 문화와 역사 등이 혼종되어 있는 일종의 아나그램에 의해 구성된다. 그의 소설은 이러한 문화적 기호들의 아나그램을 통해 허구와 실재를 넘나들면서 의미와 가치가 소멸된 세기말의 현실을 알레고리화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백민석 소설은 단순한 자기증식적인 글쓰기에 그치지 않는다. (같은 책 89면)
이 대목에서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지우면 ‘의미’ ‘기호’ ‘가상현실’에 대한 익숙한 이론적 서술로 다가올 것이다. 더구나 “제가 읽고 쓰는 글들은 사실 소수의 동업자들을 제외하면 좀처럼 읽기 어려운 것들입니다”(같은 책 5면)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손정수의 글은 난해하다. ‘제 세대의 몫에 충실해야 한다’면서 ‘실험적 경향의 작품에 대한 편향성’을 스스로 지적할 만큼 ‘실험적 이론화’에 몰두하고, 그리하여 자신의 비평이 ‘텍스트 이론의 실증이자 텍스트-실천의 원천’15임을 정직하게 드러내 보인다.
반면 김춘식(金春植)은 주로 시를 대상으로 삼는 가운데 ‘시적 생산의 현장은 언제나 이론을 앞서가는 만큼’ ‘엄밀한 이론적 정합성보다는 시기 적절한 판단을 내리는 일, 동시대적인 감수성과 감각’에 더 많이 의존16했음을 강조하며 실제비평을 행한 경우이다. 사실 동세대 비평가들 가운데 김춘식은 성실한 시읽기로 비평활동을 전개해 신뢰를 받아왔다. 그런데 성실성도 때로 지나치면 문제를 야기하는 듯하다. 특정기간 동안 발표된 몇몇 시작품을 분석하면서 거기에 지나친 의도를 덧씌워 그럴싸한 비평적 외양을 갖추려 하다가 내용과 형식이 균열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90년대 시의 몇몇 징후를 각각 내포하고 있다고 보이는 문정희의 「동행」, 서원동 「녹슨 냉장고」, 강제윤 「노인」, 나희덕 「방석 위의 생」 「젖은 길」 등의 작품에 주목해보기로 하자. 하나의 시대적 징후를 내포하고 있는 시는 어떤 의미에서든 새로운 미적 감수성과 미학의 출현을 예고하는 작품이다. 이 점은 징후가 곧 가능성의 의미로도 인식될 수 있다는 뜻이다. (같은 책 225~26면)
라는 예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미리 설정된 어떤 이론틀에 맞게 작품을 취사선택하여 이리저리 짜맞추는 듯한 인상이다. 인용된 글은 ‘미적 근대성과 진정성의 위기’라는 상당히 무게있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정작 그 내용을 보면 ‘일상성으로부터의 일탈과 화해’ ‘사물화와 인간화의 경계’ ‘죽음과 사물화’ ‘비판적 부정정신과 탈욕망’ 등의 소제목을 달고 각 시를 차례로 분석,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나열된 소제목을 이리저리 연결지어봐도 ‘새로운 미적 감수성과 미학’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또하나 간과할 수 없는 점은 뭔가 근사한 이론을 앞에 장식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관행이다. 이 글에서도 데까르뜨와 라깡을 거론하며 ‘근대적 주체의 신화’로부터 추방된 시인에 대해 꽤 장황한 이론적 서술을 펼쳐나간 끝에 새로운 징후의 뿌리에 ‘근대적인 의미의 미적 자의식과 진정성의 위기’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실 두 경우의 예만 들었는데, 일반적으로 볼 때 후자의 경향이 훨씬 만연해 있다. 결국 ‘이론비평과 실제비평의 괴리’가 없는 비평이야말로 제대로 된 비평임을 새삼 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작품읽기와 무관하게 개진된 추상적 체계에서 ‘규범’이나 ‘기준’을 미리 설정하고 그것을 개개 작품에 적용하는 태도도 문제지만, 작품을 미리 주어져 있는 ‘실체’처럼 취급하여 아무런 ‘기준’ 없이, 즉 그 나름의 이론적 가정들을 개입시키지 않은 채 수동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하면 그만이라고 여기는 ‘실제비평’적 편향17도 문제이고 그래서는 결국 실제비평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문제이다. 해석이란 해석자와 독자의 대화인 동시에 또한 작품 자체와 주고받는 대화이기도 하다. 해석은 인간활동의 산물로서 주관적인 계기들을 지닌다. 작품 또한 그저 단순히 존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는 것이다. 물론 텍스트와 비판 사이에 오가는 대화에 있어서는 수동주의적인 해석학이 원하는 것처럼 통상적인 주체-객체-관계가 그렇게 간단히 뒤바뀌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군주 앞에 나설 때처럼 예술작품을 대해야 한다고들 말한다.18 그래서 작품이 자기한테 과연 말을 걸 것인지, 그리고 무슨 말을 들려줄 것인지, 마치 앞서 인용한 최현식의 말처럼 ‘수굿하게 경청’하며 마냥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작품의 자율성 요구, 즉 사물 그 자체에 몰두하라는 요구가 그처럼 군주적인 성격으로 과장된다면, 인간이 예술작품을 전유할 수 있는 여지 자체가, 더불어 비판적 시각도 사라지고 만다.
‘실제비평’적 편향이 타성화되다보면 쉽사리 인상주의로 빠지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비평 텍스트를 철저히 개인주의적 색깔로 물들이는 일종의 미식가적 비평가19도 그 한 예이다. 작가나 독자를 향해 일정한 논거를 가지고 자신의 판단을 피력하지 않은 채 자신의 입맛에만 골몰하여 그 감각적 반응을 알리는 선에서 맴돌고 만다. 이런 경우 자질구레한 삽화를 빈번하게 도입하는데, 그것이 지나칠 경우 비평의 ‘잡담화’로 빠지게 된다.
한편 개별 작가론 및 작품론에서는 지나치기 쉽지만 하나의 비평집에 비평들이 한데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 비판력 부재의 현상이다. 개별 작가나 작품간에 분명히 질적 수준과 이런저런 차이가 있게 마련인데, 그런 불평등(?)을 없앰으로써 비평의 가장 기본이랄 수 있는 변별력은 거의 무의미해지고 만다. 오히려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것은 원칙상 모든 것이 공존할 수 있다는 일종의 ‘관용의 정신’이다. 오늘날 비평현실의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비평적 기준보다 출판자본의 이해관계나 개인적 친소관계에 이끌리는 작품해설 수준의 비평이 양산되는 현상도 이런 관용의 정신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물론 많은 비평들은 대체로 해석적 서술로 구성하고 말미에 약간의 비판적 서술을 첨가하는 방식으로 결합된 유형이다. 비판적 진술이 부분적으로나마 섞여 있기 때문에 비판적 관점이 아주 배제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경우도 기본적으로 객관과 가치평가를 이분화하는 방식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이 유형은 현실적으로 그러한 사유의 결과이기보다는 상투화된 발뺌하기의 전형적인 산물일 것이다. 특히 커다란 문제를 구렁이 담 넘듯 간단하게 처리하는 방식까지 마주하면 그런 면모는 더욱 분명해진다.
4
비평이 갈수록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제 하나의 상식에 속할 것이다. 외적인 조건 탓도 있겠지만, 최근의 비평에 대한 지금까지의 순례를 통해 보더라도 비평 자체의 문제가 적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외면상으로는 자족적인 분업체체 속에서 일종의 호황기와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으니 모순은 더욱 중층화된다. 실제로 내부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제대로 된 비평들이 힘을 모아가기보다는 속류화된 비평들이 자꾸 양산되면서 ‘타성의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근의 비평은 이분법적 틀에 갇혀 관계성과 유기적 전체성을 상실함으로써 한쪽만의 불구성으로 급격하게 수축되는 양상이다. ‘비판적 글쓰기’ 진영이 ‘부분성의 전면적 가치화’에 지나치게 붙들려 있다고 지적한 것도, 또 ‘문학주의’ 경향이 대체로 ‘이분법 도식’에 답답하게 갇혀 있다고 지적한 것도, 최근의 젊은 비평가들에게서 ‘이론비평과 실제비평의 괴리’가 심각하다고 지적한 것도 다 그런 맥락에서이다.
그래서일까, 최근의 비평양상을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어떤 이론적 명칭을 붙이든, 민족문학이나 리얼리즘이란 이름을 붙이든 안 붙이든 상관없이, 일차적으로 ‘진정한’ 비평과 ‘엉터리’ 비평을 구별하는 일부터가 새삼 중요한 사업임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정확하게 구별하고 판단하는 일이야말로 비평의 진정한 기능이자 기본적인 속성이고, 혼란스러울 때일수록 기본적인 속성에 충실하는 것이 최고의 실천일 터이다. 또한 ‘문학주의’를 분석하면서 제기했던 이분법의 고정화 자체가 문제라면 민족문학과 리얼리즘 비평이 이론비평·지도비평·입법비평 등으로 곧바로 등치되는 일률화 대상이 아님을, 오히려 그것의 진정한 의도는 이분법으로 나눠진 것을 통합·융합하는 데 목표가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인즉슨 그동안의 민족문학과 리얼리즘 비평 가운데 그렇지 못했던 것도 많았음을 환기시키는 말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나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이 글에서 이루어지는 비판은 그래서 나 자신을 향한 반성적 비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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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상일 『타락한 중심을 향한 반역』, 새움 2002, 14면.↩
- 오생근 『그리움으로 짓는 문학의 집』, 문학과지성사 2000, 391면 참조.↩
- 김춘식 『불온한 정신』, 문학과지성사 2002, 18~19면.↩
- 가령 “그들(문학권력 비판자들–인용자)이 문제삼는 것은 90년대 한국문학비평의 논리도,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담론의 질서도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90년대 문학비평이 어떤 논리로, 또는 어떤 문학사적 맥락에서 박완서 황석영 이문열 박상륭 신경숙 은희경 전경린 윤대녕 장정일 김영하 이응준 백민석 배수아 조경란 하성란 한창훈 등을 주목했는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류보선 『경이로운 차이들』, 문학동네 2002, 42면)라는 비판도 그들의 맹점을 지적한 한 예가 될 것이다.↩
- 같은 책 40면.↩
- 사실 이들 내부에 ‘차이’가 있음은 대다수가 수긍하는데, 오히려 그것을 긍정적인 요소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고명철(高明徹)은 이를 두고 ‘차이의 동력학’이라고 지칭한다. “그들(강준만, 김정란, 고명철 등–인용자)은 류보선이 비판하고 있는 대로 근대적 자기동일자의 논리에 강박되어 있지 않은바, 문학 현실의 세부적 면에 대해 갖는 태도 역시 동일하지 않다. 나는 이 글의 서두에서 문학권력 비판의 쟁점‘들’에 대한 환기를 강조하였는데, 그것은 다름아니라 다양한 쟁점들에 대한 논의(상호비판적 지지)를 통해 담론의 수평적 연대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고명철 『비평의 잉걸불』, 새미 2002, 64면) 사실 이런 차이가 애초부터 있었는지, 활동과정에서 생겨났는지도 분석해볼 지점이다.↩
- 진중권은 80년대의 정치적·경제적 변화의 결과로 대두한 모더니즘과 사실주의의 정체성의 위기에서 문학의 위기가 비롯되었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사실주의의 문학 역시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으로 비롯된 정치적 보수화, 사실주의를 미학적으로 지탱해주던 근대철학의 퇴조,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으로 인한 독자층의 감소 등으로 살롱 능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진중권, 앞의 글 323면)라는 비판은 너무 상투적이라 설득력이 부족하다. 아울러 대안으로 내세운 푸꼬의 미학적 윤리학, 즉 존재미학, 댄디즘 역시 설득력이 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 권성우, 앞의 책 94면.↩
- T. 이글턴·F. 제임슨 『비평의 기능』, 유희석 옮김, 제3문학사 1991, 100면.↩
- 우찬제 『고독한 공생』, 문학과지성사 2003, 68면.↩
- 박혜경 『문학의 신비와 우울』, 문학동네 2002, 56면.↩
- 이광호, 앞의 책 29~30면.↩
- 같은 책 34면. 앞서 살펴보았던 「보이지 않는 ‘비평의 시대’」 후반부는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말하자면 가장 최신의 흐름을 지칭하는 셈이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이광호는 “문학으로 돌아가자는 논리와 쌍을 이루는 90년대 비평의 한 경향은 대중문화를 포함한 문화환경에 대한 관심의 확대”(같은 책 75면)라고 정리한다.↩
- 이광호, 앞의 책 72~73면.↩
- 윤지관 『놋쇠하늘 아래서』, 창작과비평사 2002, 144면. 윤지관은 「날아라 비평」 「속물비평의 기원」 등을 통해 여기서 언급한 이론주의를 ‘과학주의비평’ 혹은 ‘텍스트주의’로 지칭하여 그것이 70년대부터, 또 정과리 등에게서 잘 나타나는 우리 비평계의 매우 오래된 폐습임을 분석, 주장한 바 있다.↩
- 김춘식 『불온한 정신』, 문학과지성사 2002, 7면.↩
- 김영희 『비평의 객관성과 실천적 지평』, 창작과비평사 1993, 94면.↩
- 노버트 메클렌부르크 『변증법적 문예학과 문학비평』, 허창운 옮김, 동서문학사 1991, 73면.↩
- 페터 우베 호헨달 외 『독일문학비평사』, 반성완 편역, 민음사 1995, 42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