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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문숙 李文淑
1958년 경기도 금촌 출생,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silmoon@dreamwiz.com
우리 사무실 구석에는 옷걸이들이 모여산다
슬쩍 살림을 차린 거미줄 아래
오래 전 연통이 지나갔을 둥근 구멍
아직도 남아 있는 검댕 아래
대부분은 세탁소에서 옷가지에 끼여온 구부러진 철사에
비닐을 씌운 것들이다
밤새 사람들의 훈기가 닿지 않은 이곳 복도는 길고 어둡고 냉랭하다
복도를 걸어오는 동안 차가워진 허름한 옷들을 이것들은 받아준다
어느날 이곳으로 오래된 나무 옷걸이가 이사를 왔다
새의 견갑골을 닮은 나무의 목 부분에 ‘미성라사’라는 낙인이 찍힌
누군가 처음 걸어뒀을 빳빳한 정장,
재봉사가 재단을 하고 가봉을 하고 결국 이 옷걸이에 걸려왔을
어쩌면 내가 벗은 허물,
불도장이 찍힌 정육의 덩어리,
비단뱀구렁이의 그것일지도 모를
물음표 모양의 고리는 조용히 물었을 것이다
어떻게 살아가고 있냐고
‘羅紗’라는 먼 비단옷의 기억 때문일까
한참을 잊고 있다가도
쩍쩍 달라붙으며 이 복도의 냉기를 다 핥았을
갓 빨아놓은 대걸레 자루에서
뚝뚝 물 떨어지는 기척에 돌아보면
허름한 옷들은 철사 옷걸이에 걸려
텅 빈 채 걸려 있기 일쑤인 그 옷걸이를 바라본다
조금씩 녹슬어가는 물음표에
명주좀벌레 사각사각 내 허물 먹어치우는 소리
여름밤
한낮이 뜨거웠던 저녁이다
공터 벤치에서 한 식구가 나와
도시락을 먹는다
아이 둘, 여자 하나
평상시의 조촐한 상차림이다
김치와 노각무침
징징거리며 달라붙는 아이에게
어서 먹어 다그치는
열기가 가시지 않은
등나무 아래의 식사,
공터를 돌며 그들을 곁눈질하다
달을 보니
거기서도 달그락거리는 수저 소리가 들린다
매일 식탁에서의 둥근 원이
저 달에서도 깨져 있다
한쪽이 허물어진 달처럼
家長이 빠져 있는 식사, 저 찬으로 놓인
노각은 저 달 속에서도 아삭거리며
썩은 치아에 씹히고
구름의 그늘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나온다
공터를 돌 때마다
달은 벌겋게 비벼진 밥알을 한입 가득
물고 있다 뱉어낸다
등나무 옆에 세워놓은 자전거
도시락 덜그럭대며 여자는 두 아이와
뜨거운 달의 저편으로
녹슨 체인을 감으며 굴러간다
실내화와 근육위축증
일요일 아침 베란다에서
실내화를 빤다
세월이 지나도 깔창이 생긴 것 빼고는
모양도 색깔도 똑같다
한주일 동안 얼마나 힘겨이 살았는지
어미들은 실내화를 빨며 안쓰럽다는데
나는 북북북 문질러 닦는다
어머니가 어렵사리 장만한 밭을
잰걸음으로 돌아 흙발을 탁탁 털고
현관으로 마악, 들어섰다
밭일 할 때 신었던 우리들 작아진 실내화를
소한이 와도 얼지 않는 웅덩이에 빨아 널고
바닥에 오소소 붙어 있는 흙가루
잘못 본 것이다
빨아놓은 실내화는
더이상 흰빛이 아니다
딴딴했던 장딴지는 걷는 걸 거부하고 흐물거린다
기어다니며 배냇웃음을 짓는다
달디단 공기를 씹어 삼키던 폐는 찌그러져 되레 밀어낸다
쥐오줌만큼 마시고 괭이똥만큼 배설한다
언제나 물 따뜻했던 웅덩이는 아구리를 닫은 지 오래,
핏덩이를 지려낳아 품안에 안고 키우던
(배수구에서 역류하는 빨랫물)
서서히 세상에서 정을 떼가려는 것이다
어느새 우리집 신발장에도 작아진 실내화가
너덧 켤레나 쌓였다
여기저기 다니지도 못하고 틀어박혀
근육위축증을 앓는 실내화는
더이상 눈부신 흰빛이 아니다
아니다 한다
수도꼭지를 콸콸콸 틀고
한 대야 넘치게 물을 받아놓으려 해도
흙 묻은 거친 발은 이제 없다
뒤꿈치가 갓난애처럼 말랑말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