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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형상과 그 너머
시적 사유와 형상의 관계에 대하여
정남영 鄭男泳
문학평론가, 경원대 영문학과 교수. 평론으로 「살아있는 언어, 살아있는 삶」 「시와 언어, 그리고 리얼리즘」 등이 있음. nychung58@hotmail.com
1
예술작품과 형상(이미지)이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예술작품에 구현되는 사유를 ‘형상적 사유’라 부르기도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에 주목한 것이리라. 그런데 ‘형상적 사유’의 핵심이 형상 혹은 이미지의 존재 자체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일 그렇다면 그림은 문학보다 우월한 예술이 되어야 하고 사진은 그러한 그림보다 우월한 예술이 되어야 하는데, 예술 부문간에 이런 기준으로 서열을 매기는 것처럼 우스운 일은 없을 것이다.
‘형상적 사유’가 적실한 말이 되려면 ‘형상과 관계가 있다’라는 단순한 진술이 아니라 ‘형상과 특수한 관계를 맺는다’는 더 구체화된 진술이어야 할 것이다. 실상 현실에 대한 모든 앎의 출발점은 이미지가 아닌가. 우리는 이미지의 조각들을 받아들이는 데서 지적(知的) 여정을 시작하지 않는가. 물론 우리는 출발점에서 머물지 않고 그로부터 현실에 대한 적실한 앎을 만들어내는 데로 나아간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적실한 앎을 만드는가? 그 방식은 무한히 다양하다. 이 다양함을 몇개의 유형으로 나눌 때 그중에 예술작품에 공통적이라고 판단되는 것에 대해서 ‘형상적 사유’라는 말을 붙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그리고 시는 이미지의 조각들로 더 큰 형상을 짓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1 분석적 능력이나 추론적 능력보다는 ‘상상력’을 예술적 사유의 바탕으로 보는 견해가 많은데, 영어의 ‘imagination’이나 한자의 ‘想像’이나 공히 상을 짓는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상상력을 다르게 보는 견해도 있다. 예컨대 벤야민은 “실상 상상력은 형상들과는 혹은 형상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상상력이란 “이미 형상이 지어져 있는 것을 탈형상화(de-formation, Entstaltung)하는 것” “형상을 가지고 용해(溶解)의 놀이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2 다시 말해서 상상력의 본령은 상의 형성(고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변화하는 이행”(constantly changing transitions)에 있다는 것이다.3
벤야민의 견해는, 그것이 상상력에 관해서 얼마나 만족스런 설명인가와는 별도로, 시에서 형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관하여 생각해보는 데 좋은 참조 혹은 단서가 될 수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이 ‘늘 변화하는 이행’의 구체적 존재를 세 편의 시에서 추적해볼 것이다. 나는 시 전체에 대한 어떤 거대한 이론적 결론을 내리는 데 치중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 세 편을 분석해 이런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다만 중간중간에 혹은 글의 말미에 그렇게 보이는 대목이 존재할 수는 있다. 이것은 결론이라기보다 작업가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2
가로수들이 촉촉이 비에 젖는다
지우산을 쓰고 옛날처럼 길을 건너는 한 노인이 있었다
적막하다
–「사이」 전문
처음 이시영의 이 시를 읽으면 이미지의 간결한 포착에 그 묘미가 있는 시인 듯하다. 그런데 이 시를 두번, 세번 읽으면 2행의 “옛날처럼”과 3행 “적막하다”가 처음과는 다르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두 구절로 인해서 이 시가 ‘비에 젖은 가로수길을 한 노인이 건너는 풍경의 간결한 묘사’라고 말하기 어려움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이러한 묘사가 아니고 무엇일까? 이 두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자.
“옛날처럼”이라는 구절은 결코 단순한 비유로 다가오지 않는다. “옛날처럼”이 놓여 있는 묘한 위치도 이것을 뒷받침해준다. (아마 사실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지우산은 옛날에 많이 쓰던, 당시로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 우산이라는 말이리라. 그러나 시 구절은 ‘옛날에 쓰던 지우산을 쓰고’가 아니다.) “옛날처럼”은 문법의 차원에서 보자면 “건너는”을 수식하는 부사구이다. 옛날처럼 건너는 방식이 있고 요즘처럼 건너는 방식이 있던가? 그게 아니다. 그런 수식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가만히 시를 다시 읽어보자. 그렇다. “옛날처럼”은 ‘옛날’을 시로 불러온다. 물론 어떤 형상을 가졌는지 알 수 없는 그러한 ‘옛날’이다. 형체없는 그림자처럼 다가오는 그러한 ‘옛날’이다. 불려와진 ‘옛날’은, 마치 비가 거리 전체를 적시듯이, 시 전체로 번지기 시작한다. 요컨대 “옛날처럼”이라는 구절은 “건너는”을 꾸미는 문법적인 기능을 뛰어넘어서 시의 현재 속에 과거라는 무형의 시간성을 끌어들이는 일을 하는 것이다. 2행의 동사 “있었다”가 과거시제로 되어 있는 것도 이러한 효과를 묘하게 돕는다.
이것을 일단 ‘현재라는 시간에 과거라는 시간을 중첩시킨다’라고 말하기로 하자. 그런데 우리에게 아주 낯익은 시간개념에서는 이렇게 두 시간의 중첩은 회상의 형태로 말고는 불가능하다. 나중에 오는 ‘현재들’이 선행하는 ‘현재들’을 끊임없이 과거로 밀어내어 사라지게 하는 일련의 과정–시간의 점들의 사라짐이 무한히 지속되는 과정–이 바로 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의 어디에나 존재하는 시계가 가리키는 바의 시간이 바로 이러하다.4 그런데 “옛날처럼”이 과거를 불러오는 방식은 사라진 과거의 이미지가 회상되는 식이 아니다. 그저 어떤 간단한 풍경에 형상이 없는 형태로, 그 풍경의 4차원적 그림자인 듯이 들어온다. 풍경의 표면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고서 말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중첩된다’는 말은 부적절하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주목하는 두번째 구절을 살펴보고 나서 생각을 더 가다듬어보기로 하자.
“적막하다”라는 구절은 이미 구현된 적막한 상황에 대한 부가적인 규정인가? 딱히 그렇지는 않다. 1, 2행을 잘 들어보라. 비 내리는 소리가 솨– 들린다. 길 위에, 나뭇잎들 위에, 지우산 위에 비가 내리는 소리. 크지는 않지만 넓은 소리. “적막하다”는 단순히 소리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갑자기 비가 그쳤다는 말도 물론 아니다. “적막하다”는 이 소리들의 뒤에 있는 소리없는 어떤 것을 불러온다. 이는 “옛날처럼”이 이미 발한 효과와 결합되어 표면적인 풍경의 시간에 형체없는 깊이를 부여한다.
이는 분명 시계의 시간과는 다른 차원의 시간이다. 실상 모든 시는 그것이 작품이 되는 순간 이미 시계의 시간에서 탈출해 있는 것이다. 과거로 밀려서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이」는 단순한 탈출에서 그치지 않고, 그보다 더 나아간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듯하고, 풍경이 정지된 듯한 ‘사이’로 ‘다른 차원의 시간’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이 다른 차원의 시간은 이미지들을 단순하게 재현하는 것만으로는 불러오기 힘들다. 이미지는 정지된 시간(시계의 시간)의 단면인 셈인데, 시에 재현된 이미지들은 사라짐의 운명에서는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시간의 깊이–이는 실상 영원(永遠)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를 구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미지들을 시간의 축을 따라 연속적으로 아무리 많이 늘어놓아도 그렇다. 이는 공간적인 이동을 구현할 수는 있지만 다른 차원의 시간으로의 이동을 구현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사이」에서는 “옛날처럼”과 “적막하다”라는 두 구절이 이 일을 하는 것이다.
「사이」는 3행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이기에 다채로운 이미지들의 변화를 구현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바로 이 별반 변화가 없는 3행만으로 다른 차원의 시간을 구현하는 데 성공한다. 이미지에 크게 의존하는 듯하면서 그 이미지를 넘어서고 동시에 시계의 시간을 벗어나서 새로운 차원의 시간을 구현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사이」의 핵심적 힘이 발현되는 방식이 아닌가? 뒤에 「목계장터」를 논하면서 말하겠지만 반드시 「사이」와 같은 방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이」는 몇개 안되는 이미지들로 그러한 성취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거의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움직이는’ 성취를.
3
거리는 장날이다
장날거리에 녕감들이 지나간다
녕감들은
말상을 하였다 범상을 하였다 쪽재피상을 하였다
개발코를 하였다 안장코를 하였다 질병코를 하였다
그 코에 모두 모두 학실을 썼다
돌체돋보기다 대모체돋보기다 로이도돋보기다
녕감들은 유리창 같은 눈을 번득거리며
투박한 北關말을 떠들어대며
쇠리쇠리한 저녁해 속에
사나운 즘생같이들 사라졌다5
–「석양」 전문
백석의 이 시도 사실적 묘사의 틀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사이」와 같다. 영화로 치자면, 「사이」는–정확하게는 「사이」의 풍경묘사 부분은–아주 짧은 장면에 해당하고 「석양」은 좀더 긴 것–여러 장면들의 연속–에 해당한다.6 세련되게 간결한 구조의 「사이」와는 달리, 그리고 율동이 두드러진 (뒤에 살펴볼) 「목계장터」와 달리, 「석양」은 서투른 느낌이 든다고 할 정도의 단순한 반복을 위주로 하는 문장들로 되어 있다(특히 앞의 7행이 그렇다). 그런데 반복의 단조로움은 전면에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강렬한 느낌을 주는 이미지들이 시 전체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를 기본적인 패턴으로 하는 문장의 단순함을 통해 전달되는 이미지들은, 마치 세밀한 선으로 여러번 손질한 그림보다 굵은 선으로 한번 그은 선에서 강렬한 기운이 느껴지듯이 그렇게 더 강렬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미지들이 주는 강렬함은 그 제시방식에서만 오는 것은 아닌 듯하다.이 시의 이미지들이 거의 모두 동물의 이미지라는 점–“질병코”만 예외다–과 무관하지 않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시의 모든 힘들의 벡터가 마지막 행의 “사나운 즘생같이들”로 향하는 듯한 이유도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이 왜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아니, 이미지의 강렬함이란 도대체 무언인가?
사실적 묘사의 관점에서 보면, 이 시의 형상들은 모두 노인들의 생김새를 더 정확하게 혹은 세밀하게 묘사하기 위한 비유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시에는 영감들이 가진, 동물의 그것과는 다른 것으로 규정되는 인간의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동물들의 형상이 인간적인 형상을 완전히 대체해버렸다. (돋보기를 쓴 것은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도 마치 동물이 돋보기를 쓴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더 정확한 묘사나 더 세밀한 묘사라는 말을 붙이기 어렵다. 이런 말이 적절하게 해당되려면 인간적인 모습에 동물의 모습이 이차적으로 추가되는 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시에서 영감들과 동물들의 관계는 단순한 생김새의 닮음이 아니라 존재의 문제로 다가온다. 다시 말해서 영감들은 그 존재의 어느 측면이 실제로 말이요 범이요 족제비인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여기서 ‘존재의 어느 측면’이란 영감들이 가진 생명력의 주요한 부분, 아니면 적어도 주요한 부분들 중 하나인 듯하다. “범상” “말상” “족재피상” 등은 형태상의 유사함이라는 외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비유가 아니라 영감들이 가진 어떤 힘과 활력이 발현된 것이라는 말이다.7
우리는 이 시에서 보이는 영감들과 동물들의 (그 형상의) 관계를 ‘동물 되기’의 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동물 되기’는 인간과 동물의 굳어진 경계를 무너뜨리는, 즉 인간이 경계가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경계를 넘어서는 생성의 힘을 지닌 존재임을 보여주는 일을 한다. 따라서 이 시가 구현하는 것은 ‘인간’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다. 동물인지 인간인지가 구분이 되지 않는 어떤 차원, 동물이기도 하고 인간이기도 한 어떤 차원이다. 마지막 행의 “쇠리쇠리한”은 단순히 “저녁해”를 수식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차원을 나타내는 형용어로서도 기가 막히지 않은가? 이렇듯 이 시는 강렬한 동물의 이미지들을 제시하지만, 그 이미지들의 형상성에 머물지 않고 시골 영감들의 ‘동물 되기’를 보여주는 데,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넘어서는 생성의 움직임–물론 「사이」에서처럼 여기서도 공간의 이동을 의미하는 움직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움직임이다–을 보여주는 데 그 핵심이 있다.
4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목계장터」 전문
신경림의 이 시에는 길이에 비해 비교적 많은 사물들이 등장한다. “방물장수”와 “떠돌이”를 제외한다면 등장하는 사물들에 대하여 별다른 수식이나 설명을 하지 않고 그냥 툭툭 제시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하늘”이나 “땅” “바람”은 그 형상을 말할 수 없는 것들이고, “구름”은 어떤 형상도 될 수 있는 것이며, “들꽃” “잔돌” “산” “강”은 막연하거나 단순한 형상을 가질 뿐이다. “방물장수” “떠돌이”도 비교적 긴 설명에도 불구하고 막연한 형상을 가지기는 마찬가지이다. 앞에 붙은 수식 부분이 형상을 구체화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시는 사실적 묘사의 성격이 미약하다. 사실적 묘사라고 부를 만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부분들이 결합되어 이루는 시 전체는 장터의 풍경을 시간(시계의 시간)을 고정시켜 묘사한 것, 혹은 시간의 축을 따라 묘사한 것으로부터 거리가 멀다. (앞에서 다룬 「사이」나 「석양」에는 이러한 시간의 고정과 시간의 축이 존재한다. 다만 이것에 갇히지 않을 뿐이다.)
그 대신 율동이 두드러진다. 율동은 변주된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반복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4음보로서, 이는 여러 시들에 의해 채택될 수 있는, 이미 존재하는 반복의 패턴이다. 행마다 반복되는 격이기 때문에 이 시에서는 가장 잦은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이 시의 특유한 반복으로서, 이것도 여러 수준으로 나뉜다. 작은 규모에서는 ‘갑(甲)이 ‘나’에게 을(乙)이 되라 하다’는 패턴이 갑과 을의 위치에 있는 것들이 교체되는 가운데 반복된다. 이 패턴은 1~7행에서 1·1·2·3행의 간격으로 반복되며, 8~14행은 다시 이것을 조금 바꾸어서 1·1·1'·1'·3행의 율동으로 반복한다. (‘되라 하고/하네’가 올 자리에 ‘얼굴 묻고’와 ‘붙으라네’가 왔기에 1'로 표현하였다.) 마지막 두 행은 패턴상으로는 1, 2행 및 8, 9행이 보여준 1·1행 율동의 반복이지만 내용상으로는–즉 예의 갑과 을의 위치에 있는 것들로 보자면–1, 2행과 8, 9행을 교차시킨 반복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대칭을 살짝 일그러뜨리고는 있지만 규칙성이 있는 반복이다.
이러한 반복의 율동이 「사이」 및 「석양」과는 달리 이 시의 독특한 힘을 구성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율동이 일반적으로 시가 가진 힘의 핵심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만일 그렇다면 「사이」나 「석양」은, 그리고 그와 유사한 많은 시들은 낮게 평가될 수밖에 없을 터인데, 이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만큼은 율동과 가락이 힘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는 있는가? 적어도 아직은 아니다. 앞에서는 율동을 내용과의 관련에서 떼어내어 형식적으로만 고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이 시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는 이 시의 첫 행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에서부터 우리가 사실들로 이루어지는 현실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놓이게 됨을 느낀다. “나”와 “하늘”과 “구름”이 ‘나는 하늘의 구름을 바라본다’와 같이 일반적으로 맺을 수 있는 관계를 맺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첫 행부터 불쑥 우리 앞에 놓여진, 이 사실적으로 있을 법하지 않은 관계는 2행부터 더욱 확장되기 시작한다. 2행에서는 “땅”과 “바람”이 등장하고, 3 ,4행에서는 이 “바람”이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으로 구체화된다. 여기까지는 ‘나’가 자연사물들하고만 관계맺는데, 5~7행에서는 어떤 “방물장수”의 삶이 끌어들여진다.8 다시 8, 9행에서 “산” “들꽃” “강” “잔돌”이 끌어들여지고, 10, 11행은 “들꽃”과 “잔돌”을 좀더 구체화한다. 12~14행에서는 5~7행처럼 어떤 “떠돌이”의 삶이 끌어들여진다.
이 시에 이렇게 모인 사물들이 맺는 관계의 핵심은 물론 ‘되기’이다. 이 ‘되기’는 어떤 정치가가 대통령이 ‘되는’ 것과 같은 식으로, 사실적으로 가능한 차원에서 화자가 구름·바람·잔돌 등등이 된다는 말은 분명 아니다.9 여기서의 ‘되기’는, 정치가의 비유를 계속하자면, 정치가가 자기자신으로부터도 벗어나고 대통령으로부터도 벗어나는 그러한 ‘되기’이다. 정치가를 대통령으로 고정시키는 그런 ‘되기’가 아니라, 그 반대방향으로, 고정된 것을 용해하는 방향으로 일어나는 ‘되기’이다. 앞에서 나온 ‘갑’과 ‘을’의 관계가 맨 마지막 두 행에서 교차되는 것도 시가 ‘고정’과는 다른 원리를 지향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용해의 결과로 창출되는 것은 모든 사물이 서로 통해 있는 열려진 공간이다. 이 열려진 공간에 모인 것들 중에 ‘되기’를 권유하는 큰 사물들(하늘·땅·산·강)과 ‘되기’의 직접적 지향점이 되는 작은 사물들 사이의 구분은 있다. 그러나 큰 것과 작은 것의 이러한 구분이 어떤 서열 혹은 위계를 이루는 것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 시에서는 작은 것이 단지 크기의 작음을 의미하지 않고 ‘되기’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어떤 개체의 굳은 경계가 형성되려면 무언가 두터운 각질층이 형성되어야 한다. 이렇게 형성된 경계를 통해 닫힌 개체는 자신의 경계 안에 무언가를 쌓는 것 이외에 즐거움을 모른다. 외부와의 (정신적·물질적) 소통과 교류를 배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유의 관점에서 부자가 되는 것말고는 즐거움을 모른다. 부자들은 경계가 분명하기를 원하며, 따라서 높은 담벼락을 원한다. 이와 반대로 경계를 넘어서는 생성을 위해서는 ‘가난’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가난’, 사회적으로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바의 ‘가난’–하고 싶은 것을 돈이 없어서 못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한다. 이 시에서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나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시에서 함축되고는 있지만 직접 드러나지는 않은, 시골 장터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 가난을 모르지 않는다. “가을볕도 서러운”이라는 구절은 가난이 주는 서러운 고통을 탁월하게 전달하지 않는가.10
그러나 출발점으로 한다는 말은 거기에 머물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가난은 단순한 가난이 아니다. “방물장수”와 “떠돌이”는 한군데 머물지 않는다. 아니, 머물 수가 없다. 가난해서 그렇고 “천치”–이는 지력(智力)의 가난이다–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그들은 벌써 바람이고 구름이다. 이렇듯 우리가 이 시에서 이들의 가난(의 서러움과 고통)과 함께 느끼는 것은 어떤 홀가분함이다. 자신이 쌓은 것을 지켜야 할 필요가 없고, 현재의 자신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홀가분함. “잔바람” “잔돌” “들꽃” 등은 모두 이 홀가분함에 호응한다. 잔바람은 곧 바람이기를 그칠 것 같은–그래서 다른 것이 ‘될’ 것 같은–바람이고 잔돌은 마찬가지로 곧 돌이기를 그칠 것 같은 돌이다. 들꽃은 꽃이면서도 꽃이 아니고 잡초도 풀이면서 풀이 아니다.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가난하게 되는 것–주변적인 존재가 되는 것, 소수자가 되는 것, 무명이 되는 것 등등–은 ‘되기’의 조건이다. 그리고 큰 것은 ‘되기’에 의하여 창출된 열린 공간–모든 작은 사물들이 서로 만나서 창출하는 ‘공통적인’ 공간–의 형상이다. 하늘과 땅은 형상 아닌 형상이고, 산과 강은 단순하면서도 무한한 것을 품은 형상이다.
그러나 이 열린 공간을 신비화해서는 안된다. 경계가 무너진다는 것은 닫힌 개체성이 무너진다는 것이지 모든 것이 하나의 동질적 물질로 환원된다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닫혀진 개체성이 무너진다고 해서 그 개체를 구성하는 특이성(singularity)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 오히려 이 특이성들은 개체성의 감옥에서 해방되어 개체의 외부에 있는 특이성들과 서로 만나 ‘공통적인’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다. 특이성과 ‘공통적인 것’의 관계는 ‘재현’이 아니라 ‘표현’의 관계이다. 예컨대 어떤 신문기사에 난 ‘목계장터’라면 그냥 특정 장터를 지시하거나 지칭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제목으로 사용된 ‘목계장터’는 그렇지 않다. 이 제목만으로 시골 장터의 어떤 기운이 끌어들여진다. 시끄러움과 활기와 서러움과 가난이. 물론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와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의 6행이 시골 장터의 풍경을 단편적으로–그러나 농축적으로–보여주기는 하지만 이것이 현존했던 어떤 것을 다시 시에서 재현하는 데 그친다고 볼 수는 없다. 정말로 화자와 “방물장수”와 “떠돌이”가 무언가에 의해 연결되어 서로 통해있는 느낌–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어떤 무형의 기운–이 오는 것이며, 독자로서도 이들이 남(타자)은 남인데 남 같게 느껴지지가 않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 시를 논하기 시작하면서 다룬 반복적 율동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예의 열려진 공간은 그 용해성과 유동성 그리고 개방성으로 인하여 풀어져 사라질 위험에 처하게 된다. 벤야민이 말한 ‘파괴’의 위험이다. 반복적 율동은 이러한 위험을 방지하고 시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모여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사이」나 「석양」은 이미 특정의 방식으로 모인 것, 즉 사실적으로 묘사된 장면을 가지고 시작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러한 사실적 형상을 짓지 않는 「목계장터」는 반복적 율동으로써 모임의 터, 열려진 공간의 터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모여서 이룬 결과가 어떤 고정된 상은 아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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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편의 시를 분석하는 가운데 ‘늘 변화하는 이행’이라는 말의 타당성을 어느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형상의 제시 혹은 구축이 이 시들의 핵심이 아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는 형상을 넘어가는 일은 다른 문제들–시계의 시간과는 다른 차원의 시간의 문제, (동물)되기의 문제–과 연결됨을 보았고, 여기에는 언어의 문제도 결부됨을 보았다. 단어들·문장들·단락들·작품들을 형상으로만 보게 되면, 그리고 만일 이 형상과 작품외부의 현실과의 관계를 찾고자 한다면, 이 관계는 형상이 닮은 것끼리 대응되는 데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을 가진 시인은 현실(의 어떤 부분)과 닮은 형상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그 결과로 언어를 자신의 재현의도에 종속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런데 언어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단어들·어구들·문장들)은 작가의 재현의도가 가해지기 전에 이미 여러 힘들(의미들·형상들)로 충전되어 있다. 사람이 어떤 유용한 물건을 만들 때는 물건을 구성하는 요소에 있는 힘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차원으로 이행시키는 것이지 없는 힘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물건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힘을 무시하고 자신이 지어낸 형상(디자인)에 그 요소들을 억지로 종속시킨다면 그 물건의 유용성이 심히 떨어지거나 아니면 만드는 데 실패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언어에 이미 충전된 힘들을 살리는 방식으로 결합하여11 새로운 차원으로 이행시킬 때 벤야민이 말한 ‘파괴하지 않는 탈형상화’가 일어나며, 늘 바뀌는 혁신(늘 변화하는 이행)의 순간이 영원성(파괴되지 않는 것)과 결합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반대로 자신이 지어낸 형상(구조)에 언어를 구성하는 힘들을 억지로 종속시키려고 할 때는 ‘파괴’가 일어난다. 벤야민이 파괴의 전형으로 드는 것은 ‘공상’이다. 재현의도란 공상과 같은 파괴는 아니지만, 현실과의 관계의 풍부함(다채로운 색깔의 세계)을 고정된 대응관계(흑백만 존재하는 세계)로 환원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제거하고 배제한다는 점에서는 파괴와 통한다.
언어는 포함하고 머금으면서도 가두지 않고 열어 펼치는 힘, 열린 곳에서 만나게 하는 힘, 만나서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힘을 애초에 가지고 있다. 실제의 언어사용은 많은 경우 이 힘을 죽이거나 거세하거나 억누르거나 평면화한다. 좋은 시는 이와 반대로 이 힘을 고도로 발현되게 함으로써 다른 차원으로 이행한다. 그래서 특정의 형상에 갇히지 않으며 또 바로 그런 이유로 모든 형상과 관계할 수 있다. ‘형상적 사유’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형상과 관계할 수 있다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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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와 형상을 개념상으로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다. 다만 편의상 이 글에서 나는 시의 요소들로 작용하는 작은 규모의 감각적 상들을 이미지로 부르고, 형상이라는 말은 이미지와 동의어로 사용하거나 아니면 이미지들로 이루어지는 전체 상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기로 한다.↩
- 이상 Walter Benjamin, “Imagination” in Selected Writings vol. 1: 1913~1926, ed. Marcus Bullock and Michael W. Jennings(Cambridge: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P 1996), 280면. 여기서 용해(dissolution)가 파괴는 아니다. 상상력의 “최고의 법칙은 탈형상화하면서도 결코 파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같은 곳) 벤야민이 인용되는 경우 번역은 모두 필자가 한 것이다.↩
- 같은 책 282면.↩
- 이것을 벤야민은 “동질적인, 빈 시간”이라고 부른 바 있다. 벤야민의 이것에 ‘지금 시간’(the now-time, Jetztzeit)을 대립시킨다. ‘지금 시간’이란 “동질적인, 빈 시간”이 갖는 사라짐의 운명에서 벗어난 시간이다. Walter Benjamin, “Theses on the Philosophy of History,” Illuminations, Trans. Harry Zohn(New York: Schocken Books 1969), 261면 참조.↩
- * 개발코: 개발처럼 뭉툭하게 생긴 코.
* 안장코: 안장같이 등이 잘록하게 생긴 코.
* 질병코: 질흙으로 만든 병처럼 거칠고 투박하게 생긴 코.
* 학실: 돋보기.(평북 사투리)
* 쇠리쇠리하다: 알쏭달쏭하거나 흐리마리하다.(평북 사투리)↩ - 영화에 빗댄 것은 적어도 「석양」에 관한 한 상당한 적절성을 갖는다. 이 시는 7행까지는 천천히 대상들에 다가가는 클로즈업 방식을 사용한다. 카메라가 멀리서 장날을 잡은 데서부터 시작하여 장날거리를 지나는 “녕감들”을 잡고 다시 그 영감들의 코와 코에 걸린 돋보기를 잡는 것이다. 나머지 4행에서는 “녕감들”이 다시 카메라에서 멀어져간다.↩
- 앞에서 「사이」를 논하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이 시에서도 각 부분들은 문법이 정해놓은 구조에 종속되지 않는다. 영감들과 동물들의 관계는 영감들이 주(主)이고 동물들이 부(副)라는 식으로, 영감들이 주어이고 동물들이 술어라는 식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 단 세 행으로 ‘방물장수’의 삶을 이렇게 농축해넣은 것만 해도 대단한 시적 성취이다. 그러나 이 시 전체의 성취는 이 ‘농축’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것이 이 글의 논지이다. ↩
- 만일 그렇다면 이 시는 현실을 뛰어넘는 환상시이다. 그런데 그렇게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경림〓환상시인’이라는 등식이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만이 아니라 신경림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시를 읽으면서 환상적이라고 느낄 사람은 없을 것이다.↩
- 이러한 탁월함은 시적 언어사용이 가진 특유한 표현능력에서 온다. 이 구절은 ‘가을볕’과 ‘서러운’에 이미 충전된 의미들을 결합하는 형태로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가을볕’이 포함하는, 여기서 어느 것이 가장 타당한지를 꼭 집어 말할 수는 없는 다수의 의미들에는 심지어 ‘서러운’이 포함하는 어떤 의미와 반대되는 것도 포함된다. 만일 ‘가을볕’이 특정 상황에서의 가을볕을 재현하는 기능에 그친다면 아마 하나의 (혹은 기껏해야 둘의) 사전적 의미만 남고 나머지는 제거될 것이다. 그러나 “가을볕도 서러운”은 재현에 종속된 언어가 아니기에 그 풍부한 의미들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이 구절을 ‘눈물이 나도록 서러운’이라는 가상의 (그러나 더 사실적인) 구절과 실험적으로 비교해보면 금세 드러난다. ‘눈물이 나도록’은 ‘서러운’에 이미 포함된 시각적 이미지를 재현의 필요상 가시화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이러한 가시화가 시적 효과를 얻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이 경우는 아니다) 따라서 새로이 표현되는 것이 거의 없다. 오히려 우리는 ‘서러움’에 갇히는 느낌을 받는데, 앞으로 보겠지만 「목계장터」는 이렇게 갇히는 것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시이다.↩
- 앞에서 설명한 “가을볕도 서러운”이 그 예이다. 이러한 언어사용은 그 자체로 정치적 함축을 갖는다. 정치란 그 부르주아적 가상을 벗기고 보면 사람들의 모여서 행동하는 원리일 뿐이다. 현재 지배적인 정치는 다중이 가진 창조와 생산의 힘을 살려서 결합하는 데 있지 않고 ‘문법’에 해당하는 것(국가를 필두로 하는 조직의 논리)을 위로부터 뒤집어씌우거나 전체를 대표한다는 몇몇의 인물들(정치지도자들)에 의하여 다수의 사람들이 통치되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