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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꼴까따 공산당과 불가촉민
이화경 李和瓊
소설가, 인도 캘커타대학 언어학과 한국어 객원교수. 소설집 『수화』가 있음. 90hunmin@hanmail.net
캘커타? 꼴까따!
캘커타(Calcutta)라는 영국 식민지 시절의 창씨개명을 던져버리고 몇년 전에 원래 이름으로 복귀한, 웨스트 벵갈의 허파인 꼴까따(Kolkata) 시내 한복판에는 레닌의 동상이 서 있다. 바로 그 앞 가장 번화가인 초우룽기 거리 곳곳에서는 구걸에 나선 어린 앵벌이와 막 시멘트 밑바닥에서 상체만 만들고 미처 하체를 빼내지 못한 채 굳어버린 듯한, 다리 없는 걸인이 행인을 붙잡는다. 세상의 바퀴 달린 모든 것들이 나와 달리는 도로에 영화 「씨티 오브 조이」에 나오는 하자리 같은 릭샤왈라(인력거를 모는 사람)들이 릭샤 끌채를 손에 쥐고 뜨거운 아스팔트를 맨발로 뛴다. 릭샤왈라 뒤엔 신형 모바일폰을 든 극상류층 사내가 차경적을 울리며 벤츠를 몰고 있다.
한편, 꼴까따에 메두사 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붉은 혓바닥을 내밀며 한손에 벌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망나니의 칼을 들고 목에는 좋이 십여개가 넘는 목 잘린 얼굴을 목걸이처럼 걸치고 발아래 죽은 사내의 급소를 당당히 밟고 서 있는 깔리(Kali) 여신을 모신 수많은 사원들이 포진해 있다. 꼴까따에서 가장 큰 깔리사원 바로 옆에는 거리의 걸인, 부랑아, 임종 직전의 병자들을 거두어 보살피는 마더 테레사 하우스가 있다. 깔리사원에서는 매일 뚱뚱한 힌두교 사제가 염소의 목을 쳐서 제단에 신선한 피를 바치고, 마더 테레사 하우스 옥상 위엔 십자가에 못 박힌 고난에 찬 젊은 예수가 나는 목마르다는 문구를 발밑에 새긴 채 고개를 떨구고 있다. 깔리사원에 즐비한 가게에는 깔리 여신과 인도의 쥬피터 격인 끄리슈나 신의 초상화와 함께 가시관을 쓴 예수와 수녀복을 입은 마더 테레사의 초상화도 함께 진열되어 있다. 꼴까따 사람들은 파괴의 여신 깔리를 숭배하고 끄리슈나를 사랑하며, 젊은 예수를 용납하고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테레사 수녀를 존경한다.
생의 몰락과 참화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거지가 뙤약볕이 쏟아지는 거리에서 죽음보다 깊은 잠을 자는 모습조차도 왠지 모를 성스러운 느낌이 드는 꼴까따. 외국인의 눈으로 볼 때 그런 꼴까따는 기이하면서도 매력적이고, 더러우면서도 가차없이 슬프고도 예사롭지 않게 아름다우며, 소란스러우면서도 너그러운 곳이다. 꼴까따 서민들의 남루한 삶을 보고 레비 스트로스는 ‘손수건 안의 인생’이라고 표현하고, 남미의 텅 빈 열대에 비해 너무나 꽉찬 열대인 꼴까따의 풍경에 대해 ‘이 풍경은 정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던가.
캘커타대학–꼴까따라는 이름 대신 예전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는–본부 앞의 600여개 서점이 운집한 거리 한구석에도 결연한 표정의 레닌 옆얼굴이 부조된 조각물이 있다. 그 앞을 100년도 넘은 전차가 느리게 지나가고, 거리의 목동이 수십마리 양떼들의 엉덩이를 후려치며 인파와 차량으로 넘실대는 거리를 헤쳐간다. 학생 유니언 조합에도 이란성 쌍둥이처럼 더펄머리 맑스와 머리가 벗겨진 레닌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시내 곳곳의 담벼락엔 공산당을 상징하는 마크와 마오 쩌뚱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그렇다, 꼴까따는 공산당이 집권한 지역이다.
1929년에 시작된 대공황으로 대량실업, 경기침체 등 극심한 경제위기를 겪던 서구 자본주의국가와 달리 1917년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한 소련은 제1차 5개년계획을 달성해가고 있었는데, 이는 독립으로 향해가던 인도의 발전계획에 영향을 끼쳤다. 독립 후 인도는 사회주의적 경제계획을 수립하고 신속한 산업화와 국민복지의 증대를 그 목표로 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것은 소득과 분배에 있어서 불평등과 경제력의 집중을 점차적으로 감소시켜 종국에는 철폐한다는, 사회주의적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생필품의 가격이 급등함에 따라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게 되며 이 투쟁에 인도 공산주의자들이 깊이 개입했다. 전후 노동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인도공산당은 인도가 독립한 뒤에 새로운 노선을 제시했는데, 이 정치노선의 기본전제는, 독립 인도정부가 미국이라는 제국주의세력과 연계해 모든 민주혁명을 압제하고 위성국가를 형성하려 하며, 자본가계급이 경제위기를 노동자에게 떠넘기려 한다는 인식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에 걸쳐 철도, 면직물과 황마 공장 등에서 수많은 파업이 일어났는데, 노동자계급운동은 사띠아그라하(Satyagraha, 비폭력 불복종 운동)를 통해 크게 진전되었다. 마침내 전인도노동조합회의가 결성되고 여기에 유명한 민족주의자와 노동조합 운동가들이 참여하는 등 급진적인 지식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는 위로부터 노동자들의 사회의식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웨스트 벵갈 주의 낙살바리(Naxalbari)에서 대지주들의 경제적 수탈과 고리대금업자들의 미곡가 조작에 대항해 소작인의 적인 지주를 몰살해야 한다는 혁명적 의지에 찬 투쟁이 일어났다. 낙살바리 운동은 이전과 달리 사회구조의 혁명적인 전환을 요구하였는데 웨스트 벵갈 지식인들이 대거 동참하면서 웨스트 벵갈 사회주의운동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중개인 계급인 부재지주 집단을 줄이고 직접 경작자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토지개혁을 공산당이 지도하고 수행하면서 웨스트 벵갈인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웨스트 벵갈 주의 수도인 꼴까따에서 노동조합이 조직되어 운영되고 있는 산업체의 노동자들은 파업, 사띠아그라하, 단식, 총파업 및 임시 휴업, 게라오(gherao, 사무실과 고용주 주거지 등을 에워싸는 것), 단전(斷電) 등의 방법을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려 했다.
그러나 대단히 조직적이고 극단적인 투쟁에도 불구하고 인도 경제는 개발계획을 수립한 1950년보다 더 낙후되었다.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처럼 인도 역시 무거운 외채 부담, 교역조건의 악화, 수출의 감소, 국제수지의 악화, 선진국으로의 자원의 거대한 역조, 사회 빈곤계층의 궁핍화, 경제의 마이너스 또는 제로 성장을 경험했다. 결국 악화된 대내외적 경제상황을 배경으로 1991년 여름 인도정부는 국제통화기금에 차관을 요청하고 그들이 제시하는 조건을 수락할 수밖에 없다고 선언했다. 1980년대 말 동유럽의 공산주의국가들이 무너진 후 단일화된 세계자본주의체제에서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영향하에 세계경제를 운용하는 국제통화기금/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IMF/GATT) 체제에 의해 인도 역시 거칠게 내몰리고 있다. 인도의 관세장벽을 허물기에 바쁜 시장경제 신봉자들, 지도자와 분열된 정당, 권력에 굶주린 야당에 의해서 인도는 바야흐로 세계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더욱 큰 문제는 빈곤 경감이라는 목표가 자유화와 세계화라는 화려한 커튼 뒤에 가려져 있다는 점이다. 사실 부유층과 중간계급 상층을 겨냥한 내구소비재와 기타 상품들의 생산과 수입을 고무하는 자유화는 서민층과 빈민층 전체를 헤어나오기 힘든 가난 속으로 밀어넣고 있다.외국인을 모두 미국인으로 오해하는 인도인 중에는 나를 향해 “미국인이여, 지옥으로 가라!”고 소리를 지르는 경우도 있다.
CPM(Communist Party of India Marxist)과 Left Front, RSP(Revolutionary Socialist Party), FB(Forward Block)로 불리는 공산당들이 꼴까따의 주요 집권당이다. 당의 명칭만 다를 뿐, 웨스트 벵갈 주의 공산당은 죠띠 바수(Jyoti Basu)라는 사람에 의해 전적으로 주도되었다. 공산주의자는 은퇴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죠띠 바수는 2003년 7월 6일 공식적인 은퇴를 선언했지만 아무도 그의 권력 이양이 꼴까따 공산당의 종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모두 그를 정권욕에 불타는 비열한 인물의 전형이며 꼴까따를 인도의 대도시들 가운데 최악의 빈곤으로 만든 장본인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으며 동시에 그와 꼴까따 공산당을 증오한다고 입을 모았다. 죠띠 바수는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마오 쩌뚱의 신념을 구현한 꼴까따 공산당의 빅브러더이며, 당원들은 모두 기회주의자들이고 다른 인물들조차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성토했다. 학생들은 또 끔찍하게 사악하고 비열하고 독선적이며 안하무인격인 이곳 공산당 체제하에서 지식인·상인·경영주 들은 살고 싶어하지 않고, 방갈로르나 첸나이 혹은 델리나 외국으로 떠나고 있다고 말했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를 낳듯이, 25년이 넘는 장기집권이 이루어지는 동안 어느 한 부문도 관료적 부패가 침투되지 않은 부문이 없다고 했다. 그런 탓에 꼴까따 경제는 거의 붕괴 직전이라고 그들은 결론지었다. 카라따니 코오진의 말처럼 경제적 기반을 더이상 갖지 않은 꼴까따의 공산당은 더없이 공소하고, 어떠한 도덕적 기반도 갖지 않은 탓에 맹목으로 전락한 것이다.
레닌 동상을 오랫동안 쳐다보는 내게 오십대의 어떤 인도 사내는 말했다.
“2003년 7월 지금 세계 어디에도 없는 레닌의 동상이 꼴까따에 서 있는 것은 운명의 아이러니다.”
불가촉민은 없다?
인도는 일반적으로 카스트와 계급 및 성별, 인종, 종교 등 여러 면에서 다양성을 지닌 복잡한 사회다. 인도는 밖에서보다 안에서 보면 훨씬 넓고 깊다. 살면 살수록 더 복잡해지는 곳, 어떤 공통된 교집합도 함수도 찾아내기 힘든 곳이 바로 인도다. 인도는 터무니없이 낭만적이고 이국적 정서로 가득한 곳도, 정신적 스승인 사두와 고행을 일삼으며 세속을 초월한 성자만의 공간도, 먹고살기 위해서 복마전을 치르는 아귀들의 난장판만도, 유럽 히피들이 서구문명으로부터 탈출해 찾아오는 해방구만도 아니다.
나 또한 적잖은 오해와 편견, 감상과 동경으로 인도를 바라보았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불가촉민(不可觸民)이란 존재였다. 인간에게 붙여진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잔인한 이름이 언터처블(Untouchables)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꼴까따에 와서 현지인들에게 가장 많이 던진 질문 중의 하나가 바로 언터처블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질문을 받은 현지인들의 얼굴은 곤혹과 난색 그 자체였다. 처음에는 꼴까따엔 단 한명의 언터처블도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면 당신의 카스트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열 중 아홉은 최상위 계급인 브라만(brahman)이라고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단 한명만이 자신의 카스트는 브라만 아래인 끄샤뜨리야(kshatriya)라고 말했다. 언터처블은 고사하고 바이샤(vaishya), 슈드라(shudra)라고 말한 이도 만나지 못했다. 순진한 척하면서 그들에게 계급을 커밍아웃하라고 강요한 것이 미안하기 이를 데 없다.
일년이 지난 지금, 솔직한 얘기를 듣고 싶다는 내게 그들은 언터처블이란 단어가 인도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럽다고 한다. 꼴까따의 변두리에 가면 3~5% 정도의 언터처블을 만나볼 수 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비천한 현실과 존재를 외국인에게 보이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고 했다. 꼴까따의 언터처블은 주로 배설물을 처리하거나 쓰레기나 죽은 소를 치우고, 빨래를 해주거나 가죽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며, 그중에서 가장 하층의 언터처블은 화장터에서 시체를 처리하거나 사형시키는 일을 한다고 했다.
인도는 전통적으로 카스트라는 위계구조로 이루어진 힌두 사회다. 이미 출생을 통해 숙명적으로 결정되어버린 카스트는 업과 윤회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현생에서는 어느 누구도 벗어버릴 수 없는 굴레다. 이 카스트를 힌두 고유언어로 바르나(Varna)라 하는데 사회구성 범주로서 위에 언급된 네 계급을 가리킨다. 언터처블은 카스트 제도 가운데 어느 층위에도 속하지 않는 최하층 계급의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 전체를 묶어 부르는 산스끄리뜨 고유의 이름은 없다. 그래서 사회학적 용어로 그들을 하나의 계급으로 묶어 불가촉민이라 부른다. 불가촉민은 말 그대로 접촉이 가능하지 않은 천한 인간들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카스트 체계 속에서 가장 천대받고 핍박받아왔다. 이들은 극도로 오염되어 있다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깨끗한 상위 힌두 카스트와 모든 종류의 접촉이 금지되어 있다.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없기 때문에 마을 밖으로 격리되어 주로 오물청소를 담당하며 살아왔다. 불가촉민과는 우물물도 음식도 나누지 않았다. 또한 이들은 성스러운 힌두 경전이나 사원에 접근하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다. 많은 수의 도농(都農) 임금노동자들은 불가촉민 출신이다.
불가촉민은 길거리를 걸어갈 때조차 스스로의 존재를 소리쳐 알려야 한다. 불가촉민과 접촉하는 순간 오염된다고 사람들은 믿기 때문이었다. 영국이 전근대적인 카스트 제도를 없애겠다는 의지로 불가촉민을 포함해서 하위 카스트들을 한 묶음으로 ‘지정 카스트’(Scheduled Caste)라고 명명했지만, 이름이 바뀌었다고 철벽처럼 단단한 계급의식은 쉽사리 바뀌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의 다른 이름은 하리잔(Harijan), 신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간디가 카스트의 모순을 없애려고 불렀던 아름답고 숭고한 이름이지만, 인도에서 하리잔은 불가촉민을 조롱하는 다른 대명사일 뿐이다. 네루는 수많은 종족들의 다양한 문명이 서로 부딪치던 인도에서 피정복민을 멸종시키거나 노예로 삼는 대신 각 종족이 기능을 구분하고 전문화하면서 공존한 제도가 카스트라고 보고 이를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참고로 네루는 최상위 브라만 계급이었다. 현재 그들은 불가촉민이라는 명칭 대신 ‘지정 카스트’라 불린다. 역사적으로 불이익을 받아왔던 불가촉민을 위해 ‘보호를 위한 차별’ 정책을 시행, 의석할당정책과 같은 혜택을 부여하고 있지만, 게토 안의 유태인 표지처럼 언제나 따라붙는 지정 카스트 증명서는 야누스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동시에 그런 특혜 역시 또하나의 역차별이라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불가촉민을 의도적으로 접촉하려는 시도 자체가 어느 카스트에도 속하지 않은 외국인의 입장으로서는 대단히 무모하고 무례하며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사회에서 카스트의 힘을 경험하는 것은 결혼이라는 의례를 통해서이며 지극히 사적인 영역으로 개입할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불가촉민에 대한 배타적인 타자성과 호기심을 위장한 얕은 관심으로 다가가려 했던 내 안의 천민의식이야말로 그들이 쓸어버리고 싶어하는 오염된 쓰레기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