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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이중원·홍성주·임종태 엮음 『인문학으로 과학읽기』, 실천문학사 2004

인문·사회와 과학기술의 경계학문

 

 

소광섭 蘇光燮

서울대 물리학부 교수 kssoh@phya.snu.ac.kr

 

 

인문학으로

성격이 전혀 다른 인문·사회학과 이·공학의 양면에 걸쳐 있으면서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학문이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선보인 것은 1984년 서울대 대학원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이 설치되면서부터이다. 『인문학으로 과학읽기』는 지난 20년간 협동과정 사람들이 과학사·과학철학·과학정책에 대한 문제의식들을 공유하면서 진행했던 학문적 모색을 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20년이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낀다. 실낱같이 가늘고, 있는 듯 없는 듯하던 경계학문이 이만큼 넓어진 것을 보고 가슴이 뿌듯해졌다. 우리나라가 경제규모만 커진 것이 아니라 학문의 영역도 깊어지고 넓어졌으며, 학문후속세대들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알차게 성장하고 있음을 이 책은 말해주고 있다.

현대문명은 과학기술이 끌고 가고 있다. 그렇다면 문명의 주역은 과학자와 기술자들인가? 유감스럽게도 많은 과학기술자들은 자기가 관심을 두는 현상의 연구나 기계의 발명에만 몰두한 나머지 자신이 하는 일의 문명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일반 대중만큼이나 무지하거나 무관심하다. 과학지식이 인간의 인식체계나 가치체계에 어떻게 관련되며, 과학기술자들의 집단이 사회 전체와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핵무기·생명복제·유전공학 등 인류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과학기술에서 정책적·윤리적 판단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등등의 한차원 높은 데서 조명하는 작업을 과학기술자 자신들이 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일에는 과학기술의 현장에서 한발 떨어져 바라보는 여유나 자세가 요구된다.

이 책은 13명의 소장학자들이 네 분야에 걸쳐 자신들의 연구결과를 묶은 것이다. 글 하나하나가 필자들의 연구영역을 대표하는 것이어서 경계학문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제1부 ‘과학의 철학적 쟁점’은 과학의 합리성, 맑스주의와 과학, 과학에서의 실험과 이론의 관계 등 깊이있는 주제를 다룬다. 이중원의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인식」은 자신의 과학기술적 활동에 대한 깊은 반조(返照)가 없이 순진하게 연구개발만 하는 사람이 갖기 쉬운 단순한 과학관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런 사람은 흔히 ‘과학은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진리를 찾아가고 있으며, 과학은 인간과 사회로부터 독립된 가치중립적인 것이며,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결국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 환경오염, 질병, 대량살상 무기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고 소박하게 생각한다. 이 입장은 과학적 지식의 절대적 객관성과 과학기술만능을 믿는 것인데, 현대물리학의 관점에서도 문제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님은 드러난 바 있으며, 이상욱의 「과학연구의 역사성과 합리성」, 이상원의 「실험철학의 기획」에서도 과학적 지식의 절대성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소박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제2부 ‘사회와 문화 속의 과학’에서 성영곤의 「과학과 종교의 역사적 관계」는 서구 기독교와 자연과학의 발달사에서 상호간의 투쟁과 과학의 일방적 승리라고 배워온 우리들의 상식을 반조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제공한다. 이 둘의 적대적 관계는 단순히 꾸며진 이야기에 불과하며 서양의 역사에서 과학과 기독교의 상호영향은 훨씬 복잡 미묘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화이트헤드가 과학과 종교 간의 적대감은 오히려 사소한 측면이며, 양자간의 만남은 종교가 한층 심화되고 과학이 더욱 발전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고 본 점을 머튼의 명제들을 소개하며 설명하고 있다.

과학과 종교의 문제는 오늘날에도 인간의 본성 및 궁극적 가치와 관련해 여전히 진지한 과제로 남아 있다. 특히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장대익의 「철학이 생물학을 만날 때」와 홍성욱의 「1960년대 인간과 기계」는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이미 1940년대에 미국의 수학자 위너가 ‘싸이버네틱스’(cybernetics)란 개념을 창안해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허물기 시작했고,1960년대에는 인조물인 싸이버네틱과 유기물생명체(organism)를 결합한 ‘싸이보그’(cyborg)란 신조어가 유행하게 되었다. 기계와 생물의 경계를 허무는 통합은 ‘정보’라는 개념의 실체화로 가능해졌다. 즉 컴퓨터로 대표되는 인공기계 정보화와 유전자(DNA)로 대표되는 생물정보화가 개념 차원에서 동질적이어서 더이상 기계와 생물의 본질적 차이가 없게 되었다. 생명체를 세포들이 신호와 메씨지를 교환하는 통신네트워크로 볼 수 있듯이 인간사회를 그들이 만든 각종 인공물과 함께 정보를 주고받는 거대한 통신네트워크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은 바로 이러한 개념의 실상을 드러내고 있다. 싸이버네틱스와 컴퓨터과학에 기초한 씨스템 개념은 생물씨스템, 생태씨스템, 사회씨스템, 전세계씨스템(global system)과 같이 광범위한 영역에서 사용되는데, 이들을 일관되게 꿰뚫고 있는 하나의 줄은 ‘정보’라는 개념이다. 정보 또는 지능이란 면에서 보면 인간과 기계는 더이상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결국은 지능형 기계일 뿐인가? 홍성욱은 감성(느낌과 감정)이야말로 인간성의 본질을 형성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간략하게 시사하는 수준에서 그칠 뿐이다. 인간의 본성에 관한 과학적 논의는 이보다 더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일는지 모르겠다. 이런 점에서 성영곤·장대익·홍성욱의 글들은 근본적 문제를 다루지 못한 아쉬움을 준다. 인간의 본성이 지능과 감정뿐인가? 과학·종교·철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펼쳐야 할 것이다. 이른바 영성(靈性)은 이 논의의 촛점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임경순의 「양자역학의 형성과 학문적 스타일」은 20세기와 21세기 초 자연관의 핵심인 양자역학의 개념들이 어떤 인물에 의해서 형성되었는지를 흥미있고 간결하게 잘 묘사했다. 글의 내용으로 보아 제1부 ‘과학의 철학적 쟁점’에 포함시켰더라면 이상원의 글과 더불어 ‘이론적 모형의 형성’으로 짝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제3부 ‘동아시아의 과학과 근대성’은 과학기술이 주도하게 된 근대에서 완전히 뒤켠으로 밀려나게 된 동아시아의 전통문화와 과학에 대한 올바른 시각과 문화적 정체성 확립을 위한 준비의 성격을 띠고 있다. 조지프 니덤 이후 중국과학사 연구의 최대 거장인 네이선 씨빈(Nathan Sivin)은 동아시아의 전통과학을 “자연에 대한,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자신들의 합리적·추상적 이해”로 폭넓게 정의해 ‘가설, 실험, 이론 및 수학’ 등으로 정형화된 서양근대과학의 틀로부터 자유로운 관점을 보여주었다. 현대과학의 자연관과 생명관의 한계가 노출되고 새로운 유기체적 세계관이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신과학 사조와 맞물려 동아시아의 전통적 사상인 주역, 성리학, 도사상, 불교의 우주관 및 생명관 등은 풍부한 과학철학적 주제가 되었는데, 과거지향이 아닌 미래지향적 논의가 한편쯤 추가되었으면 균형있었겠다.

3부에 있는 김근배의 「20세기 식민지 조선의 과학과 기술」은 4부 송성수의 「한국과학기술 정책의 특성」 앞에 놓고 보면 일제시대부터 해방 이후 형성기, 성장기·전환기의 과학기술정책을 통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된다. 송위진의 「혁신체재론의 과학기술 정책」은 현금의 상황에서 요청되는 과학기술 정책의 모형으로 활발한 논의의 중심이 될 수 있으며, 김훈기의 「한국 생명윤리 의제형성에 대한 정책네트워크」는 우리 사회가 당면한 생명공학의 안전문제와 윤리문제의 입법화 과정을 생생하게 다루고 있다. 김훈기의 글은 과학정책적 의의뿐만 아니라 현대과학사(contemporary history of science)의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다수의 사회집단이 깊은 관심과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정책의제 형성과정을 이렇게 상세히 고찰함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유사한 과학기술정책 과정에서 다양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겠다.

과학을 바라보는 인문·사회적 관점들을 다양하게 펼쳐 보인 『인문학으로 과학읽기』는 일반인의 과학교양서로서도 훌륭할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의 연구에 전념하는 전문가들에게도 시야를 넓힐 ‘탈전문화’의 안내서로도 적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