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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강인한 姜寅翰
1944년 전북 정읍 출생.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황홀한 물살』, 시선집 『어린 신에게』 등이 있음. poemory@hanmail.net
라일락나무에서 흐르는 밤
라일락나무 연초록 가지와 가지 사이로
바람이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일 때
안돼, 안돼
연등(燃燈)인 양 꽃숭어리를 흔들며
라일락나무 말갛게 눈흘긴다.
칼바람, 꽃샘바람, 황사바람까지
멀리 배웅하고 돌아온 뒤
가만가만 우려낸 글썽한 물빛,
라일락 자잘한 꽃잎 속에서
서늘한 오월의 밤이
한소절씩 한소절씩 떠내려온다.
외등(外燈)이 차갑게 눈뜨는 삼성의료원 현관 앞
막 퇴원한 환자가, 다 빠져나간
머리카락조차 잊고
곁에서 눈물을 감추는 보호자의 손도 놓고서
한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저 라일락나무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자수정(紫水晶) 푸른 그늘을.
풍란
벼랑끝 바윗돌에 붙어 꿈꾸다가
내려다보는 저 아래에는
물새 울음 한점 흐르지 않고
붉은 산호도 보이지 않는다
바다가 없으므로
나는 비명도 못 지른다
검푸른 바위옷이 발치에서 말라간다
이 밤에
나는 위험하다
벌거벗은 뿌리에 본드를 칠하고
매끈한 먹빛 수석 위에 결박당해
붙어 있다 십자가의 예수처럼
수반 위 세치 높이에서
한줌 물안개도 피지 않는 허공이
천길 벼랑인 것을
차라리 나에게
목숨을 날릴 태풍을 다오
뛰어내릴 쪽빛 바다를 다오.
푸른 심연
오페라의 유령
노래의 날개 위에
극장이 떠 있고
도취의 하늘이 떠 있었네
사랑의 깊이는 지옥보다 깊어서
무서워라
저 푸른 심연을 한없이 내려가
내려가면 소용돌이치는
거울의 방
갈채는 거미줄이 되어
샹들리에를 감고 흔들리더니
우레처럼 떨어지는 샹들리에
죽음의 축제
나는 가면을 벗을 수 없네
눈부신 삶의 기쁨을 노래하는
디바의 발치에 무릎을 꿇어본들
절망에 입맞춘 내 입술로
사랑을 하소연하여 무엇하리
나의 노래는 어둠 속에 숨어 있네
층계와 벽 속에 있네
그대가 바라보는 거울 속에 있네
춤추며 노래하는
그대의 길을 희미한 꿈결로 따라갈 뿐
그림자처럼 그림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