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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부안 핵반대투쟁의 진실
박형진 朴炯珍
시인. 시집으로 『바구니 속 감자싹은 시들어가고』 『다시 들판에 서서』 등이 있음.
지금 부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적어도 지난 7월 2일 핵폐기장백지화 핵발전추방 범부안군민 대책위(www.nonukebuan.or.kr)가 생겨나고 바로 다음날 핵폐기장 유치 공청회 반대시위가 일어난 뒤부터 지금까지 부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
핵폐기장 철회·군수퇴진·노무현 규탄 범부안군민 결의대회가 있던 날(7월 26일) 부안은 완전 해방구가 되었다. 김제 고창 정읍 익산 군산 전주 등 외부에서 부안으로 진입하는 모든 도로는 시위대가 끌고 나온 트랙터와 차량 등으로 봉쇄됐으며, 전경들의 진압을 막기 위해 태운 폐타이어의 불꽃과 연기가 부안 하늘을 온통 뒤덮었다. 군청 앞에서 전경들과 대치하고 있는 시위대의 머리 위를 경찰 헬기가 저공비행하며 해산을 종용하는 선무방송을 해댔다. 그러나 오후 들어 부안의 모든 상가는 문을 닫았고 거리로 뛰쳐나온 군중들은 해산할 줄을 몰랐다.
“지금 나헌티 총만 있으믄 저놈의 헬리꼽타 대번에 쏘아서 떨추겄네.” “나는 저놈의 헬리꼽타가 널러댕기다가 꼭 군수실로 떨어져부렀으믄 속이 다 시언허겄네.” “군수만 디져불면 쓰겄는가, 산자부에 핵폐기장 유치신청서 여깄소 헌 군의회 의장놈도 함께 디져야지.” “노무현이가 김종규에게 용기 잃지 말고 소신껏 추진허라고 전화를 힜담서? 뽑아준 본정머리 없이 똑같은 놈들이네.” “또 그 뭣이냐 노무현이가 불법시위 강력단속허라 허닝게 서울서 백골단들이 왔디야.” “아 광주사태가 벨것이가니……”
그러나 방금 바다나 논밭에서 일손을 놓고 달려왔음직한 시위대의 손에는 총이나 돌 대신 썩은 젓갈봉지가 하나씩 쥐어져 있었고, 시위대의 후미에는 각 면단위에서 준비해온 음식을 실은 트럭들이 대기하며 음료수와 음식 들을 나누고 있었다. 정말 80년 광주의 풍경이 겹쳐졌다. 이날 시위에 참여한 인원은 각 언론사 추정 약 1만5천명. 4일 전(7월 22일) 1만여명이 모인 핵폐기장 백지화와 군수퇴진 결의대회 때 경찰의 과잉폭력진압이 결과적으로 이날 부안을 해방구로 만들었다.
7월 22일로 되돌아가보자. 부안의 가장 중심지인 터미널 4거리에 위치한 수협 앞 도로는 오후 2시가 되자 입추의 여지가 없이 사람들로 채워졌다. 아마도 부안이 생긴 이래 가장 많은 군중이 모였을 것이다. 이날도 군민들은 읍내와 각 면의 상가를 대부분 철시하고 대회에 참가했는데, 시내 대부분의 교통을 통제하고 핵폐기장 유치 불가를 알리는 방송차량이 시내 전역을 누비며 대회 안내방송을 했다. 오후 3시 30분. 핵폐기장 백지화와 군수퇴진 결의대회를 마친 군민들은 풍물패를 앞세워 군청으로 행진했고, 약 2500여명의 전경들은 군청 앞을 막고 있었다. 진압부대의 곤봉과 방패 앞에서 기껏 구호나 외쳐대는 맨몸의 시위대 1만명은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이날 전경의 방패에 찍힌 100여명의 부상자가 도로에 피를 뿌리며 뒹굴다 들것에 실려가고 각 병원 앰뷸런스의 요란한 경광등이 부안 전역을 한꺼번에 뒤흔들었다. 이미 5월부터 시작된 부안을 에워싼 불길한 전조는 이날을 정점으로 극에 달했다. 이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난한 싸움은, 7월 26일을 기점으로 군민들 스스로 부안군민으로서의 자부심을 자각하며 주체적 역량에 의해 전개되기 시작했다.
무엇이 부안 사람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김종규 부안군수의 독단적인 위도 핵폐기장 유치신청 때문이며, 부안에서 일어난 사태를 직시하지 않고 사업추진을 강행하려 한 산업자원부와 한국수력원자력(주)(한수원) 때문이다. 우선 그 과정을 날짜별로 간략하게 정리해보자.
위도 주민 80여명이 원전수거물 안전성을 확인하기 위해 대덕 원자력연구소를 방문한 것은 지난 5월 4일이었고, 위도 주민 핵폐기장 유치위원회가 구성된 것은 5월 7일이었다. 유치위원회는 곧바로 주민들에게 서명을 받기 시작했고–이는 한 가구당 5억원씩 직접 보상이 가능할 것이라는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박동배 부연구원의 말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5월 13일에는 주민 80% 이상의 동의서명을 받아 부안군 의회에 핵폐기장 유치를 청원하기에 이르렀다.
6월에 부안군 양성자가속기 유치위원회가 바르게살기협의회·새마을회 등의 관변단체 인사들과 자영업자 2명으로 구성되자 이에 맞서 종교계와 농민회 등 34개의 민간단체들은 7월 2일 핵폐기장 백지화 핵발전소추방 범부안대책위를 구성하게 된다.
7월 9일, 비가 내리는 속에서 2천여명의 부안군민들은 핵폐기장 반대 결의대회를 갖고 군청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했고 김종규 군수를 면담한 결과 유치 반대의사를 확인하였다.
7월 10일, 신시도에 핵폐기장 유치를 신청하려던 군산시장이 유치포기 기자회견을 하자 김종규 부안군수도 “부안에서 위도보다 거리가 더 가까운 신시도에 핵폐기장을 지을 바엔 차라리 위도에 유치하고 그 지원금으로 부안 발전을 꾀하려 했으나 군산시장이 유치를 포기했으므로 위도에 유치할 명분이 없어졌다”며 언론사 인터뷰를 통해 유치반대 의사를 공식화했다.
그러나 7월 11일 오전, 군의회가 7:5로 위도 주민들의 핵폐기장 유치청원을 부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군수는 하룻밤 사이에 돌연 입장을 바꿔 유치선언 기자회견을 하였고, 유치신청 마감 하루 전인 7월 14일, 군수와 김형인 군의회의장은 산자부에 부안 위도 핵폐기장 유치신청서를 제출했다.
도대체 무엇이 군수의 생각을 돌려놨는가? 훗날(9월 8일) 내소사에서 발생한 폭행사건으로 코뼈와 갈비뼈가 부러져 전치 6주의 부상을 당하자 김종규 군수는 기자들에게 말하기를 정부가 핵폐기장과 연계해서 추진하려는 양성자가속기 사업을 따오기 위해서 핵폐기장 유치를 신청했으며 그것만이 낙후된 부안이 살길임을 확신한다고 했다. 또한 유치신청 마감에 쫓겨 공청회 등을 통한 주민의 여론수렴 과정을 거칠 수 없다고도 했는데, 이런 절차를 무시하면서까지 갑자기 유치신청을 한 것은 취임 때부터 전북에 양성자가속기를 유치하겠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던 강현욱 전북도지사와 윤진식 산자부 장관의 압력 때문이라고 한다.
그동안 한수원과 산자부는 안면도·굴업도 등에서 주민을 설득하여 동의를 구하는 대신 밀실에서 밀어붙이기식 행정과 주민을 매수하는 부도덕한 방법으로 핵폐기장 사업을 추진하려다 실패를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위도의 가난한 영세어민들을 대상으로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핵폐기장 유치신청을 하자 산자부에서는 그것이 부안군민 전체의 의견인 양 호도하며 기정사실화하려고 각 언론매체를 통해 다음과 같은 광고를 내보냈다.
“부안군민 여러분, 어려운 결단을 해주신 데 감사드립니다. 부안군민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이 광고를 본 7만의 부안군민은 구시대적 3류 코미디 앞에서 실소를 금치 못했다. 참여정부를 표방한 노무현 대통령이 부안군민의 의사를 깔아뭉갠 독단적인 군수에게 격려전화를 하고, 이에 항의하는 군민들에게는 엄정 대처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도 어이없는 일이었다. 수뇌부에서 온당치 못한 처사를 하니까 정부부처도 덩달아 이런 희극적인 짓을 하는데, 정부가 이렇게 무리를 하면서까지 핵폐기장을 건설하려는 본심은 무엇인가.
정읍엔 이미 방사선쎈터 건립을 위한 공사가 진행중인데 그 주목적은 식품·곡류 등에 방사선을 쬐어 살균살충, 발아억제 및 방부처리하여 유통기한을 대폭 늘리는 데 있다. 또한 위도를 핵폐기장 부지로 선정하면서 부안군 주산면 일대 역시 양성자가속기 사업부지로 선정했다. 양성자가속기는 핵폐기물 중에서 강한 방사선을 가지고 있고 붕괴에 비교적 긴 시간이 걸리는 세슘·테그네슘 등을 중성자로 조사해서 방사능이 줄어드는 시간을 짧게 하는 장치이다. 정부는 현재 가동중인 18기의 원전말고도 2030년까지 16기의 원전을 추가 건설한다는데 바로 여기서 나오는 중·저준위 및 고준위 폐기물을 위도 핵폐기장과 주산의 양성자가속기 핵재처리 시설을 통해 처리하려는 것이다. 가히 죽음의 벨트화 계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죽음의 계획은 어설프기 짝이 없다. 민주주의적 절차를 거쳤는지 여부를 따지기 전에 우선 몇가지 짚어볼 게 있다. 얼마 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용역보고서를 한수원이 은폐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이 보고서는 간단히 말해 사용 후 핵연료를 그것을 발생시킨 각 원자력발전소 내에 시설을 추가로 마련하여 보관하는 경우와 각 발전소의 것을 모두 한곳으로 수송하여 저장할 수 있는 별도의 장소를 마련하는 경우를 비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용후 핵연료와 같은 고준위폐기물을 예컨대 위도 핵폐기장과 같은 제3의 장소에 직접 보관하는 안에 관한 타당성 조사였던 것이다. 무슨 사설기관이나 개인도 아닌 한국에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최고의 과학 엘리뜨 집단인 한국과학기술원에서 그러한 안이 타당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그러나 한수원은 그러한 용역보고서를 임의로 폐기하고 저 멀리 울진·월성·고리에서 발생한 폐기물을 이곳 부안까지 끌어오겠다고 한다.
국회조사특위에서 위도 지질조사에 대한 한수원의 허위보고는 언급할 가치도 없다. 부안군민뿐만이 아니라 전국민의 안전이 위협받을 수 있는 핵폐기장 부지의 지질이 이미 활성단층의 활동에 의한 파쇄대(Fracture Zone)가 형성되어 50미터만 파도 지하수가 흐르고 그 이하에서는 해수가 흐르는 것이 확인되었음에도 산자부는 용역을 준 대우엔지니어링의 하청 시추업체에게 40미터만 파라고 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사정이 이러한데도 정부의 위도 핵폐기장 추진은 변함이 없다.
군민은 7월 26일을 기점으로 다양한 대정부투쟁을 펼치게 되었다. 7월 31일과 8월 21일의 두 차례에 걸친 격포·위도 간 해상시위는 그 규모나 방법, 참여인원에서 핵폐기장이라는 절체절명의 적과 치른 해전에 다름아니었다.
강현욱 지사의 부안 압살 및 전북 핵단지화 음모 저지를 위한 부안·전주 간 차량시위(8월 5일)에는 약 1500여대의 차량이 동원되었고, 서해안 고속도로 점거(8월 13일) 및 핵폐기장 반대 고속도로 홍보투쟁(8월 17일)이 그 뒤를 이었다.
방학이 끝난 8월 25일, 군내 초·중·고의 2학기 등교에 맞춰 시작된 학생들의 등교거부(등교거부율 70% 이상)는 10월 5일까지 42일 동안 이어져 정상수업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각 지역에서는 교사 학부모 들에 의한 반핵민주학교가 열려 학생들의 다양한 대체 체험학습이 이루어졌다. 등교 결정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학부모·선생님·학생 모두 이후 핵폐기장 문제의 진전이 없을 경우 2차 등교거부에 다함께 힘을 모으자는 결의를 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위도에서는 위도 지킴이 모임에서 주최한 위도 주민총회와 이어 반대투쟁결의, 서명작업이 이루어졌으며, 군내 501명의 이장단 중 340명이 사퇴하고 공무원 직장협의회 및 핵폐기장 유치위원회와 양성자가속기 유치위원들의 탈퇴 및 유치반대입장 표명이 뒤를 이었다. 변산아가씨 선발대회, 전국체전의 부안요트경기, 전국바둑대회 등 부안에서 계획되거나 이루어지는 모든 행사들이 열리지 못했거나 파행을 겪었으며 5월 이후 부안군의 정상적인 행정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9월 8일 내소사 군수 폭행사건 이후 당국은 부안에 총 60개중대, 7200여명의 전경을 배치했고 이 중 45개 중대를 상주시켜 불안을 조성하고 있으며, 공권력을 통한 구속과 수배 남발로 10월 1일까지 구속 16명, 불구속 52명, 즉심 75명 등의 폭력이 자행되었다.
이런 와중에 군단위에서 발행되는 지방신문들의 행태는 한마디로 김종규·강현욱과 한수원·산자부의 기관지 역할을 해서 군민들의 분노를 샀으나, 결과적으로는 싸움의 성격과 투쟁의 강도, 피아의 구분을 더욱 분명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중앙언론도 부안군민의 입장에서 보면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대안신문이랄 수 있는 창간준비신문 『부안21』이 10월 10일 현재 2호째 발행중인데 진정한 군민신문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10월 1일부터 부안에서 전북도청까지 10일간의 삼보일배가 시작됐으며, 7월 26일부터 11월 2일 현재까지 100일째 이어진 유명한 촛불집회는 부안핵폐기장 반대싸움의 가장 근간이 되는 집회이다.
강경폭력진압(7월 22일)이 7만여 부안군민들에게 단숨에 저 5·18의 광주의 상황을 재현케 했다면, 평화시위로 전환된 촛불집회는 2002년 광화문의 효순·미선양 추모 촛불집회로 대표되는, 그동안의 반사회적 반국민적 문제에 대한 저항과 정확하게 결합하는 것이어서 군민의식을 단숨에 성숙된 시민의식으로 발전케 했다. 자연스럽게 ‘반핵민주광장’이라 일컫게 된 수협 앞 4차선 도로의 촛불집회에는 가족단위, 마을단위로 참여해서 매일 밤마다 3천명을 넘어섰으며, 여기서 이뤄진 각종 문화공연과 토론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학습이 되어 이후 군민 스스로 결정하고 참여하는 한층 성숙된 형태의 투쟁의 장이 되었다. 싸움을 통해서 부안군민은 부안이 가진 천혜의 삶의 조건을 인식하고 자신과 지역과 이웃을 사랑하고 이해하게 되었다.
정부는 핵반대 부안대책위와 대화기구구성을 합의(10월 3일)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잘못 진행된 핵폐기장 부지선정계획을 백지화하고 대체에너지 정책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지 않고, 무조건 부안군민을 설득과 회유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기존 정부의 대민관으로 임한다면 대화기구의 앞길은 불을 보듯 뻔할 것이다. 재신임안 국면과 맞물린 현싯점에서 부안군민의 의사를 정확히 짚지 않는다면 군민 전체가 불신임을 선택할 것이며, 더 나아가 내년 총선에서 그 어느 당도 부안에서는 정치적 미아가 될 것임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지금 부안에서 벌이지고 있는 이 일이 부안군민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