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학문의 주체성과 오늘의 대학
좌담: 주체적이고 세계적인 학문은 가능한가
임형택
성균관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대동문화연구원 원장 htlim@yurim.skku.ac.kr
서경희
광주대 외국어학부 영문학 교수 khsuh@gwangju.ac.kr
신정완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경제학 교수 jeongwans@mail.skhu.ac.kr
백영서
연세대 사학과 교수, 본지 부주간, 사회 baik2385@yonsei.ac.kr
때: 2004년 10월 16일
곳: 한국프레스쎈터 20층 모란실
사회(백영서) 먼저 좌담을 위해 와주신 세 분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창작과비평』에서는 이번호 특집의 주제를 ‘학문의 주체성과 오늘의 대학’으로 잡고 좌담을 기획했습니다. 요즘 국내외 정세가 어수선하고 사회적 갈등도 심화되는 와중에 왜 이런 주제가 잡혔는지 의아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희는 이 주제가 사회적인 관심사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번 특집과 이 좌담은 작년부터 본지에서 진행해온 연속특집 ‘21세기의 한반도 구상’의 맥락에서 한반도 발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짜는 문제를 염두에 두고 기획한 것입니다. 오늘 좌담에서는 대학개혁에 촛점을 맞추되 대학의 제도적 개혁에 대한 논의는 많았으니까 그중에서도 주로 학문생산의 문제, 이른바 연구의 문제를 가지고 얘기를 해봤으면 합니다.각 학문분야의 금기랄까 차마 말 못했던 것까지도 터놓고 얘기하면서 대안을 찾는 진지한 자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먼저 이 주제에 대한 선생님들의 문제의식을 들려주시는 방편으로 학문생산 현장에서 느끼는 문제점을 얘기해주시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특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이 좌담에 대학에 있는 분들만 참석했는데, 우리 사회는 대학의 학문생산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까 하는 점을 의식하면서 논의해주셨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대학개혁의 실태와 학문생산
임형택 ‘학문생산’하니까 학문도 물질적인 것처럼 생산하는가라는 생소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만 요즘 대학사회에서는 그야말로 학문생산에 교수들을 경쟁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어요. 그래서 교수들 대부분이 학문생산 실적을 올리기 위해, 실적 부진으로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온갖 요령을 부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옆을 돌아볼 겨를도 없어 서로 어울리고 즐기는 자리도 되도록 피하게 되고, 당장 자기 논문과 관계가 될 것 같지 않으면 관심을 가지려고도 않지요. 이게 잘하는 짓인지, 이렇게 해서 과연 진정한 학문발전이 이루어질 것인지 대학사회에 평생을 몸담고 있는 저 자신도 솔직히 말해서 의문이 듭니다. 과연 그렇게 해서 생산된 학문이 어떤 기여를 하고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가에 대해서 자신있게 답변하기도 어렵지만, 무진 애를 써서 또 어려운 과정을 통과해서 논문이란 형식으로 발표를 하는데, 도대체 몇명이나 읽어주는지 문득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같은 전공자들도 별로 읽지 않는다니 일반 독자들은 이해도 되지 않을는지 모르지요. 논문이다 저서다 워낙 과다 생산이 되니까 일일이 다 챙겨서 읽기도 어렵고, 또 부실한 내용이어서 읽을 맛이 나지 않는 것도 많은데다가 제 논문 쓰기 바쁜데 남의 글 찾아 읽을 여유가 없는 것이 실상입니다. 그러니 학문이 사회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라고 봐야겠지요. 학문이 외형적으로 이미 대량생산체제에 들어서서 문제점을 무한히 야기하고 있는데 대학개혁이 진행되는 현 싯점에서 학문의 제도를 어떻게 정립해야 할까, 학문의 내실을 어떻게 채워갈까 참으로 고민스럽습니다.‘21세기의 한반도 구상’이란 자체가 본디 학문의 고유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만 이 큰 과제를 위해서 학문의 제도를 점검하고 학문의 길을 반성하는 일은 실로 관건적이라 하겠습니다.
서경희 흔히들 우리나라 대학이 현실과 유리된 상아탑에 갇혀 있어서 국가와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를 제대로 양성하지 못하고 있고, 또 국제경쟁력 면에서 낙후되었다는 비판을 듣는데, 그런 비판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대학이 지향한 진리탐구와 학문추구라는 이상은 아무런 공론의 과정도 거치지 않고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대신 세계시장을 무대로 한 경쟁력있는 인재를 배출하기 위한 실용화 바람이 거세게 대학에 몰아치고 있는데 이런 현상이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겠죠. 그런데 이같은 상황은 대학구조의 서열화로 인해 서울의 명문대학보다는 지방대학에서 훨씬 더 심각하다고 여겨집니다. 실제로 제가 지방대에 근무하면서 제일 곤혹스러운 일 중의 하나가 학생들 대부분이 기초적인 영어실력도 못 갖춘 상태인데다 기초적인 영어실력 가지고는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영문학 텍스트를 가르쳐야 한다는 점이에요. 학생들은 대부분 실용영어를 배워 토익이나 토플 점수 올리는 데만 관심이 있지 영문학에는 흥미가 없어요. 또한 대학원이 없고 학부과정만 있는 대학에서 가르치다보니 제가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의 연구와 교육 간의 괴리가 너무 커서 연구는 단지 제 개인적인 차원의 일일 뿐이고 교육현장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따로따로 진행될 가능성이 커요. 그러다보니까 연구의욕은 점점 꺾이게 되고, 또 지방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지적인 협동을 할 수 있는 학문공동체에서 멀어질 때 오는 위축감도 많이 느끼게 되지요. 그런데 대학개혁이 강제하는 교수업적평가를 의식하게 되면 또 연구실적을 일정량 내야 되니까 스스로 부실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논문을 안 낼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물론 학문생산의 제일 큰 책임은 연구자 개인에게 있는 것이지만 이런저런 외부적 조건들이 합쳐져서 전반적으로 학문생산을 부실하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 같습니다.
신정완 현재의 대학개혁은 정부가 주도하고 재계와 일부 언론이 지원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대학개혁의 큰 방향은 대학정원을 감축하는 총량적 차원의 구조조정, 대학교육 내용의 실용성 강화, 교수평가 강화 등을 통한 연구의 수월성(秀越性) 제고, 선택과 집중을 통한 전략적 대학지원 등인 것 같습니다. 반면에 교수단체 등에서는 이러한 방향의 대학개혁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 교육의 공공성 강화라는 모토 하에 대학의 소유지배구조 개선, 대학운영의 민주성과 투명성 제고 등을 강조해왔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대학설립이 크게 늘어난 데 비해 인구증가율이 감소하면서 자연스레 모집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대학들이 생겼으므로 어떠한 형태로든 총량적 차원의 구조조정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이고, 현재 대학의 성격이 취학연령 젊은이들 거의 모두가 들어가는 대중교육기관으로 변모한만큼 대학교육의 실용성 제고도 필요합니다. 또한 많은 사립대에서 투명하지 못한 경영과 재단이사회나 총장의 전횡 등의 문제도 확인된만큼 소유지배구조 및 운영방식의 민주화도 꼭 이루어져야 할 과제입니다. 이런 점에서 효율성을 강조하는 현재의 대학개혁의 방향과 대학운영의 민주성을 강조하는 요구가 결합될 수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교육부가 대학운영의 민주화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해왔기 때문에 교수 등 대학교육의 주체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 대학의 공공성 강화를 주장하는 측에서도 지금까지 우리 대학들이 교육 및 연구의 생산성 측면에서 낙후되어 있었다는 점과, 대학교육 내용의 실용성이나 연구의 수월성 제고를 위한 개혁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 합리적인 대학개혁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사회 문제의식 혹은 현장의 경험을 말씀해달라고 했는데 벌써 우리가 다루어야 할 중요한 문제로 바로 들어갔습니다. 현재의 대학개혁이 학문생산과 관련해 과연 긍정적인가에 대해서 각자의 입장을 밝혀주시면서 지금 현장의 상황이 어떤지 간단히 소개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신정완 현재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대학개혁, 또 국제적 표준에 근접하려는 연구의 수월성 강화 정책은 최소기준을 마련해준 측면이 있어요. 그래서 그 기준에 미달한 대학이나 개인에게 자극을 주고 독려하는 측면은 있는데, 정부 주도의 평가에서는 기준이 획일화될 수밖에 없어요. 시비의 소지를 줄이려면 정량적 평가를 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낳는 부작용들이 있는 것 같아요. 논문 편수가 중요하다보니까 논문을 쪼개서 쓰는 관행이 생겨나고 논문의 질이 떨어지는 문제도 있고, 각 대학들은 생존을 위해 정부의 지원을 따내야 하기 때문에 급조된 프로젝트를 많이 하게 되고 비교적 유능한 교수들이 본인의 관심사와 무관하게 동원되는 문제 등이 있어요. 그리고 한국학술진흥재단(학진)의 등재지 평가는 대학에서 요구한 측면이 있다고 해요. 대학에서 교수임용이나 재임용과 관련해서 연구실적 평가기준이 필요한데 대학 구성원이 합의를 못 보기 때문에 결국 학진에 맡겨졌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대학 구성원들이 먼저 반성을 해야겠죠. 학진 등재지 정책이 전체적으로 어떤 효과를 냈는가를 생각해보면 긍정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논문 편수를 늘린 점 같아요. 그런데 학문발전, 특히 주체적 학문발전은 새로운 영역, 새로운 방법론을 모험적으로 추구하는 연구자와 그 연구성과가 많아져야 가능한데, 기존의 대규모 학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것이 유리한 상황이 새로운 시도들을 차단해버리는 역효과가 크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또 많은 학회들이 등재지, 또는 등재지 후보로 평가받기 위해 외형 불리기에 치중한 측면이 있어요.
임형택 우선 학문생산은 대학개혁 문제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는데 지금 대학구조개혁의 당위성 내지 필요성에 대해서 부인할 사람은 없다고 봐요. 지난 세기말 이래 진행된 세계화의 추세나 정보기술의 발전 속도, 그리고 한국사회 내의 인구감소 등의 문제를 고려할 때 20세기적인 대학제도를 가지고는 21세기의 시대에 대응해갈 수 없다는 점에 대체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싶어요. 문제는 어떻게 바꿔나갈까인데, 이 대목에서 마냥 허둥대고 실착을 거듭하는 듯 보여 안타깝습니다. 학부제 문제만 해도 기존의 분과학문 체제로는 안되겠다,적절한 방도를 찾아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과연 소기의 성과와 실효를 거두었느냐는 데는 긍정적인 답이 안 나오거든요. 현행 학부제는 부실화해서 표류하고,오히려 다시 과거로 환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 아닌가요.이와 관련해서 저는 두 가지 반성할 점을 들겠습니다. 하나는 지난 80년대 전후에 실험대학이란 제도를 당시 문교부가 대학들에 밀어붙였는데 지금 학부제와 내용·형식이 거의 비슷했습니다. 그러다가 실패하여 유야무야 철회해버리고 말았지요. 그럼에도 유사한 제도를 또다시 들고 나오면서 왜 그때 실패했는가에 대한 조사·분석을 거쳤다는 말을 전혀 듣지 못했어요. 역사는 진정으로 반성하지 않으면 그 실패를 반복한다는 교훈이 새삼 절실해집니다. 그리고 일을 추진하는 방식이 문젭니다. 학부제를 포함해서 대학개혁 전반을 정부당국이 표면적으로는 대학의 자율에 맡긴다면서도 돈으로 유인하는 술수를 쓰고 있지요. 그런 한편으로 평가라는 것을 부단히 실시해서 의도하는 틀 속으로 대학들이 끌려들어가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합니다. 말하자면 지원이란 ‘당근’과 평가란 ‘채찍’을 동시에 사용하는 셈입니다. 이 방식은 묘방이어서 표면적으로는 효과를 보고 있다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실상은 그 제도의 부정적인 면이 확대되고 역효과를 내게 됩니다. 대학당국은 당근에 끌려서 부지런히 좇아가는데 교수들의 동의와 합의는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 있지요. 지금 학부제의 부실화는 기실 편의주의 때문에 자초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대학개혁도, 학문발전책도 첫째로 실사구시에 입각해서 원칙과 방향을 제시하고 적합한 방법론을 고안해야 하며, 그러면서도 대학구성원 다수의 자율성·창발성을 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개혁이란 개혁대상이기도 한 성원의 합의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래도 어느정도의 공감대 없이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덧붙여 한마디 더 하지요. 오늘의 학문생산은 제도적 과정에 속박되어 벗어날 수 없는 실태인데, 동시에 그것은 인간 개체의 두뇌에서 창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지요. 그러므로 제도가 인간에 내재한 창조적 역량을 어떻게 활발하게 만들지 먼저 사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서경희 대학개혁이나 학문생산을 얘기할 때 대학범주에 포괄되는 것은 서열구조에서 중상(中上)에 속하는 대학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 제가 근무하는 지방대학은 연구나 학문생산을 논하기 이전에 존폐의 기로에 몰려 있기 때문에 사실 학문의 위기를 논하는 것조차도 호사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요즘 대부분의 지방대 교수들이 가장 절박하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일은 신입생 충원을 위한 고교 홍보출장이라든지 재학생의 등록률을 높이고 자퇴나 타 대학으로의 편입 등의 이유로 재학생 수가 감소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각종 학생지도, 그리고 졸업생의 취업률을 높이기 위한 활동 등이거든요. 그런데도 교수업적평가 항목을 보면 다른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연구, 교육, 사회봉사 각각을 잘해야 승진이나 재임용이 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상위권이든 하위권 대학이든 공통적으로 지닌 문제는 있겠지만 대학간의 서열구조를 고려해 개혁이 논의됐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대학간 서열체제를 무너뜨리는 일과 연관하여 개혁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학에 대한 재정지원에 있어서 선택과 집중이라는 논리는 사실 서열구조의 하단부에 있는 대학을 경쟁에서 탈락시키고 이들이 되도록 빨리 고사되기를 바라는 것인 듯해요. 그래서 우리가 학문생산의 문제, 연구의 문제, 교육의 문제를 얘기할 때 때로는 대학의 서열화된 구조를 염두에 둘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임형택 사실 서울대의 모델이 전국적으로 모든 대학들에 적용됐거든요. 그런 획일화의 문제점은 굳이 지적하지 않더라도 눈앞에 뚜렷이 드러나고 있지요. 지금 대학개혁에서 대학의 여러 모델을 수준과 지역적인 조건 등 다른 여건들을 고려해서 개발, 발전시키는 일이 중요합니다. 가령 학자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대학원중심대학은 소수로 두고, 중하위권 대학, 그리고 지방의 군소대학, 특수기술학교 등 좀더 다양하고 실정에 맞는 대학의 형식을 고안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학문의 심각한 대외의존성
사회 저는 서열구조에서 이른바 상위권에 속하는 대학도 구조적으로는 다 똑같은 조건에 처해 있다고 봐요. 연세대만 해도 최근 대학개혁을 요구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위기를 겪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학문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대학원이 잘되어야 학문의 후속세대를 양성할 수 있는데 우선 제가 지도하는 학생을 보면 본교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진학했다가 상당수가 외국유학을 가요. 제 분야는 중국사이고 넓은 의미로는 동아시아사라고 할 수 있는데 이전 같으면 학생들이 유학을 안 갔어요. 그런데 요즘은 거의 중국이나 미국에 유학을 갔다오는데 그러면 교수임용도 잘되거든요. 상위권 대학조차도 대학 내에서의 학문생산 전망은 밝지가 않아요. 서울대나 고려대도 제 전공분야는 비슷한 조건에 처해 있다고 봐요. 한국의 모든 대학이 전세계의 등급상으로는 중위권 이하겠죠. 그러면서 전부 세계 중심의 상위권 대학으로 진학하는 대외종속성이 심화된다는 점에서는 같은 위기를 겪고 있어요. 다들 유학을 보내기 위한 학부과정에 그치는 것이죠. 사실 이것은 한국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대만도 비슷하게 겪는 전세계적인 문제이고, 이른바 국제경쟁력이 주는 압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그러면 대외의존성에 대한 실감이 어떤지 얘기하는 것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런 부담을 많이 느끼는 분야가 경제학과 영문학일 것 같은데요.
신정완 경제학은 사회과학의 다른 분야에 비해 연구방법의 보편주의적 성격이 매우 강합니다. 대다수 대학에서 가르치는 경제학 패러다임은 주류경제학이에요. 이념적으로 시장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방법론적 개인주의에 기초한 신고전학파 경제학을 중심에 두면서 케인즈(Keynes) 경제학이 결합된 형태가 주류경제학인데, 그 반대편에 맑스경제학이 있죠. 그런데 둘 다 보편주의적인 학문 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치학이나 사회학은 체계성이 좀 낮다 하더라도 학문 패러다임이 다양한데 경제학은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경제학자는 사회학자나 정치학자에 비해 대체로 더 근본주의적입니다. 시장지상주의자이거나 아주 원칙적인 반자본주의 성향이 강하죠. 일본 경제학이 독일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일제시대에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우리로서는 맑스주의와 역사학파의 영향이 강했어요. 경제학의 역사에서 역사학파는 거의 유일하게 특수주의적 경향이 강한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그 전통이 차단되죠. 지금은 케인즈 경제학과 신고전파 경제학을 미국에서 공부한 학자들이 대거 충원되면서 국내 대학교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몇몇 큰 대학에서만 맑스주의 경제학을 전공한 교수가 있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경제학의 본산지인 영국에서조차 최근에는 경제학 교수를 하려면 미국 유학을 가야 한다고 할 정도로 미국 집중이 강화되고 있고, 경제학 이론 생산의 90% 이상을 미국이 담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예요. 그것으로라도 한국경제를 잘 설명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IMF 경제위기를 겪을 때 IMF가 권고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의 부작용을 지적한 학자들은 주류경제학자 중에서도 주로 미국 경제학자들이었고 국내 학자들은 많지 않았어요. 정서적인 반발이 있었지만 그것을 이론화할 능력이 없었고, 그래서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주장하는 쪽이나 그것의 부작용을 비판하고 다른 노선을 제시하는 쪽이나 모두 미국학자이고 우리는 그것을 소개하는 식의 논의구도가 이루어졌는데 이 패턴이 앞으로도 지속될 가능성이 많아요. 그래서 문제의식의 주체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문제의식 자체를 배워오는 일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입니다. 국내에서 공부한 사람으로서 갖는 편견일 수도 있지만, 미국에서 유학한 교수들의 상당수는 마치 손님이 남의 사회를 바라보듯이 우리 사회나 대학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아요. 자기 대학과 사회를 삶의 중심지로 보기보다는 일종의 부임지로 보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죠. 물론 이 분들이 학부과정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다가 미국 유학에서 본격적으로 학문을 연마했기 때문에 그런 태도를 갖게 되는 측면이 있겠죠. 그런데 국내 대학교육의 부실 문제를 국내 대학에 남아서 발언을 통해 해결한 것(voice option)이 아니라 국내 대학으로부터 탈출하는 선택(exit option), 더 정확하게는 탈출했다가 학위를 받고 나서 귀환하는 선택을 했죠. 그래서 결과적으로 성공했고요. 따라서 제자들, 특히 똑똑한 제자들에게 탈출하는 선택을 권유하죠. 여기에 오래 있어봤자 별 비전이 없으니 나갔다가 오라는 식이죠.
사회 그러면 대학원 실태는 어떻습니까? 석·박사 과정이 존재하잖아요.
신정완 제가 학부 82학번이니까 오래전 일인데 그때 느낀 것은 석·박사과정이 사실 학부보다 부실하다는 겁니다. 학부과정은 교수가 책이라도 한권 떼주는데 대학원 교육은 대개 교재를 몇개 골라서 학생들에게 발표시키고 교수는 몇가지 코멘트해주는 식으로 진행된단 말예요. 박사과정에 들어가면 더 한심한 것이 대개는 석사과정 학생들과 수업을 같이 하는데 석사과정에서 배운 것과 대동소이한 내용입니다. 그러면서도 이수학점 수는 굉장히 많아요. 밀도높은 교육을 제공할 수 없으면 차라리 이수학점 수를 줄여서 논문에 집중하게 해주면 좋겠는데 취직도 못하고 논문에 집중도 못하게 하는 그런 구조입니다. 지금 미국대학의 경우 코스워크(coursework)가 굉장히 강하지 않습니까? 유럽의 경우는 코스워크가 약하고 논문지도의 비중이 크다고 하는데 우리 대학은 코스워크 비중도 크고 논문도 까다롭게 하면서 실질적인 지도는 잘 안되고 있는 것이죠.
사회 그 얘기는 80년대적인 것이고, 지금도 그렇다는 얘기입니까?
신정완 서울대 경제학부 후배들 얘기를 들어보면 젊은 교수들이 부임하면서 교육의 밀도는 높아졌다고 해요. 그러나 대학원 다니다가 유학 가는 학생 수가 늘어나면서 박사과정까지 머물러 있는 학생의 비중은 줄어들고 있고, 또 대체로 타대학이나 타전공 출신들이 박사과정에 많이 들어오면서 교수들이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을 진정한 제자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핵심적인 학자층으로 양성하기 어려운 제자로 보기 때문에 아무래도 친밀도가 좀 떨어지겠죠. 여담입니다만 국내에서 박사학위도 받고 시간강사 하던 한 후배가 어느 교수와 술좌석에서 국내 대학원을 이렇게 방치할 것이면 뭐하러 대학원을 개설했느냐, 오히려 다 유학가도록 하는 것이 학생들에게 정확한 신호를 보내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그 교수가, 그러면 지방대 교수는 누가 양성하느냐고 얘기하더래요. 그런 의식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교수는 자기 대학 출신 유학생 중에서 뽑으려 하고, 조그만 대학에서도 교수가 필요할 테니까 대학원 석박사 과정을 유지한다는 거죠.
임형택 지방대학이라고 해서 국내박사를 쓰려고 하나요?
신정완 사실 요즘 교수들 수준은 많이 평준화됐죠.
서경희 맞습니다. 지방대학에서도 외국박사를 선호하는 경향은 뚜렷하고, 수도권 대학이나 지방대학이나 교수들간에는 그리 큰 차이가 없는 듯싶습니다.
사회 그런데 영문학과는 어떤 상황입니까?
서경희 대학마다 사정이 좀 다르겠지만, 영문학과는 다른 어문계열 학과에 비해 호황을 누리고 있고 아직도 인기학과지만 사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영어가 거의 물신의 경지에 이른 세태가 반영된 현상이지요. 영문학 자체가 학생들에게 매력있는 과목으로 인정받는 것은 전혀 아니에요. 그래서 전반적으로 실용적인 영어 구사능력만 강조되고 정작 영문학 자체는 축소되는 경향이라 상당히 위기를 겪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흐름 속에서 학문 후속세대는 연수와 유학을 통한 영어능력 습득과 영미권의 최신 이론들, 특히 문학보다는 문화론에 치중한 이론들의 수용에 급급하여 주체적인 연구가 쉽지 않은 실정입니다.
영문학의 대외의존성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해방 이후 미군정기와 한국전쟁 전후에 많은 대학에 영문과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초창기에는 가르칠 교재조차 변변한 게 없고 학문의 기반이 워낙 열악하다보니 영미권에서 가르치는 문학작품을 단편적으로 소개하기에도 벅찼고 딱히 대미의존성, 대외의존성을 논하기도 우스운 수준이었지요. 이후 어느정도 기틀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학계의 주류를 차지하며 대학에 자리를 잡은 분들은 영미권에서 학위를 받은 분들로, ‘신비평’이라는 영미권의 문학연구방법론에 입각해 연구와 교육을 했습니다. 민족민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7,80년대에 학부를 졸업하거나 대학원을 다닌 사람들 중에는 굳이 외국에 가지 않더라도 우리 나름으로 연구업적을 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공부한 경우도 있는데, 상당히 내실있는 대학원 교육을 통해 학문적 수련을 받고, ‘비판적 리얼리즘’의 시각에서 괜찮은 수준의 논문을 써내기도 했지요. 이런 경향은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후반 민주화운동 및 학술운동에 힙입어 기존의 무비판적인 서구추수주의적 연구풍토를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어졌어요.‘영미문학연구회’(영미연)가 창립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전반적으로 그리 낙관적이지는 못합니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운동과 영미연의 학술운동적 기세가 수그러든 9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서울대 영문학과의 경우만 해도 대학원생 대다수가 석사과정 이후 혹은 박사과정 중간에 미국이나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이때 유학간 학생들이 지금 수도권 대학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실정이에요. 그리하여 서울대 대학원 자체는 영미권 유학의 정거장 정도로 인식되는 경향이 생겨나면서 대학원이 본격적인 연구의 장이라기보다는 외국대학의 예비학교 같은 성격을 띠게 되었는데 현재 우리 사회에 만연한 조기유학 열풍을 감안하면 이런 추세는 더 심해지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사회 그런데도 국내에 석·박사과정을 두는 이유는 뭘까요?
임형택 굳이 대학원을 두는 것은 서울대 모델의 획일화와 관련된 현상이지요.거기다가 학교경영 차원이나 교수들의 요구도 있다고 봐요. 교수의 입장에선 자기 학문을 전수할 제자를 기르고 싶은 것이 당연한 욕망이고 대학당국으로서도 대학원은 따로 전임을 채용하지 않아도 되니까 웬만하면 남는 장사죠. 그래서 중하위권 대학에까지 학생의 수준, 사회적 수요는 따지지 않고 석·박사과정을 마구 개설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국학을 하고 국내에서 연구과정을 이수한다 해서 주체적인 자세를 담보하느냐 하면 그건 꼭 그렇지 않아요. 한국문학이든 한국사든 국학이 과연 주체적인 학문자세로 학문을 해왔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회의적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해온 국학은 주체성이 다분히 모호하고 대외의존적 성격까지 지니고 있다는 지적을 해왔습니다. 주체적인 자세를 확립하기 위해서라도 국제적 소통이 필요하며, 국학 지망자의 경우 석·박사의 전과정을 해외에서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중간에 시야를 넓히고 이론을 체득하기 위해 연수나 유학을 나가도록 적극 장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국학에까지 대외의존성이 있다고 하셨는데 무엇을 대외의존성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임형택 제가 선배 세대에 대해서 늘 지니고 있던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저 분들은 일제하에서 일본 교육을 받아서 일본어에 능통하고 일본문학, 일본역사에 관한 지식도 많은데 왜 일본을 학문적으로 파고든 사람은 없을까? 근래 일본문학이나 일본사 전공자가 새로 배출되었지 전에는 만나볼 수 없었거든요.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역으로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학적 인식의 성과와 비교해보면 어떤가요?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오로지 중국의 고전을 학습했습니다. 그렇다 해서 중국을 정말 잘 알고 있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못했지요. 오늘날 미국 유학생은 넘쳐나면서도 미국에 대한 학적 인식은 넓거나 깊지 못한 현실과도 비견되는 듯합니다. 일본에 대한 학적 인식의 결여 자체가 식민성의 역반응이 아닌가 싶어요. 한꺼풀 더 파고들면 일본은 애써 배울 것이 없고 서양을 배워야 한다는 서양중심주의가 나옵니다. 우리 사고의 근저에 식민성과 함께 서양중심주의가 도사리고 있어 국학의식에도 부단히 작용했습니다. 자국의 역사, 자국의 문화를 연구한다고 하지만 이론과 방법론은 주로 서구에 기댔습니다. 그래서 외국이론을 끌어다가 근대학문이란 이름으로 국내 자료를 가공한 셈이지요. 그래서 대외의존적 성격이 있다고 한 겁니다. 지금 제 논리가 모순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어요. 열린 자세를 강조하면서 외국이론 도입을 부정적으로 언급하니 말입니다. 자족적이고 폐쇄적인 자세가 주체적인 것은 아니거든요. 국학이라도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서는 곤란하지요. 서구이론을 받아들이는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자기 현실을 돌아보지 못하는 추수적인 태도가 틀렸다는 겁니다.
신정완 저는 다른 측면을 얘기하고 싶어요. 신규교수 임용에서 국내박사와 외국박사 비중을 보면 예상과는 달리 최근 몇년간 국내박사 비중이 올라가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의학 쪽에서 교수를 많이 뽑기 때문입니다. 의학은 도제적인 씨스템 때문에 거의가 국내박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또 하나는 공학 쪽의 약진이 있어요. 카이스트(KAIST), 포항공대, 서울공대 등 비교적 우수한 교육을 제공하는 데가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인문사회 쪽은 오히려 미국 박사가 늘어나고 있어요. 우리 상식으로 보면 이공계 쪽은 외국 유학을 해도 학문 주체화 문제가 별로 없을 것 같고 오히려 우리 사회의 특수성을 설명하는 인문사회 쪽에서는 국내에서 학문해야 할 것 같은데 그 반대경향인 거죠. 이는 의학이라든가 공학 같은 경우에는 굉장히 표준적인 방법론을 사용해 국적 차이라는 것이 별 문제가 안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자원을 많이 투입해서 연구자들에게 인쎈티브를 충분히 주면 좋은 성과물이 많이 나올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경우에는 자기 사회를 보는 시각,방법론이 굉장히 중요한데 그 문제에 대해서 자신이 없는 거죠. 표준화된 길이 있으면 남보다 더 부지런히 달려가서 따라잡고 추월도 할 수 있지만 우리 사회를 어떤 가치관에서 어떤 방법론으로 분석할 것인가와 관련해서는 점점 더 외국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는 풍토가 조성되었다고 봐요.
예컨대 경제학의 경우 몇년 전 ‘발전국가론’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이 이론은 신고전파 경제학, 확실한 주류 패러다임과는 다르게 2차대전 이후 후발자본주의국의 경우 박정희와 같은 개발독재를 통해서 오히려 성과있는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면서 신자유주의 논리와는 상당히 다르게 국가의 주도성, 국가발전전략의 특수성을 강조했습니다. 그것이 국내학자들에게 많이 수용됐는데 이 이론도 대만과 한국 사례를 가지고 미국학자가 만들어낸 거예요. 그런데 한국과 관련된 내용을 보면 그 학자가 그렇게 많은 자료를 읽은 건 아니에요. 사실 팩트(fact)에 대한 지식은 국내학자들이 훨씬 풍부하죠. 그런데 미국학자들은 학자양성 과정에서 이론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니까 한두 나라 보고 뭐가 보이면 보편적인 이론을 과감하게 만들어본단 말예요. 부분적으로 안 맞는 면도 있지만 대안적인 설명 틀이 없는 상태에서는 결국 분석대상국의 학자들이 그 틀을 받아들여서 논쟁하는, 그래서 한국경제의 현실을 훨씬 모르는 학자들이 만들어내는 이론을 수용해서 다듬어내고 논쟁하는 구도, 이런 것이 뿌리깊은 학문풍토가 아닌가 해요. 이것을 극복하려면 상당히 요원하겠지만 논문을 쓸 때 뭔가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를 여러 매체에서 고무해주고, 학계에서는 그런 시도를 포상해주는 풍토가 있어야 한다고 봐요.
학문평가의 문제점과 개선방향
사회 대외의존성 극복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생산하는 학문이 우수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해요. 그런데 우수한 학문이 무엇이냐를 따져보기 위해서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평가씨스템에 대해서 한번 짚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학진이 학문평가에서 사실 권력기관화하고 있는데 이제부터는 평가의 문제, 그중 학진의 평가에 대해서 짚어보면 어떨까 하는데요.
임형택 학진의 평가란 여러 분야의 학술단체에서 자율적으로 발간하는 학회지, 그리고 각급 연구기관에서 간행하는 학술지를 대상으로 교육인적자원부 산하의 학술진흥재단이 나름의 기준을 정해서 평가하는 방식이지요. 이게 당초 강제성은 없다고 하지만 평가에서 제외되거나 저급한 평가를 받고 보면 아무리 탁월한 학술적 내용을 담고 있고 우수한 논문이라 하더라도 교수 각자로 말하면 연구성과로 인정받지 못하며, 학회는 또 지원에서 불이익을 당하게 되지요.
사회 학진의 평가방식이 뭐고 거기에 대응하기 위해서 학자들이 어떻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지, 또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를 먼저 설명해야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울 것 같네요. 지금 학진이 시행하는 학술평가제도는 국내 학술지에 등급을 매겨서 학진의 등급에 오른 ‘등재 학술지’, 그 아래의 ‘등재 후보지’ 등에 논문이 실리면, 그 집필자에게는 학진의 연구지원사업에서는 물론이고 개별 대학들에서도 신규채용이나 승진 등에서 높은 평점을 매기도록 유도하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까 많은 학회들이 자기 학술지를 이 두 등급에 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개별 교수들도 등재지에 논문을 싣기 위해 애쓰지요. 그런데 여기에 부작용이 많고 교수사회에서는 불만이 크죠.
신정완 학진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SCI(Science Citation Index,과학논문인용색인)급 논문 틀을 도입하고 있는데, 국내 학술지의 경우에는 발간 주체인 학회의 외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정하는 측면이 있어요. 예를 들면 회원이 얼마나 되느냐, 회원의 범위가 지방적이냐 전국적이냐, 학회지가 정기적으로 발간되느냐, 논문의 탈락률이 얼마나 되느냐 등이죠. 전국적으로 표준화된 지표를 정하려면 이런 방법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 문제점을 지적하면 여럿 있습니다. 학회의 외형적인 규모가 학술지의 질을 담보해주는가의 문제, 논문탈락률의 조작가능성 문제 등이 있죠.
사회 『교수신문』 10월 4일자에 실린 어느 분의 기고문을 보니, 어떤 학회는 평가에 필요한 서류를 조작하기도 한다는군요. 예컨대 방금 말씀하신 탈락률의 경우 탈락된 논문이 없는데도 서류상으로는 탈락된 논문이 존재한다든가, 학술지가 제때 발간되지 않았는데 1년 전 날짜로 인쇄해 마치 제때 발간한 것같이 조작한다는 거예요. 이는 어느정도 학계에 알려진 일이기도 하죠.
신정완 게다가 동일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의 질도 천차만별일 수 있는데 아주 우수한 논문과 최소 가이드라인을 겨우 통과한 논문의 차이가 확인이 안된다는 문제가 있어요. 어떤 학자의 경우는 등재지에 충분히 게재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신생 학회지에 논문을 발표할 수도 있단 말예요. 그런데 그런 것은 점수가 거의 빵점이고 아예 안 쓴 것이나 비슷하게 취급돼요. 이 문제의 해결책은 질적 평가일 텐데 전국적으로 표준화된 질적 평가의 기준을 만들 수는 없다고 봐요. 그래서 학진이 등재지 평가정책을 이제 그만 하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겠는가 생각해요. 왜냐하면 몇년 동안 등재지 평가를 하면서 대강의 가이드라인은 정해졌거든요. 대학당국자나 교수들이 대충은 알고 있단 말예요. 학계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맡겨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해요. 개별 학교 수준에서 그게 어렵고 어느정도 표준화가 필요하다면 각 분야의 대표적인 학회에서 가이드라인을 정하도록 하면 학문분야별 특성이 반영될 수 있습니다. 자연과학의 경우에는 최신 주제를 가지고 좀더 연구를 진척시킨 경우가 SCI급 논문들이라면, 인문학의 경우에는 호흡이 긴 저서 형태로 핵심 연구성과가 나올 수도 있어요. 그리고 번역 같은 경우에는 거의 평가가 안되는데 어려운 책, 중요한 책에 대한 좋은 번역도 어설픈 책을 쓴 것보다 나을 수 있기 때문에 각 분야의 학회들이 번역평가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주고 대학들이 참조할 수 있게 하는 것도 방법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서경희 연구실적 평가의 기준이 지금처럼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학문의 특성이나 연구자가 속한 대학의 특성이 세심하게 고려된 것이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번역이 연구업적으로서 지금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인정되어야 한다는 점을 저는 강조하고 싶습니다. 외국문학 전공자로서, 그리고 교육현장의 실질적인 필요에 의해서 번역의 중요성을 특히 절감하게 됩니다. 영미문학의 고전이나 영미문학 교육에 필요한 다양한 참고서적을 훌륭하게 번역하는 일은 연구논문을 쓰는 것보다 사회적 영향력이 더 큽니다. 흔히 번역을 제2의 창작이라고들 하는데 번역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아요. 그래서 출판된 번역의 질을 평가하는 공정하고 엄밀한 제도도 갖춰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번역이 중요한 연구실적으로 인정된다면 지금 우리 사회의 부실하기 짝이 없는 번역문화 풍토 전반을 개선하는 데도 자극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회 제 주위를 보면 인문학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느냐, 호흡이 길게 몇년에 한번 좋은 논문이 나오면 그만이다 하면서 평가 자체를 부정하려는 극단적인 경우가 있어요. 또다른 극단은 SCI든 학진의 요구든 그 기준에 맞춰서 일정한 양을 열심히 채우려고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지금 학진에서 주도하고 있는 학문평가가 학문의 질적 수준을 과연 높여주고 있는가, 아니면 논문의 양적인 수만 증가시키는 것에 그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학술평가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얘기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정완 비활성화된 부분, 연구를 거의 안하는 부분에서는 학진의 평가가 자극을 주는 면이 있고, 그래서 최저수준을 높여주는 효과는 있다고 봐요. 아주 탁월한 연구자의 경우는 자기가 하던 대로 하면 되니까 신경을 안 써도 되겠죠.중간에 있는 대다수의 학자들은 자극이 되기는 하지만 그 틀에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연구방향을 일정하게 왜곡시킨다고 할까요, 본인의 지위가 불안정하다거나 학교의 구조조정 압력이 강화된다거나 할 경우에는 흔들릴 가능성이 있겠죠.
서경희 학진에서 등재 학술지, 등재 후보지 해서 등급을 매기는 것들이 게재논문의 최소기준을 만족시키게 하는 순기능이 있다는 데 동의합니다. 영문학 쪽의 얘기를 하자면 기존의 논문들 가운데 사실 형식면에서나 내용면에서 함량 미달의 것들이 많았거든요. 그리고 한가지 덧붙이자면, 학진이 2001년부터 지방대 육성지원이나 보호학문 시간강사 지원과 같은 일부 연구지원사업에 여성연구자 우대조항을 신설하여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한 전향적 조치 등에도 점수를 줄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학진의 평가가 질을 담보해주지 못한다는 데 있어요.A급 등재지에 실리는 논문들 사이에도 질적 편차가 큰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겁니다. 논문심사위원이나 편집진의 수정요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채 부실한 논문이 그냥 실리는 경우도 있고요. 또 하나의 문제점은 퇴직하는 교수의 정년기념논문집이나 특정주제의 단행본 논문집에 기고한 경우, 실제로 논문을 쓰는 데 드는 품은 똑같은데도 학술지 게재 논문에 비해 형편없는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이죠. 실제로 그런 논문이 연구업적으로 인정받는 비율이 등재 학술지 게재 논문의 삼분의 일 정도밖에 안되니까 아닌게아니라 좀 억울한 생각도 들더군요.(웃음)
사회 그 점에서는 창비도 억울합니다.(웃음) 공들여 쓴 논문들의 반향은 크지만 창작물이 실리는 잡지라 해서 등재후보로 신청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잖아요.
임형택 두 분 말씀에 대체로 동의하지만 저는 학회지 평가를 비롯해서 업적 평가가 큰 틀에서 순기능이 없지 않다고 생각해요. 객관적으로 논문의 생산성을 배가시켰을 뿐 아니라 질적 상승의 면에서도 기여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죠. 학술지나 학회지 들은 심사 절차를 거쳐서 논문을 싣게 마련이고 심사가 전적으로 공정하게 이루어지긴 어렵지만, 저는 어쩌다가 여러 학회나 학술기관의 편집위원이 되어 심사과정에 종종 참여하는데, 학자들은 그래도 양식이 있어서 공정을 기하려 노력하기 때문에 심사를 통해 걸러내는 기능을 상당히 하게 돼요. 문제는 형식적이고 부적절한 기준들을 없애고 역기능을 최소화해서 순기능을 살리는 데 있겠지요. 가령 학회의 규모를 평가기준으로 제시해서 학회들이 몸집 불리기를 하는 웃지 못할 작태도 보였는데 소규모의 연구회에 대한 배려도 많이 있어야지요. 여기에 관건은 계량적 평가 위주에서 질적 평가를 고려하는 것입니다.
사회 저도 학진 같은 데서라도 평가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문제는 등재지와 등재 후보지가 한번 정해지면 권력화한다는 것이죠. 한번 등재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 잡지에 글을 싣고 싶어해요. 그래서 학술계에서 굉장한 권력이 되는 거죠. 물론 몇년에 한번씩 재심사를 해서 바꿀 수도 있지만 그것이 쉽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학진 평가의 문제로 먼저 다른 식의 학술발표를 줄이게 한다는 것을 들 수 있고요. 또 하나는 젊은 교수들, 갓 취직한 조교수라든가 전임강사, 정년 보장받기 전까지의 부교수까지는 이것에 굉장한 부담을 느껴요. 젊은 동료 교수들을 보면 학교 일도 많고 승진평가의 기준도 점점 높아지고 등재지에 논문도 실어야 하니까 이런 과정에서의 스트레스가 엄청나서 과연 학문생산, 질적으로 우수한 논문을 생산할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임형택 조금 얘기가 다를지 모르겠는데 나는 대학교수를 연구에 주력하는 교수, 강의에 주력하는 교수, 학교 경영 및 행정에 주력하는 교수 등으로 기능분화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사실 모든 대학성원이 연구에 매달릴 필요는 없어요. 논문은 좀 못 쓰더라도 영어교육을 잘하는 영문과 교수, 교양국어나 작문을 잘 지도하는 국문과 교수도 필요하고요. 교수에 대한 평가에 논문이란 단일기준만 적용할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사회 우리나라의 대학이 모두 같은 모델을 택해서 교수들이면 어느 대학이든 다 연구교수이고 사회봉사도 잘해야 하고 가르치기도 잘해야 한다는 식인데 개별 대학의 조건은 다 달라 실상은 그럴 수가 없잖아요. 이것이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서경희 실제로 그렇게 다 할 수가 없어요. 제가 처음 지방대학에 가니까 강의시간이 18시간이었는데 제가 많은 편이 아니더라고요. 지금은 줄어들었는데 그 줄어든 계기가 교육의 내실화 차원에서의 교수충원이나 내재적인 필요와 요구에 의한 것이 아니고, 중간에 대학평가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말하자면 강의시간을 많이 맡으면 평가에서 점수가 깎이니까 줄어든 겁니다. 강의시간은 줄어들었지만 행정체계라든지 연구지원체계가 너무 미비하기 때문에 연구라는 것은 완전히 개인의 투철한 의지와 헌신에 의지할 수밖에 없고 전반적으로 연구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연구업적을 내라고 요구하고, 그것도 등급을 매겨서 예전에는 교내 논문집에 실린 논문도 인정해주다가 그것을 점점 없애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어요. 그리고 더 우스운 것은 학령(學齡)인원 감소로 인해서 신입생 충원이 안되는 싯점에 이르러서는 학문의 특성이나 자율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단 학생 모집이 잘되는 쪽으로 학과나 학부를 붙였다 떼었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학문생산이라는 것이 원활하게 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죠.
임형택 모 대학의 신임교수 채용에서 SCI급 학술지에 수록된 논문이 없으면 국내 학술지에 발표한 성과가 아무리 우수한 지원자라도 탈락시킨 것을 보았어요.SCI라는 국제 기준을 절대적 잣대로 삼은 것이죠.SCI의 인용빈도 평가는 얼마나 타당성이 있나요?
신정완 지금의 정량 평가보다는 나은 것 같아요. 지금은 외형을 중심으로 해놓고 여기에 일단 들어가면 똑같이 대우해주는 것인데, 그래도 많이 인용된 것들은 비교적 좋은 논문일 가능성이 크거든요. 그런데 사실 미국에서는 SCI를 한국처럼 비중있게 고려하지는 않는다고 해요. 하나의 참고자료이지 우리처럼 임용과 재임용에서 핵심적인 고려사항은 아니래요.
서경희 국내 연구자가 동료 연구자의 연구업적을 상당히 등한시하는 문제도 있는 것 같습니다. 별로 읽지도 않고 영향을 받지도 않고요. 그래서 서로 인용하고 비판하는 씨스템이 도입된다면 국내 학자들 사이에 서로의 연구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그것을 의식해 논문의 질도 높아질 것이라고 봐요. 최근 영문학계에서는 우리말보다는 영어로 쓴 논문을 장려하고, 그것이 마치 논문의 질을 높이는 방법처럼 여기는 면도 없지 않아요. 물론 논문을 영어로 쓴다고 해서 논문의 질이 자동적으로 보장되지는 않겠죠. 어떤 언어로 논문을 쓰든간에 국내 학자들이 서로의 연구업적을 인용하고 지적하고 비판해주는 장치가 아주 필요하고, 또한 연구자들도 국외 연구동향뿐만 아니라 국내 연구자들의 연구동향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는 점은 강조하고 싶습니다.
학술진흥재단의 비대화와 내부씨스템의 문제
임형택 학계와 대학에 대한 학진의 영향력은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이미 대단한데 앞으로 더욱 커질 것 같아요. 학진이 1년에 쓰는 돈은 대략 3천억이라 합니다. 이 액수에는 특수목적이라고 해서 BK21이나 누리사업(NURI,국가균형발전에 따라 지방대학에 여러 재정지원을 하는 사업)은 포함이 안됐다고 해요. 그리고 과학기술재단의 과학기술부문 지원은 내년부터 학진으로 통합된다고 합니다. 그런만큼 학진의 위상과 역할은 막중해지는데요. 앞으로 학진이 어떻게 자기 위상을 정립하고 학술진흥사업을 수행할지 대단히 중요하며, 우리들도 남의 일로 생각지 말고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봅니다. 사견이지만 두 가지 제언을 하고 싶어요. 하나는 학진 자체의 씨스템에 관한 사항인데 현재 학진은 사무 행정직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필요에 따라선 교수들을 동원하여 기획하기도 하고 각종 위원회를 구성해서 자문을 받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서는 체계적이고 창조적인 사고가 불가능하며, 위원회라는 것도 대개 내용을 약간 수정하는 선에서 이뤄지는 요식행위로 되고 말지요. 현재 학진은 정부로부터 위탁받은 돈을 적절히 분배하고 관리하는 역할로 만족하고 있는 셈이지요. 학진이란 조직체의 중심에는 우수한 연구인력이 들어서야 하며, 그래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학술진흥의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는 이 조직체는 스스로 두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다른 하나도 이와 직결되는 문제인데 학진 자체가 스스로 학문 발전을 위한 장기적 플랜을 기획하고 또 자기가 수행한 사업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큰 틀에서 방향을 잡아갈 수 있고 또 반성과 함께 스스로 궤도수정도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사회 물론 학진이 좀더 나아져야 한다는 데 이견은 없습니다만 지금 학진은 너무 비대해 있어요. 학문시장에 국가가 너무 개입한다는 거죠. 결국 국가예산으로 운영되는 기구인데 의료보험공단처럼 권한이 너무 집중될 경우에는 유지 자체에 더 많은 자원이 소요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또다른 경쟁기관이 있으면 모를까 자꾸 비대해지는 학진에 잘해보라고 얘기해봐야 얼마나 잘될까요? 물론 관심을 가지고 기술적으로 조금씩 개선해야겠지만 학진이 너무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문제이지 않은가 합니다.
임형택 이미 제도화된 틀 속에서 학진이 어떻게 순기능을 할 것인가라는 면에서 좀더 얘기를 하겠습니다. 저는 BK21사업에 타의로 관여하게 됐는데, 그 기간이 7년간이나 돼서 학진 사업으로는 꽤 긴 편이었어요. 마무리되는 싯점이 2006년 2월인데, 실제로 일을 해보니까 중간점검이나 관리도 비교적 잘되고, 또 긍정적인 의미도 있는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사실 BK21사업은 대학원생과 전임이 아닌 박사 소지자에 대한 지원이 중심이거든요. 이는 인문학 쪽에선 전에 없던 것이죠. 과거의 대학교수 중심의 지원과는 다른 대학의 연구자와 대학원 석·박사과정 학생에 대한 지원, 그 다음에 역시 학문 후속세대 양성, 그리고 지금의 학문 틀에서 벗어나서 학제간 연구라든지 새로운 학문의 틀을 만들어야겠다는 기본적인 취지는 저는 평가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일정한 성과는 있더라도 목표에 미달한 면이 있는데 학문의 틀을 바꾸는 이 과제가 과연 얼마나 달성되었느냐, 또 학문 후속세대 양성에서 얼마나 효과가 있었느냐 하는 것이죠. 이는 그걸 기획한 시기나 그것을 운영하는 대학 등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결국 자리 보장이 안되기 때문에 약간의 장학금으로는 우수한 인력을 끌어들이기 어려웠다고 보이고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교수의 적극적인 참여를 거의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것이에요. 지도교수가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으니 학생 역시 그냥 기존의 과 학문체계 속에서 머물렀단 말예요. 그런데 그것도 따지고 보면 계획단계에서 학진의 몇사람이 계획서를 내고 급조해 맞춘다든지 해서 참여교수들의 충분한 동의와 자율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못한 측면도 있고, 또 하나는 교수들이 현재의 틀 속에서 안주하려는 요인도 있지 않았는가 합니다.
신정완 후속세대 양성과 관련해서 저는 조금 이견이 있어요.BK21이나 기초학문 육성사업에서는 반드시 박사급 전임연구원을 뽑아야 하는데, 기초학문 육성사업의 경우 1년에 전임교수급은 3백만원 받고 전임연구원은 2천4백만원씩 받아요. 박사학위는 있지만 전임이 아닌 경우는 웬만한 프로젝트라면 불러주면 가고 싶어할 거예요. 공부하면서 한달에 2백만원 벌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자기의 연구주제가 아니더라도 가게 되고, 또 프로젝트를 따고 싶은 교수는 최소 인원을 확보해야 하니까 조건이나 전공이 맞지 않는 사람이라도 데려와야 하죠. 그래서 지원기간에는 박사 품귀현상이 생기지요. 후속세대 양성이라는 취지는 좋지만 연구진흥사업과 후속세대의 지원사업을 정책단위별로 분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봐요. 현재 학진에는 학술연구교수제도가 따로 있습니다. 팀에 소속될 필요가 없이 개인 연구계획서를 제출하고 소속대학을 정해 한달에 2백만원 정도 받는 거죠. 최대 기한은 3년이에요. 저는 이 비율을 늘려서 본인이 하고 싶은 연구를 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전임교수들에게 동기부여가 안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인쎈티브가 별로 없다는 거예요.1년에 3백만원 받고 꽤 많은 일을 해야 하며 연구책임자의 경우에는 행정적인 짐까지 져야 합니다. 또 연구팀이 꾸려져 박사급 전임연구원들이 들어오면 연구 프로젝트 종료 후에는 다시 새로운 프로젝트를 개발해서 전임연구원들의 고용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도덕적 책무감도 갖게 되죠. 공동연구원과 책임자에 대한 연구비 지원은 다소 늘릴 필요가 있고 특히 책임자에게는 프리미엄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전임 연구박사 몇명 이상 채용이라는 의무규정은 완화하고 그 대신 학술연구교수제도를 강화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임형택 학진의 비대화가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크다는 데는 저도 공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학술진작을 위한 지원규모를 축소하라거나 아예 중단하라는 것은, 체제를 부정하지 않는 한 말이 되겠어요? 적절한 투자는 그에 상응하는 효과를 본다는 것이 자본주의 원칙인데 학술부문에도 특수성은 있지만 기본적으로 적용된다고 봅니다. 투자를 하되 합리적인 방식을 찾아서, 최대의 효율성을 고려해서 해야 하고, 학문 주체의 자율성·창발성을 되도록 저해하지 않는 방향에서 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학진 자체가 두뇌를 가져야 한다면 부작용을 먼저 우려하기 쉬운데, 부작용을 사전에 차단하는 방안도 역시 두뇌가 고민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물론 학문연구가 일원화되고 지적 담론이 한쪽으로 치우치면 아주 나쁘지요. 학술진작이 다양하게 이루어지도록 현실성있는 대책을 함께 강구하지 않으면 학진 비대화의 부작용은 결국 피할 수 없겠지요.
사회 학진이 주도하는 대형 과제에 저도 연구자로서 참여해보고 기획해본 적도 있어서 말씀드리는데, 학진의 지원기능에서 첫번째가 후속세대 양성이란 말이에요. 저도 그것이 의의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전임들에게는 인쎈티브가 없다란 얘기를 잘못 꺼내면, 월급 받고 잘 지내면서 그 정도 써비스도 안하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얘기가 나오더라고요. 기득권자들의 얘기라는 거죠. 다른 한편 혜택을 받은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건 단기적인 복지 차원의 2년,3년 동안의 취로사업이고 생활비를 받으니 의미는 충분히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신분보장은 안되고 연구가 자유롭지 못해요. 신선생이 말씀하신 것처럼 실제로 보면 억지로 끼여서 자기의 연구주제와는 전혀 관계없이 월 2백만원 때문에 2,3년간 연구를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굉장히 혼란스러워지는 면이 있죠.
분과학문체제 속에서 학제간 연구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학진의 사업에서 학제간 연구의 활성화 의도는 저도 충분히 동의하고 공감해요. 일본에서도 COE(Center Of Excellent) 사업으로 중점대학을 키우려고 했어요. 일본 역시 대학개혁을 하려 했는데 기왕의 대학을 없애는 것도 전체 학문체계를 바꾸는 것도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별개의 유인책으로 대형 프로젝트를 주어서 학제간 연구를 하게 하고 이를 대학별로 나눠주었죠. 그걸 따낸 대학과 못 따낸 대학을 나눠서 선택적으로 집중 지원하겠다는 것인데, 기왕의 학문체계를 뒤엎으려는 의도가 분명히 있었어요. 그런데 기왕의 학문체계가 있으면서 별개의 사업을 또 하나 벌이니까 복잡해지더라고요. 우리의 경우 제가 경험한 바로는 다양한 사람들을 모아야 선정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여러 학문분야, 여러 학교 출신들을 불러모았지만 실제로 한 일은 각자의 학문연구를 합쳐서 단행본으로 내는 것이었죠.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것이 학문체계의 변화에 과연 유효할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학문체계의 변화라는 것은 원하는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집중적으로 노력해야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서경희 저도 학진의 기초학문육성지원사업 대형프로젝트에 해당하는 ‘영미고전문학 번역평가사업’의 공동연구원으로 참여한 경험이 있는데, 그 사업은 연구책임자 1명에 공동연구원이 무려 42명이나 되는, 말 그대로 대규모 집단의 공동연구였어요, 실제로 일을 하다보니 백선생이 말씀하신 그런 문제들이 생기더군요. 특히나 영미연같이 연구소도 아니고 사단법인도 아닌 연구회에서 연구비를 받는 프로젝트를 하다보니 전임이 아닌 상임연구원들에게 연구공간이나 장비를 제대로 제공해주기도 힘들고 연금을 주는 등의 생활보장도 해줄 수가 없었죠. 그래서 단기적인 복지 차원의 취로사업으로서도 미흡한 점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이런 규모의 공동연구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공동연구를 조직화하고 수행해나가는 방법과 원칙에서 시행착오를 겪은 것도 사실입니다. 어쨌거나 학진이 연구역량이 우수한 선도적인 연구자를 지원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인 추세는 공동연구나 학제간 연구 쪽으로 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취지는 정말 좋지만 분과학문이 정말 내실있게 다져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같이 해봐라 하면 사실 전문성이 없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겉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실속은 없을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분과학문이 너무 울타리를 견고하게 쳐서 자기 식으로만 하는 것도 큰 문제가 되겠지만, 자생력을 갖추기도 어려운 여건에서 똑같이 모여서 뭘 해봐라, 이를테면 영문학을 하는 사람에게 갑자기 지역학을 해봐라 해서 영문학자가 여기저기에 얼굴 내미는 것도 실속없는 경우가 많지 않나 싶어요.
사회 서선생이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만, 저는 기본적으로 지금의 학문체계에 문제가 있다고 봐요. 전지구화된 새로운 삶의 조건에서는 예전보다 복잡한 과제가 부각되고 그런만큼 분과학문의 벽을 뛰어넘는 시도가 자꾸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를 위해 학제간 연구, 공동연구를 해야 하죠. 그런데 일정한 방향성이 있어야지 지금처럼 연구비 따내기 위해 개별 연구의 성과를 모아내는 뷔페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학제간 연구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흔히 얘기되는 것이 지역학(area studies)인데, 미국의 예처럼 정책적 목표가 분명히 있고 이를 위한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 모인 경우는 그 나름의 성과가 있어요. 이와 달리 문제의식이 같거나 함께 문제를 설정한 사람들이 이를 규명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연구하는 경우에 지원해준다면 아주 이상적이겠죠.
신정완 이미 분과학문 체계에 익숙한 사람들끼리 모여 공동으로 무엇을 하기가 참 쉽지 않죠. 학제간 연구를 잘하려면 대학원 교육에서부터 프로그램이 있어야 해요. 정부의 지원도 학제간 연구실적을 내본 경험이 있는 학회나 연구회를 지원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임형택 그런데 기존의 분과학문 체계와 현 대학구조 속에서 학문의 틀을 바꾸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거든요. 벌써 언제부턴가 학문의 장벽을 허물자는 소리는 높지만 학제간의 연구를 지향한다는 시도가 답보상태 아닌가요? 그래서 기존의 구조에 무리하게 손대서 마찰을 빚어내지 말고 신학문이나 종합적인 성격의 학문은 연구소 제도를 활용하는 편이 효율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21세기 신흥 학문을 담을 연구소를 젊고 활력있는 연구자를 확보해 발전시키자는 겁니다. 이런 연구소는 교학 기능도 담당해서 차세대를 길러내야지요. 한국의 대학사회에서는 사례가 거의 없는 연구소 모델입니다. 물론 학교당국 혹은 정부당국의 적극적인 신뢰와 협찬이 없이는 애초에 불가능한 안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장차 학진은 유망한 연구소 육성에 역점을 두어 연구인력과 연구기획을 지원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정완 제가 듣기에 서울대 대학원의 과학사 협동과정은 연구활동을 굉장히 잘하고 소수 정예를 배출하기 때문에 취업이 잘되는 것 같아요. 정체성도 분명하고요. 그런데 지역학 같은 경우는 어떻게 연구를 해야 할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각종 교수를 모으기만 했고 각 분과에 있는 교수가 품앗이하듯이 참여한 측면이 있어요. 이것이 연구자 양성과정인지 지역 전문가 양성과정인지 불분명한 상태에서 지원이 끊기면서 유명무실해진 것 같아요. 몇몇 학교에 남아 있기는 하지만요.
사회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학과체계가 완고하고 안정되어 있는데 새로운 것을 할 경우에는 늘 불안정하죠. 과학사 협동과정도 문제가 있을 거예요. 어쨌든 지금 얘기되는 것이 분과체계에 대한 것인데 여기에서 근대학문의 역사를 제도적인 측면에서도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합니다. 현재 분과체계는 19세기 후반 서양의 학문체계를 일본 제국대학이 수용하면서 만들어진 것이고,이게 경성제국대학을 통해서 한국에 정착되었지요. 그때 종합대학은 유일하게 경성제국대학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전문학교였어요. 그런데 해방 이후 이 틀이 그대로 유지되고 미국의 대학제도가 적당히 가미되면서 대학정원의 증원을 위해 편의적으로 분과가 많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분과의 전문가만 키워서는 사회적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어요. 이런 식의 분과학문 지식이 유용하지 않다고 해서 대학개혁의 촛점이 학부제로 나아가는, 즉 분과학문 체계를 뒤흔드는 것이 되지 않았는가 합니다.
이제 주체적이고 세계적인 학문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맞춰 얘기했으면 합니다. 각자 분과학문 내에서 해왔던 작업,80년대 진보적인 학술운동 등이 과연 주체적이고 세계적인 학문을 추구하는 과제에 얼마만큼 부응했는가 또는 한계가 있었는가에 대해 얘기해보았으면 싶은데요.
주체적 학문생산이란?
신정완 주체적 학문생산에는 서로 연결되는 두 가지 큰 주제가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학자양성 씨스템의 주체화라는 측면, 다른 하나는 학문 콘텐츠를 어떻게 담을 것인가 하는 내용적인 측면이에요. 첫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많이들 공감하는 것 같아요. 큰 대학의 교수들일수록 미국에서 많이 유학했는데 그러한 미국유학 선호와 이해관계를 어떻게 깰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하나는 수요측면의 접근이 있을 수 있어요. 가령 국내박사 할당제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겠죠. 이게 너무 강한 방법이기 때문에 조금 고민스럽기는 하지만 단기적으로 실시하는 것은 고려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너무 강하다면 대학평가에서, 특히 대학원평가에서 국내박사 임용비율 같은 것을 평가기준에 넣는 방법이 있을 수 있고, 그 대학원에서 배출한 박사의 연구직 종사 비율도 평가기준으로 삼을 수 있겠죠. 공급측면의 접근으로는 대학원생에 대한 경제적 지원, 학문 후속세대에 대한 지원 등 여러 얘기를 할 수 있겠죠. 그런데 효과 면에서 보면 공급측면의 접근은 시간이 많이 걸리고, 교수들의 선호체계가 바뀌지 않는 한 국내에서 아무리 좋은 박사들을 배출해도 안 뽑으면 그만이라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단기적으로는 수요측면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경희 국내박사 할당제를 거론하셨는데, 저도 그 취지에 공감합니다. 전통적으로 어문계열에 여학생들이 많이 진학하는만큼 대부분의 영문학과 학부과정에 여학생의 수가 더 많은데요, 제가 자세한 통계는 모르겠지만 요즘 대학원에도 여학생들이 더 많이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교수는 매우 드물어요. 물론 영문학과의 경우는 여교수를 전혀 뽑지 않는 다른 학과들에 비하면 좀 사정이 나은 편이기는 한데, 그래도 아직 불균형이 심하죠.학문생산을 담당해야 마땅할 유능한 여성연구자들이 교수임용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현실은 반드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년부터 국공립대학에서 여교수 채용목표제가 시행되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2004년 현재 4년제 대학의 전체 여교수 비율은 15.4%고, 국공립대 여교수 비율은 그보다 낮은 9.9%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적어도 전체 여교수 비율과 같은 정도가 될 때까지는 ‘국공립대 여교수 채용목표제’가 지속되리라고 보는데요. 이런 예를 보더라도 강제적인 할당제가 일정기간 가시적인 효과를 낼 수는 있을 듯싶습니다. 그런데 저는 국내박사 할당제에 ‘국공립대 여교수 채용목표제’와 비슷하게 강제성을 부여하는 것은 무리라고 여겨지고, 대신 인쎈티브를 주는 식으로 권장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 교수임용시에 모교출신 비율의 상한선은 있지만 국내박사에 대한 법적 규정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국내박사를 임용하는 경우 어떤 식으로든 인쎈티브를 주게 되면 국내 대학원이 활성화되는 효과도 동시에 거둘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사회 수요측면의 접근이라는 것은 좋고 국내박사 할당제를 할 경우 대외의존성이 약화될 수 있죠. 그런데 문제는 그게 국제경쟁력이란 기준을 감당할 만한 수준의 학문으로 인정되겠느냐는 질문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신정완 우리가 학문을 주체화·세계화한다고 할 때 방식이 한가지는 아니지 않습니까? 예컨대 자연과학의 경우에는 추격 전략, 즉 이미 정해진 경로를 더 열심히 달려서 국제적 수준의 성과를 내는 것도 세계화 전략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주체적으로 발전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연구대상 자체나 풀어야 할 사회적 과제가 다르니까 국제적 교류에 너무 신경쓰지 말고 우리 과제에 충실히 대응할 연구자를 양성하는 것이 학문 주체화의 맥락에서 사실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분야도 있죠. 사회과학의 경우 소재주의로 빠져서는 안되겠지만, 국제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서양학자들이 못 보고 생각하지 않던 측면들, 그들이 다루지 않던 연구대상을 다루어야 하거든요. 저는 국내박사의 상당수가 대학에 취직하고 대학원 과정에서 논의되던 것들이 학문세계의 공론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면 학문에 대해서 더 진지한 자세를 갖고 연구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스웨덴 노사관계를 전공했는데 스웨덴 사민당은 다른 나라 사민당과 비교해 효율성과 형평성을 동시에 담보할 수 있는 독특한 정책을 많이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들의 정책요소들을 보면 대체로 신고전파 경제학에서 할 수 있는 얘기들이지요. 그러나 이를 어떻게 조합해내느냐, 즉 어떤 것을 취사선택해서 어떻게 만들어내느냐가 정말 중요하지요. 그러니까 영미경제학, 주류경제학을 패키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중에 우수한 것들을 조립하는 방식은 자기 실정에 맞게 해야 하는데, 스웨덴에서 가능했던 것은 사민당의 장기집권이라는 정치적인 조건도 있었지만 경제학자가 대부분 국내박사들이란 점도 있어요. 배우는 것 자체는 주류경제학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대학원 시절부터 자기 사회의 핫이슈를 의식하면서, 자기가 이 문제를 풀어내면 학자로서도 성공하고 사회적으로도 평가받고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 공부한단 말이에요. 그게 학자들의 연구주제에 일정한 지향성을 준다고 봐요. 그런데 우리는 학부과정에서 부실하게 공부하다가 미국에 유학가서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그걸 패키지로 받아들여 이식한단 말이에요. 이런 식으로는 완제품 수입밖에 안되기 때문에 선진학문의 요소를 많이 받아들이되 우리 나름대로 조립해보는 출발점은 최소한 마련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사회 학문의 수입대체는 그 정도면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세계적인 학문이라고 할 경우 수출이 돼야 할 것 아닙니까? 우리 문제를 잘 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을 가져야 하는데, 제도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즉 많이 인용된다든가 많은 관심을 끌게 하는 것이 중요하죠. 우리 문제를 제대로 본다는 것이 다른 지역의 문제를 보는 데도 유용하지 않으면 학문의 수입대체에 그치지 그 이상은 아니지 않을까 싶거든요.
신정완 산업도 수출용이 있고 내수용이 있잖습니까? 모든 학문을 수출용으로 발전시킬 필요는 없다고 봐요. 내수용 학문도 있을 수 있죠. 장기적으로 내수용 학문이 발전하면 다음에는 수출로 나아가게 돼요. 우리와 서구 사회가 갖고 있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죠.
임형택 글쎄요? 인문학을 하는 입장에서는 수출용이다 내수용이다 구분할 것이 아니고 학적 사고와 논리는 항시 인류보편에 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신정완 요즘 스웨덴 학자들이 논문을 영어로 많이 쓰는데 6,70년대까지는 안 그랬어요. 스웨덴 사회를 설계하는 데 기여한 사람들은 대학교수보다는 노동조합이나 당 차원의 연구자들이 많았고, 이 사람들은 다 내수용으로 연구를 했는데 성과가 좋으니까 영미학자들이 관심을 보인거죠.스웨덴적 특수성도 있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 나타날 수 있는 보편적 문제를 비교적 성과있게 스웨덴 학자들이 연구하니까 홍보를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관심있는 외국사람들이 영어로 소개를 했어요. 쉽진 않겠지만 우리 문제를 잘 해결하면,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국말을 배워서 소개하겠죠.
서경희 저는 전공이 영문학 중에서도 셰익스피어인데, 영문학의 창조성을 보여주는 대가로서 셰익스피어를 당연히 배우고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뭘 좀 제대로 가르쳐보려고 하는데, 영미권에서는 셰익스피어를 가르칠 것이냐 말 것이냐를 가지고 논의하고 있습니다. 제국주의 시절에는 일방적으로 셰익스피어를 배워야 한다고 강제하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신식민주의 식으로 셰익스피어 같은 것을 왜 가르치느냐, 고전을 운위하는 것이 오히려 후진적인 것이 아니냐란 식으로 되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 저에게는 주체성과 관련해서 셰익스피어에 대한 교습 여부도 굉장히 중요한 이슈로 다가와요. 영미연을 결성한 취지도 영문학 연구에서 ‘안과 밖’이 더이상 분리되거나 이를 이분법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고, 그것이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어요. 주체적 의식을 갖고 있는 학자들의 개별적인 연구도 중요하지만 조직화된 공동연구가 훨씬 효과적이라는 인식도 들어 있었지요. 정기적으로 일년에 한두 번 모여 개별연구자들이 논문발표를 하고 끝내는 식의 기존 학회와 영미연이 다른 점은 기본적으로 상설적 연구조직이 주가 된다는 것인데요.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분과활동을 토대로 한 월례발표회나 정기 학술대회를 통해 연구성과를 공유하고, 반년간지 『안과밖』을 통해 영미문학 및 문화에 대한 공론의 장을 열고 있습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고 개선해나가야 할 부분도 많지만, 주체적이고 세계적인 영문학 공부를 위해 노력하는 학문공동체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임형택 『안과밖』을 드문드문 보았는데, 영미문학에 관련한 연구와 담론이 아주 알차다고 느꼈고 지적 자극도 더러 받곤 했어요. 한국의 연구 현황에 비추어 문제의식이 높고 진지하다는 생각까지 들었고요.
서경희 그렇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웃음) 우리 문학이 아닌 외국문학을 연구할 경우 주체성이라는 면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런 것은 백낙청·김우창 선생을 비롯한 앞세대 몇몇 학자들이 우리 사회의 실천적·운동적인 과제 및 실행과 결합된 영문학 연구에서의 주체성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었고,70년대 이후로 그런 문제의식을 발전시켜나갈 수 있는 토양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민족문학론’을 출발점으로 ‘제3세계문학론’이라든지 ‘리얼리즘론’ 등의 주체적인 문학연구에 대한 시각을 정립하기 위한 노력들이 계속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실상 영문학에 관한 주체적 연구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공부하는 학자들 상당수가 학문 후속세대를 양성하기 어려운 대학에 가 있고, 더욱이 여성연구자의 경우에는 대학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아예 연구를 포기하기도 하는 등 우수한 인력이 사장되는 안타까운 사정도 있어요. 그리고 영미연의 경우 새로 가입하는 회원은 꾸준히 생겨나는 편이지만 실제로 중요한 사업을 벌이려고 하면 그런 사업을 책임지고 감당할 만한 역량을 갖춘 연구자들이 많지 않다는 것도 어려운 점이죠. 그래서 여러가지 일을 중복해서 떠맡아야 하는 부담이 큽니다. 여하튼 이런 여러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인 의식을 갖는 영문학 연구자라면 더욱 세계적인 수준의 담론형성에 참여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할 필요가 있겠죠.
사회 영미연뿐만 아니라 80년대에 떠올랐던 진보적인 학술단체운동은 다 그렇다고 해요. 젊은 세대가 그것에 관심없다는 거죠.
신정완 학술단체협의회 결성 초기에 학술대회 할 때는 수백명씩 모였다고 해요. 제가 학술단체협의회 운영위원장을 최근 2년간 했는데 지금은 억지로 모아도 몇명 안됩니다. 그런데 80년대 후반 우리 사회가 처했던 정치적 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이는 당연한 것 같아요. 예전에 제기된 이슈들이 많이 제도화되었기 때문에 학술운동의 필요성이 줄어든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당시 민족적이고 민중 지향적인 학문의 경우 대체로 맑스주의로 수렴됐는데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고 맑스주의에 대한 확신과 신뢰가 떨어지면서 전반적으로 관심이 약해졌죠. 그래서 80년대 학술운동이 현장과 밀착해 사회의 실천적인 과제에 민감하게 대응한 측면이 있었는데 그것까지도 같이 약화된 점이 있는 것 같아요. 한편,80년대의 진보적 학술운동 초기에 대학원생이나 시간강사 신분으로 적극 참여한 연구자들은 교수 수요 팽창과 87년 민주화로 인한 ‘특수(特需)’의 효과로 교수로 진출하기가 쉬웠어요. 그러나 90년대 들어 이런 특수는 소멸했고 후배 연구자들은 교수직에 진출하기가 어려워졌죠. 대학의 미국박사 선호는 더욱더 강화되어갔고요.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긴 하지만 80년대 진보적 학술운동의 경우에는 초기에 운동을 주도한 세대가 그 결실을 집중적으로 가져가고 나중에 참여한 후배들은 실리적으로는 얻을 것이 별로 없었죠. 이것도 진보적 학술운동 쇠퇴의 중요한 요인이라고 봅니다.
세계적인 학문을 위하여
사회 7,80년대 진보적 학문이 주체적인 것을 강조해서 어느정도 대외의존성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했는데 세계적인 학문에 대한 관심은 적지 않았는가, 그래서 결과적으로 지금의 위축이 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하지만 보편적 적용력의 측면에서는 문제가 있지 않았느냐는 거죠. 세계적 학문은 국제경쟁력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소위 국제경쟁력이라는 것은 국가 단위의 경쟁력에 관한 것이고, 부강한 국가가 되는 데 얼마나 기여하느냐 하는 것인데, 지금 이 좌담에서 잠정적으로 쓰는 세계적인 학문은 인간해방이란 보편적인 가치 실현에 합당한 학문이라고 봐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얼마나 인용이 되는가를 떠나서 다른 지역의 문제를 푸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 민족의 과제에 진정 기여하는 학문이라면 마찬가지로 전지구화의 영향에 시달리는 다른 지역 주민들의 문제해결에도 도움이 될 것이며, 심지어는 패권국 미국 국민의 왜곡된 의식을 일깨우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그럴 경우에 언어의 문제가 따르겠죠. 스웨덴 사례도 있습니다만, 자기들이 필요하면 번역을 하겠지요. 한때 박현채 선생의 책을 비롯한 진보적인 학문운동의 상당부분이 일본에서 번역되었어요. 그러나 아주 소수만이 번역된 것도 사실이지요. 그래서 앞으로 학진 같은 데서 우수한 논문들을 영어나 다른 외국어로 번역해 널리 알리는 작업도 지원했으면 합니다. 하여튼 한국어가 국제어가 아니니까 언어의 문제가 중요할 것이라는 거죠. 다른 한편 7,80년대 진보적 학문이 인용이란 기준에서 볼 때 문제가 있지 않았는가, 즉 소재주의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신정완 언어의 문제는 공감을 하지만, 진보적 학문이 너무 특수주의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세계화에 실패했다는 데는 이견이 있어요. 진보적 학문은 오히려 초기부터 너무 보편주의적으로 접근한 측면이 강했다고 봐요. 주류학문이나 비판적 학문도 마찬가지인데, 주류학문이라는 것이 1세계 지향적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3세계적 특성을 빨리 없애고 근대화하는 것에 그 촛점이 있죠.80년대 운동도 초기에는 정서적으로 민족적·민중적 요소가 있었지만 논쟁과정에서 보편주의적인 영향력을 가진 맑스주의라는 기성의 담론체계로 빠르게 흡수되어간 측면이 강했어요. 그런데 맑스주의 이론의 측면에서는 한국 학자들이 국제적으로 경쟁력이 없거든요. 그렇다면 오히려 한국사회의 특수성과 보편성이 다 들어 있는 애초의 특수주의적 문제의식을 더 끈질기게 천착할 필요가 있었다고 봐요. 물론 당시 상황에서는 실천운동의 지침이 필요했고 결론을 빨리 내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맑스주의 논리 속으로 급속히 흡수되어간 면이 있죠. 그런데 그 논리 속에서는 적용밖에 할 수가 없었단 말이죠. 주류학문과 반주류학문이 모두 다 보편주의에 포박되어 문제의식의 참신성과 현장성을 약화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임형택 한국문학이나 한국사는 사회과학 쪽과 사정이 비슷하면서 다른 것 같은데요. 지난 8,90년대의 학술운동을 돌이켜볼 때 한국사 쪽이 가장 활발했고 성과도 컸으며, 몇종의 학술지가 꾸준히 발간되어 그런대로 지속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관여한 민족문학사연구소도 건재하다고 봐야겠지요. 그러나 출범 당시의 기백이나 활력은 진작 떨어졌고 간혹 실망스런 모습도 보이는데 시대의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생각되긴 합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자기반성을 해보겠습니다. 사실 처음에 표방한 민족문학이란 개념이 퇴색하고 진보적 이념마저 자신하기 어렵게 된 것은 객관적인 상황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겠지요. 이런 상황의 변화에 대응하고 자기 혁신을 도모하는 시도와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확실한 학문의 논리를 세우지는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문화론적인 분석이나 탈근대주의적인 방향 등은 나름의 모색이지만 전반적으로 지리멸렬해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어요. 다음으로 연구자들 다수가 교수로 진출하고 주류 학계에 편입되면서 동화·희석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겁니다. 젊은 피의 주입으로 신풍이 일어나는 그런 변화를 당장 기대하기는 어렵지 않나 싶군요.
신정완 저는 국학이 앞으로 약화되지 않고 강화될 것이라고 봐요. 당장 통일 준비과정과 그후 통일문제에서 표준 국사를 어떻게 만들고, 표준어를 어떻게 설정할 것이냐 하는 문제 등과 관련해서 국학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수요가 많을 것이라고 봐요. 그러기에 국학이 사회과학 및 여타 인문학과 활발히 교류해 지적 토양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회 주류나 반주류나 둘 다 보편주의에 매몰됐다고 하셨는데, 보편주의가 이른바 유럽중심주의는 아닌지는 나중에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 같군요. 그런데 과연 국학을 더 열심히 하면 우리가 얘기하는 의미의 세계적인 학문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그것만 보장되면 모두 다 국학을 열심히 하면 되죠 뭐.(웃음) 경제학은 한국학과 관련해서 연구하면 되겠고요. 연세대의 경우 전략적으로 국학을 열심히 해서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저는 이게 너무 폐쇄적이고 소재주의에 치우치지 않나 우려하는 편이지만요.
서경희 보편주의가 서구중심주의가 아닌가 하는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사실 영미권의 학자들도 서구중심주의에 대해 반성적으로 문제제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령 해체주의나 탈식민주의처럼 ‘중심’에서 소외된 ‘타자’를 존중하는 이론들이 있기는 하지요. 하지만 해체론자들은 ‘중심’을 해체하는 데 주력한 나머지 정작 자기네들의 고전에 대한 관심이 후퇴하고 거기에 담긴 인간해방의 가능성, 그리고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발본적인 문제제기에는 무관심한 면을 보이는 듯합니다. 한국의 영문학자가 영미의 새로운 이론이나 담론을 비판적으로 읽되 셰익스피어나 D.H.로런스, 멜빌 같은 영미 고전에 담긴 해방적 요소를 살려내 읽는다면 주체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주체성’이란 문제의식
임형택 오늘 좌담에서 표방한 주체적인 것이 과연 무엇이고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이냐에 대해서 말해보고자 합니다. 주체적이라고 하면 곧 민족 주체를 생각해서 여기서도 민족주의를 자주 들먹이게 되지 않는가 합니다. 저는 학문상에서 주체라고 할 때는 인간 개인의 주체가 기본이고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즉 학문생산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학자 자신이므로 학자의 자아 자체를 일차적 주체로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죠. 문제는 학문하는 인간으로서의 자기 주체를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입니다. 위대한 학자로 손꼽히는 다산 정약용은 주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학문 총체는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자아를 확립하고,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라는 3부의 저작으로 천하국가를 위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한 학자로의 자기 확립을, 후자는 주체의 사회적 실천을 뜻하지요. 여기서 주체와 세계는 통일적으로 의식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체 수립에 바쳐진 육경사서에 대한 해석은 다름아닌 그의 경학인데 250권에 이르는 방대한 축적에 의해 구축된 것이지요. 그럼으로써 주체 수립이 성취되었다 하겠으나 그것을 곧 근대적 ‘주체탑’으로 상정하기는 어렵겠지요. 오늘 우리의 주체는 어디에 정초해야만 할까요? 지금은 다산의 시대와 같이 경전적 기반을 빌려올 수도 없고 정위치도 없다고 보겠는데, 요는 자신의 학적 역량을 어떻게 키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기에 양면의 치중처가 있다고 보는데 자료적 측면과 이론적 측면입니다.“고리장이는 죽어도 버들가지를 물고 죽는다”는 속담처럼 인문학에 종사하는 자는 텍스트에 생사를 걸어야지요. 전공하는 자료에 대한 해독력, 분석력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좋은데 학자의 기본적인 학문역량은 거기서 나오기 때문이죠. 다음은 이론적 장악력입니다. 식견은 능히 고금을 관통하면서 현실의 대국(大局)을 통찰해야 할 것이고, 논리는 그 방면의 일반이론을 소화해서 펼쳐내야 할 것이죠. 물론 이런 주체의 상(像)이 용이하게 수립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적어도 어디로 지향하느냐는 목표는 분명해야지 않겠어요? 자기의 학적 주체를 민족의 주체와 합일시키는 과제를 감당해야 할 일이고, 나아가서는 세계의 주체로 우뚝 서려는 이상도 망각해서는 안되죠. 학자의 주체가 불투명하거나 부실한 상태에서 민족을 논하고 민족주의에 빠져드는 경우 허황하거나 오도되기 마련이었고 앞으로도 이 점은 경계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신정완 저는 주체적 학문이라고 할 때 민족적 주체성 문제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민족적 주체성에 대해 남성주의적 사고, 민족적 남성주의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고, 또 계급주의적 관점에서 민족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주체의 다원성·복합성을 얘기하는 때가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국민적 교육체계를 가지고 있고, 학문활동에 사용되는 언어가 민족언어라는 측면도 있고, 국민국가 단위의 연구체계가 주는 규정성도 강하죠. 민족적 주체성을 얘기하더라도 우리 사회는 비서구적 측면보다 서구적 측면이 훨씬 강한데, 우리가 이미 충분히 서구화된 사회에 살고 있고, 또 서구화된 의식을 갖고 있는 주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봐요. 여전히 비서구적인 요소가 있다는 게 중요하다기보다는 서양과는 달리 식민지라는 시간적인 단절이나 공간적인 분단도 있어서 서구화·근대화 과정이 굉장히 특수하죠. 근대화의 역사가 지금의 삶과 미래를 규정하니까 그 특수성을 제대로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우리 사회도 서구사회가 고민했던 문제들을 갖고 있으니까 서구의 이론 자원을 생산요소로 가져와서 이음새가 아주 말끔해 보일 정도로 잘 끼워맞추는 작업을 일단 해야 한다고 보는데,이것도 안목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아주 어렵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아예 개념화가 되어 있지 않거나 서구 이론에서 포착되지 않은 측면을 일단 한두 개라도 개념화해야 하는데, 그 방식이 서구이론과 유사하더라도 어쨌든 개념화하다보면 나중에 새로운 이론이나 방법론으로 엮어질 수 있다고 봐요. 현재 그런 단기적인 전략이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임형택 신선생의 방금 ‘끼워맞추기’란 말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데 서구의 이론을 소화한다거나 자기화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표현을 바꿀 수는 없을까요?
신정완 끼워맞추기도 안목이 있어야 하거든요. 능력이 부족한 학자는 특정 이론을 패키지로 들여와 한국사회를 설명하려 하고, 설명이 안되는 부분들은 이후의 연구로 돌린다면서 포기해버리죠. 특정인의 이름을 거론해서 그렇습니다만 『교수신문』에서 ‘자생이론 20선’설문조사를 했더니 최장집 교수가 압도적인 1등으로 나왔더라고요. 그런데 그분의 저술을 보면 그분이 새로 만든 중요한 개념이나 이론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서구이론들을 취사선택해서 아주 정교하게 끼워맞춘 것인데 저는 그것이 흠이 아니라고 봐요. 거기까지 가기도 어려워요.
서경희 주체라는 것이 말로만 내세운다고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죠. 예컨대 북한에서 셰익스피어를 주체적으로 연구한다면서 나온 논의를 보면, 권선징악적인 요소만을 강조한다거나 셰익스피어를 봉건유습의 타파를 주장한 인민주의적인 작가로 지극히 단순화해서 받아들이고 있어요. 북한식의 편협한 우리식 주체 규정이나, 주체란 것은 언어로 구성된 일종의 허구라는 식의 서구의 최근 경향 모두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므로 주체에 대한 어떤 고정된 상을 만들어내기보다는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잃지 않되 전지구적 시각에서 영문학을 사고할 필요가 있겠고요. 또한 우리 문학과의 관련성 속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는 것도 이런 주체에 대한 모색에 중요한 자산이 될 듯합니다.
사회 여성문제, 페미니즘 문제도 있는데 다양한 주체 중에서 여성 주체는 학문을 하는 데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서경희 학문과 지식의 생산·재생산이 지금까지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져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겠습니다. 오랫동안 학문생산에서 소외된 주변화된 타자로서의 여성의 시각이 반영될 경우 기존의 학문대상과 연구방법, 가치 등을 새롭게 정의하는 다양한 대안적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고 봐요. 물론 여성의 시각이라고 해서 동일한 전체로서의 여성이 있다는 얘기는 아니고 계급이나 인종 등에 따라서 다양하게 나타나겠죠. 그리고 페미니즘도 갈래가 다양하고 각각의 강조점도 다 다르기 때문에 어떤 단일하고 통일된 관점을 상정할 수는 없지요. 영문학에서만 보자면, 페미니즘 비평은 주로 남성작가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는 영문학 정전(canon)에 문제를 제기하고 정전을 새롭게 재구성할 것을 주장한다든지, 이미 정전작가로 인정받은 여성작가를 재조명할 뿐 아니라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작가를 발굴하고 부각시키는 노력을 기울인다든지, 작품을 해석할 때 침묵하거나 억압된 여성의 존재와 목소리를 복원하고자 한다든지, 작품의 문학성을 평가하는 기준이나 가치의 문제를 새롭게 천착하여 이론화 작업을 벌이는 등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고, 이제는 상당한 영향력을 확보한 비평이론으로 자리잡은 듯합니다. 하지만 페미니즘이 영문학 연구와 교육의 기본틀을 얼마나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는지, 지식생산의 권력구조 및 인간주체의 생산·재생산 과정에 개입하여 얼마나 생산적인 변화를 창조해내고 있는지는 면밀히 따져봐야 할 것 같아요. 페미니즘이 주변부를 교묘하게 포섭하는 중심의 역학에 말려들어 서구 중심을 해체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강고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원래 기획과는 달리 페미니즘 자체도 제도화한 측면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성적 비판도 있는만큼 이론과 실천 면에서 좀더 쇄신이 필요하지 않나 합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여성연구자들이 각자의 연구와 교육 영역에서 여성적 시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다양한 대안적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고, 또 그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학문주체성, 국학, 그리고 민족주의
사회 더 따지고 들어가면 다양한 주체가 병행·공존하는 걸 인정하는 데 그칠 거냐, 아니면 다양한 주체들이 어떤 삶의 터전에서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볼 것이냐에 따라 입장 차이가 있겠지요. 그런데 국학이나 민족문제가 주어진 상황에 따라 더 중요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임형택 국학은 지난 20세기 산물인데 우리의 근대학문은 국학으로 출발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국어학, 역사학, 국문학 등이 국학에 의해서 발전했단 말이지요. 중국의 경우도 우리와 대동소이합니다. 근대학문이라면 진리의 보편성을 기본전제로 삼는다는 것은 상식인데, 국학으로 근대학문을 시작했다는 자체가 자기모순이고 정합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을 만해요. 하지만 근대국가라면 응당 민족자주가 기본요건으로 중요한 과제이고, 엄중한 민족위기 상황에서 자기정체성을 찾고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성립했기 때문에 국학은 그 학문의식이 근대적이며, 근대적으로 존재의미가 확고하다고 보아요. 그런데 지난 20세기 중반기를 지나면서 한·중 모두 국학의식은 쇠퇴하고 현저히 탈국학적 방향으로 나아갔어요. 그러다가 중국에서는 개방 이후 국학이 서서히 평가를 받는 모양이고, 한국도 90년대 이후 세계화의 흐름에 대한 역반응으로서 국학 혹은 한국학을 찾기도 합니다. 아까 신선생도 앞으로 국학의 위상이 상승하리라는 전망을 내놓으셨지만 저는 21세기 현실에서도 국학의식은 폐기하지 말고 잘 살려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20세기적 국학의 부활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먼저 20세기 국학을 냉정하게 한번 돌아보면 그 역사적 의미나 당위성은 십분 인정할 수 있지만 민족위기에 대해 수세적이었고, 그 이념적 기초인 민족주의는 자민족중심으로 편협한 성격을 띠었지요. 당시 제국주의국가들의 학문전략 및 학문성과에 견주어보면 ‘국학적 대응’은 당초에 승산 없는 싸움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땅과 이땅에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국학의식 혹은 민족의식을 폐기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내화시키자는 거죠. 그리고 엄청나게 달라진 상황에서 종래의 국학에 안주하지 말고 학문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과제에서 중요하게 고려할 점은 첫째 국학의 일국적 시각을 넘어서서 동아시아를 하나의 전체로 상호 관련지어 사고하고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 지역적 차원에 안주하지 말고 항시 세계보편을 염두에 두어 ‘세계적 지평’에 올라서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패러다임의 학문을 건설하는 데 바로 주체적 학문의 길이 있지 않을까요.
신정완 우리 사회에서 민족주의는 대중의 정서적인 면에서는 굉장히 강하게 작용하지만 학문적인 수준에서는 좀 약하다고 생각해요.7,80년대에는 민족주의 과잉이 문제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 민족주의는 여전히 중요한 화두일 수밖에 없고, 사회과학·인문학 쪽에서 관심을 집중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탈근대 담론이 근대사회의 여러 문제점을 비판하고 근대담론을 해체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저는 별로 강하지도 않은 우리 사회를 정신적으로 너무 무장해제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어요. 미국 같은 세계 최강국도 국민주의를 동원해서 효율적으로 세계전략을 만들고, 그런 전략하에서 학문을 배치하기도 하는데, 우리는 힘도 없으면서 스스로를 너무 자기비판하고 해체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거죠.
서경희 외국문학 연구자들이 피할 수 없는 숙제의 하나가 주체와 민족에 대해 거듭 반성할 것을 요구받는다는 점이라고 하겠는데요. 두 범주 모두 손쉽게 해체할 수도 없을 것 같고 또 두 범주를 단일화하고 강화해서 한반도의 통일이나 민족적 번영을 위한 도구로 활용하는 것도 위험한 발상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민족 범주의 과잉을 경계하면서 그것의 긍정적인 역할을 평가해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임형택 민족주의를 포기하면 일종의 정신적 무장해제라는 그런 측면이 있다는 점도 우리가 신중하게 생각해야겠네요. 그런데 한국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과장된 민족주의, 허황한 민족주의도 보통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웃음) 정말 우리가 냉철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점인데 민족주의적 정서와 담론이 과연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고 민족이익에 부응하는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사회 저는 민족문제와 민족주의는 구별해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민족문제를 민족주의적으로 대응해서 해결될 문제인가 하는 의문이 들어요. 그건 그렇고, 임선생님께서 아까 동아시아적 시각을 확보해야 한국학이 설 수 있다고 하셨고, 평소 국문학을 포괄한 동아시아학부로 전환하자는 주장도 하셨는데, 그게 대학에서 제도화되면 어떤 모습일지, 그리고 어떻게 세계적인 기준의 학문으로 발전하는 방편일 수 있을지요?
임형택 학부제 논의가 나왔을 때 학자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인문학 분야의 대학은, 기초교양을 폭넓고 다양하게 학습할 수 있도록 학부과정은 기초교양을 3년 정도 이수하도록 하고 그런 뒤에 전공학과를 자율적으로 선택하게 하며, 대학 4학년부터 대학원 석사과정까지를 통합운영하고 박사과정에서 전공을 세분화하는 방안을 주장해보았지요. 그리고 이런 착상과 관련해서 학부와 석사과정의 모델을 다양하게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한국문학예술학부, 동아시아학부, 혹은 동아시아역사문화학부 등을 학계에 개편방안으로 누차 제기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 반응이 없어 제풀에 맥이 빠진 꼴이 되고 말았어요. 지금도 개인적으로 이 주장은 그대로 갖고 있지만요. 대학원 학생을 지도할 때 한국 한문학이라도 일국적 한계에 스스로 묶여 있지 말고 동아시아적 시각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소용이 없어요. 동아시아적 시각을 확보할 기초가 전혀 안돼 있는데 어찌합니까. 그래서 학부과정부터 영어만이 아니고 중국어·일어 등도 가르쳐 동아시아 각국 문학에 입문할 기회를 제도적으로 마련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죠. 중국문학·일본문학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한국문학을 더 잘 보고 훨씬 풍부하게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동아시아적 시각을 확보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학문의 세계적 기준을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적 지평으로 올라서는 유리한 계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한 것이지요.
사회 여기서 정말 주체적이면서 세계적인 학문의 길이 가능하다고 확신하시는지, 그렇다면 그 근거를 어디서 찾는지 듣고 싶습니다. 저는 우리 학자들에게 그런 고민도 적고 자신감도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든 적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생산의 경험에 기반한 얘기를 들려주십사고 부탁드립니다.
서경희 주체적이면서 세계적인 학문의 길에 대한 고민도 적고 자신감도 부족하지 않은가라는 말씀은 바로 저를 두고 하신 말씀인 것 같네요.(웃음)각자의 경험을 얘기하라고 하시니까 말씀드리는 건데요. 주지하다시피 셰익스피어에 관한 연구는 ‘산업’이라고 불릴 정도로 전세계적으로 수많은 논문이 쏟아져나오고 있고 따라서 그동안 축적된 연구성과는 엄청나게 많습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온갖 이론들이 셰익스피어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할 정도로 셰익스피어 연구가 각종 이론의 각축장이 되었지요.따라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분석하려면 지금까지 나온 중요한 연구성과물을 대강은 챙겨 읽어야 하고 최근의 이론적 쟁점들도 파악해야 합니다. 게다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진공상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한 작품이 씌어진 문학사적 맥락과 역사적 맥락도 알아두어야 합니다. 물론 작품을 꼼꼼히 읽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겠지요. 또 완전히 독창적인 해석을 내놓으려는 거창한 목표를 갖지 않더라도, 작품의 전체적인 의미를 파악하면서 이런저런 비평이론이 내놓은 그럴듯한 해석들을 세심하게 가려읽는 작업은 정말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서구의 제국주의적 지배담론을 전복하고자 하는 탈식민주의와 같은 읽기 방법에 기대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가 참 어렵지요. 하지만 탈식민주의와 같은 방법론은 제국주의 담론에 대한 저항적 읽기로서의 의의는 있지만, 셰익스피어와 같은 고전에 담긴 해방적인 의미를 적극적으로 살려내어 탈식민의 힘으로 활용하려는 시도와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영미 고전에 대한 실제비평을 꼼꼼히 살피면서 그 핵심을 제대로 짚어내는 데서도 주체적이고 세계적인 학문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런 고민이 학술적 공론의 장에서 공유되면서 유학파·국내파 할 것 없이 활발한 논의에 참여한다면, 개중에 뛰어난 사람들이 주체적이고 세계적인 학문생산을 실현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몇몇 뛰어난 선배 영문학자의 경우는 실제로 주체적이고 세계적인 학문생산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기도 하고요.
신정완 아직 학문활동 경험이 일천해서 제 경험에 근거한 이야기를 하기는 어렵고요. 일단 우리 학자들이 국제적으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연구대상은 역시 한국사회의 구조와 역사겠지요. 아직 경험적 연구가 충분히 축적되지 않은 영역도 많으니 한편으로는 착실한 경험적 연구를 축적해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개념화·이론화의 시도도 많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후자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우리 학자들이 서구 학문에 너무 주눅들지 말고 야성과 패기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실제로 새로운 개념화나 이론화를 이루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일 텐데요. 이와 관련해서는 한국사회 연구에서 상당한 연구성과를 낸 중견학자들의 분발이 특히 중요할 것 같습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주체적 학문 실천의 구체적 성과물이 얼마라도 나와주는 것이 중요하죠. 그래야 학문 주체화 논의가 당위성을 강조하는 서론적 수준에서 벗어나 구체적 콘텐츠를 가지고 이루어질 수 있게 되겠죠. 이 문제와 관련해서 제가 우려하는 것의 하나는 그러한 능력있는 학자들의 경우에는 학계나 언론으로부터 원고청탁 등 많은 요구를 받기 때문에 연구에 전력투구할 시간이 부족하기 쉽다는 점입니다.잠재력있는 학자들을 소중히 여겨 이들이 중도에서 이러저런 일로 연구역량을 소진하지 않도록 학계와 사회가 배려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또 이런 연구자들이 장기적으로 많이 배출되려면 대학원 교육과정에서부터 새로운 개념화를 시도하고 새로운 설명방식을 시도하는 학생들을 격려하고 고무시켜주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합니다. 국내 대학원의 위기는 결국 교수들에게도 크게 손해가 되는 일입니다. 외국대학 학위자, 특히 미국대학 학위자를 과도하게 우대하는 풍토가 시정되어야 국내 대학원이 살고 능력과 패기를 겸비한 학문 후속세대들이 많이 배출될 것입니다.
임형택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주체적이면서 세계적인 학문이란 우리의 역사적 경험으로 비추어보면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 그대로 나가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우리의 선조들은 밖으로부터 학술사상을 수용하고 자기화해서 당시 세계 일류의 위대한 학문을 이룩한 사례가 많지요. 불교의 원효, 유학의 퇴계, 그리고 실학의 다산같이 말입니다. 이런 지적 역량이 우리에게는 잠재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학문주체에 대해 종주먹을 들이대는 피상적인 규율들이 창발성을 억누르고 학계의 자정력을 죽이는 사태가 계속되고, 진정한 학문의 성과가 사회적으로 냉대를 받고 외면당하면 어렵지 않겠어요? 사회적 성원이 중요합니다. 학자들 역시 자신의 연구 결실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평가되는가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지요. 요즘 매스컴에서 띄우는 것들은 유행과 시류를 좇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정말 고뇌의 소산이고 학술적 가치가 담긴 내용들은 조명을 받지 못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학문의 자율성
사회 끝으로, 우리 학문이 어떻게 기업·정부·시민단체 등 다양한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면서도 자율성을 지켜나갈 것인지, 간단히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신정완 한국사회만큼 대학 진학률이 높은 곳도 없으니 우리의 대학은 굉장히 많은 사회적 자원을 소비하고 있는 셈이에요. 그래서 대학의 교육과 연구의 수월성을 제고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지요. 우리 사회가 가진 풍부한 자원이 인적 자원뿐이니 대학에 대한 사회의 요구는 앞으로도 계속 많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대학개혁의 방향과 관련하여 정부는 주로 선택과 집중의 논리에 의존해왔는데, 이 논리가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는 영역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영역도 있을 수 있다는 데 유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컨대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중에서도 기초학문에 해당하는 분야의 경우에는 연구자들이 연구하고 싶은 대로 놓아두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어요. 그리고 대학에서 실시하는 교수평가나 대학교육협의회 등에서 실시하는 대학평가와 관련해서는 교육능력과 교육여건에 대한 평가 비중이 한층 강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대학이 교육중심대학·학부중심대학이라고 할 수 있고 대학재정의 대부분을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충당하면서도 교육능력·교육효과에 대한 평가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거든요. 대학은 일차적으로는 학생들을 위해 존재하는만큼 학생들을 성의있게 잘 가르치는 교수와 대학이 높이 평가되어야 해요. 그리고 학문의 주체화·세계화 문제와 관련해서는 서구의 선진학문을 빨리 추격하기 위한 ‘빨리 뛰기’도 중요하겠지만 ‘다르게 뛰기’의 가치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 사회의 모습은 구성원들이 만들어가는 것이고, 외국의 경험은 유용한 참고자료일 뿐이죠. 빨리, 그리고 다르게도 뛸 수 있는 연구자들을 가능하면 국내에서 많이 육성하는 데 관심을 많이 기울여야 해요.
서경희 세계시장의 논리와 경쟁력 담론의 영향 하에 학문의 자율성이 크게 위협받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학문의 자율성을 지키는 방법이 사회의 요구와 무관하게 외딴섬처럼 존재하는 변화의 무풍지대를 꿈꾸는 것이 될 수는 없겠죠. 또 외부 상황 탓만 하고 방관하고 있어도 전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거고요. 학문의 자율성을 지키는 문제에 어떤 방법이 정답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라고 봐요. 그 방법을 고민하는 과정은 왜 학문의 자율성이 필요한가, 그리고 학문은 어떤 성격을 갖는 것인가 등의 좀더 근원적인 물음을 동시에 묻는 것이어야 합니다. 학문을 하는 개별주체, 그리고 지적 협동과 상호비판이 이루어지는 학문공동체가 함께 끈기있게 모색해나가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할까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급격하게 변화할수록 학문 주체들이 현실에 대한 감각을 잃거나 현실의 요구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나아갈 방향과 대안을 모색하고 현실의 흐름에 개입하는 학문적 실천을 할 때 자율성도 확보되지 않을까 싶네요.
임형택 오늘 우리가 많은 이야기를 나눈 셈인데 아예 꺼내지도 못한 것들도 있어요. 끝으로 두 가지를 덧붙이겠습니다. 하나는 학문의 대중성·사회성의 문제입니다. 학문은 대중으로부터 격리되어 전공자끼리만 통하는 것이 되었어요. 전공자까지도 함께 읽지 않게 되는 사태가 일어나는가 하면 대중의 지적 관심에 맞추려는 글쓰기가 성행해서 인기를 누린다는 지적도 적지 않게 나옵니다. 저는 원칙적으로 인문학이 대중성과 사회성을 외면하고 대중으로부터 버림을 받으면 건강하게 살아남기 어렵다고 봐요. 그런 점에서 학자들은 글쓰기 방식에 유의해서 대중과 소통하고 사회에 유익한 학문이 되도록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 학문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항시 던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회주의 파산 이후 전개된 현실에 매몰되다보니 학문의 의미가 무엇인가, 학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에 대한 성찰을 할 겨를도 없이 쫓기고 있지 않나요? 교육과 학문의 문제를 정부당국·학교당국은 편의주의로 일관하고 교수들은 거기에 순응해서 정신없이 나서거나 아니면 반감을 가지고 냉소와 방관을 하고들 있지 않나요? 학문에 대한 근본적 물음에는 응당 민족과 인류에 대해 학문이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할 것인가도 중요하게 포함되어야 할 터인데 이에 대해서 거론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 좌담이 다같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회 좌담 첫머리에서 임선생이 창비에서 기획한 ‘21세기의 한반도 구상’ 같은 것이야말로 학문의 고유과제라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 점을 되새기면서 좌담을 마무리짓고 싶습니다. 대학교수들만이 모여 얘기를 나누었고 때로는 학진 평가 등 학계 내부에 한정된 문제에 논의가 집중된 감도 없지 않지만, 결국은 사회 전체의 창조적인 발전방향의 기초를 따져보는 논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과제를 제대로 수행한다면 이는 적어도 동아시아에서 일정한 반향을 일으키며 보편적 호소력을 키워갈 것으로 믿습니다. 이 좌담을 포함한 특집 전체의 기획에 참여하면서 일본·중국 등지의 지인들에게 우리의 취지에 어울리는 글들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거의 없다는 대답과 함께 창비 특집에 기대를 건다는 반응을 들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도 주체적이면서 세계적인 학문의 가능성을 찾는 우리의 노력이 각별한 의의를 가진다고 봅니다. 피로를 무릅쓴 긴 시간의 토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