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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병률 李秉律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가 있음. kooning@empal.com
무늬들
그리움을 밀면 한장의 먼지 낀 유리창이 밀리고
그 유리창을 조금 더 밀면 닦이지 않던 물자국이 밀리고
갑자기 불어닥쳐 가슴 쓰리고 이마가 쓰라린 사랑을 밀면
무거워 놀란 감정의 테두리가 기울어져 나무가 밀리고
길 아닌 어디쯤에선가 때 이른 눈사태가 나고
유물항아리 속에서 몇십 갑자를 돌고 도느라 마른 몸으로 도착한 우글우글한 미동(微動)이며, 그 얼굴에 쫓겼던 또 얼굴, 당신의 얼굴들
밀리고 밀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이름이 아니라
그저 얼룩처럼 덮였다 놓였다 풀어지는 손길임을
여즉 내 손끝으로 밀어보지 못한 갸륵한 시간임을
나비의 겨울
누군가 내 집에 다녀갔다
화초에 물이 흥건하고 밥 지은 냄새 생생하다
사흘 동안 동해 태백 갔다가
제천 들러 이틀 더 있다 왔는데
누군가 내 집에 다녀갔다
누군가 내 집에 있다 갔다
나는 허락한 적 없는데 누군가는 내 집에 들어와
허기를 채우고 화초를 안쓰러워하다 갔다
누군가는 내 집에 살다 갔는데
나는 오래 집이 싫어 한데로 떠돌았다
여기서 죽을까 살을까 여러번 기웃거렸다
누군가 다녀간 온기로 보아
어쩌면 둘이거나 셋이었을지도 모를 정겨운 흔적 역력하고
문이 그대로 잠긴 걸 보면
한번 왔다가 한번 갈 줄도 아는 이 분명하다
누군가 내 집에 불을 놓았다
누군가 내 집에서 불을 끄고 아닌 척 그 자리에 다시 얼음을 놓았다
누군가 빈집에서 머리를 풀어 초를 켜고 문고리에 얼굴을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