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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침묵과 생명

 

 

박형준朴瑩浚

1966년 전북 정읍 출생.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등이 있음. agbai@korea.com

 

 

 

1. 소풍은 걸으면서 바람과 잘 논다는 것

 

미국의 피아니스트 러쎌 셔먼(Russel Sherman)이 지은 『피아노 이야기』(이레 2004)라는 책을 보면 ‘듣다’(listen)라는 말이 ‘조용한’(silent)이라는 말의 철자를 바꾼 것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러쎌 셔먼은 캐나다의 작곡가 머리 셰이퍼(R. Murray Schafer)의 저서 『세계의 조율』의 한 대목도 인용하고 있다. “지구 최초의 실내악은 바다의 목소리, 바람과 물의 여러 화신, 그리고 대지와 초목과 숲의 속삭임과 신음이었다. 이 여러가지 목소리는 불가해한 것이었지만 우리에게 위안을 주었다. 생명의 신성한 근원에 대한 탐구에 증거와 신념을 제공해주었기 때문”(201면)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우리 귀와 영혼을 만족시키는 이러한 원시적인 자연음은 이제 “거대 도시의 기형적 부산물들이 온갖 소음의 증식을 촉진하는”(202면) ‘소리 제국주의’의 세계 속에서 그 존재가치를 상실하고 있다. 스트라빈스키가 열정적으로 예찬했던 “불과 한 시간 만에 시작되어 대지 전체가 쩌렁쩌렁 울리게 하는 러시아의 격렬한 봄”(201면)이라는 말은 이제 자연도감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예감 어린 추억이 된 것 같다.1

 

‘듣기’에 ‘침묵’이 들어 있는 것은 아이가 모체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생명이 되어가는 과정과 유사하다. 바위에 부딪히는 자연의 파도소리, 해질 무렵 골목에서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장난을 치는 개들의 낑낑대는 일상의 소리 등은 엄마가 듣는 소리이면서 아이가 자신의 주체를 형성해가는 과정이다. 산모와 태아 사이의 관계는 나이면서 타자이고 타자이면서 동시에 나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나와 타자를 분리하면서 통일적 주체를 염원한다. 침묵은 마치 임신한 여자처럼 주체와 타자의 혼란을 초래하지만 구획된 세계에 혼돈을 가져온다. 이렇듯 침묵은 아직 의미를 형성하지 못한 듯 보이지만 이곳과 저곳, 나와 너의 경계에 서 있음으로 해서 생명을 잉태한다. 이것은 침묵이 양자가 넘나드는 지대에 스스로를 위치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늘 통일적인 주체를 염원하지만 사실은 형성중인 주체 속에서 버텨나갈 뿐이다. 내 속에 들어와 있는 타자를 모르지만 그 요구 속에 충분히 담기기를 욕망할 뿐이다. 따라서 인간이란 형성 완료된 주체는 없고 형성중인 주체만이 있다. 침묵은 경계선상에 위치한 카오스이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 있고 융합되어 있는 존재의 미결정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와 탯줄로 연결된 아이는 어머니가 먹는 것을 먹고 아이의 똥은 어머니가 먹는다. 내가 너가 되는 미분화 상태, 음과 양이 나눠지기 이전의 태극 상태에 비유할 수 있다. 쥘리아 크리스떼바(Julia Kristeva)는 『시적 언어의 혁명』(동문선 2000)에서 이러한 물질이면서 물질을 넘어선 상태를 코라(Chora)적 상태라고 부른다. 어머니와 아이의 공생의 리듬, 억압, 반향, 언어 등이 코라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다. 어머니와 아이의 한몸 관계는 상상적 합일만이 아니라 실제 합일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호흡과 아이의 호흡이 일치되는 과정을 통해 아이는 생명이 된다. 그것은 의미론적 차원에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바다의 조류, 바람소리의 순환이라든가 하는 차원에서 우주와 일체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인간은 타자(어머니)의 언어를 환기시키려는 욕망이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정서적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메씨지를 수렴하고 이해하는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시인의 언어는 자연의 언어를 닮은 것이고 어머니를 닮은 것이기 때문에 인위성의 언어를 들어내려고 한다. 크리스떼바는 시인에게 주체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서 모성으로 합체되었던 시절을 재발견하라고 촉구한다. 그때 시인이 처한 경계인적 위치야말로 이곳과 저곳을 넘나드는 존재가 되며, 이럴 때 “인간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철학적 정언이 ‘있다’는 역설로 바뀐다. 시인에게 이러한 역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언어이며, 시인은 언어를 통해서 모성의 절대성을 ‘환유적 대체물’로 확보한다.

침묵은 이렇듯 자연의 원초음, 어머니의 뱃속에서 꾸르륵대는 물줄기를 닮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침묵은 결코 소리의 배제가 아니라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통로가 된다.

 

자식들 도시락 싸다 남은 김밥

몇줄 썰던 아내가 갑자기 소풍 가잔다

 

소풍은 걸으면서 바람과 잘 논다는 것

반드시 도시락에 김밥 싸가지고 가서

바람에게도 한입 먹여줘야 하는 것

 

아내가 평생 안치고 푼 쌀밥과

씻은 밥그릇 얼마나 되는가

아이 잘 배던 아내는 가난했던 젊은 날

한입이라도 덜기 위해 아이 많이 지웠는데

이제 몸에 통풍하는 나이 되어 맛난 것 만들어놓고 보니

낯선 바람 찾아서라도 한입 잘 먹여주고 싶은가 보다

 

맑은 봄날 시골 가 들길 걷다 나란히 앉았다

아내는 도시락 풀어서

김밥 한 개 멀리 바람에게 고수레하고

또 한 개 던지려다 말고 내 입에 쏙 넣어주었다

먹는 것이 전부이다시피 한 삼백육십오일 일생, 우리가

저마다 먹으러 이전의 세상에서 와 만났으나

서로 먹이지 못하면 이후의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자식들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소풍 끝내려는데 바람이 계속 불어왔다

–하종오 「소풍 가잔다」(『시와시학』 2004년 겨울호) 전문

 

부부가 맑은 봄날 들판에 앉아 있다. 들길에 나란히 앉아 바람을 느끼며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 그들은 그러나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듣고 있다. 이 시에서 침묵하는 것은 바람소리인가, 아니면 부부인가. 바람과 부부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의 몸으로 스민다. 화자는 아내를 생각하고 아내는 바람을 생각하고 바람은 자식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소풍 끝내려는 부부를 생각한다. 이 침묵의 풍경은 우리들로 하여금 자신을 앞서 있는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강화도와 서울을 넘나들며 시를 쓰는 하종오(河鍾五)의 최근 작업은 주목을 요한다. 시골과 도시의 풍경을 시화하는 그의 작업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일견 서울과 농촌의 단절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밑자락에는 그 경계를 넘나들며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침묵의 언어가 깔려 있다. 최근 시집 『반대쪽 천국』(문학동네 2004)이 그러하거니와, 위의 시 역시 그러한 경계가 시 속에 녹아드는 풍경을 보여준다. 이 시는 “걸으면서 바람과 잘 논다”는 소풍의 새로운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아이들 뒷바라지와 먹고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다 삶에 지친 화자와 아내는 맑은 봄날 소풍을 떠난다. 아마도 아내는 공부하는 자식이 안타까워 입맛을 돋워주려고 도시락에 김밥을 쌌을 것이다. 그러다가 몇줄 남은 김밥을 바라보다 마음 편히 소풍 한번 못 가본 자신과 남편을 생각했을 것이다. 이 시가 이러한 아내의 애처로운 처지를 긍정하는 것에 그쳤다면 사뭇 감동은 줄어들었으리라. 오히려 화자가 아내에게서 보는 것은 봄날 시골에 가서 김밥을 먹으며 가난했던 젊은날을 위무하는 장면이 아니라 낯선 바람 찾아서라도 한입 잘 먹여주고 싶은 모성에 있지 않을까. 아내가 평생 안치고 푼 쌀밥, 씻은 밥그릇이란 사실 아이 잘 배던 아내의 억척스럽고 스산한 삶을 말해준다. 그런데 아내는 몸에 통풍하는 나이가 되어 맛난 것 만들어놓고 보니 한입이라도 덜기 위해 지웠던 아이들이 자연의 바람 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시 속의 장면에 이르러 나는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나는 기쁨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원망하지 않는다. 들판에 핀 민들레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이 말처럼 통풍 들 나이가 된 아내는 자신의 삶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원망하지 않는다. 바람에게 한입 먹여주려고 들판에 김밥을 던져주다 화자의 입속에도 한 개 넣어주기를 잊지 않는 아내. 화자의 소풍이란 이런 아내와 함께 걸으면서 바람과 놀고 그 바람 속에서 자신들의 삶을 발견하는 행위이다. 화자도 아내도 침묵하고 있지만 그들 사이로 부는 바람은 그들이 서로 넘나들 수 있게끔 통로를 열어준다. 우리는 여기서 먹는다는 것, 혹은 먹지 못한다는 것이 대립각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통로로 들어가기 위해 ‘잘 노는’ 제의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너가 되고 너가 내가 되는 죽임과 살림이 한몸이 되는 광경 앞에서 우리는 시적 진정성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깨닫게 된다.

다소 평이하고 진부한 듯 보이는 시이지만 이렇듯 이 시 속에 들어 있는 풍경은 되풀이해 읽게 만드는 매력을 발휘한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 보면 벌레가 된 그레고르 잠자가 죽고 난 뒤 일가족이 전철을 타고 소풍을 떠나는 장면이 있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허위에 가득 찬 인간사회의 소통 불가능성을 쓰라리게 전해준다. 반면 하종오의 소풍은 인간과 자연, 도시와 시골이 서로 통풍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살고 죽고 느끼고 울고 매달리고 좌절하는 자연의 법칙이 늙어가는 아내의 몸에 통풍을 들게 하지만 그것은 결코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아내의 몸속의 통풍은 소풍의 원인이 되고 인간의 희로애락이 저 자연의 들판에 부는 바람 속에 있음을 절실하게 들려준다. 자연이 내 속에 있고 내가 자연 속에 있다는 어쩌면 평범한 진리가 설득력을 발휘하는 보기 드문 감동을 선물해주는 작품이다.

 

 

2. 호박을 끌어안고 씨앗을 잉태하는 시인

 

함민복(咸敏復)의 언어에도 침묵의 빛이 감돈다. 그 침묵은 갯벌의 진득진득한 힘에서 온다. 딱딱한 모든 것을 물렁물렁한 뻘길로 바꾸는 그의 시는 가히 생명의 신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갯벌의 말랑말랑한 힘을 믿기에 “맨발로/지구를 신고”(「숭어 한 지게 짊어지고」, 『말랑말랑한 힘』, 문학세계사 2005) 생명의 황홀 속에 동참한다.

이는 그의 최근 시가 세번째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창작과비평사 1996)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의미해준다. 그는 이 시집을 통해 자본주의 비판에서 보여주던 해체시의 영역에서 벗어나 가난의 공간을 따뜻한 사랑으로 껴안는다. 「꽃」에서 그것은 사람의 삶이 ‘전생과 내생 사이의 경계에 핀 꽃’이라는 인식을 통해 드러난다. 그 경계는 상처이면서 동시에 ‘꽃’이라는 긍정적인 세계이다. 시집에서 자주 언급되는 금호동 산동네의 고단한 서민들의 삶이 비관에서 긍정으로 바뀌는 것은 그 점을 잘 나타낸다. “똥차가 오니 골목에/생기가 확, 돕니다”로 시작되는 「금호동의 봄」을 따라가보면, 대파단을 든 아줌마가 코를 움켜쥐고 뛰어가고 숨 참은 아이가 숨차게 달려내려가고 목욕하고 올라오던 처녀가 전봇대와 몸 부딪쳐 비눗갑 줍느라 허둥대는 풍경이 이어진다. 함민복은 똥차가 오는 순간 금호동 골목길에 고여 있는 갖가지 냄새들이 한통속이 되어 인간의 냄새, 즉 ‘살내음’을 풍기는 모습을 잡아낸다. 「달의 눈물」에서는 “산동네의 삶처럼 경사가 져/썩은 내 풍길 새도 없이 흘러내리는/하수도 물소리//또 비린내가 좀 나면 어떠랴/그게 사람 살아가는 증표일진대”로 가난마저 낙천적으로 바라보려는 지순한 심성이 나타난다. 그러한 토대 위에서 태어난 시 「대나무」의 “행여 내 죽어 창과 활이 되지 못하고/변절처럼 노래하는 악기가 되어도/한 가슴 후벼파고 마는 피리가 될지니/그래, 이 독한 마음으로” 같은 시구는 깊은 울림을 준다. 독한 마음으로 연주하는 피리소리야말로 스스로가 상처난 삶속으로 들어가 상처와 하나되어 지순한 세계를 열려는, 굽힐 줄 모르는 희망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 환기시킨다.

그가 9년 만에 펴낸 새 시집 『말랑말랑한 힘』은 세번째 시집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한결 깊어진 울림에 기대고 있다. 그것은 우선 소재의 측면에서 보면 도시 외곽의 금호동 산동네에서 강화의 바닷가로 모습을 바꾸고 있다. 특히 자연에 대한 그의 애정은 일식처럼, “그림자도 빛반지를 저리 껴보는”(「일식」) 눈부신 서러움으로 빛난다. 추운 밤에는 머리맡에 두고 바라보던 호박을 품에 꼬옥 안아본다. 추위에 딴딴해진 호박이 그의 품안에서 물컹물컹해지며 봄의 씨앗을 잉태한다.

 

호박 한덩이 머리맡에 두고 바라다보면

방은 추워도 마음은 따뜻했네

최선을 다해 딴딴해진 호박

속 가득 차 있을 씨앗

가족사진 한장 찍어본 적 없어

호박네 마을 벌소리 붕붕

후드득 빗소리 들려

품으로 호박을 꼬옥 안아본 밤

(…)

 

봄이라고 호박이 썩네

흰곰팡이 피우며

최선을 다해 물컹물컹 썩어 들어가네

비도 내려 흙내 그리워 못 견디겠다고

썩는 내로 먼저 문을 열고 걸어나가네

–「호박」 부분

 

이 작품은 자연이 하나의 삶의 현장이 된 그의 최근 시경향을 압축해놓은 듯하다. 강화도의 단칸방에서 혼자 사는 그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머리맡에 호박 한덩이를 두고 바라다보면서 추운 겨울밤을 견딘다. 시인의 스산한 마음처럼 호박은 추위에 딴딴해져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속에 씨앗을 가득 채우는 견딤의 시간을 통해 물컹물컹해진다. ‘최선’을 다한다는 시어가 이 시집에서 간간이 눈에 띄는 것을 보면 그는 자연에서 사는 삶 또한 생활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는 사이 겨울은 지나간다. 그것은 벌소리와 후드득 내리는 빗소리라는 청각을 통해 환기된다. 그는 그런 밤 호박의 씨앗을 틔우기 위해 꼬옥 품에 안아본다. 그의 이러한 행위는 딱딱한 알을 품고 있는 갯벌의 새를 연상시킨다. 딱딱한 것, 혹은 딴딴한 것을 부드러운 생명으로 바꾸는 행위는 그의 최근 시가 생태시적인 면모를 띄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수씨 콤바인 타고 들어가 고기 싣고 나오는 얘기는

여차리 일부 뻘 얘기지만 뻘이 딱딱해진다는

너무 슬픈 얘기라 함부로 글을 쓸 수 없고

아버지 얘기는 그냥 시인데 뭘 제목만

‘인생’이라고 붙이면 되지 않겠어

 

형님, 한잔 드시겨

–「어민 후계자 함현수」 부분

 

강화도의 작은 어촌 여차리에 사는 어민 후계자 함현수와 화자가 술을 마시면서, 함현수와 자신의 말을 대화체로 옮기고 있는 이 시는 “숭어를 지고 뻘길 십리길”을 걸어나오면서 생기는 생활의 즐거움과 애환을 다루고 있다. 생생한 사투리체가 생활의 현장감을 한껏 살리면서 ‘숭어 타작’이라는 시어가 나타내듯, 삶과 생명이 어우러지는 한판 굿거리 장단을 신명나게 전해준다. 그런데 이 시는 마지막에 전환을 보여준다. 갯벌에 콤바인을 타고 들어가 숭어를 싣고 나온다는 얘기 속에는 환경오염으로 인하여 뻘이 딱딱해진다는 슬픈 얘기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궁벽한 어촌이라 하더라도 생활을 위해 자연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는 화자의 심정이 술을 건네는 어민 함현수의 “형님, 한잔 드시겨”라는 말과 오버랩되어 여운을 남긴다.

또하나 이번 시집에 눈에 띄는 특징은 짧은 시를 통한 깨달음의 언어를 들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어렵지 않은 생활어로 딱딱한 것 속에서 부드러운 것을 꺼내는 그의 짧은 시들은 생활이 녹아 있어 매우 쉽고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다만 때로는 단시에 대한 집착이 지나친 깨달음의 지경을 보여주어 가령 “소리에 어른이신 저 큰 말씀/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천둥소리」)와 같이 해탈로 나아가서는 곤란할 것이다. 이런 점은 그의 시가 처음 출발했던 도시 변두리에 사는 ‘우울씨’의 내면풍경으로부터 너무 멀리 떠내려온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던져준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의 밑바탕인 천진성의 시학이 다음과 같은 탄탄한 생명의 언어로 승화되어갈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돌에는

세필 가랑비

바람의 획

육필의 눈보라

세월 친 청이끼

 

덧씌울 문장 없다

돌엔

부드러운 것들이 이미 써놓은

탄탄한 문장 가득하니

–「돌에」 부분

 

 

3. 소비되는 자연과 죽음의 성찰

 

많은 시인들이 자연을 대상으로 하여 침묵의 언어를 되살리려 하는 것은 도시의 거리 속에는 침묵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서이다. 우리 시에서 생태문학의 성과가 요청되는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생태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생태계 질서의 파괴가 가져온 부정적 결과를 부각해 그 중요성을 말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건강한 생태계의 긍정적 효과를 보여주는 방법이다. 이는 생태계의 순환질서나 우리가 경멸하는 사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2

 

지하 구내식당에서

혼자 먹는 늦은 점심

상추쌈 아귀아귀 집어넣는다

혼자 하는 광합성이다

 

29층 화장실

멀리 한강은 아주 느린 하류

변기에서 움찔 놀란다

바다의 한 입이

여기까지 올라와 있다

–이문재 「천지간」 부분

 

이문재(李文宰)의 시집 『제국호텔』(문학동네 2004)에서 두드러진 상상력 중의 하나는 도시 속에 불쑥 출현하는 자연에 대한 성찰이다.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기술문명과 싸이버 세계의 확장, 유전공학 등에 맞선 생태적 상상력이 도시/자연의 인위적 대립각을 허문 상태로서 표현된다. 그의 생태시편은 많은 서정시인들이 집착하는 사라진 자연에 대한 비감어린 추억에서 벗어나 이미 생활이 되어 소비되고 있는 현재의 자연에 촛점을 맞춘다. 그는 자연을 미학적 대상으로 삼거나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삶의 메타포로 삼지 않는다. 대신 이미 우리 일상에서 소비되는 수평적 자연에 관심을 둔다. 이 점은 그가 의식적으로 생태시를 자기 시의 주요한 전략으로 삼고 있음을 예시해준다. 위의 시는 상품화된 자연을 소비하고 살아야 하는 현대인의 생활을 소재로 하여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지하 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며 상추쌈을 먹는 모습을 혼자 하는 광합성으로 본 시적 발상이 참신하다. 그래서 광합성을 한 화자가 29층 사무실로 올라가는 장면은 나무의 수직성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화자는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대신 바로 화장실로 향한다. 그가 광합성한 것은 살아 있는 생명으로서가 아니라 상품화된 것이어서 탈이 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문득 변기의 물속으로 불쑥 올라온 저 아래 한강의 느린 하류를 따라온 바다의 한 입에 놀란다. 훼손된 자연은 시인에게 결코 영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저 유리창 밖으로 내뿜은 담배연기가 성층권으로 빨려 올라가듯 무심할 뿐이다. 이문재의 이번 시집이 보이는 성취 중의 하나는 이와 같은 도시 풍경과 시인의 일상 등을 병치하여 생태문제를 도시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여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런 한편 생태시에 진력하면서도 자연과 추억에 대한 원초적인 감수성을 놓치지 않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시집 초반부의 작품들은 매우 서정적이고 언어적 감수성이 찬란하다. 가령,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번 더 피어 있다

눈부시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떼를 세어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

–「소금창고」 부분

 

이런 작품은 시운동 시절의 이문재의 초기시편을 떠올리게 만든다. ‘시린 바람’ ‘눈부시다’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젖은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 같은 이미지는 그의 무의식 속에 여전히 여리고 감성적인, 천생 서정이 원적(原籍)일 수밖에 없는 예민한 시적 체질이 관류하고 있음을 일러준다.

이문재가 자연에 대한 추억과 생태적 시선을 한 시집 안에 공유하고 있는 반면 김지하는 뚜렷한 자신의 시론을 통해 생태시학의 한 전범을 나타낸다. 최근 시집 『유목과 은둔』(창비 2004)에서 김지하는 더이상 시에 문학적인 환상을 덧씌우지 않는다. 최근에 나온 산문집 『생명과 평화의 길』(문학과지성사 2005) ‘머리말’의 “시는 계속해서 배나 비행기나 차 속에서 메모되고 또한 허름하고 쉬운 형식으로 계속 발표될 것”(8면)이라는 말을 참조해본다면 그의 시적 전략은 지구 문명의 기준, 생명의 패러다임을 촌철살인의 깨달음으로 전해주는 데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시집 제목을 역설화하면, 그러한 원대한 생명의 패러다임마저도 ‘유목’ 안에 ‘은둔’이, ‘은둔’ 안에 ‘유목’이 소통하지 않는다면 감동이 배제된 시적 담론으로서 우리에게 기능할 우려가 있지 않을까. 길 위에서 허름하게 씌어지는 “쉽고 허름한 형식에/서늘하고 신령한 내용!”(「내 시의 스승은 조형 다음에 또 이형」)이라는 그의 시학은 아직 생명운동의 절실함을 체화하지 못한 나 같은 독자에게는 “생명과 평화의 길 강연”(「기꾸지」)에 억지로 초대되어 끌려나온 것처럼 시집이 강연장의 축소판 같은 느낌마저 준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시는 대가의 유목적 삶이 얼마나 은둔, 즉 침묵을 바탕으로 하여 형성된 것인가를 절실하게 깨닫게 해주어 선입견을 교정시켜준다.

 

일요일 한복판에 홀로 앉아

아무 위안도 없이

 

술도 담배도 몽상도 없이

아내만을 기다린다

 

와선

아무 말도 없을 것이다

 

다만 밥을 지어주고

함께 뜸뜨러 여의도로 갈 것이다

 

그뿐

그러나

 

내겐 그밖에 아무런

할 일이 없다

 

(…)

 

아아

예순넷

 

그렇다

 

죽음이 선풍기 근처에 와

빼꼼히 날 쳐다보고 있다

 

그렇다, 죽음.

 

그밖엔

아무것도 없다.

–「선풍기 근처에」 부분

 

이 시는 모든 것이 멈추어 있으면서 동시에 움직이고 있는 상태를 보여준다. 이 시에서 죽음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삶 그 자체다. 러쎌 셔먼을 빌려 말하면 시인은 “무의 상태로 돌아가 스스로를 창조”(『피아노 이야기』, 207면)한다. 일요일날 시인은 선풍기가 돌아가는 방안에 홀로 앉아 시골 간 아내를 기다린다. 그런데 계절은 어느새 여름과 가을 사이에 있다. 생명과 죽음이 겹쳐 있는 그 지대는 창에 어른거리는 흐린 하늘이라는 시행의 도움을 얻어 아무렇지 않게 표현된다. 그런데 그가 앉아 있는 방에 놓여 있는 선풍기의 날개는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멈추어져 있는 것인가. ‘여름과 가을 사이’와 ‘흐린 하늘’은 시인이 자신이 속한 시간의 지대를 명명한 ‘일요일 한복판’과 그 속에 ‘홀로 있음’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계절의 절정과 조락이, 격정에 가득 찬 삶의 여정과 은둔의 침묵이 한 공간에 있는 이 시의 ‘사이’ 속에는 아내를 처음에는 ‘내 애기 엄마’로 부르다가 나중에는 ‘아내’로 부르는 시인의 복잡한 심정이 뒤섞여 있다. 시가 진행됨에 따라 ‘홀로 있음’이 강조되면서 그는 오직 ‘아내만’을 기다린다고 쓸쓸하게 털어놓고 있지 않은가. 아내는 시골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지만, 시인은 이미 아내가 돌아와 자기와 함께 보낼 시간을 더듬고 있다. 아내가 간 곳이 친정인지 시댁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시인이 ‘시골’이라고 한 점을 참작하면 ‘시골’은 존재가 창조되는 곳, 즉 그곳은 생명의 근원지임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시인은 시골에 간 아내를 통해 과거의 추억 속에서 방 안에 앉아 미래를 바라본다. 그러나 그 미래는 “아무 위안도 없는” 침묵으로 감싸여져 있을 뿐이다. 아내가 돌아와 시인에게 해줄 일이라곤 아무 말 없이 밥을 해주고 뜸뜨러 여의도로 가는 길에 동행해주는 정도에 불과하다. 시인은 이제 늙어서 책을 읽으면 두 눈이 쓰라리고 글을 쓰든가 먹〔墨〕을 잡으면 정신이 왼통 어지러운, 그 생각 자체도 어지러운 ‘아아 예순넷’이다. 시인은 그것을 새삼 ‘그렇다’라고 강조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득 전환이 일어난다. 시 안에서 한 번도 출현한 적 없는 선풍기가 돌연 등장하는 것이다. “죽음이 선풍기 근처에 와/빼꼼히 날 쳐다보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시인이 창밖의 흐린 날씨를 보며, 문득 계절이 여름과 가을 사이에 있는데, 또한 늙은 자신은 아내를 기다리고 있는데, 의식하지 못한 사이 방안에 선풍기를 켜놓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날은 쌀쌀해져가는데 “술도 담배도 몽상도 없이” 빈방에 홀로 앉아 있는 시인처럼 저 혼자 돌아가는 선풍기. 있는 듯 없는 듯 계절의 변화 속에서 약하게 틀어져 있을 선풍기의 바람은 그런데 문득 큰 울림을 지닌다. 똘스또이 소설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의 한 대목인 “죽음이 침상 모서리까지 와 앉아 있다”를 상기시키는, 선풍기 근처에 와 빼꼼히 시인을 쳐다보는 ‘죽음’. 그러나 그 죽음은 소설의 대목과는 달리 묵시론적인 의미의 죽음이 지닌 부정성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로 절대 무의 상태로 돌아가서 새로운 존재의 창조로 이끈다. 계절의 변화 사이에서, 아내를 지칭하는 두 가지 호칭 사이에서, 혹은 추억과 미래 사이에서, 이 시 속의 있는 듯 없는 듯한 방안을 맴도는 선풍기의 바람은 소리가 완전히 배제된 죽은 소리가 아니라 소요 혹은 격정을 내재한 침묵의 무한한 확장성 안으로 우리를 이끈다. 즉 미약한 선풍기 바람은 모든 ‘사이’에 들어 있는 존재의 관계성을 살려내며, 죽음이 자신을 “빼꼼히 쳐다보는” 것을 다시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게 하는 침묵, 혹은 은둔의 상태와 교우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점은 옥고를 치르며 죽음을 기다리던 그를 살게 한 힘이 되어주었다고 토로한 다음의 대목을 떠올려준다. “만약 생명이 추억과 예감의 밑바닥에 생생하게 살아 있지 않다면 추억은 곧 기억의 수정으로, 예감은 즉시 망상의 비현실로 전락했을 것이다.”(『생명과 평화의 길』, 348~49면) 그러니 시인이 아내를 가리켜 “아내는 다가오는 날들의/이름이다”(「윤동주 앞에서」)라고 명명한 대목이 눈물겹지 않은가.

 

 

4. 피로와 침묵

 

옛날 풍경이다. 그가 싸리꽃 핀 벌판에 서 있다. 푸른 연못을 넘쳐흐르는 장마통의 싸리꽃 핀 벌판에 서 있다. 앞으로 열광하게 될 자유와 사랑의 미묘한 탄생의 때가 시작되기 직전인 1959년 가을의 초입에 벌판에 나가서 생각에 잠겨 있다. 그는 머리와 가슴 중에 하나를 택하기보다는 그 둘이 융합된 온몸을 믿었기에 변화무쌍한 세상을 모던하면서도 구체적으로 구성하였다. 외래 사조의 파도에 휩쓸려 새로운 언어에 탐닉하는 시인들은 그가 보기에 촛점 없는 동작에 현혹되어 ‘코스춤’에 휩쓸린 유리창에 부딪는 새들 같았다. 일반인과 전형적인 시인들이 시가 자신의 바깥에 있다고 믿은 반면 그는 생활 속에서 시를 발견하였다. 그는 쉽사리 자연을 노래하지 않았다. 시가 아름다우면 시인 자신부터가 그 포로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상을 민감하게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대상을 통해 자기의 감정을 분출하는 대신 구체적으로 대상이 자신에게 들어와서 생겨난 제3의 새로운 무엇인가를 구성하려 하였다. 장마통의 지리한 세속도시를 벗어나 싸리꽃 핀 벌판에 서 있는 그는 결코 싸리꽃 냄새를 맡지 못했다. 구질구질한 도시의 삶과 도취의 피안으로 인도할 싸리꽃 냄새 사이에서, 그가 애써 머리로 구성하려고 했던 것은 피로였다. “피로는 도회뿐만 아니라 시골에도 있다.” 그는 간신히 장마통의 도시를 빠져나왔지만 그가 묻히고 온 도시의 역한 냄새는 자연이란 ‘형이상학’조차도 온전히 누리기 힘든 것으로 만들었다. 그를 시골로 실어나르던 기적소리는 자연의 풍요로운 삶 대신에 오히려 자신이 처한 궁색한 ‘문명의 밑바닥’을 알려주는 신호음이었고, 그의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돈지갑’이었다. 그런 처지가 그로 하여금 푸른 연못을 넘쳐흐르는 장마통의 싸리꽃 핀 벌판에서 “나는 왜 이다지도 피로에 집착하고 있는가” 되묻게 하고 있다.(김수영 「싸리꽃 핀 벌판」)

물론 그는 1년 후에 열광적으로 혁명에 도취하였고 온몸으로 자유를 노래하였지만 곧 싸늘하게 식어질 혁명의 열기를 예감하고 반년도 안되어 다시 피로에 빠져든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김수영 「그 방을 생각하며」)는 것이 그 피로의 요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번의 피로에 대한 생각은 예전의 한탄 섞인 것과는 다른 무엇이었다. 피로는 ‘하루의 나머지 시간’이며, 세계가 그러한 ‘무수한 간단(間斷)’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알게 했기 때문이다(김수영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찰나에 그만큼 불안하지만 변치 않는 사랑이 있음을 알았고, 그래서 그는 훗날 혁명이란 ‘눈을 떴다 감는 기술’이며 ‘간단도 사랑’임을 피로의 요체를 빌려 아들에게 말해줄 수 있었다(김수영 「사랑의 변주곡」). 그는 “어느 한순간, 때로 지속되며 빛나는 것은 시간 속에서, 시간을 벗어난 시간”3 속에서만 있음을, 시간 밖의 시간은 ‘폭발 일보직전의 정지상태의 순간적 긴장’ 속에서만 있음을 깨닫는다. 그에게 피로란 순간들 속에서 포착할 수 없는 것을 다시 포착할 수 있고, 현재의 속성을 이용하여 ‘간단’을 영원화하는 응고의 기술이었다.

이제 한줌 흙이 된 시인 김수영(金洙暎)의 영혼을 빌려, 21세기의 화려한 여명 아래 넘쳐흐르는 풍요를 바라보며 왜 이다지도 나는 지금 피로에 집착하는 걸까. 우리 시는 어느 순간 피로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피로로부터 자유스러워진 면모를 띄고 있다.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실험성의 시들은 도시적 상상력을 폭죽처럼 선보이고 있지만 삶의 근원적인 성찰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서정을 매개로 한 시들은 언제나 자기보다 우위에 선 자연에 대한 예찬을 통해 개인의 자아를 확보하는 데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이러한 저간의 사정이 ‘새로운’ 시인과 ‘낡은’ 시인들 간에 소통불가를 조장하기도 한다. 나는 적어도 김수영 시인이 말한 피로란 나로부터 벗어나서 나를 보게 하는 기술, 즉 침묵이라고 믿고 있다. 시는 도시나 시골이라는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이 연결되는 틈에 있다. 쉽게 말하면 도시 안에 시골이 보이고 시골 안에서 도시가 보인다. 시인이 하는 일이란 그 둘이 연결된 틈을 잘 닦는 일이다. 자신의 생각을 담기에 급급해서는 그것이 아무리 새로운 소재를 다룬 시이든, 혹은 우리 삶의 본질을 전해주는 자연의 소중한 가르침을 담은 시이든 남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태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침묵은 존재의 일체를 그리워하지만 ‘사이’가 낳은 갈망의 그림자이다. 그러나 침묵이 그 그림자로써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은 생명을 꿈꾸는 새로운 존재의 창조, 즉 갱신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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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피아니스트가 쓴 글이지만 이런 대목은 시의 본질을 상기시킨다. “침묵이 없으면 음악도 없다. 소음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서 청각이 퇴화되기 때문이 아니라, 침묵은 음악적인(그리고 시적인) 생각의 틀이자 안정된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침묵은 탄산수이며, 상쾌한 공기이며, 천사의 지시를 받기 위해 건너야 할 존경의 다리요 방식이다. ‘나는 음표는 몰라도 쉼표는 다른 피아니스트들보다 더 잘 연주한다’고 한 아르투르 슈나벨의 말을 상기해보라.”(같은 책 203면)
  2. 홍문표 『현대문학비평이론』, 창조문학사 2003, 864면.
  3. 앙드레 뒤 부셰 『회화』, 1983; 미셸 꼴로, 정선아 옮김 『현대시와 지평 구조』, 문학과지성사 2003, 66면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