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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세계일화(世界一花), 사막에서 열매를 맺다
무량 『왜 사는가』 1·2, 열림원 2004
강미숙 姜美淑
인제대 영어교육원 교수 langkang@inje.ac.kr
“사막에서 10년째 절을 짓고 있는 ‘일하는 스님’ 무량”이라는 부제가 붙은 『왜 사는가』의 저자는 예일대학을 다니던 중 숭산(崇山) 문도로 출가한 미국인 스님이다. 일찍이 ‘세계는 한송이 꽃’이라는 깨달음으로 삼십여개 나라에 백이십개가 넘는 선원을 연 숭산 스님의 포교 역정은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일반 독자들에게는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쓴 현각 스님의 스승으로 더 유명한 듯하다. 무량 스님의 책은 스승의 입적을 예감한 듯 직전에 출간되어, 스승이 전한 한국 선불교가 서구인들의 정신세계에 어떤 모습으로 다가갔는지 실증한다. 사실 미국의 종교적 상황은 그 나라의 음식과 마찬가지로 세계 각 지역의 종교가 몽땅 수입되어 있다고 할 정도로 다양하다. 하지만 청교도들을 건국 시조로 내세우는만큼 기독교가 그 나라의 이념적·정서적 토대를 이루어왔고, 미국 이민길에 오른 다수의 우리 교포들도 그 사회에 동화되는 안전판으로서 기독교를 택하기도 하였다. 특히 9·11 이후에는 선악 이분법이 두드러지는 근본주의적 기독교가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경기 침체 속에서도 미국의 대중이 그들의 이익에 노골적으로 반하는 부시에 이끌리는 연유도 이런 정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서구인들, 특히 서구 지식인들이 선불교에서 발견한 매력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들이 우리에게 되돌려주는 메씨지는 어떤 것일까? 숭산 스님은 한국 불교가 국내에서도 온전한 쇄신과 부흥을 이루지 못하던 1960년대에 이미 해외포교의 뜻을 세우고 미국에 건너가 낮에는 세탁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흑인가의 초라한 방에서 불법을 전했다고 한다. 진정한 ‘세계화’가 외면할 수 없는 모두의 과제가 된 지금의 상황에서 이 일화가 소중한 것은 자신을 낮춘 큰스님의 ‘하심(下心)’의 자세 못지않게 그가 우리 시대를 어떻게 인식했고 어떻게 실천했는가 하는 문제일 터이다. 외국인 스님들의 수행기를 읽으면서 미국 명문대 출신의, 말 그대로 눈 푸른 이들과의 동일시를 구하거나 우리 문화의 ‘우월성’을 확인하려는 자기만족에 머물러서는 안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속명이 에릭 버렐(Eric Berall)인 무량 스님의 이 책은 출가의 배경이 된 성장기의 경험, 숭산 스님을 만나 23세에 한국불교로 출가하게 된 과정과 수행이력을 기록한 1권과, 1993년부터 지금까지 미국 모하비 사막의 테하차피에서 거의 혼자 힘으로 한국식 사찰 태고사(太古寺)를 지으며 겪은 일들이 펼쳐지는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을 읽으면서 무량 스님의 개인적인 감정과, 해설이 절제된 간명한 문체가 특이하게 느껴졌다. 흔히 수행기라면 일상인들이 흉내내기 힘든 구도과정의 치열함이 부각되거나 추상적으로 보일 수 있는 선문답 및 그에 대한 당사자의 고양된 감회 등이 담기기 십상일 텐데, 이 책에서 그런 대목을 찾기란 쉽지 않다. 스님 자신이 말한 대로 이는 자신의 절에 사는 고양이에게도 이름을 따로 붙여주지 않을 정도로 명명(命名)이나 언어화에 연연하지 않는 성격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알음알이의 영역, 이성과 언어의 경지에서는 갈 데까지 간 서구인에게 불교의 진면목은 말과 생각에 있지 않다는 게 더욱 명확했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그가 인생의 물음을 풀지 못해 방황하다가 숭산 스님을 만나 한방에 가버리는 대목은 참 흥미롭다. 어린애처럼 반짝이는 눈을 가진 스승은 첫 만남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아무런 의미도, 이유도, 선택도 없습니다.”
그렇다. 나도 알고 체험한 사실이다. 그러면 당신은 여기서 무엇을 더 얘기할 것인가?
“그러나 나는, 나의, 나를(I, my, me), 이것들을 버리면 엄청난 의미와 이유와 선택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아아, 맞는 말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의미와 이유와 선택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1권 91면)
생각 많은 에릭이 꽉 막혀버렸던 지점을 스님은 독심술하듯 꼭 집어서 추궁해들어간 것이다. 사실 서구 근대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에 의지해 존립했고, 이후 해체주의 철학 등이 그 형이상학적 허위를 적발하려 노력했지만 그래서 뭐가 남았는가, 이게 다란 말인가라는 의문은 그들의 마음속에 가시처럼 박혀 있었던 것이다. 스승의 답은 의외로 단순명확하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텅 빈 것인가? 생각하지 않는 자체란 생각 이전의 세계를 말한다. 모든 사물의 본성이 여기에 있다”라는 것이다. 필자의 짧은 능력으로 사족을 단다면 이는 모든 것이 무상하고 비어 있지만 거기에 참된 진리가 있다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경지이고, 알음알이가 아닌 수행(修行)으로서만 증득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닐까?
이후 에릭이 숭산을 진정한 스승으로 받아들이게 된 또하나의 계기는 밥을 먹으면서 이루어진다. 그가 밥을 남기자 스승은 다 먹었느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자 “그럼 이건 뭐지?” 하고 남은 밥을 가리키고 하나씩 다 떼서 먹도록 하는 장면이다(1권 100~101면). 수채에 밥풀 하나 버리지 않던 우리 어머니들의 전통에서 보자면 평범할 따름인 이 지적이 에릭에게는 백마디 ‘진리의 말씀’이 주지 못한 깨달음을 연 것이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 쌀 한톨, 물 한방울의 소중함을 모르고 살아온 그였기에, 이 깨우침은 천가지 생각이 행동 하나에 미치지 못함을 가르쳤던 것이다. 불법이 무엇이냐고 묻는 제자에게 조주(趙州) 선사가 “아침밥을 먹었느냐?”고 묻고 그렇다고 하자 “그럼, 가서 밥그릇을 씻어라”고 일러 제자를 일깨우던 일화의 핵심이 여기서도 울리고 있다.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도 무량 스님은 긴 소감이나 별다른 해석을 덧붙이지 않고 넘어간다.
수다스럽지 않은 화자의 매력은 그의 소략한 말을 듣는 독자가 그 말의 여백을 상상하고 작은 행동까지 신뢰하게 된다는 데 있다. 더군다나 무량은 은근히 이야기꾼으로서 자기는 재미있는 줄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재미난 에피소드를 많이 들려준다. 대학시절 강력한 환각제인 LSD를 먹고 딴 세상을 경험한 이야기,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와 걷는 모습을 보고 질투심에 사로잡히는 자신이 싫어 말없이 헤어져버린 일, 세 차례 만행을 하면서 1980년대 한국 구석구석을 발로 헤맨 노정과 갖가지 모험담 등이 아주 실감나게 읽힌다.
그가 숭산 스님의 비서일을 하던 시절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스승도 인간인데 완벽하기만 할까 의심을 품고 있을 때, 숭산 스님은 그렇다면 “스승을 죽여야지”라고 단호하게 일러 그 의심을 풀어준다. 외국 여행길에 짐을 챙기는 일을 잊어버리자 무량은 “스님도 잊으셨잖아요!” 하고 도리어 큰소리를 친 적도 있다(1권 135~37면). 후에 제자는 잘못을 깨닫지만, 어른을 공경하는 전통이 없는 문화에서 있을 법한 일화이다. 이 사건을 통해 제자는 한편으로 진리 앞에서 누구나 절대적으로 평등하다는 것과, 그렇지만 실용(實用)의 세계에서는 지혜의 선후란 엄연히 존재함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근대적 평등주의는 물질적 평등조차 실현하지 못하면서 참된 정신세계의 맥을 이어갈 종요로운 인간관계를 끊어왔던 것이다. 또하나 눈길을 끈 것은 미국 선원에서 수행할 때 일정액의 생활비를 낸다든가, 시자로서 포교여행을 할 때도 항공료·숙박비 등을 모두 자비로 부담한다는 대목이었다. 기초적인 생활면에서 투명하고 자기 생활은 자력으로 책임지는 이런 정신은 일반인뿐 아니라 국내 불교계에서도 새겨들을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지 않은가 싶다.
소개하는 이의 말이 길어져서 정작 중요한 절 짓는 이야기는 간략하게 해야겠다. 2권에서는 절터를 고르고 구입하는 과정, 땅의 내력, 불모의 땅에 풍력발전기를 세워 발전을 하고 댐을 만드는 일, 직접 포클레인을 몰고 요사채와 대웅전을 지으면서 하루하루 닥치는 일감을 처리하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기록된다. (사진작가 서원씨가 포착한 사진들도 이 기록에 긴요한 도움을 준다.) 여기서 무량은 스님일 뿐 아니라 자연과학도요 환경운동가이며 온갖 힘든 일을 마다않는 상일꾼이기도 하다. 특히 미국식 소비주의를 극복하고 에너지 문제의 대안을 모색하는 구체적 실천력은 종교적 입장을 떠나 우리 모두 경청할 부분이다. 홀로 자연 속에 머물면서 현대문명의 해악을 비판하고 인간과 환경의 조화를 강조한 면에서는 『월든』의 저자 헨리 소로우(Henry D. Thoreau)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무량 스님에게 절 짓기란 수행과 둘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공동체로의 회향(回向)에 맞춰져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세계무역쎈터 건물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당연히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고 말하는 이 ‘과격한’ 수행자는 전쟁과 테러의 원인을 없애기 위해 지금 ‘평화의 종’을 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