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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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영 李宣姈

1954년 전남 장성 출생. 1986년 『세계의 문학』, 198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눈물은 푸르다』가 있음. 07sylee@hanmail.net

 

 

잃어버린 반지

 

 

어느날 손을 씻다가

손가락에서 미끄러져 나온 반지가 세면대의 배수구 속으로 사라졌다면,

미처 손써볼 새도 없이 아끼던 반지를 어이없이 잃어버렸다면,

그것이 그렇게 돼야만 할 반지의 운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반지가 손가락에 허술하게 끼워져 있던 것은 나의 부주의였고

배수구 속으로 영영 자취를 감추기 전에 반지를 붙들지 못한 것은 나의 실수 아니었던가

그 다음은 어떠했나

내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쉽게 체념하고 위로하지 않았던가

 

세월이 흘러 새로운 반지를 손가락에 끼면서 문득

그때의 잃어버린 반지를 떠올린다

그것은 운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놓쳐버리는 장면이었다고

 

 

 

李美子와 金秋子

 

 

평양공연을 간 이미자의 노래를 듣는다

동백아가씨, 여자의 일생, 아씨, 으레 이런 노래들 이미자가 부르는 노래들

이미자는 아직까지도 변함없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백년에 한번이라는 그녀의 목소리

옆방에서 귀동냥으로 듣다가도 ‘역시 잘하는구나’ 귀가 솔깃해지는 노래들

이미자는 자타가 인정하듯 우리 가요사에서 몇손가락 안에 꼽히는 가수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노래를 좋아하고

나는 이미자의 노래에 푹 빠져든 적은 없지만

그녀를 ‘엘레지의 여왕’ ‘최고의 가수’라 부르는 세간의 평에는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이따금 듣는 것은 김추자의 노래다

한때 노래하다 사라진 김추자 몇곡 들으면 끝나버리는 김추자

님은 먼곳에, 거짓말이야, 나뭇잎이 떨어져서, 때로는 폭발적이고 때로는 흐느적거리는

나를 빨아들이는 그녀의 노래들

김추자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녀를 최고라고 평하는 이는 없지만

그녀가 꽤나 유니크한 가수였음엔 틀림없다

 

李美子냐, 金秋子냐

나는 종종 그 기로에 선다

내겐 늘 그 저울질이 어렵다

李美子도 金秋子도

그렇다, 그것이 쉽지 않다

 

 

 

유도화

 

 

버들잎 같은 두껍고 좁은 잎, 대나무를 연상케 하는 가는 줄기, 복숭아꽃 색깔과 같은 화려한 꽃

나를 柳桃花라 부르는가 꽃이라 하는가

 

일러두건대 나는, 허울은 꽃이로되 꽃을 피운 毒이다

안에서 울컥거리는 毒氣를 가누다 못해 입술 깨물어 꽃이 돼버린

 

세상 모든 땅이 다 나를 자라게 할 따스한 흙을 일구고 있는 건 아니구나

아니면 내가 잔뜩 도사린 꽃이든지

 

꽃의 허망을 살아갈수록

허망의 아름다움에 집착할수록

더욱 혀끝에 감겨오는 독의 감칠맛

독의 기운이 온몸을 비틀며 퍼져오를 때 나는 더 붉고 화려하게 꽃핀다

 

내게 다가오지 마라 다가와서 나를 함부로 꺾으려 하지 마라

나는 언제든 너를 향해 내뱉을 독극물, 때로 내 몸이 까맣게 타들어가도록 삼키고야 말 독극물이

입안 가득 고여 있는 꽃이다 독의 뜨끈함으로 불끈불끈 피어오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