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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정호승 鄭浩承
1950년 대구 출생.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별들은 따뜻하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이 짧은 시간 동안』 등이 있음.
낙죽
결국은 벌겋게 단 인두를 들고
낙죽(烙竹)을 놓는 일이지
한때는 산과 산을 뛰어넘는
사슴의 발자국을 남기는 줄 알았으나
한때는 맑은 시냇물의 애무를 견디다 못해
그만 사정해버리는 젊은 바위가 되는 줄 알았으나
결국은 한순간 숨을 멈추고
마른 대나무에 낙을 놓는 일이지
남을 사랑한다는 것
아니 나를 사랑한다는 것
남을 용서한다는 것
아니 나를 용서한다는 것 모두
낙죽한 새 한마리 하늘로 날려보내고
물이나 한잔 마시는 일이지
숯불에 벌겋게 평생을 달군
날카로운 인두로
아직도 지져야 할 가슴이 남아 있다면
아직도 지져버려야 할 상처가 남아 있다면
산사로 가는 길
산사에 오르다가
흘러가는 물에 손을 씻는다
물을 가득 움켜쥐고
더러운 내 손이 떠내려간다
동자승이 씻다 흘린 상추잎처럼
푸른 피를 흘리며 계곡 아래로
나는 내 손을 건지려고 급히 뛰어가다가
소나무 뿌리에 걸려 나동그라진다
떠내려가면서도 기어이 물을 가득 움켜쥔
저놈의 손을 잡아라
어느 낙엽이 떨어지면서 나뭇가지를 움켜쥐고
어느 바위가 굴러가면서 땅을 움켜쥐고
어느 밤하늘이 별들을 움켜쥐고 찬란하더냐
산사의 종소리가 들린다
관 밖으로 툭 튀어나온 부처님의 발을
다시 관 속으로 고요히 밀어넣는
저 저녁 종소리를 들으며
움켜쥔 것은 모두 놓아버리고
손이여
물속에서도 풍경소리 울리는
한마리 물고기가 되어 바다로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