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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갈림길에 선 한국 시와 시비평
꽃들은 세상을 버리고
다른 서정들
이장욱 林洪培
시인. 시집『내 잠 속의 모래산』과 주요 평론으로「오감도들」등이 있음. oblako@hanmail.net
서정의 인공정원
흔한 말이지만, 지금은 서정의 시대가 아니다. 오늘의 삶과 세계는 전래의 서정적 어법으로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다. 이제 후위(後衛)에 남은 서정시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의 도원(桃源)을 이루는 것 정도인지도 모른다. 그 서정의 공간이 도원인 것은 그곳이 무슨 이상향이기 때문이 아니라, ‘전체’이자 ‘모든 것’인 일인칭의 영혼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서정은 만상을 일인칭의 내면적 고도(高度)에 걸어두는 방식이다. 그 고도에는 시인 자신조차 없다. 왜냐하면 전래의 서정이 전제로 삼는 ‘시인’이란, 어쩔 수 없이 왜소할 수밖에 없는 현대적 실존을 벗어나 모종의 ‘전체’에 투신한 자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의 세계에는 파편적이며 오염된 채 존재하는 실재의 만상과 만상에 대한 감각이 들어설 여지가 별로 없다. 서정의 어법은 끊임없이 바깥의 세계와 바깥의 언어를 밀어낸다. 그것은 신화가 언제나 우주 전체를 대상으로 삼아서 제 바깥에 다른 사물과 다른 신화를 상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전래의 서정은 마음의 신화를 구축하는 방법이며, 이것으로는 전체나 본질 같은 관념과 무관하게 스스로 천변만화하는 오늘의 세계와 시인 자신을 보여주기 어렵다. 왜 서정시가 세계와 시인을 보여주어야 하느냐고는 묻지 말자.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시인의 개인적 의무나 의지 같은 것이 아니라, 서정시의 미적 특성과 그 풍경이다.
이 글의 목적은 오늘의 서정이 ‘다른 서정’에 이르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반(反)서정’이 아니라 ‘다른 서정시들’을 위해 씌어진다. 먼저 한 편의 시를 인용하고 싶다. 이 시에는 서정의 정형과 변형이 공존한다. 서정이 자신의 ‘도원’을 이루자, 그 ‘도원’을 무너뜨리기 위한 세계의 습격이 시작되는 풍경.
목련화 그늘 아래서 아니면, 인적이 끊긴 광화문쯤의
오피스 환기구였는지도 몰라
그대와 나라고, 하면은 금방 아닌 것 같은 그대들
술잔에 붉은 입술을 찍어
어린애 손바닥만한 꽃의 육질을 열어
좋은 안주로 삼았었지
그대는 ‘깜찍이 소다’를 마시고
짐짓 취한 척
성냥을 건네주던 그대의 손을 혹은, 라이터
스치며 지는 꽃잎처럼, 흐르던 穀雨
淸明도 지나고 雨水는 이미 오래전 일
그날 잊지 않으려
마음속으로만 무수히 되뇌던 시를
취한 듯, 꿈인 듯, 끝내 적어두지 못해
다시는 꽃이 진 나무 아래를 찾지 못하는 冬至
小雪과 大雪 동안은 놀고
가장 긴 밤에 나는 하염없이
잠든 나무의 이름을 찾아 헤매었지 잠든 나무?
(우리는 누구나 서로의 슬픈 미래를 본 적이 있다)
단오에는 내가
어떤 향기로 그대의 머리를 감겨주었던가?
바람에 꽃잎을 날리던 立夏와 小滿 사이
白露와 霜降의 햇빛도
소용없이 빈 마당에 떨어지는 가좌아파트 베란다
꽃들은 세상을 버리고
봄을 잊은 나무는 괴롭게
저절로 깊은 세상을 열어두겠지
―함성호 「꽃들은 세상을 버리고」(『너무 아름다운 병』, 문학과지성사 2001) 전문
작은 글씨들을 지우고 읽는다면 이것은 전형적인 서정시이다. ‘그대와 나’를 둘러싼 저 ‘목련화 그늘’은 서정적 우주의 다른 이름이다. 그대를 향한 나의 괴로움과 그리움이 그대와 나로만 이루어진 이 우주의 동력이다. 아마도 정말 평화로웠을 그대와 나의 한때를 위해, ‘목련화’와 ‘꽃의 육질’과 ‘곡우’ ‘청명’ ‘우수’, 그리고 바람에 날리는 ‘꽃잎’들이 호명된다. 이 아득한 만상들은 이제 서정적 감성이 유발하는 일인칭의 리듬을 통과하면서 서서히 기화한다. 지상의 중력이 사라지자 모든 것은 화자의 리듬 안에서 몸의 무게를 잃는다. 그것들은 휘발된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의 괴로움과 그리움이 잠언적인 구절로 종결되는 순간, 그대와 나를 둘러싸고 있던 만상들은 드디어 이 서정적 우주의 소품으로 완성된다. 이제 ‘목련화 그늘’은 꽃의 그늘이 아니라 마음의 그늘이며, ‘곡우’와 ‘청명’과 ‘우수’는 구체적인 시간을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영원을 흘러간다. 결국 모든 것은 저 서정적 화자의 내면 풍경을 대리하기 위해 인입된 것이다. 드디어 꽃들이 “세상을 버리고” 떨어지는 순간, 꽃에 대한 서정적 화자(〓시인)의 압도적인 지위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된다. 그저 떨어질 뿐인 꽃잎은 화자가 부여하는 의미를 대리하는 ‘세상의 모든 꽃잎’이 된다. 당연하게도, 세상을 버리고 떨어진 것은 꽃잎이 아니라 화자의 마음이며, 이는 서정시의 일반적인 문법에 해당한다. 서정시는 사물과 세계에 대한 서정적 자아의 우위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이 시의 제목을 빌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꽃들은 세상을 버리고, 결국 화자의 마음속으로 떨어진다.’ 꽃들이 세상을 버리고 떨어지는 이 마음의 우주는 지나치게 순수한 것이어서, 모든 순수가 그러하듯 폭력적인 방식으로 혼탁한 사물성을 거세한다. 이제 시는 일관된 가치와 의미와 정서를 점유한 서정시인에 의해 단 하나의 지평만을 보여준다. 이 지평에는 하나의 가치와 하나의 세계와 하나의 전체만이 가능하다. 아무리 겸손한 어조를 지니고 있더라도, 서정성은 어쩔 수 없이 권위적이다.
물론 이것은 작은 글자(‘소문자’)를 지웠을 때의 이야기다. 당연하게도 이 시의 핵심은 저 서정적 ‘대문자’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저 ‘대문자’와 ‘소문자’ 들이 이루는 간극이다. 첫 행에서 ‘목련화 그늘’이라는 서정적이며 관례적인 배경은 “인적이 끊긴 광화문쯤의 오피스 환기구”에 의해 극단적으로 취소된다. 광화문과 오피스 환기구가 창출하는 산문적이며 실재적인 공간성은 서정적 전언을 위해 대상을 도입하는 일반적인 문법에 균열을 부른다. 그것은 다음 행의 ‘그대와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대와 나’는 ‘그대와 나’라고 말하는 순간 부정되고, ‘그대’라는 서정시의 어휘는 ‘그대들’이라는 산문적이며 냉소적인 문체의 도전을 받는다. ‘술잔’과 ‘깜찍이 소다’, ‘성냥’과 ‘라이터’의 대립 역시 서정성의 취소, 혹은 약화에 기여한다. 급기야, “잠든 나무의 이름을 찾아 헤매었지”라는 서정적 어조는 “잠든 나무?”라는 직접적인 구어적 반문에 부딪힌다. 이제 저 대문자의 권위는 전복된다. 완결되었던 만상이 갑자기 지상으로 떨어지자, 서정의 우주, 혹은 마음의 인공정원은 파괴된다. 그러자 문득, 그대와 내가 보인다. 그대와 나는 지상으로 추락한 시의 지평에서 ‘괴롭게’ 다시 만난다.
나는 이 시의 대문자와 소문자를 다소 도식화하여 해석했지만, 이 시가 서정성의 균열 안에서 다른 종류의 시적 풍요로움을 얻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사물과 세계를 서정적 내면의 ‘표상’으로 환원하는 대신, 그 서정의 반대편에 사물과 세계의 ‘산문적 진실’을 유희적으로 대질시킴으로써, 저것은 ‘균열의 리얼리즘’이라 할 만한 것에 접근한다. 그것은 서정의 인공정원에 대한 냉소적 자세를 타이포그래피 층위에서 드러낸다.
사물과 사물 사이의 유현
서정시인이 속한 일상적이며 실재적인 세계는 불화와 모순으로 가득하지만, 이 불화와 모순들은 서정적 영혼의 내부로 편입되면서 조화롭게 ‘승화’된다. 이 말은 서정시인이 현실의 불화에 눈감는다는 뜻이 아니라, 현실의 불화에 대해 말할 때조차, 그는 어쩔 수 없이 하나의 가치와 체계로 밀폐된 서정적 우주 안에서 조화로울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 조화로운 서정의 인공정원을 완결시키는 계기는 다양하다. 그것은 사랑일 수도 있고 자연일 수도 있고 종교일 수도 있고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이건 서정시인은 괴로우면서도 아득한 마음의 도원경을 떠나지 않는다. 이것은 내면의 리듬에 기초해 있는 서정시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서정시의 이 오래된 운명은 대체로 만상을 자기화하는 서정적 전유의 힘에 의지하고 있으며, 잘 알려져 있듯이 이 전유의 힘은 은유적 구조와 근친관계이다. 여기서 문제는 미시적인 은유 하나하나가 아니라, 미적 ‘전체’를 관할하는 은유적 사유와 체계이다. 서정시가 은유에 친화력을 보이는 것은 서정적 어법 자체의 필연적인 산물이다. 만상을 하나의 시선 안에 가둔 후 의미를 풍요롭게 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은유이므로 이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은유와 서정의 밀월은 이렇게 간단히 정리되지 않는다. 은유적 어법의 내부에서 이미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변주의 풍경을 좀더 자세히 살펴야 한다.
아픈 아이를 끝내 놓친 젊은 여자의 흐느낌이 들리는 나무다
처음 맺히는 열매는 거친 풀밭에 묶인 소의 둥근 눈알을 닮아갔다
후일에는 기구하게 폭삭 익었다
윗집에 살던 어름한 형도 이 나무를 참 좋아했다
숫기 없는 나도 이 나무를 좋아했다
바라보면 참회가 많아지는 나무다
마을로 내려오면 사람들 살아가는 게 별반 이 나무와 다르지 않았다
―문태준 「개복숭아나무」(『맨발』, 창비 2004) 전문
「개복숭아나무」의 서정적 진술은 문태준(文泰俊)이 즐겨 쓰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개복숭아나무를 가운데 두고 개복숭아나무와 유비관계를 이루는 은유적 대상들이 나열된다. 은유는 하나의 사물에 대해 유사한 다른 사물을 덮어씌우는 방식이며, 이때 두 항의 사물은 바라보는 자의 의미 영역으로 편입된다. 언뜻 보면 이 시 역시 이러한 양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문태준이 즐겨 쓰는 어법은 대상을 자아의 표상으로 환원하는 일반적인 은유와는 다르다. 개복숭아나무가 “아픈 아이를 끝내 놓친 젊은 여자”와 유비적 관계를 맺는 순간, 여자가 보조관념이 되고 개복숭아나무가 원관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개복숭아나무의 열매는 또 “거친 풀밭에 묶인 소의 둥근 눈알”과 은유적인 관계를 맺지만, 소의 둥근 눈알은 개복숭아나무의 열매를 설명한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저 유비들은 원관념을 말하기 위해 보조적인 사물들을 끌어들인 후에도 그것들의 사물성을 폐기처분하지 않는다. 젊은 여자는 개복숭아나무를 형용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개복숭아나무 곁에서 울었던 젊은 여자로 생생히 살아 있다. 마찬가지로 소의 눈망울은 개복숭아나무의 열매를 설명하기 위해 헛것으로 도입된 것이 아니라, 개복숭아나무 곁에서 여전히 사실적인 소의 울음과 더불어 보존된다. 대상들은 서정적 내면이 설정하는 소실점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비가 오려 할 때」 등 『맨발』의 많은 시편들이 이런 맥락에서 언급될 수 있다. 산문적인 듯 가볍게 말하면서도 잘 쓰이지 않는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활용하여 유려한 시적 리듬을 구현하고, 여기에 농경적 삶의 아스라한 풍경을 겹쳐놓는 것은 문태준의 장기이다. 이와 더불어 오래된 사물과 사물 사이의 유현(幽玄)을 소묘하는 저 미묘하게 ‘다른’ 서정의 어법은, 그의 시가 지닌 매력의 비밀이기도 하다. 낡았기 때문에 오히려 낯설어져버린 세계는 이제 저 토속적 공동체의 감성 안에서 부드럽게 살아난다.
물론 그의 시에는 서정적 권위의 흔적이 보일 듯 보이지 않게 남아 있다. 앞에 인용한 시 역시 그렇다. “바라보면 참회가 많아지는 나무다”라는 매력적인 구절과, “마을로 내려오면 사람들 살아가는 게 별반 이 나무와 다르지 않았다”는 부드러운 리듬을 이어오면서, 개복숭아나무의 사물성은 서서히 서정적 권위의 규율을 받게 된다. 개복숭아나무가 결국 사람들의 삶과 등가관계에 놓이면서 시가 종결되는 순간, 사물과 사물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저 서정적 유현은 약화되고 서정의 자기규정은 강화된다. 개복숭아나무는 사람들의 곁에 남아 있지만, 결국에는 삶의 곡진함을 직접적으로 유비하는 보조적인 지위로 강등된다고 할 수 있다.
로맨틱 클럽의 아이러니
서정성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소실점을 설정한다. 흔히 서정시가 세계를 ‘주체의 표상’으로 변환한다고 말할 때, 이 ‘표상된 세계’는 단일한 시선의 단일한 소실점을 중심으로 구획된다. 그것은 이른바 ‘일점원근법’의 세계다. 이 일점원근법은 가공의 시간과 공간을 구축하며 서정적 자아의 단일한 시선을 중개한다. 중세적 자아의 시선이 ‘역원근법’, 즉 신과 만상의 자리를 시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면, 그럼으로써 인간적 시선의 부재를 현현했다면, 근대 서정시들은 일점원근법이 관할하는 ‘시적 소실점’에 의해 운용된다.
하지만 어떤 시들은 소실점 자체를 삭제해버린다. 가령 박정대(朴正大)의 시는 로맨틱한 서정의 어법을 극대화하면서도 예의 그 소실점을 설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대단히 과격한 낭만주의이다. 세계를 하나의 표상으로 도입하는 대신, 내면적 공간으로 세계를 대체해버린다. 그의 낭만적 서정성이 이룩하는 공간은 공간성을 거의 박탈당함으로써만 시적인 공간이 된다. 그래서 그의 시편들은, 흔히 그를 수식하는 그 ‘광활한 공간’과 ‘넓은 시야’에 의해 설명될 수는 없다. 그의 시편들은 한번도 내면이라는 공간을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박정대의 로맨티시즘이 이루는 광활한 이동 경로는 그런 의미에서 마음의 지도 위에서만 그려질 수 있다. 그를 이해하는 키워드는 공간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 있는, 내면의 음악이다. 음악이야말로 저 로맨틱한 자유의 출발점이자 종착지이다.
안녕하세요, 투르니에氏
*
부에나 비스타 소설 클럽에는 글로 씌어진 음악이 있네
그 음악을 따라 몇 개의 階段을 밟고 오르면 그 계단의 끝에는 자작나무가 있고 자작나무 노란 잎사귀엔 밤마다 초생달이 뜨네, 밤이면 초생달의 칼집에서 검을 꺼내어드는 무사들, 차가운 겨울 바람이 내는 음악 소리에 무사들은 가끔씩 가슴을 베이기도 하지만 밤새 자작나무 작은 잎사귀 위를 뛰어다니던 무사들은 새벽녘이면 지붕 위에 누워 나뭇잎 천사들과 오래도록, 바람이 쓰고 가는 차가운 生의 문장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네
영혼의 무게가 사라진 세계에서는 허공을 날아다니는 무사들의 음악이 필요하네
악사들, 자신들의 온몸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그들이 바로 영혼의 무사들이지,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은 한없이 낮고도 투명한, 필사적인 사랑의 음계에 닿아 있네
(...)
나의 짧은 生은 그녀에게로 망명해가는 음악일 뿐이어서
수도원의 골방에는 바다를 향한 작은 창문이 하나 있고 녹슨 촛불이 있고 그 촛불 아래엔 내 불멸의 아내인 아그네스가 있네
*
안녕하세요, 투르니에氏
그냥 한번 불러봤어요
깊은 밤에, 글을 쓰다가
깊은 밤에
―박정대 「안녕하세요, 투르니에氏」(『아무르 기타』, 문학사상사 2004) 부분
이 음악은 확실히 로맨틱하다. 낭만주의와 상징주의에 관여했던 ‘음악의 정신’은 비범한 개별자의 영혼에서 발원하여 모종의 내면성, 혹은 모종의 ‘본질적’ 세계에 대한 희구를 동력으로 삼는다. 그의 시가 사곶 해안을 거쳐 몽골과 하노이를 지나 아프리카의 초원까지를 헤맬 때, 그 모든 공간들은 그의 내면이 상정하는 ‘본질적 초원’의 일부가 된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낭만성과 탈낭만성의 미묘한 긴장이다. 자작나무와 초생달과 칼 든 무사들이 있는 저 로맨틱한 풍경은 유희적 맥락 안에서 스스로 위태로운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그의 화자는 ‘영혼’의 ‘수도원’에 기거하지만, 이 ‘수도원’은 엄정한 자기검열과 금욕주의를 통해 영혼의 자유를 추구하는 오래된 낭만주의의 수도원이 아니다. “영혼의 무게가 사라진 세계”와 싸우는 그의 무사들 역시, 실은 “영혼의 무게가 사라진” 저 음악적 허공을 날아다닐 뿐이다. 이 극단적인 자유는 역설적으로 서정의 ‘권위’조차 무력하게 만들어버린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궁극적으로 박정대의 수도원은, “안녕하세요 투르니에氏, 그냥 한번 불러봤어요”라는 무책임한 결구로 환원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이것을 윤리적 의미의 무책임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미적 무책임이며 그런 의미에서 감각적인 무책임이다. 그는 자신의 낭만적 서정이 재현하거나 재연하는 세계에 대해 어떤 ‘책임’도 부과하려 하지 않는다. ‘책임’에 무심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책임’의 영역을 방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적 방기이다. 이러한 미적 방기가 “부에나 비스타 소설 클럽”이라든가 “로맹 가리 노가리” 같은 맥락없는 언어유희를 가능하게 만든다.
아마도 소실점이 사라진 이 내면적 로맨티시즘과 ‘무책임한’ 유희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석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맥락에서 보면, 저 영혼의 무중력 상태는 기이하게도 서정적인 ‘권위’의 약화를 초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권위의 약화가, 박정대 특유의 감상적이되 유장한 리듬과 함께 넓은 의미의 아이러니에 도달하는 지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전래의 서정과는 전혀 다른 지점에 가닿는다.
서정 바깥의 서정
전래의 서정이라고는 했지만 서정시에 ‘기원’ 같은 것은 없다. 니체 이래 ‘기원’이나 ‘계보’ 같은 개념들이 끊임없이 부정되는 것은, 그것들이 규칙과 본질과 위계질서를 만들어 은밀히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 개념들은 관념과 체계 안에 갇혀 있으며 그래서 변신을 제한한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의 존재방식이 아니다.
시와 서정은 무한히 흔들리며 변해왔을 뿐 ‘기원’ 따위를 지니지 않는다. 이 말은 ‘전통’ 서정시들을 현대 한국 시의 ‘기원’으로 설정하는 우리의 무심결을 부정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기원’을 설정하고 ‘일탈’의 각도를 측정하는 순간, 우리는 현대적 서정의 많은 부면(部面)들을 잃게 된다. ‘전통’은 다양한 문학적 역학에 참조항을 이루는 문학적 기억의 일부이지만, 복원하거나 귀환해야 할 ‘원형’이나 예외적으로 존중받아야 할 ‘근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의 ‘해체’는 지금 출현하고 있는 새로운 시들의 핵심적인 과제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개별자적 감각 안에서 이미 일정한 ‘보편적’ 감성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당대적 감성의 지평 위에서 이합집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원’이나 ‘계보’를 의식하거나 꿈꾸지 않는다. 그러므로 ‘서정적 자기동일성의 해체를 통한 근대의 극복’이라는 우리 시대의 낡은 명제를 반복하는 것은 이제 지루한 일이다. 지금 많은 시인들에게 ‘해체’와 ‘균열’은 이상적 상태를 전제로 한 결여의 상태가 아니라 그저 삶의 당연한 조건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해체를 해체로 의식하지 않으며 균열을 균열로 의식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는 ‘해체’도 ‘균열’도 없다.
오늘의 시인들은 그저 자연스럽게 서정의 영토를 넓혀간다. 이제 많은 시인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목소리에 염증을 느낀다. 그래서 때로 시인들은 다른 이의 목소리를 시 안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시 장르는 생래적으로 ‘수많은 말들’의 물리적 현현이 지극히 제한적으로만 가능하다. 시의 물리적 제한성은 소설처럼 말과 말 사이의 내밀한 권력투쟁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경우 시의 타자들은 아이러니의 지원 아래 미묘한 방식으로 시에 틈입한다.
실습용 재료 같은 사내와 여자가
나란히 검은 주유기를 제 옆구리에 꽂고 서 있다
그들은 서울의 밤이 꿈 대신에 선택한 텍스트이다
허공의 미터기에서 그들의 몸까지는
부패한 내장 같은 검은 호스가 늘어졌고
주유기의 금속성 손잡이는 옆구리 앞에서 멈추었다
그들은 두 발을 각각 흰 정지선 앞에 멈추었다
오아시스 같은 붉은 간판은 허공에 있다
우리는 언제나 조금 더 길을 가야 한다
지도를 내장한 몸은 어둡고 뻑뻑하다
미터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가지만
사내와 여자의 주유량은 어디에도 표시되지 않는다
판독되지 않는 그들의 그림자가 도로로 흘러넘쳤다
밤의 표면은 접시처럼 미끄럽고 불안하다
서울은 텍스트인 사내와 여자를
퓨즈처럼 갈아끼우기 시작한다
밤의 흐린 불 속에
공기가 철근처럼 삐죽삐죽 뽑혀져 있다
―이원 「서울의 밤 그리고 주유소」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문학과지성사 2001) 전문
이 시는 환상시가 아니다. 사내와 여자가 주유기를 옆구리에 꽂고 있는 것은 환상이 아니라 몸과 자동차의 의도적 혼종에 의한 ‘시적 착란’이다. 이는 인간의 몸에 ‘플러그’를 꽂는 이원 특유의 시적 ‘作亂’들과 같은 맥락에 있다. 작란, 혹은 착란과 더불어, 시인은 도시 야경의 한 장면에 확대경을 들이대는 방식으로 그로테스크한 화면을 연출한다. 이 그로테스크는, 서정적 진술이 아니라 건조한 이미지에 의거하는 이원의 집요한 시적 본능에 힘입고 있다. 이미지는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출발점이자 종착지이다.
하지만 이 시는 이런 일반적인 해석을 벗어나는 몇가지 흥미로운 특징을 보여준다. 우선 이것은 ‘서정시’가 아니다. 당연히 일인칭 화자의 파토스는 보이지 않고, 부드러운 인간의 몸을 기계의 일부로 치환하는 화자의 건조한 묘사가 지배적이다. 그런데 이 건조한 묘사가 ‘유사 서정성’에 의해 혼탁해지는 지점이 있다. 4연 첫 행부터 시작된 이 오염은 미묘하게 서정적이다. “우리는 언제나 조금 더 가야 한다” 같은 구절은 주유소에서 급유를 받는 이 현대적 기계인간들의 지극히 ‘사실적인’ 숙명이다. 정말이지 그들은 주유소에 머물 수 없는 것이다. 이 사실적인 관찰이 복수 일인칭의 서정성을 통해 느낌을 확장해가는 지점에 이 시의 ‘서정적’ 매력이 있다. “밤의 표면은 접시처럼 미끄럽고 불안하다”라거나 “밤의 흐린 불” 같은 감상적인 표현들은, 저 도시 공간 내부에 배치된 사내와 여자의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원은 서정적 감각을 본능적으로 타자화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저 인물들의 불안은 일인칭 화자의 서정적 불안과 달리 미묘하게 객관화된 채 독서과정에 편입된다. 이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아이러니에 의해 저 ‘주유소의 밤’이 유발하는 불안은 우회적으로 우리 모두의 불안과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은 시의 표층이 아니라 심층, 혹은 시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이루어진다. 아이러니는 은밀하게 시를 풍요롭게 만든다. 다음의 시 역시 그 예가 될 수 있다.
아이들 공놀이를 하고 거짓말같이 공이 떠오르고 엄마는 멀리 그늘에서 고구마의 어린순을 다듬고 손끝에 핏물 곱게 들고 나팔꽃 지지배배 몰래 울고
지나갈 비가 지나고 거짓말같이 옷이 마르고
공원에는 시작되는 연인들 끝나는 연인들 쌍을 지어 날아오르고 못 본 척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출 수 있는 아이들 멈추지 않고 자라고 또 자라서, 내 오랜 엄마는 어둡고
팬지는 차갑게 웃고 지고
공놀이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왜 필요한가
―이근화 「공놀이」 (『리토피아』 2005년 봄호) 전문
풍경들은 공놀이와 함께 흩어져 있다. 아이들이 있고 나팔꽃이 있고 연인들이 있고 팬지가 있다. 그들은 고구마의 어린순을 다듬는 한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는 서정적 화자를 중심으로 배치된다. 그리고 화자는 “내 오랜 엄마는 어둡고”라고 적는다. 풍경들은 금방이라도 이 애잔한 화자가 이루는 마음의 소실점으로 사라져버릴 것처럼 위태롭다. 하지만 이 시 속의 만상은 끝끝내 그 서정의 블랙홀로 사라져버리지 않는다. 아이들이 놀며 던지는 공은 ‘엄마’의 어둠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허공에 떠오른다. 연인들은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진다. 또 지나갈 비는 지나고, 옷은 마르는 것이다. 전래의 서정시라면 저 거짓말처럼 마르는 옷은 엄마를 바라보는 화자의 내면이나 생의 ‘비의’를 가리키고는 단일한 의미망 속으로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마르는 옷은 화자의 내면으로 환원되지 않으면서 미묘한 서정성을 유지한 채 그저 풍경 안에 걸려 있다. 그것은 마음의 표상으로 환원될 듯 결국 환원되지 않는다. 저 사물들과 화자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아이러니적 거리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추는 아이들의 경쾌한 리듬을 무심하게 흘려보내는 이 감각은 전래의 서정적 감각이 아니다. 모든 것을 제 느낌과 깨달음과 전언에 귀속시키는 서정의 권위가 여기에는 없다. 삶의 무게와 의미를 전하는 서정시의 소실점은 사라지고, “공놀이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 아닌 질문의 매력적인 서정만이 남는다. 이것은 서정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서정이다. 서정은 서정의 내부로 내려가 서정 자체를 넘어선다. 그 바깥에 있는 것은 물론, ‘반(反)서정’이 아니라 ‘다른 서정’이다. 이제 우리는 서정의 끝까지 가서 서정의 ‘관례’를 극복해버리는 풍경을 보게 된다.
미안해, 나는 성욕을 딱 잃고 말았다
왜 사람들은 날 걱정할까
순두부처럼 살고 싶었다
말도 안돼
지금부턴 너를 독점하리라
랍비가 있는 풍경이 날 웃게 했다
공동번역 성서를 읽고 있는 평양의 인민들,
나는 수령이란 낱말을 찾아 레위기를 헤맨다
누가 내 몸 안에서 섹스를 하나 봐
헐떡이는 소리, 세살 이후부터 끊이지 않고 있다
나를 사랑하는 헬리콥터 조종사가 머리 위에서 붕붕거린다
그는 흑인이다
편견이 곧 나다; 나를 버리기란…
그를 쫓아주세요 외국 군대에 언제까지 의지해야 하나
미국이 잘되는 이유는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다 들어 있다
나는 불타고 있는데, 아무데도 맞불은 보이지 않아
미끼라도 물고 싶어
결혼식장이 어물전 같아
비리지 않은 여자를 만나고 싶다
기고 싶다, 비비고 싶다, 까고 싶다
내 인생은 재즈라기보단 헤비메탈이다
내 서정의 목은 늘 쉬어 있다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2」(『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세계사 1994) 부분
10년 전에 발간된 시집에서 옮겨적은 이 시는 압축과 절제, 그리고 말의 정교한 활용 같은 서정시의 관습을 온전히 무시한 자리에서 시작된다. 저 파편적인 내면성(들)은 분별없이 쏟아져나와 기약없이 섞여버린다. 맥락을 무시하고 의식의 흐름에 의지해 문장들을 병치하는 것은 가장 손쉬운 시작법(詩作法)일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저 혼돈스러운 화자의 지껄임을 ‘새로운 서정’의 모범적 사례로 제시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내면적 카니발리즘의 언어들은 우리의 논의에 의미있는 시사를 던져준다. ‘성욕’과 ‘순두부’와 ‘평양의 인민들’과 ‘레위기’와 ‘리더스 다이제스트’까지 한달음에 내닫는 저 당대적 언어의 박물지는 그들 사이에 의미의 위계를 허용하지 않는다. 말들은 들끓고, 들끓는 말들은 수평적 역학관계 안에서 좌충우돌한다. 행과 행 사이의 저 좌충우돌을 통해 서정적 발화의 권위는 극단적으로 약화된다. 화자의 말은 화자의 말을 취소하고, 화자의 어휘는 화자의 어휘와 충돌한다. 가령 “편견이 곧 나다”라는 문장은 진리치를 내재한 잠언이 아니며, 시인 자신의 단순한 반성문이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외국 군대에 언제까지 의지해야 하나”라는 의문문은 단선적인 정치적 주장과 무관하다. 그것들은 말과 말 사이에서 서로를 밀어내고 허용하고 승화시키면서, 궁극적으로 표층의 말과는 다른 잠언, 다른 반성, 다른 정치학을 현시한다. 이것은 미적인 용광로이다. 섹스에서 정치에 이르는 이질적인 삶의 부면들은 행과 행 사이, 시인과 독자 사이에서 산문으로는 번역 불가능한 의미망을 이루며 다시 태어난다. 강력한 일인칭의 자아가 이 보이지 않는 부활의 동력이다.
이제 저 시행들은 서로에게 절대적 입지를 허용하지 않는 기이한 서정성을 이룩한다. 이 서정성 안에서 화자는 시인이면서 시인이 아니다. 시인은 화자(들)의 말에 자신을 투사하지만, 그 말들은 진리가 되기를 거부하고 역동적인 개별자의 언어로 남는다. 모든 발화는 그래서 ‘시인’을 부정하는 ‘타자’의 언어가 된다. 여기서 ‘타자’의 언어는 ‘남의 말’이 아니라 서정적 독백의 권위를 버린 말을 의미한다. 이제 저 어지러운 말들은 시를 거부하고, 이 거부에 의해 역설적으로 시에 도달한다.
“내 서정의 목은 늘 쉬어 있다”고 화자는 말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상징적이다. ‘목쉰 서정’이야말로, 일상어와 시어의 사이, 관례와 새로움의 사이, 개인과 사회의 사이, 현실과 희망의 사이에 개입하여, 그 만상의 곡절들을 가장 시적으로 반영하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풍자가 아니라 자살이다
요컨대 문제는, 서정 자체가 아니라 서정의 ‘권위’이다. 이것은 문체 차원에서 겸허한 어조가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사물과 의미에 대해 소실점과 위계질서를 설정하려는 시적 무의식을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미학의 문제다. 서정시가 마음의 ‘도원’을 버리고 ‘진리’를 버리고 결국 ‘시인’을 버린다는 것. 여기에 ‘새로운 서정’의 미래가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시는 개별화된 말과 감각과 세계관 들이 이합집산하는 공간이 된다. 여기서 개별화된 언어라는 것은 개인적이거나 자폐적이거나 암호화된 언어라는 뜻이 아니라, 서정적 진리와 권위와 위의(威儀)를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언어를 뜻한다. 이 거부에 의해 서정시의 완결성과 순수함이 훼손되는 것을 궁극적으로 용인하는 일, 그것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미적인’ 용기가 필요하겠지만, 이 용기를 통해서만, 서정시는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보이지 않는 전체와 개별화된 파토스 사이에서 ‘다른 서정시’들이 태어난다. 그 ‘사이’로 사물들이 진입하고 이질적인 자아가 드러나고 다른 세상들이 틈입한다. 그제서야 시는 관례와 깨달음이 아니라 진짜 세계 감각들을 현시할 수 있다. 이제 세계는 말하는 자의 표상이기를 멈추고, 말하는 자가 세계의 표상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풍자냐, 자살이냐”라는 김지하의 유명한 명제를 다른 맥락으로 전용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대상에 대한 시인의 압도적 우위를 전제로 하는 ‘풍자’가 아니라, 서정적 권위를 지닌 시인의 미학적 ‘자살’이 필요하다. 역설적이지만, 삶과 세계와 자신의 감각에 충실한 시의 ‘진정성’과 넓은 의미의 ‘풍자’는, 이러한 미적 ‘자살’에 의해 비로소 성취될는지도 모른다. 이제 시인은 언어들을 서정적으로 규율하여 ‘진리’를 기술하고자 하는 ‘권력’을 반납하고, 이 세계에 미만(彌滿)한 수많은 말들 가운데 하나인 말을, 힘겹게 발설한다. 그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말을 버리고, 무한히 변신하고 증식하고 경쟁하는 말들을 허용한다. 이 ‘자살’을 통해서, 서정시인은 다시 태어난다. 어쩌면 그 경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시를 ‘서정시’로 승인하게 될는지도, 혹시 모른다.
태양남자 애인 하나 없이 46억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지구를 비췄다 왜 무엇 때문에 무슨 영화(榮華)를 누리겠다고. 여름, 일년에 한 번 나 자신을 강렬하게 책망했다
늙은 나무들 과수원 바닥에 사과 배 대추 감, 열매들이 떨어질 땐 너희들이 먹어도 좋다는 게 아니고 우리들이 또 한번 포기했다는 뜻이다, 가을
미스터 정키 어떤 계절은 남녀를 가리지 않을 정도로 뜨겁고 또 어떤 계절은 순식간에 싸늘해져서 남자도 여자도 그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뿌리부터 차가워지지
힙합 소년 j 친구들은 늘 우정이 어쩌구 선후배가 어쩌구 떠들어대지만 스윗 숍(sweet shop) 앞을 지날 때면 부모 형제도 몰라봅니다 친구들은 커서 달콤한 가게의 핌프(pimp)가 되겠죠
나는 다릅니다 나는 생각이 있어요 붓질을 잘하면 도배사 하지만 글을 배워서 서기(書記)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이소룡 청년 차력사인 아버지의 쉴 새 없는 잔소리에 머리가 늘 깨질 듯이 아팠다 쌍절곤 휘두를 힘도 없다 가끔 정키 씨를 불러 리밍을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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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이었고 눈이 내렸다
스윗 숍에서부터 시작된 불길은 에로틱파괴어린빌리지 전체로 번져 나갔다
늙은 나무들은 포기를 모르고 맹렬히 타올랐다
힙합 소년 j는 달콤한 가게의 구석방에서 창녀 셋과 뒤엉킨 채 숯불구이가 되었고
이소룡 청년은 차력사인 아버지를 때려눕히고 아비요! 교성을 지르며
늙은 남자의 항문에 쌍절곤을 쑤셔 박았다
죽음도 삶도 아닌 세계, 붉은 해초들이 피어오르는 환각 속에서
미스터 정키는 끝없이 헤엄쳐 나갔고
태양남자, 언덕 위에 누워 46억년 만의 휴식처럼
에로틱파괴어린빌리지의 겨울을 내려다보았다
누가 만든 불일까, 잘 탄다
저팔계 여자는 순돈육 자지를 달고 불 속을 걸었다
―황병승 「에로틱파괴어린빌리지의 겨울」(『파라21』 2004년 겨울호)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