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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규리 朴奎俚
1960년 서울 출생. 1995년 『민족예술』로 등단.
상추
난이나 몇촉 캘까 산을 헤맸다
개울 옆 후미진 비탈길
역한 냄새 진동하는 쓰레기더미 속에서
상추 몇포기!
솟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 더러운 곳도 깨끗한 곳도
어느 쓸쓸한 세상 가장 낮은 곳도
가리지 않고 뿌리내리는 것이
생명이라 했던가
저 상추 몇잎이
남도의 이름없는 절 뒷산을
이렇게 아름답게 바꾸었다
숨이 막힌다
연꽃에만 진흙이 묻으랴
두 손으로 감싸안은 상추에
역시 쓰레기 냄새는 배어 있지 않다
뜨거운 생명이 되기보다는
깨끗한 방안에 난분이나 앞에 놓고
나는 무슨 꽃 피우려 몸 달았던가
고양이, 그 고독한 탄생 앞에서
고양이가 새끼를 낳은 것이 분명하다
어디에 낳았을까 구경 좀 하려고 따라가면
고양이는 이빨을 드러내며 겁 준다
멋모르고 옆에서 얼쩡대던 강아지를 벌써
등짝에 피가 나도록 할퀴어버렸다
새끼만 낳으면 녀석은 뵈는 게 없다
가물거리는 두 눈을 부릅뜨고
어둠 속에서 홀로 치러냈을 그 많은 공포와
황홀한 두려움을 생각한다
그 고독한 탄생 앞에 나는 목이 멘다
눈동자는 고통 속에서 더욱 형형하고
날선 발톱은 이제 다시
아무것도 놓지 않으리라
산고에 털이 다 빠진 녀석을 보며
고요히 내 가슴이 푸르게 멍든다
살아남은 것 외에
나의 생애는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냐
그래 스스로 새끼들을 앞세워
당당하게 올 때까지
눈만 퀭하니 치켜뜬 녀석을
다시는 따라가지 않기로 했다
가을비
무당 두 사람이 산기도를 왔다가
느닷없는 가을비에 떨며 서성이다가
해가 져 할 수 없이 암자에 들어
스님, 마당에서라도 하룻밤 묵어 가면 안될라우?
꾸벅꾸벅 졸던 스님 뛰어나가
아이고, 어서 오소! 공양부터 드시오
나에게 밥 차려오라는 눈치다 나는
저녁은 드리겠으나 잠 잘 곳은 없으니
저 아래 마을 여관 가서 자시오
맵게 말을 끊었다 사람 좋던 스님
처마끝으로 후득후득 비 긋는 소리
무심히 듣고 섰더니,
혼잣말인 듯 한숨인 듯……
……따스한 방안에서
여지껏 비에 젖지 않은
자네가 마을 여관 가서 자고
한비에 온몸 젖은 사람은
따스한 이불 펴고 방안에서 주무시게……
빗물이 계곡을 덮쳤다
가을비에 웬 천둥까지 내리는지……
그날 밤, 하늘 아래 죄없는 女人 둘과, 차마 머리 들기 부끄러운 내가 한방에 나란히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