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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영하 金英夏
1968년 경북 고령 출생. 1995년 『리뷰』로 등단. 소설집 『호출』 『오빠가 돌아왔다』, 장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검은 꽃』 등이 있음. timemuseum@hanmail.net
아이스크림
그러니까 그것은 국제통화기금이 일종의 집달리가 되어 한국을 접수하고 있던 시절의 일이다. 국가대표 축구팀도 시원찮고 경제는 빌빌대던, 그야말로 조국은 빈사상태였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던 시절. 동규와 그의 아내는 슈퍼마켓에서 아이스크림을 사고 있었다. 그 무렵 그들은 아이스크림을 무척 좋아했다. 특히, 신구약성서 합본호 크기 상자에 스물네 개의 소포장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는 유명 제과회사의, 그러나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제품을 사랑했다. 상자를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생각날 때마다 따로따로 포장된 작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꺼내먹는 재미가 제법이었다. 지우개 크기의 아이스크림은 한입에 쏙 털어넣기엔 조금 컸고 그렇다고 베어먹기엔 작았다. 조심스럽게 비닐포장을 반쯤 찢어 한입 베어물고 초콜릿 코팅의 향이 입 안 가득 퍼질 무렵이면 나머지 반을 털어넣고 작은 비닐포장은 쓰레기통에 버리면 그만이었다. 가족들이 모두 숟가락을 들고 모여앉아 머리를 부딪치며 퍼먹어야 하는 볼썽사나움과는 거리가 먼, 국민소득 1만 달러 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귀여운 낭비였다. 그 무렵 제과회사들은 앞을 다투어 포장방식을 바꾸며 제품을 고급화하고 값을 올려받기 시작했다. 자동화된 기계로 구운 쿠키 하나를 봉지에 넣어 다시 상자에 차곡차곡 포장해 인상된 가격으로 파는 것이 유행이었다. 나라 경제가 결딴이 나서일까. 사소한 사치도 큰 감동을 주었다. 동규와 그의 아내는 비록 국제통화기금 치하에 살고 있다 해도 3000원짜리 아이스크림 한 통이 주는 기쁨을 금가락지 헌납하듯 나라에 갖다 바치고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슈퍼마켓에서 문제의 그 아이스크림을 카트에 던져넣고 서둘러 계산대를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가지고 오는 길에 조금 녹았을 수도 있으므로 냉동실에 넣어두었다가 느긋한 마음으로 하나씩 포장을 까서 베어물고 있노라면 금세 행복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초콜릿이 주는 작은 흥분과 차가운 유지방의 부드러움으로 그들은 천천히 녹아내렸다.
동규가 사는 곳은 80년대 중반에 지어진 21평짜리 아파트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걸어 집 앞까지 오는 동안 다른 집에서 내놓은 세발자전거 따위가 발치에 차였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두 명이 서 있기도 비좁은 현관이 있었다. 거기에 신발을 벗어놓고 안으로 들어가면 거실은 작은 창 때문에 어둠침침했다. 거실의 오른쪽에는 두 칸짜리 싱크대가 있었고 타일의 틈새에는 그을음과 기름때가 침착되어 있었다. 가끔 혜선이 특수세제를 이용해 닦아보려 했지만 너무 오래된 것이어서인지 잘 씻기지 않았다. 그나마 타일의 한쪽은 깨져 있었다.
“아파트가 기울고 있어서 그래요.”
옆집 여자는 주장했다. 화장실 문이 잘 닫히지 않는 이유도 아파트가 한쪽으로 기우뚱 기울고 있어서라고 했다.
그들은 그 타일과 싱크대를 늘 부끄러워했다. 네 가구의 세입자가 물려가며 쓰던 싱크대인데도 주인은 쓸 만하다며 여간해서 바꾸어주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세입자인 그들이 생돈을 들여 남의 집 재산을 불려줄 일도 아니어서 그들은 습기에 불어 접착력이 떨어지며 무늬목이 들뜨기 시작한 낡은 MDF 싱크대를 그저 참고 견디고 있었다. 싱크대의 끝은 90도로 꺾어지며 간이식탁 노릇을 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것은 굵고 둥근 다리 하나로 지탱되어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 그들은 두 개의 의자를 갖다놓고 거기에서 밥을 먹었다. 그 간이식탁은 급할 때는 아쉬운 대로 부족한 싱크대의 역할을 대신했다. 야채를 썰거나 양념통들을 올려놓는 용도였다. 혹시 친구라도 찾아오면 동규의 회전의자를 갖다놓을 수밖에 없었다. 몇걸음 더 들어가면 왼쪽으로 동규가 쓰는 방이 있었고 그 다음으로 화장실, 그리고 안방이 있었다. 그들은 안방에 텔레비전을 갖다놓았다. 침대에 누운 채 왼발과 오른발 사이로 보이는 삼성 20인치 텔레비전을 시청했다. 안방 바로 오른쪽은 베란다였다. 만약 누군가 현관문을 열고 냅다 뛰어들어오고, 게다가 베란다 창문까지 열려 있다면 미처 멈추지 못해 추락할 수도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미닫이 반투명 유리문으로 거실과 분리되어 있는 베란다는 폭이 좁아서 빨래 널기도 힘들 정도였다. 둘은 세탁기에 빨래를 한번 돌리면 건조대에 갖다 널고는 다음 빨래를 할 때까지 잘 걷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널린 빨래가 햇빛을 가려 커튼 노릇을 했다. 베란다의 한쪽에는 동규의 부모님이 굳이 떼어주신 구형 에어컨의 실외기가 바다표범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그들은 용달차 운임 10만원, 설치비 8만원을 내고 에어컨을 설치했다. 에어컨은 13평짜리 벽걸이형이었는데 한번 켤 때면 아랫집에서 항의할 정도로 강력한 소음을 내곤 했다. 마치 잠에서 깬 괴물이 잠투정으로 으르렁대는 것 같았다. 자동온도조절 기능에 의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는데 특히 꺼져 있다가 다시 켜질 때 굉장한 소리를 냈다. 쇠를 긁는 소리와 함께 망치로 철판을 두들기는 소리가 뒤섞여 요란했다. 여름밤에는 열대야 때문이 아니라 에어컨 소리 때문에 자주 잠에서 깼다. 도대체 에어컨 안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프레온가스가 순환하며 열을 떨어뜨린다던데, 왜 철판이 저토록 덜덜거릴까, 그들은 가끔 궁금해했지만 바람도 잘 통하지 않는 아파트에서 그나마라도 없으면 불쾌지수는 더 높아졌을 것이다.
그 어느 여름날. 둘은 나란히 아파트단지 내 상가에 장을 보러 갔다. 동규의 일주일짜리 여름 정기휴가가 시작된 날이었다. 농협이 직영하는 슈퍼마켓에 들어가 야채와 우유, 달걀을 산 후에 마지막으로 계산대 근처에서 문제의 그 아이스크림―진짜 이름은 따로 있지만 소송을 당할 우려도 있으니 이름은 그냥 ‘미츠’쯤으로 해두자–을 샀다. 아이스크림까지 샀으니 쇼핑은 다 된 셈이었다. 이들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산을 하고 슈퍼마켓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여름이라 햇볕이 굉장했다. 자외선을 차단하는 검은색 반투명 챙이 달린 모자를 쓴 여자들이 그들을 스쳐지나갔다. 자외선을 가리는 데에만 신경을 쓰고 남의 시선에는 무신경한 그 중년 여성들은 챙을 너무 내려쓴 나머지 마치 누군가가 그들의 얼굴을 검은 먹으로 지워놓은 것 같았다.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어찌 보면 약간 공포스럽기도 한 장면이었다. 그들은 여자들이 지나갈 때마다 킥킥거리며 웃었다.
“아무리 자외선이 무서워도 그렇지. 저게 뭐야? 가끔 무심코 걷다가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꼭 외계인 같지 않아?”
혜선이 뒤를 힐끗거리며 말했다. 어린아이들은 마침 유행하기 시작한 인라인스케이트를 신고 그들을 스쳐지나갔다. 땀냄새가 훅 끼쳤다. 아이들은 더위와 햇볕을 전혀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았다. 동규와 혜선은 그들을 질투하는 시선으로 쳐다보며 마침내 자신들이 사는 동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가 사온 식료품을 냉장고에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가장 먼저 집어든 것은 더위에 녹아버릴 수 있는 미츠였다. 냉동실을 열자 차가운 냉기가 흘러나왔다. 꽝꽝 얼어붙은 굴비의 눈이 동규를 노려보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내용물이 담긴 비닐봉지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동규는 그것들을 재배치한 후, 적당한 공간을 만들어 행여라도 비린내가 배지 않도록 조심하며 미츠 박스를 밀어넣었다.
그들은 에어컨을 가동시켰다. 이이이잉– 드르르릉– 덜컹덜컹. 거세게 울부짖으며 남극 상공에 오존 구멍을 낸다는 프레온가스, 환경단체들이 반대하는 그 구식 냉각제가 파이프로 뿜어져나와 순환하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동규는 나가면서 열어놓은 베란다의 창문을 닫았다. 채 베란다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실외기의 더운 공기가 발목을 핥고 지나가는 것을 동규는 느꼈다. 불쾌한 감각이었다. 그러나 실내에 차가운 공기를 공급하기 위하여 저 자신은 뜨거운 열을 내뿜어야 한다는 것이 어쩐지 공평하다는 인상을 주었고 마치 세상의 중대한 섭리를 깨달은 것 같은 쾌감도 주었다.
장 보아온 것을 모두 적재적소에 집어넣은 후, 그들은 침대에 누워 텔레비전을 켰다. 그 무렵 텔레비전에선 연일 외국자본에 넘어가는 토종기업들의 이야기를 방송하고 있었다. 뉴스와 기획 프로그램들은 시청자들을 계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비록 당장은 아깝더라도 경제의 회생을 위해서는 외국자본을 받아들여야 한다. 공적자금을 투입해서라도 부실기업을 조금이라도 정상화하고 이것을 외국자본에 매각해 돈이 돌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게 우리나라의 살길이다’라고 역설하고 있었다. ‘자본에는 국적이 없다.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우리 돈이다’라는 주장도 있었다. 동규는 아주 옳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되는 거 아닌가? 물론 한 사람의 납세자로서 억울한 점도 있지만 그렇다고 부실기업이 마냥 돈을 까먹는 물귀신이 되도록 방치하는 것은, 그의 생각에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다. 그는 간혹 공적자금 투입에 분개하는 아내 혜선과 논쟁을 벌일 때도 있었다. 혜선은 그런 기업들은 아예 파산절차를 거쳐 청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럼 거기 다니는 직원들은 어떻게 하고?”
“그럼 모든 해고자를 국가가 먹여살려야 돼?”
“그건 아니지만 부실기업에 다닌다는 죄로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내쫓긴다는 건 너무하지 않아?”
“그런 온정주의 때문에 IMF가 온 거라구.”
혜선은 입을 비쭉거렸다. 꼭 틀린 말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혜선은 국제통화기금 사태와는 무관하게 바로 그 직전, 보모로 일하던 어린이집을 홧김에 그만둔 바 있었다. 원장과의 알력이 문제였는데 막상 그만두고 나니 후회가 되는 모양이었다. 아동학과를 졸업하고 나름대로 그 분야에 야심도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실업자가 되었고 그사이 경제위기가 닥쳤다. 있는 사람도 내쫓을 판에 새로운 사람을 뽑을 데는 없었다. 그리고 혜선처럼 직장을 그만둔 엄마들이 많아 어린이집에 오는 아이들의 수도 줄어든 판이었다.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 동규는 그쯤에서 그만 입을 다물었다. 해고니 실업이니 하는 문제만 나오면 심사가 뒤틀리는 혜선이었지만 막상 다른 면에서는 이해심이 깊었다. 뉴스를 볼 때는 냉정했지만 휴먼 다큐멘터리 같은 데서 갑자기 실직한 노동자들을 보여주거나 할 때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남몰래 방송사로 기부금을 보내기도 했다. 반면 동규는 공적자금 투입의 불가피함에는 공감하면서도 기부금을 보낸다거나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게 둘의 다른 점이었다.
“미츠 하나 먹을래?”
조금은 썰렁해진 분위기를 바꿔볼 겸, 동규가 제안했고 혜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밝은 표정이었다. 벽 쪽에 누워 있던 동규는 몸을 동글게 말았다가 펴는, 배추벌레식 전진법으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차는 작은 더블침대에서 반대쪽의 혜선을 건드리지 않고 침대에서 내려가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그는 냉동실의 문을 열고 미츠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개봉하고 두 개의 소포장 아이스크림을 꺼낸 후, 상자는 다시 냉동실에 집어넣었다. 작은 접시에 담아 침대로 간 그는 궁둥이를 먼저 침대에 올려놓은 후, 미츠가 담긴 접시를 혜선에게 건넸다. 그리고 다시 배추벌레식 전진법을 사용하여 자기 자리로 돌아가 베개를 괴고 텔레비전을 보았다. 혜선이 비닐포장을 찢어 미츠를 한입 베어물었고 동규도 똑같이 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둘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미간을 찌푸린 혜선은 동의를 구하는 눈빛으로 동규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규도 거울놀이를 하듯 혜선과 똑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혜선은 오른손바닥을 펴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을 뱉어냈다. 그리고 침대에서 내려 부엌으로 달려가 손을 씻었다. 동규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다.
“휘발유냄새 나지 않아?”
혜선이 물었고 동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뭔가 다른데.”
“우리가 이거 하루이틀 먹는 거 아니잖아. 뭔가 이상해. 기름냄새가 난다구.”
혜선은 벌써 입을 헹구고 있었다. 동규는 손에 들고 있던 나머지 반을 입에 넣었다.
“미쳤어?”
혜선이 소리쳤다. 동규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오물거리며 정말로 기름냄새가 나는 건지 다시 확인했다. 그러나 아이스크림을 삼키지는 않고 싱크대에 뱉었다.
“정말 기름냄새가 나는데.”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혜선이 파르르 떨며 찢어진 포장지 표면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생산자의 이름은 없었다.
“이거 소비자보호원 같은 데 신고해야 하는 거 아냐?”
동규는 냉동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미츠 상자를 꺼냈다. 거기에는 소비자상담실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제품에 이상이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을 해달라는 문구와 함께. 동규는 그 글귀를 혜선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정말 전화하게?”
혜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규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이게 얼마짜린데. 이대로 버리기는 아깝잖아. 그리고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알려줘야지.”
혜선도 목소리에 힘이 붙었다.
“어쩌면 보상을 받을지도 몰라. 내 친구는 사이다에서 엄지손가락만한 벌레가 나왔대. 이래저래 꽤 받아낸 모양이야.”
“그런데 발뺌이라도 하면 어떡하지?”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
“아니, 우리를 의심할 수도 있잖아. 전에도 보니까 어떤 남자가 요구르트에 독극물을 넣어서 협박하다가 잡혔잖아. 그런 일이 어디 한둘이야? 우리가 무슨 이물질을 넣은 거 아니냐고 의심받으면 어쩔 거야?”
“괜한 짓 하는 거 아닐까?”
둘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전화나 해보지 뭐. 만약 그런 식으로 나오면 소비자보호원으로 바로 신고해야지.”
동규는 상자에 적힌 전화번호를 외워 꾹꾹 버튼을 눌렀다. 그는 전화번호를 잘 외우는 남자였다. 080으로 시작하는 번호는 모두 열 자리였다. 혜선은 아이스크림 상자를 다시 냉장고에 넣고 동규의 표정과 입을 주시하였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은 사람은 젊은 여자였다.
“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 그 회사 제품 중에 미츠라는 아이스크림 있죠? 저희는 그걸 일주일에 두 번은 사먹거든요. 그런데 오늘 먹어보니까 기름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요. 여기다 얘기하는 거 맞아요?”
“네 고객님. 맞습니다. 저희 제품 때문에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구요. 곧 저희 담당자가 댁을 방문해서 제품을 살펴보고 자세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뭐래?”
혜선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동규는 조용히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주소와 전화번호를 찬찬히 불러주었다.
“네, 잠시 후에 찾아뵙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응대는 차분하고 충분히 정중했다. 동규는 일이 그렇게 순조롭게 풀려가자 어쩐지 좀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곧 찾아뵙겠다고, 대단히 죄송하다고 그러는데. 되게 친절하네.”
혜선은 깜짝 놀라 갑자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집으로 온다는 거야? 집도 안 치웠는데.”
혜선은 냉장고 옆에 놓인 진공청소기를 벌써 집어들고 있었다. 동규는 그런 혜선을 제지했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동규는 불안할 때면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었다. 입사면접 때 혹시라도 그 버릇이 나올까봐 두 손이 으스러져라 깍지를 끼고 버틴 그였다. 그런데 어느새 또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왜?”
혜선이 물었다.
“회사에서 우리집까지 왔는데 말야, 우리가 먹은 두 개만 이상하고 나머지는 멀쩡하면 어떡하지? 그럴 수도 있잖아. 왜 헛걸음시켰냐며 화내지 않을까? 왜 법률에도 무고죄라는 게 있잖아.”
혜선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미츠는 스물네 개가 각기 독립된 포장으로 된 아이스크림이었다.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자동으로 재료를 배합하여 사각형 틀에 붓고 얼리고 굳힌 다음 포장을 하여 마지막에 종이박스에 집어넣을 것이다. 그들이 사온 스물네 개 모두에서 기름냄새가 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렇다고 둘이 먹은 두 개에서만 기름냄새가 난다는 것도 이상했다. 그들은 자동화된 아이스크림 제조공정을 상상해보았다. 붕어빵 기계 같은 사각형 틀에 유지방이 부어지고 거기에 실수로 잘못된 원료가 투입된다. 그중 몇개가 비닐로 포장되어 어떤 박스에 들어간다. 그 몇개가 들어감으로써 한 박스가 가득 찬다. 하필 그것은 동규네가 사온 바로 그 상자이다. 상자의 입구에 그 두 개가 있었던 것도 우연은 아니다. 그것들은 가장 늦게 들어왔기 때문에 거기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상상하고 나자 그들의 불안은 증폭되었다.
먼저 제안한 것은 혜선이었다.
“하나만 더 먹어보자. 아닐 수도 있잖아.”
동규도 동의했다. 그는 냉장고에서 한 개를 꺼내 조심스럽게 포장을 뜯었다. 조금 전 입 안을 가득 채운 그 역한 휘발유냄새가 채 가시지도 않은 참이었다. 그렇지만 곧 들이닥칠 그 제과회사 직원을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혜선은 초조하게 동규가 어서 그 아이스크림을 삼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규는 3분의 1쯤 베어물었다.
“어때? 기름냄새 나지? 나지? 안 나?”
혜선이 물었다. 동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와 같은 확신은 도무지 생기질 않았다. 기름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처음에 먹었던 아이스크림 때문에 생긴 일종의 잔향일 수도 있었다.
“잘 모르겠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나는 것 같기도 하고.”
혜선이 눈을 흘겼다. 명백히 책망하는 눈빛이었다.
“뭐야? 그런 게 어딨어? 나면 나고 안 나면 안 나는 거지. 이리 줘봐.”
동규는 혜선을 제지했다.
“양치질하고 와서 다시 먹어봐. 아까 그 맛이 남아 있어서 정확하게 판단이 안돼.”
혜선이 양치질을 하는 사이 동규는 다시 3분의 1을 베어물었다. 이번에도 분명한 확신은 들지 않았다. 어찌 보면 휘발유냄새 같은 게 코끝을 감아들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평소 미츠 맛과 별다르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혜선이 양치질을 마치고 돌아오자 동규는 손에 든 나머지를 건네주었다. 혜선은 와인 테이스터처럼 진지한 자세로 허리를 곧추세운 후, 미츠를 받아 입에 넣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한참을 묵묵히 앉아 있었다. 이번에는 동규가 몸이 달았다.
“어때? 냄새나지 않아?”
혜선은 잠시 후 눈을 뜨고는 심오한 진리라도 깨달은 것처럼 선언했다.
“나. 냄새나. 분명 뭔가 있어. 휘발유나 벤젠이나 뭐 그런 걸 거야.”
“정말이야?”
“응, 나는 것 같아.”
“정말? 확실해? 엉?”
혜선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니 느낌이 그렇다는 거지. 맛이라는 게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서 확실하다는 거야, 아니야?”
“확실했는데 당신이 자꾸 그러니까 잘 모르겠잖아.”
“안되겠어. 하나만 더 먹어보자.”
동규가 말했다. 침묵이 흘렀다. 둘은 망설였다. 슬슬 뱃속도 느물거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먹어서는 안될 어떤 화학약품이 이미 그들의 뱃속으로 들어가버렸을지도 몰랐다.
“일단 기다려보자. 그쪽에서 뭔가 장비나 시약을 가져와서 조사해보면 금방 나올 거야.”
“그러다 아니면 어떡해?”
“먹고 탈나면 우리만 손해라구.”
“도대체 이렇게 큰 기업에서 왜 이따위로 만드는 거야?”
혜선이 벌컥 화를 냈다. 실내가 충분히 시원해지자 에어컨이 갑자기 작동을 멈추었다. 매미소리가 갑자기 요란하게 들려왔다.
“좋아. 하나만 더 먹어보자.”
동규도 양치질을 했다. 치카치카치카치카. 치약이 들어가자 울컥 구역질이 나왔다. 좀전에 먹은 아이스크림 때문인지 아니면 과음으로 비장이 약해진 탓인지 알 수 없었다. 동규는 양치질을 마치고 물로 입을 충분히 헹구고 다시 좁은 2인용 간이식탁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혜선이 벌써 동규가 먹을 미츠를 준비해두었다. 그녀는 동규가 먹기 편하도록 포장을 찢어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동규는 뜬금없이 독배를 마시는 소크라테스를 생각했다. 그리고 억지로 뭔가를 먹어야 했던 그 많은 인류의 조상들을 생각했다. 미사 때마다 별 맛도 없는 포도주를 들이켜야 하는 전세계의 가톨릭 사제들을 또한 생각했다. 그리고 미츠를 4분의 1쯤 베어물었다. 혜선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때?”
“난다 나. 확실해. 정상이 아니야. 이럴 수는 없어.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나야 하는데 뭔가 씁쓸하고 역시 그 기름냄새가 나.”
동규는 분명한 기름냄새에 자기도 모르게 신이 나 다시 한입을 베어물었다. 혜선의 표정도 덩달아 밝아졌다.
“거 봐. 우리가 이걸 얼마나 많이 먹었는데. 우릴 속일 수는 없지.”
혜선은 기세등등하여 동규가 남긴 나머지 반을 가져다 먹었다. 오물오물, 오물오물.
“됐어. 분명해. 기름냄새 확 나는데 뭐.”
동규와 혜선은 이제 스무 개밖에 남지 않은 미츠 상자를 다시 냉동실에 넣었다. 혜선은 진공청소기를 들고 윙 소리를 내며 청소를 시작했다. 에어컨도 기다렸다는 듯 다시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매미들도 방충망에 붙어 요란하게 울어댔다. 동규는 빗자루를 들고 방충망에 붙어 있는 매미들을 두들겨 쫓았다. 매미가 날개를 펴고 아래층으로 마치 카미까제 전투기처럼 낙하해갔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얼마전 뉴스에도 나왔던 황조롱이가 길게 원을 그리며 아파트단지 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다시 찾아온 황조롱이’라는 제목 아래 생태계의 복원을 상징하는 존재로 부각된 바로 그 맹금류였다. 아마도 사냥중인 듯싶었다. 동규는 거실로 돌아와 바닥에 뒹구는 잡지와 신문을 치웠다. 그들 부부는 저녁 준비도 잊고 부산히 집을 청소하고 정리했다.
“어쩌면 뉴스에 날지도 몰라.”
“그럼. 사람들 먹는 거에 얼마나 민감한데.”
“별일 아닐 수도 있어.”
“하긴.”
둘은 청소를 마치고 침대 발치에 걸터앉아 텔레비전을 봤다. 5분쯤 지났을까. 초인종이 울렸다.
“당신이 나가봐.”
혜선이 동규의 등을 떠밀었다. 동규는 현관으로 나갔다.
“누구세요?”
“……소비자상담실에서 왔습니다.”
동규는 문을 열어주었다.
“아이구, 저희가 어디 잠깐 나갔다 오느라 집을 못 치워서 좀 어수선합니다.”
앞머리가 벗어진 중년의 남자는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한 손에는 큼지막한 검은색 브리프 케이스를 두 개나 들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없이 혼자였다.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동규의 말을 무시하고 그는 우선 허리를 굽혀 동규에게 인사를 했다.
“심려를 끼쳐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동규는 얼떨결에 그를 따라 맞절을 했다. 중년의 남자는 가방을 내려놓더니 양복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동규에게 건넸다.
“소비자상담실의 김성룡 부장입니다.”
명함 그대로였다.
“아, 예. 안녕하세요.”
동규는 다시 고개를 숙여 절을 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혜선은 동규의 등 뒤에 숨어 김성룡 부장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나이는 50대 초반에서 중반쯤으로 보였고 목소리나 태도 모두 무게가 있었다. 단지, 더운 날씨 탓인지 이마에 땀이 번질거려서 실제 이상으로 느끼해 보였다. 지하철에서 만났다면 이유없이 치한으로 의심받을 수는 있는 그런 용모였다. 그러나 양복은 깨끗했고 넥타이는 한눈에도 꽤 비싼 제품으로 보였다. 두꺼운 검정테에 알이 크고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조계종 총무원장이나 큰 교회 담임목사가 쓰면 딱 어울릴 정도로 권위가 있어 보이는 제품이었다. 한마디로 중후했다. 벗어진 이마는 주름 한 줄 없이 팽팽하고 분홍색으로 빛나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그에 비하면 볼은 축 늘어져 다른 장소에서 만나면 좀 심통맞아 보일 수도 있을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는 현관으로 들어서면서부터 과장된 미소로 자기 얼굴에 깃든 권위를 지우려 노력하고 있었다. 평소엔 부하직원들 앞에서 팽팽한 이마와 권위적인 안경, 축 늘어진 볼을 앞세워 군림하다가 상관이나 동규네 같은 까다로운 소비자들 앞에서는 몸에 익지도 않은 공손함으로 자기를 애써 낮춰야 하는 김부장의 처신이 동규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그런 관리자들은 동규의 회사에도 한 다스는 있었다. 그러면서도 저런 권위적인 대기업의 간부급 부장마저 간단하게 굴복시킬 수 있는 소비자라는 존재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면서 살짝 통쾌함을 느꼈다. 단돈 3000원을 지불했을 뿐인데 그런 자신들의 입을 막기 위해 신고한 지 한 시간도 안돼 이 더운 여름날 영등포의 본사에서 여기까지 헐레벌떡 달려온 것을 보라! 말이 좋아 중소기업이지 조그만 하청업체에서 늘 대기업의 구매담당들(그래봤자 대리급도 안되는 것들)에게 굽신거리며 생계를 유지하는 동규 같은 처지에선 김부장 같은 자를 이렇게 전화 한통으로 불러올 수 있다는 게 한편 놀라우면서 또 한편 고소했다.
김부장은 열린 현관문을 닫은 후 발뒤축을 비벼 구두를 벗고 조심스럽게 거실로 올라섰다. 그리고 갑자기 어두워진 실내에 적응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동규는 소파도 없는, 그래서 손님이 와도 어디 앉으라고 권할 데 하나 없는 자신의 집이 문득 부끄러웠다. 김부장 역시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라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동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동규는 하는 수 없이 붙박이 간이식탁으로 그를 안내했다. 그는 괜찮다며 사양했지만 동규는 기어이 그를 거기에 앉혔다.
“우선 말씀하신 그 제품을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김부장은 정중히 물어왔다. 혜선이 냉동실 문을 열고 문제의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얼어붙은 굴비들이 비듬 같은 서리를 부스스 떨어뜨리며 바스락거렸다.
“저, 이게요 기름냄새가 심하게 나더라구요. 저희가 이거 한두 번 먹는 게 아닌데. 아니 세상에 이게요.”
동규는 눈짓으로 혜선의 말을 끊었다. 아내의 말투가 조금 거슬렸다. 대기업의 부장급이 친히 와주었는데 아내는 마치 동네 슈퍼 주인한테 하듯이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제품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뭔가 잠깐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동규가 아내를 대신하여 변명하듯 말했다. 김부장은 “네. 제가 한번 보겠습니다”라고만 말하고는 문제의 아이스크림 상자만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보석감정사처럼 신중한 태도였다. 그들 부부는 결혼 후, 딱 한번 패물을 내다판 적이 있었다. 동규가 주식투자에 돈을 다 날리는 바람에 당장의 생활비가 딱 떨어진 때였다. 신혼에 여기저기 구걸하기도 남부끄러워 종로4가 지하상가에 나가 패물로 받은 다이아몬드 목걸이 세트를 팔았던 것이다. 그들은 그때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라는 말이 얼마나 심한 거짓말인지 알게 되었다. 보석감정사는 신중하게 돋보기로 여기저기를 살피더니 그들이 산 가격의 거의 반값도 안되는 가격을 제시했다. 보관하는 사이에 여기저기 흠이 생겼고 세팅 방식도 촌스러워 다시 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 다이아몬드가 깎여나가기 때문에 가치가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억울했지만 그들은 보석을 잘 몰랐고 감정사가 풍기는 직업적 권위에 주눅들어 별말도 못하고 몇년도 안돼 ‘촌스럽다’는 평가를 받게 된 그들의 결혼예물을 넘겨주고 말았다. 지금도 어쩐지 비슷한 기분이었다. 동규와 혜선은 식탁 주변에 서서 초조하게 국내 굴지의 빙과업체 소비자상담실 김부장의 판결을 기다렸다. 김부장은 유통기한을 먼저 살폈다.
“유통기한은 아직 많이 남아 있어요. 살 때 꼭 확인하거든요.”
혜선이 앞질러 말했다. 김부장이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김부장은 상자를 펼쳤다. 스무 개의 아이스크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규는 김부장의 주변을 살폈다. 성분을 조사할 장비 같은 것은 없는 것 같았다. 김부장은 그중 하나를 꺼내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갑자기 두 손에 힘을 주어 포장을 쭉 찢었다. 그러더니 내용물을 통째로 입에 넣었다. 동규와 혜선은 예기치 않은 전개에 놀랐다. ‘회사를 위해 저렇게까지 몸을 던져 충성하다니!’ 동규는 대기업의 기업문화에 주눅이 들면서 동시에 먹고사는 일의 숭고함에 대해 새삼 경건한 마음을 품었다. 그는 남자들이 직장에서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아내를 바라보았다. ‘잘 보라구. 남자들이 어떻게 제 식솔들을 벌어먹이는지!’ 그녀도 약간 충격을 받은 듯했다. 김부장은 아무런 장비도 없이, 그 어떤 예방의 조치도 없이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도 모르는 아이스크림을 자기 입에 집어넣은 것이었다. 동규와 혜선은 애써 놀라움을 감추고 이제 그가 내릴 판결만을 기다렸다. 그는 한입에 넣기엔 조금 큰 그 아이스크림을 입속에서 천천히 조심스럽게 음미하고 있었다. 참다못한 동규가 물었다.
“이상하죠? 기름냄새 안 납니까? 분명히 날 텐데요. 어떠세요?”
김부장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입을 오물거리며 아이스크림을 다 삼켜버렸다. 에어컨이 다시 꺼졌다. 이번엔 매미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적막이 길게 느껴졌다. 혜선도 김부장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어떠세요? 이상하지 않으세요?”
김부장은 아무 표정도 없었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동규와 혜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쩌면 그들의 입맛이 틀렸을 수도 있었다. 김부장은 어쩐지 무엇엔가 실망한 듯한, 침울한 얼굴이었다. 김부장은 또 한 개의 미츠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능숙한 솜씨로 포장을 뜯고 내용물을 다시 입에 집어넣었다. 동규와 혜선은 그가 아이스크림 맛을 판별하고 다시 입을 열 때까지 무덤가의 문관석 무관석처럼 굳은 얼굴로 김부장의 양쪽에 서 있었다. 김부장은 이번에도 표정의 어떤 미세한 변화도 없이 미츠 하나를 천천히 먹어치웠다. 약간 힘빠진 목소리로, 그러나 희망을 잃지 않은 채 동규가 다시 물었다.
“어떠세요?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김부장은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갸웃거렸다.
“글쎄요.”
그는 다시 포장을 뜯었고 또 하나를 먹었다.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동규는 더이상 묻기를 포기하고 그가 충분한 데이터를 축적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기로 했다. 김부장은 또 하나를 뜯어 입에 넣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혜선이 참지 못하고 끼여들었다.
“안 이상하세요?”
김부장은 눈을 떴다.
“네, 약간 이상한 것 같기도 하네요. 그렇지만 확실히 그렇다고는 말씀드리기가 곤란한……”
김부장은 또 하나를 집어들고 천천히 포장을 뜯었다. 그리고 새로운 미츠를 다시 입에 집어넣었다. 동규는 자기 속까지 메슥거리는 느낌이었다. 벌써 네 개째였다. 그러나 김부장은 이런 일을 많이 겪어본 듯 태연했다. 김부장 앞의 식탁에는 비닐포장지가 하나둘 쌓여갔다. 정확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족히 여섯 개 이상은 먹어치운 것 같았다. 휘발유냄새 나는 수상쩍은 아이스크림을, 하나둘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삼킬 수 있다는 게 실로 놀라웠다. 그쯤 되자 김부장의 안색도 처음 집에 들어설 때에 비해 확실히 어두워져 있었다. 아니 어두워졌다기보다 어딘가 결연한 기운이 엿보였다. 미츠를 정말로 사랑하는 동규와 혜선이었지만 한꺼번에 세 개 이상 먹어본 적은 없었다. 이도 시렸고 무엇보다 의외로 양이 많아서 금방 배가 더부룩해졌기 때문이었다. 아이스크림이란 게 다른 음식처럼 그렇게 한목에 많이 집어넣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동규와 혜선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눈앞의 김부장은 마치 필름을 빨리 돌리기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예닐곱 개의 미츠를 먹어치운 것이었다. 혜선은 혜선대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나이도 많은 양반에게 못할 짓을 시키는 것 같아 편치 않았다. 갑자기 김부장이 벌컥 화를 내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근거없는 불안감도 들었다. 보상이고 뭐고 다 필요없으니 그만 돌아가달라고 무릎 꿇고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부장은 그저 어두운 얼굴로 미츠만을 삼킬 뿐이었다. ‘아, 이제는 그만!’이라고 동규와 혜선이 입을 모아 외치고 싶은 순간, 김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규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물었다. 얼핏 들으면 짜증을 부리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투였다.
“어떻습니까? 아직도 잘 모르시겠습니까?”
김부장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허리를 펴더니 동규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혹시 토하는 게 아닌가 싶어 혜선은 조금 뒤로 물러났다.
“심려를 끼쳐드린 점,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그는 허리를 숙여 자기 오른쪽에 놓인 검은 가방을 열었다. 거기에는 그 회사에서 만드는 초콜릿 중에서 가장 비싼 제품 두 상자가 들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꺼내 동규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밖에도 그 회사의 로고가 새겨 있는 꽤 쓸만한 계산기 겸용 탁상시계도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왼쪽 가방을 열자 거기에서도 고급 과자선물세트가 나왔다. 어린이날이나 명절 때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먹어치운 미츠의 빈 포장지와 아직 뜯지 않은 열두어 개의 미츠를 상자째로 검은 가방에 쓸어담았다. 그리고 철컥, 잠금쇠를 잠근 후, 가방을 양손으로 집어들었다.
“앞으로도 궁금한 점 있으면 언제라도 전화 주십시오.”
어느새 그는 현관으로 나가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문을 닫은 후 사라졌다. 그가 떠나버린 후, 동규와 혜선은 거실로 돌아와 김부장이 아이스크림을 먹어치우던 식탁에 둘러앉았다. 둘 다 멍하니 한동안 말이 없었다. 혜선은 김부장이 놓고 간 초콜릿 세트를 들고 살펴보았다.
“미츠 값에 열배는 되겠다.”
“그러게 말야. 땡잡았네.”
둘은 초콜릿과 과자를 싱크대의 빈 공간에 집어넣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텔레비전을 켜고 침대에 누웠다. 다시 배추벌레처럼 후진하여 침대에 올라간 동규는 엉덩이에 깔린 리모컨을 집어들고 채널을 돌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텔레비전에는 신경을 끈 채 사념에 잠겨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문득 여름날 오후의 이 소동이 정말로 있었던 일인지조차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그 아이스크림에서 정말 휘발유냄새가 났는지, 이제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혹시 그 김부장 말야.”
동규가 천장을 보며 말을 꺼냈다.
“왜?”
“정말 부장 맞을까?”
“명함도 받았잖아.”
동규와 혜선은 침대에 누워 어떤 장면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제과회사의 소비자상담실에 모여 있는 중년의 남자들. 말쑥한 양복을 입고 읽은 신문을 또 읽고 또 읽으며 시간을 죽이는 남자들. 전화벨이 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간 후, 소비자상담실의 실장이 들어와 말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아이스크림인데요. 음, 김부장님이 좀 가주셔야겠습니다. 따로 말씀 안 드려도, 잘 알고 계시죠? 그러면 명예퇴직자 김부장, 관리직 모집이란 말에 혹해 이력서를 들고 찾아왔던 우리의 김부장은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묵묵히 두 개의 가방을 받아들고 신고가 들어온 곳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면 되는 것이다. 운이 좋으면 가벼운 스낵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운이 나쁘면 아이스크림 한 통을 다 해치워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만약 동규네처럼 기름냄새가 나네 안 나네, 두눈을 부릅뜨고 꼬치꼬치 묻는 사람들만 아니었다면 굳이 그렇게 많이 먹지 않고 슬쩍 수거만 해와도 됐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에게 보내진 김부장은 그 세계의 초보였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동규와 혜선은 상상을 멈추고 말없이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히히호호. 개그맨들이 필사적으로 엎어지고 자빠지며 시청자들을 웃기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동규와 혜선은 웃지 않았다. 그들은 본래 코미디를 보면서 여간해서 웃지 않는 편이었다.
“벌써 해가 졌네. 어디 밥이나 먹으러 나갈까?”
마치 아이스크림 한 박스를 혼자 다 먹어치운 것처럼 속이 더부룩했지만 동규는 에어컨을 끄고 밖으로 나갔다. 더운 열기가 확 끼쳐들었다. 그들은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 앞에 멈추었다.
“신용대출, 신용 없어도 대출.”
동규가 광고 스티커의 문구를 힘없이 읽었다. 그리고 조금 킬킬거렸다. 둘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속은 계속 메슥거렸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는 그들을 1층에 내려놓았다. 그들은 천천히 걸어 단지 내 상가로 향했다.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얼레리꼴레리, 얼레리꼴레리.”
달아나는 아이가 필사적으로 외쳐댔다. 달아나는 것보다 놀리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직도 저 말을 쓰네. 얼레리꼴레리, 얼레리꼴레리.”
혜선이 애들의 흉내를 내며 키득거렸다.
“그러게 말야.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하는 애들도 봤어, 며칠 전에는.”
둘은 상가의 입구에 서서 주욱 늘어선 간판들을 살폈다.
“치킨하고 맥주 어때?”
“그러지 뭐.”
둘은 치킨집 밖에 내놓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더벅머리를 하고 싸구려 양복바지를 입은 40대의 남자주인이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프라이드치킨 한 마리하구요. 생맥주? 네, 오백 두 잔 주시구요. 무 좀 많이 주세요.”
“닭은 여기서 드시고 가실 거죠?”
“네?”
“드시고 가실 거냐고.”
“네.”
동규가 다른 곳을 바라보며 힘없이 대꾸하자 주인이 다시 한번 다짐을 두었다.
“한 마리 다 드시고 가시는 거예요?”
“아, 그렇다니까요.”
동규가 살짝 짜증을 부렸다. 혜선이 그런 동규에게 눈을 흘겼다. 주인은 말없이 안으로 들어가 주방 쪽을 향해 동규네를 흘깃거리며 무언가 투덜대는 것 같았다. 그의 아내인 듯싶은 주방의 여자는 동규와 혜선 쪽을 사나운 눈길로 쳐다봤다. 잠시 후, 더벅머리 주인이 기름이 뚝뚝 듣는 갈색 프라이드치킨과 생맥주 두 잔을 그들의 자리로 갖다주었다.
“미츠 그거. 이제 안 먹어야겠어.”
혜선이 말했다.
“그러게 말야. 분명 휘발유냄새였다니까. 할 수 없지. 다시 투게더 퍼먹어야지.”
“엄마아 아아빠도 함께 투게더, 투게더.”
동규가 그 옛날의 투게더 씨엠송을 흥얼거렸다.
“자, 이거나 먹자구.”
동규가 눈짓으로 프라이드치킨을 가리키자 혜선이 포크로 닭의 몸통을 쿡 찌르며 말했다.
“어휴, 쓴 식용유를 쓰고 또 쓴대. 그러면 기름이 산패하고, 그래서 발암물질이 나온다는 거야.”
“야, 그런 거 생각하면 지구상에 먹을 거 하나도 없어. 어서 먹어.”
동규가 먼저 닭다리를 쭉 찢어 입에 물었다. 그리고 생맥주를 들이켰다. 혜선은 가슴살을 포크로 찢어 먹었다. 닭의 흰살이 드러났다. 털이 온통 뭉친 검은색 떠돌이 푸들 한마리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처량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은 꾸역꾸역 닭고기와 맥주를 먹고 마셨다. 식욕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들의 착각이었다. 그들은 계속 먹고 마셨다. 그야말로 꾸역꾸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