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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박민규 朴玟奎
1968년 울산 출생. 2003년 『지구영웅전설』로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한겨레문학상 수상. kazuyajun@hanmail.net
장편연재1
핑 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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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왜 그래요 오비원?
그 아저씨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예술대의 로비 한켠을 점거한 채 검고, 두껍고, 묵직한 일련의 책들을 늘어놓은 것이 영업의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그 책의 전질(영인본)을 신청했다. 이걸 읽지 않고선 문학을 논할 생각도 하지 마. 안경을 끄덕이며 선배들은 얘기했다. 학생도 문창(文創)인가? 아저씨가 물었다. 아니라고, 나는 대답했다. 사람들은 그를 창비(創批)아저씨라고 불렀다.
아니라고, 내가 대답한 이유는 한가지였다. 수십권의 『創作과批評』(금박이다)은 열아홉살의 나에겐 가히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그리고, 정말 어려웠다. 어떤 자괴감 같은 것이 그래서 생겨났다. 학생도 문창과라며? 낯을 익혀버린 창비아저씨를 끝끝내 피해다니며, 나는 겨우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번도 문학을 논하지 않았다.
바로 그 창작과비평에, 소설을 연재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니 무려 19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창작과비평이라구요? 창작과비평입니다. 마치 창비아저씨와도 같은 창비 직원의 목소리에 또다시 나는 가슴을 쓸어야 했다. 왜, 창작과비평이 나에게 왜? 한마디로 불안하고, 한마디로 불쾌했다. 학생도 작가라며? 저쯤에서 웃고 있는 창비아저씨의 영혼 같은 것이, 그래서 그 순간 강한 포스로 다가왔다. 왜 그래요 오비원, 제국의 역습이라도 시작된 건가요? 이 연재는 그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이야기는 두 명의 중학생에 관한 것이다. 학생들의 얘기라고 해서 부모나 선생 같은 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재의 이유는 단 한가지다. 지금 이 얘기가 미치도록 쓰고 싶다. 그 때문이다. 그것이 전부고, 쓰고 싶은 대로 쓸 것이다. 이것은 〈창비〉다,라고 당신은 얘기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창비〉란 걸, 나도 알고 있다. 여성지에 연재하는 걸로 여기겠습니다. 백낙청 선생을 뵌 자리에서 그렇게 말씀드렸다. 그걸로 된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작가의 포지션이다. 여성지도 창비도 작가에겐 하나의 지면(紙面)일 뿐이다.
탁구계(卓球界)에 들어설 두 명의 중학생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기 바란다. 할일이 많은 중학생들이다. 뭐 어차피 박수를 칠 수밖에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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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
벌판의 중심에는 탁구대가 놓여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랬다. 그리고 낡은 소파가, 탁구대의 옆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가죽이 죄 벗겨진, 노파와 같은 느낌의 소파였다. 소파의 방향은 언제나 달랐다. 대개 남쪽을 향해 있지만 때로 동쪽을, 때론 꼭 동쪽이라 하기도 힘든 곳을 향해 소파는 놓여 있었다. 소파의 방향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지만, 그래서 왠지 누군가가 앉았던 느낌이었다. 그 뒤엔 녹슨 캐비닛이 기우뚱 서 있었다. 움직여지지도, 움직일 이유도 없는데다, 문까지 열리지 않아 누가 뭐래도 버려진 게 확실했다. 동물이나 새 같은 건 본 적도 없다. 있다면 이따금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기, 띄엄띄엄 수북한 각목과 모래 더미, 저 멀리의 중장비. 말하자면 그것이 벌판의 생태계였다.
벌판 끝에선 공사가 한창이었다. 주상복합(住商複合)의 아파트 공사였다. 끝도 없이 땅만 파대는 걸로 봐서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단지임이 확실했다. 소파에 걸터앉아, 모아이와 내가 처음 본 것은 그래서 하늘과, 하늘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크레인이었다. 크레인은 척 보기에도 수십 미터가 넘는 철골구조물을 하늘 높이 들어올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대단한 풍경이었지만, 우리는 놀라거나 와아 소리치지 않았다. 비교적 무감하거나 그래서가 아니라, 즉 말하자면, 너무 많이 맞아서였다.
와아
라니. 얼마나 행복하면 그런 환호성을 지를 수 있을까. 굉음과 함께 수평이동을 시작한 크레인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나는 생각했다. 옆구리가 욱씬, 했다. 아무래도 옆구릴 잘못 맞은 모양이었다. 소파 깊숙이, 나는 몸을 묻었다. 성급히 일어섰다간 더 큰 고장이 생긴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끼익. 괴로운지 모아이도 몸을 뒤척였다. 소파의 스프링이 더 괴로운 소리로 끽끽거렸다. 초여름의, 토요일 오후였다.
와아
오늘은 정말 많이 맞았다. 특별히, 많이 맞는 날이 있다. 한달에 두세 번은, 꼭 그렇다. 어쩔 수 없다. 간단히 넘어가려 해도 이유가 내게 있는 게 아니니까. 끼익. 다시 쇳소리가 났다. 녹이 슨 소파의 스프링은, 그 자체로 천식을 앓는 노파의 기관지 같다. 기침이나 골골거리게, 나도 빨리 늙었으면 좋겠다. 확 늙어버리면, 따 같은 건 당할 일도 없겠지. 아니 마흔살만 되어도, 서른살, 아니 스무살만 되어도 좋아지겠지. 스무살. 스무, 살. 스무살까지, 그런데 살아 있기나 할까? 제발, 살았으면 좋겠다. 높고, 원대한 꿈.
모아이와 나는 한 세트다. 한 세트로 당하고, 한 세트로 불려나가고, 한 세트로 맞는다. 맞는 장소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교실에서, 화장실에서, 옥상에서, 바로 이 벌판에서 매일 맞는다. 언제부턴가, 모아이도 나도 그것을 일과로 여기게 되었다. 그다지 좋은 일과라곤 할 수 없지만, 그 외의 일과를 가져본 적이 없어 좋다 싫다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냥, 사는 게 이런 것 같다. 나는 열다섯인데, 또 열여섯인 모아이의 생각은 다를지도 모르겠다. 한 세트로 맞는다고 해서, 꼭 그런 대화를 나누는 건 아니다.
모아이는 말이 없다. 다른 학교를 다니다 1년을 꿇고 이 학교로 왔다. 내가 아는 건 그게 전부다. 예전 학교에서도 따였는지 어떤지, 아무튼 말이 없다. 별명을 붙여준 건 담임이다. 이야, 완전 이 느낌이네. 그리고 담임이 남태평양 어느 섬에 있다는 수수께끼의 석상(石像) 사진을 보여주었다. 다들 넘어갔다. 그러니까, 완전 그 느낌이었던 것이다. 석상의 이름은 모아이였다. 모아이는, 그래서 모아이가 되었다. 언제 들어도, 공교로운 이름이다.
저 정도면 하나의 신앙 아니니? 여자애 하나가 그런 소릴 하는 걸 엿들은 적도 있다. 나로선 뭐라 할 처지가 못되지만, 그만큼 모아이는 초자연의 신비- 거대 얼굴이다. 그렇다고 모아이가 얼굴 때문에 따를 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몇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은 돈 때문에, 또 말이 없고, 따 체질인데다 초능력을 가진 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초능력. 그러니까 언젠가 그런 프로가 화제였는데, 스푼을 문질러 엿처럼 구부리는 초능력자가 방송에 나왔다. 집중하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장, 구부리기에 성공했다는 제보가 줄을 이었으므로, 다음날 교실은 시끌벅적 그 자체였다. 야, 너도 한번 해봐. 누군가 모아이에게 스푼을 내민 게 화근이었다. 오오. 스푼이 정말 엿처럼 구부러졌다. 야, 일루 와봐. 그리고 치수가 모아이를 불렀다. 다시 한번 해봐. 다시 한번, 모아이는 스푼을 구부렸다.
한동안 치수는 심심찮게 모아이를 불러냈다. 너 와보래. 말을 전한 것은 언제나 나였다. 장소는 주로 치수패가 모이는 창고 뒤였고, 모아이는 또다시 스푼을 구부렸다. 우와 캡숑. 이따금 밤에도 호출이 있었다. 쎄븐일레븐 옆의 공터에서, 치수패와 패들이 어울리는 여자애들 앞에서 다시 모아이는 스푼을 구부려야 했다. 꺄아. 더 큰 건 안돼? 더 큰 건, 되지 않았다. 모아이의 초능력은 그래서 점점 시들한 것이 되었다. 씨발 니 좆이나 구부려. 여자애 하나가 하루는 그렇게 말했다. 혹시 너 돈 좀 있냐? 빗질을 하며 치수가 물었다. 공교롭게도, 모아이의 주머니엔 꽤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 혼자 오면 어떡해? 다음날 창고로 나가자 치수가 찍, 침을 뱉으며 말했다. 너 와보…라는데. 와보래와 와보라는데가 확실히 다르듯, 호출의 목적도 확실히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한 세트가 되었다.
함께 맞고 함께 불려다니지만, 모아이와 나는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오라는데, 와보라는데. 서로의 교실을 찾아가 고개를 숙이고 나누는 호출의 변이 대화의 전부라면 전부였다. 모아이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처음엔 사실 그지없이 기쁜 마음이었다. 그러니까 친구가 생긴 느낌이랄까, 그랬다. 그 일이 없었다면 지금쯤 우리는 단짝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 세트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 새낀 보면 볼수록 이상하네. 무표정한- 초자연의 신비, 거대 얼굴이 아무래도 치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넌 감정이 없냐? 그리고 툭툭, 모아이를 때렸는데 역시나 모아이의 얼굴엔 아무 변화가 없었다. 거참 이상하다니까. 간질여도 보고 별짓을 다하더니 이윽고 놈의 변태끼가 발동했다. 키득키득, 패거리들이 웃기 시작했다. 야, 못! 모아이의 하의를 벗긴 놈이 나에게 얘기했다. 빨아. 처음엔 망설였는데 두어 차례 눈에서 불똥이 튀고 나자 나도 모르게 놈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하지만 실은 입에 물고만 있었을 뿐이다). 눈물을 흘린 것은 오히려 나였다. 초자연의 신비가 여전히 침묵을 지키자 이윽고 놈이 어깨를 으쓱했다. 관둬. 포기다 포기. 그 일이 있은 후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한 세트이긴 해도, 그랬다.
못. 나는 못이다. 그렇게 불린다. 쿵 쿵. 치수가 내 머릴 때릴 때 멀리서 보면 꼭 못이 박히는 것 같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야, 못! 하면 이상하지만, 그 외의 별명은 가져본 적이 없어 모르겠다. 좋거나 싫다는 생각이, 그래서 들지 않는다. 쿵 쿵. 하지만 정말 못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벽에 기댄 채 머리를 맞다보면, 절대로 그렇다, 기도한다. 다음엔 못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 못이라면, 일생에 한번만 맞으면 그만일 테니까.
아닌게아니라 두개골에 금이 간 적도 있었다. 날아온 돌에 맞았어요, 엑스레이를 찍고, 돌에 맞은 거라니까요, 인화된 엑스레이를 보면서도, 돌이 확실해요-라고 주장했다. 의사가 지적한 부위에는 정말 못이라도 박힌 듯 살짝 금이 가 있었다. 두개골이 아물 때까지 치수는 나를 때리지 않았다. 언어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것은, 말하자면 그때부터다.
나는 따의 전형이다. 허약하고, 겁이 많고, 눈에 띄지 않고, 공부도 못한다. 무엇 하나 잘하는 게 없다. 없을 수,밖에. 무관심, 무신경, 무감각, 무소유, 그리고 평소엔 박테리아처럼 숨어 있다가 야, 못! 소리에 반응한다. 화들짝, 절로 몸이 움직인다. 치수의 음성일 경우엔 더더욱이다. 그래서 더 쪽팔린다. 모아이와도, 그래서 다르다. 모아이가 이른바 물주(物主)에 가깝다면, 나는 확실히 따까리라 말할 수 있다. 더 하위(下位)다. 예전엔 인간이었는데, 지금은 그래서 딱히 인간이라고는 말 못하겠다. 대충, 못과 인간의 중간 정도라고나 할까. 핑. 그래도 가끔 눈물이 도는 걸로 봐서, 뭐 그 정도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따는 이학년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유 같은 건 없다. 치수와 한반이 되고, 치수의 눈에 띈 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우선 맞았다. 팔 올려. 그리고 겨드랑이 밑을 몇십번이고 때리는 것이었다. 얼굴은 깨끗한데 끙끙 며칠을 앓을 정도로 심하게 아팠다. 싹처럼 돋아 있던 인생의 날개 같은 것이, 그때 꺾여버린 느낌이었다. 하얀 깃털이나 솜털 같은 것이, 그래서 맞을 때마다 보풀처럼 떨어졌다. 그런, 기분이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니, 걸 수 없었다. 나는 오로지 치수의 독점, 꼬붕, 밥, 오르골, MP3플레이어, 경보기, 애완곤충, 핸드백, 쌘드백이 되었다. 아무리 맞아도 아무렇지 않게 되기까지는 꼬박 일년이 걸렸다. 어느 순간,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해졌다. 더 나빠질 게 없다고 느끼는 순간, 불안이란 감정 자체가 사라진 것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삶이 그래서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심하게 맞은 날엔 얼굴에도 상처가 생겼지만, 나의 대답은 일관된 것이었다. 싸웠니? 넘어졌어. 처음엔 보복의 두려움 때문에, 또 나중엔 더 나빠질까봐 입을 다물었다. 정말 아무렇지 않니? 아무렇지 않아. 아무렇지도 않은 삶이 그런 식으로 이어졌지만, 아무렇지 않다고 할 수 없는 곳이 한 군데 있었다. 손톱이었다.
열 손가락의 손톱 모두가 절반가량 닳아버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물어, 뜯어서였다. 죽어버려. 치수를 죽이고 싶을 때마다 나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손톱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아무리 아파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손톱의 그런 면이 언제나 나를 안심시켰다. 맞벌이를 하는 부모들이 대개 그렇듯, 나의 부모도 자식의 손톱검사 같은 건 한번도 하지 않았다. 너 손이 왜 이러냐? 깨진 사금파리 같은 손톱을 발견한 건 오히려 치수였다. 으응, 원래 그래,라고 둘러댔는데, 찍 침을 뱉으며 속삭였다. 너, 나 죽이고 싶냐?
어떻게, 알았을까?
그후로 놈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나는 더이상 손톱을 물어뜯지 않았다. 치수에 관해서라면, 노트 백 권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할 말이 많거나, 아예 할 말이 없거나, 그렇다.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울 만큼 악(惡)하고, 존재 자체를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월등하다. 모든 면에서, 그렇다. 입밖에 꺼낸 말은 언제든 그대로 해버린다. 머릴 다 뽑아버린다, 그러면 정말 머리칼을 다 뽑아버린다. 칼로 배를 딴다, 그러면 정말로 배를 딴다(빨리 병원에 실려가 죽지 않았다). 죽인다, 그러면 정말로 죽일 것이란 생각이, 그래서 누구나 들게 마련이다. 그래서 누구나, 치수의 말을 들었다.
고교의 일진들도 치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폭력조직의 실력자들이 이미 치수를 점찍었다는 풍문도 설득력이 있었다. 뭐랄까, 무서울 정도로 월등한 면이 확실히 있기 때문이다. 저 많은 걸 언제 다 익히고 배웠을까, 나로선 납득이 가지 않았다. 완력과 폭력, 기만, 조장, 장악, 이용, 유지, 회유, 진압, 설득, 친화, 조종… 그러니까 악하다는 단순한 말로는 치수를 설명할 수 없다. 이를테면 놈이 자상한 농담을 건네거나 친구 그 자체인 뉘앙스로 안부를 물어올 때가 있다. 아주 가끔이지만, 그때마다 핑, 눈물이 도는 것을 나도 어쩌지 못한다. 무서운 재능이라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세상을 끌고 나가는 건 2%의 인간이다.
입버릇처럼 담임은 그런 얘길 했는데, 역시나,라는 생각이다. 치수를 보면, 확실히 그런 인간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다. 출마를 하고, 연설을 하고, 사람을 뽑고, 룰을 정하는- 좋다, 납득한다. 이 많은 인간들을 누군가는 움직여야 하니까. 수긍한다, 나머지 98%의 인간이 속거나, 고분고분하거나, 그저 시키는 대로 움직이거나- 그것은 또 그 자체로 세상의 동력이니까. 문제는 바로 나 같은 인간이다. 나와, 모아이 같은 인간이다. 도대체가
데이터가 없다. 생명력도 없고, 동력도 아니다. 누락도 아니고, 소외도 아니다. 어떤 표현도 어떤 동의도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 살고 있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치수의 패거리는 모두 다섯이다. 어중이떠중이를 합치면 수십명은 되겠지만, 이 다섯이 패거리의 중심이다. 실은 오래전 국가의 모 기관에서 개와 인간을 결합, 인간의 전투력을 극대화하는 실험을 했다. 무슨 SF도 아니고 그런 실험이 성공할 리 없었다. 연구기관은 문을 닫고, 남은 건 결국 개와 인간의 잡종아기들이었다. 실패작들은 여기저기 싼값으로 팔려나갔다. 그런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채, 그에 걸맞은 바보 부모들이 이 잡종들을 오냐오냐 길러왔다-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더러운 놈들이다.
여자애들은 그보다 더하다. 원래 1910년에서 1920년 사이에 태어난 분들인데, 어찌어찌 한 세기가량을 매춘에 몸 바쳐 일한지라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든살이 되던 순간 전 재산을 쾌척, 온몸의 주름을 팽팽히 당기는- 보지의 주름까지- 팽팽히 당기는 초하이테크 전신성형을 받고 빈털터리 열다섯살 행세를 하고 있다-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걸레들이었다.
빨아.
실제로 그중 한명의 그곳을 나는 빤 적이 있다(실은 입만 대고 있었다). 치수의 전화를 받고도 몸이 아프다며 원조교제를 나가지 않은 아이였다. 야, 못! 가방을 나에게 들게 하고 여자애의 자취방을 찾아간 치수가 방문을 걷어차고 들어갔다. 게을러 보이기도 하고 아파 보이기도 하는 여자애였는데, 정말 머리카락을 거의 뽑아버렸다. 그리고 떡볶이 자국이 남아 있는 프라이팬으로 사정없이 여자애의 머리를 내리쳤다. 벗어. 떡볶이 국물이 묻은 추리닝을 여자애가 내리자 나에게 또 그짓을 시켰다. 빨아. 그리고 폰으로 그 장면을 찍었다.
1910년에 빨다가 만 빨래의 냄새 같은 것이, 여자애의 다리 사이에서 심하게 풍겼다.
요약하자면
그런, 인간들이다. 그런 인간들이, 2%의 인간 옆에 붙어 있다. 잘 씻지도 않고, 훔치고, 삥을 뜯고, 원조교제를 하고, 그 돈을 갈취하고, 협박을 하고, 때리고, 세금도 한푼 내지 않으면서 기분 내키는 대로 돈을 챙긴다. 그보다 더 용서할 수 없는 건, 자신이 그 2%에 들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음으로든 양으로든, 똥대가릴 굴리며 그렇게 여기는 것이다.
착각 마, 이 새끼들아
벌판은 여러모로, 그래서 치수패들에게 유익한 공간이었다. 숨어 나쁜 짓을 하기엔, 이만큼 좋은 장소도 없을 거란 생각이다. 원래 도랑이 있어 사십분은 돌아가야 하는 곳인데, 공사가 시작되면서 트럭들이 흙으로 도랑을 메워버렸다. 학교 뒷산을 끼고 돌면, 그래서 벌판은 채 십분이 걸리지 않는 거리가 되었다. 처음 이곳에 끌려온 날도 심하게 맞았다. 소파가 있는 쪽은 아예 몰랐고, 인근의 모랫더미 앞에서 세트로 당했다. 치수패들이 돌아가고도 한참을 우리는 누워 있었다. 엉금엉금, 그리고 모아이가 소파를 발견했다. 소변을 볼 요량에 쌓여 있던 각목더미를 돌아들어가서였다. 어떻게 된 거야. 도무지 나오지 않아 그 뒤를 쫓았는데, 파묻힌 느낌으로 모아이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털썩, 나도 그 옆에 주저앉았다. 소파는 2인용이었고, 어떻게 된 건지 그 앞엔 탁구대가 놓여 있었다.
그 풍경을 아직도 나는 잊을 수 없다.
탁구대는 벌판과, 세계의 집약(集約) 같은 느낌으로 그곳에 놓여 있었다. 장마가 끝난 후의 청명한 하늘이었고, 태풍이 오기 전의 고요한 대기였다. 그래서 더 선명한 붉은색의 라켓과, 주변에 널려 있는 여러개의 흰 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탁구 칠래?
모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야, 못!이라고 부르지 않아 반응이 늦긴 했으나,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없이, 우리는 탁구를 쳤다. 정식으로 탁구를 배운 적은 없지만, 대충 어떤 식으로 넘기고 받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핑. 퐁. 핑. 퐁. 핑. 퐁. 핑. 퐁. 이상하리만치 상쾌한 소리가 났고, 이상하리만치 경쾌한 기분이었다. 땀이 났다. 맞은 자리의 통증 같은 것이 땀과 함께 밖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탁구를 치게 되었다.
휴우, 땀을 닦으며 다시 소파에 앉았을 때는 결렸던 어깨와 허리가 시원하게 나은 느낌이었다. 저기, 말이야… 그때 일… 그거 미안해.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억지로 삼켰던 탁구공 같은 것이 입밖으로 나와 통 통 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네 잘못이 아니잖아. 공을 주워 돌려주는 느낌으로 모아이가 얘기했다. 그 공을, 나는 말없이 받았다. 작지만 희고, 눈부신 공이었다.
퐁
반(班)은 마흔두명으로 이뤄져 있다. 모아이의 반은 마흔다섯, 또 그렇게 열다섯개의 반이 모여 한 학년을 이루고 있다. 학년의 총원은 육백삼십칠명, 그렇게 이뤄진 세개의 학년을 모두 합하면 천구백십일명의 전교생이 산출된다. 그것이 우리 학교다. 시(市)에는 도합 서른한개의 중학교가 있다. 검색하면 오만구천이백오명의 중학생이 시의 일원으로 등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그중의 한명이다.
물론 그것도 우리 시의 중학생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의 얘기다. 영역을 전국으로 확장하거나, 아시아와 세계, 혹은 인간을 기준으로 확장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마흔한명에게 둘러싸인 중학생의 느낌과는 차원이 다르게- 실은 지독히도 많은 인간이 이 세계에 살고 있다. 쓸데없이… 그런 생각은 왜 한 거지? 그럴 리 없겠지만, 이런 질문을 해줄 친구가 있다고 가정하자. 가정하고, 응, 그건 기도를 하다가 든 생각이야,라고 내가 대꾸하고, 또 물론 가정이지만- 기도라니 뭔 말이야?라고 친구가 다시 묻는다면, 묻는다고 한다면… 하지만 역시
그런 친구가 있을 리 없다
나는 혼자다. 늘 마흔한명 속에 앉아 있지만, 또 육백삼십일곱명의 졸업앨범에 나란히 사진을 넣기도 하겠지만, 실은 천구백십명과 오만구천이백사명과 육십억의 인류가 나를 둘러싸고 있다고도 볼 수 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내가 말을 걸 수도 없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그렇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잘못된 일이다. 누구에게나 이름을 알고, 매일 얼굴을 봐야만 하는 마흔한명 정도의 인간들이 있다. 마흔한명 정도의 그 인간들이, 실은 그래서 천구백명과 오만구천명, 나아가 육십억 인류를 대표해 한 인간과 대면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지독하다. 과연
니들이 인류를 대표한 거냐?
굽어 살피소서. 그래서 기도를 했다. 기도는, 한창 손톱을 물어뜯던 때의 주요한 일과였다. 죽여주세요. 제발 죽거나, 사라지게 해주세요. 어두운 방 안에서 손톱을 뜯다보면, 순간 말 못할 고통과 함께 피가 입속으로 고여들었다. 죽여주세요, 제발. 그래도 자라나는 손톱과 생살처럼,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폭력의 촉수는 무럭무럭 자라났다. 이건 잭과 콩나무야. 이대로 콩나무를 타고 오르면, 어느새 하늘, 어느새 구름, 어느새 죽음.
기도를 멈춘 것은 가족과 함께 제주도를 다녀와서였다.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고 구름 이상의 세계로 올라간 것이었다. 보이지 않겠구나. 그때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육십억과, 오만구천이백사명과, 천구백십명과, 육백삼십육명과, 마흔한명에 둘러싸인 중학생 같은 게 보일 리 없다는 사실을. 아니 실은 육십억의 인류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느새 구름, 어느새 땅, 어느새 삶.
결국 인류의 문제는 인류 스스로만이 해결할 수 있어. 친구가 있다 가정하고, 나는 다시 중얼거렸다. 신이 있다 가정하고 기도를 중얼대는 것과는, 그래서 약간의 차이가 스스로도 느껴졌다. 나는 더이상 손톱을 물어뜯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구원을 요청하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를 구원할 생각도, 구원할 능력도 없었다. 야, 못! 치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후다닥, 육십억 인류 중에 가장 빠른 속도로 나는 냅다 치수를 향해 뛰어갔다.
가방을 받아들고, 나는 치수의 뒤를 따라 걸었다. 하암, 잘 잤냐? 갠 날씨처럼 하품을 하며 치수가 물었다.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으, 으응. 이것이 치수다. 어제 그렇게 사람을 때려놓고도, 잘 잤냐,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건넨다. 이상하게 꼭 이런 순간, 분한 건지 감사한 건지 알 수 없는 눈물이- 핑 뜨겁고도 갑작스럽게 눈가에 고인다. 모아이는? 그, 글쎄. 이상하게 단 한번도, 나는 모아이를 위해 변명을 해준 적이 없다. 변명 따위 소용이 없다는 걸 알기도 하지만,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야, 못. 그 가방 말이야, 마리년 방에 좀 갖다 놔줄래? 으, 으응. 하고 잠시 주춤했지만 나는 냉큼 발길을 돌린다. 참, 이거. 돌아보니 치수가 천원짜리 한 장을 불쑥 내밀었다. 멀잖아, 가다가 음료수라도 사먹어. 아니 괜찮아,라고 말하면서도 나는 꾸깃, 그 돈을 받아넣었다. 언제 또 기분이 변할지 몰라서였다. 뛰어. 음료수라도 마시라더니 뛰라는 건 또 뭐지, 의심할 겨를도 없이 타다닥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탁 탁 탁 탁 달려가는 나를, 등교길의 아이들이 무심히 바라보았다. 마흔한명의, 육백삼십육명의, 천구백십명의 일부인 눈동자들이 물끄러미 나를 투과해 교문 쪽으로 흘러갔다.
마리의 방은 더럽게 멀다. 누군가 하면 떡볶이, 그러니까 1910년에 태어나신 그분이다. 즉 신흥지구의 유흥가 근처 원룸에 살기 때문에, 버스를 타고 열여덟 정거장을 달려야 한다. 인류를 대표한 강물이 교문 쪽으로 완전히 흘러간 후, 나는 혼자 버스를 기다렸다. 하아 하아, 어제 맞은 옆구리가 또다시 아파왔다.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이봐요, 에어컨 좀 켭시다. 버스 안에서 남자 하나가 소리쳤다. 덥긴 했지만, 덥다고도 덥지 않다고도 할 수 있는 그런 온도였다. 기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거 좀 켭시다. 이번엔 어떤 여자가 소리쳤다. 운전석 창을 열고 기사는 딴전을 피우더니, 웅성웅성 다시 항의가 줄을 잇자 말없이 에어컨을 작동시켰다. 과반수였다. 다수의, 다수에 의한, 다수를 위한 냉풍이 머리 위 송풍구에서 쏟아져내렸다. 마리의 방까지는 아직도 세 정거장이 남아 있었다.
세계는 다수결(多數決)이다. 에어컨을 만든 것도, 말하자면 자동차를 만든 것도, 석유를 캐는 것도, 산업혁명과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도, 인류가 달에 간 것도, 걸어가는 로봇을 만든 것도, 우주왕복선이 도킹에 성공한 것도, 휘 휘 지나가는, 저 규격 저 위치에 저 품종의 가로수를 일렬로 심은 것도, 모두 다수가 원하고 정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인기의 정상에 서는 것도, 누군가가 투신자살을 하는 것도, 누군가가 선출되고 기여를 하는 것도, 실은 다수결이다. 알고 보면 그렇다.
따를 당하는 것도 다수결이다. 어느 순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엔 치수가 원인의 전부라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둘러싼 마흔한명이,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다수의, 다수에 의한, 다수를 위한 냉풍이 다시 폭포처럼, 송풍구에서 쏟아져내렸다. 손을 뻗어, 송풍구의 밸브를 잠그려 애써보았다. 퓌 퓌, 고장난 밸브의 덮개 한쪽이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다시 밸브를 열었다. 확실히 춥긴 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 에어컨 좀 끕시다,라고 소리치는 것은, 그래서 날 좀 따돌리지 말라니까,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다. 모쪼록 그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반팔 아래의 삼두박근을 손바닥으로 감싼 채- 나는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다수의 결정이다. 참고, 따라야 한다. 에취! 뒤에서 누군가 심한 재채기를 했지만 이내 버스 속은 잠잠해졌다. 인간은 누구나 다수인 척하면서 평생을 살아간다.
〈내리실 분은 버튼을 눌러주세요〉를 나는 누른다. 두 개의 가방을 들고 선 중학생에 대해, 과반수의 승객들은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 다수인 척, 스스로도 무관심하게- 나는 두 개의 가방을 들고서 버스의 계단을 내려선다. 아홉시 반, 이미 1교시가 끝나가고 있었다. 정류장 앞에는 오래된 학원건물이 서 있다. 역광(逆光)의 해가 마침 옥상에 걸려 있어, 건물의 키는 더욱 높아 보였다. 내리실 분은 버튼을 눌러주세요- 한동안 높은 건물의 옥상만 보면, 그런 기분으로 뛰어내리고픈 충동에 휩싸이곤 했다. 내리실 분은, 버튼을 눌러주세요. 그 버튼을, 나는 참 얼마나 매만졌던가.
조용하고 착한 애였어요. 믿기지 않아요. 왜 좀더 잘해주지 못했나 후회가 돼요. 끝끝내 버튼을 누르지 않은 까닭은- 치수 때문도, 혹시 남아 있을 내 삶의 희망 때문도 아니었다. 눈물을 닦으며 다시 수업에 열중할 마흔한명의 〈다수인 척〉 때문이었다. 스스로는 단 한번도 나를 괴롭힌 적이 없다 믿고 있는, 그러니까 인류의, 대표의, 과반수. 조용하고 착한, 인류의 과반수. 실은, 더 잘해주고 싶었을, 인류의 과반수.
딩동. 벨을 눌렀으나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나는 다시 벨을 눌렀다. 그리고 다시 벨을 눌렀다. 또 눌렀다. 또 한번 더, 그리고 다시. 다른 이유는 아니고, 치수가 가방을 이곳에 갖다두라 했으므로- 다른 수가 없다. 외출이라도 했다면 이거 문제가 복잡한데, 하던 차에 겨우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치, 치수 심부름인데. 부스럭, 잠이 덜 깬 얼굴의 마리가 창문을 열었다. 역겨운, 〈뭐야, 너였군〉의 표정이 역력했다. 안녕,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대뜸 시간을 물었다. 지금 몇시야? 열시, 그쯤일 거야. 볕이 부신지 마리는 눈을 뜨지 못했다. 듬성듬성 뽑혔던 머리가 그사이 꽤 자라 있었다. 탁 탁, 담배를 물고 열심히 불을 붙이려던 마리가 라이터를 던지며 말했다. 불 있니? 없어. 불도 없어? 담배 안 피워. 그럼 돈은? 딱히 뭐라 대답을 못하는 동안 마리가 말했다. 가서 음료수 하나만 사다줄래?
탁 탁 탁 탁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이유는 알 수 없고, 치수와 그 주변의 부탁을 들으면 일단 몸이 반응한다.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잖아, 그런 음성이 들려도 할 수 없지만- 또 꺼내든 천원이- 맞다, 치수가 준 것이지,라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돌아오니 마리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보이진 않았지만 티브이도 켜져 있었다. 실내의 어둠속에서 재잘재잘 홈쇼핑이 흘러나왔다. 자, 이거. 음료수와 치수의 가방을 나는 한꺼번에 건네주었다. 몇시에 온대? 그냥 가방만 갖다두랬어. 톡 톡, 재를 털며 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올래?
마리가 말했다. 잠시 머뭇대다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멍하니 마리가 나를 쳐다보았다. 의외라는 눈빛이었다. 멍해진 대화의 공백 사이로 홈쇼핑의 소음이 끼여들었다. 낮은 볼륨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또렷한 재잘재잘이었다. 수라상표 즉석 한우갈비 사태찜, 구이세트. 갈비! 장만에서 요리까지 번거롭고 힘드셨죠? 갑자기 들이닥친 귀한 손님, 하지만 이젠 걱정 마세요… 말도 마세요. 직장 동료들이 아주 감탄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전자레인지에도 이렇게 덮개를 열고… 오분, 오분이면.
배고파. 다시 마리가 입을 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밥 좀 사줄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밥 사주면 놀아줄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갈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수업이라도 받는 거니? 처음으로 웃으며 마리가 물었다. 그 그건 아니고,라는 말이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처럼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아주 감탄을 했다는 표정으로 마리가 되물었다. 가서 할일이라도 있냐? 얼른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없지? 없으면.
탁구를 쳐야 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순간 탁구를 쳐야 해-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탁구? 응, 탁구. 이렇게 덮개를 열고?의 느낌으로 마리가 몇번 라켓을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웃겨 죽겠다는 표정으로 새 담배를 꺼내문 마리가 큭큭큭 했다. 안녕. 탁구공처럼 가볍게, 뛰어서, 나는 계단을 내려왔다. 골목을 나서는데 마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담배를 물고 선 마리가 뭐라뭐라 소리를 질렀다. 뭐라는 거야? 고개를 갸웃하자 억울하게 털을 깎인 양(羊) 같은 표정으로 탁, 창을 닫고 들어가버렸다. 양털 같은 연기가, 창틀의 주변에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치수의 패거리들은 전부 마리와 잤다. 내가 알기론, 그렇다. 들어올래?란 말을 들었을 때 우선 그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1910년에 태어나신(아마도) 걸레라는 이유로, 내가 마리를 피한 것은 아니다. 그게 어때서, 오히려 정말이지 그게 어때서냐는 생각이다. 신이 굽어봐도 보이지 않는 인간이다. 얼마든지 망가져도, 인간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 나와 마찬가지로- 마리는 마리를 둘러싼 마흔한명의 인간, 그런 인간들의 다수결이다. 그 결과다. 인류를 대표해 치수의 패들이 전부 마리와 잔다. 노인들이, 아저씨들이 돈을 주고 마리와 자는 것이다, 다수인 척하는 것이다. 섹스를 해본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다수인 척 섹스를 하기 싫어서도 아니었다. 이유는 한 가지, 나는 누군가와
의미있는 관계를
맺기가 싫다. 정말이지, 그렇다. 차라리 마리가 양이라면, 나는 즐거이 관계를 맺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싫다. 인간이라면, 그러니까 나는 누구와도 관계하고 싶지 않고, 누구와도 관계되고 싶지 않다. 제발이다. 제발, 그런데 왜, 그런데 왜- 날 내버려두지 않는 거지? 툭 툭, 돌멩이를 걷어차며 나는 생각했다. 오전의 거리는 돌멩이가 맘 푹 놓고 십 미터를 굴러가도 좋을 만큼 한산하고 한산했다. 꿈이 있다면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따 같은 거 당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다수인 척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일정하게, 늘 적당한 순위를 유지하고, 또 인간인만큼 고민(개인적인)에 빠지거나 그것을 털어놓을 친구가 있고, 졸업을 하고, 눈에 띄지 않게 거리를 활보하거나 전철을 갈아타고, 노력하고, 근면하며, 무엇보다 여론을 따를 줄 알고, 듣고, 조성하고, 편한 사람으로 통하고, 적당한 직장이라도 얻게 되면 감사하고, 감사할 줄 알고, 이를테면 신앙을 가지거나, 우연히 홈쇼핑에서 정말 좋은 제품을 발견하기도 하고, 구매를 하고, 소비를 하고, 적당한 싯점에 면허를 따고, 어느날 들이닥친 귀중한 직장동료들에게 오분, 오분 만에 갈비찜을 대접할 줄 알고, 자네도 참, 해서 한번쯤은 모두를 만족시킬 줄 아는 그런 사람.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사람이 되면
행복할 수 있을까?
버스는 오지 않았다. 좀더, 나는 버스를 기다려본다. 열시 반, 2교시가 한창일 시간이다. 다수인 척, 열여덟 정거장이 떨어진 곳에서는- 다수가, 다수에 의한, 다수를 위한 수업에 열중해 있을 것이다. 행복할 수, 있을까? 인류에게도 2교시란 게 있을까? 나는 버스를 기다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류의 속셈을 모르겠다.
뭐, 밥은 누가 사줘도 사주는 거겠지만
학교에 돌아오니 이미 치수는 보이지 않았다. 패거리도 따라 시내로 나간 듯했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의 노예처럼- 나는 불안해하면서도- 모처럼 편안히- 도시락을 먹고, 물을 마시고,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잤다. 잘 수, 있었다. 눈을 떴을 땐 이미 5교시가 끝나 있었다. 비록 이상한 일이긴 해도, 치수가 없으면 할일이 없다.
치수는 오지 않았다. 몇번이고 휴대폰을 확인했으나 어떤 호출도 들어와 있지 않았다. 집에 가도 될지 어떨지, 그래서 판단이 서질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모아이가 찾아왔지만, 그래서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어떤 책임도, 지기 싫어서였다. 어쩌지? 집에 가잔 얘기를 모아이가 해주길 바랐는데, 뜻밖에도 탁구-란 대답을 들어야 했다. 탁구, 그러고 또 웅얼웅얼 몇마디를 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 짧고 간략한 탁구, 때문에 나는 다시 벌판을 향해 걷게 되었다. 늘 오가던 그 길을, 그러나 아프리카로 돌아온 흑인처럼- 하늘도 보고 흙을 만져보기도 하며- 걸어갔다. 갈 수, 있었다. 도착하니 문득 아프리카와 비슷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소파는 서쪽을 향해 있었다. 누군가 왔다간 흔적이, 그래서 역력했다. 누굴까? 풀썩 소파에 주저앉으며 내가 말했다. 탁구대도 캐비닛도 모든 것이 그대로였지만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다. 라켓과 공이 보이지 않았다. 벌판 끝의 공사현장을 바라보며- 그래서 나는 여기까지 걸어와 탁구를 즐기는 인부들이 있나보다, 편하게 생각을 해버렸다. 모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떤 삶일까. 수십 톤의 철골을 쌓고, 기계를 작동하고(면허 같은 건 기본이란 얘기 아닌가), 뜨거운 태양 밑에서 주상복합의 건물을 짓고, 무엇보다 땀을 흘리고- 점심을 먹은 후 수백 미터를 걸어와 탁구를 한판 치는 인생. 행복,할까? 따인 주제에다 공도, 라켓도 없는 나로서는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핑, 퐁, 핑, 퐁, 그리고 자 이제 일할 시간이야, 벌판을 뛰어가는 한 무리의 얼룩말 같은 남자들을 나는 떠올렸다. 행복,할까?
따만 당하지 않는다면-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있을 것이다, 그 정도 자신은 있다. 목소리가 크고, 초원의 끝에서도 보일 만큼 흑백의 줄무늬가 선명한- 즉 좋고 싫음을 언제나 분명히할 수 있는- 그런 인생 말이다. 그런 인생을, 살 수 있을까? 물론 자신은 있지만, 만약에… 만약에 함께 탁구를 치던 동료들이… 함께 탁구를 치기도 한다고 해서 어느날 불쑥 찾아온다면… 그러면 어쩌지? 오분 만에… 그러니까 갈비… 그런 걸 미리 사둬야만 하나? 아아 어쩌지? 생각만으로도 나는 머리가 아파왔다.
이봐 모아이… 멀뚱히 나를 쳐다보는 모아이에게 나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식은땀, 같은 것이 목덜미를 흐르는 느낌이었다. 너 말이야… 혹시 우리집에 놀러오고 싶거나, 그런 적 있니? 화산석(火山石)의 피부에 이끼가 껴도 좋을 만큼, 모아이는 오오래 허공을 응시했다. 아니. 석상의 입이 무겁게 움직였다.
고마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모아이가 편하게 느껴졌다. 매일… 여기서 탁구를 치면 좋지 않을까? 일어나 탁구대의 모서리를 매만지며 모아이가 물었을 때도, 나는 그래서 편안한 마음이었다. 과연 모아이라면, 그래서 함께 탁구를 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을 한번 확인한 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면 지금 같이 라켓을 사러 가지 않을래? 모아이가 말했다. 지금? 언제 또 이런 시간이 생길지 알 수도 없고. 확실히, 그건 그렇다는 생각이 나도 들었다. 다시 한번 휴대폰을 확인한 후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것이 태풍의 징조란 걸 안 것은 물론 나중의 일이지만- 초원의 끝에 앉아 있던 수만명의 줄루족(族)이, 우르르 함께 몸을 일으키는 착각이 들었다. 강렬한, 검은 구름의 띠였다.
버스를 타고 우리는 시내로 향했다. 갑자기 날이 어둑해지더니 빗방울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버스는 한산한데다, 교통상황을 전하는 라디오가 거슬리는 음폭으로 차체를 울리고 있었다. 볼륨을 좀 줄여달라 말하고 싶었지만- 하나, 둘… 여섯, 여섯의 승객 중 과반수가 아니란 생각에 그만 자신감을 잃고 말았다. 나는 고작
좀 시끄럽지 않니?
라고 모아이에게 말했을 뿐이었다. 모아이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진 도로는 늘어난 차량과 비바람, 그리고 어둠이 한데 뒤엉켜 심한 체증을 앓기 시작했다. 이나미 리포터 나와주세요. 치직. 네 여기는. 치직. 태풍은 급속도로. 치직. 투신한 여성은 현장에서. 치직. 건물이 대로변이어서. 치직. 사고수습에 어려움이. 치직. 우회하시기 바랍니다. 정말이지, 시끄럽지 않은 걸까? 노선을 우회해 조금씩 속력을 내기 시작한 버스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정말이지 인류는.
메트로폴리스에서 내린 우리는, 일단 편의점을 향해 부리나케 뛰었다. 바람은 이미 강풍으로 돌변해, 광장을 질러 쇼핑몰까지 가기가 그닥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았다. 또다시 휴대폰을 확인한 후, 우리는 나란히 우산과 핫초코를 구입했다. 탁구용품이라고? 글쎄 요즘은 그걸 취급하는 곳도 많이 줄었을 텐데. 놀랍게도 편의점의 사장은 모아이를 잘 아는 눈치였다. 날씨도 이래서… 전화로 확인해보는 게 안전하겠지? 마침 메트로폴리스에 입점(入店)한 친구가 있다며 사장은 직접 전화를 걸어주었다. 그래 스포츠 쪽 말이야,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더니 사장은 아 그렇습니까? 예 예, 하며 급히 약도를 그려서는 우리에게 넘겨주었다. 전화하길 잘했지? 마침 그쪽의 용품점이 러닝머신 전문점으로 전환했다지 뭐냐. 그곳 사장이 여길 가보라는구나. 제대로 된 탁구 전문샵이라는데 알아보겠니?
〈랠리〉라는 이름의 그 가게는 메트로폴리스에서 두 블록 떨어진 구(舊) 상가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도시의 모든 오래된 것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아마도 고집이 있는 가겔 거야, 모아이가 중얼거렸다. 건물이 끊어지는 지점마다 우산이 뒤집힐 만한 강풍이 쏟아졌지만, 위태위태 또 이어진 건물을 방패삼아 우리는 〈랠리〉를 찾아갔다. 그건 그렇고, 편의점의 사장과는 친척이니? 뒤집힌 우산을 다시 뒤집으며 내가 물었다. 아니, 같은 클럽의 회원이야.
클럽이라니!
사실 무척이나 놀랐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클럽, 게다가 그런 어엿한 성인과 친분을 나누는 클럽이라니. 순간 모아이가 명왕성 정도로 멀게 느껴졌지만, 나는 역시 내색하지 않았다. 어떤… 클럽인데? 말해도 될까?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 핼리혜성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임이야. 핼리혜성? 응. 그럼 뭐 소원 같은 걸 비는 건가? 그런 건 아니고, 쉽게 말하자면 핼리가 와서 지구와 충돌해주길 기다리는 사람들이야.
잘은 몰라도, 뭔가 대단한 박력에 나는 사로잡혔다. 충돌이라니,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모아이는 맹렬히 살고 있구나- 우산 속에서 절로 고개가 떨어뜨려졌다. 아까 그 아저씨 말이야… 부인에게 딴 남자가 생겼어. 게다가 돈까지 빼돌리고 있다는 걸 얼마 전에 알았지. 말하자면 그런 사람들이야. 말하자면, 그런 사람들이구나. 나는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구 상가의 낡은 네온들이 비와 강풍에 급격히 풍화작용을 일으키고 있었다.
〈랠리〉는 역시나 낡은 상가의 3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태풍의 영향인지 듬성듬성 문을 닫은 가게들이 있어, 건물은 전체적으로 버려진 벌집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복도나 계단도 거의 한산한 분위기였고, 단지 우리 둘만이 새 집을 짓는 일벌처럼 분주한 마음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주인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랠리〉의 주인은 외국인이었다. 콧날이 가파르고 머리가 벗어진- 그래서 새 같기도 하고 쥐 같기도 한, 묘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근본적으로 외국인인데다, 또 골똘히 쌘드위치를 먹고 있어 우리는 차마 말을 건네기가 곤란했다. 멈칫멈칫 샵을 둘러보기 시작한 모아이를 따라- 그래서 나도 라켓과 탁구대, 즐비한 벽의 포스터와 사진 들을 둘러보았다. 그중 한 장의 사진에 라켓을 추켜올린 주인의 젊은 모습이 담겨 있었다. 선수였구나,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모아이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끝낸 주인은 남은 커피를 마저 비운 후 조심스레 코를 풀었다- 풀었다,라고는 해도 실은 양쪽을 지그시 누르는 것이었다- 선이 강한, 콧수염이 딸린 매부리코가 그래서 더욱 강조되는 느낌이었다. 킁 킁, 거울을 보며 콧수염을 부풀린 주인이 그제야 우릴 향해 말문을 열었다.
벌판에서 왔구나.
기분이 잠시 멍했지만, 모아이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벌판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놀라긴, 요즘은 협회 사람들이 아니고선 그쪽을 경유해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란다. 팔짱을 낀 채 싱긋 웃으며 주인이 얘기했다. 유창한 한국어였다. 〈한국말을 잘하시네요〉와 〈거기 사람들을 아시나요〉가- 나와 모아이의 입에서 동시에 튀어나왔다. 두서없이 날아온 두 개의 공 중에서, 우선 주인은 하나를 선택해 정확히 리시브를 했다.
말이 유창해질 만큼 여기서 산 시간이 길었단다. 내 이름은 세끄라탱, 원래는 프랑스인이고 지금은 한국인이랄까? 아무튼 삼십년 전 서울오픈에 참가했다가 눌러앉은 거란다. 그래서 이젠 스스로도 불분명해. 프랑스인? 한국인? 그러니 쉽게 〈탁구인〉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어. 탁구의 세계에선 국경 따위 없는 거니까.
벌판의 탁구대에 대해 아시나요? 아까와는 다른 각도로, 자신의 공을 주워온 모아이가 낮은 목소리의 써브를 다시 넣었다. 그 탁구대? 경쾌하게 주인은 그 공을 받아주었다. 알다마다지, 업계의 전설이니까. 전설이라구요? 그 탁구대는 말하자면 프로토타입(proto-type)이란다. 프로토타입? 그건 공장에서, 그러니까 대량으로 제품을 양산(量産)하기 전에 제작하는 원형을 뜻하는 거란다. 즉 이 땅에서 제작된 모든 탁구대의 원형인 셈이지.
그런데 그런 게 왜 거기 있는 거죠? 말하자면 복잡하단다. 원래 그 부지는 신화사(信和社)가 있던 자리란다. 한국 최초로 탁구용품을 생산해낸 유서깊은 회사지. 그런데 여차저차해서, 또 여차저차한 이유로 3대째에 이르러 문을 닫게 된 거야. 공장과 부지도 몽땅 헐값에 넘어가버렸지. 그리고 남은 게 그 탁구대와 캐비닛이란다. 실은, 어떤 의미에선 문화재라고 해야 할 그런 물품들이지. 잠깐 이걸 한번 보겠니?
계산대 아래의 금고를 열고 세끄라탱이 꺼낸 것은 라켓이었다. 고무(이때는 러버란 용어를 알지 못했다) 테두리가 죄 벗겨진, 지독히 낡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1926년작(作), 신화사 최초의 라켓이란다. 실은 날 반하게 해서 이곳에 눌러앉게 만든 장본인이지. 어떠냐? 그리고 지그시 한쪽 눈을 내려감은 세끄라탱은 구석의 할로겐 아래에서 라켓의 이모저모를 비춰 보았다. 아름답지?라고 묻는다면- 아름답다고 얘기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는데, 그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든 골동품들이 그렇듯, 라켓은 분명 아름답다고도 말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그만 여기까지. 다시 입을 연 세끄라탱은 이미 푹, 깊은 잠을 자고 난 사람의 표정이었다. 아마도 라켓을 사러 왔겠지? 뭔가 더 묻고픈 게 많았지만, 금고의 문을 잠그는 그에게 더는 질문을 던질 수가 없었다. 고작 라켓을 사면서 여차저차한 사정을 전부 묻기란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모아이도 같은 생각임이 분명했다.
우선 펜홀더(penholder)와 셰이크핸드(shakehand), 두 가지의 대표적인 스타일이 있단다. 일반적으로 펜홀더는 아시아에서, 셰이크핸드는 유럽에서 특히 선호하는 걸로 알려져 있지. 하지만 선택의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거니까. 자, 그렇지 일단은 잡아보는 게 우선이란다. 어때? 두 개의 쌤플 중 나는 펜홀더를, 모아이는 셰이크핸드를 집어들었다. 잠깐, 이렇게 쥐면 안돼. 이렇게, 즉 펜을 쥐듯 부드럽게… 그래서 펜홀더란다. 셰이크핸드도 마찬가지. 말 그대로야, 악수를 한다는 생각으로… 그렇지.
벌판에서 아무렇게나 쥐었을 때와는 뭔가 다른 느낌이- 손끝과 손목과 팔꿈치와 어깨에서, 이윽고 전신으로 차례차례 점등(點燈)되어갔다. 진열장의 형광등보다는 확실히 밝은 에너지의 느낌이었고, 구석의 할로겐보다도 그윽하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태양의 미세한 파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친절하면서도 자극적으로, 세끄라탱은 라켓의 특징과 사용법, 간단한 탁구의 기초동작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뭐랄까, 자극적이라 함은- 이를테면 이런 식의 말을 중간중간 섞어넣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라켓을 가진다는 건 말이다, 말하자면 비로소 자신의 의견을 가진 것이란 얘기야- 나 같은 유형의 인간에게, 확실히 그것은 자극적인 말이었다. 아차, 휴대폰을 꺼내 확인한 후 나는 또다시 솔깃한 그의 전언(傳言)에 귀를 기울였다. 이미 아홉시가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나는 자리를 뜨고 싶지 않았다. 소금을 뒤집어쓴 민달팽이처럼, 모아이도 꼼짝을 할 수 없는 눈치였다.
결국 나는 펜홀더를, 모아이는 셰이크핸드를 구입했다. 그리고 한 박스의 공과 러버 손질용 클리너를 덤으로 샀다. 가게의 불을 끄고 셔터를 내린 후 우리는 함께 계단을 내려왔다. 상가는 이미 어둠속에 잠겨 있었고, 비는 더욱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부스럭 부스럭 세끄라탱이 가방에서 꺼낸 것은 검은색의 커다란 우의(雨衣)였다. 뒤집어쓰면 작은 창을 통해 눈과 코만이 겨우 노출되는 특이한 우의였다. 너희는? 저희는 우산입니다. 그렇구나, 그럼 열심히 쳐라. 랠리(탁구경기에서 공을 주고받는 행위)의 중요성을 잊지 말고. 안녕히 가세요. 폭우속으로 사라지는 세끄라탱의 뒷모습을 보며 우리는 인사를 했다. 그런데 벌판의 그 탁구대 말입니다, 써도 되는 건가요? 모아이가 그렇게 물었을 땐 이미 어둠속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물론이지, 누구나 거기서 탁구를 배우는 거야.
좋은 기분이었다. 침대에 누워서도 나는 여전히 라켓을 만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것은 밤 열시였다. 우산을 쓰고 택시를 탔는데도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하지만 기분은 썬샤인 썬샤인. 샤워를 하고 나와서도 여전히 태양의 파편 같은 것이 마음속에 녹아 있는 느낌이었다.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발가락들을 향해, 나는 몇번이고 써브를 넣는 상상에 빠져 있었다. 썬샤인 썬샤인, 음악을 듣는 것도 일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이 나의 의견이다
의견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라켓을 돌려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붕, 붕, 라켓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상상만으로도 귀 옆을 스치는 듯했다. 넓은 벌판과 같은 잠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라켓을 쥔 채 나는 벌판의 탁구대 앞에 서 있었다. 의견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얼룩말들이 달려오는 듯한 빗소리가 의식의 제방을 범람하기 시작했다. 어둡고 깊은 잠의 강 속으로, 나는 깊이, 끝없이 가라앉았다.
푸하, 잠을 깬 것은 휴대폰의 벨소리가 울려서였다. 강의 밑바닥에서부터- 부력에 의해 튀어오른 탁구공처럼 급격히 의식이 되돌아왔다. 치수의 전화였다. 메씨지가 아니라 전화, 벨이 울리고 통화를 해야 하는, 정말이지 전화였다. 우선 시계를 보았다. 새벽 두시였다. 새벽 두시라면 잠에 빠져 전화를 못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건 전적으로 나의 의견일 뿐이고- 나는 얼른 전화를 받았다. 썬샤인 썬샤인, 리버스된 CD의 트랙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잤냐? 쎄븐일레븐 옆이다. 그것이 전부였다.
썬샤인 썬샤인, 오디오를 끄고 옷을 입고, 나는 부리나케 쎄븐일레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폭우는 더욱 심해져 이미 발목이 물에 잠기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몇분을 걷고 있을 때였다. 바람과 비의 믹싱음 속에서 또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치수의 벨소리였다. 여보세요? 어 못, 어디쯤 왔니. 거, 거의 다 와가. 아, 그게 내가 깜박했는데 말이야. 우산 하나만 챙겨와라. 봐라, 비가 많이 오잖냐? 알지? 접히는 거 그런 작은 거 말고, 길고 큰 우산 말이야. 검은색이면 더 좋겠는데. 알았지? 다시 집으로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치수는 혼자였다. 여기 우산. 나는 우선 우산을 건네주었다. 검은색과 은색이 칸칸이 섞인 것이라 마음을 졸였는데, 의외로 치수는 말없이 우산을 건네받았다. 고마워. 잠깐 귀를 의심했지만, 치수는 분명 고맙다고 얘기했다. 번개가 번뜩였다. 모쪼록 고맙다는 뜻밖의 말 때문에, 나는 더욱 다리를 떨고 있었다. 우리 저쪽으로 가자. 치수가 가자고 한 곳은 쎄븐일레븐에서 십 미터쯤 떨어진 자판기 앞이었다. 여러대의 자판기가 늘어선 위로 줄무늬의 텐트 차양이 드리워진 곳이었다. 동전 있냐? 동전은 언제나 준비해두고 있었다. 두 잔의 커피를 누르고 뽑은 것은 치수였다. 이런 물어보지도 않았네, 혹시 블랙이라도 좋아하는 거 아냐? 무슨 일일까 더 무서웠지만- 아니- 무서움을 참고 나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럼 다행이고. 담배를 꺼낸 치수가 불을 붙였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리 그년이 죽었어.
10층에서 뛰어내렸지 뭐냐. 나 그 때문에 조사받고 나오는 길이야. 그년 전화기에 온통 내 번호가 찍혀 있었거든. 시내 복판에서 뛰어내려 사건이 컸대나 어쨌대나. 나 참, 난 어제 얼굴도 못 봤는데 말이야.
못, 너도 알지? 내가 그년 얼마나 챙겨줬는지.
마리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어제 마지막으로 만난 게 너니까… 궁금한 것도 있고, 또 혹시 말을 맞출 게 있음 맞춰놔야 피곤한 일도 없을 것 같아서 말야. 그러니까 어제 걔 만났을 때 얘길 좀 해줄래? 그게, 그냥 만나서 가방을 줬어. 좀 상세하게 해봐. 응, 문을 두들기고… 걔가 창문을 열더니 몇시냐고 했어. 그리고 또… 음료수를 사다달라고… 그래서 사다줬냐? 으응, 그리고 가방을 건네줬어. 대충 그 정돈데… 혹시 내 얘기 한 건 없냐? 치수의 눈이 잠깐 반짝였다. 어, 없어. 자세히 생각해봐. 나중에 헛소리하지 말고. 다리가 떨려 이미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그냥 없다고만 해선 안된다는 느낌이 그간의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전해져왔다. 아 맞다. 내가 골목을 나서는데 뒤에서 막 소릴 질렀어. 소리? 뭐라고? 그러니까… 밥 좀 사달라고 그랬어. 밥? 으응, 확실히. 그래서? 진짜 그게 다야. 그게 다란 사실을 음미라도 하듯 치수는 몇번 고개를 끄덕였다. 찰칵, 새 담배에 불을 붙이며 치수가 중얼거렸다. 꽈릉 천둥이 울렸지만, 나는 그 중얼거림을 섬세히 엿들을 수 있었다.
뭐, 밥은 누가 사줘도 사주는 거겠지만.
다들 잘하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잘하고 있냐고 묻고 싶은 것이다. 변함없이 45분 버스를 기다리는데 오늘 아침엔 유독 연착을 했다. 51분. 늦은 건 좋은데 만회라도 할 생각인지 난폭운전이 시작되었다. 버릇이, 또 나왔다. 봐라, 신호 무시하고 그냥 밟는다, 꺾고, 끼여든다. 급,정거. 두 대의 경차가 급하게 멈춰선다. 하마터면, 하지만 우리와는 상관없는 하마,터면. 고무가 타듯, 비켜준 비켜줄 수밖에 없는 마음, 같은 것이 퓨즈와도 같은 것이- 탄다, 차는 급,정거를 했지만 우리와는 상관없는 타는 냄새, 타는 냄새가 급,정거를 못했다, 그만 버스의 측면에 충돌한다. 차체에, 유리창에 절대 부딪치진 않았지만- 즉 눈에 안 보이는 유리의 분자(分子), 그런 구조물의 빔을 흔들고, 부수고 넘어온다. 스며든다. 그렇구나. 다들, 어디서, 타이어가 타나보다, 한다. 이봐요. 경차의 뒷유리엔, 아이가 타고 있어요 스티커가 붙어 있다. 아이가 다친 건 아니므로, 아니 그것과도 또 상관없이 버스는 달린다. 실은 아이가 타고 있지도 않고, 비일비재한 스피드일까요, 비일비재하게, 6분이 늦었기 때문입니다. 묻거나 답하진 않아도 동의한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습니까? 아무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퓨즈를, 퓨즈를 갈아야겠군요. 비일비재한, 일입니다. 비일비재하게, 오늘도 버스는 학생들과 회사원들로 꽉차 있다. 흔들리고, 에어컨이 나오고, 한곳에, 한꺼번에 내리기 전까지는 주로 타기만 한다. 계속 탄다, 오른다, 들어가세요. 안은 비었다니까, 그러니까, 잘하고 있냐는 것이다. 저 남자는 집이 종점인지, 언제나 저 자리에 앉아 있다. 내가 타기도 전에, 내가 내릴 때까지도 언제나 앉아 있다. 앉아, 성경을 읽는다. 때론 기도 같은 걸, 때론 성경구절을 응얼거린다. 오늘도 응얼거린다. 내일도, 아마도 모레도. 그러니까, 잘하고 있냐는 것이다. 그래서 차 안은 언제나 소란스럽다. 그 언니가, 어제 드라마에서 그만- 소용돌이무늬의 페이즐리 이어링을 하고 나왔는데, 그게 그만 너무 멋져버렸다. 언니는 지금 인기가 급,상승중이고, 또 과로로 잠깐 입원,하지만 불굴의 연기 투혼으로 남은 24회분의 촬영을 모두 마쳤다,지 뭐야. 대단하지 않니? 기사의 밑줄엔 과연 누구누구! 그래서 스태프 모두의 박수를 받고, 하지만 고질적인 갑상선과, 야 요즘 그런 게 흉이라도 되냐, 언니는 가슴 성형의 의혹을 받았지만, 한편 소속사 사장과의 스캔들이 루머로 밝혀져 언니의 결백이 입증. 그래서 저 언니는, 그 언니가 더욱 좋아진 것이다. 언니가 산양좌(座), 혈액형은 B형이란 걸, 게다가 4년 전의 데뷔작품까지 비디오로 소장하고- 어머, 그때 진짜 예쁘게 나왔는데- 그래서 이번주엔 토요일 두시야, 전에 갔던 데 있지? 야외녹화세트장- 오 야, 비오면 안돼. 그러니까 언니는, 여고생이나 돼가지고 그 언니의 모든 걸 알고 있지만, 그러니까 그 언니는 언니를 알까? 팬 여러분께 감사드려요, 하지만 그런다고 언니에게 감사할까? 사랑할까? 과연 그럴까, 즉 잘하고 있냐는 것이다. 그래서 어젯밤에도 공부를 많이 했고, 옮긴 학원의 예상문제가 꽤 많이 적중, 이번 시험결과가 아주 좋았던 것이다. 나도 옮길까, 한 과목만 옮기긴 좀 그래. 교재는 어떤 식이야/일곱 가지 기능을 하나로. 한번에, 한꺼번에 해결/나 눈에 난 거 보이지, 이거 학원에서 옮았지 뭐냐. 말 마 성적 졸라 올랐대니까, 나 같으면, 그러니까 비싼 학원을/단과를 찾았는데 말이야, 집중, 집중해서 잘,하고 있냐는 것이다. 어머, 나 어제 미쳤지 뭐니, 그래 그거~ 질렀대니까. 응, 당분간은 비밀이야. 응/응, 야 그런데 이번달에 나 또 연체다. 글쎄 담달에 준다니까. 응, 여기? 지금 버스야. 그런 건 아니고- 중요한 건 자기만족 아니겠니? 여보세요? 앗, 과장님 아침부터 웬일이십니까? 네 네. 지금 출근중입니다. 네 네. 괜찮습니다. 네 네. 제가 도착해서요, 바로 파일 첨부해서… 네 네, 제가 그걸 또… 마무리를 해서요, 네 네,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럼요. 갑자기 얼굴에는 해바라기가- 활짝, 해바라기가 녜이 녜. 도착 즉시- 해바라기는 약속합니다. 해바라기는 녜이 녜. 해바라기는 녜이 녜, 잘해드리겠습니다. 잘하고, 있습니다. 염려 놓으시구요, 버스는 절대 코스를 역행하지 않습니다. 교통법규를/저희는 정류장을 지나치지/고객과의 약속을/내리실 분은 버튼을, 사물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구요, 내리실 땐 주의를, 언제나 신호를 준수하고 있습니다. 저희 명보운수는 승객 여러분의 불편사항을, 고객의 소리/접수하고 있습니다, 24시간. 교통카드를 이용하시면 나라의 경제에도, 그리고 카드를, 정액제와 더불어- 새로 개통된 마진터널을 이용함으로써 전체 교통량의 30%를 분산- 효과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상반기 경제현황을 둘러싼, 원리와 원칙과- 원천징수를 통해 탈세의 경로를, 원천봉쇄, 5개 중대를 광화문과 종각, 서울역의 집결지에 분산- 그쪽을 지나는 차량은, 다음은 경기도가 계획한/전체/묘지의 절대적인 부족과/국토의 효율적 운용/아침의 활기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이런 말이 있죠. 러시아의 문호 똘스또이는 말했습니다. 똘스또이는요, 도스또예프스끼와 종종 비교가 되곤 하는데요, 그러니까 사형집행을 당하기 5분 전, 죽기 직전에 비로소 하늘과 땅, 시베리아의 벌판을/다시 화장시설과 납골당의 확장수용안을 검토하고/그 5분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러니까 다들- 비일비재하게, 버스는 25분에 도착했다. 같은 곳에서, 한꺼번에, 다같이, 우리는 내렸다. 늦지 않았다. 늦었던 6분을, 버스는 만회했다, 만회한 것이다. 늦지 않기를- 묻거나 답하진 않아도, 그래서 모두가 동의한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습니까? 아무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늦지 않았습니까? 아무도 늦지 않았습니다. 하나 둘, 뛰는 아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후각세포의 원자(原子), 그런 구조물의 빔을 흔들고, 부수고 고무 타는 냄새가 스며든다. 그렇구나, 다들- 그러니까 다들, 잘하고 있냐는 것이다.
치수가 잠적한 사실을 안 것은 태풍이 끝나고 나서였다. 태풍은 일일 815ml의 강수량을 기록했고, 전국적으로 5조 5천억의 피해를 입혔으며, 사흘간 학교의 문을 닫게 하고, 사흘간 우리를 따에서 해방시킨 후 동해에서 소멸되었다. 어이, 못. 패거리 중 한명이 나를 불렀다. 〈야〉와 〈어이〉가 확실히 다르듯, 호출의 이유도 확실히 다른 것이었다. 어이 못, 잘 들어. 얘기를 요약하자면 치수를 도와줄 목돈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나에겐 백만원, 모아이에겐 삼백만원. 준비할 날짜는 이틀 뒤까지. 그리고 알게 되었다. 치수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치수가, 사라졌다. 치수가 사라졌다.
치수가, 사라졌다
한 기(機)의 쌍발 무스탕 같은 것이 하늘을 날고 있는 소리, 같은 것이 81.5데시벨을 기록한 후 동해 쪽으로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F-82G란 비행기에 대해 아니? 어둡고 비좁은 비상계단을 내려오면서, 그래서 우리는 백만원이니 삼백만원이니에 대한 소리는 일절 하지 않았다. 해박한 편이구나- 모아이가 말해줄 때까지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나는 과연 2차대전사나 군함, 프로펠러 전투기들의 기종 같은 걸 줄줄 외던 아이였다. 평범하지 않은 면이, 없잖아 있기도 했던 유년이었다. 알고 보면, 그렇다. 알고 보면 나도, 알 필요도 없이, 이제 치수가 사라졌다. 백만원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패거리 중 둘이 치수와 함께 잠적했기 때문에 나머지 셋도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잠적에 대한 추리도 각기 달랐다. 마리를 밀어 떨어뜨린 게 치수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죽은 마리 때문에 원조교제의 루트가 발각, 도망을 다니는 입장이라고도 했다. 그게 아니라 마리년 때문에 취조를 받다가 경찰을 패고 튄 거래. 나머지 하나가 그렇게 얘기했다. 셋 다, 아무래도 좋은 이유였다. 심지어 셋도, 아무렴 어떠냐는 눈치였다. 아무렴, 어떨까?
내 말이 그 말이다. 실은 아무렇지 않은 것이다. 이제 어쩌냐, 큰일이라며 담배를 꼬나물긴 했어도 실은 아무렇지 않은 것이다. 곧 이런 얘기도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거 아냐? 뭐? 치수가 회충 때문에 미친다는 거. 뭐, 회충? 아 그건 나만 아는 사실인데 전에 얼마나 놀랐던지. 그러니까 전화가 막 왔는데 빨리 어떤 병원으로 오라는 거야. 부랴부랴 갔더니 병원 대기실에 치수가 떨면서 앉아 있는 거야. 왜 그러냐 했더니 너 혹시 이게 뭔지 아냐며 휴지에 싼 걸 보여주더라고. 휴지 속에 뭔가 지렁인지 국수 같은 게 꿈틀대고 있었어. 우웩 이게 뭐냐 했더니, 글쎄 오랜만에 욕조에 몸을 푹 담그고 있는데 갑자기 다리 사이로 뭔가 보이더래. 뭔가 보니까 분홍색 국수 같은 게 똥구멍에서 쑤욱 나오고 있었대지 뭐냐, 얼른 그놈을 잡았는데 잡자마자 다시 쑥 들어가더래. 그래서 치수와 그 국수가락의 싸움이 시작된 거야. 치수 말로는 제정신이 아니었대. 그게 미끄덩해가지고, 그래도 치수도 보통 독한 게 아니니까. 결국 그래서 끊어져버린 거야. 치수 말로는 놈이 스스로 끊고 들어가버린 거래. 즉 지능도 있는 놈이란 거지. 그래서 그 토막을 들고 백 미터 11초로 뛰어 병원엘 간 거야. 그게 바로 회충이란 거야. 그래도 진찰 끝날 때까지 친구로서 내가 곁에 있어줬지 뭐냐. 의사가 약 계속 먹고 참, 손톱부터 깎고 깨끗이하라고 했지만 그게 되냐? 치수 자취방이 얼마나 더러운지 니들도 알잖아. 그래서 종종 그후에도 미친다고 그랬어. 물론 나한테만 살짝 귀띔을 했지. 그런 날은 내가 봐도 막 돌더라구. 하긴 그런 게 똥구멍에서 막 나오고 들어가고 그러면 나라도 돌았겠지 뭐. 치수가 마리 그년 특히 갈궜잖아. 그게 한번은 그러더라고. 이상하게 그년이랑 할 때면 꼭 그게 기어나온대. 한번은 계속 쑤셔대면서 한 손으론 그걸 붙잡은 적도 었었대더라. 사람이 미칠 노릇 아니겠냐?
아무렴, 어떠냐는 것이다. 누가 따를 당해도, 누가 자살을 해도, 누가 살해되거나 누가 잠적을 해도- 실은 그것이 인류의 반응이다. 육십억이다. 인류라는 전체가 개인을 굽어보기에는 개인이란 개체가 너무나 많다. 비록 이상한 일이긴 해도- 개인은 확실히 인류보다 많다, 다양하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한 사람의 인간은 그래서 분명 인류와는 전혀 다른 생물이다, 동떨어진 종(種)이다. 즉 누구도 자신의 일을 인류에게 통보하지 못한다, 할 수, 없다. 분홍색 국수 같은 게 항문을 자주 들락거린다는 사실을. 실은 그런 이유로 꼭지가 돈 인간에게- 못이 박히듯 맞고 산다는 사실을. 실은 그런 이유로, 개인은 세계로부터 배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소외가 아니고 배제야
벌판을 향해 걸어가며 나는 중얼거렸다. 뭐가? 모아이가 물었다. 따를 당한다는 것 말이야… 소외가 아니라 배제되는 거라고. 아이들한테? 아니, 인류로부터. 살아간다는 건, 실은 인류로부터 계속 배제되어가는 거야. 깎여나가는 피부와도 같은 것이지. 그게 무서워 다들 인류에게 잘 보이려 하는 거야. 다수인 척, 인류의 품속을 파고들어가는 거지. 아무렴 어때. 모아이가 말했다. 그건 그래.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비탈을 내려서자- 태풍이 휩쓸고 간- 말끔히 때를 민 인류의 넓은 등〔背〕 같은 것이 펼쳐져 있었다. 벌판이었다.
탁구대는 무사했다. 소파는 아직도 귀퉁이에서 물이 줄줄 새고 있었지만, 비닐의 커버만큼은 완전히 말라 있었다. 살짝, 모아이가 엉덩이를 얹어보았다. 괜찮아? 괜찮아.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우리는 라켓을 꺼냈다. 기쁘다. 고개를 숙인 채 모아이가 말했다. 안 맞고, 탁구를 칠 수 있다니. 나 역시 같은 기분이었다. 피해를 입은 것은 저 너머의 공사현장인 듯했다. 주상복합의 구조물이 눈에 띄게 파손되어 있었다. 공사도 다 중단인가? 멈춰선 크레인을 바라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그 순간만큼은, 세계가 정지해 있었다.
핑
퐁. 핑 퐁. 세계가 다시 움직인 것은 우리의 랠리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처음엔 말없이, 그러다 한참 동작이 익숙해지자 어느 순간부턴가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기묘한 체험이었다. 공을 받는 순간 말이 나오고, 공이 네트를 넘는 순간 말은 끝이 났다. 한 소절 한 소절 정확한 템포로, 그래서 마치 노래를 주고받는 기분이었다. 긴 말을 하기 위해선 또다시 한 박자를 기다려야 했다. 신체의 동작에 따라 뱉는 것인데다, 상대의 동의 없이는 절로 말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공평한 느낌이었다. 아, 이것이 대화(對話)구나. 나는 비로소 세끄라탱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써놓고 보면 지극히 평범한 대화일 뿐이지만, 나는 분명히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미국에 우리 형은
친형이야, 사촌이야?
사촌
그래서?
흑인이 총을 쐈대
왜
그냥 하나 둘 셋 넷 하면서
(동의)
네 방 중 두 방을 맞았대.
죽었어?
죽었대
탁구를 쳐본 적 있을까? 뭐가? 너의 사촌형 말이야, 죽기 전에 탁구를 쳐봤을까,라는 말이지. 땀을 닦으며 내가 말했다. 글쎄. 손질한 러버를 돌려보며 모아이가 대답했다. 우리는 공평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축구나 야구 같은 건 해보지 않았을까? 그건… 그냥 살았다는 얘기로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평하지 못했을 거야. 패스 한번 못 받았을 수도, 아흔 개의 공을 혼자 던졌어야 했을 수도 있어. 그러다가 뱅뱅 뱅뱅이라… 인류도 정말 너무하는군. 또다시 쌍발 무스탕이 하늘을 나는 소리, 같은 것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나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마리는 탁구를 쳐본 적이 있을까.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인류처럼 거대한 태풍에서 떨어져나온- 개인이란 느낌의 작은 구름이었다. 〈랠리〉는 문을 열었을까? 글쎄… 아마도. 자신의 라켓을 가진다는 거 말이야, 세끄라탱의 말처럼 정말 근사한 일이야. 빙글빙글 손가락에 건 라켓을 권총처럼 돌리며 모아이가 얘기했다. 대단한데? 이틀 내내 연습했어. 나의 펜홀더로는 쉽지 않은 동작이었다. 땀이 식은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백만원이니 삼백만원이니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쩔 거야? 주지 뭐. 모아이의 대답은 간단한 것이었다. 나 역시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차곡차곡 플스와 게임 CD, 참고서 등등을 목록에 넣고 또 넣었다. 다 팔아도 고작 이삼십이 전부일 것 같았다. 모르겠다. 엔딩까지 저장된 메모리카드 세 개, 그래도 겨우 오만원 추가. 답이 없는 계산이었다. 모르겠다, 고개를 젖혔다. 돈이 없니? 모아이가 물었다. 대답 대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름은 점점 둥글어져, 조금 전 랠리를 끝낸 우리의 탁구공을 닮아 있었다. 할아버지한테 말해볼게. 할아버지? 아마 주실 거야. 잠깐 복잡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마리는 뭐라고 떠들고 창을 닫았던 걸까.
역시 우리 학교였구나.
뜻밖의 목소리에 우리는 화들짝 뒤를 돌아보았다. 또래의, 그러나 낯선 얼굴이었다. 이런 식의 만남을 가져본 적이 없어 나는 그 낯선 인간(그를? 그 친구를? 그 아이를? 그 녀석을?)을 어떻게 칭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단지 같은 교복을 입었다는 안도감이, 나와 모아이를 그나마 안심시켜주었다. 누구… 뭐…지? 내가 물었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 그럴 뜻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난 전교학생회장(全校學生會長)이야.
모아이와 나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나쁜 기분은 분명 아닌데, 난감했다. 학생회장은 웃고 있었고, 게다가 뺨은 은근히 분홍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문득 항문에서 분홍의 국수가 나온다는 게 바로 이런 걸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2%의 인간이다. 탁구를 쳐서 생긴 탁구공만한 자신감이, 그래서 그 순간 휘발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땅을, 아마도 모아이는 하늘을 보고 있었을까?
탁구부니? 모아이도 나도 특별히 대답을 하지 않았으므로- 학생회장은 쉽게, 우리를 탁구부로 여기는 듯했다. 여긴 참 묘하구나. 탁구대가 있는 것도 그렇고. 캐비닛은… 혹시 학교에서 가져온 거니. 아니.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구나. 미안, 의심을 했던 건 아니야. 참 시도(市道)대항 예선이 다음달이지? 몰라. 나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가장 큰 행사로 알고 있는데. 우린 탁구부 아니라서 몰라. 탁구부가 아니라고?
그렇구나.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학생회장은 그렇구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근했던 분홍이 미묘하게 짙어진 사실을 나는 알 수 있었다. 탁구부도 아닌데 왜 탁구를 치는 거지? 게다가 이런 곳에서 이토록 열심히. 실은… 이제 막 시작한 거야. 그래?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뺨의 분홍이 마치 호흡이라도 하듯 옅거나 짙어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학생회장의 뺨 속에 엉켜 있을 수많은 회충의 덩어리를 상상했다. 여긴 자주 오니? 우린 늘 이곳에 와. 탁구를 치기 전부터 그랬어. 그래? 그것 참 방과후엔 보통 학원이나 집으로 가는 게 정상인데. 미안해. 미안하다고 나는 말해버렸다.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어. 언제나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넌 어떻게 온 거야? 그냥…이야. 실은 산책을 하다가 길을 잃었어. 조금 생각할 일들이 있었는데 워낙 쉽게 집중하는 타입이라. 고민이라도 있니? 뭐, 개인적인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학생회장으로서의 고민이야. 어떤 건데? 글쎄, 어떨지… 실은 올해 일학년에 말이야, 파충류의 뇌를 가진 아이가 두명 들어왔어. 파충류의 뇌? 개교 이래 처음 있는 일이지. 게다가 지난봄 신체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또다른 일학년 하나가 조류의 뇌를 가진 걸로 밝혀졌고… 이래저래, 그래서 고민이 많아. 교장선생님과 나는.
나는 낙지가 불쌍해.
낙지라니? 그렇잖아, 낙지는 가만히 있는데… 인간은 계속 낙지를 공격하니까. 이대로라면 멸종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야. 문어나 오징어도, 헬리코박터균도 실은 마찬가지야. 잠깐… 낙지나 그런 건 파충류가 아니야, 더군다나 조류도 아니고. 낙지는 아마도 두족류(頭足類)일걸. 아니 낙지는 양서류야. 뻘에서도 수족관에서도 사니까.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왜 갑자기.
왜냐하면- 그리고 모아이까지 끼여들어 점점 상황은 걷잡을 수 없어졌다. 왜냐하면, 이 세계를 손에 쥔 게 노인(老人)들이기 때문이야. 학생회장은 잠시 어, 하는 표정을 짓더니 그런 얘긴… 이상하잖아. 게다가 세계의 주인은 바로 시민(市民)이야. 시민단체가, 또 시민대표가 대부분의 사안을 결정해나가고 있어. 이를테면 나 역시도 시민대표의 한 사람이라 할 수 있지. 누가 우성이니, 누가 열성이니 그런 얘기가 아냐. 내가 지적하고 싶은 건 세상의 돈을 노인들이 다 가지고 있다는 거야. 할아버지도 실은 세 명의 노인이 세계를 쥐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어.
그럼 이건 어떻게 된 거야? 잠깐 바지의 주머니를 부스럭거린 후, 학생회장이 꺼낸 것은 팔천이백원이었다. 돈은… 누구나 갖고 있는 거라구. 게다가 우성과 열성에 관한 얘기가 아니었잖아. 학생회장의 표정이 이윽고 쓸쓸해졌다. 미안해. 나는 다시 미안하다고 말했다. 뜻밖의 얘기들이 나와버린 거야. 진심이 아니었어. 아니 괜찮아. 그래도 파충류나 조류의 뇌를 가진 것보단 나으니까. 그나저나 점점 힘들어지는구나. 일학년들을 생각해도 그렇고… 너희들도 그렇고. 미안, 우린 정말이지
가만히 있을게
그런 건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아. 세계는 전체적으로- 대화를 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어. 비록 점진적이긴 해도 언젠가 그 사실을 니들도 알게 될 거야. 전체적으로? 전체적으로. 다수가? 물론 다수가. 그렇구나, 다들… 잘하고 있구나. 갑자기 마음이 허심탄회해져 나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라켓을 손질해 가방에 담기 시작했다. 어때, 우리 같이 분식집에라도 갈까? 팔천이백원이면 그럭저럭 먹을 수 있을 텐데. 괜찮아… 우린 아직 할일이 남아서. 할일이 남았다는 건 거짓말이었지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럼. 학생회장이 발길을 돌렸다. 경쾌한 보폭이었다. 각목더미를 돌아 사라진 그가, 그러나 잠시 후 더미 사이로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저기, 몇반의 누구인지 물어도 될까? 고함을 들은 모아이가 갑자기 가방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부스럭, 모아이는 도시락을 꺼내더니, 뚜껑을 열어 다시 은빛의 스푼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말없이 스푼의 목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흐물, 분명 그런 느낌으로 스푼의 목이 뚝 꺾였다.
잠시 어, 그런 느낌이 전해지기도 했지만 학생회장은 이내 자취를 감춰버렸다. 결국 벌판엔, 그래서 모아이와 나만이 남아 있었다. 왜 그랬어? 내가 물었다. 모아이의 대답은 말하자면 어떤 요령에 관한 것이었다. 스푼을 구부릴 때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 몰라.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지잉 하는 거야. 의외로 점진적인 것이었구나. 아무튼 그래. 아무튼, 좋은 하늘이다. 정말 그래. 참, 이런 얘긴 해주는 게 좋겠지? 어떤 얘기?
다음달에 핼리가 지구를 찾아와.
그건 확실히, 점진적인 게 아니란 생각이 나로서도 드는 것이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