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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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제2회 창비신인시인상 당선작

 

안주철 安舟徹

1975년 강원 원주 출생. 배재대 국문과 졸업. 현재 원주 불휘문학회, 배재대 문향 동인. rire010@empal.com

 

 

제2회 창비신인시인상 당선작

흉측한 길 외 4편

 

 

아침부터 그 흰 개는 길을

깨물고 놔주지 않았다

길 옆 화단의 잡초와 시간을

뽑고 있는 노인들은

잠깐씩 그 흰 개를 바라보고

아카시아 꽃잎은 바람이 불 때마다

아주 먼 곳으로 떨어지고 있었지만

떨어지기 전

향기를 잃은 꽃잎은

쉽게 남들의 일이 되는 법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트럭이 그 흰 개를 밟고 지나갈 때

그 흰 개는 털을 세우고

길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잠시 속도를 줄이며

백미러를 통해 흰 개를 확인하는 운전사

 

거울에 비친 죽음은

거울에 맺힌 상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한대의 승용차가 그 흰 개를

밟고, 잠시 갓길에 서서

그 흰 개를 바라보고 있다

그 흰 개의 입은 뭉그러져 있고

터진 옆구리가 길을

삼키기 직전

 

나는 그 길 건너편

가파른 벼랑을 보면서

장식으로 걸어논

흉측한 길이라고 잠깐 생각했다

 

좋은 표현인 것 같아

기분이 참 좋았다

 

 

 

거친 나무상자

 

 

사과나무 아래에는

녹슨 전기밥솥과 뒤집어진 양말 한짝

과수원집의 대문 문고리가

벌레 먹은 사과 옆에

떨어져 있고

빈집 벽에는 내가 그려논

몇 덩어리의 달이

풀숲에 엉겨 있는

김씨와 김씨의 아내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다

 

사과나무 그림자는 대문처럼

사과나무 아래 검게 닫혀 있고

 

사과나무 그림자 속으로

몰래 들어가버린 김씨와

사과나무 그림자를 버리고 떠난

김씨의 아내는

바람이 불 때마다

사과나무 이파리 사이로

한입 베어먹은 사과처럼

옷을 추스르고

 

사과나무 아래

버려진

거친 나무상자에는

썩은 사과와 잎들이

쌓여 있고

이끼 낀 상자바닥은 축축하게

사과나무 뿌리에 엉겨붙은

김씨의 아내의 거웃처럼 젖어 있다

 

 

 

창고

 

 

집집마다 어둠이 쌓여 있는 창고는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한채씩 놓여 있었다

창고에는 여름 내내 마당에 얇게 펴바른 후

몇번씩 햇볕으로 뒤집어 말린 닭똥이

닭똥이 풍겨내고 있는

역한 냄새에 한포대씩 담겨 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할 것 같으면

마을의 누구 할 것 없이

마당의 마른 닭똥을 창고에 쌓기 위해 분주하고

일이 끝났을 땐

스피커에 매달린 조합장의 목소리가

꽃 심기 작업을 알리고

마을사람들은 투덜거리는 목장갑을 끼고

맨드라미나 깨꽃, 분꽃, 코스모스를 심기 위해

마을을 가로지르는 도로 옆으로 나갔다

 

어둡기 시작해서야 끝나는 꽃모종

심다 남은 모종을 들고

집으로 돌아올 때

사람들은 창고에 쌓여 있는

마른 닭똥 속으로 모종을

던져버리고

가끔 잘못 던진 모종이

뿌리를 내려 꽃을 피울 때에도

꽃 향기를

코끝에 쌓아두는 법이 없었다

마을사람들의 창고엔 어둠이 한포대씩

차곡차곡 마른 닭똥과 함께 쌓여 있을 뿐이었다

 

마른 닭똥을 겨울 동안 마대에 담아 몇백포씩

거름으로 팔고 나서도 어둠은 한포대도 팔지 못했다

이제 겨울이다

추위가 몇백포씩 어둠과 함께 창고에 쌓이고 있다

 

어둠은 햇볕에 말릴 수 없다

 

 

 

김씨의 오만한 자세

 

 

김씨의 상체는 장거리 스타트 자세다

창문 턱에 놓여진 화분처럼

햇빛을 무섭게 감지한 자세다

 

김씨가 플라스틱 넉가래를 사들이고 나서

그 밤, 김씨를 넘어뜨리던 눈이

고요하게 쌓이고

이 겨울을 위해 사들인

플라스틱 넉가래의 편리함과

그 편리함을 보여주기 위한

김씨의 오만한 미소가

오른쪽 다리를 저는

그를

오랜만에

사람답게 보이게 한다

 

눈 쓸기 싫어하는 과부가

눈을 다 쓸 때쯤 내오는 생강차처럼

씁쓸하면서도 평범한

나의 증오

 

오늘 김씨는

담 밑까지 눈을 바짝

밀어내고 있다

오른쪽 다리를 버팀목으로

온힘을 다해

 

김씨는 길에서 벗겨낸 눈들을

바라보며

오랜만에 오만한 자세다

 

 

 

삼류인생

 

 

나는 시집을 살 때

시인이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본다

그것만 열심히 읽어서 그런지

시인 이름만 대면 그가 쓴 시는

몰라도 그가 나온 대학은

나와 함께 글쓰는 친구처럼

잘 안다

 

술을 마실 때만

왜 없는 놈들은 글쓰기도 힘드냐고

눈과 목에 힘을 줘보기도 하고

이제부터 삼류대학 나와서

시집 낸 놈이나 그런 작품만을

사보자고 비틀거리는 결심도 해보지만

 

며칠 후 서점에 들러

나와 나의 친구는

삼류대학 나와서 시집 낸

놈들의 시집을 한권도 사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 동안

삼류라는 말과 시인의 약력에

대해 함구한다

 

어느 오후에는

술집에서 다시 만나

그런 속된 얘기는 하지 말자고

정신까지 비틀거리며 결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