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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 소설

 

망각과 기억의 사이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저서로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이 있음. llauper@hanafos.com

 

 

1. 돌아오는 유령들

 

이 계절에 흥미롭게 읽은 임철우(林哲佑)의 단편 「나비길: 황천이야기2」(『문학동네』 2005년 여름호)는 황천읍에서 벌어지는 유령소동으로 시작된다. 마을의 중학교에 부임해온 생물선생 기병대가 추문에 휩싸여 실종되는 과정을 그려가는 이 소설은 스토리의 재미라는 측면에서도 뛰어난 흡입력을 발휘하는 작품이다. 소설 전반을 휘어감는 끈적끈적한 ‘늪’의 이미지, 소리없이 목을 죄어오는 악몽과 추문, 산 자와 죽은 자를 오가는 ‘나비’의 상징은 소설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적절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황천읍이라는 고립된 공간 역시 학교와 직장, 가족이 지시하는 규범적 삶에서 크게 이탈하지 않는 마을사람들의 삶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무대가 된다.

여성과 남성, 사회와 가정, 삶과 죽음, 이성애와 동성애, 실재와 환상,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어진 이분법적 가치기준을 비판하는 이 소설은 집단의 욕망과 광기가 지닌 폭력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동안 임철우 소설이 꾸준히 다루어왔던 주제들을 연상시킨다. 오랜만에 발표한 장편소설 『백년여관』(한겨레신문사 2004) 역시 영도(影島)에 있는 ‘백년여관’에 모여든 억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등장하는 구도라든지 현재와 과거, 실재와 환상이 교차하는 방식의 서술기법은 「나비길」을 포함한 황천이야기 연작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황천이야기 첫번째에 해당하는 「칠선녀주」(『문학판』 2004년 겨울호)에서도 신비한 술을 빚는 모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국근대사의 비극적 사건들이 등장한다.

황천이야기 연작의 두번째 작품에 해당하는 「나비길」은 추문에 휩싸여 삶의 근거지를 박탈당한 나비연구자 기병대의 이야기를 통해, 집단의 규율과 질서에서 튕겨져나간 타자(他者)들의 운명을 그리고 있다. 푸꼬(Foucault)의 지적대로 근대사회의 각종 제도와 기관들은 ‘비정상적’ 사람들에 의해 ‘정상적’ 사람들이 희생되지 않도록 면밀한 감시와 처벌을 행해왔다. 19세기 중반에 대대적으로 체제가 구축되어 ‘비정상인’들을 판별하고 가려내어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역할을 정당화했던 서구 정신의학의 학문적 부상은 그 대표적인 기획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미셸 푸꼬 지음, 박정자 옮김 『비정상인들』, 동문선 2001, 349~80면 참조). 변태선생으로 놀림당한 나비선생 역시 ‘비정상’으로 보이는 특이한 행동으로 서서히 집단에서 이탈되기 시작한다. 권위적인 남자교사의 이미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그의 부드럽고 다정한 태도는 사람들에게 이질감을 불러일으킨다. 성정체성의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우며, 장애인에 대해서도 편견을 갖지 않는 그의 태도는 일반인들에게 오히려 혐오와 의문의 대상이 된다.

나비선생에게 마을사람들이 보여주는 편견과 차별은, 집단의 ‘정상적’ 가치관에 흡수되지 않는 타자가 박해당하는 과정이 어떤 것인지를 리얼하게 드러낸다. 나비선생과 더불어 이 소설에서 또다른 타자로 부각되는 인물은 황천이발관 주인 양성구다. ‘양마담’이라는 별명을 지닐 정도로 소심하고 수줍은 양성구는 객지에서 날아온 미지의 인물 나비선생에게 단숨에 매혹된다. “나이를 가늠하기 불가능한, 완전한 소년의 얼굴”을 지닌 나비선생은 “희고 정갈한 목덜미에 보송보송한 솜털이 보얗게 돋아 있”는 “눈부신 순백의” 모습으로 이발사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실제로 소설에서 애절하게 부각되는 것은 나비선생 기병대와 이발사 양성구의 로맨스이다. 두 사람 사이에 싹튼 감정이 순수한 우정인지 아니면 성적인 관심이 동반된 사랑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집단에서 소외된 주변인임을 본능적으로 자각한 이발사와 나비선생이 서로를 위무하는 모습은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간절한 로맨스가 주는 여운에도 불구하고, 나비선생을 배신한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이발사의 모습을 그린 소설의 결말은 이 작품이 결국 넘지 못한 경계가 무엇인지를 일깨운다. 소설 초반에 제기되었던 소수자에 대한 억압과 폭력의 문제는 후반부로 갈수록 그 복잡하고 섬세한 층위들이 생략된 채 집단과 개인,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립구도 속에서 극화된다. 인물 형상화의 문제점도 비슷한 맥락에 놓여 있다. 나비선생의 선량한 성품과 비교한다면 그를 괴롭히는 ‘자율방범대장’ 나수칠은 지독하게 혐오스러운 악인으로 그려진다. 나수칠이 남성가부장 사회의 모순과 폭력을 집약하는 상징적인 인물로 전형화되는 부분은, 그가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아 귀향한 포악한 사업가라는 설정에서도 드러난다. 더불어 나수칠의 횡포를 묵인하고 지지하는 마을사람들의 차별적 태도도 구체적인 에피쏘드들보다는 막연한 ‘소문’의 분위기로 형상화된다. 나비선생을 유령으로 만든 것은 ‘우리 모두’라는 작가의 전언에도 불구하고 막상 이를 뒷받침하는 주변인물들과 연결된 스토리들은 다양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동성 사이의 욕망이 발생하는 내밀한 과정에 끊임없이 개인의 가족사나 정신적 상처를 개입시키는 작가의 설명적 묘사는 이 소설이 제기한 욕망과 금기의 다양한 해석 층위를 제한한다. 두 사람 사이에 싹튼 감정이 순수한 우정인지 아니면 성적인 관심이 동반된 사랑인지도 모호하지만, 이 사랑의 형태가 ‘이성애자’의 시선 속에서 가족과 군대집단 등의 환경적 요인의 영향으로 거듭 규정되고 있는 것은 눈에 띈다. 나비선생을 향한 이발사의 욕망은 그가 군대시절 겪었던 억압적 체험에 대한 보상심리로 설명되며, 나비선생 역시 어머니를 여읜 고독감으로 인해 내성적이고 여린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묘사된다. 특히 나비선생은 정체를 알기 힘든 아름답고 유혹적인 모습으로 끝까지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신비화된 인물이다. 여성이 영원한 자연적 모성과 흔히 연결되는 것처럼 나비선생은 자라지 않는 소년의 이미지로 고정된다. 그는 집단적 금기가 밀어낸 어둠의 지대에 웅크리고 숨은 애처로운 피터팬처럼 보인다.

‘나는 남자다’라는 주문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발사의 혼란스러운 심경이나 모성콤플렉스에 시달리며 성인사회로의 진입을 거부하는 나비선생의 심리에 대한 묘사는 우리 소설이 환기시키는 타자의 상상력이 아직도 많은 금기에 사로잡혀 있음을 새삼 확인시킨다. 나비선생의 유령을 불러낸 것은 그를 어둠의 영역으로 밀쳐낸 우리 모두라고 소설은 강조하지만 집단의 구성원들이 공감해야 할 그 죄의식과 자책감은 모호하고 막연한 분위기로 작품 속에 떠다닐 따름이다. 그런 맥락에서 나비선생이 무고한 희생자이자 ‘유령’으로밖에 귀환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는 죄의식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수수께끼로 남을 뿐 세속에 안착하지 못한다. 결국 아무도 손길을 내밀지 않는 타자의 영역에서 유령으로 맴도는 나비선생의 존재는 제도와 금기를 돌파하는 다양한 방식의 사랑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되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잃어버린 기억, 고립의 방식

 

임철우의 소설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실재와 환상의 경계를 더듬어가는 심리적 기록들을 통해 개인들의 숨은 꿈과 욕망을 추적하는 서술방식은 최근 우리 소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향이라 할 수 있다. 최인석(崔仁碩) 역시 현실의 질곡을 강렬하게 되비추는 환상구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소설가라고 할 수 있다. 「내 님의 당나귀」(『문학수첩』 2005년 여름호)와 「목숨의 기억」(『현대문학』 7월호)은 ‘숨은 아비 찾기’라는 모티프를 통해 역사적 상흔과 인간다운 삶에 대한 희망을 절망적인 환상의 형식으로 포착한 작품들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포함한 최인석 소설의 부계인물들은 남성가장이라는 측면에서 한국 가족의 전형적 위계질서를 재현하지만, 억압받는 사회계층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 주변화된 인물들이다. 지배와 억압을 동시에 구현하고 있는 이 특이한 인물형은 사회체제에 대한 분노를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괴물’로 상징화된다. 「내 님의 당나귀」만 하더라도 ‘순이 애비’로 자처하는 노인은 욕설을 퍼붓고 행패를 부리며 병원 이곳저곳에 나타나 사람들을 제압하는 ‘도깨비’에 비유되며, 「목숨의 기억」에서 가족사의 상처로 신음하는 할아버지는 물갈퀴를 지닌 그로테스크한 환상으로 표현된다.

거론한 두 작품 중에서도 이미지와 상징의 측면에서 주목되는 작품은 「목숨의 기억」인데 이 소설은 ‘할애비’의 기억상실을 통해 분단역사의 고통을 암시하고 있다.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죽은 아들에 대한 아픈 기억을 지닌 할애비는 치매를 앓으면서 꽃을 먹고, 어린애 같은 행동을 벌인다. “입당원서 쓰러 가야” 한다는 할애비의 고통스러운 되뇌임은 “다 잊어먹었다. 그런 거 다 기억하고 어찌 산다냐. 다 잊고 살아야 헌다. 다 잊어야 살어……”라는 할미의 한맺힌 고백과 대조를 이루며 상처받은 가족사의 면면을 암시한다. 치매에 걸린 할애비가 꿈꾸는 수궁의 세계는 “사람이 채송화하고도 풍뎅이하고도 얘기를 하고, 단풍나무하고도 호랑나비하고도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한다”는 곳이다. 억울하게 아들을 잃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디기 위해 할애비는 수궁세계를 상상하며 그 속에서 행복한 꿈을 꾸는 것이다.

소설에서 기억을 잃은 조부를 바라보며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아가려는 주인공의 간절한 몸짓은 결국 수포로 돌아간다. 그는 ‘빵떡모자’를 쓴 예술가가 진짜 아버지인지 아니면 간첩혐의를 쓴 채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아버지인지 끝까지 알 수 없다. 이 현실을 되비추는 고독한 환상의 세계는 지옥 같은 세상에서 달아날 출구는 그 어디에도 없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최인석 소설의 미덕은, 이렇듯 허황된 낙관과 희망 대신 절망적인 고립이나 자폭의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절박성을 포착하는 데 있다. 풍요로운 물질문명의 뒷골목에는 터질 듯한 고함과 분노, 비명이 들끓는 고통의 삶이 변함없이 현존한다. 최인석 소설의 전언대로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대립하는 현실을 벗어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증오와 복수의 형식이 강렬한 이미지로 포착되었던 전작들에 비해, 「목숨의 기억」을 포함한 최인석의 근작들은 환상의 형식이나 탈주의 결말을 부각시킴으로써 주제의 경직성을 완화하려는 시도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 같은 현실과 극적 환상을 대비시키는 최인석 특유의 서사적 가공방식이 예정된 도식이나 모호한 탈주의 결말을 이끌어내는 문제점은 새삼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의 소설이 표출하는 집요한 비관주의가 선험적인 절망의식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는 지적 역시 되새겨볼 만하다(서영인 「피안과 현실」, 『충돌하는 차이들의 심층』, 창비 2005, 130면). 강자와 약자가 대결하는, 그리고 현실 그대로 약자가 늘 패배하는 그의 소설에서는 환상조차도 짊어지기 힘든 십자가가 되어 주인공들을 짓누른다. 당나귀로, 물갈퀴로, 수궁으로 현현하는 환상들은 세상을 향해 더이상 손을 내밀지 않는다. 아비 찾기를 내세우는 이 두 소설이 진짜 아버지를 확인하지 못한 채 혼돈의 상태에 남겨지는 결말이 미진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화해가 불가능한 현실 속에서 주인공이 빠져드는 정체성의 혼란은 최인석 소설이 고민하는 새로운 출구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최인석의 소설이 절망 속의 꿈꾸기를 통하여 비참한 현실의 일면들을 환기시킨다면, 정지아(鄭智我)의 소설은 내적인 응축의 방식으로 역사적 상처와 고단한 가족사의 기억을 끌어안는다. 여러 작품 중에서도 「풍경」(『문학과경계』 2005년 여름호)이 눈에 띄는 이유는 균질화된 역사의 기억을 뚫고 솟아오른 개인의 욕망과 꿈을 작가가 절실하게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는 한 노인의 삶을 묘사한 이 소설에서 어떤 격정의 순간을 포착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지난 시대의 소설들 같으면 서사의 중심부에 내세웠을 전쟁과 분단 이야기는 이 고독한 소설 뒤에 꼭꼭 숨겨져 있다. 가족사의 아픈 기억은 어머니의 치매상태 속에서 흐릿하게 비춰질 따름이다. 어머니와 아들이 살고 있는 산골의 고적한 집 역시 역사적 풍랑으로부터 의도적으로 차단된 폐쇄의 공간이다. 이 산골에서 큰아들과 작은아들이 여수 14연대를 따라 입산하여 다시는 돌아오지 않게 된 불행한 기억은 “가마솥에 물 끓는 소리, 닭 우는 소리, 군인들의 웃음소리,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누이들이 쫑쫑 달리던 소리, 달그락거리며 부딪는 총소리”의 행복한 추억 속에 은폐된다.

호젓한 산골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었을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후, 집에 남은 어머니와 막내아들은 망각과 고립의 삶을 살아간다. 어쩌면 이 고립의 삶은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존하는 유일한 수단인지도 모른다. 세속과 분리되어 시간의 흐름을 잊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안전할 수 있다는 철저한 고립의 전략은, 개인을 압도하는 외부의 폭력에 대한 격렬한 항거를 보여준다. “날이 풀리고 개구리가 뛰어다니면 곡식을 심었고 그것이 쑥쑥 자라 땡볕에 열매가 익으면 따먹었으며, 날이 추우면 군불을 지피고 방에 들앉”는 삶만을 살아온 모자에게 현재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서서히 잃어가는 시간으로 의미를 갖는다.

상처의 중심부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나 외부의 삶을 단절시키는 고립의 삶은 정지아 소설이 주된 테마로 삼아왔던 ‘운명에 항거하는 자아’의 문제와 연결된다. 근작 「운명」(『한국문학』 2005년 여름호)에서 우연적 사랑을 피해 달아나는 주인공의 모습은 단절과 격리를 통해서 스스로를 보존하려는 자아의 안타까운 집념을 보여준다. 「풍경」의 세계에서도 그것은 완고한 단독자의 자기 결벽으로 나타난다. “아랫마을부터 기어올라온 어둠이 어머니와 그를 집어삼키고 산 정상을 향해 달려갔다. 낡아 부스러질 듯한 두 개의 기둥처럼 어머니와 그는 세월을 버티고 있었다. 아직 달은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후면 손톱 끝만한 그믐달이 어둠속으로 스며들 것이었다”라는 구절을 읽으면, 자기 내면의 ‘풍경’ 속에 침잠하는 자아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풍경」이 창조한 완전무결한 고독의 시간은 역사적인 상처를 새로운 방식으로 비끄러매는 독특한 자기성찰의 영역과 만난다. 시간 속에 기억들을 봉인해놓고 찬찬히 들여다보는 이 성찰의 자세는 손쉬운 화해나 용서를 허락하지 않는 결벽함으로 감동을 준다. 역사적 물결 속에 부표처럼 떠다니는 사람들의 상처와 회한을 조심스럽게 싸매는 이 내성적 서술의 방식을 옹호하고 싶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3. 도시를 가로지르는 추억의 마술

 

최인석과 정지아의 소설에서 망각과 고립은 현재의 고통을 견디기 위한 존재의 필사적인 생존방식으로 형상화된다. 기억의 강박에서 풀려나기 위해 기꺼이 고독을 선택하는 고집스러운 소설인물들은 집단 속에 묻혀 있던 개인의 다양한 욕망들과 조우한다. 여기서 도시적 일상성의 빛과 어둠을 예민하게 응시하는 은희경(殷熙耕)과 하성란(河成蘭)의 소설로 시선을 옮겨가보자. 이들 소설은 분열과 소외의 경험으로 가득한 현대적 일상에서 기억의 힘이 얼마나 매혹적이고 교묘한 마력을 갖고 있는지 예민하게 자각해 보인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특히 은희경의 경우 얼마전에 출간한 장편소설 『비밀과 거짓말』(문학동네 2005)을 통하여,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혈연과 운명적 인연들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어 주목을 요한다. 『비밀과 거짓말』을 포함한 최근 은희경의 소설은 부정적이고 환멸적인 세계에 몸담고 있는 자아의 기원을 세심히 들여다보는 것에 관심을 둔다. 낭만적 추억의 힘을 상기시키는 듯한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도 그러한 인연과 운명의 만남에 대한 긍정과 사색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 ‘1991년의 코스모나츠’는 주인공의 젊은 날을 일깨우는 상징적인 시대기호이다. 한 중년 남자의 내면적 고백 속에서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여러 에피쏘드를 배열해 보이는 방식이 인상적인 이 소설은 쏘비에뜨연방의 몰락, 유리 가가린의 우주비행, 연인이었던 은숙의 결혼식, 술에 취해 소설원고를 잃어버린 청춘의 어느날을 차례로 엮어나간다. 조국이 사라진 후 귀환하게 될 코스모나츠의 아이러니컬한 운명처럼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 역시 자신의 미래를 짐작할 수 없는 불안과 막연한 혼돈 속에서 청춘을 보냈다.

운명이 빚어내는 삶의 결정적 순간들을 회고하는 이 작품은 덧없고 우연적인 계기들로 이루어진 삶의 불가해성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건조하고 반복적인 일상, 불안과 설렘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청춘은 소설에서 대비를 이루는 두 세계로 드러난다. 주인공은 현재와 과거의 경계에 서서 추억을 회상한다. 타인의 시선으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감정적 노출을 경계하던 은희경의 인물들의 냉소적 화법을 상기한다면 소설 속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감상적인 몸짓은 의외의 것으로 여겨진다. 성장을 멈추어버렸노라고 단언하던 확신에 찬 소녀의 음성이 아닌, 나이를 먹어도 삶에 대해 자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노라는 불안하고 수줍은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하다.

“오늘 나는 시간을 가로지르는 통로에 잠깐 서 있는 건지도 모른다. 유리 가가린의 세상에서는 종이접기를 하듯 시간을 접어두는 것이 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라는 고백에서 짐작되듯이 추억은 순식간에 도시의 건조한 일상을 가로지르고 다가와 주인공을 소환해간다. 유리 가가린의 이야기와 주인공의 회상이 상징적으로 결합되는 이 장면은 예정되어 있는, 그러나 다소 어색한 반전의 분위기를 띤다. 리버 쎄느에서의 약속을 확인해가는 미스터리 형식의 서사는 삶의 피로와 허무를 고백하는 주인공의 진술 속에서 흩어진다. K의 자살이나 은숙의 결혼은 아련한 추억의 마술 속에서 흐릿하게 환기되는 영상일 따름이다. 주변인물의 사연들에서 거듭 미끄러져나가는 주인공의 자기회상은 삶을 위로하는 잠언록 속에서 힘겹게 맴돌고 있는 것이다.

주관적 자아의 극대화가 인물과 서사 간의 유기적 관련성을 제약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 소설이 보여주는 고백의 화법은 최근 은희경 소설들의 성숙과 변모의 지점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미있게 다가온다. 자아가 외부환경에 제약당할 수밖에 없는 숙명적 조건들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려는 시도는 소설 속에서 따뜻한 연민의 시선으로 분출된다. 환멸적 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아이러니를 창출했던 작가는 자기긍정을 통해 삶의 숙명성에 대한 성찰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극대화된 자기연민과 몰입,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응시하는 자기성찰의 지점은 그 자체로의 완결적 의미보다는 이후의 소설 여정 속에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속』의 세계가 면밀히 탐색해 보였던 일상의 희비극적 풍경, 그리고 『비밀과 거짓말』이 묘파한 드라마틱한 가족서사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 이 작품은 내면적인 고백의 글쓰기가 향하게 될 다음의 행로를 궁금하게 만든다.

하성란의 「1984년」(『한국문학』 2005년 여름호)에서도 추억의 화법을 통하여 개인의 삶과 만나는 시대적 기호를 만날 수 있다. 하성란 소설에서 찬찬하게 복원되는 추억의 세계는 도시일상을 살아가는 개인들의 삶을 다양하게 탐색하기 위한 작가의 정공법적 대응을 암시한다. 치밀한 사물묘사와 긴장감있는 스토리텔링의 힘은 여전히 유지하면서 등장인물들의 내면에 더욱 밀착하는 서술을 하고 있는 점은 최근 소설에서 달라진 부분이다. 「웨하스로 만든 집」(『문예중앙』 2005년 봄호) 등 최근 작품에서 가족적 소재 속에 내밀한 화자의 목소리를 자주 개입시키는 점도 눈에 띈다. 특히 이전의 소설에서 부재하다시피 했던 ‘아버지’의 존재가 실물감을 띠고 등장하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철저한 계급사회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독재자가 권력을 휘두르고 ‘사상경찰’이라 불리는 경찰들이 텔레스크린으로 당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조지 오웰이 제시한 암울한 ‘1984년’”에 열아홉살인 주인공은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어머니가 바느질해서 버는 돈으로 여섯 식구가 먹고살아야 하는 현실은 “책가방에는 늘 구직용 이력서 다섯 통이 비치되어 있”고 “하루에도 몇번씩 마음 한구석으로 정찰용 헬리콥터가 불안하게 날아오르고 저벅저벅 군홧발 소리가 꿈자리를 밟고 지나”갔던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다. 주인공이 취직을 준비하기 위해 상식책을 외우던 그 시절, 많은 사람을 일시적으로 위로했던 것은 유리 겔라의 마술이었다.

대학을 가지 않은 사람에게는 잿빛이기만 한 사회, 언제 취직이 될지 모르는 불안한 나날들, 그 속에 문득 기적처럼 유리 겔라의 숟가락 마술이 찾아오고 주인공은 친구와 뒤바뀌어 엉겁결에 오퍼상에 취직을 하게 된다. 기적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상의 삶에서 잠시나마 사람들을 위로했던 그 가짜 마법의 세계를 응시하는 작가의 찬찬한 시선은 주변화된 청춘의 한시절을 섬세하게 복원한다. 운좋게 직장을 구해서 기뻐하던 것도 잠시뿐, 어머니는 바느질 품삯을 떼이고, 여섯 식구의 고단한 일상은 평소와 다름없이 진행된다. 에나멜 구두와 빌로드 투피스를 장만하여 출근을 시작하지만 수백명이 실내체육관에 앉아 타이프라이터를 기계적으로 두드려대던 그 황막한 일상의 풍경은 고스란히 현실 속에 박혀 있는 것이다.

현대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텔레스크린’에 의해 ‘감시당하는’ 오웰 소설의 주인공들 같다는 식의 진부한 서술이 의식적으로 등장하긴 하지만,이 소설이 포착하는 주변부 삶의 고단함은 여러 대목의 묘사들에서 솜씨있게 포착되고 있다. 일거리에서 묻어나온 실오라기가 국그릇에 떠다니다가 아이들의 양말에 묻어나가는 장면,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타이핑하며 새끼손가락이 자꾸 미끄러져 자판에 끼는 모습, 양복 꾸러미를 머리에 이고 호두까기 인형처럼 입을 앙다문 엄마를 길가에서 만나는 모습 등은 이 소설이 갖는 기억의 힘을 생기있게 담아내는 뛰어난 대목들이다. 「웨하스로 만든 집」에서 무너지는 집, 엇갈리는 운명, 가족에 대한 애착의 시선을 흥미롭게 교차시킨 것처럼 작가는 이 소설에서도 현실에 밀착한 기억의 모티프를 통해 그 어떤 과장의 시선 없이 추억의 시절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열아홉의 소녀가 무한경쟁체제의 사회구조에 첫발을 들여놓는 과정을 기록한 이 쓸쓸한 고백록은 십대의 추억이야말로 우리를 미혹시키는 가장 고통스러운 환상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꿈 많은 학창시절로 치장되기 쉬운 십대의 시절은 냉정한 경쟁사회로 진입하기 위한 덧없는 대기과정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성장이란 인격적으로 성숙한 그 무엇인가를 얻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그저 사회의 냉엄한 규율 속으로 매끄럽게 빨려들어가는 것에 불과함을 작가는 담담하게 진술하는 것이다.

 

 

4. 망각과 기억의 사이

 

공식적 역사의 기록 뒤에 숨겨진 개인들의 다양한 사연을 포착하는 서사의 방식은 최근 소설에서 자주 발견되는 경향이다. 환상과 현실의 교차를 기법적으로 활용하여 개인의 내면적 기록을 절실하게 부각시키는 방법에서부터 본격적인 허구의 공간으로 역사적 기록을 활용하는 소설까지 다양한 형태의 소설들이 발표되고 있다. 역사에서 억울하게 희생되어간 이름없는 사람들을 돌아보는 소설들의 흐름 중에서도 정지아의 소설이 견지하는 거리감각과 내적인 응축의 방식은 눈에 띄는 미덕을 보여준다.

수많은 차별과 배제가 은밀히 행해지는 일상의 삶에서 임철우와 최인석의 소설이 환기하는 타자의 상상력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소설은 유령과 괴물 등의 타자적 세계를 상징적으로 포착함으로써 소수자를 배제하는 집단의 차별논리가 얼마나 우리의 삶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가를 증거한다. 임철우 소설이 호소하듯이 ‘정상적인’ 삶에서 배제된 타자들의 유령은 우리 내부에 소리없이 스며들어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죄의식을 호출한다. 그것은 일상에 깊이 스며 있는 다양한 형태의 억압과 규율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요구한다.

도시적 일상이 부여하는 추억의 모티프를 통해서 삶의 심연을 들여다보려는 은희경과 하성란의 소설도 이 계절의 주목되는 작품들이다. 은희경 소설에서 보이는 우연성의 담담한 수락은 이전 소설들과는 달라진 변화의 징후를 보여준다. 하성란의 소설 역시 가족사의 기억과 내적 화자의 부각이 이후의 어떤 소설들로 연결될지도 궁금하고 흥미로운 부분이다.

기억의 빈 곳을 채워가는 오랜 여정을 거쳐 우리는 드디어 덧없는 현재로 귀환한다. 소설의 한 대목처럼 어느 한순간은 “지워져버렸던 청춘의 어느 하루가 선명하게 되살아나면서 오히려 현재의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질 때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 혼돈의 시간여행이 궁극적으로 귀환하는 곳은 ‘지금―여기’임을 새삼스럽게 자각할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모든 순간은 바로 그 순간의 혁명 가능성을 수반하며(…) 과거의 자식이 과거를 깨우는 다행스러운 계기가 되리라는” 벤야민(Benjamin)의 믿음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수잔 벅 모스 지음, 김정아 옮김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문학동네 2004). 이야기꾼의 참된 저력은 과거를 현재 속에서 소통시켜주는 데 있으며, 소설이 선택하는 고통스러운 기억의 여정 역시 현재의 삶 속에서 생명력을 갖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