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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 시
환상과 실재
박형준 朴瑩浚
시인.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춤』 등이 있음. agbai@korea.com
로트레아몽(Lautréamont)의 시집 『말도로르의 노래』(Les Chants de Maldoror)에는 ‘재봉틀과 우산’을 결합시키는 대목이 나오는데, 문학청년 시절에는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던 이 구절이 지금은 왠지 고전적으로 들린다. 어쨌든 서로 거리가 멀면 멀수록 충돌 효과가 커지는 동떨어진 대상들의 새로운 메타포의 효과가 내 머릿속에서는 최상의 모더니티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순간적인 착시 같은 것이었는데, 영화에서처럼 소리들이 일시에 소거되며 휴대폰에 대고 무어라 소리치거나 소곤대는 사람들의 입 모양, 귀 모양, 액정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눈, 빠르게 무언가 꾹꾹 눌러가는 손가락들이 어안렌즈 속의 세계처럼 과잉 왜곡되어 클로즈업된 채 전철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모두 모국어로 말하고 있었고 모국어로 문자를 송신하고 있었지만 나는 순식간에 이방인의 느낌 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나만이 아니라 전철 안의 모두가 서로에게 이방인인 느낌 같은 것이었다.
―김선우 산문집 『김선우의 사물들』(눌와 2005)222면
외국에 체류하다 돌아온 시인은 고국을 비워둔 단 일년이란 시간도 놀라웠나보다. 모국어가 아닌 말이 주는 긴장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모국어에 대한 갈망을 채우려는 노력도 잠시, 전철 풍경은 일거에 그 향수를 걷어가버린다. 시인은 서두부터 프루스뜨(M. Proust)가 마들렌느 과자를 적셔먹듯, 휴대폰을 커피 한잔과 함께 먹어치웠으면 좋겠다고 도발적으로 말한다. 차에 적신 과자 한조각의 맛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여정이 되었듯, 커피에 적신 휴대폰에서 “어린 시절 종이컵 두 개를 실로 연결하여 만들었던 전화기”(같은 책, 225면)를 떠올리는 상상력이 돋보인다. 저편의 말을 헤아리기 위해서는 쫑긋거림과 숨결을 감지해야 하는 침묵의 언어가 필요하고 ‘낮은 무릎’으로 세상을 봐야 한다는 전언이 인상적이다. 밤이 되면 창틀에서 내려와 책상에 켜놓은 촛불을 보는 고양이와 그 고양이 눈을 응시하는 시인의 이야기는 얼마나 한없이 우리를 몽상의 세계로 이끄는가. 거기서는 여성도 남성도 식물도 동물도 모두 침묵의 아늑한 거처에 몸을 맡긴 채 서로의 눈 속에 타는 영혼을 깊이 빨아들이고 있다.
시인 김혜겸이 서상(書床)을 하나 선물로 가지고 왔다 헐어낸 고가에서 나온 구멍 숭숭 뚫린 널빤지를 정성스레 다듬고 네 귀에 나무못을 박고 가운데 서랍을 단 것이었다 도예가 이동욱이 만든 것이라고 했다 마루의 서쪽 벽면이 어울릴 것 같아 그 아래 두고 모시천을 깔고 작은 사발을 가만히 올려놓았다 흰 그늘 같은 것이 흐르는 듯했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어디로 갔는지 사발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검붉은 기가 도는 갈색 꽃병을 올려놓았다 그것 역시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시집을 한 권 올려놓았다 시집도 행방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서상(書床)은 저 홀로 제시간에 흘러가는 어둠을 보고 싶은 듯했다 그리고 여러 날들이 지나갔다 우수도 지나가고 청명도 지나갔다 한식이 내일모레라는 날 나는 시를 쓰려고 이층 서재에서 파지를 수십 장 버리다가 작파하고 한밤에 층계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갔다 나는 마루로 내려갔다 놀랍게도 마루에는 물과 같은 시간이 넘실거리면서 가고 있었다 서상(書床)은 시간 위에 둥둥 떠가고 있었다
―최하림 「서상(書床)」(『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 랜덤하우스 중앙 2005) 전문
현대시에서 환상과 이미지는 우리들의 현실보다 더 실제적이다. 시인들은 이제 붉은 혈액을 수혈받는 대신 환상과 이미지를 링거액처럼 공급받기를 더 좋아한다. 이민하의 시집 『환상수족(幻想手足)』(열림원 2005) 해설에서 김수이(金壽伊)가 “환상계로 통하는 문은 발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발명’해야 할 대상”이라고 한 것은, 현대시에서의 환상의 의미에 대한 탁월한 지적이다. 서정시가 일상적으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기억과 현실을 결합할 수 있는 정지된, 그래서 영속화된 이미지를 ‘발견’하는 데 주력한다면, 젊은 시인들의 시에 나타나는 환상계란 매일 밤 새로운 이야기를 꾸며내야만 목숨을 보장받는 아라비안나이트의 세헤라자데의 운명과 비슷하다. 그래서 서정시가 꿈꾸는 기억과 근원에로의 회귀가 ‘정지의 미’를 꿈꾸는 데 비해, 환상시란 애당초 본질이 존재하지 않으며 미래만이 계속되는, 그 미래조차도 영토화가 되려는 순간 ‘발명해야 할 대상’인 가능성의 영역으로 미끄러지는 차연(差延)의 세계이다.
환상적 요소를 시에 적극 도입한 이민하의 시집에서 「나비잠」의 화자는 밤마다 화자를 대상화시킨 ‘몸뚱이’에 투입되는 ‘바람의 링거액’을 체크한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몸뚱이를 간호하던 화자 자신도 몸뚱이와 마찬가지로 벽을 부여잡은 채 고치처럼 눕는다.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현실은 이제 우리의 몸과 정신을 치유해주고 이상을 제시해주기에는 너무 늙어버렸다. 가령 80년대 이성복이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그날」,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고 말한 것은 그 시효를 다했다. 이제 젊은 시인들은 그러한 명령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아프지 않다’는 이 말에는 현실에서 아픈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치열한 역설적 표현이 들어 있고 그러한 각성이 시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망가진 현실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가족과 기억으로 돌아가게 한다. 지난 연대의 시인들은 매순간 부서진 현실을 넘어서려고 미래로 나아가지만, 이러한 운명으로 인해 매순간 자신의 기억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들은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게 하는 망가진 현실을 견디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그 현실을 배태한 무의식으로 귀환해야 했으며 그 속에서 운명적으로 아픔을 ‘발견’해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 시대의 시인들은 인터넷과 위성방송까지 즐길 수 있는 집에서 현실의 아픔을 ‘발견’할 수 있는 붉은 혈액을 수혈받는 대신 주삿바늘처럼 전선줄을 머릿속에 꽂고 “환상의 링거액”을 공급받는다. 최근 우리 시의 중요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환상은 이렇게 현실을 발견하는 대신 이미지를 ‘발명’하는 데 주력한다.
그렇다면 「서상」에서의 환상은 무엇인가. 이 시에 나오는 환상은 현실인가 이미지인가. 화자는 선물받은 서상을 놓을 자리를 고심하다 마루의 서쪽 벽면 아래 놓는다. 그런데 서상에 올려진 것은 서상의 용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처음에는 모시천을 깔고 작은 사발을, 다음에는 갈색 꽃병을, 마지막엔 시집을 한 권 올려놓았다. 화자에게는 시집조차도 읽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상에 어울릴 만한 그 무엇으로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서상에 올려진 것들은 다음날이면 모두 사라진다. 그런데 그것들은 서상의 내면성(흰 그늘)→집과의 친화성(검붉은 기)→화자와의 친화성(시집)이라는 과정을 밟아간다. 우수와 청명과 한식은 이러한 서상의 존재에 대한 화자의 각성을 시간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시간의 지나감은 그 무엇과도 어울리지 않고 맞지도 않는 서상이 “저 홀로 제시간에 흘러가는 어둠을 보고 싶”은 것을 깨닫는 과정과 조응한다. 한식이 내일모레라는 날 화자는 본업인 시를 쓰려고 이층 서재로 올라간다. 아래층 마루의 서상이 저 홀로 어둠을 바라보기 위해 작은 사발과 갈색 꽃병과 시집을 떠나보냈듯, 시인인 화자는 시를 쓰기 위해 수십 장의 파지(破紙)를 낸다. 시의 마지막은 화자가 시쓰기를 작파해버리고 마루로 내려갔더니, 놀랍게도 서상이 물과 같이 넘실거리는 시간 위에서 둥둥 떠가는 것으로 끝난다.
다시 시의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선물받은 이 서상은 도예가가 정성스럽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도예가가 “네 귀에 나무못을 박고 가운데 서랍을” 달기 전까지는 “헐어낸 고가에서 나온 구멍 숭숭 뚫린 널빤지”였다. 손님이 서상을 선물로 들고 오고 화자가 그것을 마루의 서쪽 벽면 아래 두었을 때는 낮이었을 것이다. 또한 손님이 돌아간 뒤 화자가 서상 위에 모시천을 깔고 작은 사발을 올려두거나 검붉은 기가 도는 갈색 화병을 올려두었을 때, 그리고 시집을 한 권 올려놓았을 때 역시 낮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낮은 사람과 사물이 선명하게 관계를 맺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밤이 지나고 다시 아침이 되어 서상 위를 보면 그것들은 모두 행방을 감추고 보이지 않는다. 서상은 그 위에 얹힌 사물들과 함께 새로운 환경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헐어낸 고가”의 시간 속에서 존재한다. 서상이 바라보는 어둠은 자신의 “구멍 숭숭 뚫린 널빤지”에서 나온 것이다. 서상에서 사라진 사물들은 실종된 것이 아니라 그 어둠속에 섞인 것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 나타나는 풍경은 실재와 환상이 서로 삼투하며 존재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를 통해 실재와 환상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한몸 속에 존재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아래층에서 서상이 “제시간에 흘러가는 어둠”을 타고 둥둥 떠가고 있듯, 아마 화자가 쓰다버린 파지 또한 이층의 서재에서 둥둥 떠가고 있으리라는 상상도 해볼 수 있다. 거기에 이르면 우리는 그 파지를 시인의 숭숭 뚫린 구멍에서 나오는 정신의 어둠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그런데 로트레아몽의 예와 마찬가지로 엘리어트(T. S. Eliot)의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에서 저녁노을을 ‘에떼르로 마취된 환자’나 ‘수술대에 누운 환자’로 보는 상상력은 이미지를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시적 효과가 얼마나 달라지는지 보여준다. 대상이 갖고 있는 속성은 우리로 하여금 대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결정하게 만든다. 우리는 끊임없이 대상에 의해 제약을 받고 있다. 예술가란 대상이 갖고 있는 규정성을 해체하고 그 구속력을 벗겨내는 자이다. 즉 인간의 삶을 규정짓고 있는 틀과 제약을 벗겨내는 것인데, 이것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이미 말한 바 있다. 슈끌로프스끼(Victor Shklovski)가 “새로운 형식은 새로운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 나타난다”고 했을 때, 이것은 새로운 형식이 새로운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 나타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예술성을 상실해버린 낡은 형식을 바꾸기 위해 나타난다는 뜻이다. 그에 따르면 그것은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삼촌에게서 조카로 옮겨간다. 이를테면 주변적인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 편입되어 중심으로 들어온다. 즉 문학사는 직선이 아니라 사선이다. 패배당한 노선은 파괴되는 것이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 노선은 단지 정상에서 미끄러져 휴식을 취하면서 아래에서 놀고 있는 것이며, 옥좌를 요구하는 영원한 왕자처럼 또다시 부각될 수도 있는 것이다.
최근 우리 젊은 시의 주요한 흐름이 되고 있는 환상성 또한 80, 90년대 시의 한 조류였던 ‘해체’와 더불어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들어오는 하나의 현상이 되고 있다. 자연의 유기적 질서를 원천으로 하는 동일성의 미학이 추구하는 자아와 세계의 진정한 합일은 자연이라는 자족적인 생명공동체를 전제로 한다.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 나타나는 환상의 기획은 “서정시의 영토를 통치하던 서정적 절대주체가 권좌에서 하야”(김혜순)해야 한다는 목소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젊은 세대의 시에서 남성들은 더이상 남성이기를 거부한다. 이들의 시에 나타나는 시적 페르쏘나(persona)들은 남근이라는 상징적 기표를 거부하는 ‘나의 분홍 종이 연인들, 언어로 가득 찬 자궁이 있는 남성들’(허윤진의 평론 제목, 『문예중앙』 2005년 여름호)이다. 이러한 사유는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삶의 원리를 등가화하는 전통적 서정시들이, 단성적이며 이성애에 근간하고 있다는 부정적인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이 인식이 재래적 서정에 대한 의도적인 차단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사정은 다르지 않을까? 실제로 젊은 70년대생 시인들의 시집 해설을 읽다보면 심심찮게 전 세대와의 단절을 언급하는 대목들이 등장한다. 그것은 이들이 “전통에서 일탈하는 것이 현대시의 임무”(이장욱의 해설, 김민정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열림원 2005)라는 데 공통적인 믿음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풀의
옷은, 풀잎이듯
태우면 고운 재의 粒子만 남는, 눈길 거두고
몸 일으킨 맹인 안내견, 목줄 내밀어 새로 이삿짐을 푼 집의 방으로
다시 나를 데려갈 것이다
―김신용 「재봉틀」(『현대시』, 2005년 8월호) 부분
나무도 환상통을 앓는 것일까?
몸의 수족들 중 어느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간 듯한, 그 상처에서
끊임없이 통증이 베어나오는 그 환상통,
살을 꼬집으면 멍이 들 듯 아픈데도, 갑자기 없어져버린 듯한 날
한때,
지게는, 내 등에 접골된
뼈였다
木質의 단단한 이질감으로, 내 몸의 일부가 된
등뼈.
(…)
몸에 붙어 있는 것은 분명 팔과 다리이고, 또 그것은 분명 몸에 붙어 있는데
사라져버린 듯한 그 상처에서, 끝없이 통증이 스며나오는 것 같은 바람이 지나가고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다
―김신용 「환상통」(『환상통』, 천년의시작 2005) 부분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신용(金信龍)은 부랑자 출신 시인이며, 젊은날 지게꾼으로 연명한 이력이 있다. 「재봉틀」이라는 시를 보면 화자는 현재 수의를 짓는 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시골로 새로 이사한 집에 “된장독 이불 보따리 같은 가재도구들”과 함께 ‘풀밭에 놓여 있는 재봉틀 한 대’. 또한 그 ‘재봉틀 위에 앉은 나비’. 화자는 그 재봉틀을 부려 삶을 꾸려가지만, 그 삶은 풀로 만들어진 수의처럼 “태우면 고운 재의 粒子만 남는” 그런 것이다. 이 시에서 ‘재봉틀/수의’는 ‘맹인 안내견/나비’로 변주된다. 화자가 풀밭에 놓인 재봉틀에서 자기 삶을 이끌어갈 맹인 안내견을 연상하면서, 자기 삶을 압축해놓은 이미지인 수의/나비를 통해 ‘풀→풀을 먹고 풀실로 수의(고치)를 짓는 애벌레→수의를 태우고 나비로 환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환상통」 역시 경험과 상상 혹은 환상이 겹이미지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환상통’은 환지통(幻肢痛)이다. 환지통은 사고나 수술을 통해 신체 일부를 상실한 경우에 발생하는 증상을 일컫는다. 가령 한쪽 다리를 잃은 환자는 그 없어진 다리에서 통증을 느끼며, 나아가 그 다리로 걷거나 발을 뻗으려 하는 등 마치 다리가 있는 듯한 감각활동을 계속한다. 메를로뽕띠(M. Merleau-Ponty)에 의하면 환지통은 ‘나는 생각한다’와 같이 의식이나 의지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몸 자체에서 발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절단되기 이전의 발이 누려왔던 행위 영역을 보존하려는 신체의 지향성에서 비롯된다(『지각의 현상학』). 이 시는 이러한 환지통을 빌려와 자기 삶의 상처를 가만히 들려준다. 화자는 물끄러미 새가 떠난 자리,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본다. 그런데 나뭇가지의 흔들림 속에서 그가 보는 것은 한때 자신의 등에 붙어 있던 지게이다. 그는 그 지게를 “등에 접골된 뼈였다”라고까지 토로하고 있다. 그래서 나뭇가지에서 날아가는 한 마리 새를 통해 자신의 등에서 없어진 ‘끝없는 통증’을 기억하는 이 신체의 환상은 실재적이며 존재론적이다.
상처난 눈과 상상하는 눈을 전구알처럼 갈아끼우는
우리의 모든 날은 생일이므로.
어제의 시체를 파먹고 시간을 수혈하며 날마다 태어나는
마네킹 M.
―이민하 「20031010」(『환상수족』) 부분
그러나 최근 시인들의 시에 나오는 환상은 기획된 것이다. 김신용 시에 나타나는 환지통의 모티프가 이 시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시에서 나타난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환상은 이미지에 의해 지배되는 것에 가깝다. 그것의 원인 역시 모두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현시대에 씌어지고 있는 환상시들 역시 어떤 이미지들의 지배를 받아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렇다면 환상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들의 머릿속에서는 무엇을 환상적이라고 규정짓고 있는가? 서정시와 환상시의 경계는 무엇인가? 환상시를 환상시로 만드는 요소는 시 안에서,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 시를 보면 현대시에서 환상과 실재를 구분하는 것은 고전적이다 못해 너무나 구태의연해진다. 우리들은 이제 진짜 현실보다는 이미지와 환상으로 가공된 가짜 현실에 더 끌리며, 그것이 삶의 주요한 동력이 되었다. 인터넷과 게임, 위성방송 등의 영상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디자인혁명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의 아픔보다는 가공된 환상과 이미지에 의해 아픔이 ‘발명’되는 새로운 세계를 목격하게 한다. 어쩌면 이제 진짜 현실보다는 가짜 현실이 더 생생하며 사물의 본질보다는 사물의 허상이 더 진실된 것인지 모른다. 이 시에서처럼 “어제의 시체를 파먹고 시간을 수혈하며 날마다 태어나는/마네킹 M”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은 새롭게 자신을 ‘조립’해야 할지 모른다. 사람들이 날마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상적인 활동과, 프루스뜨의 마들렌느 과자가 베풀어주는 무한한 기억의 확장이라는 풍요로운 경험은 이제 이미지의 거울에 비치지 않으면 오히려 감각되지 않는 허상이 되어버렸다. 젊은 시인들이 이러한 뒤바뀐 진실을 통해 낡아빠진 현실과 이상을 버무린 ‘서정의 여물통’에 머리를 박고 있는 ‘고전’들을 조롱한다 해도 지금 뭐라고 대꾸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지금 환상이 가득한 세계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환상을 실제보다 더 생생하고, 더 그럴듯하고, 더 ‘진짜’같이 만들어서 그 속에서 살려고 한다.1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자리를 잡고 있던 이상이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이미지가 똬리를 틀고 있다. 이미지적인 사고방식과 이상적인 사고방식은 매우 대조적이라고 한다. 라틴어 이마고(imago)에서 온 영어 단어 이미지(image)는 라틴어 이미타리(imitari), 즉 모방하다(imitate)란 말과 관계가 있다. 이에 반해 이상(ideal)이란 단어는 이념(idea)과 관계한다. 이미지가 어떤 대상이나 사람의 외형을 인공적으로 모방하거나 표현하는 것이라면, 이상은 이미지와는 달리 인공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통, 역사, 신에 의해 창조된다(273면). 부어스틴(Daniel J. Boorstin)의 말을 변용하자면 현대시는 자연 대신에 자연을 ‘의도적으로 배치한’ 디자인에 더 점수를 준다. 시인은 자기가 본 자연에 감탄하는 것이 아니며, 그 자연의 아름다움이 최종적으로 담긴 시라는 결과적인 형태에 감탄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이 훌륭하고 영리하게 세상을 보는 방법, 즉 시를 찍어내는 기술에 더 감탄한다. 많은 현대시인들이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는 관심이 없고 그것을 진짜처럼 제조한 자신의 환상 또는 이미지에 집착한다. 그래서 이제 “인간 경험은 집이 아니라 그 집의 실내장식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248면). 우리는 이제 거울 속에서 우리 자신을 보기 원하며 그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삶은 어느새 이상이란 낡은 단어를 거울 밖으로 내던져버렸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최근 우리시에서 나타난 환상은 김수이가 말한 ‘발명’이지만, 그것은 ‘가공’된 상처이며 상상이다. 그런데 다음을 보라.
창조적 독창성의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했나, 그들의 시가? 나는 전혀 그 반대라고 생각하는데? (…) 물론 성장기와 이러저러한 문화의 변화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 같은 것이겠지만, 이를테면 실내에서 하는 카드놀이나 좀 잘아빠진 테크닉을 요구하는 당구 같은 거는 잘하는데 넓은 잔디밭으로 나가서 뛰는, 땀을 흘리는, 장쾌한 스윙으로 홈런을 날리는 그런 시들은 잘 안 보여. 스케일이 큰 서사구조를 가진 시나 야성(야생)의 시가 좀 나타나주었으면 좋겠는데, 가만 들여다보면 늘 혼자만 노는 시들이야. 이름을 가려놓고 보면 누구의 시인지 잘 모르겠어. 어쩌면 그렇게 발상부터 표현기법까지 한결 엇비슷한지.
―유홍준·신동욱 대담 「차돌처럼 단단한, 자기부정과 갱신의 길」
(『현대시』 2005년 8월호) 232~33면
나의 시쓰기는 전략적으로 모색된 이후의 선택이었다는 점을 나름으로 피력하고자 합니다.
저는 제 자신에게 계속 ‘자신감’을 가지라고 최면을 걸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제 시가 제 생활내력의 연장선에서 분출된 것이고(외설을 포함하여), 그 무엇을 부인해서도 안된다는 생각까지를 보태고 있습니다. 이유는 그것이 검증된 적이 없는 ‘불안한’ ‘실험적인 시쓰기’라는 데 있고요.
―이기인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창비 2005) 107면
앞의 인용문은 한 대담에서 70년대생들의 다양한 시적 스펙트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유홍준(劉烘埈)의 답변이고, 뒤의 인용문은 이기인(李起仁)이 자신의 시집 해설을 부탁하며 쓴 편지를 해설자가 재인용한 것이다. 두 인용문은 서로 톤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지금 시대의 시쓰기에서 나타나는 전략 혹은 테크닉과 실제 삶의 연관찾기에 대한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의 시는 일정부분 그로테스크한 환상을 자신의 시적 전략으로 삼고 있지만 “언제까지고 한쪽 발은 현실에, 땅에 붙이고 있어야 한다”(대담, 225면)는 믿음이 강하다. 물론 여기서 평자가 이들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오규원(吳圭原)의 말처럼 “젊은 시인들에게 보이는 ‘가벼움’이 무거움을 이기기 위한 가벼움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가벼움은 고통스런 가벼움이기를 희망”2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환지통이 잃어버린 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겪는 신체적 고통이라면, 그 고통은 한 나뭇가지의 흔들림에서 “등에 접골된 뼈”였던 ‘지게’를 감각하는 김신용 시에서처럼 절실함을 회복하려는 간절함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의 현실과 삶이 아무리 훼손되었다 하더라도 그 안에 내재된 변하지 않는 낡은 이상이나 꿈을 미래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갈망이 환지통인 것이다. 이렇게 잃어버린 꿈을 회복하고자 하는 이상이 가려움증이나 갈망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환상과 실재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해 갱신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 연장선상에서 살펴볼 수 있는 시집이 이기인의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창비 2005)이다. 이 시집에는 소녀들의 성(性)과 기계의 결합이 다채로운 이미지를 통해 나타난다.
어둠과 소녀들이 교차하는 시간, 눈꺼풀이 내려왔네
ㅎ방직공장의 피곤한 소녀들에게
영원한 메뉴는 사랑이 아닐까,
라면 혹은 김밥을 주문한 분식집에서
생산라인의 한 소녀는 봉숭아 물든 손을 싹싹 비벼대며
오늘도 나무젓가락을 쪼개어 소년에 대한
소녀의 사랑을 점치고 싶어하네
―이기인 「ㅎ방직공장의 소녀들」 부분
‘기계와 사귀는 여자들’은 이 시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공장에 다니는 여공이거나 혹은 창녀들이다. 그의 시의 한 가닥은 인천의 공장지대와 창녀촌, 그리고 교도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 소녀들의 삶은 직접적인 노동현장을 통해 드러나기보다는 분식점이나 공중화장실 같은 장소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흰 벽」이 한 예가 될 수 있다. “공장과 공장 사이에 있는 화장실/흰 문짝은 오랫동안 페인트를 벗으면서, 깨알 같은 글씨를 토해내고야 말았다//똥을 싸면서도 뭔가를 열심히 읽고 싶었던 이 못난 필적은 필시/쾌활한 자지를 바나나처럼 그려놓고 슬펐을 것이다.” 퇴락한 공중화장실의 흰 문짝에 칠해진 페인트가 벗겨지면서 나타나는 ‘깨알 같은 글씨’와 ‘쾌활한 자지’는 소녀들의 욕망을 은유한다. 이기인의 시에서 성(性)은 쾌락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예정된 삶의 은밀한 그늘이다. 그녀들은 고쳐질 수 없는 삶을 산다. 그녀들이 늙은 여자가 아닌 순결한 소녀의 이미지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이 훼손은 운명적이다. 소녀들은 현대사회의 화려한 문명에서 소외되어 자신의 은밀한 꿈을 노동의 그늘에서 찾는다. 이들이 현실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에 대한 ‘메뉴’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기계 기름이 찌든 ‘봉숭아 물든 손’을 바지에 싹싹 비비고 ‘나무젓가락을 쪼개어’ 소년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슬픈 열망은 분식점에서의 짧은 휴식시간을 통해서만 허용된다. 따라서 「ㅎ방직공장의 소녀들」에서 ‘ㅎ’은 ‘희망’이면서 동시에 ‘희생’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슬픈 열망은 현실이라는 화면에 수없이 덧칠되어 그 흔적은 겹겹의 페인트가 떨어진 다음에나 발견된다. 성과 기계의 결합은 소녀들의 삶을 수동적으로 내몰고 있지만, 그들은 이 수동적인 성을 역설화해 현실을 타개하는 적극적인 생존전략으로 삼는다. 시인은 이 소녀들을 빌려 우리의 삶이 ‘상처 디자이너’에 의해 기획된 것이지만, 그것을 외면하지 말고 그 속에서 암울한 삶을 헤쳐나갈 실재를 발견하고자 한다.
지금 우리의 젊은 시는 환상이라는 무한한 바깥과 조우하고 있다. 하지만 환상이 현재와 미래가 결여된 ‘배치와 기획’에 한정될 때, 이데올로기의 도구가 되어버린 지난 연대의 리얼리즘 시가 저지른 잘못처럼 또다른 의미의 배타적인 영역이 되어버린다. 자칫하면 환상이 범람하는 사회에서 내면의 나르씨씨즘적인 새로움은 금세 “대기 속에 녹아버리고” 가짜 이미지만이 끊임없이 그 모습을 바꾸며 실재를 대신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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