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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균열과 봉합의 비평을 넘어

 

 

박수연 朴秀淵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기억의 서사학」, 저서로 『문학들』이 있음. qkrtk@chollian.net

 

 

1

 

최근의 한국 시단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한동안 시는 특유의 민첩성과 비의성(秘意性)으로 사회와 역사의 시공간에 뛰어들었다. 특히 민중시는 시대적 유격전을 통해 새 삶을 예감케 하는 유력한 언어구성체였다. 지금, 시가 불의와 맞서는 유력한 무기였던 시대는 흘러갔음이 분명하다. 대부분의 시는 더이상 공통적 삶의 고통, 한숨과 눈물,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희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미래를 향한 예언적 투사의 순간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검은 섬광 같은 내면으로 가라앉거나 그 섬광의 세련된 디자인을 본딴 풍경과 추억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은 세계의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드는 시대를 살아가는 한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시도 세상도 그렇게 흘러온 것이다.

그렇지만 무슨 이유가 있기는 할 것이다. 가령 세계가 담론구성체라는 논리 속에서 보면, 인간은 언어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탈근대에 대해 발설하는 순간 탈근대의 시대를 살게 되는 것이다. 시의 감각을 말할 때 감각이 부각되고 자연을 말할 때 세계는 자연이 된다. 이 말을 세계에 대한 관념론적 이해로 받아들여선 곤란하다. 오히려 언표된 것들의 수행적 성격 내지는 실천적 성격에 주목해야 한다. 언어는 항상 존재를 술어적으로 산출하면서 진행된다. 그 진행이란 이미 있지만 측정불가능한 실재(the real)를 현재적 순간에 구성해내는 것을 뜻한다. 바로 그 현재적 순간의 내외적 윤곽이야말로 그러므로 시적 진술들의 확실한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유물론적 장’(A. 네그리) 안에 있는 시적 진술들은 따라서 두 가지 가치규정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첫째, 시는 측정불가능한 세계로부터 자신의 근거를 확보받는다. 이것이야말로 맑스가 말한 유물론적 테제의 현실성을 가리킨다. 의미로 충만한 문학이란, 그것이 터잡고 있는 토대로부터 산출되는 언어적 충전물이다. 다음, 언어를 둘러싼 물질적 복합체들에 대해 문학은 심미적으로 응답한다. 이 응답이 심미적인 것은 문학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미학주의와 달리 지속적 운동과정에 있는 사회현실과 문학이 바로 그 운동의 내용과 형식으로 닮은꼴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실을 고정시키고 어떤 척도로써 위계화하는 모든 지배적인 힘들을 부수기 위해 스스로를 비고정성의 운동으로 몰아붙이는 자기부정성이라는 계기와 함께하는 관계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미래에 대한 기획이 있지만, 그것은 또한 우발적 요인들을 자기 근거로 긍정하는 기획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은 그 기획을 벗어난 곳에 항상 자리잡는다. 이 두 가지 규정 중 어떤 것이 앞서는가 하는 점은, 문학을 환원론적 시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가 아닌 한 불필요하다. 실로 문학은 자신의 내재성을 긍정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언어구성체이다. 다른 것들로 환원될 수 없는 바로 그 성격은 그러나 다른 것들과의 관계를 통하지 않고는 표현되지 않는 성격이다. 문학은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적이면서 상관적이다. 그러므로 환원되지 않는 내재성들의 수평적 횡단운동이 문학을 심미적인 것으로 만든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문학의 모순적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 쉬운 규정을 내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학은 규정되지 않는 것이면서 그 횡단운동에 끝없이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순이면서 모순을 넘어서는 것이 문학이다.

따라서 시란, 토대로부터 나와서 토대에 심미적 판단과 예감을 되먹이는 순환적 생성과정을 살아가는 존재일 것이다. 최근의 한국시에 분명한 존재근거를 부여하는 일은 바로 이 상관적 운동방식을 설명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운동방식에 대한 충분한 자각이 비평에 필요해진다. 비평이란, 그것이 해석이든 평가이든 충분히 의식적인 척도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비평이란 말 자체가 언어로써 평형을 만든다(言+平→評)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다가, 그 평형이란 일정하면서도 지속적인 분석 논리를 동반함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머물 수만은 없다. 비평과 학문은 서로 다른 방식의 글쓰기이다. 학문적 새로움이란 대개 낯선 이론의 패러다임에 의지하게 마련이고, 그 새로움의 성취가 학문적 성과로 인정받기 때문에, 그것을 척도로 논문들을 평가하는 국가관리의 제도적 영역으로 회수되는 학술논문은 이중의 부담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이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해야 하는 것이 학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제도관리 체계에 안착해야 하는 것이 학문이다. 비평의 영역은 그 제도관리를 넘어 작품을 통한 전복적 상상력을 재구축하는 데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다. 이 전복적 상상력이 순연한 의식의 차원에서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특히 자본주의적 분열증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더더욱 강조되어 마땅하다. 비평은 창조적 순간의 비의성에 정서적으로 합류하여 그 획득물을 언어로 논리화하는 작업인 것이다.

최근의 한국 시비평이 평가가 삭제된 해석에만 치중한다는, 필자까지 포함한 여러 논자들의 비판은 실은 이런 구분이 전제된 상태에서만 제 목소리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제도관리의 영역에 점점 침윤되고 있는 학문이 밋밋한 해석에 전념한다면 비평은 그 평지에 정서적 굴곡을 이루어놓는다. 언어적 무의식이 가외로 가져다주는 창조성의 심미적 굴곡을 실현하는 것이 비평인 것이다. 만일 해석이 이런 수준을 구현하여 창조적 심미성의 운동을 통해 현실의 재발견에 도달하도록 할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서 완성된 비평이라고 할 만하다. 최근의 해석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오히려 학문적 방법론의 관행에 사로잡힌 밋밋한 해설중심 비평에 더 타당한 것인 셈이다.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는 ‘갈림길에 선 한국 시와 시비평’이라는 제목 아래 최근 한국 시단의 윤곽을 여러 면모로 짚고 있어서 주목할 만하다. 최원식(崔元植)의 글이 한국 시와 시비평에 대한 총괄적 문제제기의 성격을 갖는다면 나희덕(羅喜德), 임홍배(林洪培), 이장욱(李章旭), 유희석(柳熙錫)의 글은 최근 논란이 되거나 시단의 한 축을 형성하는 시세계를 각론 형식으로 섭렵한다. 시와 시인은 많아졌지만 시의 영역은 날로 좁아지고 있다는 판단 아래 기획되었음직한 이 글들은 한국 시의 현재가 성취한 것과 결여하고 있는 것들을 지적해줌으로써, 무엇보다도 현재의 시단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기획된 글들 사이에는 모두 하나의 잡지로 묶어두기에는 무시할 수 없는 균열이 있다. 성취를 이야기하는 글이 나희덕과 이장욱의 것이라면 결여를 이야기하는 글은 최원식, 임홍배, 유희석의 것이다. 이 균열이야말로 어쩌면 한국 시의 현재를 더 잘 알 수 있도록 해주는 현상일 듯도 하다. 시인들이 많아진 것만큼이나 수많은 시적 갈래들이 현재 한국 시단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균열은 동의할 수 없는 내용들이 그 글들에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창비는 어떤 동요에 놓인 듯한데,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며 의도적인 것일까? 또한 특집에 실린 글들은 앞에서 말한 시의 두 가지 가치규정, 요컨대 현실성과 심미성이라는 요건을 어느 정도나 비평적으로 의식하고 있는 것일까?

 

 

2

 

복잡하게 꼬이고 갈래가 나 있는 대상들을 체계화하는 데는 무릇 배제와 일반화의 원리가 작동하게 마련이다. 실로 현재의 한국 시가 권위적이고 중심적인 담론체계에 의해 위계화되거나 단일화되지 않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한 진영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또다른 진영을 포기하는 일이 거의 필연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듯이, 다른 진영의 포기란 있을 수 없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 일반화의 방법이다. 그런데 일반화란 그것이 이루어지는 순간 개체들의 단순집합을 넘어서는 어떤 내용을 갖는다. 원리나 법칙의 수준에서 개체들을 추상화하는 일이 이때 나타난다. 이를테면, 일반화의 언어들은 존재를 술어적으로 산출함으로써 원리를 긍정하도록 한다. 물론 일반화가 존재들의 위계화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동반하게 되는 위험한 시도라는 문제제기는 때에 따라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항상 필요하고 올바른 것은 아니다. 모든 일반이론을 권위적 위계의 강요로 생각하는 것은 실은 그 일반이론 앞에 무력하거나 위협을 느끼는 경우에나 해당한다고 하겠다.

언어가 술어적으로 존재를 산출한다면, 무엇인가 언표되는 순간 그 언어의 그물에 사로잡히는 대상들이 떠오를 것이다. 한국 시문학의 현재에 대한 최근의 진술들은 많은 경우 그 일반화의 과정 속에서 논의에 어긋나는 작품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이것은, 무수히 많은 갈래의 작품군이라는 객관적 요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품의 특이점에 집중하여 그 작품을 정서적으로 재구성하는 비평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최원식의 글은 그러나 그 일반화의 수준을 지나치게 밀어붙인 경우라고 여겨진다. 그의 글은 많은 것들을 배제하고 있다.

그가 이루어놓은 일반화는 두 가지이다. 첫째, 한국시는 우량한 독자의 위기에 처했고 그 결과 좋은 시의 지반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 이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시인들이 먼저 자기 시를 갱신할 새로운 언어, 새로운 리듬을 찾는 모험에 나서야”(18면) 하며 이를 위해 선후배 시인들 사이에 ‘존이구동(存異求同)’을 찾는 대화가 필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둘째, 사회의 민주화가 자율적 대중을 부각시켰고 이 평등주의가 시의 대중화로 귀결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시적 언어의 긴장을 해체시켰다는 것.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대중화에 함몰된 시를 그 이전 과거의 영예로 돌려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곰곰이 따져보면 이런 문제 해결의 대안은 꼭 ‘시의 위기’라고 일컬어지는 때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대안은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시창작의 일반론이며 대중사회의 위력 아래에서는 비단 시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최원식이 제기한 대안을 지나친 일반론이라고 규정하는 이유는 그 일반성을 구축할 좀더 세밀한 방법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현재의 한국 시가 펼쳐 보이는 광범위한 감성을 따라잡는 데서 어떤 피로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가령 대중사회에서 맞게 된 시적 긴장의 이완을 문제삼으면서 그가 인용한 모범적 시의 예는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의외이다. “시는 운명적으로 언어의 경계에 속박”(22면)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당시(唐詩)를 인용한 것은 이미지들이 배치되는 언어구조의 정련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그것은 이미 시대 속에서 스스로 낡은 것일 수밖에 없다. 이 낡음에 대해서는 고정되지 않은 현실과의 역학 속에서 심미성을 실현하는 문학의 경우에는 더욱이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보들레르(Baudelaire) 이후의 현대시에서 크게 강조되는 미의 기준이 소멸하는 새로움의 영원성임을 염두에 둔다면, 현재의 한국 시가 찾아야 할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백거이(白居易)를 인용한 것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이것은 ‘현재의 시’를 찾는 일에서는 그야말로 난망(難望)한 인용이다.

그의 이 진술이 가진 좀더 결정적인 함정은 시의 미학을 고정불변의 완전성으로 이해하는 태도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시는 완전의 영생을 부정함으로써만 계속 탄생할 수 있다. 시는 차라리 스스로를 배반하면서만 새 세계를 불러오는 언어구성체이다. 바로 여기에 시적 죽음의 비밀이 있다고 말한 사람은 김수영(金洙暎)이지만, 동시에 고정불변의 완전성이란 곧 실제적 죽음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솔거(率居)의 소나무 그림이다. 소나무를 향해 돌진하여 죽는 새의 운명을 백낙천(白樂天, 백거이)의 시에서 경험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시는 완전을 추구하되 그것을 넘어서는 행위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최원식이 ‘미래를 위해 과거를 잊지 말라’고 말할 때의 본뜻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미래의 핵심으로 수렴되면서 죽는 과거는 그 자체로 빛나는 심미성을 이룬다. 그 과거의 미학에는 현재의 시와는 달리 언어적 긴장의 정련을 거쳐 나온 작품이 실제로 있다는 판단이 여기에 작동한다. 그런데 정말로 그런 것일까? 2000년대 이후의 한국 시는 언어적 긴장의 상실을 뚜렷한 특징으로 하는 듯하다. 이런 이유는 시에서 현실이 실종되기 때문이다. 최근의 한국 시는 ‘운동하는 현실을 미적으로 재구성하는 시’ ‘(무의식적) 언어의 환유놀이로 펼쳐진 시’ ‘그리고 그 중간지대의 내면을 드러내는 시’로 분류될 수 있을 듯하다. 생태시는 첫째 항과 관련하여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고, 여성시는 주로 둘째와 셋째 항에 걸쳐 있다. 최근의 젊은 시인들에게 주류는 아무래도 둘째와 셋째이다. 그런데 이들이 이들만의 현실감각으로 선배세대와의 비약적 단절을 진행하는 동안, 선배세대는 자신들 고유의 현실을 패배로 몰아넣고 말았다. 정치적 386이 절차적 민주주의의 실현 앞에서 득의양양할 때 문학적 386은 미시영역으로 향한 자본의 진군에 밀려 참담함으로 소일했으며, 반성이 청산으로 바뀌는 동안 젊은 세대는 전시대의 신화로부터 떨어져나와 ‘봉숭아학당’의 언어 아니면 기형도(奇亨度)의 극단에 도달했다. 그러니까, 미래가 과거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과거가 미래로 나아갈 길을 잃은 데서 최원식이 한탄하는 병통은 생겨난 것이다. 시에서 현실이 실종된 것은 이런 전말 속에서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렇게 ‘실종된 현실’의 블랙 유머와 비극을 창조적 비평정신이 어떻게 우리 시대의 독특한 감각으로 해석해내는가 하는 점이다. 평가가 있다면 그 이후에나 가능한 일인데, 최원식의 글은 그 해석의 미적 기준을 과거의 영예로 되돌려놓는 데서 멈추어 있다. 최근 시의 유물론적 장은 그러나 자신에게 한층 더 밀접한 심미적 이론을 요구한다고 여겨진다.

다시 대화는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과거와 미래가 연결되는 방식은 그 과거가 자신의 말을 미래에게 해주고 미래가 그 말을 받아 과거에게 되돌려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말을 한다는 것은 회통(會通) 이전의 언어를 발설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회통을 부정하는 주체로 서서 회통을 스스로 실현하는 문학의 길을 열어두는 일 또한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최원식이 설정한 의제는 현재 그 첫발을 내민 셈이다.

 

 

3

 

나희덕의 글과 이장욱의 글은 시적 서정을 논의한다는 점에서 동질적이지만 서정을 다루는 시적 언술의 이해에서 차별적이다. 이 또한 한국 시의 다양한 갈래를 일반화하면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우선 나희덕의 글은 ‘기억’과 ‘자연’의 능동적인 힘이 환기하는 이상적 공간이 그 자체로 결여와 왜곡에 시달리는 현실에 대한 비판기능을 담당할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기억과 자연이 반드시 그런 힘을 갖고 있는지는 더 꼼꼼히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어쨌든 그것들은 현실의 문제들을 외면하든지 그 현실로부터 탈주하도록 함에 틀림없다. 도시적 삶의 피로가 늘 꿈꾸는 것이 자연이거니와, 도시인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자연에 대한 어떤 기억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 서정이 위무의 기능을 담당하는 것은 결코 간과될 수 없는 시의 주술적 힘이다.

이 점을 긍정하면서도 더 논의해야 하는 것은 그밖의 자연이다. 기억과 자연이 특정의 언표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것들을 통해 위로받는 삶이란 곧 그 언표의 맥락에 의해 의미화되는 삶이란 뜻이 된다. 그런데 언표란 무엇인가. 담론이란 말로 바꿔도 크게 다르지 않은 이것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기호의 역할을 한다. 얼마전에 유행했던 ‘느림’의 이데올로기는 최근에 와서 웰빙 라이프라는 고급 상품으로 발전했다. 자본주의적 속도전에 대항하는 삶의 이념으로서 ‘느림’이야 얼마든지 강조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노동시장 유연화 전략 아래 사회적 노동공간에서 착취되는 사람들이야말로 그 ‘느림’의 이데올로기에 이중적으로 억압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지금 현재 느리게 살고 싶어도 생계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미래의 느림을 위해 부지런히 살고 싶어도 실업 때문에 그러지 못한다. 웰빙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자연도 그렇다. 현실의 결여를 비판하도록 하는 이상적 자연이란 이미 부의 상징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더구나 무정한 자연이 기호취미적 풍경으로 치환되고 기억의 고통이 쾌락적 추억으로 뒤집어지는 곳에서는 그 자연과 기억의 이데올로기적 순치기능이 더 먼저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 이때 시가 자연서정을 노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지금 논의되어야 할 것은 최량의 서정시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갖고 있는 현실적 효과로서 서정주의(抒情主義) 시 일반이다.

최원식의 말대로 “시는 시장적 요소에 덜 연동된 장르”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은 시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장의 뒷면을 들추어보면 곧바로 드러나는 문제를 외면할 때에만 나타날 수 있는 주장이다. 시는 장르적 분량 때문에 시장의 손쉬운 상품으로, 그러나 그것이 교묘하게 은폐되는 방식의 상품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시가 덜 시장적인 만큼이나 더 엘리뜨적인 요소를 갖춤으로써 시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행위를 문화적 상징자본의 표상으로 이해하도록 한다는 점과 관련된다. 시는 독자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욱더 비의적 문화권력의 성격을 지닌다. 그것이 문화권력의 상태로만 머문다면 차라리 다행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그럴 수 없다. 시는 대중으로부터 멀어지는 순간 그들이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는 힘을 갖게 되는데, 바로 그 힘 때문에 그 힘의 적절한(?) 배분을 수단으로 하는 돈벌이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이 타락한 시장사회에 비판적 거리를 둔 듯한 사이비 순결성으로 시장의 원리를 포장하여 회수하는 사회적 자본의 운동방식이다. 수많은 문예지들이 돈을 받고 시인면허증을 판매한다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시 혹은 시 생산과 소비의 장(場)을 상품화했다는 사실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상품화되는 작품과 장이 기준으로 삼는 시의 성격이 문제이다. 서정시가 문제되는 것은 그렇게 생산되는 시 대부분이 대량생산된 서정 상품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를 상품화된 서정으로 이해하도록(이해해도 괜찮다고 여기도록) 하는 통로를 이룬다. 여기에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새 삶을 예감하게 하는 문학의 전복적 성격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다만 잘 포장되고 디자인된 서정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서정의 일정 수준을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하는 정황적 여건이 있을 뿐이다. 동시에,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서정시의 태반이 자연서정을 노래하는 작품이라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평등주의의 결과 탄생하는 대중시인들의 대다수는 시의 시장이데올로기를 자연 서정의 포장지로 감쌀 줄 아는 사람들인 것이다. 여기에 과연 시 자체의 본원성일 전복적 상상력은 있기나 한 것일까?

다음, 이장욱의 글은 시의 단일 의미를 가져오는 서정을 비판한다. 기존의 서정이란 “하나의 가치와 하나의 세계와 하나의 전체만이 가능”(73면)하도록 하는 서정이다. 서정이 동일화의 세계인 한 이것은 옳은 말이다. 이장욱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파편적이며 오염된 채 존재하는 실재의 만상과 만상에 대한 감각”(70면)이 그 서정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분열의 의미론을 감당하는 서정이 기존에는 없었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런 주장이야말로 최근 세대의 시 이전에 있어왔던 수많은 분열증적 시편들을 의도적으로 삭제한 상태에서만 가능한 일반화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장욱 또한 하나의 중심적 대체계를 형성하고 있는 셈인데, 이 문제는 더 많은 시를 인용하고 분석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리고 이장욱의 글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서정문법에 있으니까, 접어두기로 하자. 그의 글이 강조하는 것은 새로운 서정의 필법으로 제출되는 것으로서, ‘서정 바깥의 서정’ ‘서정적인 권위를 해체하는 시’이다. 이런 시란 ‘하나의 가치, 세계, 전체’를 거부하고 ‘다수의 가치, 세계, 전체’를 발언하는 시일 것이다.

그런데 ‘서정적인 권위를 해체하는 시’라는 말은 일종의 형용모순이다. 서정은 주체가 대상에 대해 갖는 태도인데, 이장욱의 말대로 대상과의 동일시가 가장 큰 특징이다. 심지어 대상과의 불화와 단절을 경험하는 순간에도 서정은 그 대상 속으로 들어가서 존재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정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서정이란 대상을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 대상과 함께하는 힘이라고 해야 한다. 대상을 지배하려는 힘은 오히려 그 서정의 주체로부터 나온다. 서정이 주체를 통해 대상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서정을 통해서든 다른 것을 통해서든 대상을 지배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다 아는 말이지만, 저자(author)의 함축된 형태인 주체가 권위(authority)를 갖는 것이다. 풍자하고 비판하고 놀리는 것은 주체이지 서정이 아니다. 서정시가 아픈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서정의 동일화하는 힘이 대상을 감싸기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 지금까지 시는 대상을 감쌀 줄 아는 이 능력으로 세상의 상처를 치료해왔다. 이 치료마저도 대상 지배의 행위라면 할 말은 없지만, 강은교(姜恩喬)시인이 시도하는 것과 같은 ‘시를 통한 질병 치료’마저도 서정적 권위의 한 형식으로 보는 일은 참으로 곤란한 일이다.

대상을 감싸는 행위가 대상을 지배하는 권위의 또다른 이름이라고 한다면 굳이 반대할 뜻은 없다. 그렇지만 시선과 응시의 교차로에서 시선의 무의식적 지배욕망을 파악하고 그것만을 전면화하는 듯한 태도에 대해서는 토를 달아두고 싶다. 무의식을 강조할 때 우리는 종종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을 혼동하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잠재적인 것을 포함하는 실재란 사실은 어떤 말로도 드러낼 수 없는 측정불가능의 세계이다. 그것은 그렇게 있을 뿐이다. 그렇게 있고 시가 있는 것이다.

문태준(文泰俊)의 「개복숭아나무」에 대한 분석은 새로운 서정시가 나아갈 길에 대한 이장욱의 생각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문태준 시의 최종적인 장점으로 “사물과 사물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저 서정적 유현”(76면)을 지적하고, 한계로 그 유현을 약화시키는 “서정의 자기규정”(같은 곳)을 언급한다. 이런 한계가 나타나는 것은 “개복숭아나무가 결국 사람들의 삶과 등가관계에 놓이”(같은 곳)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우선, “바라보면 참회가 많아지는 나무다”라는 구절과 “마을로 내려오면 사람들 살아가는 게 별반 이 나무와 다르지 않았다”라는 구절에 의해 사물들의 사물성이 소멸된다는 지적이 있다. “젊은 여자의 흐느낌”과 “소의 둥근 눈알” “개복숭아나무”의 특이한 개별성이 주관의 감정과 생활로 환원되어버리는 것이 문제라는 이야기가 되겠다. 이것이야말로 시적 해석의 차원에 해당할 터이다. 그의 이 해석은 ‘환기’를 ‘약화’ 내지는 ‘장악됨’으로 바꿔 부르는 경우인데, 시의 언어들이 의미의 고정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면―과거의 시나 최근의 환유적 시나 모두 마찬가지이다―이 환기는 필연적인 일이다. 더구나 사물들은 그 환기를 위해 오히려 끝까지 살아남는다. 가령, 언어의 미끄러짐이라는 명제 또한 최종적 의미의 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이긴 해도 매순간의 활력적 의미형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언어는 존재를 술어적으로 산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의 “참회”와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 자체의 단일성―이장욱이 말하는 서정적 권위―으로 시를 지배하지 않고 “개복숭아나무” “젊은 여자의 흐느낌” “소의 둥근 눈알”과 결합해서 그 사물들을 되살려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되살림은 사물 자체의 되살림이 아니라 실존(이것은 정화열의 개념이다)의 구체성을 되찾아주는 일이다. 시의 심미성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여기에서 사물들의 경계 해체나 그것의 약화만을 긍정적인 시학으로 설정하기는 어렵다.

좀더 근본적으로 논의해보아야 할 것은 사물성이 그 자체로 진술되었다가 다시 소멸되는 상태에 대한 미적 긍정이다. 시적 대상들의 개별적인 사물성은 ‘흐릿한 경계의 유현’으로 사라져야 하는 것일까? 이 진술에서 중요한 것이 사물들의 감각적 현존이니까, 영상의 예를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의 「올림피아」는 정치의 심미화를 통한 파시즘의 정당화에 복무하는 다큐 필름이다. 영상은 올림피언들의 거친 호흡과 터질 듯한 근육, 피부를 흐르는 땀과 리드미컬한 신체운동, 그것들의 고통과 환희를 신성할 정도로 아름다운 사물로 표현한다. 그 근육들의 사물화는, 가령 피사체로 포착된 피식민지인 남승룡이라는 마라토너 개인의 실존성·주체성·역사성을 무화하고, 그래서 올림피언들은 인간 너머를 지향하는 개체들의 분리된 사물성만으로 살아남는다. 여기에서 구체적 인간의 실존은 환기될 수 없다. 사물화된 영상에는 다만 베를린 올림픽을 미적으로 정당화하는 파시즘의 이데올로기가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서정적 주체의 환기를 거부하는 사물성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전지구적 자본주의시대의 개인중심적 차별화 논리가 차이의 미학으로 관통하고 있는 이때에 더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서정적 주체가 자신을 환기하는 사물의 경합에 의해 구체적 실존성으로 되살아나야 한다는 것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이 세계를 지배하는 숨겨진 힘을 분석하고 그를 넘어선 세계를 향한 집중적 예감을 가능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서정적 단일 의미를 형성하는 것을 권위라고 명명하는 것은, “전통의 해체에는 별 관심이 없다”(79면)는 수사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해체적 독법이라고 여겨진다. 이렇게 본다면 세계 속의 모든 존재가 권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 형성된다. 폴라니(M. Polanyi)의 지적처럼 모든 앎은 개인적·주관적 관여를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시적 의미 또한 주관의 암묵적 집중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대상을 단일한 의미로 수렴하는 것은 이 주관적 관여가 필연적인 한 그 과정에 동반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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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의 어떤 균열과 동요에 대해 말할 때가 된 것 같다. 이 동요와 균열은 필연적일 수도 있고 의도적일 수도 있다. 지난호 특집의 글들 중에 최원식의 글을 제외하면 임홍배와 유희석이 한 경향을 이루고 나희덕과 이장욱이 또 한 경향을 이룬다. 경향이라고 말했지만 그 차이는 자못 크다. 우선 임홍배와 유희석의 글은 좀더 정통적인 창비의 입장을 대변한다. 대상시인이 워낙 그런 탓도 있겠지만 작품을 읽어가는 방법이나 주장의 내용도 그렇다. 임홍배는 인간적 삶의 시적 구체성을 요구하고 유희석은 『만인보』의 세밀한 결을 80년대와 90년대라는 시대적 정세 속에서 읽어가면서 그 시에 좀더 필요한 감화력을 요구한다. 임홍배가 생태시학의 어떤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추상적 자연을 벗어난 현실의 실감을 요구하는 것은 최근 생태시의 정형화되다시피 한 경향의 문제점에 대한 대안으로 백번 타당하다. 유희석의 글이 강조하는 시적 감화력 또한 모든 시에 항상심으로 필요한 사항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김진경, 하종오, 백무산, 고은의 최근 성과와 한계를 갈무리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감이 없지 않은데, 가령 생태주의의 인식론이 갖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효과라든지 탈민족주의의 담론이 극성인 현재에 『만인보』의 위상은 어떤가 하는 점이 좀더 논의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글들은 창비의 오랜 문학적 기반을 작품에 즉해 일반적 수준에서 부각시킨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그런데 특집의 제목이 ‘갈림길에 선 한국 시와 시비평’이라는 점에서 드러나듯이 이와는 다소간 갈라지는 경향의 글이 특집에서 동시에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미 살펴본 나희덕과 이장욱의 글이 그것이다. 나희덕의 글은 다른 글들이 지향하는 바와 커다란 편차를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최근 시비평에 평가가 실종되었다는 최원식의 질책성 발언의 당사자라도 되는 듯이 대부분 해석으로 채워져 있다. 아마도 이는 작년 여름의 소설론 특집에서 강조했던 것 같은 ‘자세히 읽기’라는 기획의도가 이번 시론 특집에서도 작용된 결과일 것이다. 이 지적은 나희덕의 글이 문제적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명민한 해석 자체도 좋은 비평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의 글은 잘 보여준다. 그렇지만 총론 격인 최원식 발언과의 차이는 창비 담론의 어떤 균열을 표상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장욱의 글은 그 균열을 더 크게 벌려놓은 경우에 속한다. 그는 “지금은 서정의 시대가 아니다”(70면)라는 장담으로 글을 시작하고 “서정적 권위를 지닌 시인의 미학적 ‘자살’이 필요하다”(86면)는 주장으로 글을 맺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가 말하는 자의 표상이기를 멈추고 그 역으로 “말하는 자가 세계의 표상이 되”는 비약이 필요한데,이를 통해서 태어나는 존재는 ‘다른 서정시인’이다. 이를테면 들뢰즈(Deleuze)가 말하는 비인간적 퍼쎕트(percept)와도 같은 것이 그가 새로운 서정시에 요구하는 것의 요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는, 그가 개념화하는 바의 ‘서정의 권위’를 대표할 선배시인들과의 대화를 강조하고, “님이 죽었다고 그 사망을 호들갑떠는 가짜 균열”을 질책하면서 “민족문학은 아직도 부득이 유효하다”(33면)고 말하는 최원식이나, 최근 시의 한 경향으로서 현실 자본의 차별화 전략에 뒤따르는 언어적 표현이기도 한 “종작 없는 개성의 추구”(69면)를 비판하는 임홍배, 그리고 민족문학의 이름으로 창작된 작품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요구하는 유희석과 크게 다르다. 이것은 서정적 주체의 몸바꿈을 말할 뿐 그 주체의 죽음과 같은 단절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나희덕과도 차별적이다. 이 다름을 균열 자체로 놓아두려는 의도였다면 이는 다양한 독자들에게 취향껏 골라 읽는 재미를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른바 ‘좋은 시’를 요구하는 목소리와는 배치되는 것이다. ‘좋은 시’란 최원식의 말을 빌리면 “현재로부터 탈주하는 것이 아닌, 현재에 압도되는 것도 아닌, ‘현재의 시’”(22면)인데, 이장욱이 새로운 시의 요건으로 드는 것은 “영혼의 무중력상태”가 가져오는 “서정적인 권위의 약화”(79면)이며 ‘삶의 무게와 의미를 전하는 소실점의 소멸’(83면)이다. 이런 차이가 갈림길이라는 언어로 무난히 결합될 수 있다고 믿었다면, 이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생각이다. 이것은 갈림길이라기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뒤엎으려는 반대의 길이다. 문학은 인간이라는 실재를 향해 가는가 비인간이라는 실재를 향해 가는가. 문학뿐만 아니라 인문학과 자연과학 전체에 현재 걸려 있는 이 문제는 적당한 타협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다.

얼마전까지 한국문학의 활로를 탐색하는 유력한 방안으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이라는 명제가 크게 부각됐지만 실제로 그것은 각 진영이 가진 물질적 힘의 자장을 이기지 못한 채 하나의 선언에 머물고 말았다. 물론 회통 자체야 나무랄 것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현실적 물리력을 견디면서, ‘나’와 ‘너’가 자신의 영역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면서 이룩될 것이지 인위적 의도와 선언으로 추구될 것이 아니다. 문학은 항상 미래의 기획과 함께 시작되지만 결국 그 기획을 벗어나는 장소에서만 구체화된다. 마찬가지로 나의 문학은 항상 나의 의도를 벗어난 곳에서 뜻을 드러낼 것이다. 문학을 끝없는 현실운동의 심미적 영역으로 놓아두기를 원한다면, 따라서 바로 그 ‘나’의 영역을 좀더 분명히해두는 일이 필요하다. 그럴 때 문학의 심미적 운동은 스스로 나의 고립을 벗어난 회통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호 특집은 ‘나’의 탐구를 좀더 심도있게 진행했어야 할 듯하다. 어떤 기획의도가 있었을 텐데, 그것이 설령 균열을 드러내려는 것이었다 해도 결과적으로 드러난 것은 적당한 절충의 태도이다. 창비는 차라리 ‘과거의 영예’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도래할 앞날의 자리를 예감하도록 했어야 했다. 그래야만 “과거를 잃은 자는 미래도 잃는다”(22면)고 최원식이 힘주어 한 말의 진정한 울림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임홍배의 진술에 좀더 주목해볼 필요가 있겠다. 시적 개성만을 추구하는 태도―이것은 자본주의적 개체성의 신화로 현실을 은폐하는 태도이다―를 비판하면서 그는 그것을 “포스트포디즘 시대의 상품생산에서 표준화보다는 차별화가 더욱 고도화된 자본의 지배전략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의사소통 환경의 변화 속에서 차이의 생산은 자본의 차별화 전략과 시소게임을 벌이는 아슬아슬한 곡예가 될 수도 있기 때문”(69면)이라고 말한다. 이 소중한 진술에 덧붙여서 말한다면, 아슬아슬한 곡예이기 때문에 차이를 배제할 수는 없다. 바로 그 ‘나’의 실현이 지속적인 타자지향의 과정에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지향의 기획은 언제나 의외의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점에서 ‘나’는 오직 한번만 세계 속에 존재한다고 해야 한다. ‘나’마저도 스스로의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분화되어가는 차이 속의 존재인 것이다. 시도 마찬가지이다. 시는 차이나는 의미로 단 한번 세상에 존재한다고 말해야 하리라. 그런 지금, 차이의 긍정을 통해서 새 세계의 윤리학을 탐색하는 일이 거의 유행처럼 추구된 결과 오히려 ‘차이의 동일성’, 즉 ‘차이의 외피를 쓴 동일성’으로 차이 자체가 수렴되는 듯한 이때에 조기조(趙起兆)의 시는 그와 대비되는 사유의 섬광을 보여줌으로써 더욱 오롯하다. “함께 살고 싶지 않은 것들에게/함께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침엽수가 활엽수에게 그러듯/활엽수가 침엽수에게 그러듯/차이를 미워하며 서로 경계를 짓고/군집을 이뤄 살아가는 힘/이 팽팽한 사랑과 증오의 긴장이/숲을 넉넉하게 만든다.”(「숲의 정치―똘레랑스에 대하여」 『유심』 2005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