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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2000년대, 한국문학을 위한 비판적 단상

 

 

김영찬 金永贊

문학평론가. 성균관대 강사. 주요 평론으로 「한국문학의 증상들 혹은 리얼리즘이라는 독법」, 역서로 『근대성과 페미니즘』(공역) 등이 있다. youngmarx@naver.com

 

 

1. 문학의 곤경, 그리고……

 

21세기 초입, 지금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변화는 문학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지금 그렇듯, 앞으로도 필시 그러할 것이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영상문화의 영향력 확대와 멀티미디어 테크놀로지의 발전, 그로부터 촉발된 문화적 다양화와 문자문화의 자연스런 위축 등을 거론하는 수많은 진단이 이미 있었으니 여기서 재삼 반복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는다. 다만 그와 관련하여 이 지점에서 새삼 다시 환기하고픈 것은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에 의해 가속화된 진보이념의 패퇴, 그로 인한 좌절과 환멸이라는 착잡한 과거사의 기억이다. 지금까지 그것은 흔히 민중―민족문학 또는 리얼리즘 문학의 위축을 불러온 요인으로 지목되고 또 그런 문맥에서 호명되어왔다. 그러나 그 점은 사태의 일면일 뿐이다. 크게 보면 그 과거사가 야기한 효과는 한국사회에서 문학의 위상에 대한 인식의 변화, 그리고 그와 연동된 문학 자체의 존재방식의 변화였다. 1970~80년대에 특히 그랬듯 기존의 문학이 문학 바깥의 가치영역들을 통섭(通涉)하고 그것에 실질적인 지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일종의 메타적 위치에 있었다면, 이제 문학은 그 자리에서 내려와 그 자신에 할당된 개별적인 제도영역 속에서의 자족적 생존을 자신의 고유한 존재방식으로 내면화하고 있다. 흔히 ‘환멸’이라 일컫는 주조(主調)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1990년대의 일련의 변화는 개인과 일상이라는 새로운 미학적 가치의 발견으로 이어졌으나,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 자체의 사회적 위상과 권역의 그같은 축소와 결합되어 있는 것이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문학은 이제 더이상 사회적으로 영향력있는 통합적인 사유와 지혜(혹은 지식)의 매체가 아닌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를 문학의 뒤늦은 분화와 자율성 획득의 전도된 표현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역사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면, ‘90년대 문학’의 주체들이 그 역사에서 읽었던 것은 한국사회의 집단적 과제의 압박에 의해 유보되었던 문학 자체의 자기완결적인 미학적 성숙에 대한 요구였다. 다른 한편 가혹한 역사의 흐름에 크게 영향받은 대부분 민중―민족문학의 미학적 침체와 퇴행은 부정적(negative)인 형태로 제기된 그런 역사의 요구를 나름의 방식으로 돌파하는 성실한 대응이 없었던 데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터다. 개인과 일상의 가치를 앞세운 90년대 문학이 미학의 영역에서 이루어낸 진화는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분명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와 돌아보면 90년대 문학이 이루어낸 그 미학적 진화의 뜻하지 않은 부대비용 역시 만만치 않다. 자아를 강조하는 가운데 한국문학은 알게 모르게 조금씩, 문학이 실현해야 할 보편가치와의 연결지점을 상실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는 물론 문학의 자발적 왜소화와 사소화(些少化)다. 적어도 지금, 그것은 이제 쉽게 돌이킬 수 없는 흐름으로 고착되어버린 느낌이다.

새로운 세기의 문학에 요구되는 윤리적·정치적 과제를 민주주의 문제를 중심으로 날카롭게 제기하고 있는 황종연(黃鍾淵)의 글1이 갖는 중요성은 여기에 있다. 사실 이 글의 촛점은 고은(高銀)의 『만인보』 비판에 맞춰져 있고 문학과 정치, 또는 민주주의와의 관계에 대한 언급도 그런 문맥을 타고 있는 것이다.2 하지만 이 글의 문제성을 고은의 『만인보』와 그것을 매개로 한 민중-민족문학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만 주목한다면 한국문학 전체를 위해서는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이 글은 그것이 제출된 문맥을 떠나 그 자체로 21세기 한국문학의 정치학과 관련하여 가벼이 넘겨버릴 수 없는 소중한 문제제기와 제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황종연은 라끌라우(ErnestoLaclau)와 무페(Chantal Mouffe)의 급진민주주의 이론과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의 정체성의 정치(identity politics)를 참조하면서 민주주의 기획의 필요성과 그것을 매개로 한 문학과 정치의 만남을 강조한다. 실제로 “개인이 그 자신을 정의하고 발전시킬 권리”(「민주화」 398면)에서 출발하는 자유주의의 심화와 확대를 민주주의의 기초에 놓는 사고는 현대 정치철학에서는 일반화된 상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황종연의 문제제기는 문학과 정치의 문제를 사고하는 데서 소홀히 넘기기 쉬운 기본을 다시금 환기하면서 출발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3특히 “문학이 다수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의미있는 언어예술로 존재하려면”(「민주화」 409면) 무엇보다 “문학인의 재능과 성의를 요하는 기획”으로서 “민주주의의 실현”(「민주화」 390면)에 대한 방도를 궁구(窮究)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은 문학인 모두가 귀담아들어야 할 문제제기다.

이 글을 단지 고은의 시와 나아가 민중―민족문학에 대한 비판의 맥락으로만 환원할 수 없는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 크게 보면 황종연의 문제제기가 지닌 생산적 차원은 무엇보다 그동안 많은 한국문학이 자발적으로 망각하고 있었던 보편가치에 대한 문학의 관계맺음을 근원에서 다시 사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논의는 지금 한국문학의 현재를 있는 그대로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로서도 중요한 참조지점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것이 궁극적으로는 21세기 한국문학의 미래를 성찰하는 문제와 무관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굳이 2000년대 한국문학의 현재를 진단하는 이 글을 문학과 정치의 만남을 기대하는 황종연의 제안을 주목하면서 시작하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2. 근대 개인의 문화와 90년대 문학

 

먼저 우리는 황종연의 본래 의도와는 별개로, 무엇보다 오늘날 문학의 새로운 윤리와 정치의 필요성에 대한 그의 시의적절한 문제제기가 하필 고은 시에 대한 ‘비판’에 얹혀 제출되었다는 그 사실 자체를 일단 하나의 증상으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지금 한국문학이 궁리해야 할 민주주의 기획의 실현에 대한 중요한 제안이 그처럼 네거티브한 방식으로 제출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거꾸로 보면 이 글에서 그가 주장하는 문학의 정치학을 그 기본에서부터 올곧게 감당하고 있는 한국문학의 사례를 지금 이 시대에는 쉽게 찾아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은의 시에 “근대적인 개인의 문화”(「민주화」 400면)가 누락되어 있다는 비판이나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는 “자유주의의 심화와 확대”(「민주화」 398면)에 대한 천착이 없다는 진단은 내가 보기에는 비단 고은의 시에만 국한될 것이 아니라 마땅히 지난 세기는 물론 이 시대의 한국문학 전체가 감수해야 할 비판이다.

사실 민중-민족문학뿐만 아니라 1990년대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면서 이야기를 펼쳐왔던 한국문학조차도 황종연이 주장하는 ‘근대 개인의 문화’에 대한 치열한 탐구에 결코 값하지 못했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아이러니다. 이는 그가 강조하듯이 90년대 문학의 자아가 “법률상(de jure) 개인”에 불과했을 뿐 결코 “사실상(de facto) 개인”(「모더니즘」 257면)의 이상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한다.4 지난 십여년 사이의 한국문학이 “정체성의 정치와 문화에 대한 철저한 탐구에는 이르지 못했다”(「민주화」 409면)는 그의 진단도 이러한 판단과 전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90년대 문학의 일관된 옹호자였던 황종연은 이미 그 스스로도 90년대 소설에서 “개인의 자유를 증대시킬 개인들 사이의 제휴에 대한 관심”의 부재를 지적하면서 장정일, 백민석, 김영하의 소설을 예를 들어 90년대 소설에 출현한 “나르씨씨즘 문화는 자유의 자랑스런 명패가 아니라 곪아터진 상처”(「모더니즘」 257면)라고 정당하게 지적한 바 있다. 이어지는 그의 논의에 따르면, 진정성의 이상이 개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시 “삶의 의미를 자신을 위해 스스로 창조하는 것”(「모더니즘」 258면)이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그가 비판하는 바로 그 작가들이야말로 그가 재삼 강조하는 그와 같은 진정성의 이상과 파토스에 나름의 개인적인 방식으로 충실했던 이들이었고 또 그 역시 줄곧 그렇게 말해오지 않았던가?5 이를 지적하는 것은 단지 그의 논의가 시간차를 두고 갖는 이율배반을 지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실제로 진정성의 이상을 강조하는 황종연의 실제비평에서 우리가 종종 부딪혀야 했던 난감함은, 그의 정교한 이론적 기획을 현실에서 결코 따라잡지 못했던 작품 내의 결여로 인한 이론과 작품 사이의 격차다. 그러나 지난 세기 그가 그래왔듯 작품의 실상을 과장함으로써 그 격차를 메우려는 충정은 진정 앞으로도 한국문학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보다 여기서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개인적 자유의 실현을 위한 연대”(「모더니즘」 258면)를 몰각하는 ‘나르씨씨즘 문화’와 개인의 진정성의 문학(에 근접한 문학) 전체가 지난 세기 실제로 갖고 있었던 구조적인 친연성이다. 적어도 90년대 한국문학의 실상이 증명하는 바로는 그 둘은 서로 모순적으로 얽혀 있었으며 그런 한에서 결코 상호 배제적인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진정성’의 이론을 충족시키지 못했던 작품의 문제는 90년대 문학에서 자아의 일방적인 평가절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돌이켜보면 사실 90년대 문학의 성취는 실제로 자아에 대한 끈질기고도 집요한 탐구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만큼 그 자아에 대한 믿음과 집착은 사뭇 남다른 데가 있었다. 예컨대 얼핏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신경숙(申京淑) 소설의 자아만 해도 얼마나 물샐 틈 없이 끈질기고 견고한 것인가. 그리고 『외딴 방』(문학동네 1995)의 탁월한 성취도 바로 그곳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이런 자아가 없었다면 90년대 문학의 일탈적인 미학적 진화를 낳았던 배음으로서 냉소와 환멸도 애당초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냉소와 환멸이란 ‘의미’나 ‘가치’의 소멸과 하락을 재어보고 평가할 수 있는 견고한 관념적 척도를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자에게서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인 것은 그 자아에 대한 일방적인 집착이 거꾸로 ‘진정성’의 문화에 값할 수 있을 만큼의 철저한 자기 성찰과 탐구를 스스로 가로막았다는 점이다. 무릇 치열한 자아탐구는 자율적인 자아의 존립을 불가능하게 하는, 그것을 끊임없이 간섭하고 탈구(脫臼)시키는 ‘바깥’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필수적으로 포함하는 법이다. 예컨대 보들레르(C. Baudelaire)의 문학과 조이스(J. Joyce)의 『율리씨즈』의 위대한 성취가 증명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90년대 문학에 나타난 자아의 평가절상은 이 ‘바깥’의 일방적인 평가절하와 짝하고 있었고, 90년대 문학이 그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철저한 자아탐구에 이르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다.

나르씨씨즘의 상처는 바로 여기에서 자라나오는 것이다. 90년대 소설에 나타난 나르씨씨즘은 따라서 황종연이 비판하는 장정일, 백민석, 김영하에 국한된 것이기보다는 90년대 문학 전체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옳다. ‘바깥’을 버리고 자아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나르씨씨즘 주체에게 세계는 존재하지 않거나 등장하더라도 그 즉시 부풀려진 내면이나 관념에 종속되어 해소되어버린다. 자아주장이 낮은 목소리로 공명하는가 아니면 냉소를 동반하거나 과격한 형태로 분출되는가 하는 차이는 있을지라도, 이 점에서는 크게 다를 바 없다. 90년대를 대표했던 윤대녕, 은희경, 신경숙,장정일, 전경린, 배수아, 김영하, 백민석 등의 소설을 떠올려보면 이는 더할 수 없이 분명하다. 가령 윤대녕과 신경숙의 90년대 소설만 보더라도 그렇듯이, 이런 나르씨씨즘의 우세는 ‘나’와 다른 타자와의 실질적 연대를 모색하고 창출하기보다 그 타자조차 결국은 익숙한 ‘나’의 분신으로 동일화해버리고 그럼으로써 ‘바깥’과 격리된 ‘나’ 안에 안주해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90년대 문학은 실로 진정한 의미에서 근대 개인의 문화의 긍정적 심화보다는 거꾸로 그것의 자기만족적 가상(semblance)에 머물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다시 황종연의 논의로 잠시 돌아와서, 90년대 문학의 이런 한계는 그의 진정성 논의가 갖는 결여와도 무관하지 않다. 이와 관련해 그의 논지에서 의아한 부분은 인간 존재는 사회적 관계에 의해 구성된다는 맑스의 교훈이 “인간 개체로부터 자주성 또는 주체성을 이론적으로 박탈”(「민주화」 398면)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그가 참조하는 현대 좌파 정치철학이 합의하고 있는 상식에서도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닌가. “인간사회는 합법칙적으로 발전하는 하나의 전체라는 믿음”에서 공산주의 전제정권 성립의 영감을 읽어내는 것(같은 곳)은 가능할 수도 있다고 보지만, 그 전제주의의 영감의 원천을 그같은 인간 존재에 대한 교훈에까지 소급해가는 것은 그의 주된 이론적 전거(典據)를 감안하면 이해하기 힘들다. 민중―민족문학에 대한 비판의 맥락이 크게 작용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나, 넓게 따져보면 앞선 맑스의 교훈은 “개인들은 집합적 정체성들이 서로 얽히는 지점에 그 자아 정체성의 근원을 가지고 있”(「민주화」 409면)다는 그 자신의 주장과도 크게 배치되지 않는 이야기다.

언뜻 사소한 문제를 지적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근대 개인의 문화에 대한 천착이 충실하게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한 본질적인 구성요소로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실질적인 조건의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이 지점에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고은의 『만인보』가 보여준 문제점의 근원을 인간이 사회적 관계에 의해 구성된다는―인간의 창조성을 인정하지 않는 결정론과는 거리가 먼―맑스의 인간존재론에까지 소급해 찾는 황종연의 비판은 거꾸로 본래 의도와는 달리 그가 말하면서도 결코 말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난 세기 90년대 문학이 보여주었던 자아탐구의 한계는, 그리고 동시에 그 한계를 더욱 깊이 파고들어 근원에서 성찰하기보다는 의미있는 삶의 원천들을 상기시키는 진정성의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서둘러 덮어두었던 황종연 비평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실로 1990년대 이후 개인과 사회의 전 영역에 대한 자본의 실질적·이데올로기적 포섭이 전면화된 지금 한국사회의 실상은 근대 개인의 문화가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미궁에 빠뜨리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따라서 자유주의의 심화와 확대에 이바지하는 자아탐구는 자아를 근원에서 제약하는 이런 조건에 맞서는 정신적 싸움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자율적인 개인의 입장에서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의식을 끊임없이 간섭하고 굴절시키는 ‘나’ 안의 낯선 ‘바깥’ 혹은 타자와의 섣부른 화해가 아닌 치열한 싸움이다. 자아가 사회적 관계에 의해 근원에서 탈중심화되어 있다는 사실은 자율적인 자아를 제약하는 한계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자아를 위한 싸움을 그 자체로 사회 전체를 위한 싸움이 되게 하는 내재적인 가능성의 조건이기도 하다. 따라서 개인을 하나의 자율적인 ‘전체’로 완결되지 못하게 하는 그 내부의 결여에, 그리고 그 결여가 열어놓는 역설적인 가능성에 더욱 충실할 때에만 자아의 창조성은 창조성답게 발휘되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체적 자아의 구성이 정확히 실패하는 한에서만 보편자가 ‘나’의 정체성의 일부로 들어온다는 라끌라우의 지적6은 각도를 돌려 이런 맥락에서도 진지하게 다시 새겨들을 만하다. 자기 자신의 자아에 집착하면서 상상적 자유에 몰두했던 90년대 한국문학이 상실했던 것은 바로 이런 자아의 진정한 창조성의 조건이었다. 정확히 이런 맥락에서 자율적 자아 관념의 물신화를 견제하려는 노력은 “민중 관념의 물신화를 저지하려는 노력”(「민주화」 409면)만큼이나 긴요하다. 일찍이 개인의 자유는 그가 자연의 인과성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벗어날 수 없는 그것의 지배를 철저히 인정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바로 칸트(I. Kant)였다.

 

 

3. 위기 속의 한국소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도덕적 관습으로부터의 자유와 진정성에 근거한 자아 발전을 이상으로 삼고 그 이상의 실현에 합당한 정치, 사회, 문화의 형식들을 요구하고 추구하는 개인의 문화”(「민주화」 400면) 속에서 “새로운 윤리와 정치의 가능성을 발견”(「민주화」 409면)하는 것은 한편으로 이 시대의 한국문학 전체가 결코 소홀히할 수 없는 과제 가운데 하나다. 개인의 존엄에 대한 수호 위에서 공공의 선과 가치를 위한 도덕적 지평을 열어놓고 통합하는 진정성의 이상은 그런 문화적·정치적 기본이 유독 결여된 근대의 길을 걸어왔던 한국사회에서도 요청되어 마땅한 개인의 모럴이다. 그런 근대 개인의 문화는 개인의 존엄을 승인하는 만큼 그와는 다른 다양한 개인들의 차이와 동등한 가치 및 권리를 승인하고 연대하면서 그에 합당한 사회의 재구조화를 모색하는 작은 실천의 토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난 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이 현실에서 실제로 걸어왔고 또 가고 있는 길은 그런 이상과는 큰 거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자아의 존엄을 위해 싸워왔고 또 그 위에서 무시할 수 없는 미학적 진화와 성숙을 이루어왔던 90년대 문학까지도 진정성의 이상이 열어놓는 이 가능성의 지평을 철저한 자아탐구를 통해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것은 실로 문학과 정치의 바른 만남이 요구되는 한국문학 전체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한국문학의 ‘새로운 윤리와 정치’의 가능성은 끝없이 미끄러지면서 지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적을 유독 90년대 문학에만 돌린다면 그것은 불공정한 일이 될 것이다. 오히려 90년대 문학이 80년대 문학에서 소홀히 다루었던 개인과 일상의 문제를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무대에 올리고 또 그럼으로써 미학적으로도 이전의 낡은 문학적 관습을 갱신하면서 이루어온 성과는 그것이 갖는 한계 때문에 일방적으로 부정될 만한 것이 아니다. 특히 90년대 문학이 개인을 거점으로 나름의 방식으로 수행했던 근대와의 싸움이 갖는 의미도 쉽게 폄하될 수는 없다. 은희경, 신경숙, 배수아, 김영하 등이 보여주는 최근의 변화도 90년대 작가들이 2000년대 들어와 90년대 문학의 문법을 갱신하면서 조금씩 열어나가는 자아탐구의 심화로서 새로운 기대를 갖게 하는 것이다.7 문제는 90년대 문학의 성과가 후속세대들에게 생산적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은 반면 그에 못지않게 문제점을 계승, 심화하고 확대재생산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는 데 있다. 90년대 문학이 고수했던 자아와 문학의 자율성이라는 가치는 실제로 한국문학이 그 어떤 관습과 권위에도 기대지 않는 새로운 미학을 정립하고 성장시킬 수 있었던 토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것이 가졌던 내재적인 한계가 다른 한편으로 문학의 자폐와 자발적 왜소화를 정당화할 수 있는 길을 트고 열어주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문학은 이제 더이상 다른 문화들을 앞서는 우월한 가치를 주장할 수도 없고 현실이 그것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문학은 앞으로도 내내 주변부적 위치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문학의 자발적 왜소화다. 이는 어찌 보면 90년대 문학의 성과와 결여를 동시에 낳았던 나르씨씨즘이 전혀 다른 장소에서 다른 모습으로―심지어 문학의 존재방식까지도 결정하는 방식으로―열성유전(劣性遺傳)되고 있는 형국이라 할 수도 있겠다.

특히 이즈음 일부 적지 않은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서 흔히 보듯 일각의 한국문학은 90년대 문학의 치열한 자아탐구에 미치기는커녕 냉정하게 말하면 이제 여타 대중문화가 결코 줄 수 없는 깊이있는 감응과 삶에 대한 이해나 통찰을 제공하는 언어예술로서 문학의 고유한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듯한 인상이다. 지금 한국사회의 현실 한가운데서 그에 반응하는 매체가 가령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왜 하필 문학이어야 하는가,라는 절실하고도 고통스런 질문과 성찰이 없는 까닭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당연한 말이지만, 문학작품으로서 미학적 성취는 결코 그와 분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과 현실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문제의식 없이 빈약한 내면에 자폐적으로 안주하고 있는 수많은 한국소설들이 얼핏 새로워 보이는 실험을 거듭하면서도 뚜렷한 미학적 진전과 성과를 보여주지 못한 채 비슷비슷한 상투형만을 생산하고 있는 것은 그런 자발적 왜소화가 치를 수밖에 없는 당연한 댓가다.

어쩌면 그 원인의 일단은 이즈음 젊은 작가군의 일각에서 문학에 대한 의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고 또 그것이 일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도 있을 듯하다. 조금 과장해 말하면 적어도 지금 많은 젊은 작가들의 의식 속에서 문학은 인간의 삶과 현실에 대한 사유를 촉발시키고 그것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만듦으로써 반성하게 하는 언어예술의 차원에서 점점 그와 무관한 개인적 자기표현과 자기실현만을 위한 고급한 개인미디어 중 하나의 차원으로 이동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8 그렇다면 작가의 정체성 또한 사회에 대한 문학의 고유한 책임과 보편적인 가치주장 또는 통합적 정신을 어떤 형식으로든 내면화하기보다는 그렇지 않아도 크게 상관없는, 주어진 분업체계 속의 파편화된 정신과 제도적 위치를 문제의식 없이 수락하는 문자직업인에 불과하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지나친 비관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혹 이것이 현실의 부정할 수 없는 한 흐름이라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든 간에 그런 일각의 흐름을 억지로 되돌릴 수는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탄식이나 불평에 개의치 않고 그 자신의 간지(奸智)를완강하게 고집하는 것이 또한 무심한 현실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위기라고 일컫는 현상의 중요한 원인은 바로 거기에 있다. 문학 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영상문화의 발전과 문화적 다양화 등을 지목하는 답안이 기왕에 제출되어 있지만, 그것은 단지 외적 조건에 불과할 뿐이다. 문학의 자발적 왜소화는 문학 내적인 측면에서 사유와 미학의 결핍을 불러올 뿐만 아니라 그럼으로써 문학 자체의 현실적인 입지도 더욱 축소시킨다. 그와 더불어 현실을 문학적으로 감당하려는 예술적 사유의 진전과 끝없는 내면의 쟁투 대신 안이한 안주가 아니면 퇴행을 택한 숱한 기성작가들의 책임 역시 면제될 수 없다. 따라서 한국문학에 대한 대중의 외면과 냉소를 인터넷의 바다와 대중문화만을 의식 없이 좇아가는 대중의 탓으로 돌릴 일만은 아니다. 단순하게 말해 문학이 그저 그런 것일 뿐이라면, 특별한 재미가 있다거나 의무감에서가 아닌 이상 더욱이 한국소설을 읽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문학의 위기는 어떤 외부요인보다 앞서 문학 스스로 자초한 것이며, 이 점을 간과한 채 유통되는 문학의 위기와 관련한 탄식과 이런저런 담론은 문학의 실질적인 내적 위기를 은폐하는 자기기만(mauvaise foi)의 스크린일 뿐이다.

 

 

4. 탈내면의 상상력 혹은 2000년대 젊은 문학의 가능성

 

다소 의식적으로 비관을 앞세워 말해왔지만 당연히 이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역사는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하는 자들에 의해 진전되어왔기 때문이다.9 지금 그런 조건을 거슬러 펼쳐지고 있는 2000년대 문학세대의 새로운 문학은 90년대 문학세대의 갱신된 문학적 성과와 함께 교차하면서 90년대 문학의 근대 개인(주의)의 문화를 계승하면서도 또다른 여러 가닥으로 분기되거나 확장되고 있는 중이다. 1990년대 이후 개인의 일상과 욕망의 문제가 끊임없이 문학의 중심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것은 집단과 역사에 대한 상상이 입은 상처의 후유증이 작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국사회의 흐름이 걷잡을 수 없는 파편화와 단자화를 강제해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금 그것은 작가가 의식적으로 취하는 문학적 선택의 거점의 문제이기도 한 한편, 현실에 대한 실제적인 감각의 문제일 수도 있다. 특히 지금 한국사회의 사정을 생각해보면 이 점은 필연적이라는 느낌도 없지 않다. 작금의 한국사회는 후기근대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외적인 풍요 속의 극심한 불확실성과 갈등을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분열과 적대로 얼룩져 있다는 의미에서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끌라우·무페)는 추상적인 명제가 멀리 갈 것도 없이 경험적 사회영역에서 더할 수 없는 실감을 얻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로 인한 불안을 방어하는 확실성의 기초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는 개인의 자기보존과 자기구성의 욕망이 당연히 부상하리라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가운데 2000년대 젊은 문학은 앞서 지적한 90년대 문학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향보다는 애초 그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길을 열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이 바로 개인 주체의 성격과 태도다. 2000년대 젊은 문학의 자아는 대체로 처음부터 자기 자신의 현실적·정신적 무력함을 일종의 운명으로 내면화하고 있는 자아다. 예컨대 이즈음 부각되는 몇몇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놓고 보건대 숨막히는 도시의 미로를 희망 없이 방황하는 강영숙 소설의 주인공들이 그렇고, 동화적 판타지라도 없이는 견딜 수 없는 가난한 고독을 감내하는 윤성희와 김애란 소설의 주인공들이 그렇다. 박민규와 이기호 소설의 엉뚱하고도 일탈적인 유희 역시 이 무력한 자아에 대한 자각이 만들어낸 틈새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도시의 괴물에게 삼켜먹혀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거나 그래서인지 죽은 체하며 살아가기를 비장의 생존법으로 터득하는 손홍규 소설의 주인공은 또 어떤가. 편혜영, 김중혁, 박형서, 김유진 같은 젊은 작가들도 크게 보면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 이들에게는 기댈 수 있는 어떤 관념적 거점도, 현실과 부딪치는 모험적 열정도, 자기파괴적 항의도, 냉소할 수 있는 여력도, 또 이를 떠받칠 수 있는 자아에 대한 강한 신념도 없다. 그보다는 예컨대 신경증적 강박과 폐소공포증적 불안, 혹은 무력한 자기위안적 판타지가 아니면 딴전 피우기나 그에서 비롯되는 엉뚱한 공상과 수다가 있을 따름이다. 그런 측면에서 2000년대 문학을 활보하고 있는 주체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제된 고단하고 주변부적인 삶의 횡포에 적극적으로 반발하기보다는 그것을 이미 주어진 변할 수 없는 것으로 감내하는, 그런 전제 위에서만 가까스로 자아를 방어하고 보존할 수 있게 해주는 나름의 자기표현 방법을 체득하는 빈곤하고 왜소한 주체다.

이런 주체의 빈곤함과 왜소함 자체를,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무기력한 자기방어와 자기위안의 미학을 비판하고 마는 것은 쉬운 일이다. 비록 겉으로 아무리 발랄하고 일탈적이라 해도, 거기에는 근본적으로 근대현실의 됨됨이에 대한 선험적인 체념이 깔려 있다. 하지만 하기 쉽게 비판해버리기 이전에 그것이 일단은 이 후기근대 자본주의의 풍요와 활기 뒤에 감추어진 흔들리는 불안과 숨막히는 폐쇄성에 대한 정직한 실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들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탈현실의 포즈 역시 적어도 지금 이 세계의 바깥은 없다는 사실에 대한, 그리고 발랄하지만 무기력한 공상이나 방어적 판타지말고는 그에 실제로 저항할 수 있는 의식과 현실의 견고한 거점이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에 대한 생래적 감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아니면 많은 작가들의 경우 거꾸로 말해 그런 사실에 대한 자의식조차 결여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그 거점의 상실을 역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2000년대 이들의 문학은 이 후기자본주의의 시대에 사물화(Verdinglichung)에 저항하는 “인간적·영혼적 본질”10마저도 그 사물화의 운명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그렇지 않으면 그 운명의 제약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만 희미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우울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을 한편으로는 문학의 왜소화를 또다른 차원에서 겪어내는 진통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이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하는 문제는 또다른 과제일 테지만, 그저 비관하기보다는 그런 한계 속에 숨어 있는 역설적인 가능성을 우선 식별해보는 것이 옳다. 2000년대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개인을 압도하는 세계의 비정한 모더니티에 대한 감각을 나름의 개인적인 방식으로 대처하고 소화하려는 노력이 기존의 낡고 굳은 관습을 깨뜨리는 개성적인 어법과 미학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박민규의 소설만 예를 들어 보더라도, 그의 개성적이고 도발적인 어법과 문법을 근원에서 만들어내고 추동하는 것이 그 뒤에 숨어 있는 무력한 주변부 개인의 고통이라는 점은 눈치채기 어렵지 않다. 강영숙, 천운영, 윤성희, 이기호, 김중혁, 김애란 등의 개성적인 소설문법의 근원 역시 이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소설의 작은 이야기들이 이 시대 대중들에게 그래도 공감을 얻어내는 것은 그들 소설의 개인적 현실감각이 현실에 대한 대중들의 공통감각과 그런 점에서 접점을 형성하기 때문이고, 또 그 위에서 이전과는 다른 소설적 허구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놓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의 약화가 역설적이게도 허구의 새로운 문법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다른 한편,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라는 의문을 유발할 수도 있을 듯한 탈현실적 허구로서 가령 박형서와 김유진의 소설도 이런 맥락에서라면 일방적으로 비판받을 일만도 아니다. 그리고 소설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역으로 질문하게 만드는 잡스런 허구로서 천명관의 『고래』(문학동네 2004)의 흥미진진한 성과도 이런 바탕 위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 또한 기억해둘 필요가 있겠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런 허구의 탐구는 무력한 개인의 삶과 고통을 여하튼 사회적·역사적 의식 속에서 재해석하고 자리를 매겨야 한다는 의식의 강박을 떨쳐버린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오히려 이들에게는 90년대 문학의 주체가 그랬던 것처럼 80년대적인 엄숙한 아우라에 대한 의식적인 반발과 부정의 포즈조차도 없다. 그 대신 여기에 있는 것은 자아를 억압하는 세상의 무게에 짓눌리기보다는 고정된 관습과 규칙을 일탈하면서 그 무게를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하는, 그리고 그 속에서 자아의 가치를 창조하고 재발견하는 개인주의적 의식이다. 2000년대 젊은 문학이 그렇게 80년대의 사회역사적 의식이나 그에 대한 90년대의 대타적 부정의식을 동시에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뜻하지 않은 어떤 효과와 연관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세상의 관습적인 가치와 규준, 혹은 자본이 구축해놓은 의미와 가치의 체계에 대한 경쾌한 반발이나 부정과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90년대 문학의 개인주의와 구별되는 지점은, 자신을 압박하는 세계의 필연적인 규정성을 견고한 정신의 기초 위에서 의식적으로 부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처음부터 피할 수 없고 저항할 수도 없는 조건으로 내면화하는 데서 출발하는 ‘무력한 자아’의 개인주의라는 데 있다. 이 자아의 무력함은 물론 그 자체로는 긍정적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가령 강영숙과 윤성희의 소설에서도 보듯 2000년대 젊은 문학의 개인에게서 건강한 자기존중과 타자와의 공감이나 연대의 실마리가 역설적이게도 이 자아의 무력함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조금씩 풀려나오고 있다는 점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보여주는 세상의 가치와 규준에 대한 무관심이나 경쾌한 반발도 이를 기초로 해서만 성립하는 것이다. 2000년대 모더니티라는 초자아(super-ego)는 이들의 자아를 근원에서 제약하고 있지만, 또 일부 작가들의 경우 그에 대한 자의식조차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를 더욱 입증하는 셈이지만, 적어도 지금 보건대 2000년대 젊은 문학의 상상력이 자라나오는 중요한 조건은 바로 그것이다.

그런만큼 이들 문학의 구성요소로서 위축된 주체의 개인주의는 자기 세계를 관념적으로 정교하게 구축하고 그것을 완결된 미적 체계로 이어가는 데는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한계가 오히려 거꾸로 기존의 내면성의 미학과는 방향이 다른 새로운 탈내면의 미학을 개척하는 데는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 또한 틀림없다. 내면성이 축소되고 또 그럼으로써 90년대 문학이 한편으로 다다랐던 집요한 자아탐구의 치열함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이들 소설의 실상이지만, 그런 한에서 내면의 폐쇄성에 일방적으로 고착되지 않는 개성적인 탈내면의 상상력의 자리는 바깥으로 산포되면서 넓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앞으로 자기 자신의 결여를 어떻게 극복하면서 어떤 성과를 낳고 축적할 수 있을지는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자아탐구는 또다른 방향에서 시작되고 또 계속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5. 불행한 근대, 상상과 윤리

 

물론 2000년대 젊은 문학이 만들어내고 있는 이같은 작은 생산적 성과가 90년대 문학이 이룬 성과를 더욱 심화시키면서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전망을 뚜렷이 보여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 생산적 성과 자체도 부정할 수 없는 한계 속에서 자라나온 효과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는 어찌됐든 ‘좋은 옛것’보다는 ‘나쁜 새것’(브레히트)에서 길을 찾고 열어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2000년대 젊은 문학에 요구되는 것은 그 자신의 미학의 갱신이 아직은 다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가능성을 깊고 폭넓은 사유 속에서 이어가고 넓혀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 개인의 문화에 대한 철저한 탐구는 2000년대 문학으로서도 마땅히 짊어져야 할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다.

더욱이 2000년대 한국문학은 아직 개인의 상상을 보편적인 ‘전체’에 대한 상상과 결합할 수 있는 능력을 크게 결여하고 있다. 그 능력이란 예컨대 이 시대의 불행을 개인 각자의 불행이 아닌 전체의 불행으로 포착하고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며, 그에 대한 치열한 탐구를 세계를 반성하고 통찰할 수 있는 작품의 미학적 재구성으로 이어갈 수 있는 능력이다. 이것이 언어형식과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철저한 탐구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은 다시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하나 정녕 이뿐일 수밖에 없는가? 행복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이 총체적인 불행의 시대에 문학은 과연 여기서 더 어떠해야 하는가? 이런 물음은 문학의 바른 존재방식에 대한 성찰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결국은 윤리와 관계된 물음이다. 이 윤리적 물음을 자기 자신에게 제대로 묻고 감당하는 문학에서, 우리는 오래 이어질 21세기 한국문학의 진전된 미래를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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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황종연 「민주화 이후의 정치와 문학: 고은 『만인보』의 민중-민족주의 비판」, 『문학동네』 2004년 겨울호. 앞으로 이 글을 인용할 경우에는 「민주화」로 약칭하고 책의 면수만을 표시한다. 이와 함께 검토하는 황종연의 「모더니즘에 대한 오해에 맞서서」(『창작과비평』 2002년 여름호)는 「모더니즘」으로 약칭한다.
  2. 참고로 황종연이 이 글에서 진력하고 있는 고은 시에 대한 비판은 나로서도 의견을 같이하고 충분히 공감하는 내용인만큼 따로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후 전개되는 논의는 당연히 『만인보』에 대한 황종연의 해석이나 비판의 내용 자체에 촛점을 맞춘 반론은 아니다. 다만 자세히 이야기할 자리는 아니지만, 고은 시의 문제점은 황종연이 적시한 민중이나 민족에 대한 이해방식의 문제만으로 환원할 수 없는, 역사나 현실 속에서의 주체위치의 정립방식과 태도에서도 크게 기인한다는 것이 거칠게나마 대강의 나의 생각이다.
  3. 최원식은 황종연의 민주주의론에 대해 “개인의 탄생을 내세운 구미자본주의 사회가 개인의 무덤 위에 세워진 엘리뜨지배로 귀결된 사정”을 환기하면서 “공공선에 충성하는 계급연합적 공화(共和)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의 전진은 제국의 출현 또는 국가의 붕괴를 오히려 도울 수도 있는 것”이라고 비판한다(최원식 「자력갱생의 시학」,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 32면). 그러나 이런 비판은 실제로 정곡을 얻었다고 할 수는 없다. 개인의 자유주의적 가치를 강조한다고 해서 황종연이 의거하고 있는 ‘급진민주주의’가 ‘공공선에 충성하는 계급연합적 공화’에 결코 무관심하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4. 나로서는 이런 구분법은 물론 ‘진정성’(authenticity)의 문화와 ‘정체성의 정치’에 대한 이견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일단 여기서는 그런 척도가 황종연과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90년대 문학의 진정한 성취를 가리고 판별하는 데 유용하게 적용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5. 황종연 『비루한 것의 카니발』, 문학동네 2001 참조.
  6. Ernesto Laclau, “Universalism, Particularism, and the Question of Identity,” October, 61, 1994, 89면 참조.
  7. 90년대 문학의 작가들이 2000년대 들어와 보여주는 변화의 양상과 의미, 그리고 그것에서 예감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90년대 문학의 전반적인 특징과 함께 이미 한차례 짚어본 바 있다(김영찬 「1990년대 문학의 종언, 그리고 그후」, 『현대문학』 2005년 5월호 참조). 뒤에서 이어지는 2000년대 젊은 문학에 대한 진단은 앞선 이 글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8. 최원식이 지적한 시인과 시인지망자들의 과잉과 “‘나의 시’를 앞세우는 풍조” 역시 시의 경우여서 차원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이런 현상과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최원식, 앞의 글 17~18면 참조.
  9. 마침 공교롭게도 루카치는 일찍이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Trotzdem)라는 태도를 문학예술의 본질적 특징 중 하나라고 말했다. 게오르크 루카치 지음, 반성완 옮김 『소설의 이론』, 심설당 1985, 92면.
  10. 게오르크 루카치 지음, 박정호·조만영 옮김 『역사와 계급의식』, 거름 1986, 26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