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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아시아인에 의한 동북아 평화는 가능한가
좌담: 탈중심의 동북아와 한국의 ‘균형자’ 역할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 정치학
lee87@mail.skhu.ac.kr
배긍찬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정치학
gcbae89@mofat.go.kr
박명림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정치학
mlpark@yonsei.ac.kr
임원혁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경제학
limster@kdi.re.kr
이남주(사회) 창비는 올해가 광복 60주년, 을사조약 100주년 등이 되는 해라는 역사적 계기와 냉전체제의 해체 이후 국제정세가 매우 복잡하고 빠르게 변화되는 상황을 고려하여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시아 평화체제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전개해보자는 계획을 세운 바 있습니다. 한국사회 내적으로는 87년 6월항쟁과 대통령선거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우리의 정치·사회·경제 씨스템이 전환기를 맞고 있다고 판단하여, ‘87년체제’가 어떤 구조적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어떤 방향으로 변화·발전시켜야 할지 논의를 전개하는 것을 또 하나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동북아 평화체제와 관련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냉전해체 이후 이러한 논의가 계속되어왔지만 현재 어떤 방향으로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질지는 매우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다만 한반도 차원에서 보면 핵문제를 둘러싼 북한과 미국의 갈등이 새로운 평화체제 조성에 커다란 장애로 남아 있고 이 문제가 언제 해결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7월말 6자회담이 재개되고 동아시아 차원에서는 동아시아정상회의(EAS, East Asia Summit)가 올해 처음으로 개최될 예정이며 FTA 같은 경제문제를 중심으로 지역차원의 협력이 빠르게 진전되는 등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올해초 노무현 대통령이 내놓은 ‘동북아균형자론’이라는 구상도 여러 비판적 문제제기를 받기는 하지만 동북아,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한국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에 대한 전략적 고민을 촉발하는 계기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오늘 좌담은 이러한 최근의 변화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가, 이 변화가 발전적인 방향, 새로운 평화적 질서로 진전되기 위해서 어떤 과제가 제기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속에서 한국의 역할은 무엇인가 등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점검해보고자 합니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독자분들의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간단하게 각자의 관심사와 좌담에 참여하는 입장을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배긍찬 저는 외교안보연구원에서 15년 넘게 근무하고 있습니다. 사실 학자로서 처음에 동남아 전문가로 출발했습니다. 외교안보연구원에 들어와서 초기에는 대미관계, 미국의 외교정책에 대해 연구하다가 동남아를 잊을 수 없어서 다시 회귀했어요.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에 동남아뿐만 아니라 동북아, 즉 동아시아 차원에서 아세안(ASEAN)+3이라는 새로운 협력체계가 모색되면서 중국, 일본, 그리고 이 지역 문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미국도 제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호주, 인도를 포함해서 아태지역의 국제관계에 일반적인 이해를 가지고 동아시아 지역협력 문제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예기찮게 이 창비 좌담에 오게 된 것은 중도보수나 실용온건의 입장에서 발언을 해달라는 무언의 요청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념적 편향보다는 국제관계에 대한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갈까 합니다.
박명림 우선 이 주제가 갖는 시의성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에서는 세계적 수준의 급격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지만 세계시간과 동북아시간 사이에는 불일치의 폭이 크지 않느냐, 그래서 동북아에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논의가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한반도문제가 동북아지역의 핵심문제로 떠오르면서 그것이 어떻게 풀리느냐에 따라서 동북아의 21세기 초반 지역질서가 정해질 것 같은 상황입니다. 오늘 토론은 그런 이중의 전환기에 마련된 시의적절한 기획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또래 연구자들이 거의 그랬던 것처럼 저는 공부를 시작하던 80년대에는 민족문제와 분단·통일문제에 관심이 컸습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한국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죠. 한국전쟁을 연구하게 된 것도 그것이, 제가 ‘한국문제’라고 부르는 우리 국가·사회와 민족의 내외조건, 그리고 동북아의 질서를 정초한 결정적 사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의 기원이나 전개에 관한 연구를 일단 마쳐놓고 그것의 세계적·지역적·국내적 영향을 절반쯤 집필하다가 최근 2~3년 동안은 불가피하게 시간을 성큼 건너뛰었습니다. 북핵문제로 야기된 전쟁위기로 인해 50여년 전의 비극이 저를 학문적으로나 실존적으로 압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회과학이 갖는 존재구속성 때문인지 북핵문제 해결이라는 과제가 절박하게 다가오자 최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라든가 동북아 평화공동체 건설문제를 다루게 되었습니다.
임원혁 저는 대학원에서 경제사를 전공한 후 96년에 KDI에 입사했는데, 처음에 북한경제팀에 들어가서 집중적으로 북한 식량난 문제를 연구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북한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게 아니냐 했는데, 분석적으로 보니까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또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같은 시민단체처럼 북한 식량난의 실태를 조금이라도 알리는 데 기여한 것이 가장 큰 보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북한경제를 연구하는 데 시간을 100% 투여한다는 것은 허무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도 경제학자라면 탄탄한 자료가 있어야 얘기를 할 수 있는데 북한경제를 2년 정도 연구하면 더이상 나아가기 어려운 부분이 많거든요. 그래서 그후에는 특히 남북한 경제통합과정에서도 상당한 이슈로 부각될 기업구조조정 문제를 연구하고 있고, 부차적으로 지역적 관점에서 북한과 동북아 쪽을 관심있게 보고 있습니다. 예컨대 동북아 에너지 협력문제는 사실 가스산업 구조개편이나 전력산업 구조개편과도 연관이 있기 때문에 기업·산업부문 연구들과 지역협력을 어떻게 연관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연구를 해왔고요. 요즘은 아무래도 과거보다는 구체적으로 논의되는 동북아 에너지협력 문제와, 또 북핵문제 해결과도 관련이 있는 지역협력 쪽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남주 참석자들의 전공이 다양하네요. 중국정치학이 전공인 저도 좌담에서 나름대로 보완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다. 배긍찬 선생의 경우에는 국제관계에 대한 관심사에서 출발하여 동북아협력과 한반도의 역할을 고민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또 박명림·임원혁 선생의 경우는 한반도의 분단과 민족문제로부터 출발해서 동북아 문제로 나아가고 있는데, 이러한 개개인의 연구사들도 한반도와 동북아, 동아시아가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중국의 급부상과 동북아 질서의 변화
최근 동북아시아 질서의 변화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하나의 현상은 지구적 차원에서는 탈냉전이 진행되고 이에 따른 새로운 관계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데 동북아에서는 냉전적 질서가 계속 잔존하면서 새로운 질서의 형성을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 경향의 강화가 동북아 평화에 새로운 위협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도 대체로 동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왜 동북아에서 냉전적 질서가 계속 남아 있으며, 지역협력의 발전 속에서 새로운 평화체제의 모델을 만들어가는 유럽과는 달리 민족주의적 갈등이 역내의 평화를 위협하는 수준으로 강화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 차이가 존재합니다. 특히 미국의 역할에 대한 견해들이 그런데요. 즉 미국이 동북아에서 새로운 평화체제를 발전시키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가 부정적인 역할을 하는가에 대해 견해가 갈립니다. 여기에 중국의 부상이 동북아의 새로운 질서 형성에서 매우 중요한 변수로 대두되고 있으며, 성장하는 중국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도 새로운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먼저 동북아의 새로운 질서에 커다란 영향을 줄 중국과 미국의 역할에서 논의를 출발했으면 합니다.
임원혁 80년대 이후 동북아 질서의 변화는 결국 크게 두 가지로 보는데, 하나는 미소 양극체제의 와해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침체, 중국의 급부상입니다. 80년대 말로 거슬러올라가면 양극체제가 와해되고 일본이 넘버원이 아닌가 하는 논의도 있었고, 사회주의 체제전환이 일어나면서 비교적 쉽게 동북아공동체로 갈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논의들이 많았죠. 90년대 초만 하더라도 단순히 중국의 노동력과 일본과 한국의 자본, 기술이 결합해서 호혜적인 경제관계를 만들 수 있고, 일본을 선두로 한국 등 신흥공업국(NICs)과 중국 등 후발개도국이 기러기 편대형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경제 위주의 논의가 많이 진행됐습니다. 그런데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중국의 부상이 급격히 눈에 띄게 되고 중국 충격(China shock)이라는 말이 거론되기 시작하지요.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외교적으로도 중국의 부상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결국 20세기초 전후 독일이 부상했듯이 중국도 현상타파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그것이 과거사문제나 지정학적 요인과 결부되어서 중국을 포용하느냐 견제하느냐 하는 논의로 발전되었죠. 그러면서 동북아 담론도 과거 미소 냉전체제가 와해된 직후의 낙관적이고 단순한 견해에서 벗어나, 오히려 동북아에서 거대한 초승달(Great Crescent) 식으로 미국, 일본, 대만, 인도를 엮어 중국을 견제하는 신냉전구도가 대두할 수도 있다는 지적까지 나오는 상황이기 때문에 지난 20년간 동북아의 질서변화는 상당히 진폭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배긍찬 미국의 관점에서는 유럽과 달리 아시아의 불안정 요인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 내부에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아시아의 내부적 불안정성은 중국―대만 문제, 한반도 문제라고 파악하는 것이고, 또 노골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지만 일본의 재무장화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불안하게 보고 있습니다. 미국은 아시아 역내국가들끼리 협력체제를 이루는 것보다는 미국이 개별적 사안에 대해 개별 국가를 관리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접근했는데, 냉전 이후에도 그러한 태도가 그대로 답습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이는 이데올로기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유럽과는 차별화된 아시아 국제관계의 구조적 특징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이 지역의 안정적인 질서 창출과 유지의 문제입니다. 일차적인 힘의 관점에서 동북아, 특히 동아시아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가장 핵심적인 행위자는 미국과 중국, 일본 3국이죠. 물론 여기에 영향을 미칠 만한 국가로 인도, 러시아, EU를 들 수 있고, 중급국가인 한국의 역할도 생각해볼 수 있겠죠. 또 동남아 중소국가 연합체인 아세안도 있겠지만요. 그러나 기본적으로 미·중·일 3자간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핵심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미국의 패권을 바탕으로 한 3국간의 힘의 관리문제를 인정한다면 나머지는 부차적인 문제가 될 수밖에 없죠. 부차적인 문제는 대안적인 질서라기보다는 보완적인 질서인데, 좋든 싫든 미국의 패권을 인정하는 가운데 3자관계를 관리하는 동시에 동아시아국가들간 역내협력, 정체성 확립, 그리고 역내국가들의 안정과 평화와 발전을 스스로 도모할 수 있는 하나의 협력구도를 형성해나가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미국의 패권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문제는 미국이 역내국가들끼리의 협력문제에 대해서 유럽과는 달리 상당부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인데, 앞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나갈 것인가 하는 게 중요하죠.
미국의 중국 견제정책
미중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중국지도부는 모든 문제를 미국과 협상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는 것이죠. 중국은 미국의 패권을 인정하면서 세계화를 받아들이고 대만문제를 제외하고는 어떤 문제도 미국과 협상할 수 있다는 아주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어요. 알다시피 미국이 중국을 관리하는 방안 중 하나는 포용정책이고 다른 하나는 봉쇄정책입니다. 과거 클린턴정부는 대중국 포용정책을 통해 중국과 일본 사이의 균형자 역할을 하면서 이 지역을 관리해왔거든요. 그런데 부시행정부에 들어서, 특히 9·11 이후에 중국이 미국의 대테러전쟁에 협력하고 있는데도 더욱 노골적으로 중국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최근 한미간에 문제가 되는 전략적 유연성 문제도 사실상 중국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신냉전이라는 말도 이런 데서 나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러나 중국에서 현실적인 감각을 가진 전략가라면 향후 20~30년 동안 미국에 정면 도전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고 할 능력도 안된다고 보거든요. 중국은 내부문제를 해결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는데, 과도한 목표를 설정해서 그것을 밀어붙이는 부시의 대중국전략이 과연 이 지역에 바람직한 구도를 만들어 낼지는 의문입니다.
박명림 동북아에서 궁극적인 균형자 역할을 해야 하는 주체는 결국 미국이 아닌가 하는데 거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동북아인들이 스스로 역내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우선이라는 것이죠. 우리는 동북아국가들의 상호 협력과 연대가 높아지면 미국의 역할은 축소되고, 반대로 갈등과 대립이 커지면 미국의 역할이 확대되는 묘한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저는 지난 한세기 반 동안 미국의 동북아정책의 핵심을 세 가지로 봅니다. 패권주의, 일방적 양자주의, 그리고 일본중심주의라는 것이죠. 미리 결론을 얘기하면 이 세 가지는 각각 호혜주의, 다자주의, 중국포용주의 또는 중일균형주의로 바뀌어야 합니다. 세계가 탈냉전으로 접어들었지만 세계에서 유일하게 동북아에서 지역냉전이 온존하는 까닭은 앞의 세 가지 기조가 담겨 있는 미국의 동북아정책과 동북아 자체의 특징의 결합에 있습니다.
지난 1세기 미국의 동북아정책은 몇번의 커다란 전환점이 있었는데 중심 요인과 타깃은 바로 중국이었습니다. 20세기 초반 영일동맹과 태프트―카쯔라(Taft―桂太郞) 조약의 체결로 동북아에서 세계 최초로 미영일동맹 체제가 만들어지면서 영미의 후견을 받은 일본은 중국패권에 도전할 수 있었고 결국 성공했습니다. 여기에 러시아가 들어오면서 미·영·일·중·러 5대 강국 사이에 불안정한 세력균형체제가 등장하죠. 그런데 그 최종 결과는 영미패권에 일본이 도전하여 일어난 세계대전이었습니다. 미국의 두번째 동북아정책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2차대전 종전 직후입니다. 일본과 전쟁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다시 일본을 지역주축으로 삼아 소련과 중국 견제정책을 폅니다. 이는 냉전대결에 따른 일본중시전략의 결과였어요. 중국에 대해서는 초기만 해도 중국봉쇄에 대한 목표는 확고하지 않았지만 한국전쟁 이후에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죠. 미중간에 한반도에서 3차대전을 치른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중국이 거의 전면전을 치르면서 양국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아 본격적인 중국봉쇄가 시작되고, 미국은 이때 일본을 중심으로 한국과 대만을 연결하는 위계적 지역통합전략을 구사했죠. 그러나 다행히 한국전쟁 이후에 중소갈등이 터졌어요. 중소갈등과 봉합의 한 역사적 산물이 바로 미중, 중일 데땅뜨였죠. 즉 미중, 중일 데땅뜨를 통해 중국을 소련에서 떼어내는 것이죠. 그러다가 1980년대 레이건―새처―나까소네로 이어지는 미영일 보수동맹체제가 구축되면서 소련이 붕괴되었어요. 미국을 정점으로 유럽(영국)과 동아시아(일본)를 잇는 거대한 글로벌 냉전보수동맹이 가능했던 이유는 일본을 중심으로 동남아와 대만―한국을 이으려는 미국의 전후 동아시아 지역통합구상이 완성되었기 때문이죠.
중국을 포용하는 동북아 질서가 필요하다
냉전해체 이후에도 중국이 살아남자 미일동맹은 더 강화되면서 한반도 및 양안 문제와 연결되어 지역냉전을 지속시키고 있습니다. 평화헌법 개정문제에서 보듯 미국의 일본중시―중국견제 전략은 현재 거의 변하지 않았어요. 특히 부시행정부의 등장 이후 부상하는 중국에 맞서 부시―블레어―코이즈미로 이어지는 세번째의 미영일 보수동맹체제의 구축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중국이 국가전략을 잘 선택한 것 같습니다. 미국의 글로벌 헤게모니를 인정하는 가운데 ‘평화적 흥기〔和平崛起〕’를 통해서 지역강국 건설전략으로 나아간다는 것이죠.
배긍찬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는데요. 미국이 중국을 진정으로 원했던 적도 있어요. 일본의 군국주의가 최고조로 달하면서 국민당정권과는 정말 잘 지내서…… 그땐 진짜 동맹으로 만들 생각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박명림 맞습니다.
배긍찬 결국 미국은 유라시아지역의 주도국가가 미국에 도전하는 것을 방지하겠다는 지정학적 이해 때문에 동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일본을 양쪽에 놓고 시소 타듯이 역사적으로도 몇차례 왔다갔다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최근 부시행정부의 외교정책을 주도하는 네오콘은 전세계적인 민주화를 위해 정권교체(regime change)를 하겠다는 것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정권교체의 궁극적인 대상이 중국이라는 점입니다. 미얀마니 북한이니 꾸바니 하는 나라들은 다 피라미들이고 궁극적으로는 중국을 노리겠다는 것이거든요. 대만이나 한반도 문제도 예외가 아니라고 보는데, 네오콘들은 미국이 이 지역에서 군사행동을 취할 경우 중국정부가 미국에 정면 도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80%는 믿고 있는 것 같아요. 그 가정하에서 어떤 면에서는 자신있는 정책을 취해왔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오늘 조간에 실린 헨리 키씬저(H. Kissinger)의 전략적 사고는 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던데, 중국의 부상을 10, 20년 늦출 수는 있어도 막을 수는 없다면 미국이 중국을 동아시아의 책임있는 행위자로 인정하고 협력을 유도해나감으로써 이 지역의 세력균형을 도모하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겠느냐는 거죠. 저는 그 말에 매우 공감하고 있습니다.
박명림 아까 이야기의 결론을 말씀드리면 미국이 동북아에서 균형자 역할을 하려면 이제까지의 일방적인 일본중시전략을 거둬들이고 최소한 중일균형전략이나 중국포용정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지난 백년을 살펴보면 일방적인 일본중시정책은 동아시아와 세계 평화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오늘의 중국은 과거의 중국과는 명백히 다릅니다.
동북아에서 미국의 균형자 역할은 가능한가
이남주 지금 두 분이 동북아에서의 미국의 균형자 역할을 지적하셨는데 최근 한국에서 논의되는 ‘균형자’와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임원혁 선생은 두 분이 말씀하신 미국의 균형자 역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임원혁 여기에 대해서는 미국에서도 오랫동안 논의가 있었습니다. 미국사람들은 동북아의 균형자(balancer) 하면 마치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미국이 눈치를 보면서 왔다갔다하는 것 같으니까 안정자(stabilizer)라는 말을 더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한데, 기본적으로는 지금 두 분께서 하신 말씀에 동의하고요. 미국에서도 최소한 정통 보수론자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중국이 부상하고 있으면 그쪽과 엮어서 책임있는 강국으로 되도록 해야지 계속 일본만 붙잡고 가서 되겠느냐 하는 의견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미국에서 동아시아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다수가 일본의 영향을 꽤 많이 받은 것 같거든요. 상당히 친일본적이라고 할 수 있죠. 사실 전통적으로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대륙과 해양 양쪽을 동시에 중시하면서 소련을 견제하고, 자신의 패권적인 위치를 공고히하려고 했는데 대륙 쪽은 거의 적대관계로 해놓고 해양 쪽만 중시하겠다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지 의문스러워요. 예를 들어 동아시아지역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던 도널드 그레그(Donald Gregg)나 더쎄이 앤더슨(Desaix Anderson) 같은 이들은 그런 얘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이른바 미국내 동아시아 전문가 대다수는 기본적으로 그런 문제인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게 가치동맹(價値同盟) 문제와 엮여서, 일본은 그래도 민주화되고 시장경제를 받아들인 성숙한 국가인데, 중국은 어딘지 미숙하고 민족주의가 발호한다는 인상이 있어서 그냥 일본을 믿고 가자는 인식이 전문가들 사이에는 상당한 것 같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도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하는 게 과제라고 봅니다.
배긍찬 저도 그런 사람들의 얘기를 많이 듣는데, 그러나 미국의 상당수 전문가들의 글을 보면서 이런 것을 느꼈어요. 아무리 미국이 지금 여러 이유로 일본을 키워준다고 하더라도 진주만을 기습해서 자신의 등에 비수를 꽂았던 일을 잊을 수 있겠는가? 특히 브레진스키(Z. Brzezinski)의 글은 그런 뉘앙스를 많이 풍겨요. 그는 중국의 군비증강보다도 특히 일본의 군비증강을 더 우려하고 있죠. 실제 기술적으로 앞서 있고 훨씬 더 강력하고, 그래서 일본을 억제한다는 것이 미국의 아주 중요한 이해관계 중의 하나인 것을 잘 알고 있는데, 물론 단서는 있어요. 즉 일본은 아직은 믿을 만한 행위자이고, 일본인들은 훌륭한 세계시민이라는 거죠. 그러나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급박한 안보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특히 북한 핵문제를 핑계삼아 일본이 그야말로 재무장을 신속히 하고, 미국으로부터 급격하게 이탈할 개연성에 대해서는 경고를 잊지 않아요.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중국과 아무리 관계가 좋아도 역사문제가 하나 불거지면 완전히 뒤집어지는 것처럼…… 그런 것이 작용하지 않을까 싶네요.(웃음)
이남주 여러가지 중요한 문제가 제기된 것 같습니다. 모든 분들께서 동북아 협력에서 미국이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가가 매우 중요한데 현재로선 미국의 역할이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해주셨습니다. 특히 동북아에서 평화적 질서가 만들어지기 위해선 미국이 중국의 성장을 포용하고 동북아의 지역협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지적은, 미국을 동북아 협력에서 배제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현실적인 의미가 있는 문제제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가능성에 대해서 배긍찬 선생은 상대적으로 긍정적으로 보고 다른 분들은 비판적으로 보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습니다. 저도 조금 비판적인 입장이지만 배긍찬 선생의 견해에도 기대를 걸어보겠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태도 변화는 기대와 희망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동북아와 동아시아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다양한 협력이 미국의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역차원의 협력이 발전적인 방향으로 전개되면 미국이 이를 계속 외면한 채 냉전적 사고와 동맹관계로 지역에 개입하기 어려워진다는 점을 깨닫게 되리라 봅니다. 특히 동아시아의 현재 협력추세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유럽 협력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한 초기단계보다도 통합의 수준이 높습니다. 그리고 인적·문화적 교류도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새로운 지역질서 형성의 동력들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협력이 단순한 교류의 증가를 넘어 지역차원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데 아직 어려움이 많다는 현실입니다. 특히 가치관과 의식적인 측면에서 차이가 크며 지역협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법과 제도적 협력의 수준도 낮기 때문이죠. 다만 유럽의 경우도 경제협력이 지역협력을 촉진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재 동아시아에서도 이러한 경로의 발전이 가능한지를 검토해야겠습니다.
동북아 협력과 유럽식 통합모델의 차이
임원혁 경제협력 쪽으로 얘기한다면 90년대 초의 낙관적인 시절, 사실 그때 아이디어는 다 나왔던 것 같아요. 크게 보면 시장통합이 있었고 또 하나는 에너지나 수송 네트워크를 건설해서, 특히 안보 쪽과도 연계가 상당히 있지만, 낙후지역 개발에 기여한다는 기본구상이 있었죠. 시장통합과 관련해서는 최근 FTA 논의가 많이 진척되고, 또 에너지나 수송 네트워크와 관련해서는 석유나 가스 파이프 건설 문제가 논의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90년대 초에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경제협력에 있어서 최근에는 중국과 일본 간의 경쟁관계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중국은 과거 일본이 80년대에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치고 나가고 있어요. 과거 일본은 부를 축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대하고 여유롭게 베풀지 못했던 면이 있는데, 중국은 심지어 아세안 10개국 중에서 후발주자 4개국에 대해서는 일방적으로 중국시장을 무관세로 개방하고요,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중국의 WTO 가입에 따른 이득을 조기 수확할 수 있도록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결국 중국과 아세안 간의 FTA의 진전을 이끌고 있습니다. 여기에 초조감을 느낀 일본이 대응을 하고 있고요. 하지만 일본이나 한국은 농업분야에 결정적 취약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FTA 식으로 진전되는 데는 앞으로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발생할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이 일본과 FTA를 먼저 체결하고 그 다음 중국―아세안 FTA와 엮어서 동아시아 FTA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우선 중국과 일본 간에 경쟁의식이 있고 농업문제가 걸리기 때문에 시장통합을 이루는 과정 자체가 상당히 어려울 것 같다는 느낌도 듭니다.
에너지와 수송망 역시 중일간의 경쟁관계가 상당히 작용합니다. 원래는 시베리아 안가르스끄에서 중국의 따칭(大慶)유전 쪽으로 송유관 건설이 추진되었는데, 나중에 일본이 뛰어들어서 극동의 나호드까 쪽으로 송유관을 건설하려고 했고 결국은 타협안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도 90년대 초의 예측처럼 경제협력을 하면 정치·외교적으로도 화해무드가 조성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 것 같아요. 오히려 정치·외교 문제가 끼여들어서 경제협력을 방해하는 판국이기 때문에 전략적인 관점에서 미국을 포함한 주요 국가들이 과연 다자간 협력구도를 먼저 만들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고, 대타협 이후에 기능적인 경제협력을 이루고, 거기에서 힘을 받아서 추가적인 정치·외교적 화해를 조성하는 것이 좀더 현실적인 씨나리오인 것 같습니다.
이남주 앞서 말씀하신 것들과 연관시킨다면, 특히 유럽과 비교를 한다면 유럽 같은 기능주의적 통합모델을―사실 유럽의 경우도 기능주의적 통합모델만으로 지역협력이 촉진된 것은 아니지만―동아시아에 적용시키려는 경향이 강한 것은 사실인데, 동아시아에서는 기능주의적 협력의 한계가 좀더 뚜렷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시는군요. 즉 정치적 측면에서 다자간 협력에 대한 큰 틀의 합의가 전제되어야 하고 그 속에서 기능주의적 협력들을 강화해가는 것이 더욱 현실적인 길이라는 의견인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세안+3 구도와 동아시아정상회의
배긍찬 이런 기능주의적 통합과정에서 역시 정치·외교적인 문제, 특히 중일간의 패권경쟁이 협력을 매우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아세안+3 차원에서 협력한다는 얘기를 많이 하잖아요? 그건 아세안이 하는 정상회의에 한·중·일 정상을 손님으로 부르는 거예요. 즉 자기들끼리 하는 정상회의 제2부에 한·중·일을 불러서 지원과 협력을 얻어내는 형식이거든요. 따라서 그다지 자연스럽지 못한 협력구도인 셈이죠. 그렇기 때문에 동아시아 지역협력의 주도권이 여전히 아세안에 있는 거예요. 즉 동북아 3국간, 특히 중일간 협조가 안되니까 동남아 중소국가 연합체인 아세안이 리더십을 갖게 되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세안+3 구도가 우리에게 매우 유용하다고 봅니다. 참여정부에 들어서 동북아구상도 나왔지만 사실 동북아 3국간 협력은 지난한 일이거든요. 그런데 아세안+3은 유효한 틀을 제공해주고 있어요. 3국간의 직접적인 협력이 안되기 때문에 동아시아라는 넓은 틀로 우회해서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한다는 것이죠. 아세안+3 정상회의와 연계해서 한·중·일 정상회의도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말하는 동북아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곧바로 동북아로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동아시아로 우회한다는 측면은 반드시 되짚어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동아시아 외교무대의 최대 쟁점은 동아시아정상회의 개최 문제입니다. 애초에 나온 아이디어는 한·중·일에서도 아세아+3 정상회의를 개최할 수 있는 동아시아정상회의가 필요하다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디어에 대해서 아세안 쪽에서 일찍이 유보의사를 표시했어요. 자기보다 덩치가 훨씬 큰 동북아 3국이 자기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참가한다는 것이 엄청나게 부담스럽거든요. 그럴 경우에 중소국가 집합체인 아세안의 전략적 중요성이 희석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죠. 그래서 많은 전문가와 관찰자들은 동아시아정상회의는 기능적 협력이 더욱 심화되어 역내 자유무역지대 같은 구상이 실현될 수 있는 2010년 경에나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랬는데 작년 초부터 별안간 중국과 말레이시아가 경쟁적으로 동아시아정상회의를 제안, 추진했어요. 하지만 이에 대해 아세안 내부의 입장은 반으로 갈려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중국이 주도할 것으로 보이는 동아시아정상회의에 대한 일부 아세안 국가들의 거부감 때문이죠. 인도네시아가 가장 대표적 경우이고, 역내 세력균형을 중시하는 싱가포르, 또 역사적으로 중국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는 베트남 등도 그렇죠. 그럼에도 작년말 말레이시아가 인도네시아를 극적으로 설득해서 일단 2005년 12월 쿠알라룸푸르에서 동아시아정상회의 개최에 합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이걸 하려니까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미국과 일본은 동아시아정상회의를 중국의 지역패권 추구의 유용한 수단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죠. 또한 미국이 동남아국가 중 가장 거부감을 갖는 말레이시아가 중국과 함께 지나치게 이것을 밀어붙인 점도 그렇습니다. 때문에 중국의 지역패권을 경계하는 국가들이 동아시아정상회의를 희석시키는 방법으로 생각해낸 것이 회원국 확대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은 미국, 러시아, EU, 호주, 뉴질랜드, 유엔 사무총장을 다 부르자는 거죠. 일본의 생각은 자기가 주도하지 못할 바에는 아예 무산시키는 것이 낫다는 것이고, 올초에 미국도 참여하겠다고 얘기했어요. 이후 아세안에서 몇가지 기준을 제시하면서 일차적으로 인도를 끌어들이고, 이후 호주와 뉴질랜드의 참여도 사실상 결정되었습니다. 최근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인도, 호주, 뉴질랜드가 정상회의에 참여해야 한다는 견해를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아세안 국가들 입장에서는 중국 견제라는 문제 때문에 일단 호주, 뉴질랜드, 인도를 부르기는 했지만, 여전히 동아시아 협력의 중심축은 아세안+3이라는 데 큰 이견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싯점에서 돌아보면 중국이 별로 현명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렇잖아도 미국과 일본이 중장기적으로 아세안+3이 중국의 그라운드가 될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일을 급박하게 추진해서 불필요한 경계와 견제를 자초했다는 거죠. 중국은 이 점에서 외교상 실패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하여튼 동아시아정상회의 개최 건은 앞으로 여러가지 숙제를 안게 되겠죠.
이남주 임원혁 선생께서 동아시아 협력의 현황과 관련해서 경제협력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한계가 있으며 정치적 협력의 진전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하셨고, 배긍찬 선생께서는 아세안+3이라는 무대를 통해 진행되는 정치협력에서도 정치적 갈등이 통합의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면 동아시아에서 경제협력과 정치협력만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협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박명림 우선 저는 유럽통합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재의 인식으로는 동북아 지역통합과 협력에 큰 교훈을 얻지 못한다고 봅니다. 즉 경제통합과 정치통합을 너무 분리해서 보거나 시계열적(時系列的)으로 보지 않느냐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로부터 유럽경제공동체(EEC), 유럽공동체(EC), 유럽연합(EU)으로까지 나아가는 과정에서 경제에서 정치로의 파급효과(spill-overeffect)로 인한 정치통합을 강조하는데, 저는 다르게 보거든요. 경제통합 못지않게 집단안보기구의 존재, 지식공동체의 형성, 과거사문제의 해결 같은 세 가지 조건이 결정적이었다고 봅니다.
먼저 NATO라는 집단안보체제를 떠나서 20세기 유럽통합과 경제협력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실상 유럽통합의 전제는 경제통합이라기보다는 집단안보를 통한 안보협력이었어요. 오늘날 동북아의 역내무역 비중이 EU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역내 안보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심각한 상황임을 고려하면 집단안보 개념과 기구의 발달은 지역통합에 결정적입니다. 둘째는 지식공동체의 역할입니다. 유럽지식인들이 여러 분야에서 ‘하나의 유럽’의 역사와 전통을 불러냈던 목적은, 과거를 향한 것이 아니라 명백히 미래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즉 ‘미래비전’이었던 것이죠. 독일과 프랑스, 독일과 폴란드, 그리고 전 유럽의 교과서 협력에 대한 노력들 역시 중요했지요. 셋째는 과거사문제입니다. 중국과 일본, 한국과 일본 못지않게 독일과 프랑스는 각각 나뽈레옹과 히틀러를 겪었기 때문에 서로간의 경쟁의식이나 패권의식, 피해의식 같은 것이 굉장히 컸습니다. 상호간에, 특히 독일 쪽에서 이런 것들을 풀어주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했지요. 예컨대 독·불 화해협력조약(엘리제조약)을 이끌어낸 1963년 아데나워―드골 회담을 보면 어느 정도까지 과거를 넘어섰는가를 보여주거든요.
그러나 동북아지역은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냉전시대 이래 탈냉전시대에 이르기까지 동북아지역은 전세계에서 집단안보체제나 다자안보기구가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지역입니다. 지식공동체의 구축 노력 역시 국민국가 중심이거나, 지역단위로는 너무 약하고 느리지요. 과거사문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지요. 그 결과 경제는 통합으로 나아가는데 군비경쟁은 세계 최고수준이고, 역사전쟁·영토분쟁·민족주의가 더욱 강화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어요.
이남주 민족주의적 갈등 등 현재 동북아시아가 직면한 문제들이 기존의 협력모델만 갖고는 해결되기 어렵다는 의견인 것 같은데, 새로운 협력모델과 관련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을 말씀해주시죠.
배타적 국민국가와 민족주의에 대한 도전들
박명림 동북아지역은, 역사가 홉스봄(E. Hobsbawm)이 말했듯 ‘역사적 국가’라고 할 정도로 오랫동안 ‘정치적 단위’(국가)와 ‘종족적 단위’(민족)가 일치해왔지요. 그런 전통적 요인에다가 근대 이후의 충돌이 겹치면서 이곳에서 민족주의와 국민국가는 분명하고도 강력한 역사적 실체로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현실적인 조건에 의한 변화압력에 의식적인 노력이 결합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선,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의 강화가 지역안보(regional security)의 긴장과 해체로 나아가 다시 국가안보를 해치는 역설적 악순환구조에 눈을 떠야 한다는 점입니다. 지역공동안보 개념을 들여올 때 역내 국민국가간 관계는 완전히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예컨대 오늘날 유럽 지역안보가 깨지면 네덜란드 국가안보는 의미가 없습니다. 둘째, 동북아의 경제와 시장의 통합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중국과 일본, 한국이 서로 시장을 대폭 잠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계속 배타적 민족주의에 바탕해 대립한다면 자국의 경제적 이익조차 지속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국수주의적인 민족주의를 적절하게 후퇴시키지 않으면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이죠. 셋째, 지금 일본이나 한국 같은 경우 노동의 구성에서 많은 부분 이주노동자들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경제의 역내 불균등발전과 통합에 따른 일종의 노동시장 통합의 진전이지요. 이는 앞으로 더욱 빠르게 진행될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지금까지처럼 국민국가 수준의 정체성과 이익만을 고수하기는 어렵죠. 끝으로 환경이나 안보, 인권, 역사 문제 등 초국적·지역적 의제를 중심으로 인터넷이나 시민사회의 연대를 통해 역내협력이 높아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컨대 최근에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를 보면 평화와 인권, 화해를 지향하는 단체들이 국민국가 단위는 물론 동북아시아를 넘어 동아시아, 미국, 유럽까지 연대를 형성했어요.
이런 추세와 요인들로 인해 이제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가간·시민사회간 지역협력과 연대는 필수적이죠. 저는 그 돌파구의 하나를 민주화에서 찾고 싶습니다. 일본의 역사왜곡 역시 일본 민주주의의 저발전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과거에는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앞선 민주주의를 보여주었고, 그래서 ‘동아시아 민주주의의 섬’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지금은 한국이나 대만 같은 나라들이 일본보다 더 앞서 있어요. 그래서 외부로부터 자극과 압력이 가해질 때 일본의 시민사회나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본 민주주의와 지역협력을 발전시키기 위한 움직임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그것은 평화나 인권 등 향후 동북아의 다른 문제, 다른 국가를 향할 때에도 적용될 수 있는 방식이라고 봅니다.
이남주 국민국가라는 틀이 동아시아 협력이라는 새로운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 측면이 있고, 새로운 힘에 의해 국민국가들 사이의 갈등이 해결되어야 하며 이와 관련해서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등이 중요한 화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사실 창비가 이 좌담을 준비할 때 국민국가들을 위주로 하는, 그중에서도 특히 강대국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협력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탈중심의 동북아질서’상(像)을 그려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는 국민국가 이외의 행위자들이 다양한 차원에서 협력관계를 발전시키고 각각의 협력 네트워크가 지역적 차원에서 나름의 중심적 역할을 하는, 다양한 행위자가 참여하는 다중심적인 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현실성 여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할 수 있겠죠.
배긍찬 시민사회의 연대의 힘으로 일본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점에는 공감하는데, 진짜 변화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지극히 회의적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7,80년대에 일본사회에 꽤 있었거든요. 그런데 90년대 이후 거의 사멸하다시피 했잖아요. 지금도 있기는 하지만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가는 테러를 당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 현재의 일본사회라고 한다면……
박명림 동감입니다. 저는 늘 일본에 대해서 이중사회 혹은 단층(斷層)사회라고 하는데, 진보진영이나 시민사회에서 아무리 비판을 해도 정부정책으로 채택이 안됩니다. 두 개의 사회가 공존하는 평행사회라고 할 수 있죠. 바로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동아시아의 새로운 지역거버넌스 구상
앞서도 언급했지만 동북아에서 국민국가의 존재양식은 분명한 역사성을 갖고 있습니다. 동시에 국민국가의 대결구조, 또는 해결방식만으로는 오늘날 역내문제들은 풀리지 않아요. 또 우리는 유럽식의 지역연합체 결성도 어렵고, 북미식의 합중국 건설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국민국가(nation state)와 지역연합(regional union) 사이에 새로운 형태의 지역거버넌스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일종의 이단계 통합, 또는 이중 지역거버넌스라고 할까요? 제 식으로 표현하자면 중위통합(中位統合, mezzo integration)인데요, 먼저 경제나 안보, 역사, 인권, 환경, 무역, 노동, 시민단체 등의 분야에서 영역별로 개별 국민국가들이 참여하는 지역연대기구나 다자기구를 만드는 것이죠. 그곳에서 역내 영역별 문제를 공동으로 논의하고 해결방안을 찾는 겁니다. 일례로 인권문제만 해도 일국 내의 문제가 아니라 역내 여러 국가에 걸친 문제들이 아주 많아요. 이런 문제들이 존재함에도 이상하게도 지역인권협약 하나 없는 지역은 아시아밖에 없습니다. 유럽, 아프리카, 미주 지역은 모두 지역인권협약을 체결했죠. 아시아에만 유독 인권협약이나 인권재판소가 없습니다.
다음으로 이들 영역별 연대기구들과 역내 국민국가들이 ‘함께’ 통합적 지역연합기구, 또는 정상조직(頂上組織, peak association) 같은 것을 만드는 겁니다. 앞의 영역별 연대기구들이 모두 참여하고, 역내 국민국가들도 다시 참여하는 통합기구를 만드는 것이죠. 이러한 이중 지역거버넌스를 통해 역내문제를 논의하고 해결해가는 구조입니다. 이런 구상을 가지면 국민국가의 역할도 일정정도 인정하면서 축소하고, 그러나 동북아의 여러 특성상 유럽연합보다는 낮으나 국민국가를 뛰어넘는 지역거버넌스 구조를 갖는, 그러한 중위통합을 통해 공동체를 형성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틀을 갖출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임원혁 아까 얘기로 돌아가보면, 저도 동북아에서는 협력이 잘 안되기 때문에 우회해서 아세안이라는 틀을 통해 동아시아부터 풀자는 것에 전적으로 동감하는데요. 이걸 유럽연합의 경우에 비추어 생각하면, 유럽연합 태동기에는 결국 프랑스와 서독이 화해하기로 하고 이끌어간 것이고, 베네룩스 3국에다 이딸리아까지 6개국이 시작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유럽은 진짜 핵심국가 둘이서 화해 협력으로 가기로 했기 때문에 탄력을 받아 진전된 구도인데, 동아시아에서는 반대로 핵심국가 둘이 화해 협력을 안한다는 겁니다. 오히려 아세안+3이라는 큰 장을 마련해서 아세안과 한국이 협력의 촉진자 역할을 해야 하는데 사실 간단하지 않은 문제죠. 물론 중국과 일본이 경쟁적으로 아세안과 한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아세안+3의 협력구도를 유지해나간다면 좋겠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편가르기를 시도할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아세안과 한국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죠.
이남주 동북아 평화를 위해 미국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언급하신 바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현재의 질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즉 커다란 혼란이 출현하는 것을 막는 데 미국이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거나 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과연 동아시아의 불안한 균형상태를 안정적인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데 미국이 얼마나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인가는 현재로서는 회의적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중국, 일본 같은 다른 대국들도 이 점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즉 다들 지적하듯이 굉장히 불안정한 상황에 있는 동아시아가 안정적 방향으로 가는 데서 큰 국가들의 역할이 긍정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오히려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은 중간 규모의 국가들의 역할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역시 새로운 동북아 질서가 탈중심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전조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이들의 역할이 현실에서의 힘의 논리를 극복하기에는 여전히 많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매우 장기적 과제가 되겠지요. 이러한 한계들을 극복하는 협력방안으로서 박명림 선생께서 이중의 지역거버넌스의 필요성을 지적해주셨는데, 혹시 이에 대한 다른 생각들이 있으면 더 들어봤으면 합니다.
배긍찬 동아시아에서 민주화됐다고 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 대만, 태국 등이고, 민주화가 진행중인 나라라면 여전히 문제는 많지만 필리핀이나 최근 직선제를 채택해서 상당한 정치발전을 이룩한 인도네시아 정도죠. 그러나 여전히 다수의 동아시아국가들은 일당지배체제, 권위주의, 군부체제가 지배적이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초보적인 노력을 하고 주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동아시아 전체의 거대하고 뿌리깊은 연대를 형성하는 데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일본의 역할이 극히 중요한데, 사태는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거든요. 결국은 다시 처음 얘기로 되돌아오는데, 우리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범위에 있기는 하지만 미국·중국·일본 3국간의 관리체제가 일단 원활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현재로서는 미국중심의 헤게모니 구도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보완하면서 미국패권의 폐해를 점진적으로 줄이는 방법으로 역내국가들끼리 정체성을 확립하고 협력의 질을 높여나가야 합니다. 사회적 차원에서 본다면 박명림 선생이 말씀하는 방향이 바람직한데, 그것이 국가끼리 하는 것보다도 더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웃음)
박명림 아까 지역거버넌스를 말씀드렸듯이 그게 이중과정이라는 거죠. 무역이나 안보, 노동, 환경 등의 영역들은 국가간의(inter-governmental) 거버넌스가 없으면 안되는 것이죠. 정부간의 거버넌스 구조가 분명히 있어야죠. 또 지역 시민연대, 역사재단, 지식공동체 같은 것은 그것들대로 시민사회 수준의 연대기구를 만들 수 있고요. 그래서 이중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배긍찬 중국 같은 나라에서 시민사회 형성이 가능할까요? 정부 통제 안에서 꼼짝 못하고, 웹싸이트 하나 만들었다가도 결국은 얼마 안 가서 폐쇄되는 사례를 보면 쉽지 않은 것 같고요. 또 대만과 한짝이 되면 진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면이 있습니다. 일본은 적절하게 안 돌아가고, 동남아는 아직 준비가 부족하고…… 참 어렵습니다. 차라리 어떤 점에서는 미국이나 서구의 시민사회와 연대하는 것이 어떨까요?
임원혁 19세기말 20세기초 일본의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은 이웃 나라들은 부패하고 타락한 국가들이니까 오히려 서양열강과 어울리면서 배울 것을 찾자는 구도 아닙니까? 그런데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서양 시민사회와의 연대가 일본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폄훼하거나 배제하지 못하도록 하는 면이 일정부분 있는 것 같아요. 위안부나 과거사에 대한 사과문제에서도 호주나 미국, 유럽 국가들의 시민단체와 역사학자들이 상당한 역할을 한 것 아닙니까?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한국이나 중국 학자들이 제기하는 것보다 일본을 설득하는 데 더 효과적이었다고 보는데요. 시민단체 연대문제도, 배긍찬 선생의 지적처럼 굳이 동아시아 내에서만 한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남주 미국이나 서구의 시민사회, 즉 아시아 이외 지역의 시민사회와의 연대가 중요한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죠. 아시아 협력이 아시아적인 특수성을 가진 폐쇄된 지역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열린 지역주의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고요. 또 하나는 현실적으로도 아시아의 많은 지역의 NGO에 서구 시민사회의 NGO가 이미 개입해 있어요. 그래서 아시아 협력이든 시민사회 협력이든 국민국가를 뛰어넘는 협력은 지금 우연처럼 얘기됐지만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명림 그게 오늘 논의의 핵심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는데요. 우리가 지역협력과 연대를 얘기할 때 그게 시민사회가 됐건 정부가 됐건 결국은 국민국가 단위의 협력을 얘기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이제 문제를 3차원으로 확장해서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첫째는 각 국민국가 내부의 민주화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개별 국민국가의 민주화가 내부를 변화시키면서 대외적으로 역내문제에 협력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죠. 둘째는 시민사회면 시민사회, 운동이면 운동, 정부면 정부, 학계면 학계 사이에 국가간 협력이 있다는 거죠. 셋째 차원은 글로벌 연대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들 하셨듯이 지역문제 해결을 위한 글로벌 네트워크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노무현정부의 동북아 담론
이남주 탈중심적 동북아 질서를 고려할 때 시민사회 차원의 협력이 매우 중요한데 과연 실제적인 국제현실에서 시민사회의 협력이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견 차이가 존재하네요. 다만 동북아 협력이 경제, 정치안보, 그리고 시민사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입체적 차원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변화 자체가 탈중심적인 질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협력에서 과연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이겠지요. 이와 관련해서는 정부가 제시한 ‘동북아균형자론’에 대한 평가부터 시작했으면 합니다.
박명림 제가 먼저 화두를 던진다면 일단 동북아균형자론의 문제의식이나 기본적 고민을 인정한 토대 위에서 이중 선순환구조 같은 것을 생각해봅니다. 먼저 동북아 평화·협력과 한반도문제 사이의 선순환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사적으로 동북아 안정 없이 한반도 평화 없었고, 한반도 평화 없이는 동북아 평화 구축도 어려웠어요. 한반도문제는 늘 동북아 갈등과 평화의 진앙이었죠. 둘째는 남북관계와 국내문제 사이의 선순환구조입니다. 과거에는 남북문제, 북한카드가 늘 국내의 민주주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죠. 또한 남북의 권위주의 국내정치가 대남·대북정책을 온건하게 펼치지 못하게 한 점도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남한의 민주발전은 양자 사이에 상호 긍정적 효과를 유발하고 있어요. 6·15 공동선언 같은 것을 보면 서서히 선순환구조로 들어오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동북아 문제와 관련해서 노무현정부는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 동북아경제중심국가, 협력적 자주국방, 동북아균형자론의 네 가지 정책을 제시했습니다. 가장 큰 특징은 한반도 안보와 평화문제를 일관되게 동북아 차원에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미관계와 한국의 역할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일관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있는 것은 이 동북아 구상에서 북핵문제를 포함해서 북한문제는 조금 독립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북핵문제가 왜 탈냉전기 15년 동안 동북아 최대의 안보현안이었는지를 구조적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북핵문제는 북한문제의 일부이고, 북한문제는 다시 한반도문제의 일부이며, 한반도문제는 동북아문제이자 국제문제라는 인식, 즉 북한문제 역시 한반도문제요 동북아문제이자 국제문제인 것으로 다층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거죠. 노대통령의 언술이나 정부정책을 보면 이중 선순환구조에서 남북문제와 국내문제에 대해서는 파악한 것 같은데 동북아문제와 북한문제는 조금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다음으로는 안보의 개념입니다. 노무현정부는 평화의 동북아시대, 동북아균형자론을 통해 국가안보를 포함하되 그것을 넘어서는 지역안보의 개념에 눈을 뜬 것이 사실입니다. 유럽연합 헌법에서는 유럽연합의 목적을 ‘평화증진’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아주 시사적입니다. 또한 유럽연합 헌법은 공동안보, 공동방위 개념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유럽연합 내에서의 국민국가들은 이제 적대와 군비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안보 공동운명체가 된 것이죠. 동아시아 역내국가들이 공동안보, 지역안보 개념을 발전시킨다면 지금처럼 국민국가 단위의 군비경쟁이 아니라 아주 새로운 안보거버넌스를 구축할 수 있을 텐데요. 저는 이게 동북아와 한반도, 국내문제에서 상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중 선순환구조의 후자 측면에서 보자면 새로운 지역 안보거버넌스를 통한 군축의 실현은 각국의 민주화와 복지화 수준을 비약적으로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배긍찬 우리의 목표나 지향이라고 한다면 두 가지가 있을 것 같은데요. 이른바 일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의 선진국화가 분명히 그 하나가 될 수 있고, 또 하나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국민국가 건설의 마지막 단계로서 남북통합인데, 이 두 가지를 달성하는 데 어떤 중장기적 고려가 있어야 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국민소득 3만달러의 선진국 건설과 국민국가 통합은 막대한 비용이 수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지점에 가기 전까지는 적어도 외교안보정책에서 유형이든 무형이든 효율적이고 저비용 구조인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겁니다. 현재 주변 강대국들이 군비증강을 하고 원거리 수송능력을 높이고 대양 해군을 지향하고 있으니까 우리 해군과 공군도 지금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려는데요. 과연 우리가 저걸 다 쫓아가야 할 것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중급국가로서 한국의 경제적 능력과 국제적 역할을 벗어나서 과도한 투자를 바탕으로 하는 고비용정책은 피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유형의 외교안보정책이고, 또 하나는 무형의 외교정책입니다. 불필요한 언어 선택을 자제함으로써 주변국들에 주는 오해나 마찰을 최소화하자는 거예요. 예를 들면 동북아시대 구상이라든지 동북아중심국가론, 동북아균형자론 같은 것은 국내용이라고 한다면 물론 효과도 있고 국민의 자긍심도 고취시킬 수 있죠. 그러나 미국의 입장에서는 동북아균형자 같은 얘기를 듣고 한국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 있었을 겁니다. 그후에 중국과 일본 간 균형자라고 내용이 좀 바뀌었는데, 그래도 사실 많은 의문이 들어요. 우리가 중국 편에 선다고 해서 일본이 기울고 우리가 일본 편에 선다고 중국이 기울겠느냐는 거죠. 그래서 외교적 언어 사용에 있어서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자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중견국가(中堅國家)론입니다. 지금 우리가 독자적 능력을 갖는 강대국 지향의 외교정책을 편다는 것은 비현실적이에요. 불행한 것은 세계 1,2,3,4등이 다 우리 옆에 있으니 우리가 5등 정도라도 되면 뭔가 대등하게 해볼 텐데, 물론 남북통일이 되어 인구 1억 정도의 시장을 갖고 그걸 기본으로 하면 일본과 엇비슷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그렇지 못하다는 거죠. 따라서 현재 우리가 지향해나갈 방향은 중견국가라는 겁니다. 중견국가라는 용어가 이론적으로 그다지 세련된 것은 아니지만 국제무대에서 이것을 지향하는 나라로 캐나다, 호주, 한국 정도가 있다고 보면 됩니다. 중견국가의 역할은 경쟁적인 강대국들간 교량 역할을 도모하고 자기보다 작거나 비슷한 역량을 가진 세력과는 전략적 제휴를 해서 강대국과 중소국가들 간 연계를 강화해나감으로써, 세력균형자까지는 못 가겠지만 적어도 국제사회에서 순기능을 할 수 있는 긍정적인 역할을 추구하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강대국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우리 주변 강대국들을 어떻게 유도해야 남북통일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겠는가 하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 중국은 자기들에게 유익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지 않으면 한반도 통일에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이고, 또 미국과 일본이 중국을 위협으로 간주하는 한 한반도 통일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외교정책은 중국에는 한반도 통일이 유익한 것이라 설득하고, 미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중국을 적대시하거나 위협으로 보지 않도록 유도하는 게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와 함께 우리가 아세안+3 같은 지역협력을 촉진·강화해나가는 그런 중견국가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동북아균형자론의 문제의식과 한국의 역할
이남주 배긍찬 선생도 균형자 역할에 대해서 평가하시면서 촉진자, 교량자 역할을 하는 중견국가 개념을 제시하였는데, 저는 이러한 고민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냉전 해체 이후 국제질서가 빠르게 변화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외교적 고민이 깊어지고 있어요. 한국의 대외전략이랄까 외교적인 측면에서 보면 우선 힘의 논리를 중시하는 현실주의적 접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전통적인 한미동맹론을 대안으로 내세우거나 또는 현실 변화를 다르게 평가하면서 중국에 편승하여 문제를 해결하자는 방안이 있죠. 그런데 저는 이 모두가 그다지 현실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적대시하는 발상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이죠.
새로운 모색은 다소 이상적이지요.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니까요. 그중 하나로 중립화론이 있었는데,이것은 정말 이상적인 것 같아요. 현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자는 발상이거든요. 기여와 공헌, 다른 행위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방어적이고 자기만 특수하게 예외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인데 동북아에서 이러한 발상이 인정받기는 당장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가지로 논란거리가 많지만 균형자론 자체는 우리가 주변관계에 개입해가면서 우리의 안정과 평화의 조건들을 만들자는 생각들을 하게 한 의미가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내용적인 측면이라든가, 특히 언어구사의 문제는 배긍찬 선생의 의견과 크게 다르지는 않고요.
임원혁 동북아중심국가론도 그렇고 균형자론도 기저에 깔린 것은 변방 콤플렉스라고 봅니다. 변방의 역사를 청산하고 동북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겠다, 얼마나 화끈한 얘기입니까? 선거 당시의 구호로서 그것은 충분히 기능을 했고요. 하지만 이후에 그것을 정책적으로 구현한다면 그런 구호에 스스로 현혹되면 안될 것 같아요. 그것보다는 훨씬 치밀하고 현명한 정책이 따라줘야 하는 것이고, 특히 용어구사에 있어서는 두 분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동북아균형자론의 문제의식을 적절한 용어에 담아 표현한다면, 우리가 현재는 동북아시아의 분단된 가교국가인데 동북아시아에 다자간 협력구도가 형성되는 것이 우리 국익에도 부합하고 동북아 질서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므로 협력의 촉진자 역할을 하겠다, 이런 식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훨씬 건설적인 방법인 것 같고요. 이것과 관련해서는 아까 박명림 선생이 이중 선순환구조를 말씀하셨지만, 남북화해협력과 동북아 통합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우선 남북관계에서 지난 10여년간을 돌이켜보면 통일비용 문제나 남북의 상호불신 때문에 통일논의 자체가 상당히 침체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특히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에 남북간의 불신이 어느정도 완화됐다고 보고요. 또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동북아에서 미소냉전을 대체하는 신냉전구도가 고착화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저는 최소한 통일정책에서는 좀더 전향적으로, 예컨대 한반도식 일국양제(一國兩制) 식으로 평화공존을 넘어서는 단계까지 서둘러 나아가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되도록이면 다른 국제역학관계 때문에 우리가 희생을 당한 역사적인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동북아에서는 중국과 일본이 서로 엮이도록 하고, 이것이 미국에도 유리하다는 점을 논리적으로 풀어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논리의 핵심고리는 중국이 소련과는 달리 세계화라는 가치를 받아들였고 이미 개방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일본, 대만, 인도를 연결하여 중국을 봉쇄한다는 것이 지도상으로는 그럴듯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과거 소련 봉쇄정책보다 설득력이 훨씬 부족하고 주변국가들의 동조를 구하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고요. 따라서 이런 방식으로 하면 미국의 입지가 약화된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아무래도 미국은 계속 북한과 중국의 인권문제를 제기할 것 같은데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확보되는 것이지 정권교체를 통해서 이식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결국 외부와의 끊임없는 접촉을 통해 변화가 이루어지는 거니까 지금 민주적이지 않고 시장경제가 아닌 국가들을 적대시할 것이 아니라 접촉을 더 확대해나가는 것이 미국 국익에도 부합된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견·교량국가로서의 가능성과 과제
이남주 요새 제가 중국을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면 한국이 적극적인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특히 대미관계에서 이러한 요구를 많이 하는데, 전에는 이런 얘기를 들으면 자신들이 하기 어려운 것을 우리에게 떠넘기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요즘에는 우리의 역할을 실제로 높이 평가하는 것이라는 느낌도 듭니다.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가 매우 어렵거든요. 미국의 패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는 없어요. 그렇다고 중국이 말한다고 미국이 들어주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한국이 얘기하면 좀더 편하게 풀릴 듯싶으니까 자꾸 우리에게 그런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는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보면 중국과 미국 간의 관계에서도 우리가 충분히 그런 협력을 엮어나가는 역할을 할 수 있고, 기회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도 최근 몇년간 한국이 자기 품을 벗어나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감정적으로 반응한 측면이 적지 않은데 요즘 들어서는 한국을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없다는 현실적 측면에 대한 인식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기회를 잘 활용한다면 동북아에서 한국의 역할을 찾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박명림 저는 양자 활용관계랄까 그렇게 보는데요. 최근의 제4차 6자회담의 재개과정을 보면 미국과 중국 모두 한국의 역할에 대한 일정한 기대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문제와 관련해 미중관계를 보면 중국의 처지에서는 상당히 부당하죠. 왜냐하면 미국은 중국에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중재자 역할을 요구했지만, 전체 동북아 차원에서는 거꾸로 미일동맹을 강화해서 중국견제정책을 구사하기 때문입니다. 중국 입장에서는 북핵문제 해결과 미일동맹 강화 사이에는 분명한 충돌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2004년 6월의 제3차 6자회담을 계기로 중국과 한국의 역할이 바뀌어 한국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것은 미국이 중국에 했던 이중정책의 오류에다가 남한의 적극적 역할이 없이는 한반도문제의 해결이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기 때문이죠.
역사적으로 우리가 택했던 국가전략이 몇가지 존재합니다. 속방국가, 중립국가, 동맹국가, 중심국가, 교량국가 전략 등이 그것들이었죠. 속방국가전략은 중국 패권시대의 전략으로서 오늘날 더이상 가능하지 않죠. 중립국가전략 역시 동북아 세력균형체제를 상정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죠. 전후 가장 중심적인 전략은 동맹국가전략이었습니다. 그것은 미소 냉전체제 때문에 가능했는데 그 안에서 차례대로 미국(이승만), 일본(박정희), 중국과 소련(노태우)과 관계개선을 이루고 마침내 남북정상회담 합의(김영삼), 남북정상회담 실현(김대중)을 통해 사고와 접촉의 지평을 전방위적으로 열었어요. 그리고 노무현정부 들어 동북아 지평을 포착, 동북아경제중심국가, 동북아균형자론까지 나왔다고 봅니다.
아까 이중 선순환구조를 말씀드렸는데 우리 전략과 연관을 짓자면 동북아 차원에서 안보, 인권, 경제 등 여러 영역의 지역거버넌스를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교량국가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먼저 동북아에 아직도 존재하지 않는 역내 다자안보공동체,인권협약 및 인권재판소, 지역역사재단, IT거버넌스, 시민연대기구 등의 설립을 주도하고 몇몇 기구를 한국에 유치해서 일종의 중추국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죠. 그러나 중추국가전략은 반드시 교량국가 역할과 만나야 합니다. 해양과 대륙, 서양과 동양, 일본과 중국, 동북아 역내국가들을 연결하는 전략이죠. 무엇보다 여러 영역들을 각각 엮어내는 교량 역할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를 중추교량국가(hub bridge state)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안보, 역사화해, 인권 거버넌스의 경우 한국을 제외하면 중국, 일본, 북한, 대만 등 동북아 어떤 역내국가도 지역다자기구를 주도하고 유치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한국이 중추이자 교량 역할을 하자는 거죠. 한국에 동북아의 안보, 경제, 노동, 무역, 환경, IT, 시민연대, 인권 다자기구 등이 들어온다면 한국은 동북아의 제네바요 벨기에가 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주도하고 유치하면 이것이 국가전략인 동시에 동북아 협력도 함께 추구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의 국가 위상도 높아지고 동북아 협력도 증진시키면, 조금은 이상적이지만 아름다운 나라를 만드는 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이남주 한국의 교량자적 역할에 대해서 박명림 선생이 중추교량을 말씀하셨는데, 대체로 동의하시는 것 같습니다. 임원혁 선생도 가교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는데 같은 맥락으로 보이구요. 월권이지만 제가 사회자로서 제안을 드리면 ‘중견·교량국가’로서 동북아에서 한국의 역할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러한 표현에 동의하실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지향하는 함의에 대해서는 큰 틀에서 뜻을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역할을 위해 어떤 준비가 필요할지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으면 합니다.
새로운 동북아를 위한 앞으로의 과제들
배긍찬 글쎄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국민소득 3만달러와 남북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실제로 엄청난 비용이 드니까 그걸 대비해서 그때까지는 외교정책이나 대외정책을 가급적 저비용으로 추진함으로써 최대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중견국가론을 얘기했고요. 중견국가론을 바탕으로 교량 역할을 한다고 해야 말이 되는 것이지, 우리도 독자적 파워라고 해서 균형자가 되겠다는 것은 스스로 엄청난 비용을 초래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한가지 중요한 것은 쏘프트파워 부분인데, 사실 이 부분에서 한국이 궁극적으로 다른 아시아국가들보다 장점을 가질 소지는 많다고 봐요. 민주주의의 발전에서 가장 앞서 있는 나라이기도 하고요. 박명림 선생께서 말씀하신 그런 시민사회와 민주주의가 토대가 되어 한국 특유의 쏘프트파워를 키워나가야 합니다.
그런 것들 중의 하나가 담론의 개발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힘으로 주변 강대국들을 설득할 가능성은 거의 없고, 결국 담론을 생산하는 일이 중요해요. 일본의 과거사문제 그리고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등에 대해 우리의 지식인, 이론가 들이 설득력있는 담론을 만들어 전세계적으로 또는 유관국가들에 유포해서, 일본이나 중국이 외부에서 조여들어오는 압박 때문에라도 할 수 없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대표적인 쏘프트파워의 유형이라고 봅니다. 또 이런 것도 있을 것 같아요. 지금 동아시아지역에는 아세안지역포럼(ARF), 아태안보협력이사회(CSCAP), 동북아협력대화(NEACD) 등 몇개의 안보포럼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비전통적 안보의제로 마약·밀수·해적·환경 문제 등이 거론되는데, 우리가 여기서 역사인식의 문제를 하나의 비전통적 안보의제로 설정할 필요가 있어요. 왜냐하면 일국의 그릇된 역사해석이 주변국가들에서 엄청난 안보위협과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니까요. 우리가 이러한 담론을 만들어낸다면 의미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게다가 그건 돈도 안 드는 것이거든요.(웃음)
이남주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어쨌든 우리가 아시아에서 평화공존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현실주의적인 접근을 넘어서야 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이런 플러스 알파를 위한 새로운 힘을 만들어내야만 아시아문제도 해결되고 우리 문제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됩니다.
임원혁 가령 역사문제에서 제가 고무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예컨대 한국에서 베트남전쟁의 문제점에 대해 보도를 하면 반응이 일본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점입니다. 물론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사람들한테는 매국노라는 말을 들었지만, 사회적인 대세로 봐서는 그런 반성은 정말 잘했다는 평가인데, 이렇게 우리의 치부까지도 드러내면서 반성하는 모습이 필요하죠. 아까 이주노동자 인권문제를 말씀하셨지만 그런 부분들을 우리가 선도해나가고 모범을 보이는 것이 중견국가로서 쏘프트파워를 가질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봅니다.
박명림 저는 역사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에는 역사가 비전을 던져주기 때문이죠. 동북아는 역내에서 중화체제로부터 일본제국주의로의 전이 등, 공존이 아닌 교체의 역사를 지나왔습니다. 그로 인해 한국은 국가전략을 선택하는 데 엄청난 제약을 받아왔어요. 그러나 이제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중위국가, 중견국가로까지 성장하였습니다. IT나 한류나 시민연대나 동아시아 지식교류라는 차원에서 보더라도 민주화 이후에 우리 사회가 동북아에서 표준까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새로운 지역기준을 제시할 수 있을 만큼 앞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역사교과서 문제를 포함한 역사인식과 대응, 타자에 대한 이해는 과연 이런 발전에 상응할 정도로 충분히 열려 있는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어느 면에서는 심각하게 닫혀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때문에 제가 중추교량국가를 말씀드렸을 때 문제의식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교량 역할을 해야 한다면 평화나 역사이해, 인권문제 등에서 선진적이지 않으면 중추와 교량 국가 역할 모두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배긍찬 어떤 분은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일본 후소오샤(扶桑社) 교과서말고 일반적으로 쓰이는 일본의 역사교과서와 우리 역사교과서를 비교해보면 그것이 우리보다는 훨씬 국제주의적이라는 겁니다. 우리 교과서도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이남주 베트남전쟁 문제도 그랬듯이 예컨대 역사교과서 문제도 지금 제기한 대로 개혁할 경우 엄청난 내부의 반발이 있을 거예요. 남북관계 개선과정에서도 드러났지만 이 문제 역시 기득권자들의 이해관계와 반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그러한 부담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가 관건이겠습니다.
박명림 결국 정체성과 이익의 문제라고 생각되거든요. 국민국가의 정체성, 국민으로서의 정체성, 또는 이념 정체성, 진영 정체성을 넘어 개인 정체성, 지역 정체성이나 지구적 정체성 등 다양한 정체성에 대한 담론이나 대응양식을 많이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국민국가 유일의 인식과 행동보다는 지역협력과 연대를 구축했을 때 경제·평화·문화·지식 등의 영역에서 더 많은 이익이 제공되는만큼 연대와 협력이 증진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런 인식을 확산시켜가는 작업이 굉장히 중요하고, 그것은 역시 교육과 지식인들의 임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남주 우리가 외부에 대해 어떤 역할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내부적 준비가 먼저 필요하다는 점이 마지막으로 지적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한 논의가 더 깊이 진행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오늘 좌담을 통해 동북아에서 새로운 질서와 평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한국이 어떤 역할을 추구할지에 대해 일정한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을 나름의 성과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를 계기로 우리의 전략적 방향과 이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기를 기대하며 오늘의 좌담을 마치겠습니다. 오랜 시간 토론해주신 좌담 참여자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