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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다모폐인, 참여하는 개인주의 문화현상
TV드라마 「조선 여형사 다모」
이성욱 李晟旭
『씨네21』 기자. lewook@hani.co.kr
「조선 여형사 다모」가, 화젯거리의 뒷정리를 주요업무의 하나로 삼고 있는 기자인 나에게 묻는다. “내가 너에게 무엇이더냐?” “하지원, 이서진, 김민준의 삼각 멜로를 『장길산』류의 체제전복적 역사드라마에 풀어놓은 새로운 감성의 퓨전 사극이옵니다.” “그뿐이더냐?” “친남매의 러브스토리를 끝까지 밀어붙인 근친상간적 상상력으로 수백만 대중의 마음을 달뜨게 한 놀라운 드라마입니다.” “정녕 그뿐이더란 말이냐?” “으흠~(호흡이 조금 가빠진다) 방송사 홈페이지의 시청자 게시판 게시물 수가 100만건을 돌파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다모폐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지요.”
‘다모체 어투’는 다모 공식홈페이지와 다모 팬까페 등의 ‘다모폐인’들을 이어주는 즐거운 끈이다. 드라마가 막을 내린 지 제법 시간이 흘렀으나 ‘다모폐인’의 가상공간에는 새벽 2~3시에 누군가 “이년이 지금 막 입궐했사옵니다”라며 글을 하나 띄우면 대번에 댓글이 십여개씩 붙을 정도로 열기가 넘쳐흐른다.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드라마 「대장금」을 ‘대장균’으로 부르며 신흥세력과 날카로운 신경전도 벌인다.
다모폐인들만큼 드라마의 팬덤문화(fandom culture)를 이리저리 흔들어놓으며 독자적인 놀이의 세계로 진화시켜간 경우는 없다. 노희경의 「거짓말」에서 시작해 인정옥의 「네 멋대로 해라」에서 절정을 이룬 드라마 팬덤은 「다모」에 이르러 수적으로, 질적으로 판이한 양상을 보인다. 홈페이지 게시판에 오른 글이 100만건이라는 건 또다른 화제의 드라마 「올인」과 「옥탑방 고양이」가 각각 6만7천여건, 3만4천여건이었던 점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수치다. 이 수치는 왕성한 다모폐인(포털싸이트 다음daum의 다모까페 회원수는 20만명을 넘는다)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한성 좌포청 신보’ 같은 신문을 만들어 「다모」와 관련한 진실 혹은 가공의 흥미로운 뉴스를 양산했고(가상공간 안의 미디어라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예컨대 「리니지 2」를 대상으로 한 웹진 ‘L2day’는 게임회사나 게임운영자가 발행하는 뉴스 웹진이 아니고 게이머들이 직접 취재하고 주인공이 되는 미디어다), 포토샵과 인터넷 소설이라는 도구로 새로운 이야기의 「다모」 외전을 만들며 콘텐츠를 증식시켜갔다. 스토리와 캐릭터에 대한 토론과 애정 표현이 주를 이뤘던 이전 팬덤의 모습이 어쩐지 초라하게 보일 지경이다.
다모폐인의 묵직한 존재감은 전통적인 시청률 조사방식이 프로그램의 상품가치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느냐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다모」 방영이 중반에 이르렀을 때 시청률은 같은 시간대 경쟁작이던 「야인시대」(25.5%)와 「여름향기」(16%)에 못 미치는 15%선이었다. 후반으로 갈수록 멜로 코드가 강화되면서 시청률이 치솟기는 했으나 인터넷에서 발견되는 열기와 시청률의 괴리감은 「네 멋대로 해라」보다 훨씬 컸다. 상대적으로 저조한 시청률에 비해 VOD(다시보기)써비스 이용 건수는 iMBC 유료화 이후 최고인 40만건을 넘어섰다. 이쯤 되면 방송사 수뇌부들의 머릿속에선 드라마의 시장가치를 재는 척도가 달라지고 있지 않을까. 시청률로 입증되는, 절대 다수가 따라오는 드라마만이 최고가 아니라는.
다모폐인을 출범시킨 건 드라마다. 「다모」는 「네 멋대로 해라」만큼 파편적인 세상과 인간을 쿨하게 바라보지는 않지만 관습을 거부한 작가주의 드라마임에는 틀림없다. 여형사 채옥(하지원 분)과 같은 새로운 여성캐릭터가 한 예다. 땀이건 물이건 흥건히 젖어 있기 일쑤인 그는 드라마에서 유례없이 동적인 여성이다. 일정 간격으로 펼쳐지는 활극에서 그의 액션은 남자를 능가하거나 최소한 동등하다. 사랑하는 ‘나으리’가 위험한 짓 하지 말라고 해도 자꾸 위험에 개입함으로써 주위에 자신이 존중받을 만한 존재라는 걸 증명해간다. 「다모」의 힘은 언어에서 결정적이다. 다모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건 대사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나를 아프게 하지 마라.” “다시는 나 같은 인연 만나지 마라.” “나는 너를 이미 베었다.” “그리 떠나면 형제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허망하겠느냐.” 대사에 담긴 감성은 간결한 쎈티멘털이지만 신파를 넘어서는 내공을 뿜어낸다. 또 그 쎈티멘털을 구어체가 아닌 예스런 문어체에 결합시킨 시도가 상상 못할 폭발력을 발휘했다. 공자님 말씀 같은 결론이지만, 새로운 콘텐츠와 텍스트가 없었다면 새로운 팬덤 역시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모폐인들의 즐거운 놀이는 인터넷의 독자적 공간에서 개별적 접촉으로, 특히 자발적 참여로 이뤄진다. 이는 ‘광장에서 밀실로’ 이동한 이 시대의 취향과도 맞아떨어진다. 영화 쪽의 씨네필(cinephile)은 예전처럼 씨네마떼끄로 몰려다니지 않는다. 인터넷 주문이란 방식으로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기만의 취향을 즐긴다. 예전의 씨네필들이 영화보기와 영화에 대한 글쓰기를 사회에 참여하고 발언하는 하나의 통로로 삼았다면 지금의 씨네필들은 영화를 굳이 사회적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개별성과 밀실성이 씨네필과 다모폐인에 공히 흐르는 공기라면, 콘텐츠에 대한 감상과 해석을 넘어 참여를 통해 쾌감을 얻는다는 점에선 다모폐인은 게이머와 통하는 점이 있다. 게임은 게이머의 참여 없이 작동되지 않는다. 게임평론가 박상우씨는 게이머에게서 ‘P세대’로 불리는 요즘 세대의 특징을 효과적으로 잡아냈다. 가령, 아버지의 입장에서 지극정성으로 딸을 키우는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게임과 여학교 수위로 딸 같은 여학생들을 유린하는 「유작」 같은 게임을 태연하게 번갈아가며 즐기는 모양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프린세스 메이커」의 주체 A군과 「유작」의 주체 B군은 우연히 ‘나’라는 몸을 공유하고 있을 뿐, 각기 상이한 세계에서 태어난 서로 다른 존재다. A와 B는 모두 자신이 탄생한 세계에서 그 세계의 법칙과 목적에 맞춰 적극적으로 살아갈 뿐이다.”
80년대식 용어라 할 ‘총체성’ 개념으로 요즘 세대를 바라보는 건 그래서 벽에 부딪힌다. 광화문 일대에서 붉은 옷을 입고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며 춤추며 즐기던 그와, 촛불을 들고 분노를 내뿜던 그는 우연히 한 몸을 공유하고 있는 동일체이다. 총체성이란 하나의 맥으로 설명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모순된 존재는 아니다. 자기 취향에 따라 참여하며 즐길 뿐이다. 다모폐인들의 팬덤은 그런 ‘참여하는 개인주의’가 만들어낸 또하나의 문화현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