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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아시아인에 의한 동북아 평화는 가능한가
동아시아 경제와 한국의 87년체제
교착과 혁신
이일영 李日榮
한신대 중국지역학과 교수, 경제학. 저서로 『중국의 농촌개혁과 경제발전』 『개방화 속의 동아시아: 산업과 정책』(공저) 『동북아시대의 한국경제 발전전략』(공저), 주요 논문으로 「새로운 한반도 경제체제의 구상」등이 있음. ilee@hanshin.ac.kr
*본고는 2005년 7월 15일 열린 창비―시민행동 공동심포지엄 ‘87년체제의 극복을 위하여’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1. 들어가며
필자는 아직도 가끔 나쁜 꿈을 꾼다. 악몽은 크게 두 종류이다. 하나는 시험과 관련된 것으로, 예를 들면 수학시험이 내일로 다가왔는데 공부한 것은 없고 벼락치기도 가능하지 않아 안절부절못한다. 또 하나는 폭력에 시달리는 것이다. 계속 누군가에게 쫓기다가 절벽에 다다르고 어느 순간 잡혀서 묶이고 갖은 방법으로 고통을 당한다. 그래도 이제는 찌르는 아픔과 치떨리는 분노에 사로잡히는 꿈은 크게 줄었다. 아마 1987년 이후의 민주화 덕일 것이다. 시험에 드는 꿈은 아직도 형태를 바꾸어 나타나는데, 넉넉지 못한 인품 탓인가 하면서도, 복잡한 현재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의 뿌리를 생각해보기도 한다.
확실히 1987년 이후 한국사회는 크게 변화했다. 무엇보다도 헌정체제의 변화와 그에 따른 형식적 민주주의의 진전이 있었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 87년‘체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민간부문이 크게 늘어났으며 국가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민주화운동과 함께 성장해온 노동운동과 농민운동도 일정하게 시민권을 확보함으로써 이전과 같은 저임금―저농산물가격 체제를 유지하기는 어려워졌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점은, 이러한 국내의 세력재편이 글로벌화의 진전, 동아시아 경제의 발전, 사회주의권의 붕괴라는 세계사적 변화와 중첩되어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국내와 같이 확연하게 1987년으로 경계짓기는 어렵지만, 세계경제에는 1980년대 후반 이후 매우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세계경제의 변화는, 국내에서 작동하고 있는 국가체제, 재벌체제, 노동체제, 농업체제와 교착하고 또 상충하고 있다. 경제‘체제’는, 제도·조직 요소를 핵심으로 하되, 재화 고유의 특성이나 기술 요소가 포함되기도 하고, 나아가 가치·규범 요소까지도 포괄하는, 안정적이고 꽉 짜인 개념이다. 이러한 ‘체제’ 개념을 엄격하게 사용하려 한다면, 1987년 이후의 한국경제는 ‘체제’라기보다는 ‘과도기’나 ‘이행기’로 표현하는 것이 덜 위험할 것이다.
그러나 국제환경과 국내체제가 잘 조응되지 않는 탈구(脫臼) 상태가 의외로 길어지고 있다. 또 변화의 내용에 생산기술, 생산조직 등 세계적 차원의 생산양식 문제가 포함되고 있으며, 지금까지의 운동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대안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따라서 ‘문제형성’과 ‘문제해결’의 관점에서라면 ‘87년체제’라는 개념이 유용하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글에서는 1987년 이후의 경제씨스템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내외적 계기와 모순을 살펴보고 새로운 전화의 방안을 모색한다. 동아시아 차원의 새로운 생산네트워크의 진전과 이에 비한 국내 씨스템의 지체, 그리고 이러한 교착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과제를 살펴볼 것이다. 구체적인 논의를 위해 자동차산업과 농업을 관찰의 사례로 택한다. 자동차산업은 전후방 연관효과가 높고 주요 재벌기업과 민주노총의 핵심사업을 포함하고 있으며, 농업은 경제발전의 초기와 완성기에 중요한 산업이다. 이것들은 87년체제를 형성한 동력을 담지하고 있으면서 87년체제를 넘어서기 위한 사회경제적 대안이 필요한 부문이다.
2. 87년 이전과 87년 이후의 개관
1) 87년 이전: 국가단위의 추격체제
분단 이후 남북한에 형성된 두 개의 경제체제는 매우 이질적인 것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남북한 발전전략에는 상당한 정도의 유사성이 존재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남북한의 경제체제에 모두 선진국 또는 남북한 상대국을 따라잡겠다는 강력한 국가의지가 작동했다. 이러한 ‘추격·추월 전략’의 전제는 국가를 기본단위로 한다는 것, 경제발전의 중심을 공업화에 둔다는 것이고, 이를 뒷받침하는 씨스템은 가격을 왜곡하는 거시정책과 통제적인 관리체제이다. 즉 국가는 일정하게 이자율, 환율, 원자재가격, 농산물가격을 억제하고, 희소자원 분배에 개입한다. 종종 유치산업 보호를 위한 산업보호정책이 시행되고 무역장벽이 설치된다.1 국가 단위에서 공업화를 통한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국력 강화를 시도하고 자원의 집중적 동원과 관리를 행하는 것은 역사상 새삼스러운 사례가 아니다. 선진국들도 절대주의 국가를 통해 상대적으로 강력한 산업정책을 실시했던 시기가 있었고, 스딸린시대의 소련에서도 공업화를 위해 국가가 적극 개입했으며 억압적 정치체제를 구축했다.
한국에서 일국적이며 폭력적인 스딸린식의 추격발전 전략이 채택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2 먼저 제2차 세계대전 후 확립된 브레튼우즈(Bretton Woods) 체제는 국가 단위의 정책적 자율성 공간을 일정하게 허용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자본통제와 고정환율제를 통해 각국 정부가 사회보장제도, 그리고 완전고용 및 성장과 같은 국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거시경제정책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전세계 무역을 자유화할 수 있도록 하는 체제였다. 선진국 내에서는 자유무역 옹호자들과 사민주의자들 간의 타협의 산물로 각국 정부에 자국 경제를 운용하는 데 상당한 자율성을 허용하는 체제가 등장했고,3 한국은 이에 편승하여 거시적 안정(물가 억압) 속에서 경제성장을 추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50년대 중반 이후에는 얄따(Yalta) 체제가 만든 분계선이 더욱 공고화되었다. 그때까지 미국은 자국의 영향권에 있는 개발도상국을 지원하는 수단으로 무역과 해외직접투자를 중시하였으나, 1956년부터 분위기가 일전되었다. 흐루시쵸프의 대외적 경제공세,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뿌뜨니끄의 성공적 발사, 소련의 제6차 5개년계획 등으로 ‘소련경제 위협론’이 제기되었고, 이로 인해 체제간 경쟁이 유발되었다. 개발도상국에서도 경제적 자유주의나 정치적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것보다는 개발지상주의적 국가가 등장하는 것을 용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4
2) 87년 이후: 교착(交錯)과 교착(膠着)의 체제
국가주도의 추격발전모델이 크게 타격을 받은 것은 1980년대 후반이다.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크게 개선된 세계시장 여건에 편승하여 남한의 재벌체제는 그 외형을 크게 확대할 수 있었고 그에 대한 국가의 조정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국가가 신용할당을 통해 투자방향을 정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점차 민간대기업 스스로 투자를 결정하게 되었다. 한편 민주화의 진전으로 자원 유출 또는 수탈의 대상이었던 노동·농업·환경 부문의 정치력이 크게 성장했다. 이에 따라 국가가 주도하여 저(低)요소가격의 투입조건을 만들어주고 자본―노동관계를 조정하던 종래의 체제는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꾸준히 축적된 민주화운동의 힘으로 군사적 지배체제를 종식시킨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1980년대 후반에는 과거의 체제가 더이상 스스로를 조직할 수 없도록 하는 중요한 환경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첫째, 냉전체제의 이완이다. 얄따협정 이후 10년에 걸쳐 구체화된 냉전체제가 1970년대부터 느슨해져서 마침내 1989년 사회주의권 붕괴로 이어졌다. 동북아의 냉전구조는 유지되었지만, 강권적 위기관리체제의 존립 근거는 서서히 약화되었다. 둘째, 더욱 중요한 것으로, 1980년대 이후 무역·금융·생산에서의 글로벌화·지역화의 경향은 점점 더 국가주도의 추격전략과 조응하지 않게 되었다. 다국적기업의 발전에 따라 국가 단위의 ‘점진적 추격’ 대신 특정한 가치사슬5에서의 ‘갑작스런 비약’이 빈번하게 발생하게 된다.
이렇게 87년체제는 ‘국가’의 능력과 ‘추격’의 가능성이 크게 감소한 조건에서 출범하였다. 국가가 주춤거리며 후퇴한 가운데 재벌은 활동공간을 확대했다. 국가와 기업 모두에서 외환 및 수지 관리의 실패가 계속되었고, 재벌기업의 신용독점과 국가의 금융관리의 비효율성이 누적되었다. 1997년 외환위기는 곧 경제 전반의 위기로 확대되었다. 위기를 계기로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가 급속히 도입되었다. 엄혹한 경쟁에서 승리한 일부 재벌은 독점성을 강화하면서 국가의 보호 없이 생존할 수 있는 기술적·금융적 기초를 마련했다. 구조조정의 압력을 뚫고 현장 통제력을 유지한 조합운동들도 정치적·사회적 역량을 일정하게 보존했다.
일국적 추격체제에서 잉태된 재벌체제와 운동세력은 87년체제를 떠받치는 주요한 지주가 되었다. 그런데 글로벌화가 진행되면서 동아시아에는 국제적 생산네트워크가 형성되었으며 한국도 이에 깊숙이 편입되고 있다. 점차 세계가 복잡해지면서 동아시아 경제와 국내 씨스템과의 교착(交錯)은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87년체제의 미시경제조직은―재벌기업이든 운동조직이든―경직되고 폐쇄적인 조직형태에서 탈피하지 못한 교착(膠着)의 체제로 남아 있다. 환경이 복잡해질 때 씨스템은 스스로를 변화시켜 환경에 대한 대처능력을 높이지 않으면 안된다. 87년체제는 글로벌화·지역화 속에서 국경을 넘어 형성되는 수평적 네트워크와 조화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혁신해야 하며, 이를 기초로 동아시아 경제를 좀더 민주적이고 참여적인 씨스템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87년체제는 이전보다 진보된 체제이면서 새로운 진보를 필요로 하는 체제이다.
3. 동아시아 생산네트워크의 형성
1) 글로벌화와 동아시아 경제의 발전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유지되었던 국경 조건과 정책적 자율성은 1970년대를 통하여 변화했다. 1950~60년대까지는 미국이 모든 부문에서 절대우위를 가졌으나, 1970년대 들어 일부 부문에서 우위를 상실하면서 국제무역도 급증하기 시작했다. 선진국 사이에서 진전된 자유무역화의 거대한 흐름은 1980년대부터는 대부분 개발도상국과 사회주의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국제적 유동성이 증가했고 국제자본시장은 확대되어, 개발도상국과 동유럽 국가들이 자본시장에 편입되었다. 또 세계적 차원에서 해외직접투자가 1980년대 말 이후 크게 증가했고, 다국적기업은 가치사슬을 분할하여 활동을 초국적 차원으로 확장하였다.
이러한 조건에서 동아시아 경제의 팽창이 이루어졌다. 무역성장은 주로 미주, 유럽, 동아시아의 3개 블록에 집중되었는데, 동아시아 개발도상국들은 주로 OECD 국가에 제품을 수출함으로써 1980~90년대에 급속히 성장했다. 해외직접투자는 동아시아에 새로운 생산네트워크를 창출했다.6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은 생산물과 투입요소 두 분야에서 모두 무역을 발전시켰고, 저임금 생산품은 다른 빈곤국으로 이전되었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다국적기업의 핵심시장이자 기술 및 숙련된 종업원을 조달하는 네트워크에 포함된 데는 새로운 산업의 태동이 계기가 되었다. 전자산업 안에서 새로운 산업의 태동은 새로운 형태의 경쟁방식을 낳았다. 미국에서 형성된 IT산업은 기존의 기업 가치사슬을 해체하였다. IT산업의 기술진보는 ‘개방하되 소유권을 갖는’(open-but-owned) 씨스템을 창출했고, 시장지배력은 수직적으로 통합된 전통 조립업체에서 기술·부품·기업지원써비스를 공급하는 협력업체로 이전되었다.
미국 기업들은 1980년대를 통해 동아시아 지역에 자동화 설비에 기초한 조립공정을 이전했고, 나아가 부품 및 반조립품의 조달을 현지 자회사에 위임했다. 1990년대 들어 생산망은 더 넓어졌고 이에 따라 동아시아 지역에는 지역생산체계가 형성되었다. 일본도 비교적 낮은 기술수준의 단계에서이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해외투자를 확대하여 동남아에 생산네트워크를 형성했다.
타이완이나 싱가포르와 달리 한국은 1980년대 초까지 국내기업을 지원하고 외국기업 투자를 선별하는 산업정책을 실시하고 있었으며, 개방정책을 통해 미국이나 일본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생산네트워크 안에 들어가서 첨단산업을 육성하는 전략을 채택하지는 않았다. 대신 국내기업들이 독자적으로 첨단기술산업에 진입을 시도했다. 삼성의 경우 1980년대 말 미국 벤처기업에 투자하고 이를 인수하여 미국내 R&D쎈터로 활용했다. 이후 삼성은 미국내 R&D쎈터와 한국의 생산능력을 결합하여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이는 기술력을 가진 미국 기업들이 동남아의 생산능력과 결합한 것과 동일한 원리였는데, 차이는 한국 기업이 이러한 네트워크를 기획했다는 점이다.7
2) 자동차산업의 생산네트워크
IT제품, 특히 PC가 모듈형 아키텍처 제품을 대표한다면,8자동차는 통합형 아키텍처의 전형적인 제품이다. 자동차는 차종별로 핵심부품의 최적설계와 이들의 긴밀한 상호조정을 통해서만 요구되는 수준의 기능을 달성할 수 있다. 그래서 자동차산업에서는 완성품업체와 부품업체 사이에 설계와 생산 면에서 밀접한 연계와 조정이 필요하게 되고 양자간에 수직적 통합구조를 갖게 되는 경향이 있다.9 따라서 자동차산업에서의 해외투자는 제품의 특성, 산업구조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시장기회의 확대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포드, GM 등은 유럽시장 확보를 위해 유럽에 진출했지만, 유럽의 각국 정부가 지원하는 업체와 경쟁해야 했다. 1970년대에 일본 기업들이 혁신적 경영기법을 확립하면서 수출 중심으로 유럽과 미국 시장에 침투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일본에서도 전문업체를 중심으로 분업체제가 재편되면서 폐쇄적이던 하청거래가 개방되기 시작했다. 이후 선두업체들은 해외생산을 확대하고 부품의 공용화와 글로벌 쏘싱을 추진하면서 폐쇄적 분업체제를 신차종 개발네트워크로 재편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90년대 중반에는 해외생산이 수출을 상회하게 되었다. 미국, 유럽 기업도 일본의 생산체제를 벤치마킹하면서 1990년대의 세계 자동차시장은 글로벌 생산과 과점적 경쟁이 격화되었다. 1998년 다임러벤츠가 크라이슬러를 인수함으로써 세계 상위 완성차업체들이 이합집산했으며, 상위 6대 그룹에 의한 과점체제가 형성되었다. 한편 IT산업의 발전에 따라 부품의 구매·판매씨스템이 획기적으로 변화하고 부품제조의 외주화, 부품의 모듈화가 급속히 전개되었다. 부품업체간 경쟁도 가속화되었고, 완성차업체와 부품업체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부품업체간 네트워크 형성이 중요해진 것이다.
한국의 대기업은 현대자동차를 중심으로 가공조립 부문에서 시작하여 신차개발에서도 상당한 기술력을 축적하는 데 성공했으며, 일본에 비해 저렴한 인건비로 아시아시장에서의 중소형 신차개발의 지역거점으로 자리잡았다. 한편 자동차 생산국의 시장이 대부분 성숙기에 도달한 가운데, 중국시장은 1990년대 말부터 ‘자동차 붐’이 일어나 세계시장에서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이에 따라 세계 10대 상위업체 모두 중국에 진출하게 되었고, 중국은 세계 4위의 자동차 생산대국이자 3위의 자동차 소비대국이 되었다. 폴크스바겐 등 독일계 기업이 일찍부터 중국 현지업체와 제휴하여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일본·미국·한국 업체들이 그 뒤를 추격하고 있다.
중국 자동차산업의 부상으로 중국에 투자가 집중되어 동아시아에 새로운 자동차 생산거점이 형성될 전망이다. 아직 신차개발 부문에서는 기술격차가 있지만, 중국으로의 완성차 및 부품 수출이 증가하는 한편, 중국은 노동집약적인 부품공급의 새로운 거점으로 부상할 것이다. 중국산 부품은 동아시아는 물론 미국 등 역외시장으로 수출되어 부품업체간 경쟁이 격화될 전망이다.10
3) 농업의 무역·생산네트워크
농업도 글로벌 차원에서 급속히 시장화·네트워크화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1930년대 대공황을 거친 이후 개별 국가의 사회적 안정을 우선시하여 ‘소득보상적 농업보호정책 체계’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틀 속에서 다른 부문에서는 자유무역이 진전되는 가운데 농업부문은 예외로 허용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서유럽의 여러 국가에서는 가격보조 및 수출보조 정책으로 인해 발생한 과잉생산과 재정부담 문제가 점점 누적되었다. 그리하여 1980년대에는 농산물무역을 자유화하여 국내가격과 국제가격이 직접 연계되는 자유경쟁시장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UR 농산물협상과 1995년 WTO의 출범으로 농업의 자유무역체제는 글로벌 차원에서 제도화되었다.
이후 농업부문에서도 새로운 경쟁방식이 도입되었다. 즉 국경조치나 국내보조가 점차 감축됨에 따라 농업무역은 크게 확대되고 농업생산은 중장기적으로 국가간 경쟁에서 경영체간 경쟁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농업무역의 전개는 여타 생산활동과 더욱 깊숙이 연계되어 교역재와 비교역재의 연결을 강화하고 농산물과 연관된 산업의 융합을 촉진한다.
농업의 무역망이 획기적으로 넓어지고 있으나 농산물 가격에서 차지하는 유통비용의 비중, 소비문화의 중요성 등을 감안할 때 지리적 거리는 아직도 중요하다. 따라서 농업무역의 지역화는 지역간 무역에 보완적이거나 지역간 무역과 함께 성장하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인구와 농업생산량이 압도적인 중국이 국제무역에 적극 참여하게 된 것이 지역시장 형성의 또 하나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11
현재 한국·중국·일본 사이에는 토지·노동력·자본·기술 등 생산요소의 부존(賦存) 차이에 따른 특화가 진행되고 있고 이러한 추세는 장기간 계속될 것이다. 즉 중국은 토지사용적·노동집약적인 곡물과 채소를 한국과 일본에 더 많이 수출하게 될 것이다. 한국은 자본·기술집약적인 일부 신선채소와 고품질 가공농산물을 일본으로, 그리고 고급 과일과 가공식품을 중국으로 수출하게 될 것이다. 일본은 채소종자 등 기술집약적인 농자재와 고급 가공식품의 수출을 확대할 것이다.
게다가 동아시아 농업의 역내 분업은 최종재의 무역에만 국한되어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동아시아에서도 식료씨스템(food system), 즉 농업·식품공업·식품유통업·외식산업 등 다양한 산업의 연관에 의해 성립하는 다단계산업의 연쇄가 형성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의 식료·농업씨스템을 추동하는 주요한 계기는 소비자의 변화, 기술진보, 국제화 등이다. 첫째, 영양, 편리성, 입맛 면에서 차별화된 기호를 추구하는 소비자가 등장했다. 이는 대규모 대중시장이 축소되고 여러개의 분할된 소비시장이 형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바이오테크와 IT의 발달에 따라 농민·식품기업 등에 변화의 압력이 가해지고 있다.12 바이오테크는 더욱 자동화된 생산으로의 이행을 촉진하는 한편, 식료생산을 한층 확대된 산업구조의 일부로 재편성한다. 셋째, 식품·유통기업이 국제화를 추구하면서 중국이 동아시아 차원의 식료·농업씨스템에 주요한 요소가 되었다.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중국 농산물 수입의 증대는 유통·가공·외식 업체의 활동과 관련이 있다.13
4. 87년체제의 산업씨스템
1) 자동차산업
1980년대 후반의 호황으로 한국경제는 크게 팽창했다. 1990년대 들어서 재벌들은 경쟁적으로 자동차산업에 뛰어들어 외환위기 직전까지 5개 그룹 8개 완성차업체가 난립하는 가운데 과잉투자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전후하여 모든 업체가 경영 위기에 봉착하였고 이는 한국경제 전체의 위기로 전화되었다. 격렬한 구조조정 과정이 진행되었는데 이는 재벌체제의 대규모 재편을 의미하였다.
자동차산업 구조조정의 결과 현대자동차그룹이 출현했다. 고유모델 개발을 통해 상당 수준의 기술능력을 보유하고 있던 현대자동차는 기아를 인수하여 국내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동시에 그룹 분리를 통해 현대자동차는 선단식 경영에서 벗어나 자동차 전문그룹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히했다. 또 주가관리를 중시하는 주주자본주의적 경영방식을 강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3세로의 경영 승계가 쟁점이 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족기업으로서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14 국내 자동차산업에 외국계 업체가 대거 진출한 것도 구조조정 과정의 중요한 결과이다. GM, 르노, 샹하이자동차가 각각 대우자동차, 삼성자동차, 쌍용자동차를 인수함으로써, 외국계 기업이 국내업체의 합작파트너에서 나아가 50% 이상의 지분을 소유하고 직접적인 경영주체로 나서게 되었다. 외국계 기업은 완성차업체뿐만 아니라 부품업체도 상당수 인수하여 전자제어기·에어백·전장부품·베어링 등 핵심부품을 담당하게 되었다.
기업 내부에서는 생산합리화가 진행되고 있다. 생산합리화의 핵심은 국내외 환경 변화에 대응하여 유연성을 증가시키는 것으로서, 생산기술 측면에서는 플랫폼 통합과 모듈화로 집약된다. 현대·기아자동차는 종래 20여개에 달했던 플랫폼을 6~7개로 줄여 신차모델 개발비용을 크게 절감했다. 또 10% 내외에서 시작된 모듈 생산의 비율을 35~40%까지 높이는 계획을 실행중이다. 그러나 완성차업체의 부품업체에 대한 하청지배구조는 더 강화되었는데, 이는 현대자동차그룹의 규모 확대와 관련이 깊다. 즉 완성차업체의 시장지배력이 강화되면서 부품업체에 일방적 단가인하, 임률고정 등 저임금을 강화하고 있다.
자동차산업에서 기술요인이 가장 중요한 경쟁력 요소로 꼽힌다는 것이 최근의 변화된 양상이다. 따라서 고급 R&D 역량을 갖춘 인력의 양성과 작업자들의 숙련 향상이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대립적 노사관계 때문에 R&D에 대한 투자와 작업자들의 숙련 향상에 대한 투자가 제한되고 있다.경영진은 노동자들에 대한 교육훈련 투자를 회피하고 설비자동화와 조직개편을 중심으로 생산합리화를 추진하고 있다. 노동조합은 숙련 형성이 단결력을 약화시킨다고 판단하고 직무규제 등 작업장 내의 권력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15
2) 농업
한국에서는 식료소비가 선진국의 형태로 전환되고 있다. 즉 소비의 물량적 변화, 질적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식료소비의 주체인 가계의 특성이 변화하여 맞벌이부부의 증가, 독신가계의 증가, 가계규모의 축소 등이 진전되고 있다. 그 결과 식품소비구조는 더 고도화·외부화되고 있다.16 또한 유통부문에서도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으며, 대형할인점·식자재업체·외식업체 등 구매자가 점점 대형화되고 있는데, 이들 대형 구매자들은 소비자들의 기호를 반영하여 탄력적으로 구매성향을 변경하고 있다. 이들은 시장 수요를 반영하여 글로벌 쏘싱을 더욱 강화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농업은 이러한 추세에 대응하는 씨스템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1980년대 들어 식량생산은 정체·감소하고 우등재인 과일·채소·축산의 비중이 증가하는 구조 변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이는 식료의 대량소비와 소득상승에 따른 우등재 소비 증가에 꾸준히 대응해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이후 그간 농업성장을 주도하던 과일·채소·축산의 성장이 정체하고 있으며, 그 결과 2000년대 들어서는 전체 농업성장이 둔화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쌀 소비는 급감하고 있고, 1990년대 말부터 과일·채소 소비도 안정기에 접어들었는데, 이에 대응하지 않고 계속 요소를 투입할 경우 경영조건은 크게 악화될 것이다.
문제는 농업 경영주체이다. 그동안 호당 경영규모와 함께 2ha 규모 이상의 대농경영층 비율은 증가해왔지만, 0.5ha 이하 규모의 경영층은 의미있는 감소세를 보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영세농 비율은 더 증가했다. 영세농은 농업으로 소득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고 신기술 수용을 통한 경영혁신에도 소극적이다. 또 65세 이상 고령농가 비율이 1/3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의 농가소득은 전체 농가 평균소득의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경영혁신을 주도해야 할 30세 미만 청년층 노동력은 전체의 2.4%에 불과하다.
쌀을 포함하여 전품목으로 과잉생산이 확대되고 있는데, 경영구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농가경제는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농가경제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기 때문에 농민운동은 쌀 농업에 대한 국가보조를 강화할 것을 계속 주장하고 있다. 지방정부와 생산자조직이 연대하여 새로운 생산―마케팅 씨스템을 모색하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지만, 아직은 주요한 흐름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5. 87년체제의 혁신을 위하여
1987년 이전의 국가주도 추격모델이 작동하게 된 배경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세계체제가 있다. 개발독재를 지지하던 얄따 체제와 브레튼우즈 체제가 약화된 것은 1970년대이다. 1980년대 이후 무역과 생산이 더욱 국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게 되었으나, 글로벌화를 통해 선진 블록에 집중되는 정도는 더욱 높아졌고, 특히 동아시아에는 국제적 생산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수명을 연장하고 있던 한국의 군사적 개발주의체제는 1987년에 붕괴되었다.
한국의 87년체제는 글로벌화·지역화와 나란히 출범했지만, 87년체제는 과거 체제에서 형성된 폐쇄적·경직적 요소를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과도적이고 불안정한 체제이다. 대기업은 하청부문에 대한 수직적 지배력을 강화하고 비정규직부문을 확대하여 수량적 차원의 유연화에만 집중했다. 해외공장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가격경쟁력 제고에만 골몰한다면 그것은 종래의 외연적 규모 확대의 방식을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산업차원에서 보면, 유연한 생산기술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작업자들의 다기능화와 숙련 형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능력있고 혁신적인 인력이 산업에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흐름이 약화되고 있다. 평균적인 품질의 생산에만 익숙할 뿐 부가가치가 높은 고급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숙련 형성과 참여는 부족하다. 여기에는 고용조정을 둘러싼 대립적 노사관계, 시장개방과 보조금을 둘러싼 국가와 농민의 대립구도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87년체제는 진보의 교착상태이다. 재벌체제는 세계시장·국내시장의 사다리에서 몇걸음 올라섰으며,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모두 일정하게 현장통제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러한 상태가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는 없다. 동아시아에서 무역·투자 자유화를 제도화하려는 움직임은 비가역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제조업에서는 모듈화와 적기조달씨스템으로의 진전이 계속될 것이고, 농업·식료부문에서는 소비의 고급화, 생산·유통·가공의 씨스템화가 진행될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경쟁과 이동성을 증대시키고 불확실성을 확대한다. 절대적 불확실성은 경제주체의 독립성과 시장원리를 강화하지만, 상대적 불확실성은 상호의존성과 위계·조직 원리를 강화한다. 절대적·상대적 불확실성이 함께 증가하면 시장도 위계·조직이 아닌 네트워크로 대응하는 것이 유리해진다.
재벌 대기업이 밖으로는 글로벌 쏘싱을 추구하면서 안에서는 수직적 위계를 강화하는 것은 장기적으로는 양립할 수 없다. 또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이 동아시아 차원에서 형성되는 생산네트워크를 저지하겠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기존의 기업이나 운동조직이 적응력이 떨어지는 과거의 기술·자산을 지키려고만 하면 그것은 단순히 ‘분배동맹’이 되고 만다. 새로운 진보를 위해서는 교육훈련을 강화하고 품질경쟁력을 높이는 경영능력 혁신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 유연한 기술과 생산조직, 그리고 수평적 네트워크로 구성된 공급씨스템, 생산조직과 지자체의 네트워크에 의한 생산―마케팅 씨스템이 발전해야 한다. 복잡해진 환경에 대처하는 마법적 해결책은 ‘혁신동맹’으로 씨스템을 다시 복잡화하는 것이다.
과거의 시장에서는 기업간·국가간에 경계선이 필수적이었으나, 동아시아 생산네트워크 안에서 그 경계선은 더 유동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동아시아 생산네트워크는 경쟁의 성격과 협력의 성격이 혼재되어 있으며, 불신과 신뢰가 교차하고 있다. 따라서 국경을 가로질러서, 또 국경 아래에서, 혁신과 창의, 호혜와 신뢰에 기초한 네트워크 모델로 전화하는 힘을 강화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87년체제가 개방형 네트워크 경제로 발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동아시아 생산네트워크를 좀더 민주적으로 교화된 씨스템으로 진화시킬 수 있는 동력이 될 것이다. 87년체제의 혁신은 동아시아 경제를 다시 혁신한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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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이 수출시장을 목표로 대기업을 육성하면서 경공업에서 중공업 단계로 이행했다면, 북한은 처음부터 강력한 중공업 우선발전을 추진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국유화·집단화를 행했다. 물론 세계시장의 중요성과 미시 조직의 효율성 문제를 경시한 북한경제가 나중에 치러야 할 댓가는 엄청난 것이었다.↩
- 박정희시대에 경제성장과 독재체제가 서로 보완적이었던가 독립적이었던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이병천 「개발독재의 정치경제학과 한국의 경험」, 이병천 엮음 『개발독재와 박정희시대』, 창비 2003; 조석곤 「박정희신화와 박정희체제」,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 필자는 특정한 국제환경 속에서 성장과 독재체제가 양립했으며, 1980년대 후반 이후 그러한 국제적 조건이 약화되었다고 본다.↩
- 데이비드 헬드 외 지음, 조효제 옮김 『전지구적 변환』, 창작과비평사 2002.↩
- 末廣昭 『ギャッチアップ型工業化論:アジア經濟の軌跡と展望』, 名古屋大學出版會 2000.↩
- 가치사슬(value chain)이란 포터가 발전시킨 개념으로, 기업의 전반적 경영활동을 주활동 부분과 보조활동 부분으로 나누어 구매·생산·물류·판매·재고관리·AS 등 각 단계에서 기업이 얼마의 비용으로 얼마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가를 분석하기 위한 도구이다(Porter, M., Competitive Advantage, Free Press 1985).↩
- 해외직접투자는 고부가가치의 전문적 생산활동을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에 특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은 메모리칩, 타이완은 디지털 디자인, 싱가포르는 생산공정 및 엔지니어링 등으로 특화되었고, 저부가가치의 조립생산은 중국과 동남아 지역으로 이전되었다.↩
- 김주훈 『동아시아의 글로벌 생산네트워크와 한국의 혁신정책 방향』, 한국개발연구원 2004.↩
- 아키텍처(architecture)란 제품의 전체 요구 기능을 어떻게 분할하여 각 부품에 배분할 것인가, 그리고 각 부품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에 관한 기본설계사상을 의미한다. 모듈생산이란 지리적으로 모기업 내외부의 근접한 장소에서 복수의 부품을 중간 조립해서 모듈 형태로 최종 조립라인에 투입하여 완제품을 만드는 생산방식을 지칭한다. 모듈형 아키텍처 제품은 각 기능과 구조 및 부품간의 대응관계가 명확하며 특정 기능을 하나의 부품에 집약하는 방식으로 설계가 용이하고 부품간의 상호관계가 비교적 독립적이다.↩
- 藤本隆宏 『日本のもの造り哲學』, 日本經濟新聞社 2004; 조성재 외 『동북아 제조업의 분업구조와 고용관계(I)』, 한국노동연구원 2005.↩
- 한국개발연구원 지식경제팀 『한국의 산업경쟁력 종합연구』, 한국개발연구원 2003; 서석흥 「중국 자동차산업의 현황과 시장동향」, 중국시장포럼 세미나 2005; 박번순 외 『아시아경제, 공존의 모색』, 삼성경제연구소 2005.↩
- 우리나라는 농산물·축산물·수산물·임산물을 모두 합쳐 수입액 기준으로 국가별 점유비율이 1995년에 미국 34.7%, 중국 7.3%, 인도네시아 6.9%였는데, 2003년에는 중국 24.3%, 미국 23.2%, 호주 6.8%의 순으로 변하였다(농산물유통공사). 1995년에는 한국이 미국에서 주로 먹을거리를 수입했지만, 이후 수입선이 중국과 미국으로 분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2004년 현재 일본의 농림수산물 수입액의 국가별 비율은 미국이 22.8%, 중국이 14.0%를 기록하였다(日本 農水省).↩
- 바이오테크는 “유기체 또는 세포, 분자 요소를 사용하여 생산물을 제조하거나, 희망하는 특성을 갖도록 식물·동물·미생물을 변형하는 기술”로 정의되며, 이에 따른 생산품은 의약품과 비의약품(농업관련 산품 및 공산물)으로 구분될 수 있다.↩
- 이일영 「한국 농업과 동북아 농업: 새로운 시대의 의제와 전략」, 『창작과비평』 2004년 가을호.↩
- 재벌개혁의 성과를 둘러싼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필자는 문제의 성격이 ‘진화’했다고 생각한다. 즉 시장과 규모의 확대, 가치사슬의 분할과 개방화, 수평적 네트워크의 증대 등으로 인해 총수지배 또는 가족기업이라는 모순이 아직도 중요한 문제지만 그 비중은 감소했다고 할 수 있다.↩
- 조형제 『한국적 생산방식은 가능한가?』, 한울 2005.↩
- 한국 도시가계 평균 엥겔계수는 1960년대 60% 수준에서 2000년대에는 26% 수준으로 급감하였다. 식료소비 중 외식의 비중은 198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상승하여 최근에는 46% 수준에 도달했다(유영봉 「21세기 한국농업의 성장전략」, 농정연구쎈터 제13회 연례 심포지엄 ‘한국 농업·농촌의 장기비전’ 2005.6.22).↩
- 동아시아 생산네트워크의 성격이 이미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선진국의 대규모 초국적기업들에게 유리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들만이 지배하는 배타적인 존재는 아니다. 물론 좀더 참여적이고 분산적인 씨스템이 되기 위해서는, 두 차원에서의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는 평화문제·생태문제 등 다원적 가치를 포괄하는 동아시아공동체 형성의 노력이고, 둘째는 혁신·경쟁 요소를 ‘지역’ 단위에 고착·감금(lock―in)시킬 수 있도록 하는 시도들(예컨대 지역혁신클러스터, 지역단위의 노사정협력, 지역농업네트워크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