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소설

 

김애란 金愛爛

1980년 인천 출생. 2003년 대산대학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달려라 아비』가 있음. brokenname@empal.com

 

 

 

베타별이 자오선을 지나갈 때, 내게

 

 

열차는 눈먼 물고기처럼 인천을 빠져나와 서울의 북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열차 안의 노선도를 올려다보며, 역사(驛舍)의 수를 꼽아보았다. 인천에서 의정부까지 50여 개의 역이 있고, 영등포에서 신길, 종로를 지나면 서울 북쪽 어딘가에 내 방이 있다. 자동문 위, 노선표의 불빛이 깜빡거렸다. 자그마한 플라스틱 전구 위로, 종착역까지는 녹색불이, 이미 지나간 역 위로는 빨간불이 켜지는 노선표였다. 낯선 지명의 점들과 그 사이를 잇는 직선. 나는 그것이 카시오페이아나 페르세우스, 안드로메다라 불리는 이국말로 된 성좌의 이름처럼 어렵고 낯설었다. 내가 모르는 도시의 별자리. 서울의 손금. 서울에 온 지 7년이 다 돼가는데, 그중에는 내가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한 동네가 많다. 지하에서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안내방송을 들을 때마다 나는 구파발에도, 수색에도 한번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것은 서울이 너무 넓은 탓이 아니라, 내 삶의 영역이 너무 좁았던 탓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별자리에 깃든 이야기처럼, 그 이름처럼, 내 좁은 동선 안에도― 나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열차는 긴 꼬리를 그으며 수도를 헤엄쳐갔다. 도시의 불빛들. 그 안에는 분명 입시학원들도 있을 터이다. 서울엔 크고 작은 학원이 밤하늘의 별처럼 많다. 얘들아, 우리별은 자전할 때마다 크기가 조금씩 작아지며― 하얀 분필가루들을 우주 곳곳으로 흩날리고 있지 않을까. 강사생활 10년에 지문이 닳은 한 선생이 조금 전 정차한 역 어디에선가 중얼거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밤. 열차문이 열리자, 깊고 찬 가을바람이 덜컥 들어왔다. 보강에 지친 강사들이 입 안에 털어넣는 목캔디 향처럼, 맵고 알싸한 바람이었다.2005년 가을, 이제 스물여섯. 강사경력 3년차 이력서를 들고, 나는 며칠 전 학교 도서관에서 마주친 친구와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영아, 너 얼굴이 왜 그래?”

나는 도서관 컴퓨터로 채용결과를 알아보고 나오던 참이었다.

“내 얼굴이 왜?”

수줍은 듯 한쪽 손으로 얼굴을 만지는 내게, 친구는 눈을 뚱그렇게 뜨고 말했다.

“얼굴이 괴물처럼 일그러졌어.”

 

열차 안으로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의정부 ‘북부행’이라는 말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어쩐지 나는 우리 모두가 아주 멀고, 추운 나라로 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창문에 얼비치는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좀 까칠하고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문득 내가 모르는 얼굴이 나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학원면접을 마치고 집에 가는 중이었다. 학원이라면, 이미 학부 2학년 때부터 학비를 벌기 위해 나갔던 터라, 나름대로 이력도 있고 자신도 있었다. 한때는 아예 전문적인 학원강사가 되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훗날 고향친구들이 ‘지금 뭐하냐’고 물었을 때 ‘학원 나간다’고 하면 왠지 부끄러울 것 같았다. 동네마다 보습학원이 너무 많이 생겨난 탓에, 대학만 졸업하면 웬만해서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학원강사였다. 일반 직장인보다 고소득을 올리는 유능한 강사도 많지만, 한편으론 ‘먹물들의 막장’이라고 은근히 폄하되곤 하는 것도 학원이었다. 학원의 규모나 대우도 천차만별이어서, 나는 학원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그리고 이따금, 좁고 어두운 학원 화장실에 앉아 있을 때면, 내가 쓰는 화장실이 나를 말해주는 것만 같아 울적해지곤 했다.

 

내가 강사직을 그만둔 것은 스트레스 때문이 아니었다. 그땐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놀게 될지 몰랐다. 내 학과성적은 항상 4.0이 넘었고, 토익점수도 900점 이상이었다. 나는 성격도 원만했고, 나름대로 창의적인 인간이라 생각해왔다. 그래서 처음 서류심사에서 떨어졌을 때 나는 ‘원래 몇번씩은 다들 떨어진다잖아?’ 하고 생각했다. 두번째로 심사에서 떨어졌을 때, ‘혹시 자격증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 운전면허를 땄다. 또 한번 서류심사에서 떨어지자, ‘혹시 내 인상이 안 좋나?’ 해서 사진을 다시 찍었다. 열번 넘게 떨어지자, ‘혹시 내 전공이 국문학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영문과에 다니는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영문과도 마찬가지야. 요새 영어는 아무나 하거든.” 철학과에 다니는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그래도 네가 나보단 낫지 않니?” 그 말을 똑같이, 법학과에 다니는 친구에게 하자 그는 꽁초를 힘껏 빨며 웅얼거렸다.“그것도 옛날 얘기지. 요샌 고시도 잘사는 집 애들이 잘 붙어. 고시는 장거리경주라 누가 뒤를 받쳐줘야 하거든.” 시험에서 한 스무번쯤 떨어졌을 때, 나는 ‘내가 너무 눈이 높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작지만 건실한 회사에 원서를 부지런히 넣었다.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서른번째 낙방을 했을 때, 두 손으로 머리통을 감싸안고 중얼거렸다.

“혹시 나는 정말 괴물이 아닐까?”

 

입사시험을 준비하며 나는 여러 노력을 했다. 한번은 인터넷을 뒤져 한 대기업의 인사과장이 ‘서류는 일단 자기소개서를 잘 써야 한다’며 올려놓은 모범답안을 정독했다. 그런데 모범답안을 보니 그 사람은 자기소개서를 잘 쓴 게 아니라, 인생 자체가 잘 씌어 있었다. 만일 IT 회사에 서류를 낸다면― 나는 아마 포털싸이트에 대한 관심으로 자기소개서를 채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사다준 애플 컴퓨터를 분해하며 노는 것이 참 즐거웠습니다’라고 쓸 것이다. 그는 취미도 ‘승마’였다. 나는 ‘독서’라고 쓰는 것이 왠지 부끄러워, 보편적이면서도 무난한 ‘영화감상’이라고 썼다. 한 선배는 내 이력서를 보더니 혀를 차며 이렇게 말했다.

“이거야 원, 콘텐츠가 없어, 콘텐츠가……”

나는 진지하게 물었다.

“선배, 콘텐츠는 어떻게 만들어요?”

학교 도서관에서 1년째 공기업 입사시험을 준비하던 선배는 커피를 사주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나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으며 물었다.

“저기, 여자는 면접 때 인성을 본다던데.”

선배는 무릎 나온 ‘추리닝’ 바지의 보풀을 뜯어내며 말했다.

“인마, 여자는 얼굴이 인성이지.”

나는 공손하게 커피를 내밀었다.

“선배 콘텐츠는……?”

선배는 커피를 단숨에 마시더니 “만들긴 뭐로 만들어, 돈으로 만들지”라고 말한 뒤 삼선 슬리퍼를 끌고 유유히 사라졌다.

 

열차가, 대방을 지나 한강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나는 오늘 돌아본 학원 중 과연 몇곳에서 연락이 올지 계산해봤다. 물론 그중에는 연락이 와도, 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곳도 있었다. 맨 먼저 간 학원에서는 원장이 초면에 반말을 했다. 그러더니 ‘나 안 만만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소파 팔걸이에 느슨하게 팔을 걸치고 면접을 봤다. 두번째 학원에서는 원장이 내게 ‘강의’란 무엇인가를 한 시간 넘게 강의했다. 나는 말이 많은 원장들은 그만큼 학원에 대해 자신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참의 장광설 끝에 그가 부른 강사료는 그날 들른 학원들 중 최저였다. 마지막으로 면접을 본 학원에선 ‘애들은 때려야 한다’며 원장이 청테이프가 감긴 각목을 내 앞에서 휘둘러 보였다. 나는 얕은 숨을 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다음역은 노량진, 노량진역입니다”

 

1999년 봄. 그때도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한강을 건너 노량진에 온 적이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멨던 빨간색 프로스펙스 가방을 바싹 끌어안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가방 안에는 누가 절대 훔쳐갈 리 없는 학습지가 가득 들어 있었다.3월이니 뭔가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봄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뭔가 먼저 알아버리기에도 너무 이른 나이였던 때. 나는 장기판 위에 놓인 한 마리 말〔馬〕처럼 대책없고 수줍었다. 열차 안으로는 도심의 빛이 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차창 밖으론 한강대교와 올림픽대로, 크고 작은 빌딩들이 지나갔다. 스무살의 나는 ‘이야, 다리는 정말 다리가 많네?’ 하고 신기해했다. 오후 2시. 머리 위로 고요하고 오래된 태양계의 질서가 습관처럼 자전(自轉)하고 있던 때.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더니 주위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바싹 조여들었던 나의 동공은 점점 크게 벌어져 하나의 상(像) 앞에서 멈췄다. 한강 너머― 호젓하게 솟은 빌딩 한채가 보였다. 온몸으로 푸른 하늘을 인 채, 수백 장의 금빛 비늘을 얌전하게 펄럭이고 있던 그것.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아! 63빌딩이다.”

내 마음의 데시벨은 너무 낮아 누구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나는 그때 분명히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63빌딩이다―라고. 나는 63빌딩을 보자 이상하게도 서울에 온 것이 실감났고, 비로소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63빌딩과 관련된 웃지 못할 일이 하나 있었다. 내가 재수학원에 다닐 때의 일이다. 개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나와 같은 단과수업을 듣던 아이가 강의실 안으로 헐레벌떡 들어왔다.그애는 강의실 문을 열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야! 나 지금 63빌딩이랑 좆나 똑같은 거 봤다!”

“그게 무슨 소리야?”

“따라와.”

아이들은 모두 우르르 학원 옥상으로 올라갔다. 아이들이 두리번거리며 ‘어디? 어디?’ 하고 묻자, 그애는 한강 너머의 한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

아이들은 다같이 그애의 손끝을 아득하게 바라봤다. 옥상 위에서 담배를 피던 남자아이들도 엉겁결에 하늘을 봤다. 모두 UFO라도 목격한 시민들 같았다. 저기, 지는 해를 등지고 눈부시게 빛나는 고층빌딩 한채가 보였다. 그것은……63빌딩과 ‘좆나’ 똑같은 63빌딩이었다. 누군가 말했다.

“빙신아! 저거 63빌딩이잖아.”

아이들은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갔다. 일렁이는 노을 사이로, 멍하니 서 있던 그애가 물었다.

“정말?”

……그래 정말. 네가 시골에서 올라온 것과,63빌딩이 63빌딩일 거라 상상하지 못하는 것. 내가 한달에 11만원짜리 독서실에 산 것이 정말이었던 것처럼. 그맘때 우리들의 얼굴이 저녁 무렵의 63빌딩과 같이 전부 노랬던 것처럼.

 

1999년 봄 노량진역― 우리는 햇살을 받아 마른버짐처럼 하얗게 빛나던 육교 위에 앉아 농담처럼 그랬다. 되고 싶은 것? 대학생.존경하는 사람? 대학생. 네 꿈도, 내 꿈도 그러니까 대학생과 ‘좆나’ 똑같은 대학생.

 

열차가 노량진을 떠나고 있었다. 그러자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일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내 인생의 성좌 중 어느 한점. 유난히 흔들리며 약하게 빛났던 작은 별에 깃든 이야기. 노량진. 좌절된 꿈처럼 그곳을 감싸안고 있던 성운들과 고운 색의 먼지들. 뭐 그런 것들.

 

좀 쑥스러운 이야기지만, 내가 재수를 한 것은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었다. 비록 최상위권은 아니지만, 서울에 있는 대학은 무난하게 지원해볼 수 있을 만큼 성적이 나오곤 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이던 97년에 IMF사태가 터졌고, 다음해 나는 교대에 떨어졌다. 갑자기 교대에 지원하는 학생들이 많아지면서 경쟁률이 무척 높아진 것이다. 그동안 나는 ‘수학’이나 ‘내신’ 탓이면 몰라도 내가 ‘IMF’ 때문에 대학에 떨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게다가 ‘IMF’는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 ‘네가 대학에 떨어진 이유는 올해 카시오페이아좌에 있는 7789 베타별이 자오선을 지나갈 때 반짝거렸기 때문이란다’라고 말해주는 것과 똑같이 들렸다. 부모님은 말했다. 사립대는 안된다. 하지만 재수도 안된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먼 미래가 아닌 당장 돌아올 설이었다. 왜 모든 시험결과는 설날 전에 발표되는지. 친척들의 질문과 어정쩡한 변명을 생각하자니 끔찍했다.

 

그즈음. 집으로는 각종 기숙학원 홍보 팸플릿이 부지런히 배달됐다. 대부분 무슨 면, 무슨 리로 끝나는 긴 주소를 가진 우편물들이었다. 그곳의 학생들은 모두 똑같은 체육복을 입고,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수업을 들으며, 한달에 한번씩만 외출을 한다고 했다. 심한 곳에서는 하루 다섯 시간 이상 자는 학생을 깨워 ‘빠따’로 때린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진학률은 매우 좋다고. 나는 팸플릿을 슬쩍 열어보다 얼른 덮어버렸다. 한달에 100만원 가량 되는 금액이었다. 나는 ‘저기 제가 100만원 드릴 테니 제발 저 좀 때려주지 않을래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맞고 싶어도―100만원이 없었다.

 

보다못해 재수를 제안한 것은 엄마였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냐며, 서울 어디 학원을 알아보라고 했다. 나는 타지에서 재수를 하면 매달 100만원은 아니지만 많은 돈이 나간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마 엄마는 알았을 것이다. 내 밑으로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생이 둘이나 더 있다는 것도. 나는 알면서도 몰랐지만 엄마는 다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재수생활을 우울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패배자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재수가 황송했다.

 

1999년 3월. 나는 노량진역에 처음으로 하차했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갯바람 냄새가 났다. 대부분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나는 냄새였지만, 누군가는 그것이 63빌딩 수족관에 있는 생선들이 하늘에서 상해가는 냄새라고 했다. 개찰구를 향해 걸어가다보니, 철로 양쪽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광고판이 보였다. 영어, 역사적 사명을 갖고 책임집니다. 대한민국 대표강사 김영철 선생. 서울대! 서울대 출신 강사가 가르쳐야 갑니다. 유쾌한 과학 박남식 선생. 국가직 선관위 경기도 문제풀이 大특강 현재 접수중. 적중. 적중. 적중. 합격신화는 계속됩니다. 이동성 경찰학원. 노량진 수험가의 새로운 혁명. 노량진 행정고시 학원. 공무원 그 미래의 약속. 광고판에는 자극적 수사들과 함께 강사들의 사진이 크게 실려 있었다. 때론 온화하게, 혹은 공격적으로, 어느 때는 굉장히 진지하게, 어느 때는 ‘걱정 마, 아무것도 아니야’ 하는 표정으로. 차림새도 염색머리에 후드티를 입은 강사부터, 셔츠 소매를 걷고 역동적인 자세를 취한 강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들 대부분은 젊었고, 또 저기 먼 곳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진 속 메이크업이 좀 어색하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래서 사실은 모두가 비슷비슷해 보인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모르는 아주 중요한 것들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노량진이 ‘약속의 땅’처럼 느껴졌다.

 

노량진에 도착한 첫날, 나는 학원 근처 여성전용 독서실을 계약하고 조그마한 사물함 키 하나를 받았다.K-59. 책상 한칸이 내 몫의 공간이었다.4인실엔 칸막이 책상 네 개가 서로 등을 진 채 놓여 있었다. 같은 구조의 수많은 칸과 칸 사이는 커튼으로 구분돼 있었다. 내가 있던 칸에는 두 명의 언니들이 이미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한 명은 임용고시 재수생 언니, 한 명은 5급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언니였다. 다행히 책상 하나가 비어 우리 칸은 조금 여유가 있었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내 책상 위에 포스트잇 하나를 붙여놓았다.

―내가 오늘 헛되이 보낸 시간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었다.

그러곤 그 아래 일년치 계획표를 붙여놓았다. 나는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주먹을 쥔 채 창밖을 바라보려 했으나― 주위엔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 그날 밤 지난 수능에서 만점 맞은 아이의 수기를 읽었다. 나는 ‘열심히 하자!’라는 각오로 이불을 편 뒤 누웠지만― 바닥이 너무 딱딱해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4인실은 너무 좁아, 네 명 모두가 의자를 책상 위에 올린 뒤, 그 아래 나란히 누워 연필처럼 자야 했다. 어둠속, 독서실 여기저기서 부르르― 부르르― 하는 삐삐 진동음이 들려왔다.이쪽에서, 저쪽에서, 때론 간헐적으로 때론 연이어서. 마치 풀벌레가 소리죽여 울듯. 아니 우리 모두가 한마리 풀벌레인 양. 어둠속 파란 불빛들이 깜빡거렸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독서실 안에서 가장 많이 나는 소리이기도 했다. 학원 공중전화 앞에 항상 줄이 길게 늘어서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루 네 시간 자던 아이도, 시간이 아까워 일년 내 미용실에 가지 않던 아이도, 공중전화 앞에서는 모두 기다렸다. 나는 옆사람이 깨지 않도록, 알람이 울린 후 0.2초 안에 삐삐를 꺼야 한다는 강박으로 잠을 설쳤다. 종종 잠에서 깰 때면,생전 처음 보는 언니들의 얼굴이 코앞에 와 있었다.

 

다음날 아침. 독서실 천장 위로 갑자기 커다란 음악소리가 울려퍼졌다.화려하고 날카로운 전자기타 소리였다. 나는 움찔 잠에서 깼다. 독서실 가득 스피커를 통해 어느 해외 록가수의 기타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연스럽게 이불을 개고 있었다. 삐삐를 보니 새벽 6시였다.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이불을 사물함에 넣고, 쓰레기를 줍고, 주변을 정리했다. 나는 엉겁결에 사람들을 따라 청소를 도왔다. 뒷자리,5급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언니는 상냥하게 말했다.

“더 자고 싶으면 청소 끝난 뒤 다시 이불 펴고 자.”

휘리릭― 독서실 총무가 물걸레질을 하며 복도를 지나갔다. 내가 독서실에 들어올 때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일러주던 청년이었다. 고시생인 그는 공짜로 독서실에 사는 대신, 독서실 관리와 청소를 맡고 있는 장학생이었다. 그러니까 아침마다 어떤 음악이 나오느냐는 전적으로 그 독서실의 총무가 요즘 어떤 노래에 ‘꽂혀’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우리 독서실의 총무는 몇달간 같은 노래만 죽어라 틀어댔다. 그래서 처음엔 ‘저 친구 기타를 참 잘 치는군’이라고 중얼거렸던 나도, 나중에는 날카로운 기타소리에 귀가 찢어질 것 같았고, 기타리스트가 클라이맥스 부분을 연주할 때면 두 귀를 감싸안고 ‘제발 그만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청소가 끝날 즈음에는, 항상 라이브 공연장의 관객들이 일제히 환호성과 함께 박수를 보내왔다. 한번은 내가 총무에게 아침 음악을 ‘쿨’이나 ‘서태지’로 바꿔줄 수 없냐고 하자, 총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경멸하듯 물었다.

“아니, 어떻게 레드 제플린이 싫을 수 있어?”

 

나는 나름대로 정한 하루 계획표대로 움직였다. 기상 수업 점심 자율학습 수업 저녁식사 수업 숙제 자율학습 등의 순서였다. 나는 공부계획을 보름마다 한번씩 세웠고,그중에 그날 한 일은 노란색으로, 밀려서 나중에 한 일은 초록색으로 표시하며 지워나갔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지우고 나면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여고동창들에게 이따금 살가운 음성메씨지가 왔다. 가끔은 나를 찾아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어색한 화장에 유치한 귀고리를 하고 있었지만, 진심으로 나는 그애들이 눈부시다고 느꼈다.

 

내가 서울에서 처음 사귄 친구는 민식이였다. 민식이는 건너편 일심학원에 다녔지만, 강석진의 수업을 들으러 일주일에 두번씩 필승학원에 왔다. 강석진의 수업은 필승학원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유명한 강의였다.그의 수업이 유명한 이유는 물론 적중률 때문이었다. 그의 이력에는 언제나 ‘필승에서 최단기 최다 마감’이라는 수식이 붙었다. 수업을 듣기 전, 나는 막연하게 명강사의 특징이 쇼맨십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노량진에 와서 놀란 건, 강사들의 어떤 여유였다. 그들은 힘을 안 들이면서도 아이들을 집중하게 만드는 요령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인쇄물도 많이 나눠주었다. 주로 자신의 이름을 건 특별요약지나 핵심문제지 등이었다. 나는 인쇄물에 강사들의 캐리커처가 그려진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멋진 문구와 산뜻하고 다채롭게 그려진 도표들도 감동적이었다. 나는 그 많은 자료를 왠지 공짜로 얻는 기분이 들었고, ‘아 서울의 사교육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감탄했다. 그들은 수업 간간이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전략과 전술을 말해주었다. 대단한 정보에 대해 담담한 말투로 전해주는 그들의 화법은 왠지 모를 경외심을 갖게 했다. 사소한 위트와 인간적인 충고, 그리고 정기적인 진도 체크와 위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 위로는 정치적인 위로였고, 수업의 요점은 항상 자기 수업을 계속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이 필요했다.그래서 밤새 기다려 수강증을 끊고, 맨 앞자리에 앉기 위해 수업 시작 15분 전부터 줄을 섰다.

그날 수학시간, 강석진은 칠판 위에 앞으로의 계획과 전략을 적었다. 그는 ‘친구들에게는 반대로 말해주라’는 농담을 했다. 나는 그 농담이 무섭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들을 따라 웃었다. 반대로 말해줄 것까진 없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말해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 정보에 대해 내가 뭔가 지불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교실문이 열렸다. 학원 수위 아저씨가 들어온 것이었다. 학원에서 도강생을 색출하기 위해 불시에 이뤄진 수강증 검사였다. 강석진은 익숙한 듯 교단 한쪽으로 가만히 비켜섰다. 아이들은 모두 책가방을 뒤져 수강증을 꺼냈다. 그런데 그때 웬 종이 한장이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날아오더니, 내 다리 밑에 사뿐 내려앉았다. 나는 무심코 허리를 구부려 종이를 주웠다.뒷자리의 한 남자애가 손을 뻗으며 어정쩡한 목례를 했다. 쉬는 시간, 누군가 내게 음료수를 건넸다.

“저, 아까 고마워서.”

나는 그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누구세요?”

“저, 아까 수강증……”

“…… 아, 네.”

그애는 머쓱해하다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저, 근데 어디서 왔어요?”

 

민식이는 나와 동향이었다. 민식이는 뛸 뜻 기뻐했다. 그러더니 점심을 사겠다고, 같이 닭갈비를 먹자고 했다. 나는 처음 보는 남자의 친절이 부담스러웠지만, 왠지 닭갈비를 먹어보고 싶었다. 우리는 복사집과 문방구, 노래방과 당구장, 만화방, 오락실이 즐비한 거리를 지나 함께 닭갈비집에 들어갔다. 민식이는 닭갈비 2인분을 시킨 뒤 고구마와 쫄면 사리를 추가했다. 나는 민식이가 사리를 능숙하게 추가하는 것만으로도 어른처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슬쩍 놀랐다. 통유리 너머로 디디알과 펌프를 하는 여자애들이 보였다. 민식이는 주걱으로 닭갈비를 고루 볶으며 수다를 떨었다. 강석진이 한달에 몇억을 버네, 송지영이 만고 끝에 노량진에 입성했는데 한달 만에 후두암에 걸려 그만뒀네 하는 식의 시시한 이야기들이었다. 혼자서 한참을 떠들어대던, 민식이는 내게 콜라를 따라주며 말했다.

“있잖아, 아까 네가 나한테 수강증 주워줬을 때 말이야. 그때 네 모습 있잖아.”

“응.”

민식이는 저 혼자 입을 가리고 히힛― 하고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마치 천사 같았어!”

그때 나는 K-59, 내 책상 위에 붙여놓은 포스트잇이 저기 먼 곳에서 펄럭― 하고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말았다. 나는 오늘 헛되이 보낸 시간 때문에 어제 죽은 이에게 죄송하게 될까 걱정됐다. 그러다 곧, 그 사람은 어차피 죽었으니까, 살아 있는 민식이하고나 잘해볼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후로 민식이는 나를 좋아한다고 저능아처럼 떠벌리고 다녔다. 나는 저렇게 모자란 아이가 왜 나보다 공부를 잘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실핀을 꼽고, 안경을 쓴 채, 매일 똑같은 옷만 입고 다니는 나를 그애가 좋아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부끄럽고 또 고마웠다. 하지만 내겐 민식이를 좋아할 일말고도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 생각도,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이런 게 아니라는 고민도 했다. 그래서 나는 공공연하게 민식이를 무시했다. 그러면 민식이는 더욱 신이 나서 내 앞에서 까불거리거나 친한 척을 했다.

 

민식이가 다니는 일심학원에서는 시험을 봐서 애들을 뽑았다. 나도 처음엔 일심학원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곳에선 석달치 학원비를 선불로 받았기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필승학원에도 좋은 강사진이 많았지만, 왠지 노량진 안에서도 일심학원에 다니는 애들은 달라 보였다. 그곳에선, 좋은 대학에 붙었지만 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재수를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일심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어떤 차분한 야심과 건조한 어른스러움 같은 게 있었다. 나는 일심학원에 다니면서도 일심학원에 다닌다는 것에 대해 ‘자연스러운’ 민식이가 부러웠다. 게다가 민식이는 학사(學舍)에 살고 있었다. 학사는 재수생들의 숙박시설 중 최고로 치는 곳이었다. 그곳에선 일주일에 한번씩 고기반찬이 나오고, 새벽에는 간식도 갖다준다고 했다. 그리고 한달에 80만원씩 받았다. 기숙시설 중 다음으로 치는 곳이 4,50만원대 하숙, 다음이 고시원이고 그 아래가 독서실이었다. 독서실도 1인실과 2인실 4인실에 따라 크게 가격차이가 났다. 나는 학사에 살면서 학사에 산다는 것에 대해 ‘자연스러운’ 민식이가 부러웠다.

 

며칠 후, 나는 책상 위에 붙은 포스트잇을 떼어냈다. 그러곤 이번엔 공부를 더 열심히 하자는 뜻에서 다른 명언을 써서 붙여놓았다.

―A rolling stone gathers no moss(구르는 돌엔 이끼가 끼지 않는다).

내가 멍하니 천장을 보자, 옆에서 임용고시 재수생 언니가 반가운 듯 참견을 했다.

“왜, 공부 안돼?”

나는 공부가 안되는 것은 언니가 아닐까 생각했다. 언니는 늘 사회와 제도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했고, 휴게실 안 텔레비전 앞에 자주 앉아 있었다. 나는 화장실에 갈 때마다 굵은 머리띠를 한 채 오락프로그램 앞에서 깔깔거리는 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평소 언니에게 잘될 거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저렇게 공부하면 안될 텐데’ 하고 생각했다.

“너도 나중에 졸업하면, 괜히 이런저런 데 원서 넣느라 힘쓰지 말고 일찌감치 공무원시험이나 준비해.”

“왜요?”

“야, 그래도 이게 낫지. 얼굴을 보냐, 그렇다고 아버지 직업을 보냐. 손가락 열 개 달렸음 되고, 그냥 열심히 해서 답만 많이 맞추면 되잖아.”

내가 갸웃거리자 언니는 답답한 듯 덧붙였다.

“야,Y대 나온 내 친구 봐. 나 지방 사대 갈 때 비웃더니, 학점도 높고 토익도 높은데, 응? 걔 지금 뭐하는 줄 알아?”

언니는 중요하다는 듯 힘주어 말했다.

“걔 지금 놀잖아.”

나는 말없이 웃었다. 나는 저런 얘긴 내가 5년 전에도 들은 이야기라고, 그러니까 내가 대학을 졸업하는 5년 후 즈음엔 달라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언니가 안이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는 포스트잇에 글씨를 써서 언니에게 내밀었다.

―근데 저 언니 왜 저래요?

임용고시생 언니가 뒤를 돌아보았다.5급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언니가 책상 위에 엎드려 있었다. 임용고시생 언니가 속삭였다.

“자고 있는 거 아냐?”

나는 포스트잇에 글씨를 적은 후 다시 건넸다.

―우는 거 같은데요.

우리는 서로 고개를 갸웃거리다, 원래 자세로 돌아가 공부를 했다. 독서실 여기저기에 스탠드 불빛이 허약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학원에서 내준 숙제를 하고, 일기를 쓴 뒤 자리에 누웠다.

 

지지징― 전자음이 소란스럽게 아침의 고요를 깼다. 그런데 그때까지 책상 위에 엎드려 있던 언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우당탕탕 총무실로 달려갔다. 나는 언니가 걱정되어 황급히 뒤를 따랐다. 총무실에 도착한 언니는 미친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대다가, 책상 위에 있는 화분을 들어 전축을 향해 힘껏 던져버렸다. 전축을 덮고 있던 유리가 와장창 깨지고, 질겁한 총무는 바닥에 자빠졌다. 갑자기 독서실 전체에 정적이 흘렀다. 상황을 모르는 아이들이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다시 청소에 열중하는 동안― 언니는 자리로 돌아와서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그길로 독서실을 나가버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독서실 총무와 언니는 사귀는 사이였다고 했다. 언니가 임신을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언니의 자리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필기가 돼 있는 국가고시 문제집이 며칠 동안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그날 이후― 독서실엔 아침마다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가 흘러나왔다. 노래는 아주 느리고, 구슬펐다. 나는 이불을 개며, 상쾌한 아침에 듣기엔 그래도 레드 제플린이 낫지 않았나 생각했다. 그것도 자꾸 듣다보니 괜찮았는데, 하고.

 

생각해보니, 노량진에는 머무는 사람보다 지나가는 사람이 항상 많았던 것 같다.혹 오래 머물더라도 사람들은 그곳을 ‘잠시 지나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나도, 재수생 언니도, 민식이도, 총무 오빠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지나가는’ 곳에서의 생활, 관계가 어떤 것들인지를. 나는 길거리나 지하철 안에서 나와 같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여름이었다. 여름은 재수생들에게 가장 힘든 계절이었다. 나는 삼복더위에 연필 들 힘조차 없었다. 처음부터 식욕 같은 건 아예 없던 터라 상관없었지만, 집중력이 급속도로 떨어지는 건 큰일이었다. 나는 아주 젊었지만 허약했고, 달력의 날짜를 지워나가고 답안을 쓰다 졸곤 했다. 날은 점점 더워지고, 체력도 바닥나고 있었다. 주위에선 끊임없이 고득점자에 대한 신화가 떠돌았다. 누구는 하루에 모나미볼펜 세 자루를 쓴다더라, 누구는 목욕탕 갈 때도 목욕바구니에 영어단어를 써서 간다더라 하는 식의 이야기였다. 대부분 터무니없는 이야기였지만― 그때는 이상하게도 그런 말들이 잘 믿겼다. 나는 지쳤지만 열심히 학원에 갔고, 시골에 전화를 하고, 삐삐 진동음에 뒤척이고, ‘님은 먼 곳에’를 들으며 잠에서 깼다. 그리고 마음이 답답할 때면, 근처 사육신묘에 가서 바람을 쐬다 오곤 했다.

 

어느날, 민식이에게서 삐삐가 왔다.민식이는 다급히 한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영아, 줄서기 시작했어!”

나는 학원으로 달려갔다. 강석진의 수강증을 끊기 위해서였다. 보통 수강신청은 당일 아침부터 접수를 시작했다. 그런데 유명강사의 경우 너무 일찍 매진되어버려, 아이들은 접수 전날부터 줄을 섰다. 자칫 줄을 늦게 섰다가는 다음날 아침 ‘마감, 마감, 마감’이라고 빨간 도장이 찍힌 시간표 앞에서 황망해지기 십상이었다. 물론 그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모두가 제 시간에, 천천히 줄을 서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한명이 먼저 줄을 서면, 그때부터 모두가 줄을 서기 시작했다. 내가 학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많은 아이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평소보다 꽤 이른 시간이었다. 나는 북적대는 아이들 틈에서 한 손으로는 빵을 먹고, 다른 한 손으로는 ‘보캐뷸러리’를 든 채 단어를 외웠다.

 

밤이 되자 아이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 돗자리를 준비해온 아이도 있었고, 쪼그려앉은 채 잠든 애도 있었다. 아이들은 친구에게 가방을 맡겨놓은 채 용변을 보러 왔다갔다 했다. 접수가 시작되기까지는 아직 열 시간도 넘게 남았는데 학원 앞은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새벽이 되자 사람들은 더 늘어났다. 줄도 이미 한줄이 아니라 서너 명이 함께 선 매우 뚱뚱한 상태가 되었다. 줄은 학원 뒷골목에서 학원과 거리를 지나 노량진역 앞에 있는 육교 위까지 길게 이어졌다. 대략 천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더이상 책을 볼 수 없어서, 사람들 틈에 끼여 숨죽이고 있었다.

 

아침 여덟시.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학원문이 열린 모양이었다. 이쪽에서, 그리고 저쪽에서 사람들이 밀려왔다. 하지만 저기, 멀리 보이는 문은 매우 좁아 보였다. 나는 옆사람과 앞사람과 뒷사람의 압력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나는 스스로 걷고 있지 않으면서도 몸이 둥둥 떠다니는 진기한 경험을 했다.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지상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 순간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울음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렸다. 내 앞에 한 여자아이가 흐느꼈다.

“밀지 마요. 밀지 마요. 제발.”

옆에 남자아이도 악을 썼다.

“밀지 마. 밀지 말라고 이 개새끼들아아!”

뒷줄에 선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말했다.

“야, 우리 조금만 더 밀어볼까?”

갑자기 한 여자아이가 도로변에 쓰러졌다. 여자애는 탈진한 듯 얼굴이 창백했다. 누군가 여자아이의 책가방을 밟았다. 순간 뭔가 툭, 하는 소리가 나더니 여자아이의 가방이 새하얗게 젖었다. 가방 속에 있던 우유가 터진 모양이었다. 우유는 쓰러진 여자아이 주위로 마치 피처럼 낭자하게 퍼져나갔다. 어디선가 또 고함이 들렸다.

“아니 왜 안돼? 내가 밤샜는데 왜 안돼? 내가 지방에서 올라와서 우리 애 대신 줄섰는데, 돈 두 배로 주면 되잖아!”

나는 자꾸만 주변부로 밀려났다. 나는 수학이 약하니까 꼭 들어야 하는데, 지난달 수업이랑 이어지니까 정말 꼭 들어야 하는데. 하지만 그곳에 있던 천여 명의 사람들에게도 그 수업을 꼭 들어야만 하는 이유가 천 개는 있었을 것이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나를 힘껏 밀었다. 나는 앞사람과 부딪혔고, 머릿속이 핑― 하고 돌았다. 헛구역질이 나며 조금만 더 있다간 그 자리에 푹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허공에서 커다란 손 하나가 불쑥 넘어왔다. 사람들 너머로 아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영아! 내 손 잡아.”

나는 그 손을 덥석 잡았다. 손은 온힘을 다해 나를 잡아당겼다. 나는 그 손을 잡는 순간 이상하게 살 것 같았다.

나는 가까스로 원하는 단과반 수업을 등록할 수 있었다. 내가 현관문을 빠져나올 때에도― 바깥에는 여전히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아이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곳곳에서 비명소리와 시비가 끊이질 않았다. 나는 어마어마한 피로감 속에서 이상한 안도감을 느끼며― 이제 ‘끝났다’고 중얼거렸다. 독서실로 돌아가는 길, 계속 주위를 살펴봤지만, 민식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후로 민식이는 소식이 없었다. 필승 수업에도 나오지 않았고 전화도 없었다. 나는 민식이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다. 민식이에 비해 나는 너무 복잡했고, 이성적이었다. 그래서 자꾸 감정을 판단하고 분석하려고 했다. 나는 민식이의 감정이 일시적인 거라 생각했다. 스무살의 남자아이가 노량진에서 한때 겪는 아주 특수한 병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내 마음을 다스리려 일기장에 진지한 말들을 잔뜩 써놓았다. 그러자 혼자 심각한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나는 괜히 성질이 나서 책상 앞의 표어를 떼어내 찢어버렸다. 구르는 돌엔 이끼가 끼지 않는다. 돌이 무슨 바퀴란 말인가. 나는 곧 흔들리는 자신을 나무라며 좀더 자극적인 표어를 붙여놓았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하지만 인생의 전부도 아닌 공부도 제대로 못한다면 대체 뭘 할 수 있겠는가?

옆에서 포스트잇을 본 언니가 깔깔대고 웃었다.

“이상해요?”

언니는 배를 잡고 웃으며 말했다.

“응. 바보 같잖아!”

나는 영문을 몰랐지만 갑자기 민식이가 미워졌다. 나는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더러운 자식! 삼수나 해라!

곧 냉정을 되찾은 나는 일기장의 다른 면에 깨끗하고 반듯한 글씨로 이렇게 썼다.

―나는 할 수 있다!

민식이에게 연락이 온 것은 그후 몇달이 지나서였다.

 

민식이는 여전히 쾌활했다.민식이는 삐삐 음성사서함에 저 혼자 주저리주저리 쓸데없는 소리를 잔뜩 늘어놓다가 마지막에 수줍게 말했다.

“우리 내일 63빌딩에 가지 않을래?”

나는 서울에 온 지 몇달 만에 처음으로 가슴이 뛰었다.

 

가을의 여의도는 아름다웠다. 나는 내 유일한 화장품인 ‘존슨즈 베이비 로션’을 바르고 여의나루에 나갔다. 사실 데이트는 시시했다. 민식이도 나도 둘 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게다가 우리는 63빌딩이 입장료를 받는지 몰랐다. 민식이는 들어가자고 우겼지만, 나는 그냥 한강 둔치에 있자고 했다.63빌딩 같은 거, 안 봐도 상관없다고. 우리는 한강 앞에 앉아 풍경을 바라봤다. 우리 등뒤로 63빌딩이 든든하게 솟아 있었다. 대한민국의 진보 앞에서― 우리는 정말 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어린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쾌적한, 너무나 쾌적한 바람이 불었다. 나는 조용한 저녁 한강을 바라보며 민식이에게 말했다.

“예전에 너 63빌딩이랑 똑같은 거 봤다고 난리친 적 있지?”

민식이가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그때 너도 거기 있었니?”

강물이 잔잔하게 흐르며 반짝거렸다. 민식이는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내 손을 잡을까 말까 고민했다. 나는 그게 다 보였지만 시치미를 뗐다. 그리고 속으로 ‘얘는 지금 지가 좋아하는 여자애의 발뒤꿈치가, 피로 때문에 바작바작 갈라져 있다는 걸 상상이나 할까?’ 하고 생각했다.

민식이는 화제를 고민하다 생각난 듯 말했다.

“그거 아니? 우리 모의고사 볼 때 가상으로 대학코드 적고 응시하잖아. 성적표에 순위도 나오고.근데 상위권 애들이 치사하게 답안지를 안 낸단다.”

“왜?”

“애들한테 퍼센트상 안도감을 주려고. 방심하게 만든 뒤에 뒤통수치려고 말이야.”

“나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넌 어느 대학 가고 싶어? 난 한의대 가고 싶은데.”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직 모르겠어. 사립대는 너무 비싸고. 국립대는 너무 높고.”

우리는 다시 할 말이 없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왜 연락하지 않았는지 따위는 묻지 않기로 했다. 민식이는 뭔가 한참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우리 대학 가서도 연락하자.”

저편 어딘가 연인의 어깨에 기대 ‘미친년’처럼 웃어대는 여자가 보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민식이가 꾸물대더니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재수생활에서 나한테 남는 건 너뿐인 것 같아.”

민식이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것일까.나는 우리가 대학생이 되면 연락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노량진은 모든 것이 ‘지나가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백만년 만에 해보는 데이트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민식이는 정말 소년다운, 그래서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나는 말을 했다.

“인형 사줄까?”

 

수능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새천년도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세계는 밀레니엄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학원에서는 기출문제 풀이와 총정리가 반복됐다.나는 이따금 대학생활을 상상하다, 알고 있는 인기가요가 너무 없어서 ‘대학 가서 노래시키면 무슨 노랠 부르나’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러곤 ‘99년도에 대학을 다니는 것보단 2000년도에 신입생이 되는 게 훨씬 근사하잖아?’ 하고 스스로를 격려했다.12월엔 임용고시도 있었기 때문에, 재수생 언니도 마지막 혼신을 다하고 있었다. 언니는 스트레스 때문에 한달째 똥을 못 눠 얼굴이 까맸다. 수능 일주일 전, 언니는 포스트잇에 글씨를 써서 내 앞에 내밀었다.

―언제 나가?

나는 언니가 준 쪽지 밑에 조그맣게 답글을 써서 언니에게 보여줬다.

―수능 전날. 바로요.

언니는 새 쪽지를 써서 내게 건넸다.

―시간이 하루라도 더 있으면 좋겠지?

나는 답글을 썼다.

―아뇨. 모든 게 빨리 끝나버렸으면 좋겠어요.

언니가 바로 답글을 달았다.

―나도.

언니는 나를 툭, 하고 건드리더니 마지막 쪽지를 건네주고 등을 돌린 채 문제집을 풀었다. 쪽지에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잘 가.

나는 작게, 그리고 진심으로 중얼거렸다.

“언니도요.”

 

눈이 많이 내리는 날 우리는 모두 시험을 봤다. 나는 정신을 바싹 차린 채, 차근차근 답안지에 마킹을 했다. 시험을 마친 뒤, 나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 며칠 동안 잠만 잤다. 나는 태아처럼 웅크린 채 아무 소리도, 빛도 없는 곳에서 깊은 잠을 잤다. 참으로 오랜만의 숙면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서울의 한 사립대 특차에 합격했다.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 나는 내가 태어난 이후로 세상에서 제일 기뻤다. 대학 입학 후 몇달 동안 삐삐를 살려두었지만 얼마 안돼 휴대폰으로 바꿨다. 민식이도 나도, 서로 연락을 하진 않았다. 어쩐지 나는 그것이 퍽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후로 나는 학부 내내 보습학원에 나갔다. 사립대 등록금을 감당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사이 편견이 많은 원장, 강사들 밥값을 아끼기 위해 자기도 함께 굶던 원장, 대부분의 강사진을 무경력 학부생으로 고용해 최저임금을 주던 원장들과 나는 젊음의 한시절을 보냈다. 한번은 수업중에 이런 방송이 나온 적도 있었다.

“정아영 선생님, 앉지 마세요.”

감시카메라로 강사들 수업을 지켜보는 게 취미였던 원장이, 다리가 아파 잠시 앉아 있던 내게 마이크로 전한 메씨지였다. 나는 학교 시간표와 겹치지 않고 집에서의 거리를 맞추기 위해서, 고만고만한 보습학원 중 차악을 골라야 했다. 학원에 늦지 않기 위해, 저녁을 굶기 일쑤였고 지하철역에서 풍겨오는 달콤한 ‘델리만쥬’ 냄새에 다리가 후들거리기도 했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국철. 자고 나면 돌아오는 아이들의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배차시간이 긴 국철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한 손에 토스트를 들고 지하에서부터 숨이 막히게 뛸 때면, 구두코에 머스터드쏘스와 케첩이 묻어 있곤 했다. 그러곤 속절없이 멀어져가는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며― 대체 나아진다는 게 무엇일까 생각했다.

 

K-59. 오래전 내 책상번호. 그래서 어쩐지 1999년의 나는, 어떤 공간이나 시간이 아니라― 번호 속에 살았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때가 내겐 어떤 떳떳한 한시절로 느껴진다. 그래서 가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때만큼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그때만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때보다― 아는 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계속 원서를 넣을지, 공무원시험을 준비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시간은 자꾸 가고, 나는 또 그 시간 동안 뭘 했냐는 질문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뭔가 될 때까지는 나는 계속 학원에 나가야 된다. 내가 생각했던 나의 경쟁력이란 ‘손가락이 열 개 달린’ 정도의 평범한 조건들이었을까.

2005년 가을. 나는 사람들 틈에 끼여 서울의 불빛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노량진의 이름을 생각했다. 다리 량(梁)자와 나루터 진(津)자가 동시에 들어간 곳.1999년 내가 지나가는 곳이라 믿은 곳. 모든 사람이 지나가는 곳. 하지만 그곳이 정말 ‘지나가기만’ 하는 곳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7년이 지난 2005년 지금도 나는 왜 여전히 그곳을 ‘지나가고 있는 중’인 것일까. 짧은 정차 후, 사람들이 계속 밀려들어왔다. 한 여자가 내 발을 밟고 소리를 질렀다.‘밀지 마요!’ 우주 먼 곳 아직 이름을 가져본 적 없는 항성 하나가 반짝하고 빛났다. 그리고 어디선가 아득히 ‘아영아, 내 손 잡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정신을 차린 뒤,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따져보았다. 차고 깊은 가을밤. 지하철은 여전히 그리고 묵묵히― 서울의 북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곧, 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