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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박민규 朴玟奎

1968년 울산 출생. 2003년 『지구영웅전설』로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한겨레문학상 수상. 소설집 『카스테라』가 있음. kazuyajun@hanmail.net

 

 

 

장편연재3

핑 퐁

 

 

좋지도 나쁘지도

 

눈과 눈 사이, 즉 미간에서 스윙은 끝이 난다. 팔꿈치의 각도는 90도, 라켓의 각도는 85도를 유지한다. 스윙에는 허리가 동반되어야 하고, 허리의 회전은 다리에서 비롯된다. 물의 흐름처럼, 동작은 이어져야 한다. 그것이 스매시다.

 

눈과 눈 사이, 즉 미간에서 스윙은 끝이 난다. 팔꿈치의 각도는 90도, 라켓의 각도는 85도를 유지한다. 스윙에는 허리가 동반되어야 하고, 허리의 회전은 다리에서 비롯된다. 물의 흐름처럼, 동작은 이어져야 한다. 이것이 스매시다.

 

끝없이 동작을 반복했다. 거울을 보면서는 천천히, 세끄라탱과 연습할 때는 쉴 새 없이. 나중엔 각도니 움직임이니, 이것이 스매시니 생각 자체가 엉망으로 뒤엉키고는 했다. 팔꿈치 올리고, 허리, 어떻게 된 거야 허리. 그립을 꽉 쥐지 마, 시선 고정하고, 그래서 아아, 더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머릿속이 간단해졌다. 생각이 없어지고 〈핑퐁〉 하는 소리만이 머릿속을 울리고 있었다. 핑퐁 핑퐁,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 소리가 그래서 참 공평(公平)해졌다고 느끼는 순간 세끄라탱이 소리쳤다. 좋았어, 그게 바로 스매시야.

 

결국엔 폼(form)을 완성하는 거야. 끝없이 계속 가다듬는 거지. 실은 공을 보내는 게 아니라 이쪽의 다듬은 폼을, 자세를 보내는 거야. 알겠니? 탁구에서 졌다는 말은, 결국 상대의 폼이 나의 폼보다 그 순간 더 완성되었다는 뜻이야. 자, 스매시에 있어 너의 폼이 생긴 게 언제였지? 일주일 전이요. 그럼 일주일간 가다듬은 폼이 그물을 넘어오는 거야. 그것을 내가 리시브한다면… 좋아, 쉽게 삼십년 탁구를 쳤다 치자, 그럼 다시 말해 내가 삼십년간 가다듬은 폼이 널 리시브하는 거야. 라켓에 닿은 공은 순식간에 일주일의 폼에서 삼십년의 폼으로 성질이 변해버리지. 그건 이동이야, 공간과 차원의 이동. 오래전 탁구가 와프와프라 불린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지. 즉 한쪽의 폼을 다른 쪽에 전이하는 수단이었던 거야. 그게 탁구의 정체야. 저편의 완성된 폼을 리시브하면서, 또 스매시하면서 이쪽의 폼을 완성해갈 수 있는 거니까. 우주는 늘, 이런 식으로 자신의 폼을 스매시를 전달해왔어. 광활한 보드를 넘어, 시간의 그물을 넘어, 와프(warp)해서 말이야.

 

자, 이번엔 모아이가 스매시를 했어. 역시나 일주일간 다듬은 폼을 나한테 보낸 거야. 나는, 실은 사십오억년이나 리시브의 폼을 다듬어왔어. 좋아, 그런데 공이 지금처럼 네트에 걸리며 떨어진 거야. 사십오억년의 폼으로도 도무지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지. 이럴 땐 모아이가 나에게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어. 그게 뭐지?

 

럭키!

 

그렇지, 바로 이 순간 자신의 득점에 운이 따랐을 뿐이라고 외쳐주는 거야. 탁구의 중요한 예절이지. 인류가 바로 이 경우에 속하는 거야. 인류의 폼이 반격을 당하지 않은 이유는 순간 이런 행운이 따라줬기 때문이지. 그래서 실은, 인류는 다 함께 〈럭키〉라고 외쳐야만 해. 공이 왔던 곳을 향해, 자신들의 자세를 받아주는 곳을 향해서 말이야.

 

럭키!

 

그래서 럭키,라고는 했지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여름이었다. 탁구의 폼을 익히며 열심히 땀을 흘렸고, 정식 탁구화를 샀으며, 적당한 디자인의 유니폼을 모아이와 함께 맞춰 입었다. 정말 한 쎄트구나. 세끄라탱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한 쎄트로, 일주일에 한번씩 폭행을 당했다. 운동도 폭력도 모두가 에누리없이 정직한 것들이어서, 럭키를 외칠 만큼의 운 같은 건 일어날 일이 없었다.

 

그래서 럭키,라고는 못하겠지만 과연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여름이었다. 치수의 빈자리를 종모가 대신했을 뿐이고, 나로선 언제나 변함없는 생활이었다. 불운하다는 건, 이러다 혹 실명을 하거나 부러진 갈비뼈가 허파를 찌른다거나, 할 때의 일이겠지. 당연히 산소와 함께 일산화탄소를 들이마시듯, 나는 적정량의 폭력을 받아들였다. 대신 우리는 그때마다 안마를 받았다. 몸이… 괜찮습니까? 수돗가에서 얼굴을 씻는데 예의 그 노인이 다가와 물었다. 이젠 십만원밖에 못 드려요. 모아이가 말하자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일이었다. 팔월이 되면서 두 사람의 노인이 갑자기 죽었다. 말이죠… 당뇨하고 협심증이었다지요. 어깨를 주무르며 노인이 수군거렸다. 럭키,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아프리카>의 메뉴에선 블루베리가 삭제되었다. 대신 구아바와 파파야가 새로운 메뉴로 추가되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일이었다.

 

왜 없어졌나요? 수입이 힘들어졌대. 블루베리가 히트를 친 덕인지 〈아프리카〉의 벽에는 커다란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파파야를 마시며 나는 뉴스를 보았다. 티베트의 주권문제와 일본의 대지진, 칠레의 장기불황과 아일랜드의 이상 가뭄, 중국의 빈부격차와 르완다의 정치보복이 CNN과 BBC의 다이제스트 편집으로 연이어 보도되었다. 이런 식으로, 인류도 자신의 폼을 가다듬어가는 걸까? 파파야의 과즙을 씹으며 나는 생각했다.

 

우린 럭키한 걸까? 모아이가 중얼거렸다. 이 세계엔 여전히 가뭄과, 학살과, 재해와, 분쟁에 시달리는 인간들이 있지만- 우리는 안전하다. 안전한 나라의 시원한 실내에서, 지금 이렇게 주스를 마시지만 이것이 럭키,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좋지도 나쁘지도, 이를테면 따에 걸리지 않은 마흔한명의 삶을, 육백삼십칠명이나 천팔백오십팔명의 인생을, 그렇다고 오만구천이백사명이나 육십억의 생을 럭키,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봐, 모아이… 델몬트의 마개를 따는 모아이에게 나는 속삭였다. 우리반의 지혜란 애 알지? 안경 쓰고… 임원 같은 거 줄곧 하고, 부모직업란에도 양쪽이 다 변호사라고 쓰고… 말하자면 럭키,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승재 말이야, 실컷 터지긴 했지만 왜 치수한테 덤볐던 유일한 애 있잖아. 우리보고 가만있지 말라고, 그래서 계속 당하는 거라고 말한 놈… 그런 놈은 럭키한 걸까? 그럼 우리반 앞줄의 병량이 같은 애는… 걘 여태 한번도 지적 같은 걸 당한 적이 없어. 선생들 눈에도 치수 눈에도 띈 적이 없고… 숨어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그래. 말하자면 그런 건 럭키,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지혜나 그런 애들… 말하자면 그런 애들을 라켓으로 때리면, 때려서 차례차례 우주로 보낸다면 어떤 리시브가 돌아올까? 스매싱해서

 

달라이 라마를 추종하는 티베트의 승려를

무너진 건물에 하체만 깔린 일본의 시장상인을

살면서 한번도 양심을 판 적이 없지만, 백칠십명의 후투족을 쏴죽인 르완다의 투치족 반군을

남동생을 성적으로 학대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가뭄 피해를 입은 아일랜드의 농부를

치수를

태교를 위해 수족관에서 돌고래의 고주파를 배에 쬐고 있는 칠레의 임산부를

가사복무(家事服務)란 유니폼을 입고 걸레질을 하고 있는 중국의 파출부를

6개월 된 칭을 데리고 산보하는 프랑스의 노부부를

조지 부시를

힐러리 클린턴을

콩고의 밀림에서 흰개미를 먹고 있는 산(山)고릴라를

지금 여기서

파파야와 델몬트를 마시고 있는 우리를

 

날려 보낸다면 어떤 리시브가 돌아올까?

글쎄… 아무튼 럭키,라고 외치긴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래서, 그래서 럭키-한 걸까?

그러고 보니, 아무래도.

 

방금 들렸어. 뭐가요? 화면의 저 남자 말이야… 하체가 깔린 저기 저 사람… 지금 속삭였어, 구조대원에게… 무너진 기꼬망 박스 뒤에 아내가 있을 거라고… 속삭였어. 힘들지만 최선을 다해 계속 속삭이고 있어. 그걸 어떻게 들어요? 모르겠어, 하지만 들려. 그리고 중얼중얼 세끄라탱은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봐요, 왜 그래요? 생각나려 해… 나는 지금… 낮말을 듣는 새. 나는 중간자, 탁구계의…

 

세끄라탱은 점점 더 맛이 갔는데, 멀쩡한 면모를 보이다가도 종종 그렇게 〈변신〉을 하고는 했다. 혼잣말을 하고, 시선이 멍해졌지만 나름 일련의 맥(脈)이 있는 변신이었다. 낮에는 〈낮말을 듣는 새〉, 즉 밤이면 〈밤말을 듣는 쥐〉. 티스푼이라도 구부리며, 우리는 대충 그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즉 새 같기도 하고 쥐 같기도 한 세끄라탱의 얼굴에서 그때마다 새나 쥐의 한 부분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아서였다.

 

콜록콜록

 

세끄라탱의 두 아이를 만난 것은 공사(工事)가 한창일 때였다. 파충류인지 조류의 뇌인지를 가졌다는 쌍둥이가 가게를 찾아왔다. 아빠, 배가 고아요. 기침이 심한 두 아이는 팔월인데도 콧물을 흘리고 있었다. 형은? 형은 오저네 나가어요. 건물 이층의 중국집에서 우리는 함께 중국냉면을 먹었다. 두 아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인상이었고, 다만 심하게 새와 쥐를 닮은 얼굴이었다. 와아. 스푼을 구부리는 모아이를 보고 두 아이는 몹시 즐거워했다. 돌아가는 아이들에게 세끄라탱은 오천원씩을 쥐여주었다. 콜록콜록, 몹시 새 같은 얼굴들의 기침을 보며 내가 물었다. 조류독감인가요? 아니, 여름감기야. 중국집에서 받은 키체인에 열쇠를 끼며 세끄라탱이 대답했다. 혹시

 

엄마가 없나요?

엄마는… 없었지.

 

〈랠리〉의 옆 점포는 비어 있었는데, 세끄라탱이 마저 세를 얻어버렸다. 공사가 시작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마루바닥을 깔고, 쇼윈도에 차양을 치고, 결국 일주일 만에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연습실이 완성되었다. 우리로선 럭키,한 일이었지만 세끄라탱으로선 부담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걱정 마, 여기 상권이 죽은 지 오래라 거의 공짜에 얻은 거니까. 탁구대의 수평을 조절하며 세끄라탱이 얘기했다. 이래저래 겸사겸사야. 나도 오랜만에 탁구가 치고 싶어졌거든. 날이 너무 더우니까, 또 벌판은… 너무 머니까.

 

벌판은… 그래서 한동안 가지 않았다. 날씨가 너무 무더웠고, 간다 해도 그래서 뾰족이 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문득, 예컨대 학원의 수업을 받다가, 또는 고오 하고 비행기가 날아가는 걸 올려다보다가, 또 랠리를 끝내고 예컨대 리치 같은 〈아프리카〉의 새 메뉴를 마시다가- 나는 문득 벌판이 보고 싶었다. 벌판의 소파가, 탁구대가 보고 싶었다. 잘들 있겠지, 물을 수 있다면 안부 같은 걸 묻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치수의 전화를 받았다. 잘 있었냐? 안부 같은 걸 묻고 난 후, 왠지 TV의 쇼프로나 드라마… 그런 것에 대한 견해를 배터리가 떨어질 때까지 실컷 늘어놓았다. 그리고 뚝 전화가 끊어졌다. 다시 걸려온 전화를 받은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여긴 J시(市)야.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뭐 말해봤자겠지만… 아무튼 한번 놀러 와라. 근처에 바다가 있어. 달도 가끔 너 생각이 나나봐,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래서

 

더욱 무서웠다. 무서워, 그건 진짜 무섭더라구. 편의점의 사장은 최근의 외화씨리즈에 푹 빠져 있었다. 하루는 메트로폴리스의 중앙 분수를 쳐다보며 한참이나 잡담을 나누었다. 그러니까 어느 누가 범인이 아니라 모두가 다 공범이란 얘기잖아, 그게 섬뜩하더라구. 첨엔 그래서 이해가 안 갔지, 주인공이 범인일 거라 당연히 생각했으니까… 나 참, 그러니까 모두가 공범이고 모두가 피해자란 얘기잖아, 하고는 손수건을 꺼내 연신 땀을 닦았다. 그래 공부는 잘되냐? 잘, 된다고 우리는 대답했다. 사모님이 요즘엔 통 안 나오시네요. 모아이가 물었다. 그러냐? 하고 사장은 환하게 웃었다. 이상하게

 

그리고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럭키,한 걸까? 〈랠리〉를 향해 걸어가며 모아이가 중얼거렸다. 뭐가? 저 아저씨 말이야. 왜? 지난달에 채팅방에서 자기 부인을 죽일 거라고 했거든. 그래?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 있거나 죽거나… 좋지도 나쁘지도, 혹은 럭키하지도. 사장은 살이 쪘고, 이틀 전 고가(高價)의 청소로봇을 샀다고 했다. 나는 막연히, 부인의 시체를 청소하는 고가의 청소로봇을 상상했다. 살이 찌는 느낌이었다.

 

로봇이다.

 

<랠리>에 탁구로봇이 들어온 것도 8월의 일이었다. 연습용이야. 신기해하는 우리에게 세끄라탱은 로봇의 작동법을 가르쳐주었다. 드라이브의 조절까지, 갖가지 공에 대한 리시브를 익힐 수 있어. 핑퐁 핑퐁, 우리는 교대로 로봇의 공을 받는 연습을 했다. 세끄라탱을 상대로 스매시를 할 때와는 달리, 참으로 생각 없고 반사적인 랠리가 이어졌다. 다르지? 달라요. 조건반사만으로도 탁구를 치는 건 가능하단다. 조건반사만으로도 삶을 사는 일이 가능하듯이. 그래서 실은 비둘기도 탁구를 칠 수 있는 거란다. 비둘기가요?

 

물론이지. 사십년 전에 나는 실제로 비둘기와 공식시합을 벌인 적이 있었어. 세명의 참관인이 지켜봤고 21대 19 박빙의 승부였지. 누가 이겼나요? 비둘기의 승리였단다. 탁구를 치는 비둘기를 길러낸 사람은 스키너란 이름의 심리학자였어. 그는 생물의 행동이 자극의 통제와 강화에 의해 형성된다고 믿었지. 그래서 〈스키너 박스〉라는 실험공간을 고안해낸 거야. 조작된 조건 속에서, 이를테면 쥐가 지렛대를 누를 때마다 먹이가 떨어지고 그걸 먹을 수 있게 하는 거야. 그럼 지렛대를 누르는 동작에 있어선 정말 슈퍼한 쥐가 길러지는 거지. 탁구를 치는 비둘기도 그렇게 해서 탄생한 걸작이었단다. 박스 안의 구조는 간단해.

 

1. 반응도구(지렛대, 열쇠, 원판)

2. 강화매개물(먹이, 물)

3. 자극요인(빛, 큰 소리, 작은 전기충격)

4. 실험유기체(쥐, 비둘기)

 

그건 마치… 세계(世界)잖아요. 아무튼 그 시합이 내 탁구인생에 있어 전환점이 된 건 사실이란다. 아, 이젠 못 당하겠구나. 먹고살고자 하는 이 조건반사를… 내가 당해내지 못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지. 그 비둘기는 어떻게 되었나요? 어떻게 되긴,

 

그렇게 살다 죽었지.

 

아아, 오늘은 한번도 마셔보지 않은 인삼을 마실래. 거봐, 아프리카에서 주스를 마시는 것도 이젠 강화(强化)된 행동이 된 거야. 이 로봇과의 랠리를, 그래서 몸으로 익혀둘 필요가 있어. 그 시합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도 이와 비슷한 거니까. 로봇은 지금의 인류가 완성해가는 또 하나의 폼이야. 진짜 탁구를 치고 싶다면, 힘들더라도 이 폼에 대한 리시브를 익혀야만 해.

 

진짜 탁구를 논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모아이와 나의 랠리는 눈에 띄게 길어져갔다. 우리는 더욱 탁구에 열중했고,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서로의 폼을 천천히 공을 들여 다듬어갔다. 밤에는 전화나 채팅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클럽에선 단계가 달라 만나기가 힘들었지만, 치수의 호출에서 벗어난 전화기가 어느새 훌륭한 연결의 끈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17일이야? 아니,19일이야. 이번엔 트레이드 빌딩의 옥상에서 모임을 갖기로 했어. 트레이드 빌딩? 그 72층 건물을 얘기하는 거야? 응, 멤버 중에 거기 경비가 있는데 몰래 옥상을 이용할 수 있게 해준댔어. 벌판에서 받은 신화사의 공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달력의 19일에 ×표시를 했다. 넌 몇번째 참가야? 거의 개근했으니 아홉번째 정도 되겠네… 넌 처음이지? 처음이야. 바람처럼 그날 핼리가 왔으면 하는 생각을, 나는 했다. 그런데 모아이, 벌판에 가보고 싶지 않아?

 

그래서 다음날 우리는 벌판을 찾았다. 오랜만이네. 그러게. 주상복합의 대형건물은 어느새 거의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탁구대는, 소파는, 캐비닛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처음 그곳에 앉아 하늘을 보던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깊숙이 소파에 몸을 묻었다.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대신,

 

럭키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모아이… 혹시 말이야… 세끄라탱에게서 옛날 탁구공 같은 걸 받았니?

 

받았어.

 

럭키,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9볼트

 

마음가짐이 중요해. 한달에 한번씩, 그렇게 믿고 순수하게 기다리는 거야. 스키너의 박스를 뜯어서 뒤집어놓은 거랄까, 아무튼 자극체인 핼리는 오지 않아. 강화매개물도 스스로 포기해, 반응도구도 없어, 그런데도 강화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야. 도심을 향한 버스에서 모아이가 속삭였다. 약간, 모서리가 닳은 둥근 달이 우주가 보낸 탁구공처럼 차창 너머에 떠 있었다. 리시브할 수 있을까. 뭘? 핼리가 온다면 말이야.

 

인원은 고작 네명이었다. 약속한, 건물 외곽의 주차장에서 우리는 빌딩의 경비인 멤버를 기다렸다. 덜컹, 비상구가 열리더니 잠시 후 사내 하나가 얼굴을 내밀었다. 핼리를 기다리러 오신 거죠?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를 따라 어두운 통로를 걸은 지 십여분, 화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른 뒤 다시 좁은 복도를 오분쯤, 기계실 같은 곳과 두 개의 비상구를 지나 우리는 다시 비상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덜컹, 마침내 도착한 트레이드의 옥상은 벌판,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광활한 곳이었다. 소리를 지르셔도 상관없습니다. 두 개의 커다란 원이 그려진― 헬기착륙장으로 우리를 안내한 후 사내는 뭔가 가져올 게 있다며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고공(高空)의, 춥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여름밤이었다.

 

잠시 후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였다. 사내는 등에 누군가를 업고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와서야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캐서린이었다. 훌쩍훌쩍 사내는 울고 있었다. 모임을 시작합시다. 일행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중년의 신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누군가 기도문 같은 걸 읊기 시작했다. 핼리를 대신해, 순은(純銀)의 달빛이 헬기처럼 천천히 착륙장의 중심으로 하강해왔다. 리시브가 가능할까? 허공을 응시한 채,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제 각자 핼리가 온다 생각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되는 거야. 멸망의 밤이니까… 뭐 사과나무를 심어도 되는 거고, 그건 각자의 자유지. 모아이가 속삭였다. 곧 자신만의 세계에 사람들은 몰입하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파악하며 주변을 서성이는데 그럼, 하고 모아이가 자리를 떴다. 착륙장의 원호(圓弧)를 가로질러, 모아이는 북극 정도로 느껴지는 옥상의 외벽까지 달빛을 받으며 걸어갔다. 핼리가 올 수도 안 올 수도 있는 하늘을 쳐다보며, 그래서 나는 혼자가 된 느낌이었다.

 

중년의 신사는 비상구가 있는 벽 앞에서 큰 소리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고함과 흐느낌을 왕복하는 기도의 주파수가 FM처럼 선명하게 모두의 귀에 수신되었다. 잠시 후 그가 벽에 머리를 찧기 시작했다. 스키너 박스를 뛰쳐나온 쥐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렴 멸망의 밤이었다. 트레이드의 경비는 물탱크가 설치된 구조물 앞에서 옷을 벗고 있었다. 준비해온 물수건으로 캐서린을 잘 닦은 그는, 잔뜩 젤을 바른 자신의 성기를 세워 주위에 아랑곳없이 兒스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오직 핼리만이 모두를 진정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라리 오늘밤이 종말이기를, 나는 대충 빌어주었다. 격하게, 달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격하게, 캐서린도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이 종말이라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에 빠져들었다. 손톱을 마저, 끝까지 물어뜯을까. 치수에게 전화를 걸어 배터리가 떨어질 때까지 쇼프로와 드라마의 이야기를 늘어놓을까. 이 새끼가 미쳤나?라고 한다면, 닥치고 끝까지 들어 이 새꺄! 고함을 친 후 다시 조근조근 드라마의 이야기를 늘어놓을까- 생각 끝에, 나는 탁구를 치기로 결심을 했다.

 

착륙장의 중심에서 나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어깨의 폭보다 조금 넓게 다리를 벌리고, 라켓을 상상하며 오른손으로 가볍게 공기를 움켜쥐었다. 왼손에는 신화사의 공이, 그 공 같은 상상력이 공기와 함께 뭉쳐진 기분이었다. 나는 스윙을 시작했다. 눈과 눈 사이, 즉 미간에서 스윙은 끝이 난다. 팔꿈치의 각도는 90도, 라켓의 각도는 85도를 유지한다. 스윙에는 허리가 동반되어야 하고, 허리의 회전은 다리에서 비롯된다. 물의 흐름처럼, 동작은 이어져야 한다. 그것이 스매시다.

 

눈과 눈 사이, 즉 미간에서 스윙은 끝이 난다. 팔꿈치의 각도는 90도, 라켓의 각도는 85도를 유지한다. 스윙에는 허리가 동반되어야 하고,허리의 회전은 다리에서 비롯된다. 물의 흐름처럼, 동작은 이어져야 한다. 이것이 스매시다- 눈을 감은 채 나는 계속 탁구에 열중했다. 땀이 나기 시작했다. 땀이 일으키는, 공기와 피부 사이의 윤활작용을 느끼며 나는 거듭 나의 폼을 가다듬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다듬는 거야. 핼리가 온다면, 이 라켓으로 최선을 다한 리시브를 해줘야지- 나는 생각했다, 그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혹시, 탁구냐?

 

눈을 뜨니 또다른 멤버 하나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짧은 머리를 희게 탈색한 이십대 초반의 형이었다. 예,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춰버려서 미안.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는 음악을 듣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양 귀에 각각 세 개, 다섯 개씩의 이어링을 하고 있었고, 이어폰이 파묻혀 보이지 않을 만큼 퉁퉁하고 살집이 많았다. 흠 흠, 탁구라면 나도 쳤었지. 초등학교 때 살을 빼려고 말이야, 물론 실패했지만 실은 잘할 수도 있었어… 에애 에애애에. 어때, 넌 성공했냐? 하긴 살을 뺀다고 다 되는 건 아니지만…

 

에애 에애애에

 

라고 하는 것이었다. 에애 에애애에를 할 때마다 그는 네모난 건전지를 꺼내 그 양극(+–)을 자신의 혀끝에 지긋이 대곤 했다. 그리고선 에애 에애애에,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기, 따갑지 않나요?라고 묻자 그가 불쑥 건전지를 내밀었다.

 

이건 9볼트야.

 

과연 건전지에는 9볼트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지만, 나는 조금 난감한 기분이었다. 느끼기에 따라, 그것은 분명 8월의 밤하늘이 잠시 소강상태에 빠질 정도의 거대한 전압이었다. 이렇게 해본 적 있니? 그가 물었다. 아니오. 다 똑같은 전지라고 생각하겠지? 그렇지 않아, 메이커에 따라 맛이 다 다르지. 에너자이저도 알카라인도… 뭐 가장 좋아하는 건 로케트지만 에애 에애애에.

 

넌 왜 핼리를 기다리냐? 알아서… 뭐하려고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이런저런 대답을 되는대로 둘러댔다. 글쎄요, 핼리가 오면… 드라마나 쇼프로, 그런 거… 또 인간은… 그래도 누군가는 살아남겠지만… 그 전에 지구가 어떻게 될래나. 아무튼…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저는 두개골에 금이 간 적이 있어요. 맞아서… 뭐 그런 것보다… 그런 짓을 해놓고도 드라마를 보잖아요. 시청자 의견을 남기고, 또 모여서 너도 그거 봤냐? 모여서 얘기하고… 막, 비슷한 척하고… 그런 건 뭐랄까… 실은 자기 생각만 하면서, 그렇잖아요. 그런 거… 누군가 살아… 남으면 또 마찬가지겠지만… 글쎄요, 모르겠어요. 그래도 최소한

 

학교 같은 건 없어지지 않을까요?

 

그렇구나. 하고 그는 에애 에애애에, 고개를 떨며 끄덕였다. 그런데 그건… 왜 하는 거예요. 아, 이거? 귀 뚫은 걸 처음 보나보구나. 글쎄 개인적으론 어울린다 여기는데… 아무래도 난 크롬 계열이라고 여기거든. 금속 알러지가 없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하긴 바보들은 내 피부가 연해 보인다고도 하는데 천만의 말씀이지. 에애 에애애에. 아니, 그거 말고 그거요. 이거? 그리고 그는 건전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에애 에애애에. 에애 에애애에. 그리고 연거푸 몸을 떨며 그것을 혀에 문질렀다. 이러면 확실히

 

기분이 좋아.

 

씩씩 숨을 쉬며 그가 미소를 지었다. 맛이 갔구나, 생각했는데 그가 물었다. 너 지금 날 이상하다고 여기는 거냐? 조금 전까진 이상했지만, 이젠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뇨, 그럴 리가요. 그래, 너와는 좀 얘기가 될 것 같구나. 바보들은 내버려두고 우린… 그냥 얘기나 좀 나눌까? 뭐, 싫으면 싫다고 얘기하고. 조금 전까진 싫었지만, 이젠 싫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아이를 한번 바라본 후, 나는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애 에애애에. 도합 여덟 개의 이어링이, 파르르 진동을 시작했다.

 

늘 모임에 나오긴 해도 말이야, 저런 바보들하곤 생각이 다르단 말씀이지. 저 새끼 봐, 저게… 뭐하는 짓이냐고. 에애 에애애에. 가서 꼬리뼈를 내지르고 싶긴 하다만 참는 거야. 열쇠를 저 새끼가 갖고 있으니까… 나가는 길도, 어차피 그래서… 에애 에애애에. 뭐, 미안하지만 난 앞뒤 생각 없는 그런 놈이 아니거든. 저기 저 녀석은 너 친구지? 여기서 한… 다섯 번은 본 거 같다, 저 새끼도 저거… 저렇게 돌아앉아 뭐하고 있는지 아냐? 에애 에애애에. 밤새 숟가락 구부리고 있어. 나 참… 잘난 척은, 저 새끼. 유리겔라한텐 잽도 안되면서… 그거 아냐? 다들 문제있는 놈들이란 거. 문제 많아. 아무튼 다들 핵심을 놓치고 있다면 실례의 말씀일까. 에애 에애애에.

 

저 새끼들의 문제가 뭔지 아니? 다들 세상이 잘못된 거라 생각한다니까. 나 참, 이쪽으로 와봐. 여기… 전망이 한눈에 보이니까. 에애 에애애에. 에애 에애애에. 자, 미안하지만 세상은 하나도 잘못되지 않았습니다요. 세상이 왜, 어쨌다는 거지? 저걸 봐. 돌을 갈아 사냥이나 하던 우리가 어떤 세계를 만들었는지. 도로를 만들고, 구역을 만들고, 콘크리트를, 설계와 건축을, 응? 항만항공을 건설하고, 체계적인 무역을 하고, 에애 에애애에. 법률과 조례… 응? 국제법을 만들고, 자동차와 저 건물들을 봐, 저 속에 전부 전기와 인터넷이 공급되고 상수도와 하수도가 연결되어 있어. 저 바보들이 도시의 지하는 어떤 걸까, 상상이나 한 적이 있겠냐구? 흥, 투시도를 본다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을 걸? 이게 전부가 아니잖아. 공항과 공항 사이를, 나라와 나라를, 대륙과 대륙 사이를 매일매일 응? 에애 에애애에. 그런데, 지금 듣고 있습니까?

 

지구라는 곳이 말이에요, 응? 세균이 참 번식하기 좋은 곳입니다요. 알지? 그 정도는 배웠을 테고. 바이러스는… 운석에도 막 묻어들어오고 그래요, 중력, 또 중력하고도 인간은 얼마나 싸워왔냐고. 추락이 일상다반사로 일어나는 곳이 지구란 말씀이야. 에애 에애애에. 응? 암과 에이즈, 뭐 위염이나 궤양, 설사, 장염, 고혈압, 동맥경화, 응? 뭐야… 또 저혈당, 뇌졸중, 결핵, 후두염, 에애 에애애에. 천식, 페스트, 콜레라, 장티푸스… 하여간에 많습니다. 또 뭐? 파라티푸스, 디프테리아, 폴리오, 홍역, 풍진, 간염, 파상풍, 말라리아, 인플루엔자, 비브리오 패혈증, 공수병, 레지오넬라, 렙토스피라, 쯔쯔가무시… 에애에에 애 에애애에에애. 예? 그러니까 금속 알러지도 있고 한 것들이… 평균 수명 칠팔십세까지… 예? 뭐 실례지만,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의학과 약학의 종사자들이 지금도… 에애 에애애에. 하물며 피를, 서로 피를 나눠가며 서로의 삶을 보존해주고 있습니다요. 민간인들조차도, 그런 인류의 힘을 터득하고 있다는 말씀. 말하자면 에애 에애애에.

 

인더스트리얼, 인더스트리얼 아냐? 아시냐구요. 산업이 그냥 발전한 게 아니잖아. 말하자면 동력도 운송수단도 모두 그냥 얻어낸 게 아니라는 거야. 봐, 작은 바퀴 하나에서 응? 어떤 결과들을 도출했는지. 넌 식기세척기가… 실은 얼마나 복잡한 작동원리를 가진 건지 아십니까? 예? 에애 에애애에. 산업과 기업이 없었다면 인구의 절반은 굶어 죽었을걸? 아마도 말입니다,그렇다고 나머지가 무사해? 어림없지, 어림없어, 어림없습니다. 에애 에애애에. 제약도 의료기관도 산업이 없었다면 말짱 꽝이야. 너는 간암, 나는 위암, 저 바보들 전부 이미 죽은 목숨들. 뭐 지극히 운 좋은 인간들만 살아남겠지만… 그래요, 경쟁은 줄고 하겠지만 스트레스는 아마 더할걸? 넌 야생에서 쥐와 싸워 이길 자신 있나요? 그래, 말은 잘하겠지. 하지만 난 없습니다. 에애 에애애에. 이거… 이거… 전지가 다 되었네요.

 

뒤적뒤적. 하아, 이건 산요 겁니다. 그래도 오늘은 스페셜 데이니까, 로케트… 찾았습니다요. 하아, 하아. 즉 내 말은… 저것들은 전부 얼간이들이란 거야. 뭐 실례의 말씀입니까? 과연 그렇다면 죄송하지만, 어쨌거나 뒤졌다는 겁니다. 예, 경쟁에서… 그렇다고 누가 감금을 하냐, 아님 불이익을 줬냐구? 응? 전기도 인터넷도, 교육의 기회도, 하다못해 로또를 살 기회도 주지 않았냐 이겁니다. 에애 에애애에. 염치가… 인간이 염치가 있어야지. 발전(發電)을 해본 적 있습니까? 자연상태에서 개인의 힘으로 한번이라도 전기를 만들어봤냐 이 말씀이야, 내 말은… 9볼트도 만들어본 적 없는 것들이 좀 뒤처졌다 싶으면 에? 에애 에애애에. 220볼트를 밥 먹듯 쓰면서 인류가 어쩌니 세계가 어쩌니… 저러고 앉아서 핼리가 와서 다 쓸어야 된다는 둥 뻘짓을 해대니 난들 미치겠지요. 그래서 내가… 얘기하는 겁니다. 할 일은 하자고, 응? 지금 듣고 있냐?

 

좀 전쟁을 하면 어때, 분쟁이니 억압이니… 인간의 이기니, 집단의 폭력이니… 좀 있으면 어떠냐 이거야, 이 정도의 씨스템을… 응? 위성을 사용하게 해주고 하는데, 학살? 범죄? 좀 있으면 어떠냐는 겁니다. 에애 에애애에. 유엔을 만들고요, 유네스코를 만들었어요… 인류는… 하아, 하아, 내려봐 저 도시를… 그리고 감히 세상이 어떠니…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에애 에애애에. 에애 에애애에. 에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고, 빨리 밤이 지나거나 핼리가 정확히 우리 머리 위에 떨어져야 살 것 같았다. 큰 키는 아니지만 허연 살집의 거구가… 눈앞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덥네… 왜 이리 덥지? 주저앉은 그가 수건으로 땀을 닦기 시작했다. 하아, 하고 에애 에애애에 하는 백발(白髮)의 그가- 그래서 순간 살찐 비둘기처럼 보였다.넌… 그래도 말귀가 통하는구나. 하아, 그리고 뒤뚱 몸을 일으킨 그가 가방을 뒤져 뭔가를 내밀었다. 자, 이거 너 줄게. 선물이야. 어쩔 수 없이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한 장의 작은 티켓이었다.

 

가족오락관 방청권이야.

 

가족오락관 알지? 예,라며 나는 말끝을 흐렸다. 가봐, 재밌을 거야. 티브이로 볼 때랑은 또 다르다니까. 티켓을 잘 접어 주머니에 넣은 후 나는 비로소 주위를 돌아볼 수 있었다. 어둠속에서, 여전히 멤버들은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부스럭 덜그럭 또다시 건전지를 뒤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여전히 에애 에애애에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핼리는 오지 않았고, 여전히 달은 지구를 떠나지 않았고, 여전히 내 마음은 좋지도 나쁘지도 럭키,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형… 형은 왜 핼리를 기다리는 거예요? 에애 에애애에. 에애 에애애에. 어둠속에서 무언가 허옇고, 웅크리고, 괴로운 것이 9볼트에 계속 감전되고 있었다. 이윽고 작은 목소리가 수명을 다한 수은(水銀)의 전해질처럼, 희미하게 새어나왔다.

 

살이 빠지지 않아

 

알겠어? 나도… 잘하려고 했지만… 안 빠지는 걸 어떡해, 너 지금 돼지라고 생각했지 이 새꺄… 크롬 링 같은 거 웃기지도 않는다고… 이 개새꺄… 에애 에애애에. 에애 에애애에. 허옇고, 웅크리고, 괴로운 것이― 그리고 마구 자신의 혀에 건전지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에애 에애애에 에애, 애.

 

그리고 순간 주위가 고요해졌다.8월의 밤하늘이 또다시 소강상태를 보이더니, 꿈틀- 한번 크게- 허옇고, 웅크리고, 괴로운 것이- 꿈틀- 하고 쓰러져 정지한 후에야, 서서히 운행을 재개하는 느낌이었다. 이봐요, 예? 허옇고, 드러누웠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나는 뒤흔들었다. 아무리 흔들어도 그것은 더이상 웅크리거나 괴로워하지 않았다. 진득한 침이 묻은 두 개의 전지가 크고 두툼한 손의 언저리에서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이봐요. 나는 계속 그것을 흔들었다. 여전히 그것은 움직이지 않았고, 대신 어딘가 모르게 살이 좀 빠진 듯한 느낌이었다. 에애 에애애에, 나는 소리쳤다. 마구, 소리치기 시작했다.

 

죽었어. 트레이드의 직원이 중얼거렸다. 삼십분이나 심장을 압박해보고, 인공호흡과 응급처치 같은 걸 해보았지만 끊어진 숨은 돌아오지 않았다. 죽었어. 다시 직원이 중얼거렸다. 중년의 신사가 다시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없이 우리는 허옇고, 드러누웠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았다. 점(点), 점(点) 탁구공 같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쩌지? 응? 어쩌냐구? 알몸의 직원이 빗속에서 중얼거렸다.

 

이걸 계속 혀에 문질렀어요. 왠지 울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울면서 건전지를 보여주었다. 허옇고, 웅크리고, 괴로워하던 것의 가방을 뒤지자 수십 개의 9볼트 건전지가 한켠에서 쏟아졌다. 미친 새끼, 직원이 다시 중얼거렸다. 비는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병렬로, 그리고 직렬로 이어지는 빗줄기가 닿을 때마다 나는 연이어 감전되는 기분이었다.

 

던지자

 

직원이 얘기했다. 직원은 멍하니, 캐서린을 닮은 표정으로 불 꺼진 도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부 내 책임이 돼버리잖아… 어차피 누구 잘못도 아니고… 그러니 도와줘… 당신들도 그게 편할걸? 아아… 72층이야… 72층이라구… 주변엔 30층도,20층도 수두룩하게 많아. 어디서 떨어졌는지 알게 뭐야… 안 그래? 잘 봐, 여긴 옥상부에 경사가 있어… 미끄럼처럼 한참을 타고 벗어나서 떨어질 거야… 방향을 알기란 정말 어렵지 않겠어? 도와달라구… 나… 내가 무슨 잘못이야… 핼리가 왔다 치고 도와달란 말이야…

 

던지죠

 

입을 연 것은 모아이였다. 그리고 우리는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각자의 물품을 빠짐없이 챙기고, 널려 있던 건전지들을 빠짐없이 주워담았다. 찌릿찌릿 손끝에 그런 느낌이 전해졌지만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니들은 다리를 잡아. 허옇고, 드러누웠고, 움직이지 않는 것의 등에 단단히 가방을 조여맨 후 직원이 소리쳤다. 하나, 둘, 셋 했지만 겨우 허리 높이가 고작이었다. 이 새끼 엄청 무겁네, 직원이 중얼거렸다. 한발 한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이라도, 부디 핼리가 와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생각했다.

 

셋에 미는 거다. 상체를 외벽에 걸쳐놓은 후 직원이 외쳤다. 그리고 하나 둘, 하는 순간 스르륵- 허옇고, 무겁고, 걸쳐져 있던 것이 저절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러다 급격히 그것은 아래로 떨어졌다. 붕. 그리고 그것은 날았으며, 순식간에 비둘기만큼 작아졌고, 이어 탁구공 같은 것이 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지구에서 오로지 탁구공만이 낼 수 있는 소리가 멀고 먼 아래에서 들려왔다.

 

경쾌한 소리였다.

 

 

 

 

실버스프링의 핑퐁맨

 

우주의 대부분은 빈 공간이래.

 

모아이가 말했다. 어떻게 생각해? 뭘? 태양의 크기를 유리구슬 정도로 가정했을 때 말이야… 우리 은하에서 가장 가까운 항성도 200km 정도 떨어져 있는 셈이래. 그래서? 평균적인 크기의 은하는 천억 개 정도의 별들로 이루어져 있고, 말하자면 천억 개의 유리구슬이 서로 200km의 거리를 두고 모여 있는 거지. 그 사이는 전부 빈 공간이란 얘기고.

 

어쩌라는 걸까?

 

그런데 요는, 그런 은하가 또 천억 개 정도 모여 있다는 거야. 이 우주에는 말이지. 어때,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 뭐가? 지구 같은 거 말이야… 거기서 어떻게 살든… 아니, 그런 게 정말 있기나 한 걸까? 이 지구나… 말하자면… 우리 같은 거 말이야.

 

정말… 어쩌라는 걸까?

 

어제는 라디오를 듣는데 말이야, 주말 퀴즈인가 그런 거였어. 월 장원을 놓고 결승을 치르는데 한우(韓牛)의 부위별 명칭에 대한 문제가 나온 거야. 지방이 적고 육질이 부드러운 배의 최장근을 이르는 명칭이구요, 비육이 잘된 한우의 이 부위는 대리석 무늬의 지방을 볼 수 있다 해서 더욱 유명합니다. 한우의 특수부위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이 살의 명칭은 뭘까요? 보기 나갑니다. ①번 부챗살 ②번 토시살 ③번 역마살 ④번 채끝살. 자, 정답은? 정답! 하고 선수를 친 것은 3주 연속의 우승자였지. 그가 외쳤어. ③번 역마살!

 

왜 그랬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는 거야. 역마살이라니… 그런가 하면, 아이슈타인 같은 인간은 E〓mc²과 같은 공식을 만들어내기도 해. 어쩌라는 걸까? 태양을 구슬 크기라 가정해도 생긴다는 200km의 거리감, 그런 게 느껴지지 않아? 스딸린은 줄잡아 이천만명을, 캄보디아의 폴 포트는 이백오십만명을 학살했다고 해. 그런가 하면 또 달라이 라마 같은 인간은 수행중 달려드는 모기를 죽일 수 없을 때가 가장 괴로웠다고 말하는 거야. 나 참, 역시 그 정도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문제잖아.

 

어쩌라는 걸까? 그리고 그 사이는 전부 빈 공간이 아닐까,라는 게 내 생각이야. 즉 너와 나 같은 인간들은 그냥 빈 공간이란 얘기지. 그렇지 않을까? 즉, 보이지 않는 거야. 멀리서 보면 그저 아무것도 없는 캄캄한 공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이렇게 존재해. 그럼 우린 뭘까? 보이지도 않고, 아무 존재감 없이 학살이나 당하고… 영문도 모른 채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고… 뭐 그래서 서로에게 의지하기도 하지만… 실은 우리도 200km는 떨어져 있는 탁구공과 같은 게 아닐까? 또 그 사이는 역시나 비어 있는 게 아닐까? 왜일까… 말하자면, 어쩌라는 걸까? 그런 공간, 즉

 

보이지도 않는 존재들인데, 왜 이렇게 노력해야 하는 걸까? 이토록 힘든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뭘까? 우주의 대부분인 빈 공간들이… 어떤 노력을 한다고는 볼 수 없잖아. 그런데도 이것은 우연일까? 이곳에 존재하고, 서로를 견제하고, 진보와 발전을 거듭하고, 자원을 이용하고, 구분하고, 차별하고, 우월해지고, 뺐고, 차지하고, 죽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살기 위해서? 이렇게 빈 공간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저 어둠처럼

 

왜 우리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을까? 왜 우리는 반드시 생존(生存)해야만 하는 것일까? 어떤 우연이 우릴 그렇게 고안한 걸까? 인체를 통해서 태어나고 길러져야만 인간일까? 반드시 그래야만 인간으로 볼 수 있을까? 영문도 모른 채 우리는 왜 사는 걸까? 생존하려고, 확장하려고 노력하는 걸까? 살아남아서 뭘 하려는 걸까? 이렇게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말이야.

 

그래서 난 낙지가 불쌍해.

 

못, 그래서 묻겠는데 우린 왜 탁구를 치는 걸까? 생각할수록 그것은 우연이고, 생각할수록 그건 고안된 일이었어. 여기 이곳엔 왜 탁구대가 놓여 있었을까? 왜 세상엔 탁구대를 제조하는 회사가, 라켓과 공을 언제든 고르고 살 수 있는 가게가 있는 걸까? 우리에겐 왜 그걸 살 수 있는 돈이 있었을까? 탁구는 왜 그렇게 오랜 룰을 지니고 있는 걸까? 우린 왜 팔다리가 있을까? 우린 왜 라켓을 쥘 수 있는 손이 있을까? 우린 왜… 인간일까?

 

존 메이슨의 소설 〈핑퐁맨〉에는 불가사의한 남자가 나와. 그는 라스베이거스 힐튼에서 해고당한 후 네바다의 실버스프링으로 건너가 정착을 하지. 이럭저럭 새로운 세계에 적응한 그가 재미를 붙인 것은 볼링이었어. 동료들과 함께 그날도 어김없이 팜레이의 볼링장을 찾았지. 게임엔 늘 판돈이 걸려 있었고, 그의 팀은 바짝 상대팀을 추격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다시 그의 차례가 왔고 그는 볼을 던졌어. 관리를 잘해온 자신의 12파운드 콜롬비아 볼이었지. 탄식과 탄성이 동시에 나왔어. 그만 5번과 10번 핀의 스플릿(남은 핀과 핀 사이의 거리가 먼 경우)에 걸리고 말았거든. 퍽, 그는 외쳤어. 그리고 자신의 볼이 돌아오길 기다렸지. 레일이 돌고 곧 공은 돌아왔어. 그런데 맙소사, 그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야. 그것은 지구였어.

 

비록 볼링공과 같은 싸이즈였지만, 그건 아무래도 지구가 확실했어. 손으로 짚자 심지어 바닷물이 손바닥을 적실 정도였지. 그는 소리쳤어. 이봐 문제가 생겼어, 이건… 말하자면 지구라구. 하지만 동료들은 플레이를 재촉했지. 승부의 고비가 되는 중요한 순간이었거든. 지구고 뭐고 간에 빨리 던져. 상대팀은 야유를 일삼았어. 할 수 없이 그는 지구를 들어올렸어. 대서양과 인도양, 태평양의 세 곳에 손가락을 끼고 그는 자세를 가다듬었지. 귀상어 떼가 손가락을 무는지 중지가 따끔거렸고, 엄지의 근처에선 해저화산이 폭발해 손끝이 다 얼얼한 지경이었지. 그는 볼을… 그러니까 지구를 던졌어. 지구는 보기 좋게 5번 핀을 히트했고, 스핀을 먹은 5번 핀이 또 아슬아슬하게 10번 핀을 강타했지. 럭키, 동료들은 기뻐 난리를 쳤고 결국 그는 그날의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어. 운이 좋았군. 상대팀은 순순히 그날의 술값을 계산했어. 곧 한바탕 기분 좋은 술판이 벌어졌지.

 

하지만 그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어. 지구는 다시 돌아왔고, 그는 그것을 자신의 락커에 넣어둘 수밖에 없었으니까. 내 공을 좀 찾아봐줘요. 은회색 콜롬비아 12파운든데 그건 어디로 가고 이런 게 나왔다니까. 주인은 거칠고 자부심이 강한 남자였지. 이봐, 여기 브런스웍(레일씨스템의 메이커)은 자네보다 갑절은 똑똑하고 정확해. 어쨌거나 레일 속을 확인한 주인이 더 큰 목소리로 고함을 쳤지. 자, 아직도 의심이 남았으면 직접 와서 보라구, 콜롬비아 똥볼 같은 게 이 속에 있나 없나! 하는 수 없이 그는 지구를 자신의 라커에 넣어두고 자물쇠를 채웠어. 누구라도 난감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겠지.

 

다음날 아침 뉴스에는 지구 이곳저곳에서 일어난 강진이 보도되었어. 숙취가 있기도 했고, 한두번 그런 뉴스를 본 것도 아니고 해서 그는 무덤덤하게 베이컨을 씹었지. 그날 저녁에도 어김없이 볼링이 시작되었어. 긴장된 마음으로 그는 라커를 열었지. 가방에서 나온 것은 역시나 지구였어. 그날 경기에서 그는 열일곱 번의 스트라이크와 두 번의 터키를 기록했어. 그리고 다음날 히말라야 전역에서 대규모의 산사태가 났다는 뉴스를 들었지.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볼링과 어떤 상관이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 네바다에서의 생활은 개인에게 그런 디테일한 고민을 허락하지 않았지. 볼링은 계속되었어.

 

이제 지구는 완전히 그의 볼이 되었어. 동료들도 그걸 인정하는 눈치였지. 마침 마블링 컬러의 볼링공이 대유행하던 시기여서, 아무도 지구를 의심하지 않았던 거야. 한달이란 시간이 지나갔어. 지구의 곳곳에선 대재앙이 끊이지 않았지. 서서히, 그도 이상한 낌새를 채기 시작했어. 크고 작은 균열이 그의 지구에도 어느덧 생겨나 있었거든. 지능지수가 110은 되기도 해서, 그는 드디어 고민을 시작했어. 하지만 그에겐 시간이 부족했지. 이유는 생활, 바로 생활 때문이었어. 마침 이웃의 월터씨가 지붕 손질을 부탁하기도 했고, 비서실의 마가렛이 함께 술 한잔 하는 건 어떠냐고 전화로 물어왔기 때문이야. 게다가 일요일엔 추수감사절을 준비하는 대규모 예배가 있었지. 예배를 마치고 나니 또 어지간히 피곤이 몰려왔어. 부족한 잠을 자느라 또 지구에 대해선 까마득히 잊어버렸지. 다시 한주가 시작되었어. 쉴 새 없는 출근과 업무와 볼링이 여지없이 시작되었지. 지구가 쪼개진 것은 목요일 저녁의 두번째 경기, 초구를 던졌을 때였어. 스트라이크! 환호도 잠시, 그는 자신의 지구가 쪼개지는 걸 똑똑히 목격했어. 그때였지. 엄청난 강진을 모두가 느낀 것은. 지진은 무려 한 시간이나 계속되었어. 다행히 네바다엔 큰 피해가 없었지만 그는 그때서야 자신의 실수를 알게 되었지. 그후의 세계는 그야말로 끔찍한 것이었거든.

 

남미는 완전히 바닷속으로 가라앉았고, 미국의 동부도 지도에서 사라졌지. 유럽과 아시아도 절반 이상이 침수되었고, 아프리카는 세 개의 작은 대륙으로 쪼개져버렸어. 혼돈과 혼란이 가라앉기까지는 무려 8년의 시간이 지나야 했지. 세계는 비록 엉망이 되었지만, 실버스프링의 주민들은 여전히 볼링을 치고 내기를 즐겼어. 오로지 단, 한사람을 제외하고는 말이야. 그는 두번 다시 볼링을 치지 않았어. 볼링장의 주변에도 얼씬하지 않았고, 동료들의 유혹에도 흔들림이 없었지. 이상한 일이지만 그는 대신 탁구를 치기 시작했어. 탁구는 실버스프링에서, 아니 팜레이에서도 무척 외로운 스포츠였지만, 그는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탁구로 여생을 보냈다고 해.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실버스프링의 〈핑퐁맨〉이라고 불렀다는 얘기야.

 

그래서, 지구는 그후로 괜찮았던 거야?

그건 모르겠어.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거든.

 

그런 이야기를, 했다. 여름이 끝나면서 우리는 눈에 띄게 말이 많아졌다. 쉴 새 없이 말을 하고,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들었다. 드라마와 쇼프로를 보기도 했다.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쉴 새 없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말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정말 불안했다.

 

트레이드에서 돌아온 다음날, 클럽은 폐쇄되어 있었다. 플래시도 음악도 없이- 쎌러브레이션을 부를 때의 쿨 앤 더 갱처럼 즐겁게 살렵니다. 서기 3001년 재오픈- 정지된 바탕화면을 배경으로 클럽의 초기화면은 굳게 잠겨 있었다. 그 고요한, 흑인들의 노래하는 얼굴이 나는 그렇게 무서워 보일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탁구를 칠 수 없었다. 방학이 끝나고 정신없이 새 학기가 시작된 것도 이유는 이유였지만, 자꾸 그 소리가- 그 허옇고, 무겁고, 떨어진 것이 내던- 경쾌한 소리가 귓속을 떠나지 않아서였다. 요즘엔 하늘에서 뭐가 많이 떨어지네… 신문을 탁 펼치고 앉아 학원의 수위가 중얼거릴 때는 숨이 다 멎는 느낌이었다. 정밀수사에 착수, 쏟아진 폭우로 수사에 어려움 따라- 신문의 헤드라인을 훔쳐보며 나는 미미한, 그러나 강렬한 감전을 몸소 경험해야만 했다. 에애 에애애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나의 심장에 건전지의 양극(+–)을 문질러대는 기분이었다. 에애 에애애에, 에애.

 

짝짝짝짝짝짝짝짝

 

전체 조례에 서 있는 그 순간이, 그래서 그렇게 편안할 수 없었다. 처음이었다. 육십억에게, 오만구천이백사명에게, 천팔백오십팔명에게, 육백삼십칠명에게, 마흔한명에게 둘러싸여 있는 일이- 그래서 무척 따뜻하고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다수인 척, 나는 옆의 아이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상 받는 애들… 좋겠다… 그지?

 

힐끗 나를 쳐다본 안경잡이는 대꾸도 없이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 200km의 거리감 같은 것이- 팔이 닿을 수도 있는 서로의 어깨와 어깨 사이에 광활하게 펼쳐진 느낌이었다. 태양계를 벗어날 우주선을 발사하는 심정으로, 나는 치밀하고 조심스레 다시 말을 걸어보았다. 방학땐 뭐했니? 여전히 정면을 주목하고 있었지만, 안경잡이의 얼굴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자꾸, 자꾸만 말을 하고 싶었다.난 탁구를 배웠어, 넌?

 

말 걸지 마 쪼다 새꺄!

 

휙, 고갤 돌린 안경잡이는 곧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로 그렇게 속삭였다. 나는 놀라 고갤 돌렸지만,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알리바이가 있다는 건 이런 것일까? 이렇게 차근차근, 확보해가면 되는 걸까? 태양이란 유리구슬의 천만분의 일도 안될 우주선처럼, 그 200km의 거리 사이에 나는 정처없이 떠 있었다.야, 무슨 말 나눈 거냐? 안경잡이의 주변에서 누군가가 속삭였다.

 

몰라, 방학때 탁구 배웠댄다. 묻지도 않았는데

 

모두가 힐끗 돌아볼 정도의 목소리로 안경잡이가 얘기했다. 킥킥킥킥 하는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조례가 끝나자 다수의 아이들이 안경잡이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장난을 치며 아이들은 교실을 향했다. 텅 비어가는 운동장의 한켠에서 나는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을이 시작된 하늘은 허무할 정도로 높고, 깊고, 비어 있었다. 우주의 대부분은 빈 공간, 인간과 인간의 사이도 대부분은 빈 공간이야. 결국 스스로에게 말을 걸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실로 돌아가는 길이 은하와 은하 사이처럼 멀고도 아득했다.

 

예전의 컨디션을 찾은 것은 경찰의 발표가 있고 나서였다. 그 허옇고, 떨어지고, 부서진 것의 핸드폰에서 경찰은 중요한 단서를 찾아내었다. 그것은 아마도- 마리의 전화번호였다. 곧, 여자친구의 투신자살을 비관한 자살로 경찰은 사건을 매듭지었다. 투신장소는 인근 빌딩의 어딘가로 추정되었고, 통화내역으로 미뤄볼 때 원조교제를 시작으로 사랑이 싹튼 게 아닐까- 경찰은 단정지었다. 수십개의 건전지에 대해선 이렇다 할 얘기가 없었다.

 

생존해야 해.

 

모아이가 중얼거렸다. 인간의 해악(害惡)은 9볼트 정도의 전류와 같은 거야. 그것이 모여 누군가를 죽이기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거지. 그래서 다들 다수인 척하는 거야. 이탈하려 하지 않고, 평형으로, 병렬로 늘어서는 거지. 그건 길게, 오래 생존하기 위한 인간의 본능이야. 전쟁이나 학살은 그 에너지가 직렬로 이어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지.전쟁이 끝난 후에도 수만 볼트의 파괴자가 남아 있을까? 학살을 자행한 것은 수천 볼트의 괴물들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전쟁이 끝난 후에 남는 건 모두 미미한 인간들이야. 독재자도 전범도, 모두가 실은 9볼트 정도의 인간들이란 거지. 요는 인간에게 그 배치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이기(利己)가 있다는 거야. 인간은 그래서 위험해. 고작 마흔한명이 직렬해도 우리 정도는 감전사(感電死)할 수 있는 거니까.

 

그래서 생존해야 해. 우리가 죽는다 해서 우릴 죽인 수천 볼트의 괴물은 발견되지 않아. 직렬의 전류를 피해가며, 모두가 미미하고 모두가 위험한 이 세계에서- 그래서 생존해야 해. 자신의 9볼트가 직렬로 이용되지 않게 경계하며, 건강하게, 탁구를 치면서 말이야.

 

실버스프링의 핑퐁맨처럼?

실버스프링의 핑퐁맨처럼.

 

벌판의 끝을 바라보며 나는 기지개를 켰다. 우선 상체를 젖혀 팔을 활짝 뻗은 다음,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다리를 끝까지 내뻗었다. 하품이 나왔다. 그렇게 릴랙스한 손끝에 순간 딱딱한 종이의 질감이 느껴졌다. 지폐와는 다른 그것을, 나는 꺼내보았다. 가족오락관 방청권이었다. 인쇄된 고딕의 글씨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티켓을 찢기 시작했다. 벌판은, 이를테면 티켓 같은 걸 찢어버리기에 딱 좋은 곳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랠리를 시작했다.

 

 

 

 

인디언 써머 높을 탁(卓) 공 구(球) 강림

 

이상한 가을이었다.

 

우선 벌판의 끝에선 주상복합단지가 완공되었다. 완공(完工)이란 곧, 돌이킬 수 없음을 뜻하겠지? 모아이가 중얼거렸다. 하아, 하고 숨을 뱉었지만 대답은 할 수 없었다. 마침 그날은 종모에게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맞았는데, 그 상태로 다시 학교를 다녀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야 못, 이거 좀 빨아와. 종모가 내민 것은 양말이었다. 한 켤레의 양말을 들고 벌판으로 돌아오는데 옆구리가 아파 몇번을 주저앉았다. 갔어. 돌아오니 모아이가 혼자 앉아 있었다.

 

그길로 종모는 식물인간이 되었다. 커브길에서 중형 트럭이 스쿠터를 들이받았고, 종모는 붕, 십여 미터를 날아가 땅으로 떨어졌다. 말도 마, 그 새끼 머리 하난 정말 돌빡이라니까. 트럭 문짝이 움푹 패었지 뭐냐? 말을 흘린 것은 혁호였다. 새벽 내내 몰래 세탁기를 돌려 건조시킨 종모의 양말을, 나는 휴지통에 버렸다.

 

그리고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안락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아무도 접근해오지 않았으므로, 정말이지 스스로가 빈 공간이 된 느낌이었다. 청소를 하는 아이들이 내 곁을 왕복했다. 매점을 향해 뛰어가는 아이들이 내 곁을 통과했다. 음악실을 향해 이동하는 아이들이 다수로, 한꺼번에 나를 지나갔다. 그리고 급우들은 이런 아름다운 노래를 합창했다. 나라는 이름의 빈 공간을, 노래는 순식간에 통과해갔다.

 

청라 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저녁 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새 같은 내 동무야

꽃진 연당과 같은 내 맘에 금새 같은 내 동무야

밤의 장안과 같은 내 맘에 가등 같은 내 동무야

 

병렬의, 9볼트 전류 같은 것이 가슴을 흐르는 기분이어서, 나는 순간 그렇게 무서울 수 없었다. 직렬해서, 언제 갑자기 가등을 켤지 몰라- 밤의 장안과 같은 나는 더욱 두렵고 무서웠다.

 

가등이 늘어선 거리를 따라 우리는 다시 〈랠리〉를 찾았다. 세끄라탱은 변함없이 우릴 맞아주었고, 우리는 함께 중국냉면을 사먹었다. 냉면이라구요? 김이 무럭 나는 주방 속에서 주방장이 고갤 내밀었다. 냉면이요, 세끄라탱이 고개를 끄덕였다. 빙하기에 나타난 세 마리의 파충류를 본 듯한 얼굴로, 주방장은 다시 고개를 집어넣었다. 잠시 후 냉면이 나왔다. 냉면은 응달에 앉은 도마뱀의 피부처럼 차고, 질기고,시원했다.

 

완공기념 축제에 연예인이 왔었나봐요. 그걸 보러 가다가 사고가 난 거예요. 저런, 하고 세끄라탱은 혀를 찼다. 덕분에… 아주 편해졌어요, 학교에서. 알고 있다. 세끄라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재스민을 마시며 〈吉〉 〈和〉 〈壽〉 〈福〉 곳곳에 붙어 있는 금박의 글씨를 바라보다가… 트레이드에서의 일을 말할까 어쩔까 망설이는데 세끄라탱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뭘요? 찻잔을 내려놓으며 세끄라탱이 혀를 내밀었다. 에애 에애애에.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검게 색이 변한 눈동자를 깜박이며 세끄라탱이 얘기했다. 난, 밤말을 듣는 쥐.

 

그리고 우리는 탁구를 쳤다. 핑퐁 핑퐁, 핑퐁 핑퐁. 오랜만에 듣는 랠리의 소음이 저녁 조수를 찾은 흰새처럼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보던 세끄라탱이 짝짝 박수를 치며 말했다. 좋은 랠리야… 하지만 비둘기를 이길 수 있을까? 우리는 무시하고 랠리를 이어갔다. 핑퐁 핑퐁, 저녁 조수를 찾은 내 마음의 흰새.

 

가을의 대부분은 탁구를 치고, 학교를 다니는 평범한 생활이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래서 광활한 빈 공간과 같은 것이었다. 소소한 생활 속에서 물론 소소한 사건들이 나를 찾아왔지만- 가등을 원치 않는 밤의 장안 같은 마음으로 나는 그것들을 통과시켰다.

 

구태여 말하자면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전교학생회장(全校學生會長)을 다시 만났다. 어 넌, 하고 분홍의 뺨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탁구를 치던 학생이지? 200km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갑구나. 연임을 위해, 새 학기의 회장직에 다시 출마했다는 변을 학생회장은 늘어놓았다. 그래서 잘 부탁해, 추진중인 프로젝트를 내 손으로 마무리짓게 꼭 좀 도와줘야 해. 학교를 위한 일이니까. 그게 뭔데? 몰랐니? 전교생이 이용할 수 있는 볼링장 건립을 추진중인데… 방학중에도 동창회의 선배들을 일일이 찾아가 호소하고 부탁드렸어. 그러니 꼭 좀 밀어주길 바래. 뭐, 자평은 그렇지만… 재임했던 지난 학기도 큰 사고 없이 임기를 마쳤다는 생각인데… 어때, 네 생각은? 별일 없었다고

 

생각해.

 

뺨의 분홍이 살짝 빛을 발했다. 그때 같이 있던 친구는 어딨니? 그 친구에게도 안부 전해주면 좋겠어. 그래, 알았어. 모아이가 바로 곁에 있었으므로 나는 그렇게밖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럼, 하고 학생회장은 우리를 통과했다.

 

목을 우두둑, 꺾던 버스기사를 C지구의 서점 앞에서 우연히 만난 적도 있었다. 기사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틀림없는 우두둑,이었다. 후줄근한 점퍼차림이었고, 비도 오지 않는데 접이우산을 들고 있었다.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고, 이상하게도 같은 방향을 200미터쯤 걸어갔다. 그는 한번도 목을 꺾지 않았고, 대신 끊임없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바짝 따라 걷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혼잣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딱 한번, 라이터가 작동하지 않자 그는 “아, 씨발” 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통과했다. 그 다음날까지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유니폼을 바꾸러 간 마트에서 양호선생을 발견하기도 했다. 무슨 문제인지 그녀는 마트의 여직원과 한창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완고하게 팔짱을 낀 그녀와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는 여직원을 나는 먼 거리에서 지켜보았다. 통화를 끝낸 여직원이 설명을 늘어놓자 그녀의 언성이 갑자기 높아졌다. 야, 너 몇살이야? 야, 너 몇살이야,가 레이저빔처럼 직선으로 나를 통과했다. 몇학년이니? 언젠가 치수에게 많이 맞고서 나는 양호실을 찾은 적이 있었다. 몇학년이니?라고 물은 그녀는 휴식을 취하는 나에게 이런저런 얘기들을 들려주었다. 멍이 있네, 친구와 싸웠니?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녀가 얘기했다. 인간은 인간에게 위로를 받는 거란다. 인간이 인간에게 위로가 되다니, 그런 개소리가 어딨냐고 나는 생각했다.

 

하루는 메트로폴리스의 편의점에 들렀는데, 사장의 부인이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늦은 밤이었는데 죽은 사람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움찔,했다. 부인은 여전히 건강해 보였고, 카운터 옆에는 또래의 남자 하나가 몸을 기댄 채 서 있었다. 음료수를 고르면서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요즘 젊은애들은 일을 안한다니까, 그게 지금 사회적으로 큰 문제야 문제. 사투리가 섞인 억양으로 남자는 말을 하대(下待)하고 있었다. 음료수를 내밀고 계산을 끝내자 두 사람이 동시에 “안녕히 가세요”라고 했다.

 

모아이는 이사를 했다. 나와서, 이제 혼자 아파트를 쓸 거라고 했다. 대충 동네라든지, 그 언저리에 대한 설명을 듣긴 했는데 놀러 가겠다는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대신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모아이… 언젠가 우리집에 놀러 와도 돼. 모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아이의 아파트를 다녀온 것은 세끄라탱이었다. 글쎄, 방에 자판기가 두 대나 있지 뭐냐? 부엌에도 큰 자판기가 하나 있고… 어이가 없다는 듯 세끄라탱이 얘기했다. 이상한, 질투 같은 것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다. 넌 왜 자판기만을 고집하지? 해도 되고 안해도 될 질문을, 그래서 그만 던지고 말았다. 대수롭잖게, 포카리의 캔을 따며 모아이가 말했다. 할아버지가 물을 마시고 그렇게 된 거거든. 아버지가 가져다준 물이었어.

 

갑자기 말을 걸어온 사람도 있었다. 학교 앞의 정류장에 서 있는데 누군가 야, 하고 나를 불렀다. 돌아보니 처음 보는 남자가 쭈그린 채 담배를 피고 있었다. 분식집의 문앞인데다 앞치마를 두르고 있어, 남자가 분식집과 연관이 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손짓을 하더니 말도 안되는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니들은 참 이상해, 중국산 김치와 직접 담근 김치를 같이 내놓으면 왜 다들 중국산 김치를 집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단 말이야. 니들은 진짜 중국산 김치가 더 맛있냐? 나는 김치를 먹지 않는다고 하자 남자는 달아서 그런가 어쩐가, 중얼거리더니 담배를 확 땅바닥에 비벼껐다. 달려가 버스를 탈 때까지도 남자는 계속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예외 없이 은행잎들이 노랗게 물들었다.

 

운동화 세탁 전문점에서 아주 이쁜 여자애를 본 적도 있었다. 여자애는 두 켤레의 스니커즈를 맡기고, 살균 항균 세탁이 끝난 한 켤레의 농구화를 찾았다. 가게 안에는 주인아줌마와 두명의 주부, 그리고 한무리의 여고생들이 있었는데 여자애가 나가고 나자 다들 이쁘다며 한마디씩 수군거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코가 좀 퍼진 느낌이지 않니? 다리도 제법 짧은 편이야. 허리가 긴 거야 얘. 여고생들이 속닥였다. 그렇다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끄라탱을 학교에서 만난 적도 있었다. 서로 주춤,했지만 서먹하게 몇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웬일이세요? 응, 아무래도 쌍둥이를 전학시켜야 할까봐. 왜요? 교장 전화를 받는 것도 지겹고… 또… 큰애가 있거든. 걔가 동생들과 함께 다니는 게 싫은가봐. 푸른 눈동자로 복도를 응시한 후, 세끄라탱은 교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주춤,하고 서 있다가 나는 교실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10월 1일부로 중국집은 중국냉면의 판매를 중단했다. 여름특선메뉴라서요,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화교 3세인 지배인이 정중하게 설명한 후 카운터로 돌아갔다. 우리는 대신 만두를 시켰다. 세끄라탱은 아주 옛날 자신이 먹었다는 인육(人肉)만두에 대해 한참을 얘기했다. 중국에서의 일이었지. 확실히 나는 냉면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강당 쪽의 화장실에서 안경잡이를 만나기도 했다. 주춤,했으나 가장 구석진 소변기 앞으로 걸어가 조용히 볼일을 보았다. 잠을 못 잤다며 안경잡이는 하품을 했다. 어젯밤 인터넷에서 여섯 개의 리플달기 1등을 먹었고, 세 시간이나 이어진 리플싸움에서 결국 상대에게 이겼다며 침을 튀기며 얘기했다. 와, 대단한데! 나란히 병렬로 선 안경잡이의 친구가 소변을 튀기며 낄낄거렸다.

 

출근하는 수많은 회사원들을 보았다.

 

좋은 랠리는 오가는 공의 동선(動線)을 보면 알 수 있어. 가장 멋진 건 나선형의 띠 같은 동선을 창출하지. 고대에 그것은 새로운 유전자를 만드는 방법으로 쓰였어. 세끄라탱이 얘기했다. 마치 새로운 유전자 같은 쌍둥이들이 〈랠리〉를 찾아온 날이었다.

 

우기(雨期)가 시작되었다. 우산을 들고 몰려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빨간 장화를 신고 횡단보도를 건너다 넘어진 여자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아주 천천히 일어났고, 신호등은 이내 빨간불로 바뀌었다. 일어난 아이가 보도를 건너기까지, 차들은 정지선을 넘지 않았다. 뒤에 선 차들이 계속 클랙션을 울렸다. 가장 듣기가 좋았던 건 〈엘리제를 위하여〉였다.

 

그리고

 

치수의 호출이 있었다. 한밤중에 벨이 울렸는데 그만 엉겁결에 전화를 받아버렸다. 오랜만이야 못, 공중전화로 거는 거라 안 받으면 어쩌나 걱정했거든. 치수는 쎄븐일레븐 옆의 공터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오분이 넘게 아무 얘기를 하지 않아 오분이 넘도록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 치수가 물었다. 뭘? 애새끼들이 전활 안 받아. 나는 종모의 사고소식을 전해주었고, 나머진 모르겠다고 얘기했다. 그랬구나, 치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그런 게 살아 있음 뭐하겠니? 안 그러냐? 종이컵을 구겨 던지며 치수가 환하게 웃었다. 너도 마실래? 괜찮다고는 했지만 치수가 굳이 커피를 뽑아주었다. 까불더니 자식… 하긴 쓰레기 주제에 보상금이라도 받으면 어디야. 그리고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치지직, 쎄븐일레븐의 전광판 속에서 수명을 다한 형광등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못… 혹시 달한테서 전화 같은 거 오지 않았냐? 치수가 물었다. 아니,라고 나는 대답했다. 치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아, 그년이 내 전화길 들고 도망갔거든. 니 펀번호가 속에 있으니 혹시 해서… 전화기 좀 줘볼래? 뚜뚜 뚜뚜뚜 그리고 치수는 자신의 번호로 몇번이고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갔지만 끝끝내 연결은 되지 않았다. 휙, 꽁초를 집어던진 후 다시 치수는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여기서 놀던 년이라 이 동네 어디 있긴 할 텐데… 못, 네가 메씨질 좀 남겨줘야겠다, 니 목소리로. 그러니까… 나한테 거는 걸로 해서, 왜 연락이 안되냐며 얘기한 백만원… 아니 이백 정도로 하자, 준비했으니까 가져가라고 해.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년이니까.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해야 해. 알았지? 자 연습 한번 해봐. 그래서 나는, 해야 했다.

 

저기… 치수니? 얘기한 돈… 그거 이백만원…

 

장난 치냐? 치수의 음성이 싸늘하게 변했다. 이봐 못… 지금 이렇게 장난칠 상황이 아녜요, 그년이 내가 거기서 번 돈을 죄다 긁어서 튀었단 말이야. 망할 년이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아가지고 카드까지 긁었어요… 응? 세상에 통장에, 카드에, 휴대폰까지 긁어 튀는 년이 어딨냐고. 니가 좀 그 정도는 도와줘야 되는 거 아니냐? 응? 그래서 나는, 다시 해야 했다. 새벽의 정적을 깨고, 지도를 받으며, 수십 번이나 대사연습을 한 끝에 나는 가까스로 메씨질 남길 수 있었다.

 

치수야, 나 못. 얘기한 이백만원 맞춰놨거든. 나 통장 그런 거 할 줄 모르니까 와서 찾아가. 오기 힘들면 사람을 보내든가. 그건 그렇고 왜 전활 안 받냐? 이씨, 받기 싫음 이 돈 써버린다.

 

메씨질 남기고 나자 순간 호흡곤란이 찾아왔다. 하아하아, 나는 쪼그린 채 한참이나 숨을 몰아쉬었다. 삑. 그때 문자가 들어왔다. 문자를 확인한 건 치수였지만, 문자의 내용에 대해선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치수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치수는 가만히 앉아 있다가, 다시 담배를 한 대 꺼내 피다가, 갑자기 자신의 항문 근처를 막 문지르기 시작했다. 이 씨, 이 씨발… 치수의 입에서 증기 같은 것이 새나왔다. 손끝을 아예 파묻고 치수는 미친 듯 항문을 긁었다. 하아하아, 그리고 치수가 입을 열었다. 야, 못…

 

너 좀 맞아라.

 

그래서 나는, 맞아야 했다. 아무 말 없이 치수는 나를 때렸고, 아무 말 없이 나는 바닥을 뒹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머리칼을 움켜쥔 억센 손이 내 머리를 들어올렸다. 무표정한 얼굴을, 그래서 나는 볼 수 있었다. 천천히, 한 대씩 머리를 쥐어박으며 드문드문 치수는 중얼거렸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못이 박히듯 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씨발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냐고

왜 나만

이런 꼴을 당하는 거냐고

응?

 

나는 누운 채 우주를 바라보았다. 우주의 대부분은 빈 공간, 태양을 구슬 정도의 크기로 가정했을 때 은하에서 가장 가까운 행성의 거리는 200km, 은하에는 그런 별들이 천억 개… 그런 생각이라도 하며 나는 누워 있었다. 이건 좀 빌려야겠다. 툭 핸드폰을 열었다 접으며 치수가 말했다. 그때 툭,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내 입을 통해 나온 말이었기에 그것은 더욱 뜻밖의 것이었다.

 

왜, 왜 날 고른 거지?

 

잠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난 후, 치수가 말했다. 글쎄, 그냥 그러고 싶었어.

 

구태여 말하자면, 그런 일들이 있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생각하면 그저, 흐린 가등처럼 불을 밝히고 선 소소하고 소소한 일들이었다. 밤의 장안 같은 마음으로 역시나 나는 그것들을 통과시켰다. 다만 열흘 정도 머리에 못이 박힌 듯 통증이 있었고, 그 못이 빠지고 나자 우기가 끝나 있었다. 예외 없이 은행잎들이 쌓여 있었다.

 

알고 있다. 세끄라탱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탁구에 열중한 어느날인데 아빠, 하며 누군가 〈랠리〉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서로가 주춤,해야 했다. 재임에 성공한 전교학생회장이었다. 다시 랠리를 이어갔지만, 도무지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세끄라탱은 곤혹스런 표정으로 전교학생회장과 얘기를 나누었다.소곤소곤한 대화였지만 뺨 속에서 꿈틀대는 분홍의 국수와, 국수처럼 이어지는 얘기의 맥락을 나는 엿들을 수 있었다. 요는 쌍둥이들의 전학문제였다. 왜 빨리 전학을 시키지 않느냐, 특수학교를 알아보는 중이다, 그 말씀 하신 지가 언제냐, 그게 문제가 쉽지 않다,였다. 흘깃 우리를 쳐다보고 학생회장이 돌아간 후 내가 물었다. 아들인가요? 역시나 곤혹스런 표정으로 세끄라탱은 엉뚱한 대답을 늘어놓았다. 쟤는 말이야… 엄마가 있었어.우리는 더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기온이 높은 날씨가 이어졌다. 반팔을 입고 다녀야 할 정도로 무더운 날씨였다. 이런 날씨를 인디언 써머라고 하죠. 겨울이 오기 전 마지막 사냥을 할 수 있었던 까닭에 인디언들은 이 시기를 신의 축복이라고 믿었다네요. 여자 아나운서의 빛 고운 해설이 없었다 해도, 누구나 반팔을 입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절로 그런 생각이 들 것 같았다. 버스를 타고 가며, 나는 마지막 사냥을 나서는 인디언처럼 창밖의 하늘을 음미했다.

 

세끄라탱이 갑자기 우릴 부른 것은 그, 여름의 일요일 아침이었다. 내가 줬던 공은 잘 가지고 있겠지? 〈信和社〉의 공을 가져오란 얘길 듣긴 했지만, 벌판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누구도 그런 일이 일어날 거란 상상을 하지 못했다. 벌판은 그날따라 광활했고, 수백마리의 들소떼가 지나간 듯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들소를 쫓는 행렬처럼 얼마 후 모아이가 도착했고, 역시나 세끄라탱이 쌍둥이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려섰다. 아녀하세요. 쌍둥이들이 인사를 했다. 새와 쥐 같은 얼굴의 쌍둥이들을 보며 우리도 손을 흔들었다.

 

이걸 받아라.

 

캐비닛의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놀랍게도 세끄라탱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속에서 꺼낸 작은 함을 우리에게 내밀었다. 그 안에는 두 개의 라켓이 들어 있었고,역시나 <信和社>의 마크가 찍힌 아주 오래되고 아름다운 펜홀더와 셰이크핸드였다. 영문도 모른 채 우리는 그것을 나눠 들었다. 라켓을 들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광활한 벌판과, 수북한 각목더미와, 저 멀리 완공된 주상복합단지와, 학교 본관의 뒤편에서 시작된 볼링장의 기초공사가 한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그래서 더 미안하구나. 세끄라탱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몇만년 만의 핑퐁인지… 나도 이젠 기억이 나지 않아. 아무튼… 핑퐁을 시작하자. 그리고 나지막이 세끄라탱이 중얼거렸다. 높을 탁(卓), 공 구(球).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세끄라탱의 시선을 따라 우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차마 너무 맑아서 불안하기도 한 하늘의 저편에서, 무언가 유리구슬 같은 것이 반짝하고 빛났다. 그것은 서서히 다가왔고, 급격하게 커지기 시작했다. 핼리다. 모아이가 외쳤지만 그것은 핼리,라고도 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그것은 차라리 낮달에 가까웠고 어떤 불꽃도, 길고 긴 유성흔도 없이 수직으로 하강해왔다.

 

그것은 거대한 탁구공이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