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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 시
상징이 되기 위한 몸짓들
박형준 朴瑩浚
시인.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춤』 등이 있음. agbai@korea.com
한때 시집이 삶에 대한 ‘예감’의 다른 말이라고 생각한 시절, 나는 한권의 시집을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전철에서도, 버스에서도, 심지어 연애를 할 때에도 그 시집은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 무엇, 영혼 혹은 상징이었다. 한권의 시집은 ‘구원할 수 없는 것’들의 총량이었다. 가령 정희성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는 아버지의 인생 전체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한 편의 시를 사랑하게 되자 정희성의 시집은 내 몸에 각인된 영혼처럼 생각되어, 그의 시집에서 ‘구원’을 찾고자 밑줄을 그어가며 읽게 되었다. 저문 강에서 삽날에 비친 노을을 씻는다는 것, 그것은 노을의 붉은빛과 삽날의 은빛이 혼융되어 아버지와 가난이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시대와의 연대의식을 꿈꾸게 하고, 그 과정에서 삶과 시대라는 이중의 억눌린 분노가 씻겨지는 카타르씨스를 느끼게 해주었다.
요즈음은 쏟아져나온 시집을 읽다보면 ‘상징’과 ‘의미’라는 말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그리고 그것이 자꾸 시적으로 변용되어서 내가 지금 이 시집들 속에서 찾으려는 것이 ‘상징’인가, 아니면 ‘의미’인가 하는 질문이 꼬리를 문다. 시집을 상징으로 본다면, 나는 하나의 시집 속에 들어 있는 추상적인 것을 모두 불러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집을 의미로 인식한다면, 그 의미에 알맞은 구체적인 몇가지의 사례를 시집 속에서 찾아내면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든 것은 인터넷에서 본 흥미로운 기사 때문이다. 최근에 새로운 검색엔진이 하나 나왔다는 것인데, 다음 문장이 눈에 쏙 들어왔다.“기존 엔진에선 검색어를 하나의 상징(symbol)으로 인식해 그 단어가 들어 있는 모든 자료를 불러낸다. 그러나 렉시(lexxe.com)는 문장 속의 단어를 의미(meaning)로 인식해 전체 문장의 뜻을 이해한 뒤 답을 찾아”낸다(중앙일보 2005년 10월 26일자). 이 새로운 검색엔진의 특징은 검색질문이 입력되면 원하는 답만 간결하게 제공한다는 것.
한 계절에 읽어야 할 시집이 많다는 것이 마냥 행복한 일만은 아니다. 특히 올해처럼 많은 시집이 쏟아져나온 것은 문단에 나온 이래 십수년 동안 처음 보는 현상인 것 같다. 새로운 검색엔진에 저 시집과 시들을 넣고 돌려버릴까. 그래서 이번 계절의 시집과 시들은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고 점잖게 한말씀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푸념일 뿐, 여전히 나는 시집에서 의미보다는 상징을 얻고 싶다.“하찮은 팸플릿에서도 새로운 이미지의 빛”1을 발견했다는 바슐라르(G. Bachelard)가 한국에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사방에서 이미지들이 대기를 침범하고,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건너가고 강대한 꿈에 혹은 귀를 혹은 눈을 부른다. 시인들이 넘쳐난다―대소시인, 유명한 시인,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 사랑받는 시인, 매혹하는 시인. 시를 위해 사는 자는 모든 걸 다 읽어야 한다.”(같은 곳) 말문이 탁 막힌다. 바슐라르는 ‘시를 위해 사는 자’는 시집의 하인이 되라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수많은 시집과 문예지에서 그가 말한 ‘이미지의 무지개빛’을 발견하기란 쉽지가 않다. 말의 홍수 속에서 어떻게 비 갠 후 맑은 대기에 걸린 한줄기 내면의 광채를 볼 수 있단 말인가. 시인은 독자에게, 그들의 ‘고뇌’를 조금이라도 줄여줄 수 있도록 상징으로 통어된 ‘고뇌의 미학’을 제공해야 한다. 바슐라르가 독서의 신에게 기원한 대로 나도 “정말 매일 새로운 이미지들에 대해 말해주는 책들이 바구니 가득 하늘에서 떨어졌으면 좋겠다.”(같은 책 37면) 그러나 방바닥에 쌓인 새 책들이 불편하기까지 한 것은 이 땅의 시인들이 여전히 할 말이 너무 많아서 그들의 고뇌와 새로움에 독자가 주눅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 시가 어떤 시대보다 다양화된 것은 축복받을 일이지만, 그 다양성도 찬찬히 따지고 보면 자기 유파 내에서만 다양화된 것이지, 바슐라르가 말한 ‘옛 세대가 새 세대를 깨우고 새 세대가 옛 세대를 깨우는’ 통합적인 면모는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밑줄까지 그으며 ‘너무 빨리 읽지 않고’ 침묵 속에서 음미하듯이 읽어야 하지만 나는 바슐라르의 충고와는 반대로 방바닥에 놓인 책들을 ‘큰 덩치를 삼키’듯 의미만을 추출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것이다.
나는 상징이라는 말을 비평적 의미보다는 어떤 추상적 아픔, 정신의 아픔으로 사용하려 한다. 시인이란 ‘나’와 세계 사이에서 빚어지는 상징을 표현하는 사람이다. 그 모습은 “다른 인간들은 고뇌 속에서 침묵하지만 신은 내게 얼마나 괴로운지를 말할 힘을 주셨거늘”(괴테)의 형태일 것이다. 보들레르가 무슨 댓가를 치르더라도 독창성을 추구하려고 했던 것이나, 두보(杜甫)가 남을 놀라게 할 만한 표현이 아니면 죽어도 쓰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다짐들은, 우선 시가 표현능력임을 일러준다. 그러나 시인들이 독창성을 추구하는 것은 세계의 괴로움에 대한 절실함과 간절함에서 나온 것이지 그저 말장난이 아님은 물론이다. 간절함이 없는 시는 상징의 정수인 ‘예감’을 얻지 못하고 의미의 세계에 복속되고 만다.
하지만 빼어난 시는 빽빽한 숲에서도 자신만의 향기와 모습을 간직한 나무처럼 빛이 난다.
김노인은 64세, 중풍으로 누워 수년째 산소호흡기로 연명한다.
아내 박씨는 62세, 방 하나 얻어 수년째 남편 병 수발한다.
문밖에 배달 우유가 쌓인 걸 이상히 여긴 이웃이 방문을 열어본다.
아내 박씨는 밥숟가락을 입에 문 채 죽어 있고,
김노인은 눈물을 머금은 채 아내 쪽을 바라보고 있다.
구급차가 와서 두 노인을 실어간다.
음식물에 기도가 막혀 질식사하는 광경을 목격하면서도
거동 못해 아내를 구하지 못한,
김노인은 병원으로 실려가는 도중 숨을 거둔다.
아침 신문이 턱 하니 식탁에 지독한 죽음의 참상을 차리니
나는 식탁에 앉은 채로 꼼짝없이 그걸 씹어야 했다
꾸역꾸역 씹다가 군소리도 싫어
썩어문드러질 숟가락 놓고 대단스럴 내일의
천국 내일의 어느날인가로 알아서 끌려갔다
끌려가 병자의 무거운 몸을 이리저리 들어 추스리어놓고
늦은 밥술을 떴다 밥술을 뜨다 기도가 막히고
밥숟가락이 입에 물린 채 죽어가는데
그런 나를 눈물 머금고 바라만 보는 그 누가
거동 못하는 그 누가
아, 눈물 머금은 神이 나를, 우리를 바라보신다.
―이진명 「눈물 머금은 神이 우리를 바라보신다」 전문(『문학들』 2005년 가을호)
이진명(李珍明)은 일상의 세목들에서 비의(秘意)를 캐내는 시인이다. 그의 시는 우리를 아주 먼 옛날에 사라져버린 시간으로 데려간다. 가령 그의 첫시집에서 ‘복자수도원’은 왜 골목에 숨겨져 있는 걸까? 그리고 화자는 산책의 끝에 복자수도원이 있다고 하면서, 마지막 행에 이르러서는 “내 산책의 끝에는 언제나 없는 복자수도원이 있다”고(이진명 「복자수도원」,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민음사 1992) 하는 걸까? 화자는 수도원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빠끔히 열린 문틈으로 엿본다. 「무늬들은 빈집에서」란 시에서는 언덕에 올라간 화자가 빈집을 내려다보며 그곳에 “무언가 엷디엷은 것이 사는 듯”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수도원이나 빈집은 ‘비스듬히 올라간’ 곳에 있다. 벤야민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산책자에게는 어떠한 거리도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2 이진명의 시에서 성(聖)과 속(俗)이 포개어지는 시간은 경사를 이룬 곳에서 발견된다. 수도원 안의 무늬란 ‘엷디엷은 것’이라서 화자가 안으로 들어가서 ‘만지면’ 그 생명을 잃고 만다. 이것은 기원할 때만 있다가 그 기원이 이뤄지고 나면 사라지고 마는 꿈과 같은 이치이다. 시인이 서 있는 곳이 속(俗)이라는 점에서 산책의 끝에 복자수도원은 있지만, 그 안으로까지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복자수도원은 없는 것이다.
그의 최근작 「눈물 머금은 神이 우리를 바라보신다」는 성과 속이 지닌 양의성(兩意性)을 절실성과 간절함으로 빚어낸 역작이다. 거리를 쏘다니다가 추억에 잠겨 도취에 빠지곤 하는 산책자는 눈앞에 감각적으로 나타나는 것뿐만 아니라 종종 단순한 지식, 죽은 데이터까지 몸소 경험하거나 직접 체험해본 것처럼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린다(같은 책 965면). 산책자 이진명은 집에 배달된 신문의 기사를 몽따주하여 절묘하게 속(俗)의 세계에 깊게 뿌리내린 비의를 체화시킨다.1연에서 쉼표와 마침표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여 몽따주 효과를 극대화한 다음 2연에서는 그것을 자신이 몸소 체험한 것처럼 자기화한다.3연의 단 한줄 “아, 눈물 머금은 神이 나를, 우리를 바라보신다”에서는 이 양의성이 절묘하게 결합된다.
그렇다면 기사 속의 “밥숟가락을 입에 문 채 죽어 있”는 아내 박씨와 “거동 못해 아내를 구하지 못한” 중풍 걸린 남편 김노인의 죽음을 화자는 어떻게 자기 것으로 체화하고 있는가. 첫째 화자는 아내 박씨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조간신문이 식탁에 “지독한 죽음의 참상을 차리니” 어쩔 수 없이 “그걸 씹어야 했다는 것”, 그러다 결국 자신도 “밥숟가락이 입에 물린 채 죽어가”야 했다는 것. 둘째는 김노인과 신(神)의 동일시이다. 그 과정에서 이 시에 세 차례 출현하는 ‘눈물’은 세속적 의미에서 비의적이며 상징적인 구원의 의미로 전이된다. 그 과정에서 사실성은 모호성으로 흐려진다.1연에서 죽어가는 아내를 거동을 못해 눈물을 머금은 채 바라보던 남편의 시선은,2연에서는 같은 상황이지만 “그런 나를 눈물 머금고 바라만 보는 그 누가/거동 못하는 그 누가”로 모호하게 암시될 뿐이다. 그런데 이 모호함이야말로 시인의 절실성을 입증한다.(세계의 구원이 어찌 이런 것이라고 확고하게 정의내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이진명 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엷디엷고’‘얼비치기’만 할 뿐이다. 시인은 이 모호함을 자기 것인 양 절실하게 ‘사는’ 존재이다.) 만약 1연의 김노인의 눈물을 사실성에 입각하여 곧장 3연의 세상의 모든 부조리에 침묵하는 신에게 ‘당신의 눈물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항변했다면, 이 시는 고작 세계의 모순을 고발하는 데서 그쳤을 것이다. 지난 연대의 민중시나 리얼리즘시의 과다한 목적의식, 그리고 최근의 선시(禪詩)류에서 발견되는 도통한 체하는 포즈들이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시가 이렇게 씌어지면 상징을 얻으려는 절실함도 없이 세계와 ‘나’는 곧장 연결된다. 이 시가 아무도 말하지 못한 표현의 참신성을 획득한 것은 상징을 얻으려는 절박하고 절실한 2연의 자기화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괴테가 말한 세상에 대해 “괴로운지를 말할 수 있는 힘”이란 한 줄의 신문기사에서도 자기를 발견할 줄 아는 절실함을 가리킨다. 이 시에서 알 수 있듯 상징이란 의미처럼 명확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 내부에 간직된 모호성은 ‘이 세상의 총량’에 맞먹는다. 세속과 신성의 결합으로 빚어낸 이 ‘눈물’은, 이진명 시의 ‘무늬’에 감돌고 있는 ‘슬퍼하는 자’가 꿈꾸는 ‘마음의 구원’이 어디에 있는지 감동적으로 전해준다. 이 시는 정보(신문기사)→이야기(자기화과정)→상징(신의 눈물)의 구도를 상상력을 통해 결합해서 보여준다. 특히 이러한 시적 구도는 “정보가 그것이 새로웠던 바로 그 순간에 가치를 상실”하는 반면,“얘기는 자신의 힘을 유지하며 집중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방출할 수 있다”3고 한 벤야민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이진명은 문학의 구원이란 남을 구원하는 명확한 의미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위로에 있음을 한방울의 눈물을 통해 상징화하는 것이다.
날개를 삶는다 날개에서 기름 나와 날개 사이로 떠다닌다 날개만 떠다닌다 머리 다리 어여쁜 몸통 무지개 같은 내장은 어디로 갔을까 길고 아린 발톱들을 누가 다 뽑아갔을까, 마치 전쟁 이제 막 끝난 도시 같은 닭국물 속으로 기름달이 수없이 많은 기름달이 뜨는데 날개를 여기다 두고 기름달을 여기다 둔 그 새는 어디로 갔을까
―허수경 「날개를 삶다」 전문(『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사 2005)
이진명이 인간의 ‘눈물’에서 신의 ‘눈물’을 발견해낸다면 허수경(許秀卿)은 국솥에서 ‘기름달’을 본다. 근작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에서 세계를 솥에 넣고 끓이는 시인은 자신을 ‘눈먼 사제의 딸’로 비유하고 있다. 현재 독일에서 14년째 동방고고학을 공부하고 있는 그의 삶이 시작태도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그는 ‘시간 언덕’의 지층을 파헤쳐서 출토된 과거의 세계를 연금술적인 언어마술을 통해 현재의 삶으로 탈바꿈시킨다. 따라서 ‘국솥’은 이 세계를 모두 담을 수 있는 상징의 용기(容器)이다. 그의 이번 시집에서는 태양/달의 등식이 나오는데, 태양은 ‘청동의 시간’과 달은 ‘감자의 시간’과 각각 호응한다. 태양은 문명의 메커니즘이라 할 수 있는 ‘청동의 시간’을 뜨겁게 달구는 절대권력의 폭력성과, 달은 참혹한 현실을 견뎌온 인간의 끈질긴 생명력을 대변하는 ‘감자의 시간’과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 있어 태양은 “마치 적군의 진격을 목전에 둔 마을/여인들의 공포 같은/빛의 움직임”(「새벽발굴」)으로서 “아이들 자라는 시간 청동으로 된 시간”(「물 좀 가져다주어요」)이다. 그 시간 속에서 아이들은 “언젠가 군인이 될 아이들은 스무해 정도만 살 수 있는 고대인”으로 설정된다. 태양의 시간으로 보면 아이들이란 스무해 정도만 살 수 있는 고대인이라는데, 그것은 역설적으로 스무해 정도만 전쟁에 사용될 수 있는 살인병기라는 뜻을 환기시킨다. 반면 달의 시간은 “땅속에서 땅사과가 아직도 열리는 것은/아이들이 쪼그리고 앉아 땀을 역청처럼 흘리”는(같은 시) 것과 연관된다. 인류의 배고픔을 충족시켜준 것이 구황작물 감자이듯이 노동하는 아이들의 세계를 통해 시인이 보는 ‘달’은 “내 속에 든 통증”(「달이 걸어오는 밤」)을 삼키는 여성성과 연관된다. 「물지게」의 전문을 보자.
물지게를 지고 지나가는 남자, 남방초길 십자성길 지나는 시간 없는 시간 속의 남자 지고 가는 물동이에 빛 있다 물이 우려내는 빛, 섬세한 빛 근육, 야자잎 드문드문 빛의 존재를 지우는데도 빛은 있다, 저 빛을 마신 남자의 아이들은 물이 되리라
태양의 빛과 달리 물지게에서 떠오르는 “물이 우려내는 빛”은 “섬세한 빛 근육”으로서 문명의 폭압적인 시간과 맞서 삶의 고난을 빨아들이는 달빛의 또다른 변용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집에서 태양과 달의 이러한 이분법적 등식은 ‘끓인다’로 대변될 수 있는 국솥의 이미지에 의해 또다른 상징으로 태어난다. 「날개를 삶다」는 이러한 이중성으로 가득 찬 두 세계를 솥에 넣고 끓임으로써 새로운 희망을 암시한다. 바로 뜨겁게 끓고 있는 닭국물의 기름 속에서 발견해낸 ‘기름달’인데, 온몸이 산산이 부서져버린 닭의 날개에서 흘러나오는 그것은 이진명이 발견해낸 ‘신의 눈물’은 아니었을까. 그렇기 때문에 이번 시집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고고학적 발굴을 다룬 시편들은 과거의 놀랄 만한 유적발굴에서 마주치는 문명의 위대함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차라리 태양의 이미지를 띤 문명이 인류에게 가한 폭력의 현장인 폐허에서 그 밑 “땅속에서” 사는 “감자의 시간”, 즉 문명이 가한 통증을 삭이는 달과 물이라는 인류애적 모성과 만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뒤로 가는 실험을 하는 것이 앞으로 가는 실험과 비교해서 뒤지지 않을 수도 있다. 뒤로 가나 앞으로 가나 우리들 모두는 둥근 공처럼 생긴 별에 산다. 만난다, 어디에선가.
―허수경, 같은 책, 뒤표지글
나는 뒤로 가는 사람을 볼 때마다 돌아가고 싶은 곳을 생각한다. 뒤로 걸어서라도 돌아가고 싶은 곳, 돌아가고 싶은 시절, 뒤로 걸으면 돌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윤학 산문집 『환장』(랜덤하우스중앙 2005),43면
허수경이 시집 1부에서 시를 각각 표준어와 고향 진주말로 써서 대비시킨 것은 삶의 원리가 순환의 리듬으로 되어 있음을 모국어 실험을 통해 보여준 사례이다.그가 세계를 솥에 넣고 끓일 때 “먼 나라에서 온 악기쟁이들을 불러다놓고 끓”여야(「흰 부엌에서 끓고 있던 붉은 국을 좀 보아요」) 하는 까닭은 리듬이 삶의 원초적인 감각이기 때문이다. 많은 시에서 어미가 ‘~하지요’ 등으로 마무리되는 이유 역시 리듬 속에 삶의 맨얼굴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역사의 지층을 파헤쳐서 우리 시대의 표정과 연결하듯이 표준어라는 언어의 지층 밑에서 ‘감자알’과 같이 살아있는 우리 본래의 언어를 발굴해낸다. 그러니 여성시인 허수경에게 뒤로 가는 실험은 앞으로 가는 실험과 비교해서 별반 차이가 없다. 왜냐면 “둥근 공처럼 생긴 별”에서 사는 우리들은 어떻게 하든 “만난다, 어디에선가”. 그러나 남성시인 이윤학(李允學)에게는, 최근 시집 『그림자를 마신다』(문학과지성사 2005)의 “언어는 정신까지 가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라는 말(뒤표지글)과 위 인용문을 참조한다면,‘언어는 철저히 뒤로 가기 위한 실험일 뿐이다’.
오리가 쑤시고 다니는 호수를 보고 있었지.
오리는 뭉툭한 부리로 호수를 쑤시고 있었지.
호수의 몸속 건더기를 집어삼키고 있었지.
나는 당신 마음을 쑤시고 있었지.
나는 당신 마음 위에 떠 있었지.
꼬리를 흔들며 갈퀴손으로
당신 마음을 긁어내고 있었지.
(…)
나는 당신 마음 위에서 자지 못하고
수많은 갈대 사이에 있었지
갈대가 흔드는 칼을 보았지.
칼이 꺾이는 걸 보았지.
내 날개는
당신을 떠나는 데만 사용되었지.
―이윤학 「오리」 부분(『그림자를 마신다』)
이윤학은 진술의 폐해를 생리적으로 체득하고 있는 경우에 속한다. 철저히 대상을 투시하여 아픔을 생각하고, 결국 아픔의 맨 밑바닥에 닿아서야 비로소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했다고 말하는 지독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아니, 그는 바닥에 닿았다고 사랑이 완성됐다고, 끝났다고 하지 않는다. 그가 세상을 최고로 사랑하는 방법은 그가 만난 세상의 온갖 상처를 들춰내고, 나아가서 아물고 있는 고통마저 들쑤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여러면으로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하루 종일,/내를 따라 내려가다보면 그 저수지가 나오네/내 눈 속엔 오리떼가 헤매고 있네”로 시작되는 「저수지」(『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 문학과지성사 1995)를 떠올려준다. 이 두 시의 시적 공간에서 보면 저수지→호수로 바뀌어 있지만 하강의 이미지는 유사하다. 먼저 「저수지」를 보자.“물결들만 없었다면”“속까지 다 보여주는 거울”이었을 저수지의 바닥을 헤집고 들어가는 것은 ‘돌’이다. 따라서 ‘돌’은 저수지에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수지, 즉 거울에 비친 풍경 속으로 떨어진다.
이번 시집의 「오리」가 공간의 유사성을 제외하고 「저수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저수지」에서는 수동적으로 묘사됐던 ‘오리’가 주체적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의 ‘오리’는 사실 「저수지」의 ‘돌’이다. 비유하자면 배우는 다르지만 맡고 있는 배역은 같다. 다만 무생물인 ‘돌’이 하강의 역동성 측면에서 수동적인 반면 생물인 ‘오리’는 적극적이라는 점이 다르다. 화자 역시 「저수지」에서와는 달리 대상, 즉 ‘당신’과 일체가 되기 위해 ‘오리’처럼 능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뭉툭한 부리로 끊임없이 호수의 바닥을 ‘쑤시고’ 있는 오리가 화자의 다른 모습임을 쉽게 알 수 있다.‘호수의 몸속 건더기’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오리의 운동성은 “너무 깊고 넓게 퍼져” 있는 ‘당신’의 마음을 탐사하는 화자의 절실함과 맞닿아 있다. 그러므로 “내 날개는/당신을 떠나는 데만 사용되었지”는 비극적 결말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받은 영혼이 바닥까지 비집고 들어가서야 만난 사랑의 실체이다. 그것은 더이상 후진할 데가 없을 때까지 뒤로 가는 실험을 펼친 시인이 건져낸 생각의 본체이다. 그는 스스로를 들쑤시고 대상을 들쑤셔 떠남으로써 완성되는 빛나는 사랑의 날개를 얻으려 한다. 때문에 ‘돌’이나 ‘오리’는 사랑을 완성하기 위한 영혼의 추(錘) 역할을 한다. 이윤학은 그 추에 자신의 상처와 사물을 달아놓고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묘사의 시학,‘응축의 시학’을 펼쳐 보인다. 비유한다면 그는 독사처럼 머리 치켜든 비애와 늘 맞서고 있지만 그 머리를 베어버리지 못한다. 내게는 그 이율배반이 두 가지 의미로 다가온다. 하나는 그가 ‘망가진 육체의 옷가지’인 이 세상의 가난한 모든 것들의 흔적을 지독하리만치 끈질긴 응시의 미학으로 복각해낸다는 점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이 차가운 바라봄의 미(美) 속에 그 누구보다 따뜻한 연민의 정서가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번 시집에서는 생의 희망에 대한 잔잔한 성찰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가령 “민들레꽃 진 자리/환한 행성”에서 꽃씨들이 “햇빛 에너지를/충전하고 있”다면서 “뿔뿔이 흩어질/꽃씨들의/여려 터진 마음이 있어” 민들레가 “높이 안테나를 세”운다는(「민들레」) 상상력이 그렇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시에서는 첫번째에 해당되는 ‘뒤로 가는 실험’이 지배적인 요소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반복되다보면 습관이 될 수 있다.
너라는 존재
무수히 위장 속에 침을 놓고
떠날 때까지
하루 종일 귤만 까먹었다
―「하루 종일 귤만 까먹었다」 부분(『그림자를 마신다』)
이렇듯 대상을 떠나기 위해 “구역질이 쉬지 못하도록/손톱 속이 노래지도록/하루 종일 귤만 까먹”다가는 그 연민이 원한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사물과 인간을 바라보는 습관이 굳어지면 ‘아플 때만 다녀가는 이미지’는 그의 추억과 기억 속에 유폐된 화석이 되어버린다. 나는 시인은 폐허 속에서 발견된 부장품을 가지고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할 줄 아는 악기, 즉 상징을 만드는 이라고 믿는다. 상징은 결국 ‘뒤로 가는 실험’이라는 전(前)영혼과 ‘앞으로 가는 실험’이라는 현(現)영혼이 섣불리 목적의식이나 유폐, 피안으로 떨어지지 않게끔 서로 강력하게 결합되어서 독자들로 하여금 ‘숨을 잘 쉬게’, 구원에 대한 예감을 꿈꾸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결국 바슐라르의 충고를 따라 이 계절에 나온 문예지와 시집 들을 되도록 천천히 읽고 몇편의 아름답고 절실한 상징들과 조우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문예지나 문학출판사에서 할 일은 시와 시집들을 신중하게 세상에 내놓는 일이다. 독자가 말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그리고 그 안에 생명을 잉태할 소중한 강줄기를 이루는 시인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도록 말이다.(올해에 좋은 시집들이 여러권 출간되었음에도 시집 홍수에 떠밀려 음미할 시간이 많지 않은 것은 두고두고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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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스똥 바슐라르 지음, 김현 옮김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78, 36면.↩
- 산책자에게는 어떠한 거리도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거리는 그를 ‘신화적인’ 어머니의 나라들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과거로 데리고 가는데, 이 과거는 산책자 본인의 것, 사적인 것이 아닌만큼 그만큼 더 매혹적인 것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과거는 항상 유년시절의 시간 그대로이다. 그런데 왜 자신이 전에 살았던 유년의 시간일까? 아스팔트 위를 걸어가는 그의 발자국은 경이로운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포석 위에 쏟아지는 가스등 불빛은 이러한 이중의 땅위에 양의적인 빛을 던지고 있다(발터 벤야민 지음, 조형준 옮김 『아케이드 프로젝트』, 새물결 2005, 964면).↩
- 유종호 『시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5,149면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