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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강준만 『이건희시대』, 인물과사상사 2005
우아한 중립, 모호한 설득
이일영 李日榮
한신대 교수, 경제학 ilee@hs.ac.kr
강준만(康俊晩)은 수없는 논전을 거쳐온 당대 최고의 논객이다. 그가 지나온 곳 풍운 가득하고 칼빛 눈부셨으므로, 평자처럼 도무지 유격성과는 거리가 먼 경제학 연구자에게는 그저 경외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경제문제·기업문제를 사람과 문화의 문제로 다루었다. 삼성의 정치자금 제공 문제, 편법상속 문제 등으로 사회적 논의가 분분한 가운데, 경제·경영학자들의 직무유기를 꾸짖으며 삼성 총수 이건희(李健熙)를 사회학적·심리학적으로 정면 분석하겠다고 나섰으니, 우선은 송구한 심정으로 가르침을 받기로 했다.
그의 『이건희시대』는 5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제1장 이건희는 누구인가’와 ‘제3장 이건희 리더십의 정체’는 저자의 탁월한 직관과 통찰이 빛나는 곳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건희는 탁월하고 박학한 천재형 인간이다. 천재형은 고독하며 편집광적이고 양면적이다. 재벌가의 황태자는 특수한 환경 때문에 세상사와 차단되었고, 창의적이지만 가상현실에 집착하고 ‘다중적 품성’을 지니게 된다. 이 때문에 국가와 인류에 대한 발언과, 상속과 노조문제에 대한 태도의 상호모순이 내면에서 공존할 수 있고, 홀로 유능하고 해박한 가운데 오만과 반말, 고압적 훈시, 침묵,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이 수반된다.
강준만은 이러한 이건희의 제왕적 리더십에서 삼성그룹이 나머지 사회와 절연된 구조와 문화를 갖게 된 현실을 설명한다. 삼성의 구조조정본부에는 충성심 강하고 능력이 검증된 인력이 집결되어 있고, 경영진단팀은 저승사자 같은 조직이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세상과 벽을 쌓은 코쿤(누에고치)처럼 되었다. 업무에 실패한 해외주재원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회장 출장시 의전에 실패한 주재원은 즉각 귀임이라는 말이 회자된다. 인사관리 및 교육씨스템은 삼성 사람들을 철저한 ‘조직인간’으로 만든다. 우수한 인재가 있으나 배타적이고 경직된 조직문화 탓에 다른 사회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사회와 비전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 부장급만 되어도 권위주의가 느껴지며, 삼성의 안전은 삼성인에 의해서만 지켜질 수 있다는 폐쇄적 발상이 지배적이다. 저자는 이렇게 인간 이건희의 성격에서부터 거대재벌 삼성의 기업구조와 조직문화까지 일격에 가로지른다.
그러나 어떤 대목에서는 논리의 비약과 흔들림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건희의 극단주의 기질이 질(質)에 ‘올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는데, 불량품에 해머질을 하고 화형식을 거행하는 이벤트는 과대평가를 할 만큼 희귀한 것이 아니다. 회사의 자원관리(ERP)와 정보씨스템을 작업현장의 숙련과 다기능화에 중요한 ‘암묵지(暗默知)경영’으로 연결하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다. 삼성이 한국현대사에서 이미 의존적인 경로가 되었다는 주장을 펴면서, 삼성은 노무현정부처럼 경로의존성과 탁월성을 혼동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대목에서는, 검이 허투루 휘둘러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성과 이건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수시로 노무현정부와 노동운동과 진보학계에 대한 노여운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왜일까?
제대로 된 분석과 해석이 있어야 한다는 것, 양 극단의 ‘전시체제’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 논쟁의 대상을 진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 ‘불신의 소용돌이’에서 탈출하자는 것,이런 것들이 저자가 가진 문제의식이고, 평자도 평소 이런 뜻에 깊이 공감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동안 독자로서 내내 혼란스럽고 불편했다. 왜 그런지 책을 덮고 나서 생각해보니, 강준만이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따뜻한 마음으로 중재하고 설득하려는 상대로서의 ‘우리’의 범주에 평자가 속해 있는지 아닌지가 불분명해서였다. 분명 머리말에서는 “우리는 정말 이건희를 알고 있는가?” 하고 시작했는데,1~2장의 현상분석을 거쳐 3~5장에서는 계속 각장 말미에 이건희와 삼성에 우정어린 충고를 하고 있다. 그리고 맺는말에서는 이건희와 삼성, 그리고 그 비판자들에게 소통과 성찰을 요청한다. 처음에는 저자와 독자가 ‘우리’로 묶여 있다고 생각했지만, 마지막에서야 강준만은 ‘우리’와 달리 구름 위로 올라간 우아한 중재자였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러니 이제는 지상에 남겨진 삼성의 비판자들, ‘우리’에 대해 변호를 좀 해야겠다. 그리고 왜 저자의 중립적 태도와 설득력이 모호하고 허약해 보이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저자는 재벌개혁론자와 재벌옹호론자 등 생각을 달리하는 독립적 지식인들 사이에 논쟁과 토론이 거의 없다고 하면서, 싸움의 대상을 진지하게 여기는 싸움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재벌개혁론자들은 재벌과 이해관계가 없는 독립적 지식인들의 재벌옹호론에 성실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재벌옹호론자의 목소리로 대안연대, 이찬근(李贊根), 장하준(張夏準) 교수를 거론하면서 이들에게 우호적인 자세를 취한다. 그럼에도 비록 재벌과 이해관계가 없다는 단서가 붙기는 했으나, 재벌옹호론자로 분류된 데에 대해서 당사자들이 썩 유쾌해할 것 같지는 않다. 저자는 최종적으로는 모든 게 ‘사람과 문화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평자의 판단으로는 이찬근, 장하준 모두 문제를 이건희 회장으로 귀결시키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 같다. 그들 역시 관심은 씨스템, 구조, 정책대안에 있을 것이다.
더욱이 재벌개혁론자들은, 그들이 토론에 성실하지 않았다고 지적된 데에 대해서 상당히 억울해할 것이다. 재벌개혁론자들도 현재 우리의 개혁수준에 비해 개방이 다소 과도하다는 점, 특히 외국인의 주식보유비중이 지나치게 높고 금융기관에 대한 외국자본의 지배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한 전제하에서 그동안 외국자본이 국내자본을 보완하고 구조조정과 기업지배구조 개선 등에 기여한 측면이 있다는 점도 열심히 설명했다. 그들의 노력에 힘입어 투기적 외국자본이 국내 금융시장을 장악하여 한국의 실물경제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것이 지나치게 과장된 주장이라는 사실도 어느정도 밝혀졌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재벌개혁론이 당장 재벌총수의 목을 비틀고 경영권을 박탈하자는 난폭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무엇이 대안인가는 정말 중요한 문제다. 저자는 대중들이 이건희와 삼성에 대해 갖는 양가감정을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우리’와 삼성 양자 모두에게 ‘타협’을 종용하고 있음이 읽혀진다. 그러나 ‘우리’가 후퇴하고 타협을 원하면 삼성도 그렇게 할 것인가? 너무나 당연하게도 기업은 이익을 좇아 움직인다. 접점지대와 중간지대를 넓혀 ‘우리’가 재벌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고 관용하면, 재벌은 안도할 것이고 결국 재벌을 ‘타협’에 나서도록 하는 유인을 삭감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재벌총수의 성패가 국민경제의 운명과 직결되는 상황은 너무 위험하다.‘신뢰’가 그런 위험을 더 심화할 수 있으므로, 평자는 당분간은 ‘불신’의 자리에 머무르고 싶다. 그래서 삼성이 상속법, 공정거래법, 금산법(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 등을 희롱하는 것을 경계하고, 또 재벌의 불법적인 정치자금 제공이나 탈세에 대해서도 견고한 자세를 지녀야 한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이건희학, 삼성학이 곧 한국학이라는 주장에도 다른 시각을 이야기하고 싶다. 삼성이 지금 수출 총액, 주식시가 총액의 20%를 차지하고 있지만, 한국의 국민경제와 발걸음을 함께할 것이라는 기대는 별로 현실적인 것이 못된다. 삼성의 경우 글로벌한 기업이 될수록 국내산업과의 연관이나 고용효과가 약화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대다수 국민과 관련된 한국경제의 미래는 중소경영체의 혁신적 발전과 동북아–남북한의 협력발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