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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40주년에 부쳐 | 일본
세까이(世界)
공동의 지적 전선을 준비하자
오까모또아쯔시 岡本厚
『世界』편집장 KYR00246@nifty.ne.jp
사회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지향하며, 한국 언론계에서 언제나 중요한 역할을 해온 『창작과비평』의 창간 4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세까이』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를 다루는 일본의 종합월간지입니다. 일본 언론계에서 기업사회로부터 독립해 지식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며, 또 비판적인 논조를 견지한다는 점에서 『창비』와 비슷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까이』는 『창비』보다 20년 앞서 창간되었습니다. 바로 지난해(2005)가 창간 60주년의 해였습니다.
1945년은 일본이 2차대전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미국의 점령을 받은 해로, 그런 결과를 초래한 일본 근대의 발자취나 존재방식이 근본부터 문제제기되던 때였습니다. 일본인에게는 너무나 커다란 재난(히로시마와 나가사끼의 원폭피해가 그 상징)이었던 전쟁의 의미를 되새기고, 왜 일본의 지식사회는 이 전쟁을 중단시킬 수 없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세까이』 창간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번 다시 일본이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 지식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 사람들에게 어떻게 호소해야 하는지가 『세까이』의 일관된 테마였습니다.
일본에서 전쟁의 역사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메이지유신(1868) 이후 일본 근대에 관해 논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일본의 근대를 논하는 데는 필연적으로 대외적인 전쟁과 침략, 식민지지배에 관한 문제제기가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두번 다시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국내적으로 민주주의를 확립시키고, 국외적으로는 일본이 침략·지배한 한반도, 중국, 동남아시아의 사람들과 화해하고 다시금 신뢰를 맺는 길밖에 없습니다.
거칠게 말해서 『세까이』의 60년 발자취의 전반기는 전쟁에 대한 반성과 냉전체제에 대한 비판, 일본의 민주화가 주된 테마였고, 70년대 이후의 후반기는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인들과의 화해가 주된 테마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지하는 바처럼 『세까이』는 7,8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깊은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그것은 이웃 나라의 어려움을 지원하는 의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역사의 반성이란 자신에게 정의를 회복시켜주기 위해 스스로 행하는 것이며, 일본에 있어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청산은 곧 목전의 남북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분단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여기고 대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까이』를 창간하고 전반기에 편집을 담당한 이는 철학자 요시노 겐자부로오(吉野源三郞, 1899〜1981)였습니다. 그의 뜻을 이어 후반기의 편집을 담당한 이는 야스에 료오스께(安江良介, 1935〜98)입니다. 야스에는 한국어를 전혀 못했지만 김대중 전대통령을 비롯한 당시 남한의 민주인사와 우정을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도 깊은 신뢰관계를 맺었습니다. 지금은 밝혀진 것입니다만, 80년대 말 한국의 지식인이나 작가 들은 야스에의 지원을 받아 방북했습니다.
저는 그의 곁에서 20년 가까이 함께 일하며 그런 사실들을 들어왔습니다. 그는 일본인이라면 남북 모두에게 식민지지배의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냉전이나 분단을 이용하거나 자기변명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하고, 만약 일본인이 남북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거나 한반도의 사람들이 가장 고통받는 문제인 분단과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일에 일익을 담당한다면 그보다 중요한 식민지지배의 보상은 없다고 믿었습니다.
남한의 언론이 군사정권에 의해 철저하게 억압받고 있다면, 우선 언론의 자유를 향유하는 일본의 언론기관이 그 귀가 되고 눈이 되고 입이 될 책임이 있다는 그의 생각은 비밀통신 「한국으로부터의 통신」(TK生)을 탄생시켰습니다. 1972년부터 88년까지 온갖 공작과 협박, 그리고 북한의 스파이라는 비방 등을 견디며 통신은 『세까이』에 게재되었습니다. (이 통신이 한국과 일본을 넘나든 국제적 프로젝트였으며,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지명관池明觀씨가 필자였던 사실은 2003년 여름에 밝혀진 바 있습니다.)
군사정권하 한국에서 『세까이』는 금서였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수입할 수 없었지만, 다양한 통로로 반입하여 민주화운동의 활동가들이 복사물로 돌려 읽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당시 이것을 읽기 위해 일본어를 공부했다든지, 칠흑같은 어둠속 한줄기 빛과 같았다는 말을 듣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가슴이 뜨겁게 벅차옴과 동시에 설령 작은 잡지일지라도 자유롭고 독립된 언론은 커다란 힘을 발휘한다는 확신을 새롭게 갖습니다.
저는 1997년부터 『세까이』의 편집장을 맡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는 냉전이 끝나고 전지구화라는 미명하에 자본의 폭주로 인한 빈부격차 확대, 부유한 자에 의한 수탈, 추방된 자의 생존위기, 지구환경의 파괴 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들에 공통되는 과제가 목전에 존재합니다. 동시에 일본,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는 아직 냉전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주화를 이룬 한국 국민들의 커다란 희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중국과 타이완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은 문제가 한층 더 심각합니다. 냉전 후 이어진 오랜 불황 속에서 내셔널리즘은 고양되었고, 중국과 북한 혹은 한국에 대한 적대의식은 확대되어가고 있습니다. 전쟁에 대한 반성이 낳은 평화주의, 그것을 나라의 기반으로 규정한 헌법9조(전쟁포기)를 버리고 군사력을 확대하려는 생각이 점차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그것은 논리적이라기보다 감정적이며, 국내의 폐쇄감을 외부에 대한 공격으로 해소하려는 심리입니다. 과거 일본은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완전히 결여된 자기중심적인 논리(팔굉일우八紘一宇, 오족협화五族協和, 동아신질서 등)를 다른 나라에 강요했으며, 저항에 부딪치자 그 저항세력을 탄압하여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커다란 희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최근 야스꾸니신사(靖國神社) 문제 등을 보면, 저는 정부의 논리나 매스컴의 논조, 사회의 대응이 과거와 점차 닮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까이』 창간의 뜻이 상기되는 시대가 다시금 왔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1930년대와 현재는 다릅니다. 무엇보다도 국경을 넘는 인적 교류, 정보의 교환, 신뢰와 협력의 네트워크가 한 국가 안에서의 폐쇄적 논리를 용인하지 않습니다. 2001년과 2005년에 거듭된 우익적 역사교과서의 강력한 채택운동이 거의 실패로 끝난 것도 일본사회에서 자라난 시민의 힘과 함께 국제적인 네트워크와 감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일본이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보나 안전보장의 측면으로 보나 동아시아 나라들과 연대해야 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그리고 일본사회의 전쟁·식민지지배에 대한 반성, 역사인식의 확립 없이 동아시아 공동체는 구축될 수 없습니다. 일본이 안고 있는 과거의 문제는 단순히 과거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미래의 문제입니다.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문제입니다.
일본의 문제가 동아시아의 문제, 즉 『창비』의 테마이듯, 한반도의 분단문제는 동아시아의 문제, 곧 『세까이』의 테마입니다. 우리는 동아시아의 언론을 담당한 입장에서 연대와 교류뿐만 아니라, 공통의 문제(예컨대 전지구화, 내셔널리즘, 미국, 미디어, 지식사회의 쇠퇴 문제 등)에 대해서 공동의 지적(知的) 통일전선을 준비할 때가 도래했다고 생각합니다.
〔박광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