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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40주년에 부쳐 | 일본
겐다이시소오(現代思想)
『창작과비평』을 다시 만나기 위해
이께가미 요시히꼬 池上善彦
『現代思想』편집장 jikegami@ka2.so-net.ne.jp
2001년 무더운 여름, 타이뻬이(臺北)에서 열린 한 심포지엄의 뒤풀이 장소는 다시 찾아가려 해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미로 같은 골목에 있는, 타이뻬이대학 앞의 어떤 음식점이었다. 그곳에서 한국학자 한 명을 만났다. 당시 『창작과비평』의 편집위원인 백영서씨였다. 『창작과비평』, 그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1980년이었다.
1980년 4월, 나는 서울에 있었다. 첫 방한이었다. 70년대 이후의 한일교류(그것을 교류라고 부를 수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긴 하지만)를 거론할 때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그것은 60년대 말부터 시작된, 김지하 등으로 상징되는 한국 정치범에 대한 일본의 지원운동이다. 그중에는 재일한국인 정치범에 대한 구원운동도 포함된다. 한국에서 재일한국인들이 체포된 후, 일본 내 그들의 가족과 친구를 중심으로 구원회가 조직되었다. 나는 그 집회에 가끔 참석한 학생에 불과했지만, 그날 한국의 감옥에 있는 정치범에게 차입물을 넣어주기 위해 토오꾜오를 출발해 한국에 왔던 것이다. 서울 체재중에 수없이 들었던 것이 『창비』와 백낙청씨의 이름이었다. 어떤 문맥에서 그 이름을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또 그들이 어떤 주장을 했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설령 그 내용이 무엇인지 몰랐더라도 나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 이름들을 귀에 담고 있었다.
사실 『창비』와의 교류는 백영서씨와 만난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겐다이시소오』에서 1988년에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 특집을 꾸민 적이 있었다. 그때 카라따니씨로부터 소개받아 『창비』의 최원식씨에게 원고를 부탁드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분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때는 내 젊은 시절 기억 속의 그 『창비』의 일원이라는 것 때문에 부담이 앞서 그 이상의 교류는 갖지 못했다. 그때 나는 아직 1980년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는지도 모른다.
『겐다이시소오』는 1973년에 창간되었다. 내가 편집을 맡게 된 것은 1991년부터다. 당시에는 아시아 또는 동아시아의 관점 같은 것은 전혀 없었으며, 그런 주제를 다루어온 전통도 이 잡지에는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있었지만 잡지 편집일을 하는 데서 그것을 발전시킬 계기를 찾기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 사정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1996년쯤부터인 듯싶다. 계기는 문화연구(cultural studies)의 도입이었다. 그해 토오꾜오의 한 심포지엄에서 타이완의 쳔 꽝싱(陳光興)과 만났고, 그를 통해 다음해 타이뻬이에서 한국 연구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서구이론을 경유해서 만나긴 했지만, 당시를 함께했던 사람에게 그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서구이론의 소개를 하나의 커다란 임무로 삼던 『겐다이시소오』로서는 그것이 지극히 필연적인 일로 여겨졌다. 이는 결코 나 혼자만의 경험일 리 없다. 그러나 서구이론을 매개로 만나다보니 각국의 현상에 대한 비교 이상의 논의를 전개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만남은 내게 대단히 신선한 것이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의 논문을 차례로 『겐다이시소오』에 게재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아시아 또는 동아시아의 관점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최근 알고 지낸 필자의, 내가 흥미롭게 생각한 논문을 게재한다는, 내가 항상 일본 내 필자에 대해서 취하던 태도와 동일한 자세로 게재해갔다. 기본적으로 이 태도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것은 내가 우선적으로 지켜야 할 예의이며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논문을 자주 게재하면 할수록 지금까지는 없었던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가령 싸이드(E. Said)든 데리다(J. Derrida)든 그들의 번역을 실을 때와는 (극히 일부의 범위에서이긴 하지만) 반응이 전혀 다른 것이었다. 잘 실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왜 아시아의 논문을 실었느냐는 비판도 받았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잡지출판의 현장에서도 아시아라는 살아있는, 그러면서 항상 문제화되는 현장이 현재 여기에 선명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것은 서구의 것을 소개할 때와는 전혀 다른 국면이었다.
아시아의 학자들과 처음 만난 때도 그랬지만, 특히 쌍방이 자기가 처한 상황에 대해 비판적이고자 하면 할수록 쌍방의 주장이 정반대로 달라지고 만다. 어디까지나 하나의 예이긴 하지만, 쌍방은 자국의 내셔널리즘적 성향에 대해 내재적으로 극복하려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에 이해를 구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일본에서도 그런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하면, 그들은 일본에는 진정한 비판적 사상의 전통이 있는지를, 즉 자신들의 역사를 경시하는 것은 아닌지를 역으로 비판한다. 그러면서도 혹 일본 비판이라도 하면, 그것은 일본의 독자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심지어 원래 식민지문제는 일본 쪽이 발언할 계제가 아니라는 말까지 한다. 물론 그것이 공통의 문제이기 때문에 함께 고민하자는 뜻임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서로에게 공통의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그런 말에는 왠지 동의하기가 어렵다.
아시아는 거울의 관계라든지 비대칭적이라든지 혹은 비틀림의 관계에 있다는 식으로 흔히 표현되는 이런 관계들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 것인가? 2000년을 즈음하여 그것은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역으로 말하면 그런 물음이 필연적으로 생기는 장소가 아시아, 특히 동아시아인 것이다. 이 물음을, 이 장소를 소중히 여기고 싶다. 전지구화의 영향 때문에라도 현재 다양한 장소에서 전개되는 동아시아와의 만남의 장에는 사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필연적인 구조가 근저에 존재한다. 평상시 인식하지 못하고 지내지만 결정적인 장면에서 우리들은 그 구조 안에서 만난다. 그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가면 현재 일본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대(對)아시아에 대한 망설임과 거부의 방향으로 향할 것이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면 자기개혁의 계기가 될 것이다. 나는 현재 그 방향에 대한 명확한 전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분간은 이 물음을 화두로 삼고자 한다. 그것이 지금 내게 있어서 동아시아를 생각하는 일이다.
이름뿐이기는 하지만 1980년에 처음 만난 『창비』를 20년 이상 걸려서 다시금 만나기 위해 나 자신은 준비되어 있는가. 풋내기 학생시절 우러러보듯 상상하던 『창비』에 대해 지금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그것은 나와는 다른 경위와 경험으로 20년, 30년, 40년 동안 이 잡지를 주시해온 사람들과는 다른 행보이고 생각일지 모른다. 이 정도나마 지금 비로소 솔직히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창작과비평』 4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박광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