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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박완서 朴婉緖
1931년 경기도 개풍 출생. 1970년 『여성동아』 공모에 장편 『나목』 당선. 소설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 장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 등이 있음.
친절한 복희씨
그는 멍한 눈으로 창밖을 보고 있다. 창도 그의 눈동자만큼이나 멍하다. 대학이 지척에 있어 젊은 활기로 넘치던 동네에 인적이 끊기니 단조롭다 못해 바보 같다. 벌써 겨울방학으로 접어든 것이다. 이삼층짜리 다세대주택들은 처음에는 조금씩 다른 빛깔로 지었겠지만 인기척이 없어지고부터는 일제히 회색빛을 덧씌운 것처럼 음울해 보인다. 우리집도 딴 이웃들처럼 우리가 사는 층 빼고는 원룸으로 개조해서 학생들한테 세를 놓아 먹고산다. 좀 무료하긴 하지만 안전한 노후대책이라고 만족해하고 있다. 방학해서 학생들이 빠져나간 집 안엔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적막감이 감돈다. 아무도 없이 그와 나 단둘이 있다는 게 나를 불안하게 한다. 그는 중풍에 걸려 오른쪽 반신이 흐느적대고, 제 입안의 침도 잘 수습하지 못한다. 뭐라고 말을 하기는 하는데 잘 알아들을 수 없이 버벌거린다. 나니까 대강 알아듣지 타인하고는 거의 의사소통이 안된다. 입술을 오므리지 못하니까 나를 ‘복희야’라고 부르고 싶을 때는 입가에 심한 경련이 인다. 나는 그게 불쌍하지 않고 고소하다. 처逑적 그의 집에서 식모살이할 때부터 함부로 부르던 이름을,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데도 그의 마누라가 된 후에도 기분이 좋을 때나 화가 날 때는 연달아 불러대곤 했다. 반신이 무력해진 후에도 속에서 뻗치는 기운은 여전한 듯 말이 잘 안돼 고함으로 변할 때는 유리창이 다 들들댄다. 원래 기운이 넘치는 장대한 남자였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쓰는 게 이상인 단순한 남자가 늙고 병들어 썩은 포대자루처럼 처져 있는 걸 보면서 나는 측은하단 생각이 들기보다는 기괴한 환상에 시달린다. 저 남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가 거침없이 말할 때도 그의 생각은 주로 욕망에 관해서였다. 물욕, 식욕, 성욕이 남보다 강하고 그걸 표현하는 데 망설임도 수치심도 없었다. 말로도 행동으로도 그런 욕망을 채울 길이 막혀버린 지금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생각은 무슨, 그의 속이 텅 비어 있다고 생각해도 불안하고, 텅 비었다고 생각하고 그 안에다 뭘 자꾸자꾸 쑤셔넣고 싶어하는 나는 더 불안하다. 내가 불안한 건 그가 아니라 나다.
나는 벌레 한마리도 못 죽이는 착한 여자다. 남들이 다들 그렇다고 그런다. 정말 벌레 한마리도 못 죽이는 위인이 된 것은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알아준 후부터이고 그전에는 가난한 보통사람만큼 곤충 종류의 벌레를 죽였을 것이다. 왜 그냥 보통사람이라고 안하고 ‘가난한’을 보탰냐 하면, 보통사람들도 이미 내복 갈피에 이가 서식하지 않을 만큼의 청결은 유지하고 살 때였는데도 우리 식구는 어떻게 된 게 저녁만 먹고 나면 내복을 홀라당 벗고 오순도순 이 사냥을 해야만 다음날 덜 긁적거리며 지낼 수 있을 정도로 구질구질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없이 살았다고 해서 내 유년기가 우울하고 불행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 오남매가 흐릿한 전등불빛 밑에서 등에 멍 같은 점이 찍힌 보리알만큼 살찐 이를 두 엄지손톱 사이에서 오지직 소리가 나게 눌러죽이며 낄낄대던 정경을 떠올리면 가족오락회의 추억처럼 그리운 미소가 번지곤 한다. 지금은 서울의 위성도시 중에서도 집값이 제일 비싼 고급 아파트단지가 된 지 오래지만 그 때만 해도 농촌이었으니 비록 땅 한뙈기 없이 사는 집구석에서 자랐어도 논에서 메뚜기도 잡아 구워먹었을 테고, 사내녀석들을 따라 개구리를 잡아 모닥불에 그슬려 그 뒷다리를 먹어본 적도 있다. 맛이 어땠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개구리를 잡아 불 속에 던질 때까지는 사내아이들과 다름없이 굴다가 막상 개구리 뒷다리를 입에 넣고 나서는 도저히 맛있게 먹는 시늉을 할 수가 없어 낭패스러웠던 일은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도시에서 배불리 먹고 깔끔을 있는 대로 떨며 살 만하게 된 후에도 어찌 파리나 모기를 철썩철썩 때려잡은 적이 없겠는가. 제일 처음 벌레 한마리도 못 죽이는 병신취급을 당한 것은 지금의 영감한테 시집오고 나서 얼마 안돼서이다. 나는 열아홉 꽃 같은 나이에 초혼이었지만 그는 서른을 넘긴 띠동갑 홀아비였다. 그가 펄펄 기운이 넘치고 내가 영양실조기가 있는 심약한 계집애였을 때는 도리어 나이 차이를 의식하지 못했다. 그이하고 하고 싶지 않은 결혼을 한 건 사실이지만 나이 때문에 그를 꺼렸던 건 아니다. 요새 나는 자주 거울 앞에 서곤 하는데 오래 바라보진 못한다. 너무 젊어 뵈는 내가, 중풍이 걸린 후 몰라보게 퇴락해가는 그보다 더 낯설어 보인다. 나는 자신이 마치 늙은 왕의 죽음과 함께 순장(殉葬)당한 어린 궁녀만 같아 그 애처로움을 차마 오래 견디지 못한다.
그는 단출한 홀아비가 아니라 전처의 아들도 하나 딸려 있었는데 우리가 간단하게 백년가약을 맺은 지 며칠 안됐을 때, 내일이 그 아이 생일이라면서 닭을 한마리 사왔다. 지금처럼 위생적으로 냉동처리한 닭을 통으로, 혹은 부위별로 팔 때는 아니었다. 시장통에는 닭장수 골목이 따로 있어서 가게마다 닭장 안에 가둬놓고 파는 산 닭 중에서 한마리 골라잡으면 최소한 모가지를 비틀어서 잡아준다거나, 부탁하면 가게 안 연탄불에 얹어놓은 양은솥의 끓는 물에 슬쩍 데쳐내어 털을 깨끗이 뽑아주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애아빠는 마치 집 안에 두고 기를 것처럼 벼슬이 시뻘건 장닭을 한마리 사다가 헛간 기둥에 매어놓으면서 내일 아침에 잡으라고 했다. 그 닭을 잡을 일이 태산 같아서 잡아서 국을 끓이라는 건지, 볶아먹자는 건지도 물어보지 못했다. 아이 생일날 새벽에도 장닭이 우는 소리에 깨어났다. 너무 자신 없는 일이라 그 일 먼저 해놓고 밥을 지으려고 마당의 수돗가로 도마를 갖다놓고 닭을 붙잡아다가 억지로 도마 위에 눕히고 식칼로 들입다 내려쳤다. 도마에 피가 낭자한 걸 보자 죽은 줄 알고는 진저리를 치면서 닭한테서 손을 뗐다. 그러나 닭은 푸드득 일어나 반쯤 잘린 모가지를 건들대며 마당을 가로질러 헛간 모퉁이를 향해 내닫는 게 아닌가. 닭은 헛간 모퉁이로 사라지기 직전에 흘긋 나를 돌아본 것 같았다. 닭의 핏발 선 눈과 마주치자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어찌나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던지 온 집안 식구가 다 깨서 뛰어나왔다. 애아빠는 그때 방산시장에서 잡화도매상을 하고 있어서 점원으로 와 있는 군식구가 여럿 됐다. 아이의 외할머니가 안방차지를 하고 있고, 우리는 건넌방을 쓰고 있었다. 건넌방에서 뛰어나온 애아빠가 사태를 알아차리고 핏자국을 따라가 뒤란에서 숨을 거둔 닭을 잡아오고, 나는 방에 데려다 눕혔다. 그때 나는 임신중이었다.
“원, 사람도 얼뜨긴.”
조금 늦게 안방에서 아이와 함께 나온 아이 외할머니에게 아이 아빠는 이 사람이 이렇게 얼뜨답니다, 하고 경위를 설명했다. 아이 아빠나 외할머니나 내가 얼뜨다는 것에 호의적이었다. 시집간 딸이 죽은 후, 새로 들어온 사위의 후처에게 전처의 어머니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는, 그런 경우가 그리 흔한 건 아닐 테니 정해진 건 없다고 해도, 그 노인은 거의 가여울 정도로 노상 경직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게 한결 누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놀라셨죠. 제 잘못이에요. 벌레 한마리도 못 죽이는 사람한테 닭을 잡으라고 했으니.”
얼뜬 사람이 순식간에 벌레 한마리도 못 죽이는 사람으로 변했다. 나는 이상한 가족구성원 속으로 시집온 후 처음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벌레 한마리도 못 죽이는 사람 시늉을 하고 누워 있고, 노인이 행주치마 두르고 부엌으로 나가 외손자 생일상을 차렸다. 나에게도 하얀 닭고기가 둥둥 뜬 미역국이 차례졌지만 욕지기가 나서 입을 틀어막고 물렸다. 임신중이었으므로 그건 당연한 권리였다. 내가 애를 가졌다는 얘길 사위에게 처음으로 들은 듯, 노인은 한약을 지어온다, 생약으로 이상한 풀뿌리를 다린다, 있는 정성 없는 정성을 다하고 나서 나에게 아무 일이 없자 당신 집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가 상처하고 나서 삼년 안에 새장가를 든 사람은 내가 첫번째가 아니었다. 나처럼 최소한의 육례를 갖춘 혼사는 아니었다고 해도 살림도 잘하고, 가게일도 곧잘 참견할 만한 여자를 들였다가 반년 만에 내치게 된 연유가, 성품이 독해서였다고 한다. 어린 전실 아들을 어찌나 모질게 학대했는지, 외할머니가 와보고 아이가 너무 꼬질꼬질해 목욕이라도 시켜주고 가려다가, 온몸이 꼬집혀 피멍 든 자국을 보고 놀라 사위한테 일러서 내쫓게 한 모양이었다. 그는 자식이라면 벌벌 떠는 사람이었고, 또 그만한 중심상권에 자기 점포를 장만해 빈곤을 벗어나기까지는 처가 쪽의 덕이 컸기 때문에 장모도 그 정도의 세도는 부릴 만했다. 그후 내가 들어갈 때까지 안방차지를 하고 외손자를 끼고 돌면서 집안의 대소사까지 건사하고 있었지만, 갈 데 없는 노인이 아니라 만장 같은 자기 집에 아들 며느리를 거느린 유복한 노인이었다. 안심하고 외손자를 맡겨도 된다고 판단한 이상 더 지체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비로소 나는 안방차지를 할 수가 있었다. 내 아이가 주줄이 생긴 후에도 그 전실 자식과 내 아이를 차별해 기르지 않았다. 모질지 못한 건 천성이다 쳐도 벌레 한마리도 못 죽인다는 건 사실과 달랐지만 그렇게 알려지자 행운이 뒤따랐는데 굳이 아니라고 우길 까닭이 뭐 있겠는가.
오늘은 두번째 일요일이니까 둘째네 식구들이 오는 날이다. 둘째라지만 전실 아들까지를 포함해서 둘째니까 내 속으로 낳은 자식으로는 맏이인 셈이다. 전실 자식과 내 자식을 차별해서 기르지 않았다고 했는데 사실이다. 내 자식이 생기고부터는 마음으로부터 그러기는 쉽지 않았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이는 게 내 신상에 편하다는 걸 안 이상 전실 아이를 더 사랑하는 척이라도 못할 것 없었다. 그 아이가 착해서 동생한테 샘내지 않고 예뻐해줬다는 것도 그 아이와의 좋은 관계에 도움이 되었다. 첫아들 다음에 첫딸을 낳고도 아들 둘을 더 낳아 전실 아들까지 치면 오남매를 두게 되었다. 딸은 미국유학까지 보냈더니 거기서 신랑 만나 결혼해서 잘산다. 나는 딸 덕에 미국 구경한 적은 없다. 딸이 이삼년에 한번씩 다니러 온다. 남은 네 아들은 장가가서 제 가정을 이루면서 뻔질나게 드나드는 자식도 있고 어쩌다가 선물을 잔뜩 사가지고 오는 자식도 있었다. 우리가 가진 것도 자식 신세 안 지고 먹고살 만했으므로 자식들이 그러건 말건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제각기 생긴 대로 하던 효도를 어느날 둘째며느리가 나서서 교통정리하더니 오늘날처럼 공평하고 규칙적인 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똑떨어지게 똑똑한 둘째며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전실 자식까지도 차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대할 수 있었던 건 며느리가 생기기 전까지고 남의 자식들이 들어오고부터는 내 마음속에도 저울이 생기기 시작했다. 겉으로 나타내진 못하고 있지만 며느리에 따라서 예쁜 자식, 미운 자식이 생긴 것이다. 편애의 쾌감은 독하고 날카롭다. 첫째 일요일엔 첫째네가, 둘째 일요일엔 둘째네가, 이렇게 순번을 정해서 오기로 합의했다고, 마치 노인복지사처럼 나무랄 데 없이 공손하고 친절한 태도로 알려줬을 때 내가 뭐랬더라?
“공일이 닷새 든 달도 있던데 그런 공일날엔 뭐 할 거냐. 네 집이 모여서 얼씨구 소풍이라도 가지 그러냐.”
“어머님도 참, 우리도 스트레스 안 받는 날도 좀 있어야죠. 그게 그렇게 억울하시면 미국 있는 시누님을 다달이 부르시든지요.”
요렇게 싸가지 없는 며늘년을 내가 아무리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시어미라 해도 어떻게 안 싫어하겠는가.
정해진 시간에 인터폰이 울리고 거실 화면에 유치원 다니는 손자의 모습이 비친다. 화면 속의 그 아이는 점프를 하면서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 보인다. 잠시도 가만히 못 있는 것하고, 시도 때도 없이 V자를 그려 보이는 게 그 아이의 좀 별난 버릇이다. 위로 누나도 있는데 남매를 같이 데려올 적도, 부부가 같이 올 적도 없다. 아이가 별나게 굴 때마다 어미는 아이를 나무라는 대신 제 아빠를 닮았단다. 나 들으라는 소리일 것이다. 하도 정신없이 길러서 나는 내 아이들이 그맘때 어땠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네 식구 중 두 식구가 번갈아오는 것도 둘째네의 특징이다. 손자는 어미하고, 손녀는 아비하고. 손녀는 동생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다가 숙성해서 숙녀티가 난다. 하는 짓도 빈틈이 없다. 과일을 그림같이 깎아다가 할아버지 입에 넣어드린다. 그러나 빨리 의무를 끝내고 일어서고 싶은 티가 역력한 걸 나는 매번 놓치지 않는다. 저게 어미 닮았지 싶지만 말은 안한다. 나는 며느리 흉을 아들한테 보는 바보가 아니다. 뭐든지 되는대로 하는 게 없이 꼭 규칙을 정해놓고 거기 따르도록 돼 있는 게 그 집구석이다. 전실 아들한테서 본 큰며느리는 시부모 방문을 날짜 정해놓고 하는 것을 불편해한다. 정해진 날 못 올 적도 있고, 그럴 때는 나한테 미안해하는 게 아니라 동서의 눈치를 더 본다. 동서한테는 다녀간 걸로 해달라고 나에게 부탁을 할 적도 있다. 나는 일단 그렇게 입을 맞추고 나면 그 약속을 잘 지키지만 실수하는 쪽은 오히려 큰며느리이다. 조만간 무슨 말끝에고 탄로가 나고 만다. 나는 그렇게 허술한 큰며느리에게 공범자 같은 우정을 느낀다. 큰며느리가 둘째보다 더 마음에 드니까 큰아들은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닌데도 정이 간다.
손자가 제 어미를 앞질러 펄쩍펄쩍 뛰어들어오더니 흔들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는 할아버지 무릎으로 뛰어올라 두 팔로 할아버지 목을 감고 양볼에 쪽쪽 소리가 나게 뽀뽀를 하고는 귀에다 대고 할아버지 사랑해요, 라고 악을 쓴다. 손자는 매번 똑같이 그렇게 한다. 그이는 말을 잘 못할 뿐 귀가 어둡다는 징조는 아직 없다. 그이의 표정이 웃는지 찡그리는지 잘 분간할 수 없다. 아이에게 사랑한다는 말만 시키지 않았어도 그애들의 방문이 한결 견디기 쉬우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영감의 고막에 동정심을 느낀다. 그만, 할아버지 피곤하시다. 사가지고 온 과일 나부랭이를 냉장고에 넣다 말고 며느리가 아이에게 명령한다. 아이가 살았다는 듯이 할아버지 무릎에서 뛰어내려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나도 그 짧은 동안에 숨쉬는 것을 참고 있었던 양 비로소 긴 숨을 내쉰다. 손자가 제 어미에게 할아버지한테서 냄새난다고 이르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아이가 지나치게 예민하거나, 노인한테서는 으레 냄새가 나려니 하는, 그 나이 또래의 맹랑한 선입관 때문이지 정말로 냄새가 날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소리 안 듣게 하려고 내가 얼마나 힘들게 그이를 거두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냄새 피우기에 알맞은 짓을 그이가 하는 것은 사실이다. 아직도 식욕이 왕성하고 소화가 잘되는 그이는 하루 한번씩 찐득한 점토 같은 변을 변기 하나 가득 본다. 보행이 불편해도 제 발로 걸어서 화장실 출입하는 데 문제가 없고, 수시로 가벼운 산책도 할 수 있고, 변비 같은 것도 없으니 고마운 노릇이다. 문제는 뒤처리다. 마비된 오른손은 멋대로 흐느적대니까 그렇다 쳐도, 성한 왼손도 항문까지 잘 도달하지 않는지, 역한 냄새를 풍겨서 벗겨보면 아랫도리와 속바지가 누런 변으로 칠갑이 돼 있다. 휴지로는 도저히 깨끗이 마무리가 안되니까 더운물로 씻어주기 시작했다. 그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어차피 속옷을 손으로 빠는 것도 그만큼 인내력을 필요로 하는 거니까 밑을 씻어주는 게 한결 손이 덜 갔다. 그가 그걸 즐기지만 않았어도 그가 죽는 날까지든, 내 수족이 성한 날까지든, 마냥 그렇게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이는 내가 해주는 뒷물을 처음에는 약간 미안해하는 듯하더니 차츰 즐기기 시작한다는 게 느껴졌다. 발음이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처음에 그가 내지른 소리는 아유 시원해, 아아 시원타, 정도였을 것이다. 너무 시원해서 그랬던가, 차츰 발음하기를 포기하고 신음 같은 흥얼거림으로 변했다. 나는 그 흥얼거림에서 성적인 낌새를 챘다. 나의 짐작은 틀림이 없었다. 하루에 한 번씩 보던 변을 두 번씩 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아랫도리에서 단호하게 내 손길을 떼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둘러 화장실에 비데를 설치했다.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세상에 그런 편리한 장치가 있다는 걸 당신은 아마 상상도 못했을걸. 용용 죽겠지 놀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떡하든지 엉터리로 씻거나 안 씻어서 내 손이 가게 만들었다. 주름이 많은 아랫도리를 깨끗이 씻기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시간이 걸리고 손길도 섬세해야 한다. 그동안 내가 참아내야 하는 것은 기분이 좋아 흥얼거리는 그의 교성만이 아니다. 나는 그동안 될 수 있는 대로 숨도 안 쉰다. 구린내를 안 맡고 싶은 것보다는 내 안에서 출구를 찾고 있는 잔인한 충동이 겁나기 때문이다.
요새 다시 예전처럼 납작하고 동그란 금속갑을 꺼내 그 안 하나 가득 말라붙어 있는 까만 고약 같은 게 잘 있나 확인해보고 위안을 얻는 버릇이 도졌다. 그건 내 인생의 슬픈 동반자이고, 오남매가 흐릿한 30촉 전구 밑에 모여앉아 이 잡으며 킬킬거리고 자랄 때부터 우리 친정집에 있던 비상약이다. 엄마는 그걸 아편이라고 했다. 어릴 때도 엄마가 아편이라고 말할 때는 바깥의 인기척을 살피면서 목소리를 낮추는 걸로 봐서 불길하고도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만 쓰면 만병통치약이지만 많이 먹으면 고통 없이 죽을 수도, 남을 감쪽같이 죽일 수도 있는 약이라고 했다. 그런 무시무시한 약이 어디서 났냐고 했더니 엄마는 시집올 때 친정에서 몰래 훔쳐왔다고 했다.
“외갓집에선 그게 어디서 났는데?”
“외할머니가 뒤란에다 몰래 앵속을 기르시지 않았냐.”
“앵속이 뭔데?”
“양귀비라고, 꽃이 어찌나 요상하게 화냥년처럼 피는지 금방 눈에 띈단다. 일정 때 왜놈 경찰한테 들키면 당장 때들어갔대. 그래도 그 동네선 다들 조금씩 몰래 길렀다더라. 꽃이 지고 열매가 맺으면 그 열매에다 상처를 내서 진을 받으면 그게 아편이란다. 때들어가는 걸 무릅쓰고 앵속을 기른 것은 토사곽란에 그것처럼 즉효약은 없었으니까. 지금처럼 마이신 같은 신통한 약이 없을 때였느니라. 어느 핸가 호열자가 돌아서 왜놈들은 걸렸다 하면 다 죽었는데, 우리게선 걸린 사람도 하나도 안 죽고 살아나서 일본놈들이 약이 올라가지고 무슨 약 쓰고 살아났나, 꼬치꼬치 묻고 다녔더란다. 굿하고 나았다고도 하고 고추장 먹어서 가볍게 걸렸다고도 하고 제각기 둘러대고 속으로 얼마나 고소해했는지 모른다고 하는 소리를 여러번 들었느니라.”
“그렇게 신통한 약을 훔쳐오면 어떡해.”
“나 시집올 때는 페니시링, 마이신이 나왔을 땐데 그까짓 걸 약에 쓰자고 훔쳤겠냐. 많이 먹으면 죽을 수도 있는 독약이라기에 훔쳤지. 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싸울 때마다 너 죽고 나 죽자고 사생결단 싸웠고 그때마다 내가 울며불며 뜯어말려 버릇해놔서 나만 없어지면 정말 무슨 일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 홧김에 눈이 뒤집히면 목구멍이 타서 죽는다는 양잿물도 마시는데 그렇게 편히 죽을 수 있다는 아편을 왜 못 먹겠냐.”
엄마가 부모님 목숨을 보전하러 훔쳐온 아편덩어리를 나는 왜 재차 훔쳤을까. 집을 나올 때 나는 그 납작한 생철갑을 보따리 깊숙이 찔러넣고 줄행랑을 쳤다. 아마 도시가 무서워서였을 것이다. 은장도가 잘 들어야 맛이 아니듯이 가까이 지녔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했다. 만일 은장도의 날이 시퍼렇게 서 있다면 상대방을 겨누지 뭣 하러 자기 명치를 겨누겠는가. 나는 송진덩어리를 자꾸 주물러서 새까맣게 손때가 묻은 것처럼 생긴 이 오래된 아편덩어리의 효능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나는 벌레 한마리도 못 죽이는 착하디착한 여자다. 생철갑이 위안이 된 고비는 여러번 넘겼지만 써먹을 엄두까지는 못 내봤다.
서울 와서 처음 취직한 자리가 지금의 영감이 주인으로 있는 방산상회였다. 그 동네서 자전거 타고 배달 다니는, 한동네 살던 머스마를 길에서 우연히 만난 게 계기가 되었다. 단봇짐을 싸가지고 대처로 나올 때의 목표는 버스차장 자리였다. 방산시장 근처를 얼쩡댄 것은 그 근처에 시외버스 종점과 버스 사무실이 있기 때문이었다. 제 앉은키보다 훨씬 높게 짐을 싣고 달리던 머스마는 나를 보고 반색을 했고, 일자리를 구하러 다닌다는 걸 알고는 점원을 구하는 집을 알고 있노라고, 자기가 말하면 문제없을 거라고 했다. 나는 너무도 쉽게 될 것 같은 취직이어서 일단 튕겼다. 내 목표는 버스차장이라고. 그 소리를 듣고 그애가 어찌나 한심스러운 표정을 짓던지 튕기는 게 손해라는 걸 알아차렸다. 취직은 쉽게 되었지만 가게일보다는 가게 뒤에 딸린 안집의 부엌일을 더 많이 해야 했다. 주인아저씨는 상처한 뒤였지만 점원들을 비롯해서 서울로 공부하러 와서 신세지고 있는, 이 집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는, 또는 알 필요도 없는 군식구들이 득시글대는 복잡한 집이었다. 주인아저씨가 나를 아래위로 한번 쓱 훑어보고 나서 선선히 월급을 얼마 주겠다는 제안을 한 걸 보면 점원이 맞긴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식모살이는 대개 서울 가서 밥이라도 실컷 얻어먹으라고 월급 없이 내보내던 시절이었다. 처음부터 가게일보다는 부엌일을 시킬 요량으로 채용했는지는 모르지만 주인아저씨가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군식구가 많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우거지찌개라도 많이 해서 여러 식구를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주인아저씨가 위대해 보여 그를 도와준다는 데 자부심을 느꼈다. 점원이면 어떻고 식모면 어떠랴 싶었다. 그 일에 보람을 느끼고 성심성의껏 일하는 동안 내 가랑이에선 불이 났고, 손등은 난도질을 해놓은 것처럼 트고 갈라졌다.
어느날 저녁, 뜰아래에 있는 독방으로 밥상을 들고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그 방은 한 평밖에 안되는 작은 방이었지만 서울 와서 대학 다니는 청년이 혼자 쓰기 때문에 깨끗이 정돈돼 있고, 발고린내 같은 고약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주인아저씨의 죽은 마누라의 친척 되는 대학생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점원들이나 딴 군식구들보다 계란프라이라도 한 접시 더 올리려고 신경이 써지던 청년이었다. 그 집엔 아직도 죽은 안주인의 그늘이랄까 권위가 도처에 남아 있었다. 조신하게 밥상을 놓고 나오려는데 청년이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손을 내밀라고 하더니 책상 위에 있는 화장수병같이 생긴 유리병에서 말간 액체를 자기 손바닥에 따라 그걸로 내 손등을 마싸지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이 닿자 내 손등이 당장 비단결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의 손길은 마치 몸을 돌보지 않고 고된 시집살이에 시달린 누이동생의 거친 손등을 어루만지는 착한 오라비처럼 극진하고 순수했다. 그의 표정 또한 내가 보아온 어떤 남자의 표정하고도 달랐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옷이나 음식 외에 표정에도 고급스러운 것이 있다는 걸 알았다. 내 손이 가늘게 떨렸다. 사내들한테 손을 잡혀본 게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사내녀석들과 어울려 거칠게 놀았고, 서울서 나를 취직시켜준 머스마도 툭하면 내 손목을 잡아끌고 청개천가의 포장마차 집으로 오뎅 먹으러 가자 했고, 가게를 닫기 전 손님이 뜸한 저녁시간이면 가겟방에 모여앉아 내기화투를 치던 인근 점방 점원들이 나를 끼워주면서 메밀묵 내기를 나를 위해 팔뚝 맞기로 변경해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팔뚝을 때리려고 내 손을 우악스럽게 잡으면 자지러지게 비명을 질렀지만, 조금이라도 살살 맞으려고 미리 부린 엄살일 뿐,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았다. 그렇게 목석같던 내 몸이 진저리를 치면서 깨어나는 게 느껴졌다. 나라고 그때까지 왜 사랑을 꿈꿔보지 않았겠는가. 내가 꿈꾼 사랑은 마음으로 하는 거였다. 그러나 이건 몸의 문제였다. 나는 내 몸이 한그루의 박태기나무가 된 것 같았다. 봄날 느닷없이 딱딱한 가장귀에서 꽃자루도 없이 직접 진홍색 요요한 꽃을 뿜어내는 박태기나무, 헐벗은 우리 시골마을에 있던 단 한그루의 꽃나무였다. 내 얼굴은 이미 박태기 꽃빛깔이 되어 있을 거였다. 나는 내 몸에 그런 황홀한 감각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이를 어쩌지, 그러나 박태기나무가 꽃피는 걸 누가 제어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의 떨림을 감지한 대학생이 당황한 듯 내 손을 뿌리쳤다.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모르며 일어서는 나를 불러 세우더니 나한테 발라주던 약병을 통째로 주면서 매일 저녁 바르고 자라면서 따뜻한 물에 손부터 깨끗이 씻은 후에 발라야 한다는 것까지 일러주었다. 대학생이 나를 염려해준다는 걸 알고부터 내 몸은 날로 귀해졌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신비체험이었다. 그후에도 밥상을 가지고 그의 방에 드나들었지만 좀 나아진 손등을 보고 약을 잘 바르나보다고 안심하는 것 외엔 딴 얘기는 나누지 못했다. 내 몸이 자꾸만 귀해져서 천사처럼 날아오를 것 같은 황홀감을 느낄 적도 있었지만 내 혼자생각이었다.
그날도 부엌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연탄불에 덥힌 따뜻한 물에 손을 담그고 느긋하게 때를 불리고 있을 때였다. 부엌 앞을 지나던 주인아저씨가 나를 유심히 보는 것 같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가 부엌으로 들어오길래 물이라도 떠먹으러 들어오는 줄 알고, 더운물에 손을 담근 채 조금 비켜앉았다. 그가 다짜고짜 내 손을 잡아끌며 목쉰 소리로 속삭였다. 너 왜 요새 자꾸 암내를 풍기냐. 나는 순식간에 안방으로 끌려들어갔다. 그의 장모는 외손자를 데리고 자기 집에 가 있을 때였다. 나는 남자 힘이 그렇게 센 줄 그때 처음 알았다. 나의 혼신의 저항을 뚫고 그가 내 안에 들어온 후에도 나는 악을 쓰고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고, 아무도 나를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 그래 봤댔자 네 망신이야. 그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비웃으며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나에게 몸이 있다는 게 얼마나 황홀한 개안이었던가. 그게 불과 며칠 만에 이다지도 모멸스러워질 줄이야.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독하게 이를 갈며, 그의 체중으로부터 풀려났다. 그 지경을 당하고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 방을 물러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생철갑이 있기 때문이었다. 굴속 같은 반 평짜리 내 방으로 돌아와 제일 먼저 한 일도 생철갑이 잘 있나 확인하는 거였다. 그러나 그걸 손아귀에 쥐고 힘을 얻은 것은 잠시, 그 안에 든 것으로 뭘 어떻게 해야 복수가 되는지, 구체적인 방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너 죽고 나 죽자고 마음먹으면 뭘 못하랴 싶긴 한데, 그자와 같이 죽긴 싫고, 혼자 죽긴 더 싫고, 그 얼마 안되는 독약이 과연 사람을 죽일 만한 양이 되는지, 맛은 어떤지, 도대체 아는 게 없었다. 그 약갑은 내 손아귀에 있었지만 환상이지 실체가 아니었다. 그후에도 몇번인가 더 안방에 끌려들어갔고 그때마다 그는 내가 첫날처럼 악을 쓰고 흐느끼길 바랐다. 첫날밤처럼, 첫날밤처럼, 그가 나를 덮칠 때마다 나에게 요구하는 이상한 주문이었다.
손에 쥐기만 해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되던 생철갑의 약발이 떨어지기 시작할 무렵 그의 장모가 아이를 데리고 안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안 있다 홀몸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아이를 뗄 돈을 달라기 위해 그이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얼마간의 목돈을 쥘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걸로 정말 아이를 떼러 갈 수 있을지는 나중 문제였다. 그때는 아직 벌레 한마리도 못 죽이는 얼뜬 사람으로 남이 알아주기 전이었기 때문인지, 내 속의 생명보다는 돈에 더 환장을 하고 있었다. 그이는 애 낳고 같이 살자고 했다. 나는 식도 안 올리고 그냥 살긴 싫다고 했다. 하긴 넌 숫처녀였으니까, 그냥 살긴 억울하겠지. 그래서 졸지에 시골에 알리고 동네사람 다 불러서 잔치를 하게 되었다.
버스차장을 목표로 상경한 천방지축 촌년이 방산시장에서도 알부자로 알려진 가게 주인하고 비록 후처이긴 하지만 정식결혼을 한 것을 두고 시골동네에서나 시장통 사람들이나 다같이 승은을 입은 무수리 대하듯, 우러러야 할지 우습게 보아야 할지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나는 그들의 속을 빤히 알기 때문에 기대에 어긋나는 태도로 일관했다. 잘난 척도 못난 척도 하지 않았다. 거만도 겸손도 떨지 않았다. 아는 것도 묻고, 거친 상소리는 못 알아들은 척했다. 군식구들의 역할이나 성깔, 버릇, 능력에 대해 상세히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이름도 외지 못하는 것처럼, 또는 이름과 얼굴이 헷갈리는 것처럼 얼뜨게 굴었다. 영악하게 잇속을 챙기는 시장통에선 얼뜨게 구는 것도 일종의 전술이었다. 우리 가게는 그 시장바닥에서도 몇째 안 가게 번성하는 집이었다. 그이는 돈을 잘 벌었지만 허술한 구석도 있어서 새는 데도 많았다. 그를 조정해서 군식구들을 줄였지만 그냥 내보내는 게 아니고, 딴 일자리를 구해서 내보내도록 했다. 전처의 처가붙이들은 내가 안방차지한 후 얼마 안 있어 다들 떠났다. 그이의 장모가 나를 믿고 살림을 내줌으로써 그런 일들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 대신 우리 식구가 불어났다. 생기는 대로 다 낳고 보니 전실 자식까지 합쳐서 오남매를 두게 되었다. 친정식구도 도와야 했다. 내가 이 고생을 하면서 엄마에게 딸이 시집 잘 갔다는 소리도 못 듣게 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이를 악물었다. 딸년들의, 특히 가난한 집 딸년들의 피 속에 유구하게 전해 내려오는 희생정신으로부터 나라고 어찌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여편네가 돈을 흔하게 쓰려면 서방이 돈을 잘 벌어야 한다. 그이가 돈을 잘 벌게 하는 일은 간단했다. 그는 마치 노름꾼처럼 그날그날의 재수에 연연했는데 잠자리에서 잘해주는 게 그 비결이었다. 그가 나에게 바라는 건 첫날밤처럼 비명을 지르는 거였다. 비명이나 흐느낌이 그의 성에 차지 않으면 풀이 죽었고, 장사가 다 안된다고 했다.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고 그렇게 의기소침해하는 걸 보면 그가 불쌍할 적도 있었다. 동물에 대한 연민 비슷한 거였다. 그는 내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걸 알지 못했다. 나는 그짓을 하는 동안을 견디기 위해 내가 지금 하는 짓은 말이나 소를 혹사시키기 위해 모질게 채찍질하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내가 지르고 있는 비명은 내 소리가 아니라 채찍질을 당하는 마소의 비명인 것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바꿔 생각했다. 착각도 길들이면 진짜 같아지는 법이다. 착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의 변태를 어떻게 살의(殺意) 없이 참아낼 수 있었겠는가. 그이가 의기소침해하든 더욱 용을 쓰든 말든 절대로 교성을 지르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건 그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나에 대한 저항이자 최소한의 자존심이었다. 일찍 시작한 출산이라 일찍 단산하고 내 몸이 풍만해질 무렵부터 나도 아주 가끔이지만 그짓에서 쾌감을 느낄 때가 있었다. 나는 그럴 때 전혀 신음소리를 안 냈다. 그러고는 일을 끝내는 즉시 욕실로 가서 오래오래 몸을 닦았다. 내 몸이 너무 징그러워 씻어내고 또 씻어내도 그 혐오감은 씻겨내려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시키는 대로 교성을 지르면서 치르는 요란한 정사 끝에는 마치 일용할 양식을 벌기 위해 과로한 막노동꾼처럼 씻고 말고 할 겨를 없이 진창 같은 잠자리에서도 곧장 단잠에 곯아떨어질 수 있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 건 그의 철학 같지만 실은 내 철학이다. 나는 아이들을 최고로 기르고 싶었다. 장차 내 자식이 되기를 바라는 나의 이상형은, 나의 몸이 잠시나마 물오른 한그루 박태기나무로 변신하는 기적과 환희를 맛보게 해준 대학생 같은 남자였다. 나는 그가 내 손등에 글리세린을 발라줄 때의 표정을 잊지 못했다. 준수하면서도 민감한 청년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 남을 배려할 때의 따뜻하고 근심스러운 표정. 나는 그때만 그런 고급스럽고 섬세한 표정을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느낀 게 아니라 그후 어디서도 만나보지 못했다. 인간의 얼굴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모르고 그 나이가 되었다는 게, 지지리 못살고 무식한 집에 태어나 고작 버스차장을 목표로 상경한 것보다 더 억울하게 여겨졌다. 그 대학생하고 다시 어째보겠다는 생각은 감히 품어보지 못했다. 임금님에게 잡혀본 손목을 비단수건으로 싸매고 죽을 때까지 보물처럼 모시었다는 왕조시대의 어떤 기생처럼 그 기억은 내 마음속에 신전이 되어 있었다.
나는 장차 내 자식들의 얼굴에서라도 그런 표정과 만나고 싶었다. 내 자식들을 곱게 길러 좋은 대학에 보내 높은 교양을 쌓게 하려면 초등학교 때부터 투자를 해야 했다. 부자 아니면 안됐다. 나는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듯이 가뜩이나 욕심 많은 그이를 더 많이 벌어오도록 끊임없이 부추기고 닦달질했다. 기껏해야 시장 장사꾼이었다. 시장통 안의 부자지 더 넓은 세상에서 우리네보다 윗물에서 노는 인간들의 복잡한 경제논리나 권모술수에 대해선 무지해서, 뻗어가는 경제성장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점점 구멍가게 수준으로 폄하되는 시장장사를 끝까지 붙들고 늘어져 오남매를 대학 보내고 어려운 처가의 학비도 보태면서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마누라밖에 모르는 우직함으로 장사에 있어서도 한우물만 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를 모질게 착취했지만 그가 기꺼이 착취당하도록 할 만큼 했다. 내가 그이와는 상관없이 따로 하는 일도 있었다. 이 무식한 집안에서 그 대학생 같은 높은 경지의 교양인을 배출하려면 돈으로만 뒷받침해서는 부족할 것 같았다. 높은 데 도달하기 위해서는 밀고 끌어야 한다. 나 자신의 교양을 쌓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중학교까지밖에 못 다녔지만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악바리 근성이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무시당하지 않도록 아이들이 동화책을 읽을 때는 나도 같이 읽고, 소설책을 읽을 때는 따라 읽었다. 그러는 사이에 내가 읽고 싶은 책도 따로 생기고, 세상사나 인생을 논하는 데 있어서는 웬만한 대학 나온 사람하고 맞먹을 교양을 쌓게 되었다고, 내 수준에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면 뭐 하나. 내 자식들이 차례차례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나는 그 대학생의 얼굴을 잊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목적을 달성한 건지 못하고 만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기대한 성취감 대신 슬픔만이 남았다.
그가 지팡이를 가리키며 뭐라고 악을 쓴다. 남들은 못 알아들을 소리지만 나는 그 소리를 산책, 산책으로 알아듣는다. 요새 그는 곧잘 혼자서 산책을 나간다. 물리치료 받으러 다니는 것도, 침 맞으러 다니는 것도 성질이 급해 며칠 해보고 효험이 없으면 욕만 한바탕하고 막무가내 안 다녔다. 그렇다고 그냥 놔두고 보자니 하루가 너무 지루해서 하루 몇번씩 부축해서 동네를 한바퀴 돌아주곤 했더니 이제는 혼자서도 곧잘 나돌아다닌다. 스웨터 위에 두툼한 파카를 입히고, 털목도리를 둘러주고 털모자까지 씌우고는 지팡이를 대령한다. 흐뭇한 미소는 그러나 일그러져 있다. 마누라의 위함을 받고 있다는 게 그를 만족시키고 있다는 걸 나는 안다. 나는 잠시라도 그의 숨결이 섞이지 않은 공기를 마실 생각에 손이 다 떨릴 정도로 조급하다. 그를 대문간까지 배웅하면서 차 조심하라고, 너무 늦지 말라고 이른다. 안으로 들어와 그가 뒤뚱뒤뚱 천천히 골목을 빠져나가는 걸 배웅한다. 멀어져가는 그를 한참 떨어진 데서 남처럼 바라보니까 저러다 회복되는 게 아닌가 싶게 다리에 힘이 오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가 안 보이기를 기다렸다가 비로소 나는 자유를 숨쉰다.
그동안의 감미로움 때문에 나는 그가 다른 때보다 일찍 돌아온 것처럼 느낀다. 그가 수상쩍은 듯이 내 아래위를 훑는다. 나는 그가 나를 그렇게 보는 게 제일 싫다. 부엌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손등의 때를 불리던 나를 다짜고짜로 잡아끌 때도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나서였다. 안면마비로 정상적인 표정을 잃고 난 후에도 때때로 그런 표정만은 살아난다는 게 나를 소름끼치게 한다. 그가 나에게 뭐라고 명령을 하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무슨 소리인지는 못 알아듣는다. 무슨 일로 그가 격앙돼 있는지 영문을 모르는 채, 나 또한 순순히 알아듣기 싫다는 꼬인 마음이니 소통이 원활할 리 없다.
그가 전화기 옆의 메모지에다 볼펜으로 글씨를 쓴다. 언제부터인가 정 안 통하는 말은 왼손으로 써 버릇하더니 요새는 곧잘 알아볼 만큼 쓴다. 나하고 필담을 한 적은 없고 주로 아들이 왔을 때 써먹곤 했다. 아들들이 뭐 필요한 것 없냐고 하면 종이에다 담배라고도 쓰고 술이라고도 쓰는데, 의사가 금한 걸 아들이 사다주길 바라서가 아니라 와아, 우리 아버지 왼손으로도 글씨 자알 쓰신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서라는 걸 나는 안다. 혼자서 왼손으로 글씨 쓰는 연습을 하는 걸 본 적도 있다. 그가 생전 안하던 먹물들의 노력을 흉내내는 걸 보면서 그에게도 혈육과의 소통의 갈망이 있다는 게 신기하게 여겨지곤 했다. 나하고의 필담은 처음이다. 그가 쓴 글씨를 보니 약국에 갔다 오라고 씌어져 있다. 긴 골목 끝에서 왼쪽으로 돌면 바라보이는 약국일 것이다. 내가 그를 부축하고 산책할 때도 늘 통과하던 정해진 코스이다.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도리질을 하면서 어서 갔다 오라고 고함을 친다. 내가 집에 있는 감기약, 기침약, 소화제, 설사약 등 상비약 이름을 대자, 그는 더 화가 나서 아니라고, 아직도 짚고 있는 세발 달린 지팡이로 마룻바닥을 탕탕 구른다. 나도 지기 싫어서 박카스, 쌍화탕, 홍삼 엑기스…… 같이 산책할 때 그가 약국 앞에서 어린애처럼 사달라고 칭얼대면 사주던 것들의 이름을 줄줄이 댄다. 그가 참다못해 지팡이를 내던지고 다시 글씨를 쓴다. 기어코 나를 약국으로 내몰 모양이다. 가보면 안다고 씌어져 있다. 기껏해야 박카스 한병 때문에 저 난리를 칠 것이다. 그가 원하면 그까짓 박카스 한병쯤 외상으로 못 줄 사이도 아닌데 그걸 안 준 약방 주인이 야속하다. 집에 있는 상비약과 모기향, 살충제 등은 다 그 집에서 산 거고, 둘이서 산책하다 눈이 마주치면 한두마디 인사를 건네는 유일한 단골 가겟집에서, 성한 사람도 아닌 환자에게 어찌 그리도 모질고 인색하게 굴었을까. 나는 약사에게 그가 뭘 사고 싶어했는지 물어보기 전에 먼저, 너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준엄하게 꾸짖을 궁리부터 하느라 씨근덕대며 약국을 향해 달려갔다. 흰 가운을 입은 피부 고운 약사가 평소와 달리 어색하고 난처한 웃음을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도대체 얼마나 비싼 약이라고 여기까지 힘들게 온 노인 헛걸음을 시키고 그래요.”
“비싸서 안 드린 게 아니라 위험하니까요.”
그러면서 약사가 내민 종이엔 낯익은 그의 삐뚤삐뚤한 왼손 솜씨로 그린 ‘정력제’ ‘비아그라’ 그런 글씨들이 징그러운 벌레처럼 기어다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없다고 말씀드렸는데도 구해달라고 부탁을 하시고는 자꾸 들르시는 거예요. 말씀은 어눌해도 말귀는 잘 알아들으시니까, 그 몸으로 그런 약 드시면 큰일 난다고 누누이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오늘은 또 종이를 달래시더니 마누라가 그걸 너무 좋아하니 좀 봐달라시는 거예요. 그래서 할머니를 좀 뵙자고, 할머니한테 직접 드릴 수는 있다고 말씀 드렸죠. 연세 차이가 많이 나시는 것 같으니까 그 나름의 고충은 있으시겠지만 참으셔야지 어쩌겠어요. 정말 큰일나는 수가 있거든요. 비타민 같은 걸 드릴 테니 그거라고 속이시는 것도 한 방법이지 싶은데요.”
나는 무슨 말이 더 나오기 전에 약국 앞을 황급히 벗어났다. 내 딸보다 어린 약사의 능멸과 동정 어린 시선의 가시권에서 벗어나려고 달음질쳐 우리집이 보이는 골목으로 꺾어들자 비로소 모닥불을 뒤집어쓴 것처럼 화끈한 치욕감이 온몸을 엄습한다. 이런 치욕보다는 차라리 분신의 고통이 견디기 쉬울 것 같았다. 죽이고 싶은 건지 죽고 싶은 건지 대상이 분명치 않은 살의가 극에 달한 채 집 안으로 돌진했다. 그가 기대에 찬 시선으로 나를 맞이한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침까지 흘리고 있다. 안방으로 들어가 드르륵 소리나게 서랍을 연다. 떨리는 손으로 생철갑을 꺼내 안에 든 걸 확인한다. 까만 고약 같은 덩어리는 오래전에 말라비틀어진 채 갑 속 가득 충만해 있다. 그걸 주머니에 넣고 다시 현관문을 나서는데도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아마 돈을 안 가지고 가서 다시 가지러 온 것쯤으로 착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와 나 사이의 착각은 바로 우리의 운명이다. 나는 더는 그 운명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약국을 피해 반대방향으로 꼬부라져 큰길로 나가면 바로 지하철 정류장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나는 정처없이 전철을 탄다. 무작정 타고 무작정 가는 동안에도 내 살의는 진정되지 않는다. 강변역이라는 소리가 죽고 싶다는 생각과 잘 맞아떨어진다. 다년간 위안받은 고약덩어리지만 그 실효는 암만해도 믿기지 않는다. 아무래도 괜찮다. 더 크게 더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테니까. 강변역 어디에서도 한강은 보이지 않지만 자꾸만 시퍼런 강물이 손짓하는 것 같아 목구멍에서 그르렁대는 소리가 난다. 한강물을 보기 전부터 물귀신의 끌어당기는 힘과 그걸 거부하려는 내 안의 힘을 팽팽하게 느낀다. 한강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한강이 안 보이는 길을 무작정 헤매기를 한동안, 드디어 진퇴양난, 한강다리로 건널 수밖에 없는 길로 접어든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로 수많은 한강다리의 가지각색의 조명을 볼 수 있다. 세상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내가 죽기도 억울하고, 누굴 죽일 용기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너 죽고 나 죽기를 선택한다. 나는 오랫동안 간직해온 죽음의 상자를 주머니에서 꺼내 검은 강을 향해 힘껏 던진다. 그 갑은 너무 작아서 허공에 어떤 선을 그었는지, 한강에 무슨 파문을 일으켰는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가 죽고 내가 죽는다 해도 이 세상엔 그만한 흔적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허공에서 치마 두른 한 여자가 한 남자의 깍짓동만한 허리를 껴안고 일단 하늘 높이 비상해 찰나의 자유를 맛보고 나서 곧장 강물로 추락하는 환(幻)을, 인생 절정의 순간이 이러리라 싶게 터질 듯한 환희로 지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