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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안시아
1974년 서울 출생. 200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ahnsea74@hanmail.net
그림자
뜨거운 한낮은 햇빛 가마터다
달궈진 태양이 먹빛으로 빚어지는 오후
그림자가 뚜벅뚜벅 골목을 가고 있다
태양은 제 몸을 달궈 가장 어두운
그늘 하나씩 만들어주는 셈,
뜨거운 최후까지 검은빛으로
반대편을 반사한다
태양을 향한 직립이 담벼락 그림자를 휜다
길 한켠 나무 아래로
두 개의 그림자가 교차해 간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서로에게
그늘의 경계를 지워가는 것
바람이 햇살에 담갔다 올린 나뭇잎이
유약을 입은 듯 반짝이고 있다
담벼락에 그림자 문양이 하나 둘 스치고
발걸음은 물레처럼 골목을 회전시킨다
뜨겁게 재벌구이되는 오후가 지나면
가로등이 높은 곳에서 몸을 데우며
둥근 저녁을 빚어놓을 것이다
세상의 굴곡은 거대한 도공의 손길이다
길 위의 사람
그는 절뚝거리는 걸음을 옮기며
광고전단을 떼어내고 있다
골목마다 햇살이 창가로 향하고
누군가 그 끝을 잡으며 기지개를 켠다
채 녹지 않은 눈 속 발자국은 아직 발이 시리다
빅토리아나이트를 소문내느라
밤새 퍽이나 후끈했을 벽 한켠,
잘 떨어지지 않는지 한참을 긁어내고 있다
종이 한 장도 버티기 위해
벽에 오래 배기는 부분이 있듯
발을 디딜 때마다 그의 한쪽 다리가
바닥을 지그시 밟는다
햇살이 햇살을 끌어당길 무렵
계단에 걸터앉은 그가 담배를 꺼낸다
태어나 한걸음도 떼어보지 못한
눈사람 하나가 묵묵히 그 앞에 서 있다
보일러 연통이 날숨을 피워올릴 때마다
숭숭 뚫린 중심을 온기로 채우는 눈사람,
계단 아래로 천천히 녹아내린다
비로소 온몸으로 길을 걸어간다
그의 발이 서서히 땅에 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