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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ㅣ6·15시대, 무엇을 할 것인가
탈분단을 위한 남북여성들의 연대적 실천
김엘리
평화를만드는여성회 정책위원, 여성학 강사. 저서로 『평화교육과 통일교육의 만남』(공저) 등이 있음. ellikl@hotmail.com
* 이 글을 위하여 인터뷰 형식으로 대화를 나누어준 6·15여성본부 공동대표 김숙임(평화를만드는여성회 상임대표) 한국염(NCC여성위원장), 6·15여성본부 공동집행위원장 손미희(반미여성회 부의장) 세 분께 감사드린다. 인터뷰의 발언을 인용할 때는 본문에 발언자의 이름을 괄호 안에 넣어 표시했다. 아울러 이 글은 특정한 여성단체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견해임을 밝힌다. 또한 북한을 호칭할 때 북조선, 북녘 등의 표현이 있으나, 이 글에서는 북한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썼다.
1. 만남을 시작하면서
2000년 6·15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5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성평화활동가의 자리에서 볼 때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은 ‘통일’과정이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실감이고, 민간단체의 통일운동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격세지감이다. 한 여성활동가는 ‘통일운동 하면 감옥과 최루탄에 범벅된 길거리 시위를 생각하게 되는데, 6·15공동선언은 통일운동의 정당성을 찾게 해준 전환점이었다’라고 평가한다(손미희). 북한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불법이고, 북한지원활동도 우회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과거를 떠올린다면, 6·15공동선언은 다양한 만남을 확대하여 남북의 공동활동을 촉진시키고 가시화시켰다는 점에서 탈분단의 시대를 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북한사람과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만남의 성격과 방식에 대한 물음들이 생겨났다. 남한의 남성지식인들이 북한에 관해 말하기 시작하면서, 북한 여성응원단이 단체로 남한을 방문하면서, 이효리와 조명애가 휴대폰 광고를 통해 만나면서 ‘우리’의 만남은 그냥 운명이라고 이상화할 수 없는 ‘현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현실은 민족의 동질성 회복과 이질성 극복이라는 정책방향에서, ‘우리는 하나’라는 대중적 구호에 취해 또렷이 분간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남한사회에서 북한여성이 재현되는 방식이 북한/북한여성과 만나는 데 일정한 장애물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탈분단을 위한 주요쟁점에서는 비켜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하나’라는 구호에서 과연 여성이 주체적 시민으로 자리하고 있는가도 의심스러운 현실에서, 남과 북의 만남에서 재생산되는 것은 무엇이고 강조되는 것은 무엇인지 여성의 입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 인식론적 차원에서 통일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간 여성들의 활동과 문제의식을 자유롭게 정리하고 공유하는 데 이 글의 목적을 둔다. 특히 6·15공동선언 이후 북한/북한여성과의 공식적인 만남이 늘어나고, 앞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만남의 기회가 확장될 것을 예상하면서, 서로의 만남이 때때로 야기하는 난감함을 문제제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이·갈등·연대의 문제를 심화시키지 못했음을 고백하면서, 남북여성들의 차이를 면밀하게 분석한 글은 다음의 과제로 남겨둔다. 우선 여성운동이 북한여성과의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부터 살펴보자.
2. 6·15 이후 활발해진 남북여성의 만남
흔히들 분단 이후 판문점을 통해 방북한 최초의 주역은 정주영 회장의 소떼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잘 모르고 하는 말로, 판문점을 통과한 최초의 주역은 여성들이었다.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가 토오꾜오(1991), 서울(1991)에 이어 평양(1992)에서 열리던 날, 21명의 여성은 판문점을 통해 평양에 갔다. 이 토론회는 북핵문제가 한반도의 정치적 쟁점이 되면서 1993년 토오꾜오 토론회를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이후로도 북한여성과의 만남을 다각도로 모색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한편 1993년 시작된, 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아시아연대회의는 남북의 정치논쟁에 영향받지 않으며 간헐적으로나마 남북여성들의 만남을 이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6·15공동선언은 남북여성들의 만남을 정례화하게 해주었다.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공동행사를 위하여 민화협, 통일연대, 7대 종단이 모여 북측의 공식 파트너로서 ‘민족공동행사추진본부’를 발족했다. 이 추진본부 내에 여성위원회가 구성되어 8·15민족공동행사가 있을 때마다 남측 여성대표는 여성부문별 상봉시간을 가졌다. 2001년에는 평양에서 22명의 남측 여성대표가 북측 여성들과 함께 남북여성통일토론회를 가졌고, 2003년에는 평양에서 한반도 전쟁위기와 평화정착을 위한 남북여성 대회를 가졌다. 6·15공동선언은 민간단체의 교류를 6·15선언의 실천과정으로 승격시켰으며, 각 부문별 교류는 통일운동의 주요한 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6·15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5년 만인 2005년 3월 7일 ‘6·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남북해외공동행사준비위원회’(이하 6·15공동위원회)가 출범했다. 그전 2005년 1월 31일에는 6·15공동위원회의 남측위원회 내에 48개 여성단체로 구성된 ‘6·15여성본부’가 발족됨으로써 여성조직이 재구성되었다. ‘6·15여성본부’에 상응하는 북측 파트너도 발족되었다. 같은 해 4월 9일, ‘여성분과위원회’가 6·15공동위원회의 북측위원회 내에 결성되었다. 남북여성들이 상설적으로 대화하고 연대할 수 있는 구조가 더욱 안정적으로 마련된 셈이다.1
여성단체들이 6·15선언 이후 단독으로 남북여성대회를 연 것은 두 번이었다. 2002년 10월 16〜17일 금강산에서 ‘6·15공동선언 실천과 평화를 위한 북남녀성통일대회’가 열렸다. 남과 북, 그리고 해외에서 약 700명이 참가한 행사였다. 2005년 9월 10〜14일, 남한여성 100명이 평양과 묘향산을 방문하여 북한여성과 두번째 만남을 가졌다. 비록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한 특정한 여성들의 만남이었지만, 규모는 다른 어느 부문행사보다 컸다.
남북여성들의 만남은 주로 6·15선언을 잘 이행하자는 실천적 의지를 공유하고 다지는 자리였다. 통일운동의 주체인 여성이 ‘우리민족끼리’의 기본정신을 지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이룩하고, 평화와 통일을 위해 여성연대를 도모하며, 남녀가 평등한 통일사회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선언했다.2 공식적인 대회말고도 개인적으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짧은 시간들은 꽤 있었다. 공식행사 때보다는 이런 자리에서 서로의 삶과 생각에 대해 훨씬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북한지원활동도 활발해져서 북한사람들과 직접 함께하는 공동사업이 전개되었다. 2004년부터 반미여성회 회원들의 힘이 기반이 되어 추진된 ‘북녘어린이영양빵공장 사업’은 이미 북한에서는 자리를 잡았다. 북한에 공장을 지어 빵을 자체생산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이 사업에는 6500여명의 남한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3 2004년 4월, 북한의 룡천역에서 폭발사고가 나자 남북여성교류를 추진하던 여성단체들은 ‘룡천돕기여성행동’을 조직하여 모금활동을 전개했다. 그 외에도 불교·기독교·원불교 등 종단에서 이루어지는 북한지원사업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모든 사업의 중심에는 여성들의 활동이 있다.
3. 북한여성에게 말 걸기
여성들의 대북활동이 증가하면서 북한여성을 만날 기회도 많아지고 있다. 내가 북한여성을 처음 본 것은 1992년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서울토론회에 참여했을 때였다. 그 뒤로는 1998년 이후 탈북여성들과 만난 적이 있고, 국제회의에 참가한 북한여성과 인사를 나눈 정도가 전부였다. 따지고 보면 나의 어머니는 평양에서 태어났고 할머니도 북한여성인데, 새로울 것 하나 없는 북한여성이 분단의 세월 속에서 우리에게 특별하고 다른 존재가 되었다. 2002년 남북여성통일대회에서 만난 북한여성들은 시종일관 나에게 ‘왜 결혼하지 않는가’라고 질문했다. ‘당신 같은 여성이 아이를 많이 생산해서 통일과업을 수행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남한여성 참여자들 중에 독신여성이 꽤 많은 것을 보고 상당히 놀라는 북한여성들과 나중에는 집단적으로 토론이 벌어질 정도였다. 북한여성들은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말하자면 이성애적 가정을 이루지 않는 남한 비혼여성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다.
반면 나는 남북여성통일대회가 진행되는 내내 ‘어머니’로 불리며 환영받았다. ‘여성’은 ‘자주통일의 길에 서도록 떠밀어주는 훌륭한 안해, 어머니’ ‘통일의 한쪽 수레바퀴를 떠밀고 나가는 조국통일의 주역’을 의미했다. 부문별 소모임 때, 남한여성들은 남한에서 벌어지는 성폭력·성희롱에 대한 운동의 성과를 설명했으나, 북측대표 여성들은 ‘성’문제보다는 통일과업을 수행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한의 여성화가가 부엌에서 본 여성의 삶을 그린 작품을 함께 보면서 북한여성은 ‘북한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똑같이 일한다’고 응수하며, ‘왜 부엌이 그림의 소재가 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1992년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서울토론회에서 ‘공화국의 여성들은 모든 사회적 불평등에서 해방되었고 여성운동이 새로운 높은 단계에서 전개될 수 있다’고 발표한 북측 발제문과 같은 맥락이었다.
어머니—가정—민족의 범주 안에서 여성의 역할을 상정하는 북한여성들에게 남한의 여성주의는 그저 ‘남한식’일 뿐이겠다는 인상을 받았다.‘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만났으나 남북여성의 차이는 분명했다. 여성의 자아실현이 개인이나 성적 주체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과 조국을 향해 있는 북한여성들에게 ‘여성’의 의미는 달랐다.
북한사회에서 즐겨 부르고, 남한사회에서도 이제 웬만큼 알려진 「녀성은 꽃이라네」라는 노래는 이미 남북여성의 차이를 보여주는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다. 1999년, 탈북여성들이 ‘3·8 세계 여성의 날’기념대회의 무대에서 이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을 때, 나를 포함한 남한여성들은 기겁을 하며 말렸다. 남한사회에서 여성을 꽃에 비유하는 건 여성을 일종의 관상용으로 취급하는 성적 대상화로, 여성성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여성들은 여성이 사회의 꽃이라는 비유는 그 사회의 핵심·중심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이러한 북한 여성들의 적극적인 해석에도 불구하고‘가부장적 북한 사회주의체제에서 사적 영역의 공간을 전통적인 여성미로 남겨둔 감성적 효과’라고 분석하는 남한 여성학자의 해석은4 여전히 ‘여성’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름을 보여준다.
4.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
지금은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한 소수의 여성들이 북한여성을 만나고 있지만, 앞으로는 만남의 규모도 커지고 횟수도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 북한여성과의 만남에는 ‘만났다’는 기쁨과 설렘 외에 나와 다른 타자와 마주서는 낯설음이 있다.
남북여성교류의 실무를 담당하는 여성활동가들은 만남과 사귐이 계속되면 ‘민족의 동질성을 확대하고 이질성을 극복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될 것이라고 낙관했다. “민간교류는 상호만남을 통해 상호간 이해와 신뢰를 만들고 상호간에 변화를 이끌어냄으로써 남북간의 이념적·문화적·심리적 차이와 거리를 좁히고 서로 다른 점을 관용하는” 성과를 기대하는 것이다.”5 일리있는 관망이다. 만남을 통해 서로 다른 점을 느끼고 본다면, 그 차이의 틈새가 탈분단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북한여성과의 만남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만남은 오히려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케 함으로써, 때로는 갈등과 혼란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여성단체의 남북여성교류 성사를 위해 발로 뛴 한 여성평화활동가는 지난 5년의 세월을 ‘고통’과 ‘인내’로 표현하기도 했다(김숙임). 타자와 만나면서 ‘차이’가 주는 무거움에 짓눌리고, 타자를 통해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 괴롭고, 타자를 바라보는 우리 안의 다양한 시선이 교차하는 현실은 고통의 과정일 것이다. 북한여성과의 만남을 이루기 위한 치열한 노력만큼이나 만남 자체가 주는 벅참에는 ‘기쁨’과 ‘고통’이 아직은 불편하게 뒤섞여 있다.
만남은 만남 그 자체로 분단의 긴 간격을 메워주지 않는다. 더욱이 차이를 동질성의 확대로 극복한다는 것은 획일적 전체주의에 다름아니다. 특히 만남의 이질감과 차이를 ‘한민족’의 정서에 기대어 덮어씌우려는 자세는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통일논의 차원에서 겉도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민족주의가 지닌 가부장적 남성중심주의가 여성의 삶을 겹겹이 에워싸서 여성을 ‘여성’으로서 드러내지 못하게 할 때, ‘한민족’의 정서는 여성주체를 또다시 타자화할 위험성이 있다. 탈분단을 위한 남북여성의 만남은 한민족의 같음을 강조하기보다는 남북여성의 차이와 마주설 때, 현재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더 잘 볼 수 있다.
여기서 남북여성은 상이한 사회체제에서 왔으니 서로의 차이에 대해 이해가 필요하다는 ‘당연한’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방식의 이해는 차이를 그냥 차이로, 남북관계의 다양한 측면 중의 하나로 방치할 가능성이 있다. 그 차이 안에 숨겨진 위계질서나 권력관계는 간과하기 쉬운 것이다.
탈분단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차이를 차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다. 이는 ‘북한바로알기’를 통해 습득될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이 역량은 사람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인식의 문제이고,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이다. 북한/북한여성에 대한 정보를 다루고 지식을 생산하는 것 자체가 인식의 문제이다.
어떤 것을 우월과 열등의 이원화된 구도로 바라보는 것, 강함—정복—남성성과 약함—패배—여성성이라는 힘의 논리로 이해하는 것, 이러한 사고체계는 차이를 차이로 보지 못한다. 차이를 차별로 치환하기 쉽다. 한 정치학자의 지적처럼, 북한/북한여성에 대한 태도는 “단순히 반북반공이데올로기 교육에 의한 것만이 아니고, 남한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사회적 강자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타자화’의 경향을 반영한다.”6 이주여성 인권활동에 전념하는 한 여성활동가는 북한사람들이 제2의 시민이 되고 중국조선족, 아시아이주자가 다음 순위로 위계화될 미래사회를 염려한다(한국염). 젠더, 쎅슈얼리티, 연령, 장애, 계급에 덧붙여 민족과 인종은 차이를 차별화하는 범주가 되고 있다. 여성은 여러 범주가 가로지르는 지점에 다중적인 정체성을 가지며,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과 다른 차별을 경험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북한여성의 차이를 본다면 ‘한민족’의 정서를 넘어서 좀더 섬세하게 보고 많은 것을 짚을 수 있다. 남한여성과 북한여성이 누가 누구를 대변 혹은 대표하거나 누구의 시각이 옳다는 생각을 버릴 때, 차이를 수용하는 역량이 발휘된다. 사실 남한사회에서 여성이 하나의 주체로서 상정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남북여성들간의 차이를 말함으로써 혹시라도 성차별문제의 심각성을 희석시키는, 또는 여성의 단결성을 흩뜨려놓는 부작용을 가져오지나 않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성의 연대는 차이를 인지할 때 가능하다. 남북여성들의 다른 위치가 가시화될 때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비로소 연대의 지점을 찾을 수 있다.
5. 변하지 않는 것, 동질성에 대한 집착
어느날의 일이다. 익명의 한 남자에게서 ‘탈북여성과 결혼하고 싶으니 소개해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 남자의 배짱에 당황했지만, 다음 말이 더 놀라웠다. “여기 처녀들은 드세지만, 북한여성은 순종적이잖아요.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요.”
이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6·15공동선언이 일상에 미치고 있는 영향이라고 생각된다. 북한에 한층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 최소한 적개심은 가지지 않는 것. 여전히 반공주의와 민족주의의 틀에 있으나, 북한에 대해 좀더 유연하게 사고할 수 있는 조건을 6·15선언은 제공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조심스럽게 들여다봐야 할,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첫째는 강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다. 힘의 논리를 숭앙하고, 자신을 중심에 놓고 북한을 주변화·타자화하며, 우월감의 시선으로 북한을 바라보는 것이다. 둘째는 성과 사랑, 결혼, 가족의 문제는 여전히 전통적이고 순수한 자연의 영역으로 남아 있길 기대하는 욕망이다.
6·15공동선언 후, 급증하는 이산가족의 상봉은 이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아버지가 이념의 역사를 짊어진 주체라면, 어머니는 이념에서 비켜난 핏줄과 자연의 영역에 있다. 어머니는 변하지 않는 전통보존자이며 순결한 자이다. 그래서 영원한 원형이다. 이러한 어머니의 정절이 남북을 만나게 하는 근원이 된다.7
여성을 변하지 않는 어떤 것으로 두고자 하는 욕망은 북한여성의 이미지 재현에서도 나타난다. 지난 2002 아시아게임에 참여한 북한 여성응원단의 남한 방문이나 금강산관광 중에 만나는 안내여성의 대면으로 남한남성들도 북한여성을 만날 기회가 많아졌다. 이러한 만남은 남한남성들에게 경계와 혼란의 경험이 되기도 했는데, 이 혼란을 정리하는 방식은‘민족’의 동질성 확대를 통한 이질감 극복이라는 단순한 차원이었다.
여기서 민족의 동질성은 전통문화에 의존하고 있다. 최근 북한사회가 개방되면서 북한을 방문한 남성지식인들은 북한여성들을 순수, 소박함, 자연미, 전통미라는 이미지로 재현하였다.8 북한 여성응원단에 쏟아진 찬사도 유사했다. 외모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선, 수더분한 느낌, 과장되지 않는 화장법 등을 이미지의 특징으로 강조한다. 언행의 차원에서는 일단 수줍음이 으뜸이다. ‘남자친구 있느냐’는 남한사람들의 질문에 북한여성들은 ‘숙녀에게 그런 거 묻는 건 실례 아니냐’며 얼굴을 붉히거나, 질문을 피해가는 재치를 보인다. 언론들은 새침하면서도 수줍어하는 북한여성들의 특성을 전통적 여성미로 다루면서 ‘성형하지 않은 자연미인들’ ‘무공해 미인’ ‘신토불이 얼굴’에 촛점을 맞추었다.9 북한여성의 전통적 이미지는 민족적 동질성을 재현하는 기호이며, 민족의 순수성을 보전하는 것으로 상징된다. 이는 문명화와 구분되는 자연이며, 고향의 원형이다.
민족의 동질성이란 남북이 분단의 역사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공유하는, 기본적인 전통적 문화가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두고 하는 말이다. 변하지 않는 동질성의 뿌리는 같은 핏줄로 맺어진 가족과 가족의 연장인 민족이다. 이러한 혈연공동체는 곧 여성의 순결한 몸을 필요로 하고, 여성은 순수한 민족과 동일시되는 상징성을 갖는다. 민족의 동질성이라는 담론에서 여성은 무시간적이고 탈역사적인 존재가 된다.
그런데 북한여성을 통하여 민족의 동질성을 보려는 욕망은 실은 문명화에 접어든 남성들의 자의식 없이는 불가능하다. 순수, 자연, 신토불이가 가치일 수 있는 것은 이것들이 남한사회를 살고 있는 남성들에게 결핍된 그리움이기 때문이다. 이미 문명화된 주체로서의 시선을 가진 남한이 스스로 북한과 다르다는 것을 규정하는 일이다. 서구 자본주의의 단선적인 발전척도로 북한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동질성에 대한 추구는 북한/북한여성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자 북한과 경계를 긋는 일이며, 타자를 전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다른 모습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북한여성과 결혼하고 싶다는 한 남성의 전화는 탈분단시대에 비판적으로 점검해야 할 남성성의 전형을 응축적으로 보여준다. 최근 결혼연령이 늦어지고 출산율이 낮아지면서 이제 아시아에서 온 여성들이 한국여성의 자리를 채우는 현상을 본다. 실제로 민족국가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데 이에 대항해 민족국가를 견고히하려는 반동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만약 분단의 선이 무너지면 북한여성은 아시아여성보다 더 선호되는 대상이 될 것이다.
6. 차이를 인정하는 연대를 위하여
남북의 차이와 갈등을 해결하는 데 여전히 큰 동력으로 간주되는 것은 ‘민족’이다. 6·15공동선언에서 의미있게 평가받는 부분도 ‘자주적으로’ ‘우리민족끼리’이루는 통일이다. 그리고 여성들도 통일의 주체가 되어 핵심적 역할을 하기 위해 여성들의 독자적 대회 개최, 여성참여율 30% 요구, 여성정책 제시, 여성주의 평화운동으로의 확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주체적으로, 자주적으로 통일을 이루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북한/북한여성과의 만남에서 겪는 난감함은 단순히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해소될 수 없는 것이 많다. 탈분단의 노력이 좀더 나은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라면, ‘우리민족끼리’이루는 통일에서 민족의 부정적 동질성은 냉정하게 비판받아야 한다.
민족의 부정적 동질성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남북의 군사화된 사회의 성격을 점검해야 한다. 남한과 북한은 분단이라는 군사·정치적 대립상황에서 ‘민족주의’정서를 토대로 근대화를 추진했다. 여기서 ‘민족’은 성·계급·지역 등 모든 범주를 넘어 정체성을 구성하는 절대적 범주가 되었다. 그런데 민족주의는 ‘우리’를 구성하는 근간이고, ‘우리’는 ‘우리 민족’외부에 있는 ‘적’을 상정한다. 공교롭게도 남한은 같은 민족인 북한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고 군비경쟁을 했으며, 적대감을 키워왔다. 따라서 민족의 동질성을 비판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남북의 대립과 대북 적대감을 기반으로 하는 남한사회를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10
군사화된 사회란 개인과 사회공동체에 군사주의11가 일상화 또는 사회화되어 있는 사회를 의미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호전적 가치가 있고, 전쟁준비 동원을 위해 개인과 사회가 일정한 방향으로 구성되는 것을 말한다. 전장에서 필요한 규율이 일상적 삶의 규율과 유사해지는 과정이 일상화된 군사화이다. 그런데 군사화된 사회는 가부장적 성차별주의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군사력을 필요로 하고, 군사적 가치를 높여주는 전쟁, 군대, 군사안보는 그 자체가 성역할을 기반으로 하고, 젠더정체성을 구성하는 주요한 기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사주의는 이미 성차별주의를 내포하는 개념이다.
그렇기에 탈분단운동은 여성주의 의식 없이는 불가능하다. 부정적 동질성을 비판적으로 보고자 한다면, 여성문제를 짚지 않고는 충분할 수 없다. 앞에서 보았듯이 통일을 민족적 동질성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통일론자들에게 통일이란 여성을 타자화하고 차별화하는 사유체계를 기반으로 하기에, 온전한 탈분단/통일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성차별주의의 해소가 필수적이다.
따라서 탈분단/통일운동에서 여성의 참여는 당연하다. 남성 또한 여성주의를 모르고는 탈분단/통일운동의 진정한 주체로 서기 쉽지 않다. 이러한 의미에서 남한과 북한 여성이 만날 지점은 분명하다. 물론 양측의 차이가 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남북여성들이 부정적 동질성을 해소해야 할 주역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기반으로 한 연대를 만들 수 있다. 더욱이 긍정적 이질성을 찾아내 공유한다면 남북의 차이가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존중되는 연대가 될 것이다.
남북여성들의 연대는 이미 조직적인 면에서 ‘6·15여성본부’와‘여성분과위원회’로 갖추어져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여성조직은 ‘6·15공동위원회’안에서 6·15공동선언의 실천이라는 범위 내에서 움직여야 하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여성들의 공존을 위한 여성들의 자생적 기반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존재가치는 크다.
비록 6·15공동선언이 민족의 틀 안에 있다 할지라도 여성운동은 글로벌한 시각에서 통일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 탈분단운동을 위해 필수적인 탈군사화운동은 통일 이후에도 계속되어야 할 평화운동이기 때문이다.「6·15공동선언 실천과 평화를 위한 남북여성통일대회 공동결의문」 역시 남북여성들의 연대가 반전과 평화를 이루는 노력에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글로벌한 시각이 필요한 이유는 남북여성들의 삶이 글로벌한 자본주의의 흐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최근 북한에서는 경제개혁 이후 가정에서 여성의 책임이 강화되거나 여성의 노동이 증가하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12 그리고 국경을 넘는 북한여성들의 수도 계속 증가 추세에 있다. 게다가 아시아 각국과 북한에서 온 여성들의 존재가 남한여성의 경험을 재편하고 있다. 특히 북한여성들과의 만남은 남한여성의 위치를 새로이 만들 것이다. 따라서 탈분단운동은 타자와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라는 물음 속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을 성찰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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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숙임 「남북여성교류」, 『한국여성평화운동사』, 한울(2006년 2월 출간 예정).↩
- 「6·15공동선언 실천과 평화를 위한 남북여성통일대회 공동결의문」, 2002.10.17.↩
- 이 사업은 (사)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의 이름으로 진행되지만, 그 운영과 추진은 대부분 여성이 맡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종단에서 전개하는 북한지원사업도 비슷하다.↩
- 정현백 「북한여성, 어떻게 만날 것인가」, 『여성과사회』 12호, 한국여성연구소 편, 창작과비평사 2001, 94~95면.↩
- 이현숙 「남북여성교류 어떻게 할 것인가」, 평화를만드는여성회 주최 ‘남북여성교류와 통일교육’토론회 자료집, 2002. 9, 32면.↩
- 권혁범 「통일에서 탈분단으로」, 『당대비평』 2000년 가을호, 168면.↩
- 좌담 「탈분단시대의 가족과 여성: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지켜보며」, 『여/성이론』 3호,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0.↩
- 남성문인들이 북한을 여성의 전통미로 이미지화하는 것에 대해 소장학자들은 제국주의적 시선이라고 이미 비판한 바 있다. 전효관 「매체에 나타난 북한의 이미지 구성」, 조한혜정·이우영 엮음 『탈분단시대를 열며: 남과 북, 문화공존을 위한 모색』, 삼인 2000.↩
- 『주간동아』 2002.10.17; 『일간스포츠』 2002.10.4; 『한겨레 21』 2002.10.17 등.↩
- 조한혜정 「통일공간과 문화: 비판적 해석」, 조한혜정·이우영 엮음, 같은 책, 329~33면.↩
- 군사주의는 군사적 가치를 고무하는 이데올로기, 가치, 신념체계, 사회와 행동양식의 경향성을 말한다. 갈등이 발생했을 때, 무/폭력적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태도가 군사주의다.↩
- 박현선 「최근 경제개혁과 북한여성 생활의 변화」, 한국여성연구원 쎄미나 발제문, 2005.4.15; 임순희 「식량난과 북한여성의 삶」, 국가인권위원회 북한인권 국제쎄미나 발제문, 2005.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