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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권경인 權敬儿
1957년 경남 마산 출생. 1991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변명은 슬프다』 가 있음. mogerja@shinbiro.com
촛불
어둠 끝에 마지막 바다가 매달린다
여명의 물결이 이루는 금빛의 가장행렬을
처음인 듯 바라본다
아침에 헛것을 이루기 위해
밤새 그렇듯 비바람 무성했던 것을–
모든 아름다움은 고통의 끝에 있고
아무리 어두워도 빛은 미리 빛나지 않으니
꽃 속에 있어도 인내는 슬픈 것
새들이 조용히 제 몸속을 날 때마다
허공을 채우는 낯선 길들
길 위에 숨어 있는 나무들
흔들리며 깊어지는 건 죽음인가 삶인가
아무리 피 흘려도 제 안의 불꽃을
끝내 다 울어버릴 수 없으니
영혼의 평화란 단순히 하나의 오해일 뿐*
검은 비는 결국 검은 흔적을 남긴다
✽『우산의 황혼』에서 니체가 한 말.
옛 절터에서
꽃나무처럼 잊었다 잡풀 무성하여
한번 발 들여놓으면 억겁을 헤맨다지
그렇게 천년 만년 흘러가서 무엇이 되리
뿌리 하나 먹고 아이 하나 낳고
뿌리 하나 먹고 드디어 캄캄하게 깊어져서
죽어서도 문밖에 서 계신 아버지
밥 먹었냐고 나무 두어 그루 겨우 흔들릴 때
돌아가자 돌아가자고 몸부림치며 떠도는 씨앗들
한때는 그가 꽃인 줄 알았으나
이제 그를 보내고 꽃들이 핀다
적막도 무거운
유적으로 가는 길
바그다드 까페
남루도 반대편에 있으면 그럴듯한 건지
회복기 환자의 얼굴을 한 나에게
그가 최초의 시선을 던진다
나는 무심한 듯
죽은 새를 뜨거운 하늘로 밀어올린다
상처난 새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시간들,
참 무섭네요 줄줄 새는
모래 위의 영혼이
다르게 살고 싶었는데…… 시작될까요 다시 전쟁이?
그의 눈빛에 서서히 죽은 새의 무게가 실린다
그러나 무엇을 믿을 수 있을까
믿음이란 그저 믿고 싶은 마음일 뿐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건 아직 잊지 않고 있다는 것
늘 시작만 되풀이하는 삶처럼
지나간 사랑은 아직 오지 않은 사랑인가
바람기 많은 그의 양복만큼이나 말쑥한,
밤꽃 같은 여자 들어온다
나와는 전혀 다른 여자
여자 속에 풍덩 빠져 사는 여자
맹한 여자, 그러나 약아빠진 여자
그녀는 비워지지 않는 그릇,
내가 끝내 숨기고 있는 내 발톱이다
괜찮아 괜찮아
사람은 다 자기자신의 편이니까
찻잔을 비우며 내가 아무렇지 않은 듯 중얼거린다
옆에선 여자들 깔깔대며 저희끼리 잘 놀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