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신도 협잡꾼도 아닌 과학

해리 콜린스·트레버 핀치 『골렘』, 새물결 2005

 

 

홍성욱 洪性旭

서울대 교수, 과학기술사 comenius@snu.ac.kr

 

 

131-327

1920년대 영국에서는 유전학자이자 과학대중화 운동을 주도했던 홀데인(J. B. S. Haldane)과 철학자 버트런드 러쎌(Bertrand Russel)이 과학에 대해 논쟁한 적이 있었다. 홀데인은 현대과학을 그리스신화의 전설적 장인 다이달로스(Daidalos)에 비유하면서 과학이 가져올 미래의 풍요와 행복을 강조했는데, 러쎌이 이를 비판하면서 과학을 다이달로스의 아들 이카로스(Icaros)에 비유했던 것이다. 이카로스는 너무 높게 비행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만 태양 가까이까지 날아갔다가 인공날개를 붙인 밀랍이 녹아 추락해 숨진 비극의 주인공이다.

2차대전 이후 과학의 대중적인 이미지는 점점 더 극단화되었다. 한편에서는 과학을 “무한한 프런티어”라고 부르면서 과학의 발전이 산업과 경제를 일으키고 질병을 퇴치하며 실업률 제로의 사회를 가져올 것이라고 설파한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과학을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에 비유했다. 자신과 자신을 만든 과학자 모두를 파멸로 이끈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처럼 현대과학, 특히 원자물리학과 생명공학은 그것을 낳은 인류를 재앙으로 몰고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콜린스(H. M. Collins)와 핀치(T. J. Pinch)의 『골렘』(The Golem, 이충형 옮김)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골렘’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골렘은 유대인의 설화에 등장하는 괴물이다. 16세기 프라하에서 반유대주의자들이 유대인의 거주지를 공격했을 때, 한 율법학자가 진흙으로 골렘을 만들고 그 머리에 유대어로  תמא( ‘진리’를 의미)라고 쓴 부적을 붙여 골렘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런데 유대인을 보호하던 골렘은 점점 더 커지고 광포해져서 보호해야 할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것이다. 다른 율법학자가 속수무책인 골렘을 제어할 방법을 알아냈는데, 그것은 부적의 맨 앞 글자를 지워버려 ‘죽음’을 의미하는 תמ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 설화에 나타나는 골렘은 조금 우스꽝스러운 피조물이다. 골렘은 인간이 가르쳐준 단순한 행동만을 반복하지만 학습이 진행됨에 따라서 스스로 좀더 복잡한 행동을 할 수 있다. 모든 생명력을 지닌 대상이 그렇듯이 골렘은 자신을 낳은 인간의 명령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프랑켄슈타인의 괴물과 달리 골렘은 통제가능하다. 물론 통제가 쉽지는 않다. 인간이 만든 골렘은 인간의 충직한 종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을 말살하는 악의 화신도 아닌 것이다.

콜린스와 핀치는 과학이 바로 ‘골렘’이라고 주장한다. 책 말미에서 이들은 “과학자는 신인가 협잡꾼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 이분법적인 질문이 시민들로 하여금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강조한다. 대신 이들은 과학자를 자연세계에 대해 전문적 지식을 가진 전문가로 규정한다. 그렇지만 과학자의 전문지식이 경제학자, 경찰, 법무사, 여행안내원, 배관공이 가진 전문지식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세상의 누구보다도 배관에 대해 잘 아는 배관공도 종종 오류를 범하듯이, 과학자와 과학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이들 주장의 핵심이다.

과학의 신화를 벗겨내기 위해 저자들은 과학의 정규적인 모습만이 아니라 ‘낯선’모습도 제시한다. 이들의 용어에 따르면 단정한 과학이 아닌 “헝클어진”과학이다. 이렇게 낯선 과학의 세계로 독자를 인도하기 위해 이들은 과학이라는 블랙박스를 열어젖히는데, 이를 여는 방법은 논쟁이 종료된 과학이 아니라 “더 나은 실험, 더 많은 지식, 더욱 진보된 이론, 더욱 분명해진 사고를 통해서도 깊은 의견의 불일치를 해소할 수 없는,”즉 논쟁이 종결되지 않은 과학의 사례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들이 다루는 예는 기억이 한 벌레에서 다른 벌레로 이전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실험적 입증에 대한 논쟁, 상온핵융합(Cold Fusion) 논쟁, 19세기 프랑스에서 빠스뙤르와 푸셰 사이에 벌어진 생물의 자연발생을 둘러싼 논쟁, ‘레즈비언’도마뱀의 교미에 대한 논쟁, 중력파와 중성미자 검증을 놓고 벌어진 논쟁 등이다.

이들은 과거의 논쟁들이 과학적 증거의 힘으로만 종식되지 않았으며, 또 그렇기 때문에 지금 진행되는 논쟁들도 실험적 입증이나 반증만을 통해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논쟁을 종결하는 것은 실험자의 권위, 출신학교의 명성, 그의 네트워크의 위력 같은 사회적인 (혹은 과학외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콜린스와 핀치는 논쟁중인 실험에 대해서 강력한 권위를 가진 반대자(혹은 옹호자)가 나타나서 힘이 실린 논문을 발표하거나 발언을 하는 것을, 논쟁이 ‘임계질량’(방사능물질이 폭탄을 만들 수 있는 질량)에 도달했다고 한다. 논쟁이 임계질량을 지나면, 반대자들(혹은 옹호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이들이 힘을 얻으면서 과학논쟁은 종결된다는 것이다.1

콜린스와 핀치가 다룬 사례들이 우리 사회의 과학논쟁에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지난 몇달 동안 과학을 신뢰했던 사람들에게 정신적 공황을 안겨준 ‘황우석사태’는 『골렘』에서 다뤄진 에피쏘드들과는 거리가 멀다. 적어도 과학데이터를 놓고 보면, 황우석사태는 의도를 가지고 이루어진 명백한 날조(fabrication), 즉 과학적 사기(scientificfraud) 사건이기 때문이다. 또 작년까지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핵폐기장 논쟁은 과학사학자 라베츠가 명명한 ‘탈정상(post-normal) 과학’이거나 사회학자 서이종이 말한 ‘과학사회논쟁’에 가깝다. 이 논쟁은 실험의 종결을 둘러싼 과학자들간의 논쟁이라기보다는 전문가와 시민들이 위험을 지각하는 방식의 인식적이고 문화적인 차이에서 기인한 논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골렘』이 우리에게 주는 메씨지는 분명하다. 과학은 신도 아니고 협잡꾼도 아닌, ‘골렘’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과학주의와 반과학주의라는 극단적 사고에 물든 우리 사회에 해독제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과학은 우리를 갑자기 잘살게 해줄 로또복권이 아니며, 그렇다고 우리의 정신적·육체적 삶을 피폐하게만 하는 재앙도 아닌 것이다. 과학은 우리가 만들었지만 우리의 뜻과는 무관하게 종종 제멋대로 행동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또 통제하는 것이 (무척 어렵지만) 전혀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우리의 까탈스러운 피조물이다.

“대체 과학에 어떻게 사기가 있을 수 있지?”라고 누가 물으면, 이 책의 독자는 이제 이렇게 답할 수 있다. “그것은 과학이 골렘이기 때문이지.”

 

 

__

  1. 실험을 둘러싼 논쟁에 대한 콜린스와 핀치의 해석에 관한 비판적 분석은 졸저 『과학은 얼마나』(서울대출판부 2004) 1~2장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