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평론
폴 오스터 현상의 역설
유정완 柳正完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 미국문학. 역서로 『포스트모던의 조건』(공역)이 있음. jyu2@khu.ac.kr
1. 브루클린의 음유시인
노벨상 수상작가 쏠 벨로우(Saul Bellow, 1915∼2005)의 타계는 20세기 미국소설사의 전환점을 알리는 하나의 징후로 읽힐 수 있다. 그의 죽음은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 중산층 남성들의 실존적 고뇌를 주로 묘사해온 일군의 백인 남성작가 시대가 하나의 매듭을 짓고 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물론 존 업다이크(John Updike)나 필립 로스(Philip Roth), 커트 보니거트(Kurt Vonnegut), 그리고 노먼 메일러(Norman Mailer) 등 그와 동시대 작가들이 여전히 작품활동을 하고 있고, 국내에는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잘 알려지고 미국에서는 은둔작가로 더 유명한 J. D. 쌜린저(Salinger)도 아직 살아 있지만, 백인 남성계 미국소설은 이미 포스트모던 경향을 특징으로 하는 차세대 작가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들 차세대 작가군은 국내에도 이미 소개된 토머스 핀천(Thomas Pynchon), 돈 드릴로(Don DeLillo), 팀 오브라이언(Tim O’Brien)을 비롯해 리처드 파워스(Richard Powers), 리처드 포드(Richard Ford), T.C.보일(Boyle) 등이다. 다른 한편, 백인남성 ‘주류문학’은 최근 다문화주의에 힘입어 새로운 대세로 떠오른 소수자문학으로부터 주도적 위치를 위협받고 있다. 소수자문학은 미국에서 이제 하나의 중요한 흐름을 이루고 있으며, 흑인 여성작가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은 흑인공동체의 역사적 경험을 독특하게 재구성한 작품들로 이미 노벨문학상을 타기도 했다. 이 같은 일종의 위기상황을 맞아 백인남성 주류집단에 속하는 일부 작가들은 실험적이고 난해한 초기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 최근에는 대중적 흥미에 부합하는 주제를 쉬운 문체로 담아내어 일반독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뉴저지 출생으로 뉴욕 브루클린에 거주하는 폴 오스터(Paul Auster, 1947∼ )는 이같은 경향의 대표적 차세대 작가이다.
유대계 작가 오스터는 컬럼비아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학을 전공한 뒤, 초기에는 번역에 종사하며 주로 시와 평론을 썼다.1 폴 벤저민(Paul Benjamin)이라는 필명으로 탐정소설 『스퀴즈 플레이』(Squeeze Play)를 1982년에 처음 발표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그는 1987년 「유리의 도시」(City of Glass), 「유령들」(Ghosts), 「잠겨 있는 방」(The Locked Room)을 묶은 『뉴욕 3부작』(The New York Trilogy)을 출간하면서 일약 유명해졌다. 『뉴욕 3부작』에서 최근의 『브루클린 풍자극』(Brooklyn Follies)에 이르는 오스터의 소설세계는 우리 삶을 지배하는 일관된 원칙으로서의 우연성에 대한 강조, 인간의 주체성과 이중자아(double)에 대한 탐구, 전통적 탐정소설의 형식을 해체하는 ‘반탐정소설’(the antidetective story)에 대한 집착, 미국문화사에 대한 폭넓은 반성적 고찰, 그리고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미국의 삶에 대한 비판적 성찰 등을 특징으로 한다. 본격소설과 대중소설의 특징을 적절히 혼합하며 일반인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흥미로운 소재를 간결하고 쉬운 문체로 표현하는 오스터는 일종의 컬트현상을 만들어낸 소위 ‘스타 작가’이다. 나아가 그는 20세기말 미국 인문학 강단을 휩쓴 후기구조주의, 정신분석학,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이론적 성과들을 바탕으로 이른바 해체의 서사, 불확실성의 서사, 탈중심의 서사를 쉬지 않고 쏟아내고 있는 ‘이론 이후’(after theory)의 작가이기도 하다. 오스터는 또 흔히 탐정소설의 창시자로 불리는 에드거 앨런 포우나 미국문학에서 고전적 위치를 차지하는 너새니얼 호손, 허먼 멜빌, 랄프 왈도 에머슨, 월트 휘트먼,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등의 작품이나 전기적 삶을 중심으로 한 미국문화사 이면의 작고 흥미로운 에피쏘드들을 자기 이야기의 소재로 자주 활용한다. 또한 그는 유럽 근대문학의 정점에 서 있는 쌔뮤얼 베케트나 프란츠 카프카의 문체와 주제와 문학정신을 다양하게 재활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오스터는 뉴욕과 뉴잉글랜드의 역사·문화·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쓰고 또 비판하는 ‘뉴욕 작가’이다. 일부 독자들은 브루클린을 근거지로 했던 시인 휘트먼에 빗대어 그를 ‘브루클린의 음유시인’(the Bard of Brooklyn)이라고도 부른다.
현대 미국소설의 국내 소개와 수용은 개별 작가와 작품 들의 문학적 성과나 미국 내에서의 위상과는 일치하지 않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예컨대 『다빈치 코드』(The Da Vinci Code)를 비롯한 대중소설들이 베스트쎌러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꾸준히 소개되고 있는 데 반해, 업다이크나 모리슨의 작품은 국내에 다수 번역돼 있기는 하지만 미국문학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위상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독자층이 적고, 초기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할 만한 핀천의 경우 제대로 소개되기도 전에 잊혀져가는 듯하다. 또 최근 미국 강단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고 문학적 평가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E. L. 닥터로우(Doctorow)나 포드, 오브라이언, 드릴로 등의 국내 소개는 아직도 미진하거나 이제 갓 시작되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백인들의 관심사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차세대 작가 오스터의 활발한 국내 번역과 소개는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그의 작품들은 시와 소설, 자전적 평론, 그리고 그가 편집한 일반 대중들의 짧은 글모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국내에 번역되어 있고 현대 미국문학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2. 한국의 문화지형과 오스터 현상
미국사의 미세한 일화들을 다분히 미국적인 관점에서 재조명하며 미국의 역사와 이데올로기를 때로 비판하고 때로는 인정, 확인하는 오스터의 소설이 오늘의 한국상황에서 널리 읽힌다는 사실은 여러 면에서 흥미롭다. 특히 9·11사태 이후 자폐증적 양상마저 보이는 미국에 대해 한국의 대중정서가 전통적 지지를 점차 유보하기 시작한 싯점에 ‘뉴욕 작가’이자 ‘미국 작가’인 오스터가 널리 읽히고, 언급되고, 팬싸이트가 만들어지고, 교재로 채택되고, 심지어 대입시험에 출제되기도 하고 그를 주제로 한 음악까지 수입되는 우리 현실은 역설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같은 ‘오스터 현상’은 오늘의 한국 문화지형을 우회적으로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작을 전후해서 진행된 한국의 오스터 수입은 우선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 우리 사회의 감수성 변화를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우리의 감수성이 심각하고 진지한 것으로부터 가볍고 얕은 것으로 점차 이동해가는 지점에 오스터 수입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다. 오스터 현상은 또 이른바 ‘세계화’라는 오늘의 전지구적 문화현상의 한국적 모순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맥도날드에서 스타벅스까지, 버드와이저에서 밀러까지, 양키즈, 메츠, 다저스의 경기에서 CNN까지 우리의 감각과 의식과 영혼과 이성이 미국식 소비대중문화와 놀랍도록 친숙해진 상황에서 뉴욕은 어쩌면 더이상 오스터만의 뉴욕이 아닐 수 있다. 우리 중 일부는 미국과의 거리두기를 시도하고 있지만, 우리의 대중정서 근저에는 “양키 고 홈, 그런데 제발 나도 좀 데려가줘!”라는 의식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오스터가 신속한 번역을 통해 국내에 소개되고 읽히는 현상은 오스터의 문학적 기획과 한국 대중의 정서적 요구 사이에 일어나는 하나의 문화적 거래로 이해될 수 있다.
오스터의 작품세계는 오늘의 한국 대중이 느끼는 불안한 삶의 정서와도 일정한 연관을 맺고 있다. 미국 식자들에게 흔히 ‘아시아의 경제독감’(the Asian economic flu)으로 알려지고 우리에게는 ‘IMF사태’라고 명명된 후기자본주의의 재조정 국면에서 우리 대중은 정서적 불안정성, 존재론적 불확실성, 그리고 세계의 불가지성을 삶의 새로운 화두로 삼게 되었다. 적어도 우리 독서대중의 인식으로는 ‘단군 이래 최대’의 경제난국과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경기침체가 너무도 갑작스런 경험이기 때문에 오스터의 반복되는 주제인 “우연 외에는 어떤 진실도 없다”(nothing [is] real except chance)는 말이 실감나는 것이다. 근대화와 민주화의 소용돌이를 숨가쁘게 벗어나자 곧바로 들이닥친 고통스런 경제현실과 불확실한 미래는 우연만이 이 세상의 진리이고 합리성은 우주의 절대 거짓이라는 오스터적 명제에 작지만 분명한 공감을 느끼게 한다는 말이다.
특히 개인의 죽음과 현대문명의 종말론적 징후에 대한 오스터의 어두운 인식은 각종 사고와 죽음으로 점철된 오늘의 우리 현실에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의 『폐허의 도시』(In the Country of Last Things), 『동행』(Timbuktu), 『우연의 음악』(The Music of Chance), 『달의 궁전』(Moon Palace) 등은 전통적 문화가치가 전복되고 완전한 디스토피아가 성립된 도시를 모델로 하거나, 죽음을 앞둔 소외된 소설가의 불행한 마지막 여정을 보여주거나, 현대 자본의 운동방식을 철야노름에 비유하여 이른바 ‘카지노 자본주의’를 우회적으로 묘사하거나, 또는 서부 팽창사에 대한 반성적 우화를 제시함으로써 미국 자본주의의 화려한 외양이 감추고 있는 어두운 이면사를 드러내 보여준다. 이런 점은 경제난국과 참을 수 없는 삶과 죽음의 가벼움을 일상적으로 느끼면서도 명확한 해답은 제공받지 못하는 오늘의 우리 독서대중에게 충분히 매력적으로 다가올 만하다.
이처럼 대중적 취향과 본격문학의 경향을 혼합하여 미국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상당한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오스터는 우리의 일반 독서대중만이 아니라 전문작가나 지식인계층에게도 흥미를 유발시키는 전형적인 ‘후기’포스트모던 작가이다.
3. 삶의 불가해성과 우연의 시학
오스터의 작품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우리에게 친숙해진 개연성의 시학을 거부한다. 그의 서사는 모든 사건의 전개를 철저히 ‘우연’(chance, randomness, coincidence)의 논리에 의존한다. 우연에 대한 집착이 잘 드러난 오스터의 작품으로는 『뉴욕 3부작』과 『우연의 음악』, 그리고 『달의 궁전』이 있다. 『뉴욕 3부작』의 첫 이야기 「유리의 도시」는 우연의 논리를 극단화해서 보여준다. 주인공 대니얼 퀸은 전통적 탐정소설의 세계에 빠져 있는 탐정소설 작가이다. 그는 어느날 밤 ‘폴 오스터’라는 사립탐정을 찾는 괴상한 전화를 받고 ‘실제’탐정의 세계로 빨려들어간다. 퀸이 오스터의 이름으로 수행하는 탐정 임무는 바벨탑의 전설에 근거해 어린 아들을 어둠속에 가두어 인간세계와 단절시키고, 그같은 실험을 통해 신의 언어를 복원하고 신대륙에 천년왕국을 건설하려던 미친 전직 컬럼비아대 교수 피터 스틸먼을 감시하고 그의 범의(犯意)를 밝히는 일이다.
스틸먼은 퀸에게 언어학적·존재론적·형이상학적 질문들을 제기한다. 어느날 리버싸이드 파크에서 스틸먼은 자기 박사학위 논문의 신학적 기초가 된 헨리 다크(Henry Dark)와 그의 신학체계가 사실은 자신이 멋대로 지어낸 것이라고 실토한 뒤, 자신이 그 가공의 인물을 왜 헨리 다크로 명명했겠느냐고 퀸에게 묻는다. 퀸이 우물쭈물하자 스틸먼은 그것이 앨리스 이야기에 등장하는 말하는 계란 험프티 덤프티(Humpty Dumpty)의 ‘H’와 ‘D’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알려준다. 그러면서 그는 담장에서 떨어져 깨져버린 험프티 덤프티를 원상복구하는 것이 바로 현대 미국인들이 직면한 철학적·신학적 과제라고 주장한다. 역사의 누더기를 벗어던지고 이상적 원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험프티 덤프티가 언어의 자의성을 인식한 쏘쒸르적 언어철학자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바벨탑 이전의 순수언어 복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심각한 문제는 퀸이 스틸먼에 대한 미행이나 우연을 가장한 조우를 통해 그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더 큰 질문들 속으로 빠져들고, 마침내 모든 실마리가 뒤엉켜서 처음보다 더 헝클어진 채로 이야기가 끝난다는 사실이다. 스틸먼은 브루클린 다리에서 투신하고, 사건 의뢰자인 스틸먼 2세 부부도 사라지며, 주인공 퀸도 종국에는 사라진다. 아담의 언어를 복원하려던 스틸먼의 신학적 실험과 그 실험의 실패로 인한 자살은 미국사의 기원적 신화에 대한 오스터 나름의 비판을 보여주지만, 결국 이 이야기가 제시하는 최후의 메씨지는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으며 우리의 삶과 세계는 우연과 신비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다.
『우연의 음악』은 이같은 우연의 논리를 우화적 구성과 카프카적 세계관을 통해 강조한다. 인생의 낙오자인 전직 소방관 짐 내쉬는 사라진 아버지의 유산을 뒤늦게 상속받고 돈을 흥청망청 쓰며 자동차를 몰고 미국 전역을 희망없이 떠돌다가 우연히 잭 포지라는 자칭 천재 도박꾼을 만나 스톤과 플라워를 상대로 한 철야 카드도박에 빠져든다. 모든 것을 운에 맡긴 내쉬는 남은 돈을 모두 잃고 자동차마저 판돈으로 잡히지만, 그것도 모자라 결국에는 노름빚을 갚기 위해 스톤과 플라워의 정원에 긴 돌담을 쌓을 것을 요구받는다. 어느날 포지가 갑자기 사라지고, 내쉬는 자본주의의 ‘영혼 없는 전문가’ 또는 ‘도구적 이성’을 대변하는 캘빈 머크스2의 감시하에 노예적 삶을 영위하며 혼자서 담쌓기 작업을 마친다. 그러나 결국 그는 기념파티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자동차사고로 무의미한 죽음을 맞는다. 그것이 자살인지 사고사인지조차 불분명하다. 모든 것이 우연에 의해 지배되고, 자본주의하의 삶이 우리의 인식과 통제 밖에 있다는 이 이야기는 ‘카지노 자본주의’에 대한 오스터의 통렬한 풍자를 담고 있지만, 한편으로 오스터의 전형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세계관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달의 궁전』은 언뜻 보기에 마르코 스탠리 포그라는 가난한 컬럼비아 대학생의 부계전통 회복이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포그의 가계 자체가 실은 우발적 사건들의 집적에 불과하다. 가난한 고아 포그는 어느 날 줄리언 바버라는 한 늙은 장님의 비서로 취직하여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예견하는 그의 사망기사를 겸한 짧은 전기를 미리 쓰는 작업을 맡게 된다. 전기가 완성되어갈 무렵 포그는 바버로부터 아버지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아들 쏠로몬 바버를 만나 전기 초고를 전해줄 것을 부탁받는데, 여기서 그는 쏠로몬 바버가 바로 자신의 사라진 생부라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한다.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발적 사고로 포그는 자기 어머니의 묘지 바로 옆의 갓 파놓은 무덤 속으로 자신의 생부 쏠로몬 바버를 밀어넣어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몰게 된다. 소설 마지막에 독자가 포그와 더불어 재구성하게 되는 가계도에는 젊은 역사학 강사와 사랑에 빠진 여대생, 그 여대생의 임신 사실을 모른 채 그 사건으로 인해 학교에서 쫓겨나는 쏠로몬 바버, 그리고 비오는 날 우연한 교통사고로 그 비운의 미혼모가 사망하고 포그만 고아로 남겨지는 사건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인물들은 결코 서로의 의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살아서는 서로 만나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 점은 ‘토머스 에핑’(Thomas Effing)이라는 줄리언 바버의 새로운 이름에 잘 암시되어 있다. ‘토머스’는 유명한 미국 풍경화가 토머스 모란(Thomas Moran)에서 따온 것이고 ‘에핑’은 영어단어 ‘fucking’의 ‘에프(f)하기(—ing)’라는 의미이므로 ‘토머스 에핑’은 결국 ‘토머스 모란으로 인해 인생이 망가진 사나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모란의 가르침에 따라 서부로 그림을 그리러 갔던 젊은 줄리언 바버가 우연적이고 괴기스런 사건들로 인해 왜곡되고 뒤틀려버린 자기 인생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바꾼 것이다. 이 우스꽝스런 이름이 독자에게 암시하는 바는 삶은 뭔가 저주스런 것, 알 수 없는 것, 미지의 힘에 의해 지배되는 어떤 것이라는 오스터적 주제이다. 이같은 우연의 서사들이 독자의 흥미를 끄는 것은 오스터가 철학적 성찰과 미국에 대한 역사적·문화적 지식을 토대로 재미있는 이야기 파편들을 지속적으로 이어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우연의 강조는 오스터의 서사전략에도 뚜렷이 나타난다. 그의 작품들은 “우연히” “갑자기” “난데없이” “운이 시키는 대로” “한 사건은 다음 사건으로 이어지고” 등의 구절들로 가득 차 있고, 서사의 흐름이 막힐 때마다 이들 구절을 동원한 급격한 전환이나 반전이 시도된다. 우연의 논리는 따라서 오스터의 소설 자체를 가능케 하는 서사의 본원적 힘이라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우연이라는 개념은 오스터의 소설에서 하나의 주제의식, 즉 우주와 세계는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신비의 연속이며 우리의 삶도 우연적 사건들의 연속에 불과하다는 메씨지를 제시한다. 이같은 메씨지는 『뉴욕 3부작』의 세번째 작품 「잠겨 있는 방」의 화자가 내뱉는 언급에 잘 요약되어 있다. “결국 각각의 삶은 우발적 사실들의 집합, 즉 스스로의 목적 결핍만을 드러내는 우연적 교차, 요행, 불규칙한 사건 들의 기록에 불과하다.” 요컨대 오스터에게 있어 미국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은 ‘우연의 여신’에 다름아니다. 이같은 오스터의 우연의 논리를 나는 ‘우연의 시학’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우연의 시학은 세계와 삶과 서사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흐름을 철저히 부정한다.
4. 반탐정소설
그렇다면 우연의 시학은 우연 자체의 강조에 머물고 마는가? 내가 보기에 오스터의 우연에 대한 강조는 좀더 진지한 문학적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우선 그는 우연의 강조를 통해 전통적 탐정소설 장르를 철저히 해체한다. 탐정소설의 원형으로 간주되는 포우의 「도둑맞은 편지」(The Purloined Letter)에서 볼 수 있듯이 전통적 탐정소설은 하나의 완결된 서사구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것은 흔히 텍스트 안팎 질서의 잠정적 와해 징후, 예컨대 ‘잠겨 있는 방’(the locked room) 속의 시체나 수수께끼 같은 범죄사건 등을 먼저 제시한 뒤, 근대 과학지식과 합리주의로 무장한 명탐정의 이성적 추론과정을 통해 그 질서가 다시 복구되는 결말을 보여줌으로써 근대 사회체제의 안정적 유지에 기여하려는 서사적 무의식을 가지고 있다. 특히 탐정의 사건해결 과정이 독서를 통한 독자의 지적 탐구 과정과 닮아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 탐정소설은 과학과 문학이 공유하는 일종의 합리적 인지기능(cognitive function)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기이한 스틸먼 사건에 우연히 말려들기 직전, 퀸이 사립탐정을 뜻하는 영어 ‘프라이빗 아이’(private eye)라는 단어를 가지고 오스터적 말장난을 즐기는 장면에 이같은 사실이 잘 암시되어 있다. 퀸은 ‘프라이빗 아이’의 ‘아이’(eye)라는 단어에는 탐정을 뜻하는 ‘인베스티게이터’(investigator)의 소문자 ‘아이’(i)만이 아니라, 우리들 자아와 주체를 의미하는 대문자 ‘아이’(I), 그리고 객관적으로 세상을 관찰하는 작가의 눈을 의미하는 ‘아이’(eye)도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퀸이 보기에 과학적 탐정, 우리의 근대적 주체, 관찰자로서의 작가는 동일한 인식론적 토대 위에 서 있다. 이같은 계몽적 전제, 즉 객관적 관찰을 통한 인간의 합리적 문제해결을 전제하는 근대적 사유의 토대 위에 기존 탐정소설이 씌어지고 또 읽혀져왔다.
그러나 오스터의 소설은 결국 이같은 전제를 거부한다. 거기에는 전통적 탐정소설의 요소들, 예컨대 ‘잠겨 있는 방’과 탐정의 출현을 필요로 하는 ‘시체’가 애초에 없다. 탐정이 해결해야 할 사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탐정이라고 부를 만한 인물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유리의 도시」의 퀸, 「유령들」의 블루, 「잠겨 있는 방」의 무명작가, 또는 『폐허의 도시』의 애나 블룸이나 『달의 궁전』의 포그, 『리바이어던』(Leviathan)의 피터 아론처럼 엉겁결에 탐정의 길로 들어서는 탐정 유사 인물이 있기는 하지만, 그에게 부여된 주된 서사적 임무는 사건의 해결을 통한 질서의 회복이라기보다는 실존적 자아추구와 그 추구의 필연적 실패에 대한 (무)의식적 각성이다. 결국 오스터의 소설은 모든 종결을 배제하고, 모든 서사적 흐름을 열어두며, 독자에게 최종적인 해결의 실마리보다는 혼돈과 회의를 제공한다. 예컨대 「유령들」의 주인공 블루는 블랙의 정체성 확인이라는 임무 완수에 결국 실패할 뿐 아니라 자신이 오히려 사건 의뢰자인 화이트의 미행과 감시를 받는 부랑아 신세로 전락한다. 이야기 마지막에 그는 독자와 화자로부터도 종적을 감추게 되는데, 화자는 “이 순간부터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선언하며 서둘러 이야기를 끝맺는다. 탐정소설의 전복 또는 자기해체 과정을 서사의 동력으로 삼고,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서사전개를 철저히 거부함으로써 오스터는 우리가 흔히 근대적 서사의 장점이라고 믿었던 자기완결적 패러다임이 이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반)서사, 또는 전통적 탐정소설의 가능성을 내파시키는 ‘반탐정소설’을 우리 시대의 대표 서사로 제시한다.3 이 점을 요약하듯 「잠겨 있는 방」의 이름없는 주인공은 괴이한 친구 팬쇼의 진의를 끝내 파악하지 못하고 뉴욕으로 돌아오면서 “그러므로 모든 것은 종결되지 않은 채 다시 시작될 태세로 언제나 열려 있다”고 느낀다. 친구 팬쇼가 남긴 이해할 수 없는 원고를 한장씩 찢기 시작해 마침내 마지막 장에 이르렀을 때 뉴욕행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오스터의 이야기들은 이같은 반탐정소설 양식을 통해 (미국)문화사와 근대 서구미학의 전제를 되새겨보려는 문학적 노력의 일환이다. 그는 이른바 ‘이론 이후’의 시대에 전통적 소설 쓰기가 어떻게 (불)가능한지를 보여주는 작가이다. 오스터의 반탐정소설은 ‘일직선적 텔로스’(a linear telos)를 거부한다. 그것은 어쩌면 텔로스만이 아니라 플롯이나 이야기마저 가지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은 텔로스의 부재, 플롯의 부재, 이야기의 부재를 작품 전면에 내세우는 『뉴욕 3부작』은 그래서 전통적 탐정소설만이 아니라 전통적 서사마저 해체하는 데리다적 기획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전통적 탐정소설은 결말에 의해 지배되고 또 결말에 대한 근대 서구문명의 집착과 연관되어 있는 데 반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은 결말의 배제를 통해 전통적 서사와 탐정소설의 의미를 끝없이 ‘산종’(dissémination)시키기 때문이다. 결국 오스터의 소설들은 소설 자체의 형식을 해체하고, 전통적 비평·이론·정전을 해체하며, 나아가 스스로까지도 해체한다. 「유령들」의 주인공 블루는 그래서 자신이 방에만 틀어박혀 아무런 “이야기도 플롯도 행동도 발생하지 않는”의미없는 책을 평생 동안 읽도록 저주 받았다고 생각한다.
5. 결론, 또는 질문의 시작
우연적·우발적 사건들의 나열을 통한 서사를 바탕으로 삶과 우주의 절대적 신비를 강조하는 오스터의 반개연적·반필연적 시학은 또 미국의 현실과 미국문화사에 대한 중요한 비판적 언급일 수 있다. 그의 소설은 소외된 삶들로 가득 찬 미국의 현실에 대해 일정한 비판을 수행한다. 그의 주인공들은 「유리의 도시」의 스틸먼처럼 진정한 언어의 의미가 사라진 ‘파편화된 도시’뉴욕에서 신의 언어를 복원하기 위해 모든 부서진 것들, 예컨대 찢어진 우산이나 깨진 병조각을 주워담거나, 『달의 궁전』의 포그처럼 카프카의 「굶기의 예술가」를 모방하며 쎈트럴 파크의 노숙자가 되어 의도적 단식을 하며 자본에 대한 상징적 투쟁을 전개한다. 또는 『달의 궁전』의 줄리언 바버처럼 우연히 얻은 거금을 맨해튼 거리의 행인들에게 이유없이 나누어줌으로써 이른바 자본주의에 대한 조롱과 비판을 수행한다. 나아가 오스터는 통상적인 미국식 문명발전관이나 미국식 팽창주의를 비판하고 미국의 역사가 사실은 우연의 법칙에 지배당해왔다는 점을, 따라서 미국이 세계의 문명중추가 되어야 할 어떤 필연적 논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오스터의 우연의 시학은 그것이 갖는 비판적 욕구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국이 하나의 제국이 되어버린 사실을 암묵적으로 정당화하는 오류에 빠지고 만다는 점이다. 미국이 미대륙과 세계를 지배할 ‘필연적’이유가 없다고 본다면, 미국이 그동안 세계제국으로 기능해온 ‘역사’를 비판할 수 있는 필연적 논거 또한 똑같은 논리에 의해 사라지기 때문이다. 오스터의 이같은 우연의 시학은 20세기말 미국 인문학계를 풍미한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후기구조주의 철학의 극단적 경향과 맥이 닿아 있다. 과도한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후기구조주의는 그 논리의 엄정성이나 해방적 비판의식에도 불구하고 자칫 다른 모든 비판을 상대화하고 무력화하는 논리로 이용되기도 한다. 나아가 이같은 우연의 시학은 차이·여백·파편·부분·반총체성 등을 중시하는 현대 자본의 논리와도 닮아 있다. 현대 자본은 스스로의 다양성과 반총체성에 대한 선전에도 불구하고 자본 자체의 총체적 논리와 지배욕구는 강화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과잉 도입한 오스터의 작품들은 그러므로 미국사회와 자본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결국 미국사의 진행이나 자본의 팽창과 형식적 상동성을 갖게 된다. 이 상동적 팽창의 결과가 우리 앞에 ‘오스터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기법의 활용이 오스터의 경우처럼 반드시 우연에 대한 과도한 찬사와 미국사에 대한 비판의 봉쇄로 귀결될 필요는 없다. 예컨대 파편화, 우연의 논리, (반)탐정소설 기법 등을 활용하는 드릴로나 닥터로우의 경우 파편적 사실들의 복구를 통해 20세기 미국사의 이면을 직접 다루면서 공식 역사가 감추거나 억압하는 일반민중의 미세한 삶의 순간들을 자세히 복원해내고, 또 해방적 우연의 논리를 비극적 세계관이나 음모론적 역사관4)과 연결지어 일종의 “인식론적 지도 그리기”(프레드릭 제임슨)를 시도한다. 드릴로는 『마오 II』(Mao II)나 『리브라』(Libra), 『지하세계』(Underworld) 등에서 미국 냉전사에 대한 ‘대항역사’(counterhistory)를 제시하거나 인문학의 전반적 위기상황에 대해 비판적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닥터로우는 『래그타임』(Ragtime)이나 『다니엘서』(The Book of Daniel) 등에서 현대 미국사의 파노라마적 전개를 되짚으면서 냉전시대 미국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오스터의 작품세계에 대해서는 미국 내에서도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그가 광범한 독자대중을 확보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일부 독자와 비평가 들은 그를 아예 무시하기도 한다. 심지어 오스터가 위선적 글쓰기의 대표주자이며 과장, 동어반복, 값싼 언어유희, 철학을 가장한 저급한 말장난의 명수라고 비꼬는 비평가도 있다. 그럼에도 다수의 비평가들은 그를 미국문학의 소중한 개척자로 여긴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그가 대중문학과 고급문학적 경향을 동시에 포용하는 방향으로 작품세계를 열어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리의 오스터 현상은 분명 과열되어 있다. 읽기 쉽고, 재미있고, 흥미로운 백과사전적 사실들로 점철된 그의 우연의 서사가 미국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건강한 역사적 시각을 자칫 무디게 할 위험도 있다. 지면 사정상 상세히 다룰 여유가 없지만 현대 미국작가들 중에는 드릴로나 핀천, 닥터로우나 보일처럼 깊이있으면서도 재미있고, 비판적인 동시에 진지한 질문들을 제기하는 작가들이 많이 있다. 제임슨의 고백처럼 우리가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를 굳이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빈쎈트 리치(Vincent Leitch)의 구분에 따라 ‘포스트모던 우파’가 아니라 비판적 욕구와 역사인식을 통합하고자 끊임없이 시도하는 이들 ‘포스트모던 좌파’ 집단에 속할 만한 작가들에게 좀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 오스터는 자전적 평론과 산문 들에서 자신이 소설가로 데뷔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소설가로 성공한 후에도 그는 여전히 번역가, 시인, 소설가, 극작가, 대본작가,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 자신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우연의 음악」에서는 마지막 장면에 까메오로 출연하기도 했다.↩
- 스톤과 플라워의 하수인 캘빈 머크스(Calvin Murks)는 그 이름이 암시하듯 막스 베버가『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말한 자본주의 정신의 원천으로서의 캘빈주의적 금욕주의를 현대적으로 체현한 ‘철장’(iron cage) 속의 ‘영혼 없는 전문가’(specialists without spirit)이자 호르크하이머 등이 말하는 ‘도구적 이성’(the instrumental reason)의 대변자이다. 오스터의 풍자적 우화에서는 잭팟(Jack Pot)을 통해 백만장자가 된 스톤(Stone)과 플라워(Flower) 또한 자본주의의 ‘토대’와 ‘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 미국 포스트모더니즘의 초기 이론가 윌리엄 스패노스(William V. Spanos)는 반탐정소설을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의 문학적 원형으로 제시한다. 이같은 반탐정소설은 중심, 종결, 완결, 통합 등을 거부하는 포스트모던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