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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 시

 

우리들의 그늘진 왕국

 

 

엄경희 嚴景熙

문학평론가. 저서로 『빙벽의 언어』 『未堂과 木月의 시적 상상력』 『질주와 산책』 『현대시의 발견과 성찰』 『저녁과 아침 사이 詩가 있었다』 등이 있음. namwoo@hanmail.net

 

 

1. 여기는 민주공화국?

 

우리 삶을 조정하고 가동시키는 법과 규율, 제도, 그리고 사회계약 따위는 합리적 근거에 의해 마련된 사회적 장치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장치들의 근본 목적은 빈부상하(貧富上下)에 따라 만들어진 계층적 위계를 최소화함으로써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지켜내는 데 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계속되는 지배와 피지배의 투쟁구조는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분명 누군가 합법성이라는 명목을 불합리한 방식으로 도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문제는 불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유지하고 증식시키기 위해 악법을 합법화하는 데 있다. 교묘하게 다듬어진 사회적 장치들이 권력의 작동방식으로 연동될 때 권력적 억압의 전술은 최상의 효과를 얻게 된다. 악법의 합법화야말로 피지배자의 숨통을 조일 수 있는 권력자의 가장 치밀한 기획인 것이다. 이같이 합리성을 위장한 비합리적 권력구조는 강대국과 약소국 혹은 국가와 시민 사이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표면적으로 개인주의가 심화되고 있는 사회에서 살지만 이면적으로는 그 어느때보다도‘사회적 관계’에 개인적 삶을 묶어놓을 수밖에 없는 구조에 예속되어 있다. 따라서 다양하게 분화된 소수집단의 이익관계는 한 개인의 삶을 좌우하는 막강한 힘을 지닌다.

부조리한 권력의 힘이 작동할 때 개인이 그것을 돌파하기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보존에 위협을 느낄 때 정의나 정직보다는 권력에 순응하거나 동조하는 편이 개인에게 이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응과 동조의 메커니즘이 강해질수록 세계의 진실은 은폐되고 권력은 더욱 증식할 가능성이 커진다. 순응과 동조의 메커니즘이 보편화될 때 공모자들의 밀약은 더욱더 합리적인 가치로 탈바꿈하여 번성할 것이다. 다수의 횡포가 곧 보편의 가치를, 다시 말해 여론이나 공론을 대변할 때 한 사회의 정신적·정서적 가치는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이때 소수의 희생 또한 무지막지한 것이 될 것이다. 이 쾌락의 시대에 문학사회학이 유효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진정한 합리성으로 기획되어 있는가? 나 또한 공모자는 아닐까? 우리 사회에 희생적 공모는 없는가? 이같은 생각과 더불어 이 세계를 고민하는 네 편의 문제작과 만날 수 있었다. 정병근의 「태양의 족보」, 박지웅의 「사회적 식사」, 김기택의 「슬픈 얼굴」, 우대식의 「택리지—겨울 남행」이 그것이다. 이들 시는 개인의 삶에 깊숙이 관여되어 있는 사회적 관계의 억압성을 예민하게 의식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2. 권력자의 밀서(密書)

 

권력자의 최대 고민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보강하는 데 있다. 권력이 곧 그의 생존력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좌가 위협받을 때 권력자의 시퍼런 칼끝은 날카롭게 벼려진다. 권력의 남용을 방지하는 장치가 약할수록 권력자의 칼은 더욱 무자비한 것으로 기능할 것이다. 그 칼은 역적의 무리를 진압하고 왕국의 질서를 다시 수립한다는 명분으로 피비린내를 불사한다. 이와 같은 절대권력은 중세의 봉건적 왕조에서만 통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 근대사에 등장하는 몇몇 정치인들을 떠올려보면 권력의 만행이 인간사에서 쉽게 사라질 성질의 것이 아님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물질적 풍요가 미덕인 시대, 개인주의가 집단주의에 우선하는 시대, 그럼에도 불평과 불행과 부당함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는 이 시대에 권력은 더욱 교묘하고 다양한 형태로 우리를 결박한다.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사회적 관계가 더 철저하게 개인을 예속시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정병근(鄭柄根)의 「태양의 족보」는 매우 흥미로운 발상을 보여주는 시라 할 수 있다.

 

근친상간과 골육상쟁의 저 유서 깊은 패륜은

가령, 내셔널지오그래픽식으로 말하자면 그게 다

무자비하면 할수록 외경스런 자연의 섭리란다

그러면서 순환하는 거라고, 인간은 그저 겸허하게 지켜보면서

뭔가를 궁구해야 한다고 나도 가끔 테레비를 보면서

아이들에게 자연과 생명의 경이 따위를 햐, 햐, 가르치곤 하는데

그런 아비를 심드렁하게 쳐다보는 아이들의

눈빛에는 벌써 불신과 권태의 낌새가 묻어 있다

저 눈빛이 언젠가는, 반드시, 화근이 될 것이다

음모와 반란, 살육과 숙청, 분서와 갱유로 얼룩진 아비의 역사가

저들에게 들통나는 날엔 나도 무사하지 못할 터, 설마 싶지만

(설마가 키운 방심 때문에 결국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나는 그게 불안하여 아이들이 더 울룩불룩해지기 전에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뭔가 단단한 것을 손아귀에 틀어쥐고

최후의 순간까지 놓지 않으리라 결심해보는 것인데,

저 아이들이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아비를 추궁할 때쯤이면

어쩔 수 없이 나의 한시절도 서서히 저물어갈 것이다

엎드려 숙제하고 있는 아들놈의 뒤통수가 무섭다

놈은 이미 살생부 명단을 짜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훈을 써서 벽에다 걸어두려는데 마땅히 쓸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비이면서 가장인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경착륙이냐 연착륙이냐, 露宿이냐 家宿이냐가 내 운명의 핵심일 터인데

일찌감치 讓位하고 수렴청정이나 할까 궁리해보다가

난데없이, 갑자 무오 기묘 을사년 들의 숱한 옥사를 생각하다가

햇빛 때문에 살인을 했노라던 한 서양 소설 주인공을 떠올리곤

그만 픽, 웃음이 나오는 것이었다 아파트—

순장의 거대한 무덤 위로 모래바람 분다 멸망이 코앞이다

—정병근 「태양의 족보」(『문학과사회』 2005년 겨울호) 전문

 

정병근은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의인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권력의 고삐를 단단히 쥐고자 하는 음험한 권력자를 시적 화자로 내세우고 있다. 그는 음모와 반란, 살육과 숙청, 분서와 갱유로 얼룩진 역사의 주인공이며 갑자 무오 기묘 을사년의 숱한 옥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이다. 그리고 그는 한 가정의 아비이면서 가장인 남성이기도 하다. 자기의 폭력적 역사를 은폐해왔던 화자는 미래에 자신을 추궁할 아이들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에게 아이들은 화근의 씨앗인 것이다. 이때 왕국의 멸망을 눈앞에 두고 있는 그의 심리는 다소 복잡하게 그려진다. 그는 어떻게 하면 최후의 순간까지 권력을 틀어쥘 수 있는가를 고민하면서 동시에 아이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를 고민한다. 더불어 마땅히 남겨줄‘가훈’을 가지지 못한 자기의 비루함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 모순된 의식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화자는 화근, 들통, 비참한 최후, 추궁, 살생부, 멸망 같은 단어들로 이루어진 일련의 사태를 예감한다. 해서 그는 다양한 궁리에 휩싸인다. 수렴청정과 모반자를 처단하는 옥사와 개인적 실존을 찾아가는 이방인의 삶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었다는 듯 그는‘픽’하고 실소하고 만다.

이러한 시적 문맥을 시인은‘태양의 족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정병근의 인간에 대한 회의적 시선이 함축되어 있다. 그는 자연의 생존투쟁을 내셔널지오그래픽식 섭리나 외경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꺼리는 듯하다. 생존의 본질적 성향인 무자비함을 그는‘태양의 족보’즉 자연의 유구한 승계방식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야말로 생명적 존재의 잔인성을 가장 기술적으로 발전시켜온 무도한 자연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화자는 침울함과 냉소를 섞어가며 인간의 본성을 들추어낸다. 겸허하게 생을 궁구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신뢰는 음모와 반란, 살육과 숙청, 분서와 갱유로 얼룩진 아비의 입을 통해 여지없이 무너진다. 시인은 무자비한 왕의 내면을 폭로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음험한 지배욕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정병근의 성악설을 전폭적으로 부정할 만한 근거를 찾아보지만 궁색하다는 생각이 든다.

 

 

3. 우두머리와의 위험한 식사

 

전쟁과 살육으로 점철된 인류역사를 먹이사냥의 역사라고 규정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타자의 영토와 목숨을 빼앗는 악덕이 곧 국력이고 경쟁력인 역사를 우린 지금도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세계는 거대한 식탁이라 할 수 있다. 제국주의나 독재체제 따위는 물론이요, 우리의 일상에서도 먹이사냥의 카니발은 사회의 다양한 이익관계에 따라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특히 무한경쟁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의 욕망 생산 씨스템은 인간의 삶을 미개상태에서 진보적 진화의 상태로 이끈 것이 아니라 야만의 상태로 전락시켰다고 할 수 있다. 공생, 상생, 차이의 인정 등의 슬로건이 강조되는 것 또한 야만적 이기주의가 그만큼 팽배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박지웅은 이러한 현실을‘식탁’의 알레고리로 표현한다.

 

갈비를 뜯다 문득 생각한다

나는 매일 동료와 어울려

이 식탁을 잡으러 다녔는지 모른다

영양같이 뛰어다니는 식탁을 위해

우리는 동물의 힘으로 모였는지 모른다

식탁 머리맡에서 우두머리가 먹고

나와 동료는 식탁을 둘러싸고 앉았다

식탁의 등을 파먹다, 오호라!

대장이 숨통을 물어 끊을 때

나는 내 뒷다리에 힘을 주고 이리저리

이 식탁의 관절을 끊느라 무척 애썼다

아 참 육질이 좋다 참, 좋구나

어리고 부드러운 살, 먹는다, 씹는다

아 어금니에서 자꾸 삐져나오는 만족의 힘이여

뼈만 남은 식탁에 발을 얹고 웃는 힘이여

식사가 끝나면 발톱을 닦고 이빨을 고르는

짐승의 솜씨를 가진 이 멋진 동료여

여럿이 있으면 우리는 왜 동물이 되는가

—박지웅 「사회적 식사」(『문예중앙』 2005년 겨울호) 전문

 

이 시의 매력은 애매성이 아니라 알레고리의 명쾌함에 있다. 오로지 한가지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곤 하는 알레고리적 표현방식은 대부분 다의성과 애매성을 결하기 때문에 의미의 깊은 맛을 살려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때로 날카롭고 명징한 알레고리가 우리의 속을 후련하게 열어주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알레고리는 애매성 못지않은 긴장감으로 독자를 이끌기도 한다. 박지웅의 「사회적 식사」가 그러한 예이다.

시인은‘사회적 식탁’의 알레고리를 통해 현대인의 야만적 생존방식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든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매일‘나’에게 유용한 식탁을 잡기 위해 온힘을 다해 뛰어다니는지도 모른다. 그 식탁은“영양같이 뛰어다니”기 때문에 쉽게 포획되지 않는다. 이때 중요한 것은 우두머리와 동료들이다. 어떤 우두머리를 앞세워, 어떤 동료들과, 어떤 자리에서 사냥이 이루어지는가가 그 사람의 사회적 성공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우두머리를 둘러싸고 있는‘나’와 동료들의 절묘한 결속관계가 무너지면 식탁도 사라진다. 따라서‘나’는 식탁을 사수하기 위해 무리에 헌신해야 하는 것이다. 이 사회적 공모관계를 시인은“우리는 동물의 힘으로 모였”다고 말한다. 그 동물의 힘이 하나의 식탁에 집중적으로 쏟아질 때 비로소“어리고 부드러운”희생자의 등을 파먹는 카니발이 시작된다. 대장은 숨통을 물어 끊고‘나’와 동료들은 식탁의 관절을 끊는다.“어금니에서 자꾸 삐져나오는 만족의 힘”, 주체할 수 없이 즐거운 생의 한순간을 위해 우린 매일 식탁을 잡으러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시인은“여럿이 있으면 우리는 왜 동물이 되는가”라고 자문한다. 사회적 성공을 꿈꾸는 모든 이에게 시인의 말은 비수와도 같이 꽂힐 것이다. 집단심리에 대한 이 명쾌한 해석이야말로 집단적 이기의 야만적 근성을 예리하게 해부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런 자문이 시작되는 순간 화려했던 식탁은 검고 칙칙한 피비린내로 변질될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관계를 자문하는 자는 다음 식탁의 희생물이 될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사회적 결속관계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는 반역적 심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시를 반복해 읽으면서 나는 자꾸 되묻게 된다. 우리의 날랜 발톱과 이빨이 다른 한 세계를 온전히 덮치는 순간 우리는 더할 수 없는 결속을 확인하곤 한다. 그런데 우리 각자는 왜 이렇게 고독한 걸까?

 

 

4. 웃음 속에 숨겨진 얼굴

 

일본 문화의 특징을 표현하는 말 가운데 타떼마에(立前)라는 용어가 있다. 타떼마에는 타인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고 관리하는‘감정관리기술’을 뜻한다. 사회적 관계가 비대해지고 그것의 의존도가 개인의 생존을 좌우할 때 이러한 용어가 탄생하게 된다. 현대 삶에서 감정관리기술에 능한 사람이야말로 사회적 결속에 잘 적응하는 사람일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사회적 요구에 맞게 자기의 표정을 길들여온 자라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감정관리기술, 즉 흔히 말하는‘표정관리’는 이미 중요한 자기관리 능력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이익집단에 대한 순응과 동조의 메커니즘이 뿌리 깊어질 때 세련되고 가식적인 감정관리기술은‘교양인’의 중요한 태도가 될 것이다.

이처럼 외부로 드러난 얼굴과 내부로 숨겨진 얼굴이 서로 다른 것은 인간의 생존적 측면에서 어쩔 수 없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왜 유례없이 극심한 다중인격으로서의 분열을 경험하게 되는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 인격체의 얼굴을 여러 개의 페르쏘나(persona)로 분화하도록 유도하는 다양한 억압의 체계가 이 사회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사회적 식탁’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감정관리기술을 연마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개인을 지배하는 음험한 왕국의 또 하나의 규율이라 할 수 있다. 김기택(金基澤)의 「슬픈 얼굴」에 주목하게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윽고 슬픔은 그의 얼굴을 다 차지했다.

수염이 자라는 속도로 차오르던 슬픔이

어느새 얼굴을 덥수룩하게 덮고 있었다.

혈관과 신경망처럼 덥수룩하게 온몸을 덮고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으나 슬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있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뜨거운 눈물에 눈알이 메추리알처럼 익을 시간이

그동안 내뱉은 모든 발음이 울음으로 한꺼번에 뭉개질 시간이

팔자걸음처럼 한적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한줌밖에 안되는 웃음을 당장 패대기칠 수도 있었지만

슬픔은 그가 더 크게 웃도록 내버려두었다.

조잘대는 주둥이 깊숙이 주먹 같은 울음을 처박을 수도 있었지만

침들이 길길이 뛰는 말소리를 그냥 보고만 있었다.

웃음과 수다에 맞추어 목과 이마의 핏줄이 굵어질 때마다

슬픔이 지나가는 자리가 점점 붉어지는 게 보였다.

한번 웃다가 일그러진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고

고음으로 갈 때마다 웃음소리는 자꾸 울음소리가 되려고 떨고 있었다.

슬픔이 얼굴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그다지 우습지 않은 농담에도 모두가 배를 움켜쥐고 웃고 있었다.

웃음과 수다가 갑자기 그칠까봐 모두 조마조마하고 있었다.

—김기택 「슬픈 얼굴」(『세계의 문학』 2005년 겨울호) 전문

 

이 시는 감추어진 존재의 본성을 감각적 사물로 탈바꿈시키곤 하는 김기택의 개성적 상상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는 이 시를 통해 외적 인격(사회적 얼굴)과 내적 인격(주체의 내면적 얼굴)으로 분열된 현대인의 얼굴을 제시한다. 그것은 웃음과 슬픔의 아슬아슬한 긴장관계에 의해 묘사된다. 온몸을 덥수룩하게 덮고 있는 슬픔은‘팔자걸음’을 하고 서서히 존재 밖으로 빠져나오려 한다. 그것을 위태롭게 막고 있는 것이 외적 얼굴로서의‘웃음’이다.“한줌밖에 안되는”웃음의 힘으로‘그’는 간신히 사회적 식탁의 유대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슬픔은 익으며 붉어진다. 일그러지는 웃음, 울음소리로 떨려나오는 웃음,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그’의 고통을 굳이 포착하는 시인의 의도는 무엇인가? 시인은 가식과 진실, 억압과 해방, 사회적 자아와 본질적 자아 사이에서 일그러지고 뭉개지곤 하는 우리들의 존재형식을‘그’의 분열된 얼굴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중·삼중의 존재분열은 이 시대에 예외적 개인이 겪는 특수한 경험이 결코 아니다. 신뢰나 정감보다는 이해관계가 우선되는 사회적 관계에 속한 현대인들에게 이는 보편적 삶의 태도라 할 수 있다. 수많은 이익관계의 망을 벗어날 때 우리는 사회의 낙오자로 전락하게 된다. 때문에‘슬픈 얼굴’을 아무 때나 내밀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개인의 내적 얼굴을 마음의 폐쇄회로 속에 구겨넣고 집단의 분위기에 맞는 얼굴, 모두가 공인하는 합법적인 얼굴로 치장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들의 슬픈 얼굴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존재의 본성을 끊임없이 감추어야 하는 구조야말로 억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나’는 없고‘나’로부터 탄생한 삼인칭으로서의 얼굴만이 용인되는 상황에서‘나’의 감추어진 울음을 진실로 들어줄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 각자가 지극히 고독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5. 하얗게 야윈 우리들의 택리지

 

‘길’에 관한 모든 몽상은 자신이 현존하는 세계에 대한 거부감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존재의 지향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지도의 청사진이다. 한 존재가 길에 관한 몽상을 감행할 때 그는 결핍을 충족시키기보다는 우선 현재의 자신을 낭비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길’은 모색이고 성찰의 과정이지 그것이 곧 결과는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시에서 수없이 반복되곤 하는‘길’의 보편적 상징에 대체로 우울한 음영이 드리워졌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길에 관한 몽상은 개인적 층위로부터 시대나 역사적 층위에 이르기까지 그 발생 연원이 다양하다. 우대식(禹大植)의 「택리지—겨울 남행」에 새겨진 길에 관한 몽상은 개인의 서정을 벗어나 우리 시대의 고민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해가 떨어진 겨울 대숲가에는

모든 사물의 뒤편이 일제히 솟아올랐다

그동안 내 눈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는 듯

무너져내린 소쇄원에 한조각 빛마저

사그러질 때 둥근 내 뼈를 바위에

갈아본다

택리지의 쓸쓸한 기억 위에

한줌 전등이 켜질 때

뼈대로 지켜낸 저 시간들이란

얼마나 물렁한 것일까

죽지 않고 살아 있음

남녘의 섬 흑산도에서 쓰던 정약전(丁若銓)의 편지들은

또 얼마나 하얗게 야위었던가

댓잎들은 위리안치의 생을 씹고 씹으며

저 깊은 어둠의 중심에서

몇마리 새를 키울 뿐

야윈 물고기들이 편지의 행간을 기어

목마른 뭍으로 오르고 있다

눈 속에서 편지 위로 번지는 불꽃들

한획을 그을 때마다 빠르게 혹은 느리게

재가 되어 주저앉는 흰 종이

이 만행의 길 위에서

겨울 해변에 이르러 한장 편지를 쓴다

한순간

모든 빛과 어둠을 뚫고 그대와 연락되기를

 

눈발이 펄펄 내리는 하늘에서

물고기들이 수직으로 하강하고 있었다

—우대식 「택리지—겨울 남행」(『애지』 2005년 겨울호) 전문

 

이 시는 독자에 따라 여행시, 혹은 개인의 고독감을 노래한 시 정도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보면 풍광을 노래하면서 거기에 자신의 감정을 엷게 곁들인 서정풍의 여행시와는 매우 다른 면모를 지님을 알 수 있다. 여행시나 풍물시가 독자에게 큰 울림을 주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데, 이는 현지에 직접 가서 낯선 것을 감격과 흥분 속에서 체험한 시인과 시집을 펼쳐 그 감격을 재생해야 하는 독자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틈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가시적 풍광의 아름다움보다는 거기에 배어 있는 역사적 흔적을 깊이있는 시각으로 포착함으로써 이같은 여행시의 단점을 넘어서고 있다.

화자는 어두워진 겨울 대숲가에서 그동안 눈으로 볼 수 없었던 사물의 뒤편을 본다. 이 시에서 모든 사물의 뒤편은 다름아닌 우리 역사의 흔적들이다. 소쇄원은 잘 알려진바 전남 담양에 세워진 조선조의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이 아름다운 건축물의 이면에는 양산보(梁山甫, 1503~57)라는 선비의 시대적 고통과 승화된 정신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양산보는 15세에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나, 정암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화순 능주에서 귀양을 살다 사약을 받고 죽게 되자 17세의 나이로 고향 담양에 돌아와 평생 정계로 나가지 않고 은일한다. 화자는 소쇄원이 어둠에 묻히자“택리지의 쓸쓸한 기억 위에 한줌 전등”을 켜고 단단하게 침묵하고 있던 역사의 시간을 물렁한 것으로 살려낸다. 그리고 자신의 둥근 뼈를 바위에 갈아본다. 이때 둥근 뼈를 바위에 가는 행위는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조광조와 양산보의 정직했지만 불우했던 선비로서의 삶을 내면화하는 행위이며 동시에 그들의 행적에 불을 밝히는 행위로 읽힌다.

화자의 이같은 역사탐방은 흑산도로 이어진다. 그는 흑산도에서 다시 역사적 인물인 정약전(1758~1816)과 조우한다. 남인계 학자이자 천주교도인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와 그들의 일가친척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처형과 유배 등 피비린내 나는 박해를 받은, 조선조에서 가장 불우했던 선비일가이다. 이러한 불행 속에서도 정약전 일가가 남긴 학문적 유산이 얼마나 막대한 것인가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화자는 신유박해 이후 흑산도에서 줄곧 위리안치(圍籬安置)의 생을 살면서 한 자연과학자로서 『자산어보』를 남긴 정약전의 쓸쓸한 행적을 비장한 목소리로 담아내고 있다.“눈 속에서 편지 위로 번지는 불꽃들”이 재가 되는 만행의 길에서 그는“모든 빛과 어둠을 뚫고”갈 편지 한장을 쓴다. 그는 편지에 무엇을 기록했을까?

시인은 택리지를 따라 불우했던 선비들의 행적을 여행함으로써 당시 권력과 제도의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선비정신을 끝끝내 지켜냈던 옛사람들의 뜻을 비장미 있게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왜 시인이 과거의 인물들을‘지금—여기’로 불러내고 있는가를 말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 시의 맥락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세상의 판도를 바꾸어놓은 오늘날에도 개인의 소신과 신념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다양한 권력체계가 여전히 존재함을 역사라는 거울을 통해 암시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의 위태로운 정신세계를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하는 성찰적 물음을 우회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대식의‘택리지’는 그늘진 쾌락의 왕국에 정신주의의 길을 열고자 하는 모색의 지도라 할 수 있다. 다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역사에 대한 화자의 진지한 태도가“그대와 연락되기를”이라는 구절에 의해 연가풍의 서정으로 희석되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