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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기호

이기호 李起昊

1972년 강원도 원주 출생. 19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가 있음. antigiho@hanmail.net

 

 

 

할머니, 이젠 걱정 마세요

 

 

1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이야기들을 책이 아닌, 할머니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할머니를 통해서 뱀이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죽은 사람들이 때론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죽어 나무가 되고, 또 누군가는 죽어 새가 되곤 하였다. 글을 몰랐던 나는, 할머니를 통해서만 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가끔 촉 낮은 백열전구가 깜빡깜빡거릴 때마다, 그 사람들이 누워 있는 할머니 머리맡에 찾아와 가부좌를 틀고 앉는 것을 보았다. 어린 나는, 그 사람들이 무서워 할머니의 말라버린 가슴에 자주 얼굴을 파묻어야만 했다. 화로와 요강과 벽장이 있는 방이었다. 화로와 요강과 벽장이 있는 방.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방에서 나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것 같다. 글을 깨치기 전, 오직 목소리만으로 말이다.

 

 

2

 

세월은 흘러흘러 할머니는 어느덧 여든을 훌쩍 넘겨버리셨다. 여든을 넘긴 할머니는, 이제 나에게 한가지 이야기만 반복해서 들려준다.

“아가, 할미가 육이오 동란 때 말이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내가 예전에 많이 듣던 이야기였다. 어느날 사라진 형부가 육이오 때 좌익 우두머리가 되어 백마 타고 동네에 나타난 이야기, 그 형부 때문에 몇달간 굶지 않고 산 이야기, 그러다가 다시 전세가 역전되어 언니와 조카들이 모두 몰살당한 이야기, 조카 중 한명이 숨겨달라고 찾아왔는데, 그 어린것을 그냥 모른 척해버린 이야기. 할머니는 그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주고, 또 들려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할머니는 작년에 몹쓸 병에 걸려버렸고, 그래서 누군가에게 빨리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것이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한자락 들었으니, 그래도 명색이 이야기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손자인데,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 옛날 할머니처럼, 작은 목소리로 사라진 사람들을 불러내었다. 할머니의 머리맡에 그들을 앉게 하였다. 그 이야기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3

 

할머니, 우리 살던 옛집 기억나? 아니, 거긴 할머니 고향이고, 나 태어난 곳 말이야. 그래, 거기. 강원도 원주. 기억나? 그래 맞아, 단구동 빨간 기와 얹은 집. 우리 할머니 기억력 아직도 쌩쌩하네, 뭐. 그 집에서 우리 이십년 넘게 살았잖아. 할머니하고 엄마하고 나하고. 봄이면 집 앞에 제비꽃하고 금낭화하고 지천으로 막 피고 그랬잖아. 대추나무도 큰 거 하나 있었고. 엄마는 왜 거 풍년연쇄점이라고, 우리집 바로 옆에서 구멍가게 하고. 아니, 통닭집 한 건 둘째고모고, 연쇄점 말이야, 연쇄점. 그래, 두부도 팔고, 담배도 팔고, 계란도 팔던 연쇄점. 그 집 참 좋았는데…… 아니, 지금은 없지. 택지개발한다고 집이니 논이니 다 밀어버려서, 그래서 우리도 이사 나온 거잖아. 지금은 거기 다 아파트고 상가야. 거, 동네 뒷산도 다 깎아버렸는데, 뭐…… 아니, 치악산말고 뒷산. 치악산을 왜 깎아.

 

그때 왜 할머니가 엄마하고 대판 싸우고 막내고모 집에서 한 반년 동안 살았던 적 있잖아? 나, 아홉살 땐가, 열살 때 말이야…… 아이고, 또 그 소리다. 그건 백번을 말하고 천번을 말해도 할머니가 엄마한테 잘못한 거지, 뭐. 남편 저세상 보내고도 군말없이 시어머니 잘 모시고 사는 사람을 건드리긴 왜 건드려…… 아이고, 참 할머니, 아, 아빠가 쿠웨이트에 돈 벌러 갔다가, 아, 그러다가 운이 없어서 교통사고로 죽은 건데 그게 왜 엄마 때문이야. 응? 아니지…… 엄마가 무슨 재주가 있다고 쿠웨이트로 날아가? 아이고, 남편을 잡아먹긴 누가 잡아먹었다고 그래. 그 보상금 받아서 연쇄점도 열고, 단구동 집도 사고, 나도 대학공부 시키고, 할머니도 지금까지 잘 모셔왔잖아. 아니아니, 쿠이트가 아니고, 쿠웨이트. 그래, 거기에서 아빠 죽고 나온 돈으로…… 우리가 굶지 않고 살았잖아…… 아이, 참. 쿠이트가 아니고, 쿠, 웨, 이, 트!

암튼, 그때 할머니가 집에 없었을 때 말이야, 그때 연쇄점에 웬 걸사(乞士)가 한명 찾아온 적 있었거든…… 그러고 보면 그땐 참 그런 스님들도 많았는데 말이야, 그치 할머니? 어느날 갑자기 산신령처럼 나타나서 괜스레 사람들 운명 바꿔놓고, 그러곤 물 한대접 얻어 마시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석양으로 사라지는, 카아, 멋있지, 멋있어…… 알지, 우리 할머니 불심 깊은 거야 원주 사람들이 다 아는 얘기지. 아니, 아니. 반야심경 테이프는 나중에 듣고……

그때 엄마하고 나하고 연쇄점 책상 계산대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거든. 칠월인가, 팔월인가, 아마 그랬을 거야. 날은 덥지, 손님은 없지, 파리는 연신 얼굴을 간질이지, 그러니 뭐 둘다 사이좋게 까무룩까무룩 졸았던 거지. 근데, 그때 웬 나이깨나 잡수신 스님 한분이 가게 미닫이문을 열고 조용히 들어온 거야. 그 더운 날씨에 커다란 염주에 장삼까지 걸친 스님이 말이야…… 겨드랑이 근처는 땀에 젖어 거무튀튀하지, 어깨엔 큼지막한 걸망을 멨지, 아 맞다, 너덜너덜한 미투리까지 신고 있었다. 머리엔…… 밀짚모자를 썼던가? 글쎄, 기억이 잘 안 나네…… 아무튼 그 양반이 가게에 들어와 대뜸 엄마한테 합장을 하고 물 한대접만 공양해달라고 한 거야. 그래, 엄마도 그게 뭐 대수냐, 날도 더운데 스님이 고생하시는구나, 해서 나름 인심을 써서 물 대신 시원한 사이다 한잔을 드린 거지. 나한테도 잘 주지 않던 사이다를 말이야…… 응? 아, 그래그래, 엄마가 할머니한테도 잘 안 줬지…… 아이, 참 엄마가 무슨 사이다를 쿠웨이트로 빼돌렸다고 그래. 아, 그건 동네 고물상이고……

아, 내 말 좀 잘 들어봐. 그래 그 스님이 엄마한테 합장을 하고 그 사이다를 달고 맛나게, 한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셨거든. 또 한번 합장도 하고…… 뭐, 그러고 제갈길을 갔으면 좋았을 텐데…… 아, 이 양반이 그러질 않은 거야. 빈 잔을 엄마에게 건네다 말고, 앉아 있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 거지. 그리고 쯧쯧쯧, 혀를 차며 한다는 소리가 글쎄, 허어, 거참 박명이로다, 박명이야, 한 거야. 참, 지금 생각해보니 그 스님도 거…… 암튼 아, 그러니 빈 잔을 치우던 엄마가 얼마나 놀래. 눈을 송아지만큼 크게 뜨고 스님 앞으로 다가간 거지. 아이고 스님, 그게 무슨 소리시냐, 우리 애가 뭐가 잘못되어서 그런 거냐, 자세히 좀 말씀해달라, 마치 내가 곧 눈을 감기라도 할 것처럼 스님한테 매달린 거야. 그렇지…… 그때가 아빠 돌아간 지 채 삼년도 안되었을 때니까…… 엄마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도 하지, 뭐…… 그러니까 그 스님이 괜스레 가게 유리창 너머 치악산을 바라보면서, 얘 친척 중에 어려서 저세상 사람 된 인물들이 여럿 있다, 그 원혼들이 명부로 가지 못하고 모두 얘한테 몰려 있다, 쯧쯧쯧, 안타까운지고, 하며 또 한번 혀를 찬 거야…… 왜, 할머니도 잘 알잖아? 나 초등학교 다닐 때 맨날 방바닥에 코피 한 바가지씩 쏟고, 걸핏하면 막 실신하고, 그래서 응급실에도 자주 실려가고 그랬잖아. 그런데다 스님한테 그런 말까지 들었으니 참…… 그냥 막무가내로 스님 바짓가랑이를 잡고 울기 시작한 거야. 하나밖에 없는 우리 아들 어쩌면 좋으냐, 서방도 없고 이제 얘 하나 보면서 사는데, 얘마저 없으면 나는 못산다…… 막 그러면서 애먼 스님을 잡은 거지…… 아이, 참 할머니가 왜 울고 그래. 다 옛날 얘긴데…… 으응? 아, 내가 죽긴 왜 죽어? 나, 여기 있잖아…… 응? 아, 나 할머니 손자야. 나 모르겠어? 으응? 아, 내가 무슨 쿠웨이트에 가서 죽었다고 그래? 그래, 그래. 여기, 잘살고 있잖아……

엄마가 그렇게 울면서 무슨 방도가 없겠냐, 공양을 하라면 하고, 부적을 쓰라면 백장이라도 쓰겠다, 그러면서 계속 떼를 쓰니까, 그 스님이 고개를 이렇게 절레절레 흔들면서 하는 말이, 부적도, 공양도 다 소용없다, 그저 방법이라곤…… 얘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마음고생, 속고생, 몸고생하는 일을 시켜라, 그렇게 고생하면서라도 명을 잇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그래야 원혼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위안을 받는다, 한 거지…… 그 말만 남기고 바람처럼 휙 사라진 거야, 석양으로 휙…… 아, 그래서 할머니, 그다음부턴 엄마가 나 공부를 안해도 그냥 흥, 숙제를 안해도 흥, 그랬잖아. 남들 다 가는 학원도 한번 안 보내주고…… 대학교 간다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일찌감치 기술이나 배우라고 하고…… 대학? 아, 그거야 마음고생은 마음고생대로 하고, 사는 건 지지리 가난해지는, 뭐, 그런 글공부 배우러 간다니까 그제야 마지못해 허락해준 거지. 응? 반야심경 좀 틀어달라고? 왜? 내 얘기 재미없어? 에이, 반야심경 들으면서 어떻게 얘기를 해? 응? 아, 알았어, 알았어. 작은 소리로 틀게.

 

근데 할머니, 참 이상한 게 말이야…… 그 스님이 왔다 간 다음부터 내가 계속 같은 꿈을 꾸는 거야…… 뭐, 조금만 피곤한 일을 했거나, 무슨 근심걱정만 있으면, 여지없이 그 꿈을 꾸는 거야. 응? 그럼, 지금도 종종 꾸는걸, 뭐. 계속 같은 사람들이 나오는 꿈……

 

그러니까 그게…… 대개 한가족이 함께 나오기도 하고, 자식들만 따로 나오기도 하고, 매번 다르지, 뭐. 음…… 거 아버지 되는 사람은 늘 말을 타고 나오고, 어머니처럼 보이는 양반은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 입고 나오고, 나머지는 다 딸이더라구, 딸만 셋……

 

응? 형부? 간난이 언니? 그게 누군데? 말? 그거야, 늘 백마였지. 백목련처럼 하얀 말…… 응? 응? 맞다고? 그러니까 그분들이 할머니 언니랑 형부네 가족이란 말이지? 거 왜 육이오 때 돌아가신 분들? 하아, 거참, 난 그것도 모르고 인사도 안하고 계속 도망만 다녔는데…… 그러니까 그분들이 내 이모할아버지, 이모할머니라는 거지? 하아, 거참, 신기하네, 신기해.

 

아이참, 할머니 또 왜 울고 그래…… 아이, 내가 다 안다니까…… 그래, 그래…… 아니야, 나한테 잘해주던데 뭘…… 그래, 그랬다니까. 내 머리 쓰다듬으면서 막 이렇게 웃어주더라구. 말도 막 태워주고 옥수수도 주고 풀피리도 만들어주고…… 그래, 정말 그랬다니까. 지난번엔 나와서 나한테 묻더라구. 그래, 네 할머니는 어떻게 지내시느냐, 몸은 편안하시더냐, 하고 말이야. 아, 그래, 내가 그랬지. 아이고 우리 할머니 기억력 쌩쌩하게 잘 지내십니다, 거 지난달엔 새로 어금니도 나셨습니다, 하고 말이야. 응? 아, 할머니 지난달에 어금니 새로 났잖아? 응? 밥알이 낀 거라고? 음…… 아무튼 그 양반들이 할머니 생각하는 게 지극하더라구. 에이, 또 그 죽는단 소리다…… 아, 할머니가 죽긴 왜 죽어? 아, 아니라니까, 그 양반들이 할머니 데리러 온 게 아니라, 그냥 안부 물으러 온 거라구. 잘 계시나, 몸에 탈은 없나, 아직도 절엔 잘 가시나, 뭐 이런 것들 말이야……

 

어? 누구? 덕자? 아, 그 이모할머니 딸? 이름이 덕자야? 덕자, 덕순이, 덕미…… 그러니까 나한텐 다 아주머니뻘들이네. 외종오촌 아주머니…… 나보다 다 어리던데……

 

아이고, 말도 마. 그 양반들이 나이가 다 어려서 그런지 장난이 얼마나 심한데. 말은 또 얼마나 많다고…… 아따, 우리 할머니 금세 또 웃어버리네. 울다가 웃으면 똥꼬에 털 나는데…… 응? 없다고? 똥꼬에 털이 없다고? 아이참, 뭘 보여준다고 그래. 아, 아, 됐어. 아, 그래그래, 할머니 똥꼬에 털 없어, 털 없다고. 에헤 참, 괜찮다니까……

 

암튼, 그 어린 아주머니들이 나를 그렇게 못살게 구는 거야. 꿈에 나타나기만 하면 괜스레 내 주위에 삥 둘러서서 툭툭, 어깨를 치는 거야.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아이고, 저거저거 생긴 거 좀 봐라, 눈썹만 까마귀새끼처럼 시커멓고 볼따구니는 빼쪽 곯아서, 저거저거 장가나 갈 수 있겠냐. 그러면 그 옆에 있던 어린 아주머니가 말을 받아서, 아이고, 꼴에 무슨 글을 쓴다고 귀한 종이를 낭비하고 있다냐, 종이가 뭐 그냥 나오나, 그게 다 아름드리 낭구 베서 만드는 건데, 그러지 말고 그냥 우리랑 개울가에 가서 놀자. 그럼 또 질세라 제일 어린 아주머니가, 놔둬라, 저거저거 고생 좀 지지리 하게 놔둬라, 그냥 우리끼리 물질하고 옥시기나 먹으면서 놀자, 하고 참견하는 거야. 자기들이 무슨 에스이에스인 줄 알고 나와도 꼭 트리오로만 나오고…… 응? 에스이에스? 아 뭐, 은방울자매 비슷한 거야. 응? 현철이 좋다고? 아, 알았어. 다음에 올 때 현철 테이프도 사올게. 트리오? 아니아니, 그건 설거지할 때 쓰는 거고……

 

하, 근데 할머니. 이 양반들이 말이야, 아 그 어린 아주머니들 말이야…… 이제 시간이 좀 지나니까 꿈에만 나타나는 게 아니고, 깨어 있을 때도 막 나타나고 그러는 거야…… 응? 그럴 수도 있다고? 할머니도? 할머니도 종종 만나? 응? 누구? 아빠? 아빠가 할머니한테 종종 와? 와아, 우리 아빠 효자네, 효자야. 우리 할머니 효자 아들 둬서 좋겠네…… 나? 난, 아빠는 못 만났는데…… 다음에 또 만나겠지, 뭐……

아, 암튼 이 아주머니들이 말이야, 시도 때도 없이 막 찾아와서 날 이렇게 빤히 바라보는 거야. 공부할 때도 나오고, 화장실에 앉아 있어도 나오고, 신문을 볼 때도 나오고, 영화를 볼 때도 나오고, 친구들이랑 술을 마실 때도 나오고…… 그냥 나와서 말똥말똥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 거야. 아, 신경 쓰이지. 왜 안 그렇겠어. 그래, 내가 그만 좀 와라, 나 책 봐야 한다, 그렇게 말해도 그냥 묵묵부답인 거야. 내가 담배를 피우면 자기들도 같이 담배를 물고…… 응? 아, 이젠 괜찮아. 뭐, 하루이틀 본 사이여야지. 지금도 또 저렇게 나와 앉아 있는데, 뭘…… 어디? 아, 할머니 머리맡에 나와 있잖아, 저기, 동그랗게 앉아서, 우리 얘기 듣고 있잖아……

 

 

4

 

그러자 할머니는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가리킨 어두운 벽을 향해 돌아앉았다. 방 안엔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형광등은 꺼진 지 오래였다. 가로등 불빛이 창문 너머에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그 가로등 불빛이 할머니의 그림자를 천장까지 잇닿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할머니의 그 긴 그림자를 바라보며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할머니를 말리지 않았다.

할머니는 한동안 말없이 벽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가, 이윽고 두 손을 허공에 쓰윽, 내밀었다. 그것은 누군가와 두 손을 마주잡는 동작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할머니는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가끔 내복 소매로 눈밑을 닦아내기도 했지만, 목소리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무릎을 탁탁, 치면서 홀로 추임새를 넣기도 했다. 나는 눈을 감고 할머니의 조용한 목소리와, 오래된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어느 노스님의 불경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할머니와 노스님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얼마 후, 할머니가 다시 내 옆으로 와 누웠다. 우리는 나란히 베개를 베고 누웠다. 누런 가로등 불빛에 드러난 할머니의 얼굴은 좀전보다 한결 더 야위어 보였다. 내가 물었다.

“뭐래, 할머니? 할머니 조카들 맞다지?”

“응……”

“뭐래? 만나서 반갑대?”

“갸들이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굳이 큰절을 하드라.”

“캬아, 우리 할머니 좋았겠네?”

“응, 덕미 고것은 어찌나 변한 게 없던지……”

“그 막내아주머니? 그 양반이 얼마나 장난이 심한데……”

“갸가 어릴 적부터 호드기 불면서 노는 걸 좋아했어…… 걸핏하면 네 아빠한테 찾아와서 업어달라, 호드기 만들어달라, 그랬어……”

“거, 우리 손주 그만 괴롭히라고 그러지. 그 말은 안했어?”

“했어……”

“했어? 그래, 뭐래? 이제 안 온대?”

“아니…… 가고 싶어도 못 간대……”

“못 가? 왜?”

“막내가…… 막내가 아직 안 왔대……”

“막내? 막내는 덕미 아주머니 아니야?”

“아니야, 덕용이라고…… 아홉살 먹은 사내애가 하나 더 있어……”

나는 잠시 주춤했다.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거…… 마지막에 할머니한테 찾아온 조카가 덕미 아주머니 아니야?”

“아니야…… 갸 밑으로 연년생 동생이 하나 더 있었어……”

“그 아저씨 이름이…… 덕용이야?”

“응…… 갸를 아직 못 만났대…… 그래, 기둘리고 있대……”

나는 말없이 불경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할머니가 내게 등을 보인 채, 모로 누우며 말을 했다.

“갸가…… 덕용이, 갸가…… 너랑 똑 닮았대…… 그래서 갸들이 자꾸 널 찾아오는 거래…… 네가 갸인 줄 알고……”

 

 

5

 

나는 좀 난감했다. 그건 미처 생각지 못한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시작한 사람은 분명 나지만, 어느 순간 할머니의 이야기가 스멀스멀 벽을 타고, 천장을 타고, 다시 내 몸 위로 먹물처럼 진하게 내려앉은 느낌이었다.

나는 무슨 말을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좋을지 몰라 가만히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모로 누운 할머니는 간간이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나는 단지 위로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게 전부였다. 몹쓸 병에 걸려, 이제는 한 가지 이야기 안에만 머무는 할머니를, 그 안에서 빼내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할머니의 이야기가 바로 내 이야기로 연결되고 말았다. 내가‘갸’가 되어버린 이야기.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내가‘갸’가 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

그러니, 어쩌겠는가. 아무리 몹쓸 병에 걸렸다 하더라도, 한가지 이야기에 사로잡혔다 하더라도, 할머니의 이야기가 힘이 더 센 것을…… 나는 그것을 또 잊어버린 것이었다. 할머니에게 있어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은, 몹쓸 병에 걸려버린 당신이 아니라, 당신이 외면한‘갸’였다는 것을…… 이제는 사라져버린‘갸’를 위로하기 위해 그렇게 같은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또 반복했다는 것을…… 그것이, 내가 아무리 이야기로 밥을 벌어먹고 산다고 하더라도, 할머니의 이야기를 못 당해내는 이유였다.

 

 

6

 

그래서, 나는 까짓것, 한번도 본 적 없는 덕용이 아저씨마저 위로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이불 속에서 움츠러든 몸을 할머니 등 뒤로 더 바싹 밀착시켰다. 그리고 말했다.

“할머니, 내가 정말 그 아저씨랑 닮았어? 그 덕용이 아저씨라는 분하고?”

할머니는 말없이 턱밑까지 이불을 끌어당겼다.

“에이, 그러지 말고 말 좀 해봐? 어디가 그렇게 닮았는데? 응? 눈? 코? 목소리도 닮았어? 응? 에이, 그러지 말고 나 좀 봐봐라? 응?”

나는 그러면서 할머니의 호리호리한 허리를 꽉 껴안았다. 그러자 할머니가 놀랄 만큼 센 완력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당신의 허리에 감긴 내 두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 할머니의 목소리가 아닌 목소리로, 아니, 내가 아주 어릴 적 듣던 할머니의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했다.

“어여 가! 여기가 어디라고 와! 나, 네 이모 아니여…… 어여 니 에미 찾아 가!”

 

 

7

 

할머니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나는 방 한쪽 벽면 정중앙에, 정사각형으로 문을 낸 벽장이 들어서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방 윗목으론 늙은 거북이 등판만한 화로가 들어앉았고, 누워 있는 내 다리 아래쪽으론 사기로 만든, 달항아리만한 요강이 놓였다. 창밖 가로등이 깜빡깜빡 점멸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예전처럼, 허리를 더 동그랗게 말며 이불 깊숙이 파고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내 안에 있는 어떤 다른 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내 목소리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 할머니의 목소리이기도 했고, 화로와 벽장과 요강이 내는 소리이기도 했다.

“갈 데가 없어요, 이모…… 아저씨들이, 동네 아저씨들이, 엄니와 누이들을 다 잡아갔어요……”

그것은 분명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대고 낮고, 화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야가, 가라니까 왜 이리 안 가고 장승처럼 부티고 있어? 아, 어여 가라니까!”

“이모, 저 좀 숨겨줘요…… 아저씨들이 엄니랑 누이들이랑 다 산으로 끌고 갔대요…… 동무들이 다 봤대요…… 인제 저 잡으러 온대요.”

“야야…… 네가 여기 있으면, 인제 네 사촌형도 죽고, 네 이모부도 죽고, 내두 죽는 거야…… 그러니, 어여 가…… 아, 회초리 치기 전에 얼른!”

 

그러나 나는 그쯤에서 할머니를 말려야 하지 않을까, 고민을 해야만 했다. 그것이 아무리 할머니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 안에선 할머니도, 덕용이 아저씨도, 아무도 위로받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괜스레 할머니의 마음만 더 뒤숭숭하게 만들고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이 쉬이 떠나질 않았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론 그렇게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그래, 나는 고민 끝에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형광등 스위치 쪽으로 걸어갔다. 방 안엔 여전히 화로와 요강이 놓여 있었지만, 나는 못 본 척 지나쳤다. 형광등 스위치를 올리면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들이었다. 점멸하는 가로등도 사라질 것이고, 벽장도 사라질 것이고, 덕자, 덕순이, 덕미 아주머니들도 사라질 것이고, 덕용이 아저씨도 사라질 것이었다. 오로지 할머니의 몹쓸 병만 남게 될 것이었다. 나는 아쉬웠지만,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형광등 스위치를 올리지 못했다. 더듬더듬 스위치를 찾아 막 켜려는 순간, 내 등 뒤에서 할머니가 버럭,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8

 

“야야! 가란다고 증말 가면 어쩌냐! 얼른 일루 안 와! 아, 얼른!”

할머니는 이불 위에 앉아 다급한 손짓으로 내가 서 있는 반대편 벽을 보며 그렇게 소리쳤다. 두리번두리번 어두운 방 안을 살펴보기도 했다. 나는 그런 할머니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무릎걸음으로 할머니 곁에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두운 벽 구석에 쪼그려앉아 있는, 잔뜩 겁에 질린 한 아이를 보았다. 빡빡 깎은 머리에, 이곳저곳‘땜통’이 나 있는, 채 아홉살도 안돼 보이는 아이를…… 나는 그 아이가 누구인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거 가면 어쩌려고 글루 가! 어린것이 겁두 없이……”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면서 앉아 있는 아이의 몸 위에 차렵이불을 뒤집어씌웠다. 그리고 마치 아랫목 콩나물시루 감싸듯 촘촘하고 꼼꼼하게, 이불을 두르고 또 둘렀다.

“야야, 여 이모네 부엌에서 한발짝도 나오면 안된다. 알았지? 여 장작 뒤에서 끽소리도 내지 말고 있어야 해. 동무들이 불러도 나는 인제 그저 장작이려니, 하고 있으란 말이여. 알았지?”

할머니의 목소리는 그 어느때보다 조심스러웠다. 손으론 연신 동그랗게 말린 이불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나는 잠자코 그런 할머니의 손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것은 내가 그동안 듣지 못한, 할머니의 또다른 이야기였다.

“이모가 어두워지문 옥시기밥 해줄 테니까, 긍까 그거 먹고…… 오줌이 마려도 그냥 꾹 참고, 알았지?”

할머니는 그렇게 말한 뒤, 가로등이 점멸하는 창문 앞을 서성거렸다. 두 손을 꼬옥 깍지낀 채, 이불이 놓인 방구석과 어두운 창밖 거리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그런 할머니의 허리는 그 옛날 그때처럼, 꼿꼿하게 펴져 있었다.

 

나는 그런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어두운 방 한구석, 이불이 동그랗게 말려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슬쩍, 이불을 들춰보았다. 아이는 그 속에 있었다…… 얼굴을 무릎에 묻은 채, 쪼그려앉아 있는 아이의 등은, 작고 가냘파 보였다. 미투리 안으로 보이는 발은 새까맣게 때가 올라 있었고, 언제 빨아 입었는지 알 수 없는 광목 바지는 무릎 부분이 다 해져 있었다. 눈썹만 새까맣게 위로 솟아 있는 아이…… 나는 그 아이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괜스레 툭, 한 손으로 아이의 발을 건드려보았다. 아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번 툭, 아이의 무릎을 건드렸다. 아이의 허리가 조금 더 움츠러들었다. 나는 아이의 얼굴을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아이는 분명 그 옛날 덕용이 아저씨일 테지만, 나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계속 툭, 툭, 아이를 귀찮게 괴롭혔다. 그때마다 툭, 툭, 내 몸 어느 한부분이 떨리는 기분이 들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갑자기 할머니가 이불 근처로 황급히 다가왔다. 그러곤 한손으로 이불을 휙 낚아챘다.

“야야, 덕용아, 야야, 얼른 인나라. 인제 민보단원 넘들이, 그넘들이 지금 재 넘어서 온단다. 부엌도 이 잡듯 다 뒤진단다. 야야, 어쩌냐? 어데, 어데로 숨냐?”

할머니는 한손에 이불을 쥐고 계속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점멸하던 가로등은 기어이 불이 나가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그때까지 미처 몰랐던 달빛이, 이미 거기 오래전부터 있었던 달빛이 방 안으로 쏟아져들어왔다. 가로등 불빛보다 더 환하고, 더 깊은 빛이, 마치 스포트라이트처럼, 할머니와 아이에게 둥근 원을 만들어주었다.

 

그 빛 아래에서…… 아이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장롱과 벽 사이, 할머니가 가끔 박하사탕과 비닐봉지와 오래된 사진들을 숨겨두는, 그 좁은 틈 사이로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채 삼십 쎈티미터도 안되는 틈이었지만, 아이의 몸은 쑥쑥 잘도 들어갔다.

“야야, 덕용아…… 그렇다고 거, 아궁이로 들어가면 어떻게 하니? 응? 괜찮아? 거기가 좋아? 그래, 그럼 거기 조금만 있어라…… 이모가 민보단원 넘들 가면 얼른 빼내줄 테니…… 조금만 있어라. 어둡다고 울지 말고…… 끽소리도 내지 말고…… 조금만 기둘려라, 응?”

할머니는 어두운 틈을 향해,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 틈을 향해,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9

 

그리고……

또 채 몇분도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방 안에 있던 여러 잡동사니들을 그 틈 안으로, 장롱과 벽 사이로, 밀어넣기 시작했다. 부채도 집어넣고, 손거울도 집어넣고, 비녀도 집어넣고, 달력도 집어넣고, 손수건과 지갑도 집어넣고, 그때까지도 계속 반야심경이 흘러나오고 있던 녹음기도 집어넣었다. 그리고 효자손을 들고 그 앞에 쪼그려앉았다. 틈 사이로 들어간 반야심경은 이전보다 더 큰 울림으로 벽과 벽을 타고 방 안으로 퍼져나갔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이었다.

할머니는 그 물건들을 효자손으로 몇번 들추고, 또 몇번 쑤시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효자손만 어둠속에서, 여리게, 작고 여리게, 떨리고 있었다.

“거 암만 뒤져봐도 없소…… 갸네가 우리랑 인연 끊은 지가 오래요. 갸가 여기를 어떻게 와요, 오기를…… 남정네들이 부엌에 그리 오래 있는 거 아니요…… 아, 남의 집 아궁이를 뭣 한다고 본다 그러소? 지금 우리 누렁이 줄 여물 쑬라 하는 거 안 봬요? 쑤셔놓은 낭구를 왜 빼라고 그러소? 불이요? 아, 불이야 인제 놓으려고 안합니까…… 아 좀 기둘려보소. 성냥을 찾아야 하지 않겠소…… 남정네들이 뭣 한다고 아녀자 부엌에서…… 아, 아니요, 아니요. 성냥 여기 있소, 내 성냥 찾았소…… 인제 불 놓을 테니 그만 가소…… 여기, 여기…… 불 놓소…… 불이요, 불……”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면서 화장대 위에 있던 내 라이터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정말, 불을 붙일 요량으로 라이터를 손수건 근처로 갖고 갔다.

 

나는 그쯤에서 할머니를 말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집에 불을 내면서까지 들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

 

 

10

 

그래서 다시 할머니와 나는 나란히 베개를 베고 자리에 눕게 되었다. 가로등이 몇번 깜빡깜빡거리는가 싶더니, 다시 예전 모습 그대로, 환하고 노랗게, 창문을 타고 들어왔다. 반야심경의 노스님은 도돌이표를 만났는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좀 지친 모양이었다. 자리에 누워서도 계속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그러면서도 간간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손을 잡을까, 하다가 그냥 그만두었다…… 할머니는 이미 내게 많은 말을 했으니, 그러니 이제 좀 쉬시게 하는 편이, 그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을 잡으면 언제 또 무슨 이야기를 시작할지 모를일이니, 세상 모든 할머니들은 손자의 손에 약한 법이니, 이야기는 언제나 거기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니, 그러니……

 

그러니까 이제 공은 다시 내게로 넘어온 기분이었다. 덕용이 아저씨는 몰라도, 그래도 할머니는 좀 위로해드려야 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든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말똥말똥 천장만 쳐다보고 있다가, 다시 이불 밖으로 조용히 빠져나왔다. 그리 좋은 생각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되지 않을까, 그 정도면 우리 할머니가 위로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한 것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좀전에 온갖 잡동사니를 다 밀어넣었던 장롱과 벽 틈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어두운 틈을 괜스레 화난 사람처럼 노려보다가 슬쩍, 왼쪽 다리를 넣어보았다. 조금 끼는 느낌이 들었으나 별 무리 없이 허벅지까지 들어갔다. 그래서 나는 다시 마치 출발선상에 선 단거리경주 주자처럼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오른쪽 다리마저 그곳으로 밀어넣었다.

 

그런데 그때…… 뜻하지 않은 문제가 생겨버리고 말았다. 종아리까진 잘 들어가던 오른쪽 다리가 허벅지 부근에서 그만 걸려버린 것이다. 허벅지 부근이 틈 사이에 끼여, 빠지지도, 들어가지도 않는 것이었다. 아무리 허리에 힘을 줘 다리를 빼내려 해도, 두 손에 힘을 줘 꺼내려 해도, 다리는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것이 무엇인가.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고 만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곳에 들어가 조용히 할머니를 부르려 했다. 아니, 이모,라고 부르려 했다…… 그래서 이제 다 괜찮다고, 하나도 뜨겁지 않다고, 그러니 이제 걱정 마시라고, 말하려 했다.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계속 칼 루이스처럼, 푸시업을 하는 운동선수처럼, 장롱과 벽 사이에 끼여, 이도 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사이…… 할머니에게선 쌕쌕,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내가 할머니를 불러도, 이모라고 불러도, 할머니는 일어나지 않았다……

 

정작 잠에서 깬 것은 안방에 있던 엄마였다. 안방에서 잠들어 있던 엄마는, 졸린 눈을 비비며 할머니 방으로 들어왔고, 들어오자마자 형광등 스위치부터 올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장롱과 벽 사이에 끼여 있는 나를 발견하곤 흠칫, 뒤로 물러섰다. 나는 나름 반가운 마음에 한쪽 손을 들어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어, 엄마 깼어,라고 말하며……

그 와중에 잠들어 있던 할머니도 일어나서 나를 발견했다.

“에구머니나! 에미야. 쟈가 왜 저러고 있다냐? 응? 네가 저러라고 시켰냐?”

그러자 말없이 나를 노려보던 엄마가, 장롱 앞에 놓여 있던 효자손을 들고 내게 달려왔다.

“이놈의 자식! 술 처먹고 들어왔으면 얌전히 잠이나 잘 일이지!”

나는 엄마가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질끈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요, 뭐…… 이젠 걱정 마시라는 거죠, 뭐……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할머니에게 드리는, 작은 위로였다.

 

 

11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이야기들을 책이 아닌, 할머니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할머니를 통해서 뱀이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죽은 사람들이 때론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글을 몰랐던 나는, 할머니를 통해서만 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할머니는 평생 글을 모르고 살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