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이기인 李起仁
1967년 인천 출생. 200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leegiin@hanmail.net
꿀벌의 집
목침을 베고 누워 있는 동안 하얗게 타버린 머리카락을 잊고 있었다
작은 병에 있던 은단을 꺼내 먹으면서 울음을 참을 수 있었다
햇살이 마당에 나와서 주름진 옷을 걸치고 나가 말릴 수 있었다
개를 묶어놓은 줄이 구렁이로 변해 허물을 벗고 있었다
가당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집을 담쟁이가 감고 있었다
빨랫줄에 앉아 있는 꿀벌이 독신으로 사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을 피해서 날아다니는 꿀벌 한마리, 앉았던 자리에 국화가 피었다
국화 그늘 속으로 들어가 하룻밤을 묶고 싶었다
노인은 열쇠꾸러미를 들고서 들어갈 수 없는 방을 기웃거렸다
하얀 노마님이 꽃잎 속에서 버럭 화를 내셨다
꿀벌과 겁에 질린 개가 벌떡 일어났다, 구렁이는 놀라서 달아났다
달빛 봉투
가족수당이 붙은 월급봉투
두툼한 봉투,
다문 입을 살짝 열어보니
그 속에, 한평생 자란 나무를 잘라내고 받은 나이테가 있었다
나무 그늘에서, 그늘로 걸어온 내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몇가닥 나이테를 팔아서 방울을 사고 쌀 한자루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손끝으로, 굵은 나이테 몇가닥을 훔쳐내고 싶은 아버지 불길하여,
월급봉투의 입을 닫아버렸다
누런 달빛 봉투, 왜 갑자기 열어보았을까
쇳덩어리 냄새가 나는 저녁에
거의 손에 쥐었다 놓친 비누는 불안한 그의 얼굴이었다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
흰 벽
공장과 공장 사이에 있는 화장실
흰 문짝은 오랫동안 페인트를 벗으면서, 깨알 같은 글씨를 토해내고야 말았다
똥을 싸면서도 뭔가를 열심히 읽고 싶었던 이 못난 필적은 필시
쾌활한 자지를 바나나처럼 그려놓고 슬펐을 것이다
작업복을 벗고 자지를 타고 올라가 그 바나나를 하나 따다, 미끄러졌다
위험한 기계를 움직이는 몸에서는 주기적으로 뭉친 피가 흘러나왔을 것이다
가려운 벽을 긁었던 소녀의 머리핀은 은밀한 필기구,
잔업이 끝나고 처음 만난 기계와 잠을 잤다,
기계의 몸은 수천개의 부품들로 이뤄진 성감대를 갖고 있었다,
기계가 나를 핥아주었다, 나도 기계를 핥아먹었다, 쇳가루가 혀에 묻어서 참지 못하고 뱉어냈다,
기계가 나에게 야만스럽게 사정을 한다고, 볼트와 너트를 조여달라고 했다
공장 후문에 모인 소녀들,
붉은 떡볶이를 자주 사먹는 것은 뜨거운 눈물이 흐를까 싶어서이다,
아니다, 새로 들어온 기계와 사귀면서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