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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안주철 安舟徹
1975년 강원 원주 출생. 2002년 제2회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rire010@empal.com
밥먹는 풍경
둥그렇게 어둠을 밀어올린 가로등 불빛이 십원일 때
차오르기 시작하는 달이 손잡이 떨어진 숟갈일 때
엠보싱 화장지가 없다고 등 돌리고 손님이 욕할 때
동전을 바꾸기 위해 껌 사는 사람을 볼 때
전화하다 잘못 뱉은 침이 가게 유리창을 타고
유성처럼 흘러내릴 때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와
냉장고 문을 열고 열반에 들 때
가게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진열대와 엄마의 경제가 흔들릴 때
가게 평상에서 사내들이 술 마시며 떠들 때
그러다 목소리가 소주 두 병일 때
물건을 찾다 엉덩이와 입을 삐죽거리며 나가는 아가씨가
술 취한 사내들을 보고 공짜로 겁먹을 때
이놈의 가게 팔아버리라고 내가 소리지를 때
아무 말 없이 엄마가
내 뒤통수를 후려칠 때
이런 때
나와 엄마는 꼭 밥먹고 있었다
꽃 1
밤새 폐지를 주워온 아버지
주무신다
하루에 세 차례 시장 가는 아버지
아침 먹고
첫번째 잠을 주무신다
어머니 나가신다
흩어진 폐지를 묶고
폐지보다 더 낡은 트럭 위에
어머니 물 뿌리신다
우리집 폐지들은
나무보다 물을 더 먹는다
좋게 생각하면 종이도 나무다
죽은 나무
나도 가끔 나간다
시 쓰다 말고
죽은 나무에 물 주는
쓸쓸한 기분으로
폐지에 물을 준다
가끔 모래도 얹어준다
아버지 두번째 잠을 주무신다
택시 하는 형이 점심 먹으러 왔다
폐지에 물 또 주신다
고물상 가기 전
우리집 폐지들은
무럭무럭 자라나
일톤짜리 꽃을 피우신다
깨진 유리
거지는 모닥불 앞에서 한장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등 세 발짝 너머에서
마을을 지나칠 때마다 새를 쫓듯
아이들과 함께 돌멩이처럼 소리 지르고
발을 구를 때마다
뒤돌아보며 도망가던 그를 생각했다
그는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며 버린 정서를
겹겹이 입고 있었다
허리까지 깊숙이 타들어간 코트에선
참고할 만한 삶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삶이
어디에서 헐리게 될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모닥불 앞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내가 피워놓은 모닥불이 빨리 꺼지기를 빌고 있었다
내가 점심을 먹고 마을 입구에 나왔을 때에도
마을 빈집을 돌며 수십장의 유리창을 깨고
다시 흑백사진을 뿌옇게 지키고 있는
액자를 깨고 돌아왔을 때에도
일어설 힘을 불속으로 던지고 있었는지
모닥불은 꺼지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서 그의 몸은 다 녹아내려
모닥불 주위에 젖은 움막처럼 질척거리고
모닥불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그의 몸들이
깨진 유리처럼 얼어붙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