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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05
페미니즘이라는 대안의 가능성
천정환 千政煥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 heutekom@naver.com
한국 성인남성의 상당수는 아직 잠재적인 최연희(崔鉛熙)이거나 그의 동료들이다. 여기자 성추행사건으로 인한최연희 의원직 사퇴촉구 결의안 투표에서 국회의원 84명이 ‘반란’을 일으켰다는데, 가히 ‘2차가해’라 할 만한 그들의 행위는 사실 반란이 아니라 오래된 습속의 산물이자 솔직한 심경의 표백이 아니겠는가? 당리당략 문제나 국회의원들의 그 빌어먹게 끈끈한 ‘동료애’는 젖혀두고도 그렇다. 한데 오늘날 ‘여자 조심하라!’는 경고에는 ‘페미니즘 조심’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특히 남성지식인에게 그러하다. 매우 예외적인 경우를 제하면 그들은 페미니즘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남성들은 있을 수 있는 오류를 피하고 궁극적으로는 여성을 배제해버리려 한다. 이렇게 페미니즘은 고립되어 있는 상황이며, 국내 필자가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의 문제를 말하여 페미니즘을 ‘아지 쁘로’하는 책도 의외로 많지 않다. 그래서 정희진(鄭喜鎭)의 『페미니즘의 도전』 같은 책의 성공은 한명숙·강금실의 등장과 같은 ‘진일보’이다.
평자는 『페미니즘의 도전』을 밑줄 그으며 읽었고 남학생들에게도 권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페미니즘이 “ ‘진정한 보편주의’정치학”이 될 수 있다는 것과, 페미니즘이 지향한다는 ‘횡단의 정치’에도 기꺼이 동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의 정치에 머물지 않는다는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의문을 갖게 하고,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준다”고 한다. 페미니즘은 “대안적 행복, 즐거움 같은 것”이며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성에게, 공동체에, 전인류에게 새로운 상상력과 창조적 지성을 제공한다.”(12~13면) 밑줄 좍!맑스—레닌이 죽은 개가 되고 난 뒤, 세상의 어떤 ‘주의자’가 자신의 ‘주의’에 대해 저처럼 자신감있게 ‘마니페스토’할 수 있을까?
페미니즘의 이같은 힘과 포용성은 저자가 말한 대로 페미니즘 스스로가 ‘타자의 사상’인 데서 비롯될 것이다. 타자의 사상과 입장만이 진정한 ‘보편’을 가능하게 한다는 데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타자의 위치로부터 솟아나서 모던과 포스트모던의 논리 모두를 지양하고, 보편적인 인간해방을 겨냥하는, 이렇게 잘 대자화된 사상이라면 어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있겠는가. 진정 그러하다면…… 평자는 친여성주의자(pro—feminist)이다.
그러나 읽다보니, 다른 한편 페미니즘은 남성지배의 ‘피해자’들의 사상이고, ‘여성이라는 정체성’에서 연역+귀납된 입장의 체계이며, 따라서 지극히 ‘당파적인’사상이라는 것도 재삼 확인하게 되었다. 저자는 페미니즘의 보편성을 말하면서도, 스스로 홀랑 뒤집어 “여성주의는 객관적이지도 보편적이지도 않다. 아니, 그것을 지향하지 않는다”(33면)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이는 단지 가치중립적 외관을 거부한다는 말 이상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마치 맑스주의처럼 보편적이기도 하고 당파적이기도 한 사상인 듯한데, 이와 같은 ‘진동’이 단지 페미니즘 내부의 노선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여성’이라는 존재(그리고 그러한 명명) 자체의 진동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인지? 저자의 입장은 맑스주의 페미니즘과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걸쳐 있는 것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이 책은 ‘전작(全作)’이 아니라, 기운 흔적이 있는 책이다.
물론 피해자의 사상이라거나, 남성지배를 폭로한다고 해서 페미니즘의 설득력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특히 한국에서 일방적인 남성지배와 그 표현인 넘쳐나는 성폭력과 성매매는 처참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은—’남성 ‘은—’이라는 차이보조사가 붙은 많은 단정적인 명제들과 ‘정체성 덩어리’인 페미니즘이나 분리주의에 대해서는 그저 할 말이 없다. 노력해도 ‘타자’의 입장에는 진정으로 다다를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페미니즘은 저자 스스로 비판한 바 ‘여성주의자의 환원욕망’이라는 오류를 노정하게 된다. 그런데 여성의 ‘정체성’을 상정하지 않는 여성주의가 가능한가?
『헤럴드경제』는 연초 특집기사를 통해 삼성·현대·GS등 유수한 대기업에서 올해 사장, 전무 등 최고위직에 오른 사람들의 학력과 경력 등을 다룬 적이 있다. 연봉이 수억이 넘을 이들 약 1300명 가운데 여성은 몇명쯤 될까? 안심하시라, 남성들이여. 단 2명에 불과했다. 이는 기업이야말로 가부장제의 사수대이자 ‘형제애’의 원천임을, 그리고 향후에 기업이 결코 순순히 친여성(노동)적인 정책을 내놓지 않을 것임을, 그래서 상당수의 여성은 앞으로도 소모품으로 비정규직에서 일하게 될 처지일 것임을 웅변해준다. 저자가 화장실 수의 예를 들어 말한 바 남녀의 실질적 차이를 고려하면 5:5가 아니라 “5:8”(179면)이어야 한다는성평등 원칙의 가장 큰 적은 ‘시장원리’가 아니겠는가. 사실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남성의 기준’은 자본주의의 기준, 즉 경쟁과 효율의 기준이다. 젠더를 무시하는 이 기준은 가장 격렬하게 그리고 에누리없이 시장에서 관철된다. ‘억울하면 니들도 군대 가라’같은 헛소리도 경쟁 때문에 나온다. 역사상 가장 간교하고도 터프한 ‘아저씨’는 자본주의이며, 그 가장 무식한 ‘시다바리’들은 파시즘과 제국주의이다. 그들이야말로 남성의 지배를 철저히 ‘전지구화’한다.
저자의 말대로 젠더·계급·세대의 모순은 중첩되어 있다. 하지만 ‘모든 운동은 부문운동이다’라는 탈중심의 논리는 제한적으로만 옳기 때문에, 이는 ‘모든 부문운동은 복합운동이(어야 한)다’는 명제로 정정되어야 한다. 탈정치화된 페미니즘 또는 기존의 계급관계를 유지, 확대재생산하는 데 이용되는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것은 어렵다. 가장 간교하고 강한 마초인 자본주의는 그 행동대장인 국가를 통해서만 기능한다.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로서의 근대국가는 계급지배뿐 아니라 남성지배의 총사령부로서 기능해왔다. 그리고 남성성의 재구성에 있어 국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여성·가족정책’들이 보여준다. 따라서 어떤 ‘국가’를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것이야말로 ‘복합운동’으로서의 운동들 공동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이다. 이러한 ‘정치문제’는 ‘일상의 성정치학’에까지 분명 깊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성평등’이나 ‘성차별 금지’의 단계를 밟아가는 일도 중요하지만 대안적인 사상으로서, 페미니즘이 ‘정치’에 있어서도 비약할뿐더러 더 많고 근본적인 것을 국가와 자본에게 요구하여 다른 정치사회운동과 연대할 공간을 넓히는 것이 필요할 듯하다. 진정 여성들은 ‘젠더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정치적 아방가르드가 되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