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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F. 제임슨 『보이는 것의 날인』, 한나래 2003

원문의 난해성과 번역본의 난해성

 

 

설준규 薛俊圭

한신대 영문학과 교수 jksol@hanshin.ac.kr

 

 

보이는것의날인

『보이는 것의 서명』(Signatures of the Visible, 1990. 이하 『서명』)1의 저자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영어로 씌어진 최초의 본격적 맑스주의적·변증법적 문학이론서라고 할 『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Marxism and Form, 1970) 이래, 문학과 문화의 사회적 연관을 역사적·변증법적으로 분석, 탐구함으로써 총체적인 ‘인식론적 지도 그리기’ 작업을 줄기차게 지속해왔다. 『서명』은 이같은 작업이 영화 분야에서 일구어낸 성과를 묶은 것이다. 이 책은 2부로 이루어져 있는데,1부에는 1979년에 발표되어 대중문화론의 고전적 논문이 된 「대중문화에서의 물화와 유토피아」를 시작으로 「현대 대중문화에서의 계급과 알레고리: 정치영화로서의 ‘뜨거운 오후’」 「‘디바’와 프랑스 사회주의」 「‘샤이닝’의 역사주의」 「히치곡을 알레고리화하기」 「영화에서의 마술적 리얼리즘에 대해서」 등과 같은 본격적 영화작품론이 실려 있고,2부를 구성하는 근 80면(번역문으로는 160면)에 이르는 「이딸리아의 존재」(1988)는 이 책을 통해 처음 발표된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 가운데 특정 영화를 분석하는 데 치중하는 글들도 문화상품으로서 일회적 소비의 대상이 되기 십상인 영화가 우리 시대를 총체적·역사적으로 읽어내는 데 불가결한 인식의 지도가 될 수 있음을 흥미롭고도 설득력있게 드러내 보이는 주목할 만한 성과들이지만, 「대중 문화에서의 물화와 유토피아」와 「이딸리아의 존재」는 비단 영화뿐만 아니라 문학을 포함하는 문화 전반을 깊이 이해하는 데 매우 요긴한 관점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각별한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 가령 「대중 문화에서의 물화와 유토피아」에는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지적이 나온다. 즉, 현대 산업사회에서 상품생산의 한 부문이 된 대중문화는 이전 시기 민중적 예술의 존재방식과 무관하며, 대중문화가 이른바 고급문화와 적대적 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은 자본주의의 특정한 생산양식에 상응하는 모더니즘 시기의 특수한 역사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모더니즘의 미적 특성은 상품생산이 대중문화 전반에 압도적 영향을 행사하게 된 상황에서 스스로 상품의 지위로 전락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상품으로서 손쉬운 만족을 제공할 수 없는 심미적 언어를 고안한 결과라는 것이다(『서명』 15면). 이는 모더니즘을 논할 때 늘 염두에 두어야 할 핵심적인 논점이다. 그런가 하면 「이딸리아의 존재」는, 저자 자신의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각각을 고립시켜 다룸으로써 그들의 변증법적 운동을 잘못 제시해온 오류를 바로잡는 글로서 그같은 변증법을 다른 어느 글에서보다 긴 호흡으로 살펴보고 있다(『서명』 6면). 이런 뜻에서, 영화사의 핵심적인 대목과 쟁점들을 거시적이면서도 깊이있게 조망하고 있는 이 글은 우리사회의 리얼리즘/모더니즘과 관련된 논의에 생산적인 참조가 될 것이 분명하다.

필자는 수년 전 이 책을 어느 공부모임에서 읽으며 그 난해함 때문에 곤경을 겪은 경험이 있다. 가히 악명 높다 할 제임슨 특유의 ‘변증법적’ 문장이 지닌 난삽함은 대충 각오한 바였지만, 이 책에 종횡무진으로 등장하는 각종 영화들에 관한 언급은 영화에 관해 거의 무지한 필자에게는 독해를 가로막는 암초의 연속이었다. 그런 경험 때문에, 지난해 말 이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는 소식을 일간지 서평란에서 읽은 필자는, 번역자에 대한 사회적 보상에 야속할 정도로 인색한 출판여건에서 거의 지사(志士)적 각고를 요구하는 이같은 난해한 저술의 번역을 시도한 역자에게 마음으로 박수를 보냈다. 아울러 번역자가 영문학과 영화를 나라 안팎 유수의 대학에서 전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원문으로 읽으면서 석연치 않았던 부분들을 번역본을 통해 새로 공부해보리라는 ‘포부’까지 품어보기까지 했다. 기대가 크면 아쉬움도 더한 법, 역자의 노력이 좋은 번역으로 결실되어 우리 사회에서 영화와 문화를 논의하는 폭과 깊이를 보태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나, 번역의 상태는 역자가 들였을 수고에 값하기에는 크게 모자란다고 생각되어 서운한 마음이 앞선다.

『서명』은 책의 첫 대목이 『철학과 문학』(Philosophy and Literature)이란 학술지의 1996년 악문(bad writing) 경시대회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할 정도로 영어권 학자들 사이에서도 난삽하다는 평을 듣는만큼, 그처럼 난해한 대목을 옮기면서 역자가 어떤 곤경을 겪었을는지는 익히 짐작할 만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날인』에는 원문의 난해성과 그다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오역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먼저 악문상을 수상한 첫 대목을 보자.“시각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포르노그래피의 성질을 지닌다. 시각적인 것은 결국 넋을 잃고 정신없이 매료되게 만든다. 그러다가 부수적으로 그 원인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데, 뜻하지 않게 사고의 대상이 생길 수도 있다. 반면 가장 금욕적인 영화들은 반드시 (…) 자신이 과잉되지 않도록 억압하는 데 에너지를 쓴다.”(13면) 첫 두 문장쯤은 원문의 뜻에서 좀 빗나가긴 했지만 난해한 원문을 쉽게 읽히도록 풀어서 옮기려는 고심참담의 소산이라고 이해된다. 그러나 그 뒤부터는 명백한 오역이다. 특히 마지막 문장은 “가장 금욕적인 영화들은 그 자신들이 도가 지나치는 것을 억제하려는 데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정도로 옮겼어야 했다. 몇 대목 더 예를 들어보자.26면,“결국 이 입장은 스스로 가치를 인정한 문화적 대상조차 독해할 방법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내용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라는 번역문장에서 뒷부분은 “그 내용에 관해 이야기할 만한 흥미로운 거리가 별로 없다”로 옮겼어야 했다.317면,“19세기 리얼리즘 소설이 부르주아지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임무를 수행했던 것과 같이 영화에서 리얼리즘의 순간은 20세기 산업 노동자들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임무를 띠고 있다”로 번역된 부분은 “영화에서 리얼리즘적 계기가 20세기 산업 노동계급에 대해 수행했던 이데올로기적 과업은 19세기 리얼리즘 소설이 부르주아지에 대해 수행했던 것과 대체로 같다” 정도로 옮겼어야 했다.

좀더 심각한 문제는 책의 전체적 내용에 비추어 중요한 주장이나 명제를 담은 대목들에서 오역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가령 서문에는 저자가 미술 및 음악과 언어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서술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부분은 문학의 언어적 특성에 관한 독특한 입장을 담고 있어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날인』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은밀하게 언어를 낚아채어 언어의 특이한 비물리적인 주의를 반박하는 그 신비로운 일에서 미신적이고 관능적인 능력을 읽게 만드는 문장의 언어적 단락을 반박하는 이 두 외부 감각에 조응하는 것이다.”(16면) 좀처럼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 문장인데, 원문은 간단히 말해서 시각적인 것과 음악적인 것이 언어적 특성을 지향한다는 의미이다. 좀더 자세히 풀면, 시각적·음악적 “두 외부 감각”은 “언어를 서로 자기 쪽으로 잡아끌며, 언어 특유의 비신체적인 관심”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문장들을 통해 “정신 자체”로 직결되는 “언어의 최단경로”를 차지하려고 다투는데, 언어의 이런 측면은 “읽기라는 신비한 행위를 무언가 미신적이고 성숙한 권능이 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국 번역문은 원문의 뜻과는 거리가 먼 수수께끼 같은 진술이 되어버렸다. 다음과 같은 구절도 보인다.“그러나 여기서 상품이란 개념을 도입하면, 미적 경험을 이렇게 보편적으로 기술할 때 그리고 어떤 식으로 기술하든간에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차별성을 나타낼 수 있다.”(29면)“상품 개념은 어떤 형태이건 미적 체험 그 자체의 보편적 기술이라고 이해되었던 것에 구조적 역사적 차별화의 가능성을 끌어들인다” 정도로 옮겼어야 할 대목을 이렇게 번역함으로써, 미적 경험이라는 관념적·추상적 범주를 역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이 책의 중요한 명제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말았다.

『날인』의 번역상태를 유심히 짚어본 필자로서는 『날인』이 『서명』의 내용을 온전하게 전달하는 데 썩 성공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원문을 참조할 처지가 못되는 독자라면 이 번역서가 지닌 ‘난해함’의 일정부분이 번역의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판단하기보다는 원문의 난삽함과 자신의 독해능력 부족이 어우러진 결과라고 짐작하기 십상이다. 잘못된 번역문을 혹 독자 나름으로 새겼을 경우 발생할 원문에 대한 엉뚱한 해석, 그리고 그같은 해석이 유포됨으로써 빚어질 폐해 등을 고려하면, 역자―특히 『날인』의 경우처럼 해당 분야의 전문적 훈련을 받아 그 분야의 권위로 인정될 법한 역자―의 사회적 책무는 실로 막중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옮긴이 자신의 말처럼,“이 책이 영화비평이 역사의 끈을 놓지 않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적어도 참고가”(『날인』 12면) 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는 훨씬 더 읽을 만한 개역본을 내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역자가 쏟았을 것이 분명한 예사롭지 않은 노고도 그렇게 함으로써만 뜻있는 보람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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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이는 것의 날인』(남인영 옮김, 이하 『날인』)의 번역상태가 고르지 않은 것을 감안해, 이 글에서 원본에 기초한 논의는 『서명』으로,번역본에 기초한 논의는 『날인』으로 각각 달리한다. 원본은 1990년에 나온 Routledge판을 참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