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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반인권론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학 사회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라깡의 정신분석학과 헤겔의 관념철학, 대중문화론, 미학, 정치이론을 결합하는 정신분석 이론가로 슬로베니아의 주간지 『믈라디나』(Mladina)의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저서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삐딱하게 보기: 대중문화를 통한 라깡의 이해』(Looking Awry: An Introduction to Jacques Lacan through Popular Culture) 등이 있다.
ⓒ Slavoj Zizek 2005 / 한국어판 ⓒ (주)창비 2006
옮긴이의 말
이 글은 『뉴 레프트 리뷰』(New Left Review) 34호(2005년 7—8월)에 수록된 지젝의 “Against Human Rights”를 완역한 것이다. 냉전 해소 이후 인권은 더욱 중요한 정치적 이슈가 되고 있는데, 지젝도 이 문제에 대한 일련의 글을 내놓고 있다. 이 글은 다른 글들에서 개진한 발상을 일부 포함하면서, 인권이라는 개념을 둘러싼 여러 입장과 논점을 좀더 이론적인 각도에서 정리한 것이다.
18세기 여행기에서 맑스의 텍스트까지, 라깡에서 근자의 인권 관련 논의까지 두루 넘나들면서 그 지적인 넓이와 깊이로 독자를 압도하는 글이지만, 글의 전체적인 흐름 및 논점 자체는 상당히 명료하다. 자유자본주의 인권론에 깔린 세 가지 가설을 구체적인 실상과 조응하여 자세히 비판하는 데서 출발하여, 일견 이와 대립되는 ‘급진적’인 근대비판론이 결국에는 ‘탈정치화’라는 점에서 자유주의 인권론과 어떻게 상통하는지를 드러낸 후, 이 두 가지 입장을 다 넘어서는 길을 모색하려는 것이 대강의 줄거리이다. 이런 가운데 일련의 서구중심적 이분법들을 뒤집는 대목이 흥미로운데, 가령 ‘근본주의’가 자유민주주의와 대립되기는커녕 자유민주주의의 산물일뿐더러 자본주의사회의 한 본질적 특징이라는 것이다.
이런 분석에서도 드러나듯 지젝이 인권을 사유할 때 늘 염두에 두는 것은 자본주의사회 및 그 사유체계에 대한 문제제기다. 그가 인권론 비판에서 ‘정치’를 화두로 삼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비정치적 인도주의를 앞세우나 결국은 서구의 정치적 이해에 복무하는 자유주의 인권담론도 문제이지만, 그런 연유로 인권이란 허구요 이데올로기일 뿐이며 집단수용소가 근대정치의 내재적 귀결이라고 단정하는 푸꼬나 아감벤 등의 반본질주의 역시 정치적 실천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탈정치화의 논리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지젝은 과연 인권의 정치성을 폭로하는 것으로 충분한가라고 묻는 것이다. 이같은 물음 끝에 결국 이 글은 ‘보편적인 인권에 대한 고려가 없이는 정치 자체가 실종된다’는 강력한 인권개념 옹호로 끝을 맺는다. 이 결말은 서구의 자기기만적이고 위선적인 보편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시작한 글로서는 하나의 역전이라면 역전이지만, 애초부터 지젝이 노리던 바이기도 하다.
그의 물음과 역전의 과정 모두가 찬찬히 곱씹어볼 만하거니와, 인권을 둘러싼 우리 논의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인권 논의를 더이상 보수세력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지 않느냐는 근자의 문제제기들에 이르기까지, 지젝의 물음과 상통하는 바 크다. 인권이 정치의 볼모가 된다고 하더라도 인권문제가 절박한 당장의 현실은 어찌할 것이며, 근자에 북한 인권문제를 두고 그러하듯 인권이 마치 보수세력의 독점물인 양 되어가게 내버려둘 수 없지 않느냐는 자성도 지젝의 물음과 상통한다. 문제는 이런 물음을 어떻게 밀고나가느냐 하는 것이며, 여기서 지젝은 몇가지 중요한 화두들을 던지고 있다. 그것들이 역사적 사유의 필요성을 환기하면서 보편주의와 정치주의 내지 문화상대주의의 양 편향을 모두 넘어서는 길을 가리켜 보인다면, 그리고 그러는 가운데 ‘큰 정치’와 ‘폭력’ 등의 중요한 쟁점들을 되살리는 일도 해낸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심장한 출발이 될 것이다.
김영희 /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영문학
현재 우리 자유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권을 내세우는 주장은 대체로 세 가지 가설에 기초한다. 첫째, 역사적으로 결정된 우연적 특질들을 자연 내지 본질로 여기는 이런저런 양태의 근본주의에 반대하는 구실을 이런 인권 주장이 한다는 가설, 둘째, 선택의 자유와 (뭔가 더 높은 이념적 대의를 위해 인생을 희생하기보다) 즐거움의 추구에 인생을 바칠 권리가 두 가지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는 가설, 셋째, 인권 주장이 ‘권력 과잉’을 방어하는 기초를 형성할 수도 있다는 가설이다.
근본주의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보자. 이 경우 악(惡)은 (헤겔의 말을 바꾸어 표현하면) 대개 악을 지각하는 시선 속에 자리한다. 광범한 인권침해의 현장이 된 1990년대 발칸반도를 생각해보라. 유럽대륙 남동부에 자리한 한 지리적 공간인 발칸반도가 오늘날 유럽인의 이데올로기적 상상계에 온갖 함의를 불러일으키는 그런 ‘발칸’반도가 된 것은 정확히 언제부터인가?1 답은 19세기 중엽, 발칸반도에 유럽 근대화의 영향이 거세게 몰아닥친 바로 그 싯점이다. 발칸반도에 대해 서구인들이 전에 가졌던 생각과 ‘근대적’이미지 사이의 간극은 놀랄 만큼 크다. 16세기에 이미 프랑스의 박물학자 삐에르 블롱(Pierre Belon)은 “터키인들은 누구에게도 터키인처럼 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고 기록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1492년 이사벨 여왕과 남편 페르난도가 스페인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을 쫓아냈을 때2 이들이 터키나 다른 무슬림 국가에서 피난처와 종교의 자유를 얻은 것도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며, 그 결과 터키의 대도시에서 버젓이 살아가는 유대인들을 보고 서구 여행자들이 당혹감을 느끼는, 지극히 뜻밖의 역설적인 사태가 벌어졌다. 이어지는 수많은 예 가운데, 1788년 이스탄불에 갔던 이딸리아인 비자니(N. Bisani)의 보고는 이렇다.
런던과 빠리의 비관용적인 편협성을 목격했던 이방인이라면 회교사원 모스크와 유대교회당 씨나고그 사이에 기독교교회가 서 있다든가, 프란체스코회의 카푸친(Capuchin) 수사 곁에 회교 수도승이 서 있는 이곳의 모습을 보고 매우 놀랄 것이다. 나로서는 어떻게 이 정부가 자기 종교와 철저히 반대되는 종교들을 품안에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런 행복한 대조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이슬람교가 쇠락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관용정신이 사람들 사이에 전반적으로 퍼져 있음을 알게 될 때다. 이곳에서는 터키인, 유대인, 가톨릭교도,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신교도 들이 마치 한 나라 한 종교 사람인 듯 일이나 오락에 관해 화기애애하게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다.3
오늘날 서구가 자신의 문화적 우월성의 징표로 찬미하는 바로 그 특징—다문화적 관용의 정신과 관행—은 이처럼 이슬람이 ‘쇠락’한 효과로 간단히 처리되어버린다. 에뚜알 마리(Etoile Marie)의 트라삐스뜨회(Trappiste) 수사들의 야릇한 운명 역시 많은 것을 말해준다. 나뽈레옹 정권이 프랑스에서 추방한 이 수사들은 독일에 정착하지만 1868년에 쫓겨난다. 어떤 기독교 국가도 이들을 받아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사들은 현재 보스니아의 쎄르비아 지역에 위치한 바냐 루카(Banja Luka) 근처의 땅을 살 수 있게 허락해달라고 술탄에게 청했고, 거기서 내내 행복하게 살았다. 기독교인 사이에서 벌어진 발칸 분쟁에 휘말려들기 전까지는.4
그렇다면 지금 서구가 ‘발칸’에서 연상하는 근본주의적 특징—종교적 불관용, 종족간 폭력, 역사적 외상(外傷)에 대한 고착—은 애당초 어디서 생겨났을까? 그 기원은 분명 다름아닌 서구이다. 헤겔의 ‘재귀적 규정’(reflexive determination)5에 딱 들어맞는 사례인바, 서구인이 발칸반도에서 보고 개탄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전해준 것들이다. 서구인이 맞서 싸우는 대상은 바로 서구인 자신의, 걷잡을 수 없이 난폭해진 역사적 유산이다. 20세기에 터키가 저지른 것으로 되어 있는 두 차례 대규모 종족 범죄인 아르메니아인 학살과 쿠르드족 박해6를 자행한 것이 무슬림 전통주의 정치세력이 아니라 터키를 구세계적 안전판에서 떼어내 유럽식 민족국가로 만들려고 한 군부 근대주의자들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자. 이 지역에 관한 프로이트의 언급을 정독한 데 기초하여 믈라덴 돌라르(Mladen Dolar)7가 내놓은, 유럽의 무의식은 발칸반도와 같은 구조를 지녔다는 낯익은 경구는 이처럼 문자 그대로 사실이다. ‘발칸’의 타자성이라는 위장된 형태로 유럽은 ‘자기 속의 이방인’, 자신의 억압된 부분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또한 우연적 특질의 ‘근본주의적’본질화가 어떤 점에서 자유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특징인지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가장 내밀한 세세한 개인사를 대중에게 드러내는 매체의 능력 앞에서 사생활이 위협받거나 심지어 사라지고 있다고 불평하는 것이 유행이다. 제대로 뒤집기만 한다면 맞는 말이다. 여기서 실질적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은 공공생활 자체, 참된 의미의 공공영역(public sphere)으로,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개인적인 속성, 욕망, 외상, 특이성 들의 덩어리로, 즉 사적(私的)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상징적 행위자가 된다. 현재 사람들이 스스로를 철저히 ‘탈자연화’된 존재로 경험하며, 종족적 정체성에서 성적 선호까지 가장 ‘자연적인’특질조차 선택된 것, 역사의존적인 것, 습득된 것으로 여긴다는 ‘위험사회’(risk society)식 통념은 따라서 매우 기만적이다.8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그 반대과정, 즉 유례없는 재자연화이다. 이제는 모든 커다란 ‘공적 문제’들이 ‘자연적’인 혹은 ‘개인적’인 특이성 조율에 대한 태도로 번역된다.
좀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준(準)자연화된 종족적·종교적 갈등이 지구자본주의에 가장 어울리는 투쟁형태가 되는 이유도 이것으로 설명된다. 참된 의미의 정치가 갈수록 전문가의 사회행정으로 대치되는 ‘탈정치’(post-politics) 시대에, 유일하게 남은 정당한 갈등의 원천은 문화적(종교적)이거나 자연적(종족적)인 긴장이다. 그리고 이른바 ‘평가’란 사회적 승진을 이 재자연화에 걸맞게 조율하는 일이다.9 맑스가 『자본론』 1장 끝에서 상품물신주의를 서술할 때 도그베리(Dogberry)가 씨콜(Seacoal)에게 한 충고를 인용하면서 반어적으로 언급한 그 뒤틀린 논리를 평가에 함축된 진실로 재천명할 때가 된 모양이다. “미남이 되는 것은 행운의 선물이다. 그러나 읽고 쓰는 능력은 천성적으로 타고난다.”10 컴퓨터 전문가나 성공적인 경영자가 되는 것은 오늘날 자연의 선물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입술과 눈은 문화적인 사항이다.
선택의 비자유(非自由)
이제 선택의 자유에 대해 말해보자. 다른 글에서 나는 아미시(Amish) 공동체의 청소년들 앞에 주어지는 사이비 선택을 거론한 바 있는데,11 이들은 지극히 엄격하게 양육되다가 열일곱살이 되면 현대 자본주의문화의 모든 과잉들—질주하는 차, 분방한 성, 마약, 술 등의 소용돌이—을 겪어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그리고 한두 해 지난 후 아미시 방식으로 돌아가고 싶은지 아닌지 선택할 수 있다. 자라나는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미국사회에 대해 아무것도 배운 바가 없기 때문에 이 젊은이들은 이런 자유방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지 못하며, 대개의 경우 참을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결국 절대다수가 자기 공동체의 격리된 생활로 돌아가는 쪽을 선택한다. 이는 ‘선택의 자유’에 어김없이 따라오는 난점들을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이니, 아미시 아동들에게 형식적으로는 자유로운 선택이 주어지지만, 선택을 하는 정황 때문에 자유롭지 않은 선택으로 바뀐다.
사이비 선택의 문제를 보면, 베일을 착용하는 무슬림 여성에 대한 일반적인 자유주의적 태도의 한계도 드러난다. 자유주의는 남편이나 가족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라면 베일도 괜찮다고 한다. 그러나 여성이 개인적 선택의 결과 베일을 걸치는 순간 베일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지니, 베일은 더이상 무슬림 공동체 소속이라는 표지가 아니라 특이한 개성의 표현으로 읽히는 것이다. 바꿔 말해, 선택이란 언제나 메타선택, 즉 선택이라는 양식 자체를 택하는 선택이며, 베일을 쓰지 않기로 선택하는 여성만이 실제로 선택을 선택하는 것으로 간주된다.12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세속사회에서 종교적 소속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예속적 위치에 놓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의 신앙은 개인적 선택으로 ‘관용’되지만, 그들이 자신들에게 신앙이 갖는 의미—실질적인 소속의 문제—를 공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순간 ‘근본주의’라는 비난이 가해진다. ‘관용적’인 다문화적 의미에서 ‘자유로운 선택의 주체’란 자신의 생활세계로부터 분리되는 지극히 폭력적인 과정의 결과로만 출현할 수 있다.
자본주의 민주사회 내부에서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관념이 갖는 물적 힘은 클린턴정부가 추진한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 건강관리 개혁프로그램의 운명에서 확실히 드러났다.13 (악명높은 군수산업 로비세력의 두배 규모인) 의료계 로비세력은 국민개보험이 되면 의료 영역에서 선택의 자유가 어떻게든 위협당할 것이라는 생각을 퍼뜨리는 데 성공했다. 이런 확신 앞에서는 아무리 ‘엄연한 사실’을 열거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것이 다름아닌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중추로, 곧 사람은 각기 특정한 성향을 지니며 그것을 실현하려 애쓰는 ‘심리학적’주체라는 개념에 입각한 ‘선택의 자유’인 것이다. 오늘날 ‘위험사회’의 시대에는 특히 그러해서, 지배이데올로기는 복지국가의 와해로 초래된 불안을 오히려 새로운 자유의 기회로 팔아먹으려고 애쓴다. 노동의 유연성이 해마다 직장을 바꾸어야 한다는 뜻이라면, 이것이야말로 평생직장이라는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이요, 스스로를 갱신하고 자기 개성의 잠재력을 실현할 기회라고 보면 되지 않는가? 표준 의료보험 및 은퇴 연금제도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그래서 추가보험을 들어야 한다면, 또 하나의 늘어난 선택의 기회로, 즉 지금 더 나은 생활을 할지 아니면 장기적인 안정을 도모할지 택할 기회로 여기면 되지 않는가? 만약 당신이 이런 곤경에 불안을 느낀다면 ‘2차 근대’(second modernity)14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사람들은 당신이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갈망하며, 안정된 낡은 형식에 매달리는 미성숙한 성향을 보인다고 진단할 것이다. 나아가 이런 곤경이 주체란 타고난 자연적인 능력들을 지닌 ‘심리학적’개인이라는 이데올로기로 포장될 때, 자동적으로 당신은 이 모든 변화가 당신 인물됨의 소산이지 시장세력에 이리저리 휘둘린 결과는 아니라고 해석하기 쉽다.
열락(悅樂)의 정치
그렇다면 즐거움의 추구라는 기본적 권리는 어떠한가? 오늘의 정치는 열락을 부추기거나 통제하는 방식에 더욱더 관심을 쏟는다. 자유주의적이고 관용적인 서구와 근본주의적 이슬람의 대립은 대개, 한편으로 자기 몸을 전시하거나 드러내고 남성을 자극하거나 교란할 자유를 포함하는 자유로운 성에 대한 여성의 권리와 다른 한편으로 이런 위협을 억누르거나 통제하려는 필사적인 남성적 시도 사이의 대립으로 압축된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리반은 여성이 굽끝에 금속을 댄 구두를 신지 못하게 했는데, 온몸을 가리는 부르카 밑에서 들려오는 또각또각 소리가 엄청난 성적 호소력을 지닐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양편 모두 이데올로기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자기 입장을 신비화한다. 서구 편에서는 남성의 욕망 앞에 도발적으로 자신을 드러낼 여성의 권리를 자기 몸을 마음대로 즐길 권리로 정당화한다. 이슬람 편에서는 여성의 성에 대한 통제를 여성이 남성의 착취대상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여성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정당화한다. 따라서 프랑스 정부가 학교에서 무슬림 여학생들의 베일 착용을 금지하는 것은, 이 여학생들이 제 몸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게 해주는 조치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또다른 주장도 가능하니, 자기 몸을 성적 유혹이나 이와 관련된 사회적 교환 및 유통에 내놓는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 여성들이 있다는 점이야말로 무슬림 ‘근본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에게는 정말 외상적(外傷的)인 충격이라는 것이다. 동성애자의 결혼 및 입양권, 낙태, 이혼 등 다른 모든 문제도 여러 면에서 이와 관련된다. 상반되는 두 입장은 엄격한 기율적(紀律的) 접근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며, 서로 방향이 다를 뿐이다. ‘근본주의자’는 성적 도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여성의 자기표현을 통제하며, ‘정치적 올바름’(pc)15식 페미니즘을 신봉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여러 형태의 침해(harassment)를 막는다는 목적에서 이들 못지않게 엄격한 행위규제를 가한다.
타자에 대한 자유주의적 태도가 갖는 특징은 타자성에 대한 존중 내지 개방성인 동시에 침해에 대한 강박적 두려움이다. 간단히 말해 타자의 존재가 성가시게 느껴지지 않는 한, 즉 진짜로 타자가 아닌 한, 타자는 환영받는다. 이렇게 관용은 그 대립물과 일치한다. 타자를 관용해야 한다는 나의 의무는 사실상 그에게 지나치게 가까이 가거나 그의 공간에 밀고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것, 간단히 말해서 나의 지나친 접근에 대한 그의 불관용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바로 이것이 갈수록 선진자본주의 사회의 핵심 인권으로 떠오르고 있으니, ‘침해’받지 않을, 즉 타인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유지할 권리이다. 새로 등장한 인도주의적 혹은 평화주의적 군사주의 논리에서도 마찬가지 역전이 일어난다. 평화나 민주주의, 혹은 인도적 원조를 베풀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라면, 전쟁도 괜찮다는 것이다. 사실 민주주의와 인권부터가 더더욱 이러하지 않은가? 고문과 영구비상국가를 포함하도록 ‘재고’된다면 인권도 괜찮고, 과도한 민중주의를 떨어내고 민주주의를 제대로 행할 만큼 성숙한 사람들에 국한한다면 민주주의도 괜찮다는 식이다.
열락의 명법(命法)의 악순환에 갇혀 있을 때, 그 ‘자연적인’대립물, 즉 열락의 폭력적인 거부를 택하는 유혹에 빠져들기 쉽다. 근본주의라 불리는 모든 것의 근원적 동기도 아마 이것, 희생정신을 되살리자고 주장하면서 작금의 세속문화의 과도한 ‘자기도취적 쾌락주의’를 봉쇄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이런 노력이 왜 잘못되는지는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향락을 몰아내려는 몸짓— “퇴폐적인 자기탐닉은 그만! 금욕하고 정화하라!”—자체가 그 나름의 잉여적 향락을 낳는다. 이념을 위해 사람들에게 폭력적인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모든 ‘전체주의’세계들은 파괴적이고 음란한 열락에 탐닉하는 악취를 내뿜지 않는가? 거꾸로, 즐거움의 추구를 지향하는 삶도 그것을 최대한 누리자면 ‘건강한 생활방식’의 엄한 기율—조깅, 다이어트, 정신적 휴식—이 따를 것이다. 즐겁게 살라는 초자아의 훈령은 희생의 논리와 내재적으로 얽혀 있다. 둘은 한 극단이 다른 극단을 떠받치며 악순환을 만들어낸다. 선택은 결코 즐거움과 만족의 추구와 의무 수행 중 하나를 택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이 일차적인 선택은 항상 또다른 선택, 즉 즐거움의 추구를 최고의 의무로 떠받드는 것과 의무를 단순히 의무로서가 아니라 거기서 얻어지는 만족을 위해 수행하는 것 사이의 선택으로 보강된다. 앞의 경우, 즐거움은 나의 의무이며 ‘병적인’즐거움 추구가 의무의 공식적 공간 속에 자리한다. 뒤의 경우, 의무는 나의 즐거움이며, 의무수행이 ‘병적인’만족의 공식적 공간 속에 자리한다.
권력에 대한 방어?
그러나 인권을 근본주의에 대한 반대나 행복의 추구로 여길 때 헤어날 수 없는 모순이 생겨난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인권이 권력 과잉에 대한 방어인 것은 맞지 않은가? 맑스는 1848년 혁명을 분석한 글들에서 속성상 항시 ‘과잉’인 것이 곧 권력의 기묘한 논리라고 규정했다. 『브뤼메르 18일』(The Eighteenth Brumaire)과 『프랑스의 계급투쟁』(The Class Struggle in France)에서 맑스는 사회적 대변(경제적 계급 및 세력을 대변하는 정치적 행위자들)의 논리를 변증법 고유의 방식으로 ‘복합적’으로 풀어냈다. 여기서 맑스는 이 ‘복잡성’을 바라보는 통상적인 관념보다 훨씬 더 나아갔다. 이 관념에 따르면, 정치적 대변은 결코 사회구조를 직접 반영하지 않으니, 가령 하나의 정치적 행위자가 다양한 사회집단을 대변할 수 있으며, 혹은 영국 자본가계급이 정치권력의 행사를 귀족에게 맡긴 것처럼 한 계급이 직접적인 대변을 거부하고 자기지배의 정치적·사법적 조건 확보를 다른 계급에게 떠맡길 수도 있다. 맑스의 분석은 100년도 훨씬 더 지난 후 라깡(Lacan)이 ‘기표의 논리’로 풀이할 내용을 이미 가리키고 있었다. 6월봉기가 실패한 뒤 형성된 ‘질서당’(Parti de l’ordre)에 대해 맑스는 이렇게 말한다. 12월 10일 대통령선거에서 루이 나뽈레옹(Louis-Napoléon)이 승리하면서 질서당이 부르주아 공화파 그룹을 ‘떨쳐낼’ 수 있게 된 다음에야 비로소
오를레앙파(Orléanistes)와 정통왕조파(Légitimistes)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당이라는 그 존재의 비밀이 드러났다. 부르주아계급은 양대 분파로 갈라져—복위 왕정에서는 대지주가, 7월 왕정에서는 금융귀족과 산업 부르주아지가—번갈아가며 권력독점을 유지해왔다. 부르봉(Bourbon)은 그 가운데 앞 분파의 이해의 압도적 영향력을 가리키는 왕족 이름이고 오를레앙은 뒤 분파의 이해의 압도적 영향력을 가리키는 왕족 이름이니, 두 분파가 상호경쟁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권력 균점을 통해 공동의 계급이해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바로 공화국이라는 이름 없는 공간이었던 것이다.16
자, 이것이 첫번째 복잡성이다. 둘 이상의 사회경제적 집단이 문제될 때, 그들 공동의 이해는 서로 공유하는 전제(前提)의 부정의 형태로만 대변될 수 있다. 따라서 두 왕당파 분파의 공통분모는 군주제가 아니라 공화제이다. (오늘날 자본 자체의 특정 분파를 넘어선 보편적 이해를 일관되게 대변하는 유일한 정치적 행위자가 ‘사회자유주의’적인 ‘제3의 길’인 것과 마찬가지다.) 이어서 『브뤼메르 18일』에서 맑스는 루이 나뽈레옹의 사병(私兵)인 테러단 ‘12월 10일회’(Society of December 10)의 구성을 해부했다.
생계수단도 출신도 다 수상쩍은 영락한 난봉꾼들과 한자리에, 부르주아계급에서 탈락한 파산한 모험꾼들과 한자리에, 부랑자, 제대군인, 전과자, 탈출한 강제노역자, 사기꾼, 협잡꾼, 라짜루스패(lazzaroni),17 소매치기, 야바위꾼, 노름꾼, 뚜쟁이, 포주, 짐꾼, 문사, 풍각쟁이, 넝마주이, 칼갈이, 땜장이, 걸인 들이 모여들었으니—간단히 말해, 프랑스에서 ‘라 보엠’(la bohème, 보헤미아인)이라 불리며 이리저리 헤매다니는, 뿔뿔이 흩어진 불확정적인 집단으로, 이 친근한 분자들로부터 보나빠르뜨는 12월 10일회의 핵을 구축했다. (…) 스스로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장으로 자임하고, 자신이 개인적으로 추구해오던 이해관계의 집단적 표현을 오로지 이들 속에서 재발견하며, 하고많은 계급 가운데 이 찌꺼기, 부스러기, 허섭스레기 집단만이 무조건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라고 보는 이 보나빠르뜨야말로 진정한 보나빠르뜨, 군더더기 없이 순연한 보나빠르뜨이다.18
질서당의 논리는 여기서 그 극단적 결론에 이른다. 모든 왕당파 분파의 유일한 공통분모가 공화제인 것처럼, 모든 계급의 유일한 공통분모는 모든 계급의 배설물, 폐물, 잔여물인 것이다. 다시 말해, 지도자가 자신은 계급이해를 초월한다고 여기는 한 직접적으로 그의 계급 기반이 될 수 있는 것은 모든 계급에서 배설된 잔여물, 각 계급에서 거부당한 비(非)계급뿐이다. 그리고 맑스가 다른 데서 발전시키듯, 보나빠르뜨가 이쪽 계급을 대변했다가 저쪽 계급을 대변하는 등 필요한 대로 입장을 바꿀 수 있었던 것도 이 ‘천인(賤人)층’의 지지 덕분이다.
독자성을 확보한 행정수반으로 보나빠르뜨는 ‘부르주아 질서’를 수호하는 것이 자기 임무라고 느낀다. 그러나 이 부르주아 질서의 힘은 중간계층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그는 중간계층의 대표인 양 처신하며 이런 취지의 법령들을 발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중요한 인물인 것은 오로지 바로 이 중간계층의 권력을 깨뜨렸고 매일 계속해서 깨뜨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중간계층의 정치적·문학적 권력의 적인 양 처신한다.19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다. 이런 체제가 작동하기 위해서는—즉 지도자가 어느 한 계급의 직접적 대표로 행동하지 않고 계급들 위에 서려면—지도자는 또한 특정한 한 계급, 다름아니라 적극적 대변을 요구하는 통일된 행위자로 행동할 만큼 조직적이지는 못한 계급의 대표로 행동해야 한다. 스스로 대변하지 못하므로 오로지 대변될 수만 있는 이 계급이란 물론 소농계급으로, 이들은
거대한 대중을 이루는데, 그 성원들은 삶의 조건이 비슷하지만 서로간에 다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 이들의 생산방식은 이들을 상호교분하는 게 아니라 서로 고립되도록 만든다. (…) 이들은 따라서 의회를 통해서든 대표자회의를 통해서든 자기 이름을 내걸고 자기 계급의 이해를 집행할 능력이 없다. 이들은 스스로 대변하지 못하며 대변되어야만 한다. 이들의 대표는 또한 이들의 주인, 이들 위에 군림하는 당국, 다른 계급들로부터 이들을 보호하며 저 위에서 비와 햇빛을 내려주는 무한한 통치권력의 모습을 띠어야 한다. 소농의 정치적 영향력은 따라서 사회를 자신에게 복속시키는 행정권력에서 그 최종적 표현을 발견한다.20
이 세 특징이 어우러지면서 인민주의적·보나빠르뜨적 대변의 역설적 구조를 빚어낸다. 모든 계급 위에 선다든가 모든 계급의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려면, 모든 계급의 ‘천인/잔여’에 직접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나아가 정치적 대변을 요구하는 집단적 행위자로 행동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계급에 궁극적으로 의탁하게 된다. 이 역설은 대변(표상)된 것보다 대변(표상)이 넘치는 구성적 과잉에 기초한다. 법의 차원에서 국가권력은 그 신민(臣民)의 이해를 대변할 뿐이다. 국가권력은 이 이해에 봉사하고 거기 책임을 지며, 그것의 통제를 받는다. 그렇지만 초자아적 이면(裏面)의 차원에서는 책임의 공적 메씨지가 무조건적 권력행사라는 외설적인 메씨지로 보충(supplement)된다.21 “법이 나를 정말 구속하지는 못한다, 나는 너에게 내 마음대로 뭐든지 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너를 죄인 취급할 수도 있고, 잠깐 기분에 너를 멸할 수도 있다.”이 외설적 과잉은 주권(sovereignty) 개념의 필수 성분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비대칭은 구조적이니, 신민들이 법에서 권력의 외설적이며 무조건적인 자기주장의 메아리를 들을 때에만 법은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권력의 과잉을 생각할 때, 우리는 지구적 변혁을 지향하는 ‘큰’정치개입에 대한 궁극적 반증이라 할, 20세기의 끔찍한 경험들, 유례없는 규모의 비참한 폭력을 몰고온 일련의 재앙들을 살펴보게 된다. 이 재앙을 이론화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하버마스(Habermas)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견해로, 계몽은 그 자체로는 어떤 내재적 ‘전체주의적’ 잠재성도 지니지 않은 긍정적이며 해방적인 과정으로, 벌어진 재앙들은 계몽이 여전히 미완의 기획임을 나타낼 뿐이며, 우리의 과제는 이 기획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둘째, 아도르노(Adorno)와 호르크하이머(Horkheimer)의 『계몽의 변증법』(Dialectic of Enlightenment) 및 오늘날 아감벤22으로 연상되는 견해이다. 계몽의 ‘전체주의적’성향은 내재적·결정적이며, ‘관리된 세계’(administered world)가 그 진짜 귀결로, 집단수용소와 종족학살은 전체 서구역사의 일종의 부정적·목적론적 종점이다. 셋째, 발리바르(Balibar)의 저작을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이 발전시킨 견해로, 근대성은 새로운 자유의 영역을 열지만 동시에 새로운 위험의 영역도 열며, 그 귀결에 대해서는 어떤 궁극적인 목적론적 보장도 없다. 양자의 경합은 끝내 미결이며 미정이라는 것이다.
폭력을 다룬 발리바르의 글은 폭력이 역사적 이성의 도구, 새로운 사회구성체를 낳는 힘으로 ‘전환’된다는 통상적인 헤겔주의·맑스주의적 관념의 미흡함에서 출발한다.23 폭력의 ‘비합리적’야만성은 이렇게 역사진보의 전체적 조화에 기여하는 특수한 ‘오점’으로 환원되어 엄밀한 헤겔적 의미에서 ‘지양’(aufgehoben)된다. 20세기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이런 식으로 ‘합리화’될 수 없는 재앙들로, 그중에는 맑스주의적 정치세력을 겨냥한 것도 있고 다름아닌 맑스주의적 실천에 의해 생겨난 것도 있다. 이것들을 ‘이성의 간지(奸智)’의 수단으로 도구화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 뿐 아니라 이론적으로도 잘못이며, 가장 강한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를 정독하면서 발리바르는 폭력에 대한 이같은 목적론적인 ‘전환이론’과 훨씬 더 흥미로운 역사개념, 즉 역사란 최종적인 ‘긍정적’귀결을 보장해주는 어떤 포괄적인 역사적 필연성도 없는, 열린 결말의 적대적 투쟁과정이라는 개념 사이의 동요를 발견한다.
맑스주의는 역사진보의 서사에 통합되지 않는 폭력과잉을 사고할 능력이 필연적·구조적으로 없다고 발리바르는 주장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맑스주의는 파시즘과 스딸린주의 및 그것들의 ‘극단적’소산인 쇼아(Shoah)와 굴락(Gulag)24에 대해 적절한 이론을 제공할 수 없다. 우리의 과제는 따라서 두 겹이다. 역사적 폭력을 어떤 정치 행위자도 도구화할 수 없는 것, 행위자 자체를 자기파괴적인 악순환에 말려들게 하는 위험을 지닌 것으로 파악하는 이론을 개진하는 한편, 혁명과정 자체를 어떻게 문명화의 힘으로 전환해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동시에 제기해야 한다. 정반대의 사태가 벌어진 예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을 낳은 과정을 보라. 까트린느 드 메디씨스(Catherine de Médicis)의 목표는 한정되고 분명했다. 까트린느의 계획은—네덜란드에서 스페인과 전쟁을 하자고 자꾸 요구하는 신교도 세력가—드 꼴리니(de Coligny) 장군을 암살하고 대권력가인 가톨릭교도 드 기즈(de Guise) 가문에 그 죄가 떨어지게 만들려는 마끼아벨리적인 음모였다. 이렇게 까트린느는 프랑스의 단결에 위협을 야기하는 두 가문 모두를 몰락시키려 획책했다. 그러나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노림수는 고삐 풀린 유혈극으로 변질되었다. 가차없는 실용주의에 눈이 멀어 까트린느는 사람들이 얼마나 신앙을 열정적으로 고수하는지 보지 못했다.25
정치권력과 단순한 폭력행사의 구분을 강조하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통찰은 여기서 매우 중요하다. 비정치적인 직접적 권위에 의해 운영되는 조직들—군대, 교회, 학교—은 엄밀한 의미에서 정치권력이 아니라 폭력(Gewalt)의 대표적인 사례다.26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공적·상징적 법과 그 외설적 보충의 구분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권력의 외설적인 ‘쌍둥이—보충’이라는 개념은 폭력 없이는 권력도 없다는 것을 내포한다. 정치공간은 결코 ‘순수’한 게 아니라 언제나 모종의 전 정치적(pre-political) 폭력에 의존하게 마련이다. 물론 정치권력과 전 정치적 폭력의 관계는 상호내포적이다. 폭력이 권력의 필수적인 보충물일 뿐 아니라, 외견상 ‘비정치적’인 모든 폭력관계의 뿌리에 권력 자체가 이미 언제나 자리잡고 있다. 군대, 교회, 가족 및 기타 ‘비정치적’사회형태 속에서 일어나는 용인된 폭력과 직접적인 종속관계는 그 자체로 특정한 윤리적·정치적 투쟁이 사물화된 것이다. 비판적 분석의 과제는 이 모든 ‘비’정치적이거나 ‘전’정치적인 관계를 지탱하는 숨은 정치과정을 식별해내는 일이다. 인간사회에서 정치는 포괄적인 조직화 원리이며, 따라서 어떤 일면적인 내용을 ‘비정치적’이라고 중립화하는 것은 빼어난 정치적 몸짓이다.
인도주의적 순수성
가장 도드라지는 인권문제, 즉 기아에 시달리거나 살인적인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의 권리문제도 바로 이런 맥락에 놓고 볼 수 있다. 사라예보(Sarajevo) 원조를 총괄 추진했던 로니 브라우만(Rony Brauman)은 그곳의 위기를 ‘인도적’위기라고 부르는 것, 군사적·정치적 갈등을 인도주의적 용어로 바꾸어 부르는 것의 뒷배에는 명백히 정치적인 선택, 즉 기본적으로는 분쟁에서 쎄르비아 편을 드는 선택이 있다고 설명한다.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인도주의적 개입’을 치켜세우는 언사가 정치담론을 밀어냈고, 그럼으로써 모든 상반되는 논란을 미리부터 무력화했다고 브라우만은 주장한다.27
이같은 구체적 통찰로부터 우리는 표면상 탈정치화된 인권정치란 특정한 경제적·정치적 목표에 봉사하는 군사개입주의의 이데올로기임을 지적하는 일반론으로 나아갈 수 있다. 웬디 브라운(Wendy Brown)이 마이클 이그나티에프(Michael Ignatieff)에 대해 지적했듯, 그런 인도주의는
스스로 일종의 반(反)정치로, 권력에 맞서 무고한 힘없는 사람들을 방어하는 순수한 실천으로, 개인에게 집단 권력을 동원 내지 행사하는 문화, 국가, 전쟁, 민족분쟁, 종족주의, 가부장제 및 여타 형태들의 잠재적으로 잔인하거나 포악한 거대한 기제들에 맞서 개인을 방어하는 순수한 실천으로 자임한다.28
그러나 이런 물음이 중요하다. 인권을 위해서 개입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반대하는 권력에 맞서 어떤 종류의 정치 움직임을 가동시키는가? 그들은 정의의 다른 공식을 지지하는 것인가, 아니면 집단적인 정의라는 기획들에 반대하는 것인가? 가령 분명한 사실은 이라크 민중의 고통을 끝낸다는 식으로 정당화된 미국 주도의 싸담 후쎄인 전복이 냉정한 정치적·경제적 이해라는 동기에서 추동되었을 뿐 아니라, 자유민주제 자본주의, 지구시장경제 편입 등 이라크 민중에게 ‘자유’를 안겨줄 정치적·경제적 조건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깔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단순히 고통을 방지한다는 순수하게 인도주의적이고 반정치적인 정치는 적극적이고 집단적인 사회정치적 변혁기획 모색을 은연중 금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보다 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가지는 보편적인(전 정치적인) 인권과 시민 내지 특정 정치공동체 성원이 가지는 특정한 정치적 권리 사이의 대립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발리바르는 “인간이 시민신분에 의해 만들어지지 시민신분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음을 설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인간’과 ‘시민’사이의 역사적·이론적 관계의 역전”을 주장한다.29 여기서 발리바르는 난민들의 상황에 대한 아렌트의 통찰을 넌지시 끌어들이고 있다.
인간 그 자체가 존재한다는 가정에 입각한 인권개념은 그것을 믿는다고 공언하던 이들이, 아직 인간이라는 점만 빼고 다른 특질과 구체적 관계를 모조리 잃어버린 사람들과 처음으로 맞부딪친 바로 그 순간 무너져내렸다.30
물론 이런 발상은 ‘벌거벗은 생명’(barelife)으로 환원된 인간이라는 아감벤의 ‘호모 싸케르’(homosacer, 신성인간) 개념으로 곧장 이어진다. 보편과 특수의 헤겔 고유의 변증법에 따라, 어떤 사람이 분명한 시민신분을 설명해주는 특수한 사회정치적 정체성을 박탈당하는 바로 그때—그와 한쾌로 동시에—인간으로 인정받고 대접받는 일도 그치게 된다.31 내가 인간 ‘일반’으로 환원되고 그럼으로써 나의 직업, 성, 시민권, 종교, 민족적 정체성 등속과 무관하게 나한테 속하는 저 ‘보편적 인권들’의 이상적 담지자가 되는 바로 그 순간, 역설적으로 나는 인권을 빼앗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권이 정치공동체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의, ‘호모 싸케르’의 권리가 될 때, 다시말해 바로 아무 권리도 없고 비인간으로 취급당하는 사람들의 권리인만큼 아무 쓸모가 없어질 때, 인권은 어떻게 되는가? 자끄 랑씨에르(Jacques Rancière)는 이때 도드라지는 변증법적 역전을 제시한다. “인권이 아무 쓸모가 없어질 때, 우리는 자선가가 헌옷을 처리할 때처럼 한다. 빈국에 주는 것이다. 제 장소에서는 쓸모없어 보이는 그 권리들을 의약품이나 옷가지와 함께 해외로 의약품과 옷,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한테 보낸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권들은 빈껍데기가 되지는 않는다. “정치적 이름과 정치적 장소는 결코 단순히 빈껍데기가 되지는 않는 법”이다. 오히려 빈자리는 누군가 다른 사람, 뭔가 다른 것으로 채워진다.
비인간적 탄압을 겪은 사람들이 그들의 마지막 보루인 인권을 행사할 능력이 없다면, 그때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들의 권리를 계승해서 그들 대신 행사해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인도주의적으로 개입할 권리’—어떨 때는 인도주의 단체들의 권고마저 거스르며, 희생된 민족을 돕는다면서 몇몇 국가가 자임하는 권리이다. ‘인도주의적 개입의 권리’는 일종의 ‘발신자 반송’(return to sender)이라고 할 수 있다. 권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발송된 권리들이 쓰이지 않은 채 발신자에게 반송되는 것이다.32
따라서 레닌식으로 표현하면, ‘제3세계의 고통받는 희생자들의 인권’이 오늘날 지배담론에서 실제로 뜻하는 바는 인권옹호라는 명분으로 멋대로 골라낸 제3세계 나라들에 정치적·경제적·문화적·군사적으로 개입하는 서구열강 자신의 권리다. (발신자는 자기가 보낸 전언을 전도된, 즉 진정한 형태로 수신자로부터 돌려받는다는) 라깡의 의사소통 공식을 끌어들인 것은 여기서 매우 적절하다. 인도주의적 개입론이라는 지배담론에서 서구선진국은 희생된 제3세계로부터 자신의 전언을 그 진정한 형태로 사실상 돌려받고 있다.
인권이 이렇게 탈정치화되는 순간 인권을 다루는 담론도 바뀌게 마련이니, 선악의 전 정치적인 대립이 새롭게 동원될 수밖에 없다. 이그나티에프 같은 사람의 저술에서도 분명히 거론되는 오늘날의 ‘윤리의 새로운 통치’(new reign of ethics)란 이처럼 희생된 타자에게서 일체의 정치적 주체화를 박탈하는 폭력적인 탈정치화 몸짓에 의존한다. 그리고 랑씨에르가 지적하듯, 이런 탈정치화와 관련해 이그나티에프식의 자유주의적 인도주의는 뜻밖에도 푸꼬(Foucault)나 아감벤의 ‘급진적’입장과 만난다. 즉 이들이 서구사상의 정점으로 설정하는 ‘생체정치’(biopolitics) 개념은 결국 집단수용소가 존재론적 숙명처럼 되는 일종의 ‘존재론적 함정’에 빠져들고 만다.33 “우리는 저마다 수용소의 난민과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일체의 차이가 희미해지고 어떤 정치적 실천도 생체정치라는 함정에 이미 걸려든 것으로 판명된다.”34
이리하여 우리는 표준적인 ‘반본질주의적’입장, 성(sex)이란 무수한 성애(sexuality) 실천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라는 푸꼬 개념의 정치적 번안이라 할 입장에 이르게 된다. 인권의 담지자인 ‘인간’은 시민권을 물질화하는 일련의 정치적 실천들에 의해 생성되며, ‘인권’은 그 자체가 거짓된 이데올로기적 보편성으로, 서구 제국주의나 군사개입, 신식민주의의 구체적 정치를 은폐하고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한가?
보편성의 귀환
맑스주의적인 징후적 읽기는 인권개념을 특정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굴절시키는 내용이 무엇인지 설득력있게 보여줄 수 있다. 즉, 보편적 인권은 실질적으로 백인남성 재산소유자들이 시장에서 자유롭게 교환하고 노동자와 여성을 착취하고 정치적 지배를 행사할 권리다. 그러나 보편적 형식을 지배하는 특수한 내용을 이렇게 식별해낸다고 해도 이야기의 절반에 불과하다. 나머지 중요한 절반은 좀더 어려운 보충적인 물음, 보편성이라는 형식 자체의 출현에 관한 물음을 던지는 데 있다. 추상적 보편성은 어떻게—어떤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사회)생활의 사실’이 되는가? 어떤 조건에서 개개인은 스스로를 보편적 인권의 주체로 경험하는가? 맑스의 ‘상품 물신숭배’분석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상품교환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개개인이 일상의 삶에서 스스로나 그들이 접하는 대상과 맺는 관계는 추상적·보편적 관념의 우연적인 구현물과 맺는 관계와 같다. 내가 구체적인 사회적 혹은 문화적 배경이라는 면에서 어떠어떠한 사람인가는 우연적인 사실로 경험된다. 궁극적으로 나를 규정하는 것은 생각하거나 일하는 ‘추상적’인 보편적 능력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어떤 대상도 우연적인 것으로 경험된다. 나의 욕망이란 그것을 채워줄 수도 있지만 결코 완벽하게는 채워주지 못하는 무수한 특정대상들과는 무관한 ‘추상적’인 형식적 능력이기 때문이다.
혹은 ‘직업’의 예를 생각해보라. 근대적인 직업개념은 내가 스스로를 사회적 역할을 직접 ‘띠고 태어나’지 않은 개인으로 경험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 되느냐는 우연적인 사회적 정황과 나의 자유로운 선택의 상호작용에 달려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개개인은 전기기술자, 웨이터, 혹은 강사로서 직업을 갖고 있지만, 중세 농노를 두고 직업상 농민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상품교환과 지구시장경제라는 특정한 사회조건에서, ‘추상’은 실제 사회생활의 직접적인 면모, 구체적인 개개인이 자신의 운명 및 자신의 사회환경과 관계맺고 또 행동하는 방식이 된다. 이 점에서는 맑스도 헤겔의 통찰을 같이하니, 이는 곧 개개인이 자기 존재의 핵심을 자신의 특수한 사회적 상황과 동일시하지 않을 때에만, 스스로를 이 상황과 영원히 ‘어긋나’있는 것으로 경험하는 한에서만, 보편성은 ‘대자적(對自的)’이 된다는 통찰이다. 보편성의 구체적인 존재태는 따라서 사회구조물에서 고유한 위치를 갖지 않는 개인이다. 보편성의 현상 양식, 실제 존재태로의 진입은 따라서 종전의 유기적 평형을 깨뜨리는 지극히 폭력적인 행위이다.
보편적인 법률적 형식이라는 이데올로기적 현상(現象, appearance)과 이를 실질적으로 지탱하는 특수한 이해 사이에 간극이 있다는 해묵은 맑스주의적 지적을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런 차원에서는, 형식이란 절대로 ‘단순히’형식이 아니라 그 나름의 역학을 갖고 있어 사회생활의 물질성에 자국을 남긴다는 (르포르Claude Lefort와 랑씨에르를 비롯해 여럿이 제기한) 반론이 전적으로 타당하다. 페미니즘이나 노조운동의 ‘물적인’정치적 요구·관행 자체를 애당초 추동한 것도 부르주아적인 ‘형식적 자유’였다. 랑씨에르가 기본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형식적 민주주의— ‘인간의 권리’(Rights of Man), 정치적 자유—와 착취·지배의 경제적 현실 사이의 ‘간극’에 관한 맑스주의적 파악의 근원적 애매성이다. 이 간극은 통상의 ‘징후적’ 방식으로 읽어낼 수도 있다. 즉, 형식적 민주주의는 착취와 계급지배의 구체적 사회현실의 필수적이면서도 환영적(幻影的)인 표현이다. 그러나 긴장을 의식하는 좀더 전복적인 방식의 독법도 가능하니, 이럴 때 ‘자유평등’(égaliberté)의 ‘현상’은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나름의 효능을 지니며, 바로 이런 효능 덕분에 ‘자유평등’의 이념은 실제의 사회경제적 관계들을 점차 ‘정치화’함으로써 그 재편을 추동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여자라고 투표하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느냐? 작업장의 상황이 또한 공적인 관심사가 되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느냐?
여기서 어쩌면 레비스트로스(Lévi-Strauss)의 ‘상징적 효력’(symbolic efficiency)이라는 해묵은 용어를 적용해도 좋을 것이다. ‘자유평등’의 현상은 그 자체로 나름의 실제적 효력을 갖는 상징적 허구이다. 그것을 다른 현실을 은폐하는 단순한 환영으로 환원하는 실로 냉소적인 유혹에는 저항해야 한다. 생활세계 경험의 진정한 표현을 설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니, 이는 곧 권력자들에게 재전유되어 그들의 특수한 이해를 추구하거나 피지배자를 사회적 기계의 양순한 부속품으로 만드는 데 사용된다. 훨씬 더 흥미로운 것은 정반대의 과정, 원래는 식민자가 강요한 이데올로기적 구조물을 어느 순간 피식민자들이 접수하여 자신들의 ‘진정한’불만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는 과정이다. 고전적인 사례로는 식민 초기 멕시코의 과달루뻬(Guadalupe)의 성모를 들 수 있다.35 한 초라한 인디오에게 성모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때까지만 해도 스페인 식민자들의 강요된 이데올로기 구실을 하던 가톨릭교가 토착민들에게 전유되어 그들의 끔찍한 곤경을 상징하는 수단이 되었다.
랑씨에르는 ‘인간 자체’에 속하는 인권과 시민의 정치화 사이의 이율배반에 매우 정교한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인권을 정치투쟁의 우연적 영역과 별개의 비역사적인 ‘본질주의적’ 피안(彼岸)으로, 역사로부터 면제된 보편적인 ‘천부적 인간권리’로 설정해서는 안되지만, 인권을 시민의 정치화라는 구체적인 역사과정에서 생겨난 사물화된 물신으로 간단히 도외시해서도 곤란하다. 인권의 보편성과 시민의 정치적 권리 사이의 간극은 따라서 인간의 보편성과 특정한 정치영역 사이의 간극이 아니다. 그보다 그것은 “공동체 전체를 그 자체로부터 분리하는”36 간극이다. ‘보편적 인권’은 전 정치적이기는커녕, 본래적인 정치화의 적실한 공간을 가리킨다. 인권이 결국 뜻하는 바는 보편성 자체에 대한 권리—정치행위자가 (특정한 정체성의 담지자인) 자신과 근원적 불일치를 주장할 권리, 스스로를 사회구조물에서 어떠한 고유한 자리도 갖지 않은 ‘열외자’(supernumerary)라고, 그래서 사회 자체의 보편성의 주체(agent)라고 상정할 권리다. 따라서 이 역설은 매우 엄밀한 것으로, 보편적 인권이 비인간적인 상태로 환원된 사람들의 권리가 되는 역설과 대칭을 이룬다. 보편적인 ‘메타정치’적 인권을 거론하지 않으면서 시민의 정치적 권리를 구상하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정치 자체를 잃어버린다. 다시 말해, 특수한 이해들의 협상인 ‘포스트정치’적인 놀이로 정치를 환원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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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칸반도는 보통 그리스, 알바니아, 불가리아, 터키의 유럽 부분, 그리고 옛 유고연방의 나라들(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쎄르비아—몬테네그로)을 가리키며 루마니아가 들어갈 때도 있다. ‘발칸’은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며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후진성의 대명사처럼 되어왔다—옮긴이.↩
- 1492년 이사벨 여왕은 그라나다를 정복함으로써 스페인을 통일하는 한편 종교재판을 통해 20만 유대인을 비롯한 비가톨릭교도들을 추방하거나 개종시켰다—옮긴이.↩
- Bozidar Jezernik, Wild Europe: The Balkans in the Gaze of Western Travellers, London 2004, 233면에서 재인용.↩
- 바냐 루카는 1943년 나찌 독일을 뒤에 업은 크로아티아계가 자행한 쎄르비아계 대학살과 1992년 쎄르비아계가 자행한 가톨릭 및 무슬림 대학살의 현장이 되었다. 크로아티아계의 종교는 가톨릭이며 쎄르비아계는 쎄르비아 정교다—옮긴이.↩
- 헤겔의 『논리학』에 나오는 개념으로, 사물이 그 자체의 특성이 아니라 맥락에 의해 규정됨을 말한다. reflexive는 보통 ‘반성적’으로 번역하나 이 글에서는 문맥상 ‘재귀적’으로 옮긴다—옮긴이.↩
- 1차대전 중인 1915년 기독교도인 아르메니아인이 러시아에 동조할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기화로 자행된 아르메니아인 학살과 1922년 쿠르드족이 분리독립을 주장한 이래 주기적으로 반복된 쿠르드족 학살을 가리킴—옮긴이.↩
- 지젝과 함께 이론 정신분석학회를 창립한 슬로베니아의 철학자(1951~ )—옮긴이.↩
-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과 영국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의 위험사회론에 대한 언급—옮긴이.↩
- 여기서 ‘평가’란 시험이나 인터뷰, 심사 등 사람의 자격을 가늠하는 평가를 가리킨다. 지젝은 모든 사람을 추상적 개인으로 동질화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사회적 차이와 차별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바로 ‘평가’라고 지적한다. Zizek, “Some Politically Incorrect Reflections on Violence in France & Related Matters”(http://www.lacan.com/zizfrance1.htm) 참조—옮긴이.↩
- 셰익스피어의 『헛소동』(Much Ado about Nothing) 3막 3장에 나오는 대사로 맑스는 이 대목에서 사용가치가 아니라 교환가치가 상품의 본질적인 속성이 되는 점을 풍자하고 있다—옮긴이.↩
- “The constitution is dead. Long live proper politics,” Guardian 2005년 6월 4일자(아미시는 17세기 스위스 재침례파 운동에서 연원한 분파로 미국에 이주해 독자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옮긴이).↩
- 선택은 본래 ‘개인적’인 것이어야 하므로 공동체 귀속성을 택하는 결정은 ‘선택’으로 간주되지 않고, 베일을 착용하기로 한 여성의 결정도 오로지 개성 표현 행위로만 해석·용인된다는 뜻—옮긴이.↩
- NHI(National Health Insurance, 국민건강보험) 실현을 골자로 추진되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간 클린턴 정부의 의료개혁에 관한 언급—옮긴이.↩
- 산업사회 민족국가 모델의 ‘1차 근대’가 현재 민족국가의 약화, 대중매체의 부상, 집단주체의 소멸에서 드러나듯 ‘2차 근대’로 재편되고 있다는, 독일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울리히벡 등이 내놓은 가설이다. ‘2차 근대’의 모습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비롯한 근대적 씨스템들로 말미암아 영속적인 위험상태가 초래되는 ‘위험사회’이다—옮긴이.↩
- ‘political correctness’의 줄임말로, 언어나 생각, 행동에서 인종·성·계급적 차별이 없는 상태를 가리킴—옮긴이.↩
- Marx and Engels, Selected Works, 제1권, Moscow 1969, 83면.
(1848년은 프랑스의 중소 부르주아지와 노동자계급이 선거권 확대와 공화정 수립을 요구하며 일으킨 2월혁명에서 빠리 노동자들의 6월봉기, 그리고 12월 대통령선거 및 제2공화국 출범으로 이어졌다. 이 선거에서 승리한 루이 나뽈레옹 보나빠르뜨는 나뽈레옹 1세의 조카로 프랑스 제2공화국 대통령(1850~52)이자 제2제정의 황제(1852~71)가 되었다. 루이는 집권 후 부르주아 공화파를 몰아내고 구 왕당파를 내각으로 복원시켰다. 이 구 왕당파가 곧 오를레앙파와 정통왕조파로서, 오를레앙파는 1830년 7월혁명 중 집권하였다가 1848년 2월혁명으로 전복된 부르봉 왕조의 한 분파로 금융귀족의 이해를 대변하며, 정통왕조파는 1830년에 실각한 부르봉 왕조 지지파로 대지주의 이해를 대변했다. 이들은 6월봉기 직후 질서당으로 연합하며, 왕정복고를 일단 미루어둔 채 부르주아 공화정을 주장했다. 복위 왕정 및 7월 왕정은 부르봉 왕조의 2차에 걸친 복위를 가리키는데, 나뽈레옹 1세의 양위로 1814년 5월 루이 18세가 국왕이 되면서 부르봉 왕조가 복위되고, 1815년 7월에는 그간 복귀했던 나뽈레옹이 워털루 패전으로 또다시 물러나면서 루이 18세가 왕위로 돌아온다—옮긴이.)↩ - 원래는 나뽈리의 노숙자를 부르는 별명으로 이들의 피난처 역할을 한 성 라짜루스 병원 이름에서 왔다. 이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낙오자라는 경멸적인 뜻으로 쓰였으며, 이들은 절대정권이 자유민주운동을 탄압하는 데 거듭 동원되었다—옮긴이.↩
- Marx and Engels, Collected Works, 제11권, Moscow 1975, 149면.↩
- Marx and Engels, Collected Works, 제11권, 194면.↩
- Marx and Engels, Collected Works, 제11권, 187—88면.↩
- 지젝은 초자아를 법과 구별하여, 초자아는 법에서 억압하는 것을 오히려 하도록 명령하는 법의 이면이라고 한다. ‘보충’은 데리다적 개념으로 단순한 추가가 아니라 추가 대상에 본질적이며 따라서 그 대상 내부의 결핍을 드러내주는 것이다—옮긴이.↩
- 죠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 1947~)은 이딸리아의 철학자로 Homo Sacer: Sovereign Power and Bare Life에서 나찌 독일의 집단수용소가 배제를 통해 국민국가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공간이었으며, 그 점에서 근대성의 법칙을 드러낸다고 주장한다—옮긴이.↩
- Etienne Balibar, Historisch-Kritisches Wörterbuch des Marxismus 제5권(Wolfgang Fritz Haug편, Hamburg 2002)의 “Gewalt” 항목 서술.↩
- 쇼아는 ‘재앙’이라는 유대어로, 2차대전 중 자행된 유대인학살을 뜻하며, 굴락은 옛 소련의 집단수용소관리국의 약칭으로, 소련의 각종 수용소를 총칭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옮긴이.↩
-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위그노(깔뱅파 신교도) 지도자인 드 꼴리니 장군의 암살로 시작해 몇달간 7만명이 학살된 사건으로 샤를르 6세의 모후인 까트린느 드 메디씨스의 섭정하에 자행되었다—옮긴이.↩
- Hannah Arendt, On Violence, NewYork 1970.↩
- RonyBrauman, From Philanthropy to Humanitarianism,” South Atlantic Quarterly, 103권 2—3호 (2004 봄—여름), 398—99 및 416면.↩
- Wendy Brown, “Human Rights as the Politics of Fatalism,” South Atlantic Quarterly, 103권 2—3호, 453면.↩
- Etienne Balibar, “Is a Philosophy of Human Civic Rights Possible?,” South Atlantic Quarterly, 103권 2—3호, 320—21면.↩
- Hanna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New York 1958, 297면.↩
- Giorgio Agamben, Homo Sacer, Stanford 1998 참조.( ‘호모 싸케르’는 범죄를 저질러 인민에게 고발당한 자로서, 법적 관점에서는 이미 존재가 부정되었으므로 그를 죽여도 살인죄가 되지 않는 로마시대의 특수한 수인(囚人)을 말하는데, 아감벤은 집단수용소의 유대인이나 난민 등 정치사회적 생명은 없고 생물학적 생명만 남은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적용한다—옮긴이.)↩
- Jacques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South Atlantic Quarterly, 103권 2—3호, 307—9면.↩
- ‘생체정치’는 ‘인구’를 대상으로 행사되는 배제와 포함의 정치를 가리킨다. 푸꼬는 인구의 통제인 생체정치가 나찌의 집단수용소 같은 ‘죽음의 정치’(thanotopolitics)를 수반한다고 보며, 푸꼬를 원용하는 아감벤도 냉전 이후 곳곳에 생겨난 수용소들을 지적하며 수용소가 현재 생체정치의 패러다임이라고 주장한다—옮긴이.↩
-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301면.↩
- 1519년 멕시코에 스페인 군대가 들어온 지 10여년 후인 1531년 12월 9일 멕시코 과달루뻬에서 아스떼끄 인디오 요한 디에고에게 현현한 성모마리아로 멕시코에 가톨릭교가 자리잡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18세기 초에는 ‘멕시코의 수호자’로 선포되었다—옮긴이.↩
-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30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