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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한류를 바라보는 일본사회의 두 가지 시각

 

 

이따가끼 류우따 板垣龍太

일본 도오시샤대학(同志社大學) 전임강사. 조선근대사회사 전공. 주요 저서로 『植民地近代の視座』(한국어판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공저) 등이 있음. itagaki@tka.att.ne.jp

오구라 키조오 小倉紀藏

일본 토오까이대학(東海大學) 외국어교육쎈터 조교수. 한국철학 전공. 주요 저서로 『韓流インパクト(한류 임팩트)』 등이 있음. kizo@ii.em-net.ne.jp

 

 

편집자의 말

한국 문화력의 실체와 가능성

 

지난 2월 24~25일 일본 쿄오또(京都)에서 한류를 주제로 한 국제심포지엄 ‘동아시아로 발신되어 확산하는 한국 문화력의 가능성’이 열렸다. 『창비』 편집진은 서울에서 창간 40주년 축하행사를 마무리짓고, 동아시아 지식인 연대의 한 장으로 마련된 이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쿄오또로 향했다. 동아시아에서 한류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이미 수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 체계적인 학문 연구와 조사가 충분하지는 못하다는 느낌이다. 『창비』 역시 지면에 짤막한 글들을 게재한 적은 있지만, 한류 현상과 정면에서 대결하지는 못했던 차여서 이번 행사는 여러모로 의미가 있었다.

본지와 함께 이 심포지엄을 주최한 기관은 리쯔메이깐대학(立命館大學) 코리아연구쎈터이다. 쿄오또에 자리잡은 좌파적 전통이 강한 이 대학의 명성을 더욱 값있게 하는 것은, 대학 부설 코리아연구쎈터의 책임자 서승(徐勝) 교수의 이름이다. 주지하듯이 한국현대사의 한 페이지는 서승과 그의 형제들로 장식되어 있다. 아직도 불행한 역사의 상흔을 얼굴에 지니고 있는 서승은 그러나 어느 누구보다 활력있고 누구에게도 스스럼이 없었다. 이 심포지엄 역시 그의 강한 추진력과 광범한 네트워크의 힘이 없었다면 성황리에 진행되지 못했을 것이다.

3백여명의 청중이 발 디딜 틈 없이 행사장에 운집한 첫째날은 테라시마 지쯔로오(寺島實郞) 일본종합연구소 이사장과 백낙청(白樂晴) 『창비』 편집인의 기조강연이 있었다. 지면사정상 창비 독자들에게 친숙한 백낙청의 강연(그의 신간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에 수록됨) 대신, 테라시마의 내용을 전하는 것에 만족하기로 하자. 그는 일본이 20세기의 4분의 3 이상을 앵글로쌕슨 동맹(영일동맹 20년, 미일동맹 50년 이상)에 의지해 지내왔다는 사실을 새삼 환기한다. 오늘날 일본의 대외무역에서 미국에 비해 중화권이나 아시아권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데서도 보이듯이, ‘몸’은 아시아에 있으면서도 ‘머리’는 미국에 가 있는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해 그는 일본인들에게 새로운 인식을 촉구한다. 이제는 현실적 이익을 위해서라도 더이상의 미국 위주 정책은 재고해야 한다는, 일본 주류사회에서도 비중있는 이 인사의 발언은 일본의 현 대외정책이 좌파뿐만 아니라 더 광범위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지닌 진영에서도 점점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진행된 이튿날 심포지엄도 참관자의 숫자나 토론의 열기가 전날 못지 않았다. 한국측에서는 「한국문학의 매력과 동아시아」(한기욱) 「한류와 동아시아 문화의 미래」(이욱연) 「동아시아 협력과 한국의 역할」(이남주) 「한류와‘친밀성의 정치학’」(김현미) 등이 발표되었고, 일본과 미국의 한국학연구자, 문화연구가, 국제정치학자 등 10여명의 개성있는 발표가 어우러졌다.

이날 제기된 여러 쟁점 중에 한류의 실체 논쟁이 있다. 한류란 아시아 각국의 문화수용자들에 의해 ‘구성’된 비실체적인 것일 뿐이라는 주장이 존재한다. 즉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자국의 발전단계에 맞게 요구되는 어떤 사회적 양상, 가치관, 욕망 들이 한류라는 외부적이고 우연적인 요소에 투영된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따라서 그 욕망을 투사하는 문화적 거울은 시기에 따라 한류일 수도 있고, 혹은 일류(日流)나 화류(華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자연히 한류의 실체보다는 한류의 수용과 소비 양상에 주목하게 마련이다. 이런 견해는 한류에 고정불변의 본질성이 존재하고 이것이 절대화·추상화되어 민족우월주의나 문화제국주의, 천박한 상업주의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한류를 상대화하고 해체하는 것에 방점을 두는 입장은 지금 완연한 흐름으로 자리잡은 한국발 문화력의 새 기운을 어떻게 바람직한 동아시아 역내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 소홀할 수 있다. 더욱이 한류가 한국사회의 역동성과 민주주의적 활력에서 힘입은 바 크다는 점을 적절히 상기한다면, 한국의 문화력은 동아시아 변혁의 기폭제가 될 한반도의 개혁에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며 또 그런 방향으로 작용하게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한류라는 새로운 메씨지의 발신자이자 동아시아에 울려퍼져 나갔다가 되돌아오는 문화적 메아리의 수신자로서의 자부심과 책임감을 동시에 감당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중요한 주제는 지금 일본사회에 나타나는 ‘한류’와 ‘혐한류’라는 두 가지 흐름이다. 혐한류 현상에 대한 분석적 접근을 통해 우리가 동일한 논리구조에 얽혀드는 것을 경계하고,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듯 보이는 이 두 흐름이 서로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고 의미있는 일이다. 여기에 실린 이따가끼 류우따의 글과 오구라 키조오의 글은 이 주제와 관련해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독자 여러분들의 유익한 읽을거리가 되리라 믿는다.

ㅣ염종선ㅣ

 

 

혐한류의 해부학

 

이따가끼 류우따

 

 

2006년 2월까지 야마노 샤린(山野車輪)의 『만화 혐한류(マンガ嫌韓流)』(2005년 7월 출간)의 공식 판매부수는 45만부였다. 그리고 2월 22일, 즉 2005년에 시마네현(島根縣) 의회가‘다께시마(竹島)의 날’을 제정한 지 딱 1년 만에 『만화 혐한류2』가 발매되었다. 이 만화는 곧바로 인터넷서점 일본 아마존(www.amazon.co.jp) 판매량에서 상위를 차지했다. 3월에는 “1·2권 누계 65만부 돌파”라는 출판사의 공식발표가 있었는데, 출판사의 발표수치는 과장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영향력은 가늠하기 힘들 정도이다.

나는 내 강의를 듣는 어떤 학생이 제출한 리포트의 유일한 참고문헌이 『만화 혐한류』이고, 그 나머지도 인터넷의 여러 페이지에서 따온 것이라는 걸 알고 굉장히 허탈했던 적이 있다. 이것은 『만화 혐한류』만의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인터넷상에서 발표되었던 이 만화가 제시하고 있는 인식과 지식은 인터넷 게시판이나 블로그, 통속역사책 등을 통해서 유통되고 있다. 또한 『만화 혐한류』가 일정한 반응을 얻었다고 판단한 다른 출판사들 역시 그에 편승한 책들을 출판하고 있다.1 즉 다수의 대중적인 매체를 통해서‘혐한류’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화 혐한류』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할 수 있다(이하 이런 일련의 큰 흐름은‘혐한류’, 만화작품은 『혐한류』로 표기한다).

『혐한류』는 일본에서의 어떤 욕망의 구조 위에서 성립하고 있다. 이 책을 낸 신유우샤(晋遊社)는 성인만화나 게임을 중심으로‘대중적’인 서적을 간행하는 출판사다. 그런 의미에서도 『혐한류』는 욕망의 마케팅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글은 만화 자체의 특징을 읽는 데서 출발하여‘혐한류’를 비롯한 현재의 일본사회와 그것을 둘러싼 상황, 즉 『혐한류』와 같은 표현을 욕망하는 구조에 대해 분석하고자 한다.

 

‘경악’과‘논파’의 문법

흔히 오해하듯 『혐한류』는 이른바‘한류’를 비판한 만화가 아니다. 나도 처음엔‘한류 붐’을 야유한 것으로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지만, 배용준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만화의 마지막에‘특별편’「겨울연가와 한류 붐」이라는 장이 부록처럼 실려 있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 야마노 샤린은‘한류 붐’을 의식해 쓴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2002년경 인터넷에 발표한 『CHOSEN』을 모작으로 한 이 만화가 주로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재일(在日)이다(『만화 혐한류 가이드북』 참조). 그후 2003년부터 작가가 발표공간도 없는 상태에서 계속 그려두었는데, 2005년 봄에 한국과 중국에서 일어난‘반일 데모’를 계기로 신유우샤가 이 만화의 출판을 승낙한 것이다. 제목은 출판사가 결정하고, 새로 그린 부분을 추가해서 7월에 간행했다(『혐한류 2』 및 『만화 혐한류 가이드북』 참조). 즉 이 만화는‘한류’를 혐오하는‘혐—한류’가 아니라‘한(韓)’일반을 혐오하는‘혐한—류’인 것이다.

또한 이 만화는 단지 과거의 역사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새역모) 등과 다르다. 한국의 표절 문제, 장애인 문제, 일본의 매스컴, 외국인 참정권 등 현대사회를 다룬 내용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새역모’의 아류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우선은 『혐한류』 같은 표현형태에 왜 일단의 일본인이 호응하는지, 그 담론의 구조를 분석해보자. 『혐한류』를 특징짓는 것은 한마디로‘경악’과‘논파(論破)’의 문법이다. 우선 『혐한류』를 읽으면, “어어?”하고 경악하는 표현이 빈번히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인공 오끼아유 카나메(沖鮎要)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통의 고등학생”(130면)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 주인공이 월드컵에서 한국경기에 관한‘진실’을 알고 놀라고(제1화), ‘재일한국·조선인의 내력’을 알고 놀라며(제3화), ‘일본문화를 훔친 한국’이라는 주제에 놀란다(제4화). 또‘반일적인 매스컴의 경이로움’이나(제5화), ‘한글과 한국인’을 둘러싼 관계를 알고 놀라고(제6화), ‘독도 문제’와 관련해서도 놀란다(제9화).

다음으로 논쟁에서 지고 나서 말문이 막히는 논파의 문법도 경악만큼이나 자주 쓰인다. 이렇게 논파되는 상대로는 제2화에서는 소위 좌익이나 반일로 표현되는 일본인, 제7화에서는 재일한국인, 제8화에서는 한국에서 온 단체가 등장한다.

여기에서 무엇에 놀라고 무엇을 논파했는지, 개개의 사실이나 인식에 어떤 잘못과 과장이 있었는지를 하나하나 상술할 여유는 없다. 중요한 것은 경악하거나 논파하는 것 모두 공통적으로 표면적인 지식을 뒤엎는다는 전제하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독자는 계속해서 이 만화가 제시하는 경악과 논파를 추체험함으로써 이 만화가 주장하는 결론으로 이끌려간다.

이 만화에서 전도(顚倒)되어야 할 지식은 공교육이나 매스컴을 통해 얻은 것으로 그려져 있다. 학교나 언론에서‘듣지 못했다’거나‘배우지 않았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 원인은 교과서의 경우에는 검정규정 중 〔주변 아시아국들과의 관계를 배려한〕‘근린제국조항(近隣諸國條項)’에 있고(제4화), 또한 매스컴의 경우에는‘반일 매스컴’에 있다고 주장한다(제5화). 그에 비해 인터넷이나 만화는 “듣지 못했던”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에서 보이는 언론권력에 대한 시민미디어의 대항구조와는 대조적이다. 2005년은‘한일우호의 해’이기도 해서 매스컴에서 한류와 관련한 긍정적인 이미지의 정보가 무수히 쏟아졌기 때문에 “매스컴이 감추고 있는 또다른 한류, 그것이 혐한류다!”(279면)라는 식의 담론은 왠지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상황이었다.

이런 특징은 어떤 의미에서‘주류’적인 것에 대항하는 대항문화의 수법을 전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이 『혐한류』는 “각 출판사로부터 출간이 거부된 문제작!”이라고 씌어진 띠지를 달고 유통되고 있다. 생각해보면‘자유주의사관연구회’의 초기 저작 제목도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1996)였다(당시 제목에 현혹되어 잘못 구입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즉 그들은 일정한 소수자의식을 가지고 무언가와 싸우고 있다. 대항할 상대는 논파의 상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좌익’ ‘반일’의식을 가진 일본인이며, 재일한국인이며, 한국·북조선이다(결코 초강대국 미국은 아니다). 그 대항문화의 담당자는‘일본’이라는 나라를 배경으로 한‘일본국민’이기 때문에 실은 다수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외감·억압감·폐쇄감을 동반한 소수자 내지 피해자 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타개해야 할‘일본인’으로서 일어서고 있다. 이것은 『혐한류』뿐만 아니라 1990년대 이후 일본사회에서 강화되어온 국민주의의 기본 특징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전도되어야 하는 지식과 인식이 과연‘주류’라고 할 수 있을까? 가령 식민지배나 전후보상을 둘러싼 지식과 인식은 진정으로‘공’적인 것이었을까. 막연하게‘일본은 조선인들에게 무언가 나쁜 짓을 했다’는 정도의 표면적인 이해, 형식적인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에 근거해 식민지배나 차별을 비판하는 방식, 일단 사과하면 그만이라는 예의 차원의 태도, 조선을 둘러싼 겉치레뿐인 역사관과 사회관…… 그런 이른바‘상식’이라면 혹여 전후 일본의 한 시기에 일정한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근저에는 오히려 항상 다양한 형태로‘혐한’적인 것이 내포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일본사회의 냉전구조와 경제성장 때문에 상대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상황에서의‘상식’이란 일본과 한반도의 뒤엉킨 관계에 깊이 관여하지 않기 위한 편법으로서도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혐한류’란 포스트 냉전 혹은 포스트 거품경제의 상황하에서 그런‘상식’때문에 볼 수 없던 것들이 표현의 장(場)을 획득하며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실제로 「『만화 혐한류』 독자의 소리」에 실린 61명의 의견을 보면 어딘가 개운치 않던 점을 만화로 잘 표현해주어서 속시원하다는,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자면 억압되어 있던 것이 해방된 듯한 느낌이라는 식의 감상들이 많이 눈에 띈다. 허구화된‘상식’이나‘올바름’을 뒤엎은 듯한 느낌을 가지면서 어떤 해방감을 획득하고 불안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까지는 그다지 공공연하지 않은 형태로 표현되던 것이 인터넷이나 만화를 매개로 좀더 첨예한 양상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상식’이나‘올바름’을 비판하고 교정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금 필요한 작업이다. 문제는‘상식’이나‘올바름’의 정치가 존재하는 방식을 묻는 작업이 오늘날의 국민주의, 인종주의, 외국인 혐오의 논리에 전유되어 있다는 것이다. ‘상식’ ‘올바름’을 탈구축하면서 정의를 희구하는 정치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그것이 긴요한 과제이다.

 

9·11 이후의 세계와 혐한류

『혐한류』의 특징 중 하나는‘한국’ ‘한국인’ ‘조선인’ ‘재일’같은 표현이 적당히 혼용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혐한류』 제4화 「일본문화를 훔친 한국」에서는 현대‘한국’, 옛날‘조선’, ‘조선인’, ‘한국인’, ‘재일한국인’에 의한 여러가지 날조가 논의된다. 그리고 『혐한류2』 제2화 「세계가 싫어하는 한국인」에서는 베트남, 멕시코, 아르헨띠나, 팔라우, LA등지의‘한국’ ‘한국인’이 연이어 다뤄진다. 즉 과거든 현재든, 국가·국민·민족이든 국내의 소수자나 개인이든, 그리고 국적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한가지 맥락 안에서 “본래 ○○인(민족)은 이러저러한 존재다”라고 본질적으로 규정하고, 그것으로‘혐오’해야 할‘한(韓)’을 구성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 살고 있든지‘한’은 무조건 싫다는 의미에서 이 만화가 주장하는‘혐한’의 어떤 일정한 개념을 찾는다면, 그것은 제노포비아(xeno-phobia, 외국인 혐오) 정도가 될 것이다. 외국인 일반이 아니라 특정한 민족 내지 인종을 향하고 있다는 의미에서‘혐한’을‘Korean-phobia’라고 번역하거나 인종주의로 바꿔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이런 개념 규정만으로는 부족하다. 2005년 7월에 일본을 공개 방문한 유엔 인권위원회 특별보고관 두두 디엔(Doudou Diène)이 2006년 1월에 제출한 보고서는 『혐한류』를‘문화적·역사적 성격을 지닌 차별’의 예로 들고 있다.2 그러나 안타깝게도‘이것은 차별이다’ ‘이것은 인종주의다’라는 딱지를 붙이더라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오늘날의 실정이다. 그것이 어떤 외국인 혐오인지, 어떤 인종주의인지, 20세기부터 그저 계속되어온 것인지, 아니면 어떤 현대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 그런 분석이 먼저 필요할 것이다.

『혐한류』의 인종주의적 혹은 본질주의적 특징은 그것이 항상 변명을 동반한다는 점에 있다. 가령 “(패전 직후) 조선인은 완전히 제멋대로였다”(81면)라고 노골적으로 본질주의적인 대사를 내뱉은 직후에, “하지만 모든 조선인이 폭도화된 것은 아니었지요?”(82면)라며‘일부의 조선인’이 나쁘다고 적고 있다. 변명을 하면서도‘일부의 조선인’을 본질화시키는 방식은 전후 일본의 재일조선인 정책의 특징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불령선인(不逞鮮人)’을 타깃으로 삼으면서 조선인 전체에 대해 식민지시대부터 계속 취해온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3

그와 동시에 이것은 9·11테러 이후 이른바‘테러와의 전쟁’에서 자주 사용되어온 수사이기도 하다. 무슬림은 나쁘지 않지만, 일부 이슬람 과격파가 나쁘다는 논리로 탈리반을 괴멸시키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고, 후쎄인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이라크를 침공하며, 테러리스트 색출을 위해 모든 외국인 입국자의 지문과 얼굴사진 정보를 채취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21세기 초의 세계상황은 역사를 되돌아보는‘혐한류’의 시선에도 짙게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어‘테러’를 둘러싼 담론은 안중근(安重根)을 평가하는 데에도 직접 연관되어 있다. 『혐한류』는 안중근을 “한국합병에 신중한 자세를 보이고 합병 찬성파를 제압하고 있던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살해한 테러리스트”(211면)로 규정하고 있다. 『혐한류 debate』에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안중근은 그야말로 진짜 테러리스트다. 한국인이 테러를 찬미하는 것은 비상식의 극치다. 세계가 테러를 박멸하자는 이때 테러를 찬미한다는 것은 한국인이 인류의 적”(188면)임을 의미한다는 표현도 있다. 그것은 폭력을 동반하는 독립운동 전반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고, “한국측의 요청도 있어서 이루어진 합방인데 그 은혜를 망각하고 테러나 폭동을 일으키다니, 제멋대로도 정도가 있지!”(220면)라고 적고 있다. 일단‘테러’라고 규정해버리면 이미 생각할 가치도 없으며, 배제해도 상관없다는, 오늘날 글로벌한 권력의 담론이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면서 표현되고 있다. ‘영웅’과‘적’사이, ‘폭력’과‘비폭력’사이에 존재하는, 오늘날 더욱 집요하게 곱새기며 사고해야 할 장소를 완전히 소멸시켜버리고 있는 것이다.4

그런 중간영역(gray zone)의 철폐, 그리고 성급하게 A인가 A가 아닌가의 선택을 강요하는 불관용이 재일조선인에 대한 『혐한류』의 묘사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마쯔모또 코오이찌(松本光一)라는 재일조선인에 대해서는 “옛날에는 조선인이 일본인이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독립국이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일본에 응석을 부려서는 곤란합니다”(66면)라고 몰아세우고, “일본인이 됐다가 한국인이 됐다가 바쁘게 왔다갔다하는데 도대체 어느 쪽이냐”(72면)며 선택을 강요한다. 그 결과 마쯔모또는 말을 잃고 착란상태에 빠진다(74면). 설령‘일본’이라는 국적을 선택한다 해도‘일본인’이상으로‘일본인’이기를 요구받는다. 예를 들어 백진훈(白眞勳)이나 히라따 마사노리(平田正源) 같은‘귀화’한 국회의원을 예로 들면서 “일본인 정치가 중에서도 국익을 무시하는 자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입후보 직전까지 한국인이었던 사람들이 진정으로 일본의 국익을 위해서 일하겠느냐?”며 의문을 드러낸다.

이와 같이‘혐한류’의 외국인 혐오 내지 인종주의는 현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담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인종주의자들은 설령 소수자의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일정한 힘을 발휘하며 확산되어가는 것이다.

 

계몽주의의 구조를 넘어서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혐한류’에 대해서‘혐일류(嫌日流)’를 주장하면 그만일 것인가. 혐일류가 겉으로는 혐한류의 비판일지 몰라도, 내셔널리즘에는 내셔널리즘으로, 인종주의에는 인종주의로라는 함무라비식 논리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실로 적대적인 공범관계밖에 되지 않는다.

말할 것도 없이 확실한 대응방법 중 하나는 『혐한류』 등의 책에서 말하는 개개의 사실에 관하여 명확한 잘못과 과장된 사실, 확대된 오해 등을 개별적이고 구체적으로 비판(논파!)해가는 것이다. 대부분의 내용이 통속적인 역사서나 한국 관련 책에 의거하고 있어 이미 바닥을 드러낸 이상, 그런 작업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혐한류』 같은 책을 읽고‘경악’했지만, 진정으로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쉽게 접할 수 있는 간단한 비판 매뉴얼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을 작성하는 작업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만화, 잡지, 대중서(대부분은 지방서점에서도 유통되는)나 인터넷 등을 통해서 확산되는‘혐한류’의 수용자들에게까지 그것이 전해지지는 않는다. 좀더 말하자면, 과연‘정확한 지식’ ‘정당한 인식’을 가르치는 방법만으로 충분할까.

1990년대 후반, 일본사회에서 새역모 등의 단체가 영향력을 확대해갈 때, 우리는 이것을 “계몽주의 구조에 대한 참견”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하게 도식화하자면, 역사를 둘러싼 계몽주의 구조란 ①우선 학계에서‘정확한 지식’ ‘정당한 인식’을생산해내고 ②그것을 공교육과 매스컴을 통해 유통시키며 ③그것을 시민이 수용하여 교양시민이 되어가는 구조가 어딘가에전제되어있는 것이다.새역모 등의 단체들은 ①을 건너뛰고 ②와 ③의 단계에서 물량으로 승부해왔다. 내가 아는 한,새역모 같은 단체들이 등장할 당시 역사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그런 것은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단체들이 일정한 영향력을 지니기 시작하자, 이번엔 역사학계가‘오류’를 리스트로 뽑아 대응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정정작업은 의의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때까지와 마찬가지로 역사계몽주의의 구조를 전제로 한 대응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혐한류’에 있어서도 문제의 구조는 마찬가지다. 인터넷, 잡지, 서적 등을 통해서 옥석이 섞인 채 방대한 규모의 정보가 유통되고 있다. 야후(Yahoo)나 구글(Google)에서‘조선’혹은‘한국’과 관련된 키워드를 입력하면 바로 검색되는 것이‘혐한류’이다. 그것은 현실정치에 대해‘저급 혹은 주변’의 위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문화정치학 등과 아카데믹한 공간 안에서만 유통되는 언어로 지적하면 될 만한 느긋한 상황도 아니다. 실로 그런 잡다한 정보공간이 현실정치의 장 자체가 되어 있다. 이런 현상황을 전제로 한다면 도대체 어떠한 실천이 가능한 것일까. 이 글에서는 우선 그런 문제의 소재만을 제시했다. 그 나머지는 향후 함께 풀어야 할 물음으로 남겨두고 싶다.

 

 

한류와 혐한류의 공통성

 

오구라 키조오

 

 

‘월경(越境)하는 문화’의 실천자들

‘한류’가 있으면‘혐한류’도 있다. 이 상반되는 두 흐름에 대해서 나는 처음부터 계속 같은 주장을 해왔는데, 한류와 혐한류의 뿌리가 같다는 것이다. 즉 일본사회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한류와 혐한류는 당연히 현재 일본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반영하고 있지만, 이 정반대의 두 유행에는 일본사회가 지닌 하나의 동일한 문제가 투영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연원은 1990년대 중엽까지 소급할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우선 이런 생각에 이질감을 느끼는 사람도 당연히 많을 줄로 안다. ‘한류’를 단순히 통속적인 자들의 열광이 아니라‘월경하는 문화’를 실천하는 새로운 동아시아의 시민연대로서 파악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경색된 동아시아의 정치국면을 풀어줄 기폭제가 될 수 있는 움직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일본 우경화의 상징인 코이즈미(小泉)내각이 노골적으로 미국을 좇으며 동아시아의 협력를 짓밟고 있는 데 반해‘시민’은 그와 상관없이 인접국과의 협력와 우호를 실천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정부보다 시민 쪽이 앞서나가는 것이며,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나 우익 네트워크, 그리고 일본정부가 반동적인 반(反)한반도 캠페인을 계속 펼치는 것에 대항할 세력으로서 한류 팬을 중심으로 한‘월경문화’의 실천자들을 위치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매스컴 중에서는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이 이런 생각을 가장 선명하게 주장했다. ‘아사히신문 아시아네트워크’는‘월경하는 문화’에 중점을 두고 새로운 동아시아의 상(像)을 만들자는 특집을연재한 바 있다. 나도 이러한 생각에 일정하게 찬동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제까지 한국에 거의 시선을 주지 않던 일본의 중년·고령의 여성층이 한국사람들과 그들의 문화에 매료되어 한국어를 공부하고, 이런 매력적인 이웃을 이제까지 알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한국에 대한 시선을 멸시·경시·무시에서 호의·친근감·동경으로 바꾼 것에 대해 최대한 높이 평가하고 있다. 나는 최근 몇년 동안 전국 각지에서 백여 차례 이상 강연과 강좌를 하면서 일본 외교가 미국 추종 일변도로 흘러가서는 안되며, 인접국 사람들과 상호이해를 도모하여 평화로운 동아시아를 구축해야 한다는 인식을 한류 팬들 스스로 터득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했다. 이는 21세기에 접어든 싯점에서 일본사회가 가져야 할 올바른 인식의 방향성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정부의 문화전략과의 관계

이처럼‘월경문화의 실천자’로서 한류 팬을 파악하는 입장에 서면서도, 그런‘월경문화’와 정부의 관계를 밀착된 것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 즉 일본에서의 한류도, 한국에서의 일본 대중문화의 인기도 결코 시민의 순수하고 자발적인 문화실천으로 부상한 것이 아니라, 그 배경에는‘문화를 새로운 국가전략으로서 이용하려는’양국 정부의 정책이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관점에서는‘정부 대 시민’이라는 구도만으로 이 새로운 문화교류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앞서 언급한 『아사히신문』도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와 같은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그것은 양국 정부가 개입하여 조성한 문화적 친밀성을 토대로 인접국과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은 바람직한 움직임이지만, 정치가 그 강고한 토대 위에 안주하여 제멋대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인식이다. 물론 한류는 한국정부의 자국문화 육성책만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문화수용자들이 자발적으로‘타자의 문화’를 선호한 것이지만, 거기에 한일 양국 정부의 정책이나 생각이 강하게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와 같은 입장에도 찬동한다. ‘정부 대 시민’이라는 구도도 어느정도 옳으며, 또‘정부가 개입하여 조성한 문화상황’의 토대 위에 안주하며 무신경하게 대응하는 정치에 대한 비판도 어느정도 옳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문맥과 관련하여, 더욱 극단적인 각도에서 한류를 보는 입장도 있다. 나는 한국 여당 국회의원과의 대담에서 “일본의‘한류’는 일본정부의 음모”라고 주장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일본이 생각하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의 환심을 사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 토양을 만들기 위해서 일본정부가‘한류’를 연출하고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극단적인 주장이며, ‘한류’의 발생 양상을 자세히 관찰해온 내 입장에서 보자면 문화산업 현장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말도 안되는 주장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일관계에서 대단히 바람직한 한류 현상을—결코 일본정부가 연출한 것은 아니지만—일본정부가 어떤 형태로든 이용했다는 점은 사실일 것이다.

이와 비슷한 입장으로는 한일 대중문화 교류에 긍정적이면서도 그 때문에 과거문제가 망각되거나 애매하게 될 위험성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눈앞에서 일어나는‘한국 선호’나‘한국 스타의 인기’같은 현상 때문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역사 문제나 응어리 등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또 북한에 대한 멸시나 적대적 감정 등이 심리적으로 정당화된다면, 거기에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는 입장이다. 물론 이런 주장도 어느정도 옳다. 즉 한류 팬 중에는 “이를 계기로 한일관계의 역사에 대해서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사람들도 많으며, 그런 의미에서‘한류〓역사의 은폐’라는 등식이 반드시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류에 의해서 한일관계가 극도의 장밋빛으로 묘사됨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모든 문제의 원경화(遠景化)’에 대해서 경계할 필요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한류와 ‘룩 코리아’

이렇게 한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에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하지만 그런 견해들은 공통적으로 한류가 한일 양국 국민(혹은 시민)을 서로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한다. 그런 평가는 지당하며 나 또한 마찬가지 입장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 때문에 한류는 옳고 혐한류는 틀렸다는 이항대립적인 사고방식에서 본다면, 이 양자는 서로 융합할 수 없는, 완전히 적대적인 흐름이 되고 거기에 세계관의 공유란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일본에서 한류의 연원을 밝혀가다보면, 문제를 그렇게 단순한 대립적 구조로 파악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한류와 그 전제로서의‘Look Korea(룩 코리아, 한국을 배우자)’운동을 포스트모던화가 갈 데까지 가버린 일본사회를 재(再)주체화·재근대화하자는 움직임이라고 줄곧 주장해왔다.5

근대 이후 일본이 아시아의 선두에서 서구의 가치를 수용했고, 한국은 주로 그것을 일본에게 배워서 근대화·산업화에 매진해왔는데,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런 관계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 것이다. 정체하는 일본과 개혁하는 한국. 후퇴하는 일본과 전진하는 한국. 이같은 새로운 인식이 일반화되고, ‘한국을 배워라’즉‘룩 코리아’의 움직임이 일본에서 생겨났다. 90년대 말부터 신문과 텔레비전에서는 갑자기‘한국의 ○○를 배우자’는 내용의 보도가 증가했다. ‘한국정치의 리더십을 배우자’ ‘한국의 낙선운동을 배우자’ ‘한국의 구조개혁을 배우자’ ‘한국의 IT전략을 배우자’ ‘한국의 스포츠선수 육성책을 배우자’ ‘한국영화의 다이내믹한 재미를 배우자’ ‘한국의 전통문화와 현대문화의 융합 방법을 배우자’등등이 그 예이다.

룩 코리아와 한류를 둘러싼 담론의 대부분은 “일본에 없는 ○○이 한국에 있다. 그것을 배우자”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것은 일본에 대한 불만이나 부족함 등의 자각과 표리일체가 되어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일본사회를 바꾸자는 프로젝트를 위해서 한국을 배우자는 것이다.

그때 어떤 정치적 입장에서 한국을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서 있는 위치’가 매우 다양해졌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발견하게 된다. 룩 코리아와 한류에는 ①가족을 강조하고 애국심을 높이 평가하는 등 일본사회의 우경화를 촉구하는 것 ②‘시민 미디어, 반권력 미디어를 배우자’ ‘낙선운동에서 배우자’등과 같이 일본사회의 좌경화를 촉구하는 것 ③하드랜딩(hard landing, 경착륙)론 등과 같이 일본경제의 신자유주의화를 촉구하는 것 등 다양한 입장들이 포함되어 있다. 즉 특정한 정치적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이 한국에 관심을 보이던 시대는 완전히 끝난 것이다.

 

룩 코리아의 사상적 배경

룩 코리아는 어떤 사상적 배경을 전제로 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본사회에서 인간을‘재주체화’하는 것이다. 패전 후 일본은 공동체보다 개인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해왔다. 특히 1970년대 말부터 불거진 포스트모던은 재래의 공동체를 해체하고 개인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웠다. 거기에서 종래의‘주체’는 낡은 개념으로 여겨지고, 대신‘관계성’만이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주체’를 해체한 이후에는‘관계의 네트워크’가 생기는 동시에 자신의 주위에만 관심을 기울이는‘반경 1미터 인간’을 양산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주체가 해체된 일본인은 90년대에 들어서 아시아 국가들의‘주체화’경향으로부터 생각지도 않았던 충격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우익진영은‘일본’ ‘일본인’으로서의 주체를 세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동시에 인간관계의 서열화와 권력화를 의미한다. 강한 리더십에 대한 희구, 평준화교육에 대한 반발, 능력주의의 대두, 공동체 중시 교육(애국심의 함양 등)의 부활 같은 사회적 현상들이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또한 좌익에서는 그같은 방향성에 대항하면서 아시아와 연대하려고 했는데, 이것 또한 포스트모던적인‘관계 우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모던적인‘주체 우위’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움직임 속에서, 특히 일본과 가까운 한국의 모습이 부럽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인은 다시금 주체화하려고 한다. 그런 시기에 한국이라는 코드가 이용되었다. 전후 일본에서 금기시해왔던 여러 현상들에 대해 한국이 너무도 간단하게 그 금기를 풀어준 것이다.

한류는 다음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체’가 해체된 일본인은 지금 한국문화에서‘주체’의 매력을 다시 한번 맛보고 있는 것이다. 한국배우가 주체적이며 멋있게 보인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일본인이 한국배우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단적으로 그 혹은 그녀가‘모던한 배우’이기 때문이다. 일본의‘포스트모던한 배우’는 이성적이지 않으며 사회에 대해 그 어떤 책임감도 갖고 있지 않다. 한마디로 수준이 낮은 것이다. 그때 나타난 한국배우는 단순히‘회고적인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라‘모던하기 때문에 멋진’존재인 것이다. 한류는 단순히 통속적인 것에 대한 열광이 아니다. 그 근저에는‘지금의 일본은 안된다. 한국을 배워야 한다’는 강한 주장이 내재해 있다. 그 때문에‘욘사마’에 대한 흥분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한국문화 전반에 대한 열렬한 관심으로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역할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을 애매하게 넘기는 일본적 심성이나 주체성의 해체를 극단적으로 추진한 일본형 포스트모던에 대한 반성이 룩 코리아와 한류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견 한류와 정반대의 움직임인 것처럼 보이는 혐한류도 “일본인도 주체성을 가지고 역사를 인식하고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주장하자”는 입장인 한, 룩 코리아나 한류와 같은 뿌리에서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룩 코리아에는 우익말고 좌익의 입장에 선 것도 많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룩 코리아와 한류의 모든 것이 혐한류와 같은 방향을 향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재주체화’라는 키워드로 정리하자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강연회에서 청중들에게 질문하면 “코이즈미 수상은 중국과 한국의 눈치를 보지 말고 야스꾸니(靖國)신사에 참배해야 한다”고 말하는 한류 팬이 상상 외로 많다는 것도 그 한 예이다.

요컨대‘월경’은 직선적으로는 진행되지 않는다. 문화교류를 통해 한국과 일본 사이에 내셔널리즘이 자연히 해소되고, 아이덴티티는 복수화·혼종(hybrid)화되어 수평적인 관계를 구축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인식이다. 오히려 상대의 아이덴티티와 만나다보면 충돌이나 마찰이 불가피해지고, ‘반일’과‘혐한’이 반복되며, 일시적으로 양국관계가 악화되는 일도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일본인의 주체성이 해체된 채, 일본만이 포스트모던의 공간을 헤매고 있는 상황은 동아시아 전체에서 보더라도 일본이 현저하게 손해를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룩 코리아와 일본의 주체화’는 21세기에 한일 양국이 동북아시아의 시민의식을 어떻게 공유하면서 어떠한 공동체를 형성해갈 것인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새로운 내셔널리즘 구축에 대한 의지가 우리들에게는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일본이 주체성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혐한류’도 그 과정에서 일어난 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ㅣ박광현 옮김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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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내가 본 것만으로도 『만화 혐한류의 진실: ‘한국/반도’의 터부 초(超)입문』(寶島社 2005), 『혐한류 debate: 반일국가 한국에 대해 반발한다』(總合法令出版 2005), 『혐한류의 진실: 장외난투극』(寶島社 2005), 『혐한류 실천의 핸드북: 반일망언 격퇴 매뉴얼』(晋遊舍 2005), 『만화 혐한류 가이드북』(晋遊舍 2006) 등 많은 책이 나와 있다.
  2. Doudou Diène, “Report of the Special Rapporteur on contemporary forms of racism, racial discrimination, xenophobia and related intolerance,” E/CN.4/2006/16/Add.2, 24 January 2006.
  3. 항상 이런 변명을 동반하는 묘사방식은 『혐한류』 『혐한류 2』 전체의 기본구조이기도 하다.
  4. 그렇기 때문에 안중근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고 반론하거나, 목적의 정당성이 있으면 수단이 정당화된다는 논리만으로 반론하는 것은 같은 싸움장에 올라가는 것이다.
  5. 이하의 내용은 졸저 『韓流インパクト: ルックコリアと日本の主霣化』(講談社 2005)에서 밝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