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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 시

 

좋은 서정과 진부한 서정

 

 

엄경희 嚴景熙

문학평론가. 저서로 『빙벽의 언어』 『未堂과 木月의 시적 상상력』 『질주와 산책』 『현대시의 발견과 성찰』 『저녁과 아침 사이 詩가 있었다』 등이 있음. namwoo@hanmail.net

 

 

1. 서정시의 고질적 문제들

 

서정성을 벗어난 다양한 시적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시 하위 장르 가운데 서정시가 차지하는 주류로서의 위상이 여전히 유지되는 것은 서정시를 향유하는 독자층이 그만큼 넓기 때문이다. 대화적 소통방식을 벗어나 개별 발화로서의 독백적 성격을 가장 두드러지게 표방하는 서정시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서정시가 지니는 장르적 친근성과 정서적 환기력이 독자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정시의 유구한 전통은 독자의 공감을 쉽게 얻어낼 수 있는 막대한 시적 자산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전통적 자산을 시 창작을 위해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서정시를 창작하는 시인들은 전통의 친밀함을 끌어들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부담을 늘 갖게 마련이다. 기존의 시들과 변별될 수 있는 색다른 느낌을 창안해야 한다는 부담은 서정시의 확대 가능성과 결부된다.

그러나 서정시가 지닌 이러한 부담은 손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 흐름 속에서 탄생한 정전(canon)의 압력만이 아니라 서정시가 지향하는 개체의 내면적 감정, 정서, 열정과 같은 주정적 측면의 보편성을 가로지르기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서정시가 관습화된 기표들을 벗어나지 못한 채 지루한 서정을 재생산하거나 자폐적 상처의 고백 이상이 되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관습화된 기표의 재생산이라는 서정시의 부정적 측면은 서정시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반복돼온 고질적 문제이다. 일체의 예술적 행위가 지배적이고 경직된 거대담론의 하중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오늘날이야말로 개별 발화가 적극적으로 옹호될 수 있는 싯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 서정시에서 지루하고 권태로운 발화가 무더기로 발견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서정시의 관습적 틀에 안주하려 하는 시인들의 안일한 의식과 허약한 사유기반 때문으로 판단된다.

 

 

2. 되풀이되는 자연과의 동일화 구조

 

계절마다 문예지에 발표되는 시 가운데 서정시가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그런데 발표된 서정시를 면밀히 관찰해보면 대다수의 작품이 대동소이한 틀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자연 이미지 혹은 자연 풍경과 시인의 주관적 정서를 비유적 관계로 설정함으로써 동일성의 세계를 구축하는 방식이다.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했던 전통적 삶에서는 자연 이미지에 대한 선호가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었다. 근대 이전의 전통시 기반이 우주적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연속적이면서 동시적인 질서 속에서 파악하려 하는 ‘연속적 실재관’에 입각해 있음을 볼 때, 자연 자체를 사유대상으로 삼는 시만이 아니라 자연을 매개로 자신의 내면을 표상하는 시가 우리 시의 미학적 전통 가운데 주류적 양상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자연이 인간 삶의 근본적 지평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전통적 양상의 계승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유효하다. 그러나 자연과 주관적 내면의 동일화 구조가 무수한 시인들에게서 끊임없이 자동화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러한 서정시의 틀이 시를 용이하게 쓰는 방법으로 이미 고착되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꽃피는 의미를 모르면서도

사랑이라고 사랑한다고

안간힘으로 꽃망울을 밀어올리는 나무들처럼

내리지도 못할 뿌리를 물고 달려드는

나의 분노도 슬픔도 사랑도

가을 속살을 베어 물고 익어가는 중이다

—김청미 「가을을 베어 물다」(『문학들』 2006년 봄호) 부분

 

아직 저녁이 오기 전인데

만나려는 사람을 만나기 전인데

앞으로 너무 오래 그래야 하는 것인 듯

눈과 눈 사이가 멀고 어둡다

그것을 알아버린 마음을 돌이킬 수 없어

성긴 눈 날린다

—심재휘 「성긴 눈」(『현대시』 2006년 2월호) 부분

 

꽃은 피어서 슬프고 지나간 날의 맹세는 쉽게 무너진다.

설렁줄 흔들어 산그늘 불러들이는 저녁 해어름 때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 지천으로 밀려오고

—김석규 「봄날은 가고」(『시와 사상』 2006년 봄호) 부분

 

안간힘으로 꽃망울을 밀어올리는 나무와 시인의 내적 고통을 동일화하는 김청미의 상상력, 성긴 눈발과 기다림으로 서성이는 시적 자아의 아득한 마음을 뒤섞어놓은 심재휘의 내면 풍경, 산그늘 불러들이는 저녁 해어름을 그리움과 결합시키는 김석규(金晳圭)의 시적 발상 등이 얼마만큼 독자의 내면을 사로잡을지는 매우 회의적이다. 이들 시가 보여주는 자연 이미지와 내면의 결합은 ‘이미 어디서 많이 본 듯한’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구체적으로 말해 김청미의 시에서 “사랑이라고 사랑한다고” “뿌리를 물고 달려드는”등과 같은 표현에서 느껴지는 절제되지 못한 감정, 심재휘의 통속적 어조, 김석규 시에서 보이는 ‘맹세’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 ‘지천’등과 같은 상투적 시어들은 나무, 눈, 저녁 해어름과 사랑, 기다림, 그리움 등의 결합을 진부한 것으로 만든다. 상투성은 개별 발화의 독자성을 말소시킨다. 서정적 자아의 목소리와 어조가 보편성에 지나치게 의존할 때 그 시는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상투적이고 관습적인 서정시가 재생산되는 것은 서정적 분위기에 대한 편견이나 서정시에 대한 오랜 관성이 시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한편 자연 풍경과 주관적 내면의 결합방식이 한 시인의 시편에서 반복될 경우, 그것이 시인의 시적 상상력을 고착시킬 위험이 있다는 점을 지적해볼 필요가 있다.

 

이태 만에

강화 갯벌에

서본다

물결 가까이에서 날아올랐을 새의 발자국이 외롭게 찍혀

바다로 간다

 

다 지난 흔적을 물고 놓지 않는 갯벌!

 

붉은 석양이 그 발자국을 딛고 간다

 

이제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

—신용목 「강화도, 석양」(『시에』 2006년 봄호) 전문

 

신용목은 자연과 시인의 주관적 내면을 빈번하게 결합하고 있음에도 비교적 세련된 이미지와 절제된 언어 감각을 유연하게 견지하는 시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첫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문학과지성사 2004)에 실린 「봄 물가를 잠시」 「백운산 업고 가을 오다」 「강물의 몸을 만지며」 「헛것을 보았네」 등과 같은 시편만이 아니라 위에 인용한 시 또한 그러하다. 외롭게 찍혀 있는 새의 발자국, 그리고 거기에 묻어 있는 붉은 석양, 이 둘을 동시에 포착하는 시인의 시선은 복합적이고 섬세하다. 시인의 내적 외로움을 “이제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는 비장한 화해로 전환시키는 정서적 비약 또한 시적 울림을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자연 풍경과 시인의 내면을 결합하는 방식을 반복하면서 시인이 지나치게 안정되고 매끄러운 시적 맥락 속에 스스로를 안착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된다. 그의 시가 이전과 비슷한 정서와 문법을 되풀이하는 것을 볼 때 시적 맥락이나 틀에 대한 자의식을 얼마만큼 쇄신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이는 신용목만의 문제는 아니다. 시인은 스스로 만들어놓은 문법을 끊임없이 파괴하면서 자기 갱신의 길을 열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3. 사유기반의 허약성, 혹은 선적(禪的) 포즈

 

서정시의 고유한 성격 즉, 서정시가 시인의 파토스(pathos)를 충실하게 반영하는 예술 장르라는 인식은 때로 서정시의 지평을 협소하게 만드는 역기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정서를 환기하고 감정의 충일을 드러내는 것으로 서정시의 역할이 완수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서와 감정의 환기는 서정시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대상에 반응하는 서정적 자아의 정서와 감정은 시인의 주관적 지향성과 결부된다. 시인의 정서와 감정의 형상화는 일회적 사건이라기보다 이상적 삶에 도달하기 위한 부단한 정신활동의 기표인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서정시는 정서와 감정을 드러내는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닐 가능성이 높다. 그간 사랑이나 화해, 상생(相生)과 같은 주제의식으로 독자들의 내면을 위로하고 순화시켜준 것은 서정시가 지닌 가장 큰 미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주제의식이 대부분 서정시의 귀결점이라는 데 있다. 이는 서정시의 사유기반이 허약하다는 사실과 깊이 결부된다. 정서나 감정의 환기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곧 사상이나 관념의 배제로 오해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감의 구체성과 관념의 배제를 등식화하는 통념이 서정시의 질적 확장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서정시의 이같은 고민을 풀어보려는 노력 가운데 하나가 선시적(禪詩的) 경향이라 할 수 있다. 선시는 세속적 삶에서 벗어나 오도(悟道)의 세계에 이르는 것을 본질로 한다. 자기정화나 깨우침을 통해 정신주의적 토대를 다지고자 한다는 점에서 우리 시단의 선시적 경향은 전통계승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폭력적 물신주의, 속물주의에 맞서는 한 기류를 형성할 가능성을 갖는다. 그러나 서정성과 결합된 선시적 경향을 보이는 모든 시가 진리를 드러내는 현정(顯正)의 묘미를 성취해내는 것은 아니다.

 

선사 마당 돌 약수대 위

나무로 만든 물바가지 두 개

눈을 뒤집어쓴 채

나란히 엎어져 있다

(…)

 

떠내도 떠내도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있는가

 

살얼음 낀 돌 약수대 위에

나란히 엎드려

빈 속을 비워내고 있다

—고영 「속죄」(『시인세계』 2006년 봄호) 부분

 

간밤엔 선월禪月이 만정滿庭하더니

아침에 문을 여니 서설瑞雪이 뜰 가득하다

 

(…)

 

첫눈 내리는 쌍계사 계곡

오늘은 물도 소리도 묵언인데

 

찬물에 씻은 찻잔 속으로 날아와

돈오의 한순간처럼 반짝이다 사라지는

몇개의 눈송이

—도종환 「첫눈」(『애지』 2006년 봄호) 부분

 

고영과 도종환(都鍾煥)의 시는 눈으로 덮인 고요한 산사의 풍경을 드러냄으로써 비세속적인 시정(詩情)으로 독자를 이끈다는 공통점이 있다. 고영이 눈을 뒤집어쓴 물바가지를 통해 ‘비움’이라는 삶의 태도를 강조한다면 도종환은 눈으로 덮인 묵언의 공간 속에서 돈오에 이르고자 하는 한 존재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이 두 편의 시는 엄밀하게 말해 선시라기보다 선시적 포즈를 취하고 있는 시라 할 수 있다. 이들 시가 탈속적인 맑고 깨끗한 풍경을 조형화하는 데는 성공하고 있는지 모르나, 세계의 진상(眞相)을 꿰뚫어내는 선시만의 비논리적 역설을 언어적으로 성취하는 데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고요한 산사 풍경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 서정적 자아를 고영과 도종환의 시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선시적 포즈를 취하고 있는 많은 시편들이 산사의 풍경과 물바가지나 눈송이 등 깨우침을 주는 사물의 발견, 그리고 서정적 자아의 정감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결합하는 시상 전개의 방식을 유행처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들 시 또한 자동화된 구성적 틀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회의하게 된다.

여기서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갈 것은 선시풍의 시들이 드러내고 있는 진실이 때로는 매우 막연하다는 점이다. 고영이 강조하는 ‘비움’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비움’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도종환이 말하는 ‘돈오의 순간’이란 어떤 것인가? 이러한 시편들을 읽을 때마다 ‘진리는 여전히 심오한 곳’에만 있는 것인가를 되묻게 된다. 정신적 비전을 독자와 공유하기 위해서는 진리의 심오함을 공공성으로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진리의 공공성보다 진리의 심오함을 침소봉대해온 우리들의 고정된 의식은 과연 올바른 것인가? 심오함을 포즈로 삼기보다는 그것을 끝까지 언어로 밝혀보려는 태도를 취할 때 서정적 정신주의의 지평 또한 넓어질 것이다.

 

 

4. 서정의 깊은 경지를 찾아서

 

앞서 지적한 서정시의 고질적인 문제점과 더불어 서정시의 전통이 지닌 무게와 부피를 가로지를 방법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서정시는 과거에 이미 보았던 것의 반복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즉 전통의 친숙함을 끌어들이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모순된 방법적 탐구가 치열한 자의식으로 시인의 상상력을 긴장시키지 못한다면 서정시의 질적 깊이를 획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형렬 시집 『밤 미시령』(창비 2006), 문인수 시집 『쉬!』(문학동네 2006)에 실린 시편들과, 백인덕의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현대시』 2006년 3월호) 등이 도달한 서정적 깊이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눈이 우르릉거리는 사나운 날엔 국수를 해 먹는다. 애 곤지 알이 명태머리 꼬리가 처박는 폭설. 된장을 푼 멸치 국물이 가스불에 설설 맴도는, 까닭없이 궁핍한 서울. 엉덩이 들고 홍두깨로 민 반죽을 칼질하고 밀가루 뿌려놓은 긴 국숫발. 바다 모래불 가 눈발을 그리는 20년 객지, 하며 창밖에 펄펄 날리는 하늘 눈사태 바라보는 나는 이런다,

 

이런 날은 이 조태 칼국수만이

저 을씨년하고 어두운 날씨를 이길 수 있다.

—고형렬 「조태 칼국수」 전문

 

토속적 미각으로 독특한 시정을 유감없이 드러낸 시인 하면 아마도 백석(白石)을 떠올릴 것이다.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물구지우림이나 무이징게국이 굳이 어떤 맛인지 모르는 경우에도, 그 음식 이미지들은 독자를 원초적 행복감으로 이끄는 데 실패하지 않는다. 백석이 토속적 미각이라는 탯줄을 잃어버린 시원(始原)에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고형렬(高炯烈)의 「조태 칼국수」도 백석의 미각적 상상력과 궤를 같이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백석의 음식 이미지와 고형렬의 ‘조태 칼국수’는 차이를 지닌다. 명태잡이로 유명한 속초에서 성장한 시인에게 저 사나운 폭설에 머리와 꼬리를 처박던 조태는 “까닭없이 궁핍한 서울”의 을씨년스러운 공기를 이겨내게 하는 근원적 힘이다. 일기 사나운 날, 엉덩이를 들고 홍두깨로 밀가루와 바닷가의 눈발을 함께 반죽하고 있는 시인을 연상해보라. 을씨년스러움을 물리치는 경쾌한 반죽! 객지의 쓸쓸함과 궁핍함을 밀어내기 위해서 그는 유년시절에 경험했던 폭설과 거기에 온몸을 처박던 조태 생각이 간절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원초적 공간에 대한 향수가 자칫 불러오기 쉬운 신파적 감상이 제어되어 있다. 이 시의 미감은 감상적 눈물을 제어하려 하는 시인의 활기로부터 생겨난다. 이 활기는 눈물에 젖어 있는 여타의 향수 시편들과 「조태 칼국수」를 변별시키는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다. 그는 이 시에서 객지생활의 쓸쓸함과 그 쓸쓸함을 가로질러가는 내적 힘을 아우르면서 시적 긴장감을 획득한다. 다음 시 또한 「조태 칼국수」와 연장선상에서 읽히는 수작이라 할 수 있다.

 

그 황태 쓸개 간 있던 곳에서 눈 냄새가 나고 납설수 냄새도 나자 아버지 냄새가 났다 (…)

 

명태들이 삭은 이빨로 떠나는 새달, 그렇게 머리를 두드려 구워 먹고 초록의 동북 바다로 겨울을 보내주면, 양력 2월 중순에 정월 대보름은 달려왔고 우리 부자는 친구처럼 건태를 구워 먹고 봄을 맞았다 남은 건 내 몸밖에 없으나 새 2월은 그렇게 왔다 가서 이 시만 이렇게 남았다

—고형렬 「명태여, 이 시만 남았다」 부분

 

이 시에서 ‘명태’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한 가계의 유대를 상징하는 동시에 신춘, 새달, 정월 대보름, 새 2월 등 끝없이 새로운 날들을 이어놓는 시간의 매개를 상징한다. 겨울을 견디느라 “삭은 이빨”을 “초록의 동북 바다”로 보내주고 새로운 날들을 받아들이는 세대간의 아름다운 유대를 유년의 미각을 통해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남은 건 내 몸밖에 없”다고 고백하지만 이 시는 결코 침울하게 가라앉지 않는다. 그 몸은 겨울을 견디고 새봄을 받아들일 몸이고 새로운 시를 탄생시킨 몸이기 때문이다. 이 시도 「조태 칼국수」와 마찬가지로 감정을 제어한 담담한 어조로 시의 긴장미를 견인하고 있다.

문인수(文仁洙)는 삶 속에서 빚어지는 “길고 긴 뜨신”(「쉬」) 울음의 속내를, 그 농밀함을 포착하는 데 매우 비상한 감각을 지닌 시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뜨거운 울음을 우리 서정시가 주로 보여주었던 여성 편향적 목소리에 의존해서 호소하지 않는다. 문인수는 때로 질탕하고 호기있게, 때로는 굵직하고 대담한 사내의 목소리로 그 울음을 담아낸다. 이와 같은 그의 어조는 눈물이나 울음이 반드시 부드러운 여성 화자에 의해서 전달되어야 한다는 통념을 벗어나게 한다. 전반적으로 이러한 성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그의 여섯번째 시집 『쉬!』의 시적 지향을 한마디로 명명해본다면 ‘그늘의 현상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땔감으로 쓰는, 건디기라는 쇠똥덩어리가 있습니다.

쇠똥에 찰흙과 지푸라기 같은 걸 잘 섞은 다음

커다란 쟁반만하게 주물러 널어 말려 쓰는데요,

이 일은 주로 여인네들이 합니다. 그러니 이 쇠똥덩어리마다엔 어김없이

눈 깊어 안타까운 그늘,

그 무표정한 얼굴의 야윈 손자국이 낭자하게 말라붙어 있지요.

—문인수 「말라붙은 손—인도 소풍」 부분

 

눈물 훔쳐 물든 눈자위, 퉁퉁 부어오른 흉터 같은 것으로 기억하노니

아름다운 여분, 서쪽이 없다.

 

말하자면 나는 이미 그대 사는 곳의 서쪽,

이 집에 이사온 지도 벌써 십년 넘었다. 인생은 자꾸

한 전망 묻혀버린 줄 모른다, 몰랐다. 다만

금세 어두워져, 저문 뒤엔 저물지도 않는다. 어여쁜 친구여

무엇이냐, 분노냐 슬픔이냐 그 속 뒤집어

널어놓고 바라볼 만한 서쪽이 없다.

—문인수 「서쪽이 없다」 부분

 

빛의 이면에 감추어진 미세한 ‘그늘’을 절대 놓치지 않는 것! 이것이 삶을 읽어내는 문인수의 심정적 깊이이면서 타자를 이해하는 시선이라 할 수 있다. “건디기라는 쇠똥덩어리”에서 그가 가난한 인도 여인네들의 낭자하게 말라붙어 있는 손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 또한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이국적 풍습의 신기함이나 쇠똥덩어리의 불꽃 대신, 시인은 거기서 안타까운 삶의 그늘을 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삶의 현상적 외피를 꿰뚫는 시인의 지향이 묻어 있다. 그의 이같은 그늘의 현상학은 “서쪽이 없다”는 발견으로 심화되기도 한다. 인생의 “한 전망 묻혀버린 줄”모르는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여분, 서쪽”은 분노와 슬픔을 저 깊은 속으로부터 풀어낼 한바탕의 붉은 울음이라 할 수 있다. 울음의 마개를 열지 못한 채 컴컴하게 그늘져 있는 우리네 삶의 무거움을 그는 ‘서쪽’의 상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붉고 뜨겁게 펼쳐지는 울음의 장관을 살아보지 못한 채 자꾸 왜소해지기만 하는, 아니 각자 외로워지기만 하는 이 시대 우리의 초상이 여기에 담겨 있다.

백인덕(白寅德) 시의 가장 큰 미덕은 비장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집 『한밤의 못질』(참빛 2002)이나 『오래된 藥』(리토피아 2004)에서 발견되는 감상적 낭만성의 과도함이나 작품 수준의 편차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여주는 서정적 비장미는 간혹 지나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이는 그의 화자가 매우 구체적이고 생생한 음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즉 시적 상상 과정에서 다듬어진 매끈한 음성이 아니라 삶의 거칠고도 지리멸렬한 체험에서 발설되는 자기만의 음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시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의 비장미도 화자의 생생한 목소리가 교직되면서 획득된 경우라 할 수 있다.

 

쉴새없이 차량들이 들어가고 나오는

학교 앞 포장마차, 식어가는 떡볶이와 어묵을

들어가고 나오는 차량처럼 번갈아 씹으며

자정을 향한 늦은 밤, 이십여년 전의

그때처럼 난 혼자 되뇌였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

병원을 다녀야만 했을 시간을, 나는

풀리지 않는 숙취와 함께 학교를 다녔다.

그러므로 잘못 다녔다는 것이다. 거기

횔덜린도 있었고, 라깡과 아아, 헤겔도 있었지만

정작 내 손으로 꾸민 작은 정원은 없었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이미 다 식어버린 어묵 꼬치를 간장에 찍으며

내게 정원이 있었다면 어떤 나무와 풀,

가벼운 돌 몇개가 어떻게 놓여졌을지

꿈을 꾼다. 자정이 다 된 늦은 밤,

—백인덕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부분

 

자정이 다 된 늦은 밤에 “들어가고 나오는 차량처럼 번갈아”떡볶이와 어묵을 씹고 있는 이 피로하고도 궁핍한 서정적 자아는 거침없이 자기의 비루함을 노출시킨다. 들어가고 나오는 차량으로 직유되는 떡볶이와 어묵이라니! 이는 거칠고 숨찬 일상을 생생하게 함축해낸다.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나 어묵 따위를 씹음과 동시에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이 떠올려질 때 우적우적 씹어 삼킬 수 없는 존재의 비애감은 극치에 도달하게 된다. 우아함을 버린 이 비시적인 풍경의 생생함이야말로 시적이다. 여기에는 비천한 현실과 그 비천함을 건너뛰려 하는 서정적 주체의 비장함이 서려 있다. 풀리지 않는 숙취와 횔덜린, 라깡, 헤겔 사이에서 부대끼면서 자기의 황폐한 정원을 되돌아보는 패배자의 비관적 심연은 어둡지만, 그 어둠의 바닥을 치고 나오지 않는다면 그는 영원히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의 불안과 피로와 궁핍은 그런 의미에서 자기의 실종을 막아내려 하는 존재의 고투로 읽힌다.

고형렬, 문인수, 백인덕의 시편 외에도 위선환의 「一泊」(『현대시학』 2006년 3월호), 하종오의 「밥 먹자」(『지옥처럼 낯선』, 랜덤하우스중앙 2006) 또한 깊이 있는 서정적 울림을 유감없이 드러낸 작품으로 기억된다. 자세히 언급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