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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유주 韓裕周
1982년 서울 출생. 2003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달로』가 있음. ehcztein@hanmail.net
유령을 힐난하다
누군가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일까, 혹은 무엇일까, 아니면 아무도 아닐까. 속이 좋지 않았다. 수도꼭지를 잠글 때, 꼭지가 비틀리면서 끼이익, 하고 세 음절의 소리가 났다. 남아 있던 두어개의 물방울이 툭, 툭, 세면기의 매끄러운 표면 위로 떨어졌다. 수첩만한 창밖으로 비가 오고 있다. 창틀 위에서 빗방울이 새된 소리들로 부서지고 있다. 발가락 사이마다 물기가 고였다. 욕조에 걸터앉았다. 무수한 소리들 사이로 적막이 습기처럼 피어올랐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아무도 없다. 빛도 없고, 온기도 없고, 아무도 없지만, 누군가가 있다는 느낌에 등뒤가 서늘하다. 작은 창을 투과하는 희미한 빛으로 아직 가라앉지 않은 물의 입자들을 어림하다가, 문득 부끄러움을 느꼈다. 어서 물기를 닦고, 옷을 입고, 머리를 말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젖은 머리로 나다니면 의심받는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여전히 미심쩍다. 누구로부터의, 무엇에 대한 의심일까? 욕조의 배수구에는 마개 대신 노란 고무오리가 꽂혀 있다. 고무오리는 끔찍한 소리를 낸다. 날개를 비틀면 자지러지고, 목을 조르면 높이 웃는다. 가슴이 저릿해온다.
그에게 공포는 성장통과 같이 찾아왔다. 그의 부모는 그가 잠든 뒤에야 따로따로 돌아오고는 했다. 그의 부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모른다. 다만 짐작할 뿐이다. 주먹질을 당할 때에도, 매질을 당할 때에도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다만 짐작할 뿐이었다. 나는 누구일까? 저 사람……은 누구일까? 그러나 아무것도 질문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감정, 감정들. 두려움, 공포, 무서움, 불안, 혐오. 1994년은 여느 해보다 1초가 더 길었다. 달의 인력 때문에 지구의 시간이 가끔 그렇게 늦어진다고 했다. 일초가 늦고 있다고, 그는 벽시계를 볼 때마다 문득 중얼거리고는 했다. 윤초라고 명명된 일초의 시간을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살거나, 알더라도 곧 잊었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이 일초를 늦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부모는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지만, 그를 매우 답답하게 여긴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그는 부모를 두려워했다. 그의 어머니는 이제는 죽고 없는 옛 독재자에 대한 향수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식탁머리에서 종종 굶주림과 추위로 매몰되었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그는 아이였고, 어머니의 이야기가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없었지만, 겨우내 계속되는 배고픔에 대한 묘사에는 진저리를 쳤다. 그가 처연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면 그의 어머니는 네가 뭘 알겠느냐며 그를 비웃었다. 그는 부모가 보는 앞에서 잘 먹지 못했다. 밥알을 셌고, 구운 생선의 살점을 잘게 바수었다. 국에 뜬 기름방울들을 휘저었고, 죽은 동물들을 생각했다. 어느날 그가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뺨을 때렸다.
그는 끊임없이 흉터를 새기고 파헤치는 자비로운 시간들을 견뎠다. 슬픔과 분노는 한발의 총성과 같아서, 당시는 견딜 수 없이 괴롭지만 곧 잠잠해진다. 사람들은 가장 두려웠던 기억들을 심장의 밑바닥에 묻어둔 채 평생을 살아간다. 나도 그들……과 같이 태생적으로, 그렇게 살 수 있을까? 그는 나지막이 묻는다.
그가 어릴 때 가장 무서워했던 이야기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야기였다. 지나가는 여행자를 자신의 침대에 재운 뒤, 여행자의 키가 침대의 길이보다 모자라면 다리를 늘이고, 넘치면 자른다는 이야기였다. 그의 침대는 작았다. 아이용이었다. 밤이면 종아리가 아팠다. 키가 점점 크고, 그래서 침대의 끝자락이 가까워올수록, 그는 바로 누워 가만히 어둠을 노려보며 두 다리가 잘려나가는 상상을 했다. 상상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양 무릎을 한껏 가슴께에 붙이고, 숨쉬기도 힘든 자세로 불편하게 잠을 잤다. 귀를 기울이면 좁은 복도 하나를 사이에 둔 부모의 방에서 새어나오는 시계 초침 소리를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물이 하나쯤 쉼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안도했다. 도망가지 않겠다고, 그는 잠결에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가 꿈속을 헤매고 있을 때,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둠이 자신의 눈꺼풀을 내리누를 때, 다른 세상도 눈을 감는 것인지 그는 궁금했다. 잠들기 직전에 무엇엔가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는 일이 드물지 않게 있었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 그는 모니터에 나타나던 심박출량 그래프가 고요히 정지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파동이 조금씩 느슨해지고, 마침내 선분 하나로 수렴되자 사람들이 갑자기 오열했다. 깜짝 놀란 그는 울음을 터뜨렸다. 눈물을 흘리면서,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볼 수 없냐고 묻자, 아버지는 붉어진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비교적 침착하던 누군가가,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감각이 청각이라고 했다. 그가 하는 말을 고인이 들었을 거라고 했다. 그는 불현듯 두려워졌다.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밀치며 죽은이에게 달려들었다. 죽은이의 맏딸이었다. 그는 죽은이가 죽어 누워 있는 침대발치에 서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병실은 17층이었다. 하늘이, 거리가, 건물들로 빼곡한 지평선이, 도시가 멀리 보였다. 할아버지, 하고 그는 속삭였다. 죽은 사람은 어디로 돌아가나요? 죽은 사람의 몸에 남아 있는 암세포는 어디로 가나요? 그는 산 아버지의 죽은 아버지에게 마음속으로 물었다. 몇번인가의 힘겨운 수술에도 암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었다. 암세포가 위와 간과 장을 모조리 집어삼킨 뒤에 그들은 또 누구의 체온과 누구의 살을, 누구의 삶을 잠식할 수 있을까. 그는 궁금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을 에워싼 채 곡을 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죽음의 순간은 일초보다 길까, 혹은 짧을까, 측정할 수 있는 시간일까, 그건 영혼의 무게를 달아보려는 시도처럼 쓸데없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다지 슬프지 않았지만 쉽게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어머니가 그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괜찮아,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다. 어머니의 가슴이 몸에 닿았을 때, 그는 움찔했다. 그는 어색한 자세로 어머니의 포옹을 받아들였다. 그의 어머니 역시도 그다지 슬퍼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떤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어떤 감정들을 연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눈을 감으면서, 아버지의 아버지 유령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상상을 잠시 했다.
그는 묻고 싶었다. 아버지에 대해서, 어머니에 대해서. 기억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죽은 사람도 사람일까? 그리고 잊어버린 기억도 여전히 기억일까? 그는 수업시간마다 검은 칠판의 여백을 좇으며 생각에 잠겼다. 깜빡 잠이 들 때마다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대개 병사의 역할을 맡았다. 달리고, 넘어지고, 뛰어내리고, 헤엄치고, 총을 쏘고, 총을 맞고, 칼을 겨누고, 칼에 찔리고, 폭탄을 던지고, 지붕을 넘고, 건물을 부수고, 공격, 저격, 사격, 폭격, 추격, 그는 달리고 또 달린다. 총신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진다. 그는 자신이 어느 곳을 달리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에게 명령을 내린 사람이 누구인지, 그가 수행해야 하는 임무가 어떤 것인지도 그는 알지 못한다. 달리고 또 달리면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사막에서 흘린 눈물은 모래에 씻기며, 바다에서 흘린 눈물은 바닷새가 핥아간다. 꿈속의 그는 안도한다. 꿈은 투명해서, 그는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모든 얼굴들을 분명히 기억한다. 꿈에서 깬 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을 입가에 갖다댄 채 혈흔을 더듬는다. 손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그는 이마의 땀을 건성으로 닦으며 자신의 영혼과 잠시 휴전한다.
그에게는 전쟁의 기억이 없었다. 총을 쏘기는커녕 실물의 총을 쥐어본 일조차 없었다. 그러나 누구의 기억일까? 나는 어째서 그토록 익숙하게 움직이는 것일까? 그가 묻는다. 그는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했다. 머지않아 그는 징집될 것이었다. 아버지가 그의 어깨를 두드릴 것이었다. 어머니가 그를 다시 한번 끌어안을 것이었다. 그는 미래의 한 장면을 유감없이 떠올렸다. 미래는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그는 생각했다. 나는 지금, 물러설 수도 뛰어넘을 수도 없는, 시간의 최전방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머니와 아버지, 혹은 다른 어른들, 혹은 다른 사람들이 순진하게 믿고 있는 것처럼, 미래는 올까? 미래는 마치 지키지 못할 약속처럼 영원히 오고 있는 중이 아닐까? 그래, 마치 죽음을 맞이할 때의, 측정할 수 없는 시간의 한 단면처럼.
그는 점차 미래가 단지 확률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가 읽었던 어느 옛날이야기에 등장하는 고대의 어떤 사람들은 새벽이면 동쪽으로 난 창을 활짝 열고 커튼을 모두 젖힌다고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태양이 전날과 같이 떠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눈부신 태양빛에 머리를 조아리는 고대의 사람들을 생각하며 창문을 조용히 여닫고는 했다. 지구가 공전한다는 것이 알려지기 전, 내일도 해가 뜰 것이라는 믿음은 해가 어김없이 떠올랐던 어제의 기억에 의존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는 생각했다. 이제 그에게 아이용 침대는 터무니없이 작게 느껴졌다. 삽화에 그려진 프로크루스테스가 들고 있던 것이 도끼였는지 혹은 검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발 없는 사람, 발 없는 유령, 그는 눈을 억지로 깜빡여 쉼표 모양의 눈물을 두어 방울 흘렸다. 그는 깊이 잠들지 못했다. 가끔 가위에 눌렸다. 꿈을 꾸는 것이 두려웠고, 꿈에서 깨는 것이 두려웠다. 그가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을 때면 눈을 감지 않은 어둠이 그의 곁에서 다정하게 펄럭거렸다. 밤이 빛 속에 그림자를 흘려놓았다. 그림자는 나날이 커지고 커져 마침내 그의 방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1994년 이후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몇초를 늦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했다. 그렇게 언제까지나 타인들에 한발 못 미쳐 살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어느날, 그리고 어느날. 모진 꿈에 시달리다 일어났을 때, 그는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어느 여름날이었다. 7월이 끝나가고 있었다. 새벽녘이었고, 창밖으로 습기 가득한 어둠이 밀려와 있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답안지를 채점하며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그가 모르는 음악이 흘러나왔고, 그는 후렴구를 서툴게 흥얼거렸다. 선풍기의 날개가 맥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무심결에 기지개를 켜다가 창가에 내어놓은 장미 화분을 보았다. 꽃송이 하나가 막 떨어지려는 중이었다. 물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현관 쪽에서 덜컥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그쪽으로 잠시 시선을 던졌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웃었다. 왜 사람들은 낯선 소리가 들려오면 먼저 자세히 들으려고 하기보다 쳐다보기부터 하는 것일까? 그의 시답잖은 의문이 풀리지 않은 채 사라졌을 때, 조금 전의 소리가 다시, 좀더 크고 분명하게 들려왔다. 누군가가 문을 열려고 하는 것 같았다. 문고리를 쥐고 사정없이 비틀고 당기는 것 같은 소리였다. 맨발이었던 그는 발소리를 죽여 현관 쪽으로 다가갔다. 두터운 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낡은 현관문에는 방범창이 없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누구시냐고 물었다. 희미하게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문고리를 쥐고 연신 덜컥거리면서, 너무 추워서, 너무 추워요…… 이불 한채만…… 하고 맥없이 울먹였다. 소름이 돋았다. 어디선가 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참았던 숨을 조용히 길게 뱉어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이불 한채 정도의 여유는 있었지만, 선뜻 문을 열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등으로 땀이 흘렀다. 춥다고, 너무 춥다고, 이불을 달라고, 이불을 덮고 싶다고 애원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끊어질 듯 말 듯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는 허물어지듯 조용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철갑처럼 묵직한 현관문 밑의 틈새로 저릿한 냉기가 스며들어왔다. 그는 두려워졌다. 무릎을 당겨 두 팔로 감싸안았다. 누구일까? 여전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목소리의 주인을 동정했지만,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문득 지금이 7월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는 문 건너편에서 떨고 있는 누군가를 생각했고, 그러자 오한이 밀려왔다.
시간이 썰물처럼 지나갔다. 한참을 더 흐느끼고 있던 여자의 목소리는 점차 잦아들었고, 어둠이 물러가고 아침이 오면서 함께 가버린 것 같았다. 자신이 얼마나 웅크리고 있었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주변이 밝아졌다. 갑자기 라디오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몇마디의 외국어가 빠르게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고, 진행자가 그것을 큰 소리로 되풀이하는 소리를 들었고, 몇토막의 농담을 들었고, 씨그널 음악의 볼륨이 높아지는 소리를 들었고, 자기 자신이 울먹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일어나 몸을 추스르다가, 현관 바닥에 신발이 다 잠기도록 한가득 고여 있는 물웅덩이를 발견했다.
그의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왔다. 단순한 안부를 전하면서, 그는 간밤의 일을 이야기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목소리가 좋지 않다면서 걱정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는 아무 일도 없다고 했다. 아버지, 전 다음달에 베를린으로 가요, 하고 그가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잠시 놀란 것 같았다. 하필이면 왜 베를린으로 가냐고, 그의 아버지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그가 대답했다. 잠시 침묵이 자리한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그는 묻고 싶었다. 단지 세명뿐이었던 그의 가족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셋이었던 가족이 둘로 줄고, 이제는 그 둘도 저마다 다른 지붕을 덮고 잠든다. 그는 자신의 가족들이 서로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사랑했으며, 그 사랑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패에 실패했고, 그래서 자기 자신들이 아니라 증오를, 증오했으며, 폭력이 폭력을 가했던 것이고, 자신이…… 두려움을 두려워하고, 무서움을 무서워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의 아버지가 헛기침을 했다. 아버지가 아직까지도 아버지 역할에 과도하게 몰입하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이웃들에게, 동료들에게,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나에게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전화를 끊고 난 뒤, 그는 간밤에 찾아왔던 목소리의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의 머릿속에서 의문들이 곪아갔다. 일이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저녁에 연옥을 만났다. 일곱시가 지난 시각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던 햇빛 한줌이 연옥의 어깨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연옥은 다소 피곤해했다. 연옥의 두 눈 밑에 어둑한 그림자가 길게 매달려 있었다. 그는 맥주 한잔을 마시고픈 생각이 간절했다. 날벌레들이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요새는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어, 연옥이 말했다. 집에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아. 아무래도…… 틀림없어. 자려고만 하면 꼼짝없이 가위에 눌리는 거야. 견딜 수가 없어. 정말 뭔가 있어. 연옥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말없이 무방비상태로 놓여 있던 연옥의 왼손을 잡았다. 연옥은 살그머니 손을 빼내 눈가를 훔치는 시늉을 했다. 당신은 행복한가요, 편의점 앞을 지나면서 흘러나오고 있는 노래의 가사 한 구절을 그는 놓치지 않고 되풀이했다. 어젯밤에도 자려고 누웠는데 가위에 눌렸어. 이번에는 ……이 내 옷 속에 손을 넣었어. 너무 무서웠어, 너무. 그는 연옥의 말을 곰곰이 되씹었다. 그는 누구였을까, 그는 생각했다. 사람이기는 했을까. 그가 사람이 아닌 유령……임에 틀림없다면,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맥주를 마시면서 그는 연옥에게 베를린에 간다는 것을 알렸다. 연옥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잘 다녀와, 연옥이 심상하게 말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베를린이야?
참, 그런데 돌아오기는 할 거야? 연옥이 묻는다.
집에 돌아왔을 때, 웅덩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증발해버린 모양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없었던 게 아닐까? 집 안은 습하고 끈적거렸다. 비가 올 것 같았다. 그는 창가에 내어놓았던 화분들을 안으로 들이고, 빨래를 걷었다. 더운 바람이 들이쳤다. 라디오를 끄고, 잠시 고심하다가 오디오에 글렌 굴드의 음반을 걸었다. 오랜 시간 감금되어 있던 수인의 발소리처럼 음들이 묵묵히 걸어나왔다. 끊어질 듯 희미하게 들려오는 연주자 자신의 허밍소리를 그림자처럼 늘어뜨리고.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오디오에 시선을 고정했다. 눈을 감았다. 음……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게 나야, 나를 봐. 그는 중얼거렸다. 당신은 행복한가요, 그는 흥얼거렸다. 가스레인지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불을 올리면서, 그는 불꽃이 일어나는 짧은 순간 퍼지는 건조한 온기를 손바닥 깊숙이 받아들였다. 따뜻하다. 건전지 사는 것을 또 잊어버렸다. 벽시계는 며칠째 여섯시 십오분을 가리키고 있다. 로마자로 음각된 시간들이 빗돌처럼 마냥 정지해 있다. 찻잔에 설탕을 두 스푼, 세 스푼, 네 스푼을 연거푸 넣으면서, 그는 검지 끝으로 단맛을 탐한다. 물이 끓었다. 그는 열개의 발가락을 모두 발바닥 안쪽으로 오므렸다. 끈끈함이 묻어난다. 그는 잠시 자신이 외롭다고 생각했다. 찻물을 따를 때, 발갛게 달구어진 물방울들이 타는 소리를 냈다. 개를 한마리 길러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막이 가장 두려웠다. 당신은……
행복한가요, 그가 흥얼거렸다.
처음 글을 배우기 시작할 때, 그는 자신이 지르는 비명소리나 울음소리를 글자로 적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었다. 글로 쓸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비오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해지는 소리, 어둠이 오는 소리, 벽을 타고 전해오는 누군가의 웅얼거림, 어머니의 한숨, 아버지의 울먹임. 어린 시절의 그는 부모의 요구에 못 이겨 몇번인가 사랑한다는 말을 했었지만, 그때마다 혀가 입천장에 붙어 잘 움직이지 않고는 했다. 아빠가 좋으니, 엄마가 좋으니, 그의 부모는 종종 곤란한 질문을 던져놓고는, 선택을 강요했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는 했었다. 그에게는 선택할 권리가 없었다.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의심받을 것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그는 거짓말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가 점차 숙련되어가는 솜씨로 좀더 능란하게 거짓말들을 풀어놓으면, 그의 부모는 그의 양볼을 꼬집으며 크게 웃었다. 그가 거짓말이 아닌 사실들을 이야기할 때, 그의 부모는 그의 양뺨을 때리며 언성을 높였다. 어른이 되면 저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어린 그는 혼란스러웠다. 어느 꿈에서인가 고래를 낚을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고 거대한 거미줄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부모 양쪽을 모두 적당한 정도로 닮아 있었고, 그의 부모는 자식에게서 자신들의 생김새를 확인할 때마다 그를 사랑해야 할지 미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랬으리라고, 어른이 된 그는 생각한다. 나는 그들의 육체가 떨어뜨린 잉여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하기도 했다. 자기 자신을 누가 사랑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자기마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가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유년기의 그는 이처럼 아리송한 문제에 골몰한다. 나도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사람의 성향은 대물림되는 경향이 있다는 기사나 자료를 우연히 접할 때마다 그는 자신의 부모를 묵념하듯 조용히 미워하고는 했다. 나는 어떤 아버지가 될까? 장미와 씨클라멘 화분에 물을 주면서, 그는 식물과 같은 아이를 갖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최소한의 빛과 물로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아이와 함께 비가 오면 온몸의 세포를 열어 수분을 빨아들이고, 해가 나면 지붕 위에 누워 광합성을 하는 장면을 상상한다. 아이가 나를 닮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하다가, 나를 닮지 않아야 한다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연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잘 들어갔느냐는 그의 말에 연옥은 그랬노라고, 심상하게 대꾸했다. 무섭지 않아? 그가 묻는다. 뭐가? 연옥이 되묻는다.
베를린에서 아직도 장벽조각들을 팔고 있다면, 한개만 사다줘. 연옥이 말한다.
그건 왜? 가짜일지도 모를 장벽조각이 왜 필요하지? 그가 묻는다.
연옥은 잠시 입을 다문다.
가짜인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너도 단지 베를린이라는 기념품이 필요한 것 아니야? 그래서 하필이면 베를린에 가겠다는 게 아니야? 연옥이 빈정거린다.
그는 한동안 침묵했다. 연옥의 혀가 너무 뾰족하다. 네 집에 있다는 ……은 오늘 아무 기척도 없어? 그가 물었다. 혼자 있기 무서우면 여기로 와. 그가 말한다. 연옥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전화기 너머로 연옥이 어깨를 들썩이는 모습이 들려왔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무섭지만, 그래도 견뎌봐야겠어. 마침내 울음을 그친 연옥이 물기가 남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정말 사람인지 유령인지 다른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느끼는 고통은 진짜야. 고통은 정말 있어. 존재, 말이야. 그래, 모든 문제가 나 때문에 생기는 건지도 몰라. 나를 괴롭히는 것이 다른 무엇이 아니라 그저 내 영혼, 내 마음, 내 심장이라면, 내 두려움의 원인이 나라면 나을지도 모르겠어.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어. 나이 먹은 사람들이 하는 말들이 전부 거짓말은 아니었어. 연옥이 말한다.
연옥은 그에게 자신의 할머니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에서 연옥의 할머니는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길하지 않은 방향으로 이사를 했다. 이삿짐을 풀고 난 뒤, 연옥의 할머니는 피곤한 몸으로 자리에 누웠고, 곧 잠이 들었다. 그날 밤 꿈속에서 연옥의 할머니는 방문 앞을 서성거리는 남자를 보았다. 그 남자는 짙은 회색의 낡은 양복을 입고 있었고, 무슨 말을 하려는 것처럼 끊임없이 입가를 문지르고 있었다. 연옥의 할머니는 같은 꿈을 사흘 동안 꾸었고, 나흘째 되던 날, 한쪽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의사도 원인을 알지 못했고,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었다. 연옥의 이모들 중 한명이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갔다. 무당은 그 남자가 몹시 굶주려 있다고, 노잣돈을 좀 주어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연옥의 할머니는 얼마간의 돈을 헌납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다시 거동할 수 있었고, 꿈속의 남자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 이야기의 마지막이었다. 그 모든 이야기를 연옥은 반쯤은 믿고, 반쯤은 믿지 않는다고 했다.
죽은 사람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아.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미 죽었고,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될 테니까. 그런데 어째서 어떤 사람들은 죽은 다음에도 말끔하게 잊히지 않고 남아서, 산 사람의 음식과 산 사람의 체온을 탐하는 것일까? 어째서 죽은 자들의 욕망이 삭지도 않고 남아서, 산 자들의 목을 조르는 것일까?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그는 할아버지의 시신을 염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때 그는 그저 아이였다. 누군가가 그를 거칠게 밀치며 유리창에 몸을 붙인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것을 그는 기억한다. 삼베로 꽁꽁 매인 할아버지의 몸은 터무니없이 자그맣게 줄어들어 있었다. 암세포가 할아버지의 욕망과 원망까지도 씹어 삼켰었을까, 그는 생각한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면서 어떤 생각을 했었을까. 그는 생전의 할아버지를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내왕이 많지 않았고, 아버지가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도 드물었다. 어머니는 아예 어떤 이야기도 한 적이 없었다. 살아서 지옥이구나, 그는 중얼거렸다. 가끔씩 생생하게 되돌아오는 삶의 순간순간들이 선연했다. 불현듯 그가 종종 꾸던 꿈속의 풍경들이 되살아난다. 길게 자란 풀숲을 포복으로 헤치며 전진할 때 등뒤에서 섬뜩한 살기가 느껴진다. 손아귀에 총자루를 단단히 쥐고 침착하게 몸을 굴려 적의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적이 쓰러진다. 적의 군모를 젖혀 얼굴을 확인하면, 얼굴은 없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허공이 검은 피를 흘리고 있다. 그는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어난다. 다시 잠들었을 때, 얼굴을 감춘 하늘에 별들이 빛을 발한다. 그는 빨간 카펫이 혓바닥처럼 깔린 모래사막을 달린다. 모래알들이 동물의 눈알처럼 반짝거린다. 그들은 아직 죽지 않았다. 카펫이 끝나는 지점에 오아시스가 있다. 빈 수통의 마개를 천천히 비틀며 죽기 직전의 짐승처럼 물가로 다가간다. 물을 움키기 위해 몸을 구부렸을 때, 수면 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면, 얼굴은 없다. 야전모자와 덥수룩한 머리칼과 천으로 감싼 목덜미와 어깨의 견장까지, 그리고 땀방울들까지도, 모두 볼 수 있지만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가 정신없이 수면을 휘저어 텅 빈 얼굴을 흐트러뜨리려고 할 때 꿈을 깬다. 꿈은 그렇게 깨진다. 꿈의 파편들이 그의 살갗을 파고든다. 없으면서도 있는 이가 너로구나, 그는 중얼거린다.
어느 죽은 병사의 고된 기억이 자신 안에 들어와 살고 있다고, 그는 문득 생각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병사의 고통과 한이 망막에 고스란히 새겨지는 것 같았다. 타인의 기억이 우연의 빗장을 풀었다. 그때부터 그의 삶이 신음했다. 그는 부러질 것처럼 딱딱하던 할아버지의 왼팔을 떠올렸다. 할아버지의 왼팔은 의수였다. 어린 그는 할아버지의 가짜 팔이 마냥 신기했었다. 할아버지는 표정 없이 그를 바라보았었다. 그는 그날 보았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언젠가 천국은 지상과 정반대의 색깔을 가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이야기에서는 하얀 하늘에 검은 별들이 빛나고, 푸른 꽃들 사이로 자줏빛 강이 흘렀다. 그는 그곳이 지옥인지 천국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 풍경을 연상하며 놀라워했었다. 꽃잎으로 시간을 헤아리고, 얼굴이 아닌 영혼으로 서로를 알아보고 대화한다는, 그래, 꿈같은 이야기였다. 아버지…… 그는 낮게 외친다. 나를 놓아주세요. 당신은 행복한가요.
그게 너였구나, 그는 혼잣말을 한다. 그래서 나는 너였구나. 그는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흔한 말을 되새겼다. 네 것이던 슬픔이 내 것이 되었으니 우리는 좀 덜 슬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연옥을 안던 순간을 생각하며 혼잣말을 계속한다. 어머니…… 당신은 두렵지 않았나요. 나를 놓아주세요.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하게 살아 있었다. 그토록 싱싱한 삶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래서 삶은 불완전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연옥은 근시였다. 맨눈으로는 거의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 위해 잘 때도 안경을 쓰고 잔다고 했다. 그는 연옥의 고통이 고통스러웠고, 연옥의 두려움이 두려웠다. 그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절의 격전지들을 기억했고, 재가 된 영혼들의 무거운 그림자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어떤 지명들을 우연히 들을 때마다 그는 흠칫 놀라고는 했다. 먼 과거의 머나먼 과거가 그의 삶에 침입했다. 아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학교는 그에게 가르쳤다. 어제의 그는 감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의심하지만, 오늘의 그는 의심하는 자신까지도 의심한다. 하얀 하늘과 검은 별들을 그는 본 적이 있다. 꿈에서였다. 어디에 숨었는지 모를 적군들이 계속해서 조명탄을 쏘아올려 어둠을 찢었다. 창백한 하늘을 배경삼아 속도를 잃은 총알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그는 세상의 끝을 향해 깊이 파내려간 참호 안에서 그 광경을 목도한다.
두려운 것을 그저 두려워하리라. 끊임없이 시들고 피어나고 다시 시드는 감정들을 견디리라. 그는 생각한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물과 빛과 공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다소 의아하게 느껴졌었다. 다른 사람들, 그의 부모와 친구들과 지나쳐간 수많은 사람들도 그와 동시에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기도 했었다. 생의 뒷면에는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꿈이 자리하고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잠이 몰려오고, 꿈이 찾아오면, 우리는 잠시 죽고 다른 이들의 삶을 살 수 있다고, 그는 다소 아이처럼 생각하기도 했다. 그는 날마다 팽팽하게 부풀어오르는 자신의 지친 욕망들과 모진 기억들을 하나하나 똑똑히 들여다보았다. 피하지 않겠다고, 그는 되뇌었다. 나에게 오라, 나에게 오라. 어머니의 장례를 치를 때 그는 병원 계단참에 주저앉아 남몰래 많이 울었다. 그때 울고 있는 그를 보았던 유일한 사람이 연옥이었다. 우는 얼굴이 마치 가면 같았다고, 울면서도 웃는 얼굴 같았다고 뒷날 연옥은 말했다. 연옥이 그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병원에서 일하는 동안 연옥은 죽은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았다. 산 사람 역시도 곧 죽을 사람일 뿐이라고, 연옥은 말했다. 그래, 그저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라고, 그러니 억지로 산 사람을 연기하는 척하지 말라고, 당신은 살아 있다고,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연옥은 말했다. 언젠가 격무에 시달리던 연옥은 자신이 일하던 병원에 며칠간 입원해야 했었다. 그가 찾아갔을 때, 연옥은 환하게 웃는다.
연옥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생각한다. 언제부터 우리는 이렇게 틀어졌을까. 그는 자신이 사람……이 아닌 사랑을…… 사랑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화를 끊고 난 뒤 그는 마침표 모양의 눈물을 조금 흘렸다. 꿈에서의 그는 시간을 사살하는 사람이었다. 현실의 그는 시간에 살해당하고, 시간에 묻히는 사람이다. 그는 죽은 뒤에야 타인의 삶으로 돌아온 자들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은 자꾸만 어긋나는 삶과 죽음의 시간 속에서 억울하게 길을 잃은 사람……들이다. 그는 자신이 그들과 다르지 않다고, 그래, 온 생을 다해 격렬한 속도로 그저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간혹 사소한 욕망들이 삶의 언저리를 불안하게 서성거릴 뿐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언젠가 잊히지 않은 욕망들이 삶의 기념품이 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비가 오고 있었다. 그는 반쯤 닫았던 창을 활짝 열었다. 빗줄기가 안으로 들이쳤다. 창밖을 내려다보았을 때, 누군가가 두 손을 펼쳐 머리를 겨우 가린 채 천천히 뛰고 있었다. 그가 찰박찰박 빗물을 튀기는 소리, 오디오가 마지막 곡을 재생한 뒤 자동으로 첫 곡으로 돌아가는 소리, 어디엔가 숨어 있던 고양이가 기지개를 켜며 그에게 다가오는 소리, 전등 근처로 날아든 날벌레가 날갯짓하는 소리, 그렇게 되살아나는 생활이 발설하는 소리, 소리들을 그는 분명히 들었다. 그는 잊고 있던 고양이에게 밥을 주기 위해 눈물을 닦고 일어섰다.
그때였다. 다시 현관문이 사정없이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돌아왔구나. 가슴께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래, 너로구나, 그는 생각했다. 문을 열어야 할까, 그러나 그는 오늘도 잠시 망설인다. 문밖에 누군가가 있다. 주먹으로 힘없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철제 현관문이 흔들리고, 벽이 가냘프게 진동한다. 끊어질 듯 희미하게, 보이지 않는 이의 웅얼거림이 문틈으로 전해진다. 그는 가만히 문에 몸을 기대고 귀를 기울인다. 지독한 추위와 슬픔이 귓가에 들려온다. 문을 열면, 서 있는 것은 육체를 벗어난 욕망일까, 아니면 한여름에도 추위에 몸을 떠는 불행한 육신일까, 아니면 부주의한 동정심으로 문을 열게 하는 악한 손일까. 어느 쪽이든, 문밖의 이가 절박한 영혼임에는 틀림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당신은 불행한가요, 그가 묻는다. 그는 여전히 문에 몸을 기댄 채로 문밖을 더듬는다. 그는 여전히 두려움에 결박되어 있는 자신을 비난한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그가 묻고 있다. 당신은 불행한 사람인가요.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왼손으로 악수라도 하는 것처럼 자물쇠를 감싸쥐었다. 문을 열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빗소리만이 열린 창문을 통해 들려오고 있다. 음악도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시계는 여전히 여섯시 십오분을 가리키며 숨이 멎어 있다.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 와 서성거린다. 고양이가 그에게 무심한 눈길을 던진다. 그래, 문밖에 누군가가 있다. 그는 나일지도, 너일지도, 그리고 당신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손끝으로 전해지는 차가운 기운을 가만히 받아들인다.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