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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사과

1984년 서울 출생. 2005년 제8회 창비신인소설상 수상.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재학중. dryeyed@gmail.com

 

 

 

준희

 

 

팔월 십사일 월요일 오전 여덟시 오늘도 나는 학원을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거리로 나서자 열다섯개가 넘는 태양이 나를 향해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나를 위협했습니다. 덮쳤습니다. 계속해서 나를 따라오며 콕콕 쑤셔댔습니다. 나는 재빨리 전철에 올라탔습니다. 창밖으로는 검은 선들이 높아지고 또 낮아지며 느긋하게 전신주와 전신주 사이를 오갔습니다. 나의 시선도 검은 선들을 따라 낮아지고 또 높아지며 무료함을 달랬습니다. 갑자기 사람들이 목이 터져라 다이내믹 코리아를 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꽹과리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붉은 악마들의 함성이 스타디움을 가득 채웁니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케이비에스 제일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국정홍보방송이었습니다. 여자 아나운서가 뉴스를 시작하였습니다.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작아지고 이어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전동차 내 방송장비 고장으로 구로역에서 정차하겠습니다 반대편에 의정부북부행 전동차가 대기하고 있사오니 모든 승객은 빠짐없이 전동차를 갈아타주시기 바랍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전동차 내 방송장비 고장〉 여자 아나운서는 안내방송에 아랑곳하지 않고 뉴스를 진행하였습니다. 지난밤의 집중호우로 인해 인천시 부평구 산곡동 일대가 물에 잠겼다고 합니다. 전철은 구로역을 향해 천천히 진입합니다. 나는 일어섭니다. 천천히 반대편 승강장을 향해 걸어갑니다. 바쁜 사람들이 나를 밀치고 뛰어갑니다. 하늘이 흐립니다. 나는 서둘러 계단을 뛰어내려오는 사람들의 틈에서 준희를 발견하였습니다. 시야가 무채색으로 건조하게 바스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흐린 하늘에 크롬빛 안개가 몰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 환상을 보았습니다.

 

〈좀 크게 말해봐 아니 안 들려〉 〈바빴어 요즘 좀 바빴어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 〈엄마 나 재즈댄스 배우고 싶어 그리고 병원에 좀 가야겠어 머리가 아파 너무〉 〈눈에 촛점이 안 맞는 것 같고요 버스 손잡이가〉 〈너 아프다며 니 친구가 연락 왔어〉 〈엄마 엑스레이를 찍어야겠대〉 〈죽고 싶다며?〉 〈아니야 안 아파〉 〈아니요 안경 안 써요〉 〈어 죽고 싶은 거지 아픈 건 아냐〉 〈별 이상은 없고 단지 스트레스〉 〈그게 그거지〉 〈그게 왜 그게 그거야〉

 

평일 아침 병점행(行) 전철은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덜컹덜컹하는 소리 사이로 햇살이 나른하게 쏟아져 들어옵니다. 나의 무릎은 알맞게 데워집니다.

 

〈아프면 나한테 연락을 하지 왜 다른 사람한테 그래 남자친구의 의미가 뭐야? 왜 죽고 싶은 건데?〉 〈아니 안 죽고 싶어〉 〈그럼 뭐야? 정말 어디 아프냐?〉 〈그냥 슬퍼서〉 〈너 오늘도 담임한테 맞았구나〉 〈학원 다니니?〉 〈어떻게 알았어?〉 〈너 맨날 맞잖아〉 〈아니요〉 〈근데 너 갈수록 이뻐진다〉 〈선생님 저는 소금물 농도 구하는 문제가 너무 짜증나요〉 〈그런가 그렇군 생각해보니 그러네 아아 새끼 그 새끼는 맨날 나만 때려 좆같은 새끼 존나〉 〈뭐?〉 〈잘 봐 여기 직각으로 선분을 그으면 이등변삼각형이 되지? 그럼 선분 A와 선분 C의 길이가 같으니까〉 〈뭐라고?〉 〈가만히 있어봐 넥타이가 비뚤어졌네〉 〈선생님〉

 

그것은 분명히 준희였습니다. 준희는 회색 스트라이프 정장을 입고 검정색 가죽 크로스백을 메고 있었습니다. 앞머리는 삐죽삐죽 세워 스프레이로 고정시켜놓았습니다. 오른쪽 네번째 손가락에 굵은 금반지가 빛나고 있었습니다. 한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목에는 엠피쓰리플레이어를 걸고 있었습니다. 그런 준희가 의정부북부행 전철에 의정부북부행 전철에 올라탔습니다. 나는 가만히 보고만 있다가 전철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전철이 떠납니다. 준희가 멀어집니다. 나는 안심합니다. 계단을 올라갑니다. 병점행 전철이 도착합니다. 집으로 돌아옵니다.

 

준희와 나는 육교 한가운데에 서 있습니다. 하늘은 로마의 밤하늘 빛깔로 아름답습니다. 준희와 나는 키스를 합니다. 밑으로는 철로가 네개나 지나가는 근사한 장소입니다. 철로는 저멀리 휘어지며 다가오기도 하고 곧게 멀어져가기도 합니다. 그 키스는 나의 첫키스였고 우리의 첫키스였으나 준희의 첫키스는 아니었습니다. 혹시 키스하기 직전에 내가 육교 계단에다가 잔뜩 토했던 것을 기억하나? 토에서는 김밥과 양념통닭의 맛이 났습니다. 준희와 나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은 시내의 술집에 모여 술을 마셨습니다. 특히 내가 제일 많이 마셨습니다. 나는 어지럽다는 핑계로 준희의 무릎에 누워버렸습니다. 나는 기분이 아주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한편 머리가 깨질 것같이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습니다. 준희는 휘청거리는 나를 다정하게 부축해주었습니다. 준희는 다정하게 나의 등을 두드려주었습니다. 내가 육교 계단에 주저앉자 준희는 편의점으로 달려갔습니다. 나는 준희가 내민 생수로 입을 헹구었습니다. 준희는 나를 육교 한가운데로 끌고 갔습니다. 준희는 몹시 흥분한 듯 보였습니다. 나는 선언하였습니다. 〈생리 삼일째〉 플레이텍스사의 탐폰이 나의 질의 입구를 틀어막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준희는 전혀 실망한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삼일째라고?〉 〈응〉 말려올라간 교복치마를 끌어내리며 나는 대답하였습니다.

 

그때 나에겐 오직 준희뿐이었습니다. 친구도 별로 없었어요. 준희는 거의 나를 파먹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준희는 배가 고파 보였습니다. 외로워 보였습니다. 내 생각에는요. 그래서 내가 준희를 먹였어요. 내가 준희를 먹여 키웠어요. 나는 그냥 내 나이에 걸맞은 짓을 하고 다녔던 겁니다, 철이 없었어요, 하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거짓말이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나요? 나는 내가 준희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봐요. 준희는 바쁘다고 하였습니다. 언제나 바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점점 더 바빠졌습니다. 준희는 빛의 속도로 걸어다니고 빛의 속도로 밥을 먹고, 그렇게 바빴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와 만날 시간이 없었던 겁니다. 그렇게 준희는 빛의 속도로 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준희와 나는 수직으로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만났는데, 만났기는 만났는데, 그러고는 끝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시작인 줄만 알고 무진장 기뻐서 사실 부끄럽게도 아이 씨발

우리는 만났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준희는 나를 별로 만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절망에 빠졌습니다. 울었습니다. 그건 다 준희 탓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준희가 나의 괴로움을 알지 못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는 나를 그저 스쳐지나갈 뿐인 거고 아무한테나 우리 이야기를 하고 다녔잖아요? 나는 그것도 별로 상관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다 준희의 탓입니다. 그래 아니 정말 다 준희의 탓인가요. 네가 나를 시시한 중학생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압니다. 하지만 시시한 고등학생이었던 것은 너도 마찬가지였잖아요. 시시한 중학생과 시시한 고등학생이 만나 시시한 연애를 한다 그런 일은 아주 많지 너무 많아서 이제는 시시하지도 않잖아요 너는 시시하지도 않아 진짜 시시하지도 않아 이 나쁜 놈아 너는 먼지 나한테는 먼지밖에 안돼 먼지가 온통 몸에 달라붙어 있어 코끝이 간질간질해서 뒈져버리겠어 그러니까 나는 너무 끈적끈적해져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너는 나에게 달라붙은 거예요 너무 많이 달라붙을 수 있었던 거예요.

하지만 그때는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불투명한 유리 너머에서 빛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투명한 유리가 모든 것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희미하게 아른거렸습니다. 어떤 것은 오렌지색으로 어떤 것은 멜론색으로 아름답게 아른거리기는 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불투명한 유리가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깨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나를 깨뜨리는 것보다는 준희를 깨뜨리는 것보다는 유리를 깨뜨리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랬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지나간 일입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너와 나는 연애를 한 것이 아니다 너는 나에게 범죄를 저지른 것뿐이다〉 아 뭐 대부분의 연애는 어느정도 범죄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집행유예나 백이십시간 사회봉사명령 정도인 거예요. 하지만 나는 너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싶습니다. 아니면 이백삼십육년형 정도를요. 너는 말하겠죠. 〈우리는 그저 연애를 한 것뿐이다 나는 이제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기억이 안 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이 씨발놈아) 그냥 어린 시절의 추억쯤으로 생각하면 좋잖아 불투명한 유리 너머의 아른거리는 불빛이 신경 쓰인다면 내가 해결해줄게 내가 두께 십오 쎈티미터의 콘크리트 벽을 설치하여줄게 그러니 그만 잊어 우리는 그저 연애를 한 것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그저 연애조차 하지 않았다〉

그 모든 기억들은 듀오톤으로 아름답게 남아 있습니다. 하나는 쎄룰리언블루이고 하나는 버밀리언입니다. 두 가지 색깔밖에는 없습니다. 드디어 나는 색을 복원하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나에게? 그것은 더이상 나에게 괴로운 기억이 아닙니다. 그것은 더이상 나에게 부끄러운 기억이 아닙니다. 나는 단지 복수가 하고 싶을 뿐입니다.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기억에 대한 복수가 될 수 있을까요? 타임머신을 이용하지 않고도 과거의 너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현재의 나는 과거의 너에게 다가갑니다. 〈잘 봐 너는 과거이다 잘 봐 나는 네가 이렇게 듀오톤으로 보일 정도로 아주 총천연색으로 살아가고 있다 잘 봐 나는 현재에 살고 있지 멋지지 않나? 과연 너는 과거다 숨이 막혀 너의 그 노스탤지어가 너의 그 쎄피아빛 추억이 토할 것 같아 아 나는 토해주겠어 나의 토는 너의 그 아련한 쎄피아빛 배경을 따라 질질 흐르게 될 것이다〉 나는 현재의 너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내 관심은 오직 과거의 너입니다. 너는 앞으로 남은 인생을 과거에 갇혀서, 쎄룰리언블루와 버밀리언 사이에 끼어서, 그 두 가지 색깔만 존재하는 세계 안에서 그 두 가지 색깔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바로 내가 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그런 식으로 너를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분명 사랑이었습니다. 그 희뿌연 수증기를, 숨 막히던 공기를, 두 뺨을 짓누르던 무게를, 그것을 사랑이 아니라면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그때 우리는 어렸고 물리방정식만큼 순수하였습니다. 나는 순수하게 너를 사랑하였고 너는 그만큼 순수하게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겁니다.

 

〈선생님은 왜 그렇게 저를 미워하세〉 내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몸이 뒤쪽으로 이 미터 정도 이동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이 미터. 나는 교무실의 왼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화이트보드까지 밀려갔습니다. 그가 한번 더 내 뺨을 후려갈기자 나는 더이상 갈 곳이 없어서 화이트보드에 등을 세게 부딪쳤습니다. 나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의 얼굴은 붉게 번들거렸습니다. 왜 나에게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일까? 왜 이렇게 화가 난 것일까? 나는 정말 혼란스러웠어요. 가장 놀라운 것은 그 세대의 손찌검에서 내가 쾌감을 맛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천국을 살짝 엿보고 온 것 같은 기분에 하하 나는 양손으로 부풀어오르는 뺨을 감싸안고 바들바들 떨며 한대만 더, 제발 한대만이요, 사정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의 얼굴을 살펴보니 그러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는 엄마에게 내가 학교 홈페이지에 김은철 개새끼라고 쓴 것도 다 불어버렸습니다. 김은철은 그의 이름이고 그는 나의 담임선생이었으니까 그는 참을 만큼 참았던 거지만 그렇다고 그걸 다 불어버리다니 이 비열한 새끼

 

엄마와 신경정신과에 다녀온 다음날 나는 늦잠을 잤다는 핑계로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예쁘게 교복을 차려입고 엄마에게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한 뒤 근처 게임방으로 향하였습니다. 한참을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데 담배가 떨어진 겁니다. 나는 빈 담뱃갑을 새우탕 큰사발면 용기 안에 쑤셔넣고 내 뒷자리 워크래프트에 열중한 남자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저기 담배 한대만 빌려주시면 안될까요?〉 〈꺼내가세요〉

삼십분쯤 지났을까 나는 몹시 화가 난 상태였습니다. 게임을 연속해서 일곱번이나 졌기 때문입니다. 때맞춰 부반장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담임선생님이 내 책상과 의자를 복도로 집어던졌다는 겁니다. 나는 내 짝에게 문자를 보내 책상서랍 안에 있는 보그걸 9월호와 20세기 소년 5, 6권을 사수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곧바로 답장이 왔는데 보그걸은 사수하였으나 만화책은 빼앗겼다는 겁니다.

나는 핸드폰을 향해 욕을 하고 재떨이에 가래침을 뱉은 다음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하였습니다. 자유게시판으로 가서 글쓰기를 클릭하였습니다.

〈fontsize〓5〉〈b〉 김은철 개새끼 〈/b〉〈/font〉

딱 한마디만 했습니다.

익스플로러 창을 닫는데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나에게 담배를 빌려준 고마운 뒷자리 남자의 손이었습니다. 〈나 지금 밥 먹으러 갈 건데 배고프지 않니?〉 〈아저씨 몇살이야?〉 〈나 칠이년생밖에 안돼 아저씨라고 부르지 마 기분 나빠〉 〈아 그래? 나는 어제 새벽까지 술 존나게 푸다 와서 속쓰려 죽겠거든 성질 부리기 전에 꺼져 나 원조 안해 용돈 필요없어 나 돈 많아 그런 년 찾는 거면 저기 행길 건너 사거리 주차장 아래로 가보던가 미친년들 존나 많으니까〉 〈해장국 사줄게〉 순간 주머니 속 내 핸드폰이 진동하였습니다. 나는 문자를 확인하였습니다. 〈담임이 너 퇴학시키겠대〉

 

(나는 울고 있습니다 준희가 보고 싶어요)

 

너는 정말 구제가 불가능한 인간이야 아니 니가 인간이기는 하냐 이 그래프를 좀 봐 사회성이 팔이라고 도대체 평균이 오십사고 제일 낮은 녀석도 십구야 그런데 그 십구인 녀석이 누군지 아니? 정은호! 정은호라고 그 약간 모자란 정은호 아이큐가 팔십칠인 정은호도 사회성이 십구가 나왔는데 너는 도대체 뭐야 뭐가 어떻게 된 애야 장난으로 풀었니 그냥 찍은 거야? 대답해봐 도대체 뭐가 문제야 게다가 이것 봐 독립성은 구십구가 나왔어 어이구 그래 독립해라 학교는 뭐 하러 다니니 너는 정말 내가 본 학생 중에 가장 저질이야 이기적이고 비타협적이고 협동심 없고 무례하고 도전적인데다 내 십팔년 교직인생에서 너 같은 아이는 처음이다 놀라워 너는 정말 불쾌해 그런 눈빛으로 선생님을 바라보는 게 아냐 그런 표정으로 비스듬하게 의자에 기대서 수업을 듣는 게 아니란 말이다! 도대체 네 부모는 너를 어떻게 키운 거냐 혹시 네 어머니 진짜 어머니가 아닌 거냐 말해봐 솔직히 집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지? 성적은 또 왜 이렇게 떨어지니 한문선생님이 그러시더라 너 오엠알카드 마킹 삼번으로 통일했다며 주관식 답은 아예 적지도 않았지? 점수가 십육점이 뭐야 너 정신이 있니 없니 이런 식으로는 여상이야 여상밖에 안돼 너 어느 여상 가고 싶니 기술 배우고 싶어? 공순이 할래? 너 앞으로 이유리랑 놀지 마라 너 때문에 이유리도 성적 떨어진 거 알지 너 삼청교육대라고 들어봤니 전두환이 누군지 알아? 광주사태 들어봤어? 너도 그런 걸 좀 당해봐야 한다 삼청교육대 같은 데 끌려가봐야 세상이 무서운 줄을 알지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봐 어디 한번 잘되나 두고보자 네가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가는지 너는 안돼 두고봐라 너 같은 인간이 바로 실패자라는 거다 너는 정말로 전형적인 실패자가 될 거야 지금은 세상이 참으로 우스워 보이지? 만만한 것 같지? 하지만 곧 알게 될 거야 알겠니? 알아들었으면 가봐 수업종 쳤잖아 이번 시간이 무슨 시간이니? 제발 수업시간에 좀 고분고분하게 굴어 빨리 가보라고 아니 필요없어 안 받아 너한테 인사 같은 거 받기도 싫어 뭐 하고 있어 수업 시작이잖아 뛰어가라고 어서

 

〈남자친구 있니〉 〈있어요〉 〈몇살이야〉 〈나보다 한살 많아 오빠예요〉 〈고등학생?〉 〈응 고등학생〉 〈어느 학교 다니는데?〉 〈말하면 알아요? 사진 보여드릴까요?〉 〈아니 됐어〉

〈무서워요〉 〈뭐가?〉 〈제 남자친구요 성격이 더러워요 여자도 때려요 나는 안 맞아봤지만〉 〈나쁜 놈이구나〉 〈네 씹새끼예요 그런데 화 안 나면 착해요〉 〈나도 화 안 나면 착해〉 〈아저씨 근데요〉 〈너 왜 갑자기 나한테 꼬박꼬박 존댓말 하니〉 〈하지 말까요?〉 〈응 하지 마〉 〈왜요〉 〈그냥, 아저씨 같잖아〉 〈오빠라고 불렀으면 좋겠지?〉 〈아니야〉 〈거짓말〉 〈아니라니까〉 〈아저씨랑 나랑 몇살 차이 나는지 알아요? 칠이년생이라고 했나? 담배 한대 피워도 돼요?〉 〈우리 맥주 마시러 갈까〉 〈저 맥주 싫어해요〉 〈그럼 뭐〉 〈소주 마셔요 맥주는 마셔도 취하지를 않아서 근데 아저씨 뭐 하는 사람이에요〉 〈나? 근무해〉 〈무슨 근무?〉 〈공익근무〉 〈너 방위냐 깔깔〉 〈야 웃지 마 오늘 뭐 해? 집에 언제 들어가? 남자친구는? 안 만나?〉 〈못 만나요〉 〈왜〉 〈면회 갔어요〉 〈무슨 면회?〉 〈몰라 친구가 잡혀갔대요〉 〈왜?〉 〈집 털다가 걸려서〉 〈그럼 오늘은 약속 없는 거야?〉 〈그러네 썅 근데 일찍 들어가야 돼요〉 〈왜?〉 〈옷 갈아입고 학원 가야 돼〉 〈옷 갈아입고 나랑 놀자〉 〈하〉 〈가지 마 술이나 먹자〉 〈아저씨 술 진짜 좋아한다〉

 

〈차라리 전학을 가라〉 〈싫어요 제가 왜 전학을 가야 되는데요?〉 〈너 때문에 반 분위기가 다 망가지잖아 내가 학교 알아봐줄 테니까 좋은 학교로 알아봐줄 테니까〉 〈싫어요〉 〈왜 싫은데?〉 〈싫으니까 싫죠〉 〈도대체 나보고 어떡하라고! 응? 제발 나 좀 살려주라〉 〈싫어요 안 가요〉

 

〈남자친구랑 자본 적 있어?〉 〈아니〉 〈몇번이나?〉 〈글쎄〉 〈많이?〉 〈많이가 몇번인데?〉 〈한번?〉 〈아니〉 〈그럼 몇번?〉 〈세번?〉 〈세번 잤다고?〉 〈아아 그런가?〉 〈야 저기 어때? 저기 들어갈까?〉 〈뭐냐 지금 나보고 저 후진 델 가자고? 분명히 방 한가운데 형광오렌지색 원형침대 같은 게 있을걸〉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가봤거든〉 〈그래? 너 저기 가봤어? 언제? 누구랑?〉 〈아 짜증나 아저씨 零케 후지니 야야 나 집에 갈래〉

 

〈너 학교 그만둔다며〉 〈그래 매점 냉면이 그리워질 거야〉 〈그만두지 마 내가 맨날 냉면 사줄게〉 〈정말?〉 〈그래〉 〈진짜지?〉 〈진짜라고 그러니까 자퇴하지 마〉 〈진짜?〉 〈알았다고!〉 〈왜 소리를 질러!〉 〈아니 그게 아니라〉

〈근데 있잖아〉 〈있잖아 뭐〉 〈한가지만 말해주라〉 〈뭘?〉 〈너 준희랑 잤냐?〉

〈왜 대답이 없어〉 〈그럼 너도 한가지만 말해줘〉 〈뭘?〉 〈너 나 좋아하니?〉 〈말해봐 너 나 좋아하지? 어때? 아니야?〉 〈아니 좋아해〉 〈안 좋아한다고?〉 〈아니이 좋아한다고〉 〈그래? 말해줘서 고마워 그니까 나도 말해줄게 나 준희랑 잤어〉 〈몇번이나?〉 〈장난해? 몇번이냐니?〉 〈아니야 장난 아냐 몇번이나 잤는데 말해줘 알고 싶어 나도 말해줬잖아〉 〈서른세번〉

〈서른세번이라고! 믿겨져? 내가 준희랑 서른세번 잤다는 게 믿겨져? 그래? 믿을 수 있겠어? 너 믿어? 정말 믿는 거야? 내 말 믿어? 어디 가? 야 어디 가 냉면 사준다며?〉 〈담배 피우러〉 〈야 어디 가 냉면은 사주고 가야지 아니면 돈으로 주던가 이 새끼〉

 

남자와 나는 에메랄드모텔로 들어갔습니다. 삼백십이호의 문을 열자 놀랍게도 형광오렌지색 원형침대가 우리를 맞이하였습니다. 남자가 나를 돌아보았습니다.

남자는 러닝셔츠를 벗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피임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복도에 있는 콘돔자판기를 가리켰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나는 다시 한번 복도에 있는 콘돔자판기를 가리켰습니다. 남자는 나를 침대에 눕혔습니다. 남자는 나의 다리를 높이 들어올렸습니다. 활짝 벌렸습니다. 남자는 나를 바닥에 무릎을 꿇게 하였습니다. 남자는 침대에 걸터앉았습니다. 아니 남자는 침대에 걸터앉은 다음 나를 바닥에 무릎을 꿇게 하였습니다. 남자는 내 머리를 끌어당겼습니다. 깊숙이 끌어당겼습니다. 나는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랐습니다. 나는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허둥지둥하였습니다. 남자는 나를 다시 침대에 눕혔습니다. 나는 눈을 감았습니다. 나는 남자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남자가 나를 다시 뒤집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헐떡거렸습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모든 것을 행동으로 요구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행동으로 지시하였습니다. 남자는 양손으로 내 가슴을 움켜잡았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모든 것에 행동으로 동의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행동으로 수긍하였습니다. 나는 지치고 피곤하였습니다. 남자는 다시 나를 바닥에 무릎 꿇게 하였습니다. 남자는 샅샅이 핥아주는 것을 바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마침내 남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길건너창녀촌에가면삼미슈퍼에서꺾어서왼쪽으로세번째집이층가장끝방에정말로죽이는여자가있지여자는몸이검고가슴이축늘어져덜렁덜렁거리지만그여자는내가아는가장죽이는여자다왜죽이는지알고싶나내가말을해줄테니멈추지말고계속해그여자가죽이는이유는말이지아아좀살살좀할수없겠어?여자는무릎을꿇고앉아긴긴시간나를감미롭게하여주었다여자는전문가야그것은쉽게따라아아아 아아 아아아으음따라아할수없는경지이지왜냐하면그여자는잇몸으로애무를하거든여자는이가없거든몽땅빠져버렸거든돈을두배로지불하면그붉은잇몸으로온몸을샅샅이애무하여준다여자의이가다빠져버린이유는추측이분분하다여자는못생기지않았어그닥늙지도않았다평소에는멋진틀니를끼고멋지게할리우드미소를지을수도있다고도한다그러나나는그것을본적이없지나에게꿈이있다면그것은여자를하나사서이를다뽑아버리는거야그리고데리고살거야평생옆에끼고살거야밤마다온몸을샅샅이애무하게할거야그렇게만들거야매일밤그런쎅스를할거

갑자기 남자가 입을 다물었습니다. 남자는 내 입 안에다 사정을 하였습니다. 나는 황급히 머리를 빼려고 하였으나 남자가 내 머리를 꼭 누르고 놓아주지를 않았습니다. 남자는 나에게 그것을 삼키기를 요구하였습니다. 남자는 나에게 그것을 사삼키기를 요구하였습니다. 나는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남자는 웃고 있었습니다 웃고있었습니다위기에처한배트맨을바라보는악당조우커같이환하게웃고있었습니다남자의미 소는 몹 시파랗고선 명하였습니다. 나는 그것을 꿀꺽 삼켰습니다.

 

〈그만두겠다고 학교를?〉 〈네〉 〈네가 반에 몇등으로 들어왔지? 지금은 몇등이지?〉 〈예?〉 〈너 이번 중간고사 반에서 삼십일등 한 거 알고 있니? 방학 때는 집도 나갔었지? 모를 줄 알아?〉 〈그걸 어떻게 아세요?〉 〈학교 그만두고 뭐 할 건데?〉 〈모르겠어요〉 〈계획도 없이 그만두겠다는 거야? 좋은 고등학교에 가야지 그래서 좋은 대학에 가야 하지 않겠어〉 〈모르겠어요〉 〈네가 학교를 그만둔다니 아까워 곧 후회하게 될 거야 하지만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너를 견딜 수가 없어 목마르지? 포도봉봉 줄까?〉 〈네〉 〈선생님 저는 유학이나 가려구요〉 〈사물함은 다 비웠니?〉 〈선생님 만화책 돌려주세요〉 〈그게 나한테 하는 작별인사냐?〉 〈돌려주세요 빌린 거란 말이에요〉 〈유학을 간다고?〉 (죽여버릴 거야) 〈그래 어디로?〉 〈카자흐스탄〉 〈뭐?〉 〈네덜란드라구요〉 〈네덜란드? 뜬금없이 웬 네덜란드? 허 뭐 나쁠 것도 없지 너는 우리나라 정서에 안 맞아 아니 우리나라가 너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해두자 그래 차라리 유럽으로 가라 가서 유럽 남자 만나서 결혼하고 애 낳고 그리고〉 (개새끼 죽여버릴 거야) 〈뭐? 안 들려 웅얼거리지 좀 말고 크게 말해〉 〈배가 고파서요〉

나는 교탁 위에 놓인 하늘색 머그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것들 특히 빨간색 연필 뒤에서 파랗게 빛나고 있는 커터칼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에 온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 이거 가지고 가서 읽어봐라 좋은생각이라는 잡지인데 너의 정서순화에 도움이 될 거야 그래 자퇴생의 꼬리표가 평생 너를 따라다니게 되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개새끼 정말 (살도록 해 그러나 어딜 가더라도 대마초가 허용되어 있는 자유로운 나라에서 살게 되더라도 너 정말 계속 이런 식으로 건방지게 굴다간) 아무래도 저 눈동자를 잘라내야겠다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 저 입술을 도려내야겠다 뺨을 잘라내야겠다 혓바닥에 칼집을 내야겠다 그래야겠다 목동맥을 잘라버려야겠다 아 잠깐만 기다려봐 죽여버릴 거야 눈꺼풀을 동그랗게 동그랗게 오려서 먹여버리기 전에 제발 좀 시끄러워 멀리 꺼져버릴 수가 없니 닥치라고 도대체 너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죽고 싶은 거야? 왜? 왜 나한테 죽고 싶은 거야? 왜? 그 얘기를 좀 들어봐야겠다고 이 씨발새끼야 닥치라고 좀 머리가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다 네가 아직은 어리고 학교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있어서 모르겠지만 세상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절대로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살다간 점점 주위에서 친구가 사라져갈거다 두고봐라 내 말이 맞는가 틀리는가 너는 혼자 남고 말 거야 세상은 혼자서 살아가는 게 아니야 지금은 그렇게 자신만만한) 터질 것 같잖아 닥치라고 제발 쑤셔버리기 전에 존나 쑤셔버리기 전에 제발 좀 누가 쑤셔버리기 전에 찔러버리기 전에 다 썰어버릴 거야! 썰어버릴 거야! 먹여버릴 거야 개새끼! 쑤셔버릴 거야 찔러넣을 거야 쑤셔버릴 거야 칼 칼이요 칼이 말입니다 칼이요 너의 칼이요 칼 빛이 나요 날카로워요 빛이 나요 딱딱해요 파래요 찌른다고 이 씨발놈아 빛이 나요 납작해요 빛이 나요 찔러넣어요 싹뚝 잘라버려요 썰어버려요 녹이 슬어요 빛이 나요 빛이 빛이 빛나요 계속 빛나요 계속 계속 빛나요 빛이 나요 존나 빛나요 이 새끼 빛이 난다고 이 병신새끼 (표정을 짓고 있지만 너는 어린애일 뿐이야 한낱 어린애일 뿐이야) 빛나요 계속 빛나요

종이 울렸습니다. 그가 일어섰습니다. 나도 따라 일어섰습니다. 그는 수업이 있다며 뒷목을 긁적였습니다.

 

남자는 샤워가운을 건네준 다음 나를 욕실로 밀어넣었습니다. 물을 틀자 찬물이 쏟아져내렸습니다. 나는 물을 한가득 입에 물었습니다. 나의 몸은 쏟아지는 찬물 아래서 딱딱하게 얼어갔습니다.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온몸이 빳빳하게 굳어갔습니다.

욕실에서 나오자 침대 위에 만원짜리 네장이 흩어져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한장은 침대 아래 떨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그것을 주웠습니다. 담배가, 담배가 몹시도 피우고 싶었지만 남자가 담배를 가져가버렸습니다. 옷을 입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지금 고객님의 전화기가〉 비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준희, 준희 생각이 났습니다. 지난 십이월 삼십일일 준희가 나를 에메랄드모텔 이백오호에 버려두고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러 광화문에 갔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가지 말라고 애원을 해보았으나 준희는 보쌈 중짜를 하나 시켜놓고 광화문으로 갔습니다. 나는 왜 같이 가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을까?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나는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습니다. 〈나도 함께 가겠어〉 〈아니 너는 여기에 있어〉 하는 대화를 예상하였기 때문일까요. 나는 너를 위해서 새옷을 입고 예쁜 케이크와 선물까지 사가지고 커피숍에 그림같이 앉아서 너를 그림같이 앉아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너는 나를 데리고 시내를 빙빙 돌다가 모텔로 끌고 와서 씻지도 않고 다짜고짜 형광오렌지색 원형침대로 거칠게 밀어붙였지. 그러고는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러 광화문으로 가겠다고 선언하였다. 너는 외투를 껴입고 검정색 비니를 쓰고 회색 버버리 머플러를 두르고 가죽장갑까지 낀 상태였어. 그러고는 일월 일일 아침 여섯시 사십분에 돌아오자마자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왔잖아. 〈배고프지 않아? 먹고 하자〉 〈싫어〉 〈저기 보쌈 남은 게 좀 있는데〉 〈하고 먹자 내가 안흥찜빵을 사왔어〉 〈나 피곤하단 말이야〉 〈나도 피곤해 지하철에서 깔려 죽는 줄 알았어〉

나는 창백한 얼굴로 에메랄드모텔을 빠져나왔습니다. 한낮의 햇살에 눈이 부셔 나는 고개를 돌렸습니다.

 

〈처음 나온 거죠?〉 〈네〉 〈닉네임이 뭐예요?〉 〈루이스, 루이스요〉 〈반가워요 루이스양 그런데 왜 아이디가 루이스예요?〉 〈루이스 캐럴을 좋아해서요〉 〈루이스 캐럴이 누구지? 아아 그 이상한 앨리스 쓴 사람?〉 〈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요〉 〈몇살이에요?〉 〈열일곱이요〉 〈이야 어리네 고등학생?〉 〈아니요〉 〈중학생인가 설마〉 〈아니요〉 〈대학생?〉 〈학교 안 다녀요 자퇴했어요〉 〈이유 물어봐도 돼요?〉 〈네〉 〈왜 자퇴했어요?〉 〈모르겠어요〉 〈뭐 해요 그럼 요새?〉 〈재즈댄스 배우러 다녀요〉 〈그렇구나 앞으로 자주 나와요 자주 봐요〉 〈네〉 〈어떤 밴드 좋아해요?〉 〈아아 저는요 그냥 가리지 않고 들어요 요새는 벡이랑 벨앤쎄바 듣고 있어요〉 〈자퇴한 지는 얼마나 됐어요?〉 〈다음주에 검정고시 보러 가요〉 〈그렇구나 꼭 붙어요〉 〈감사합니다 앗 촛불이 꺼졌다〉 〈괜찮아 다른 촛불 달라고 하면 돼 언니! 여기 촛불이 꺼졌어요 다 타졌나봐요〉 〈이 노래 뭔지 알아요? 지금 나오는 노래〉 〈캣파워〉 〈그렇구나 아아 좋다 제목이 뭐예요〉 〈베어울프〉 〈나랑 취향 비슷한 거 같아 맥주 마실래요?〉 〈네〉 〈뭐 마실래요?〉 〈벡스다크 주세요〉 〈담배 피워요?〉 〈아뇨〉 〈남자친구 있어요?〉 〈아니요〉 〈사귀어본 적 있어요?〉 〈아니요〉

 

자퇴를 하고 나서 삼년 후, 드디어 나는 김은철을 죽이는 데 성공할 수가 있었습니다. 나는 매일 밤 열한시 삼십오분 수신을 차단한 채로 그에게 이메일을 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잘 지내시나요? 선생님, 제가 갑자기 이렇게 메일을 보내서 조금은 놀라셨지요?

선생님

제가 자퇴를 한 진짜 이유가 뭔지 아세요? 그 이유는요, 선생님, 왜냐하면요, 선생님만 보면 자꾸 필통 속에서 커터칼이 반짝반짝 빛을 내더라구요. 자꾸 꺼내서 만지작거리게 되더라구요. 자꾸 선생님이 죽이고 싶어지더라구요. 자꾸 찔러죽이고 싶더라구요. 자꾸만이요. 자꾸만 자꾸만이요. 자꾸만 선생님을 정말로 진심으로 기꺼이 죽이고 싶었습니다.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하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생각은요 아직까지도 변함이 없어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수능준비도 하고 있고요. 그런데 선생님 때문에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요. 선생님 생각만 하면 저는 정말

기분이 나빠져요! 선생님만 죽어주시면 저는 아주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정말이요. 아주 잘이요. 그래서 말인데요 죽어주시면 안될까요? 제발이요. 딱 한번만요. 제발이요〉

이주쯤 지났을까 나는 하예진과 메씬저를 하다가 우연히 그의 사망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예진은 자신의 동생이 그가 선생으로 있는 학교를 다니는 자신의 동생이 그렇게 말하였으니 확실한 정보라고 하였습니다. 위암 말기였대요. 그래서 학교를 잠시 쉬고 있었대요. 두달째요. 그는 내가 보낸 이메일을 확인하였을까요? 그는 내가 보낸 이메일을 읽고 충격을 받아서 죽은 것은 아니었을까요? 거짓말같이 말입니다. 영화같이 말입니다.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하지만 어때요 아아 나는 기뻤습니다. 뛸 듯이 기뻤습니다. 정말로 근사하지 않은가요? 인생이란 이런 겁니다. 이래서 죽지 않고 살아가는 거지요. 바라면 이루어지는 겁니다. 오늘의 소망이 곧 내일의 현실인 겁니다. 나는 이렇게 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겁니다. 아아 정말로 잘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직접 나서는 길밖에는 없었잖아요. 물론 저는 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국 성공했을 겁니다. 인간이란 어쨌든 죽을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그가 죽음으로써 그와 함께한 시절은 모두 소멸한 것만 같이 생각되었습니다. 준희도요 그리고 그 에메랄드모텔의 남자도 잊은 것만 같이 생각되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이죠. 여전히 나는 화가 납니다. 여전히 나는 괴롭습니다.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나는 구십구 퍼센트의 복수심과 일 퍼센트의 과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사람들은 나를 이루고 있는 성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 틈에 끼어서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도 나는 평범하게 하루를 마감하고 평범한 침대 속으로 평범하게 기어들어갑니다. 준희는 어디로 가는 길이었을까요. 옷차림을 보아서는 평범한 회사원인 것 같은데요.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쫓아가볼걸 그랬습니다. 말을 걸어볼걸 그랬습니다. 이름을 불러볼걸 그랬습니다. 후회가 됩니다. 나는 내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절망하지 않아요. 즐거우니까요. 이것은 아는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니까요. 나는 과거와 함께 노래하고 과거와 함께 춤춥니다. 가끔 과거와 싸우기도 하지만 그건 프로레슬링 같은 거니까 심각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시간이 흘러 모든 것은 조금씩 희미해집니다. 그렇다고 생각되죠.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닙니까? 잠시 보자기로 덮어놓은 것뿐이죠. 냉장고에 넣어둔 것뿐이죠. 하지만 김치는 쉬어갑니다. 냉장고는 조금씩 김치냄새로 물들기 시작하고 그 냄새가 무서워서 나는 냉장고를 열지 못합니다. 냉장고 안에는 레모네이드도 있고 살구도 두개나 있고 소고기장조림이랑 비엔나쏘시지도 있는데요. 그것들도 모두 천천히 썩어갑니다. 내 식생활도 함께 썩어갑니다. 어서 냉장고 문을 열고 김치를 꺼내야 합니다. 김치를 꺼내 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지 못합니다. 나는 준희를 버리지 못합니다. 준희는 천천히 썩어가며 내 몸을 온통 검은 벌레들로 채웁니다. 도대체 이것은 무슨 일입니까. 나는 준희가 밉지 않은데요. 죽이고 싶지 않은데요 그런데요 왜 보자기 아래는 썩어갑니까. 나는 왜 냉장고 문을 열지 못합니까. 왜 그곳에서는 여전히 김치가 부글부글 끓고 있습니까.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서대여점에 들러 20세기 소년 5, 6권을 반납하고 7, 8, 9, 10, 11권을 빌렸습니다. 연체료가 삼천사백원이 나왔습니다. 조용한 거리는 가을빛으로 가득하였고요 하늘은 선명한 쎄룰리언블루였습니다. 구월 십구일 수요일 오후 세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