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안현미 安賢美
1972년 강원도 태백 출생. 2001년 『문학동네』로 등단. aphrodite69@hanmail.net
美里雨
당신의 눈동자 속에는 한그루의 미루나무가 서 있고 미루나무 꼭대기에선 당신의 어머니를 닮은 여자가 용접불꽃을 떨어뜨리며 구름을 조각하고 있다 용접불꽃이 떨어진 자리엔 마을의 아기들이 자라는 꽃밭이 있고 꽃밭지기 늙은 장님은 젖동냥을 하러 나가 늪에서 헤매고 있다 꽃밭에선 여덟번째 여름이 여덟번째 가을을 막 출산하려 하고 마을의 이장은 새로 태어날 계절을 위해 서낭당에서 제를 올리는 중이다 물초롱을 닮은 구름은 곳집 그늘에다 비를 내리고 비는 곳집 그늘을 싣고 젖동냥을 나선 장님의 하초를 지나 이장의 초록빛 영농후계자 모자를 지나 아기들이 자라는 꽃밭을 짓밟은 구둣발 자국에서 잠시 쉬다 비행접시 모양의 구름을 타고 마을을 떠난다 막 태어난 여덟번째 가을은 꽃밭으로 달려가 8명의 난쟁이들을 바구니에 담고 미루나무 꼭대기의 여자에게로 가 청혼한다 화요일이면서 엄마인 여자는 용접불꽃을 여덟번째 가을에게 건네주고 8명의 난쟁이가 든 바구니를 들고 나팔구름 속으로 들어간다 구름 속에선 세상의 ∞한 아픔을 대신해서 불어주는 8명의 난쟁이들의 나팔소리가 들리고 화요일이면서 엄마인 여자는 제 살과 피를 짜내 검은 유두빛 약을 달인다 8명의 난쟁이들 중 가장 작은 난쟁이가 약을 가지고 마을에 도착하자 마을의 우물에선 젖이 출렁거리고 꽃밭지기 늙은 장님은 눈을 뜨고 꽃밭을 망쳐놓은 구둣발 자국에선 다시 꽃이 피고 마을 이장의 오랜 두통거리였던 꽃의 씨들이 탱글탱글 익어간다
비 내리는 아름다운 마을 어귀 서낭당엔 한그루의 미루나무가 서 있고 미루나무 꼭대기엔 당신의 어머니를 닮은 여자가 조각한 당신의 눈동자가 걸려 있다
시집가는 날
일요일, 시집갈 준비를 하러 간다
청량리역 500원짜리 입장권을 산다
무궁화호 기차에서 내린 시어머니의 산나물 배낭을 옮겨 진다
시계탑 위 햇빛이 수줍다
붉은 신호등 안에 갇힌 사내가 오늘은 저승사자 같다
백발성성한 시어머니의 옆얼굴을 슬쩍 훔쳐본다
아이 같다 사슴 같은 눈망울로
윤년 윤달에 수의를 사면 오래 산다고
조심스레 말하던 끝에 그럼 내가 사드릴게요, 했다
일요일, 시어머니 저세상으로 시집갈 때 입을
옷 한벌 사러 간다
족두리, 장삼, 치마, 버선, 손 싸개, 손톱 담는 주머니……
옷태를 황천강에 비춰볼 땐 시집오던 날 같으실라는지
“수의를 높은 곳에 두면 오래오래 산다니 낮은 곳에 두렴”
함께 간 외숙모님 삼베옷을 쓸어보며 농을 건네신다
나는 그저 웃는다
박카스 한병과 삶은 고구마를 손에 쥐여주며
“고맙다. 우리 애기씨 옷도 사주고. 니가 큰일 했다” 하신다
시집와 겨우 옷 한벌 사드린 일밖에 한 게 없는데
겸연쩍어 박카스만 홀짝이다
집으로 돌아와 높은 곳에 수의를 올려놓는다
참기름 듬뿍 넣어 산나물을 무친다
생과 사를 무친다
시어머니 새색시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