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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세뿔베다와 라틴아메리카 문학 번역의 문제
송병선 宋炳宣
문학평론가, 울산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저서로 『가르시아 마르케스』 『보르헤스의 미로에 빠지기』 『라틴아메리카 현대문학과 한국문학』 등이 있음. avionsun@ulsan.ac.kr
1. 라틴아메리카 환상문학과 우리 문학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 번역문학의 동향을 살펴보면, 과거에 비해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상당히 약진했음을 알 수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국내 독자와 출판사에게 홀대를 받았던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지금은 주변적 위치를 벗어나 많은 사람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느낌이다. 이런 현상은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에 현대작품으로는 드물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픽션들』(Ficciones)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Gabriel García Márquez)의 『백년의 고독』(Cien años de soledad)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 두 작가의 작품은 교양인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으로 간주된다는 점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최근 들어 국내의 유명출판사들이 라틴아메리카 문학 출판을 본격적으로 기획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붐’은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시장성이 국내에 어느정도 확보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1990년대부터 우리 문학계가 경험하고 있는 ‘문화정전’(cultural canon)의 변화와 관계된 현상이라는 점이다. 문화정전은 당대의 사상과 미학적 선호도 등에 의해 확립된다. 이것은 오래 지속되기도 하지만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타국에서 유입되는 문화와 끊임없이 충돌하면서 새로운 시각을 지닌 세대들에 의해 바뀐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우리 문학계의 정전에 대한 생각이 변화하면서 수용되기 시작했고, 또한 그런 변화를 가속화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1990년대에 들어 우리나라의 실험적인 젊은 작가들이나 신진비평가들은 당시 소개되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접하면서 종래의 사실주의 문학관을 버리고 환상문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핵심인 메타텍스트, 다성성, 대중예술과 전통문학의 접합을 통한 가짜 사실주의와 보편적 세계주의에 눈을 돌린 것이다. 그러면서 환상적 사실주의와 상호텍스트 기법이 20세기 후반에 새로운 문학을 탄생시켰음을 깨달았다. 이런 정전의 변화과정 속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심에 선 라틴아메리카 현대소설은 80년대 민중문학을 지배하던 사실주의를 극복할 대안으로 등장했다.
특히 우리나라의 문학비평가들 상당수는 보르헤스와 가르시아 마르께스를 주목하면서, 그들의 작품을 ‘환상문학’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당시 사실주의의 반대개념으로 추구되던 환상문학과 포스트모더니즘에 힘입어,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가령 문학평론가 한기(韓基)는 “광범위한 환상적 요소 작용의 현실은 (…) 현대예술 일반의 특징으로 돼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정은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한국 소설문학 발전을 위한 제언: 현실에서 환상으로, 환상에서 현실로」, 『문학정신』 1995년 겨울호)라고 지적하면서 이런 현상이 라틴아메리카 소설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언급한다. 또한 라틴아메리카 작품을 바탕으로 ‘사료적 메타픽션’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구축한 린다 허천(Linda Hutcheon)에 기댄 국내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에게서도 이런 인식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환상문학’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의 범주로만 이해하는 것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산띠아고 꼴라스(Santiago Colás)가 『라틴아메리카에서의 포스트모더니티』(Post modernity in Latin America, 1994)에서 지적하듯이, 린다 허천은 라틴아메리카 현대소설을 편파적이고 자의적인 방식으로 읽으면서 자신의 이론을 설정한 혐의가 짙다. 그녀가 중점을 두고 설명하는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경우, 소설 속에 항상 내재한 역사와 메타픽션의 문제를 넘어, 스스로를 ‘리얼리즘 작가’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게 ‘현실’이란 일상사와 경제적 고통 같은 눈에 보이는 현실뿐만 아니라, 신화나 신앙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한 예로 동양의학을 들어보자. 동양의학은 서양에서 ‘유사의학’으로 분류된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현실로 인식하는 서양과학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음양오행(陰陽五行)에 바탕을 둔 침술의 효력을 믿고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서양의 ‘과학적’사고관이 이해할 수 없는 현실관이 바로 ‘마술적 사실주의’인 것이다. 이렇게 가르시아 마르께스는 “이성주의자들과 스딸린주의자들이 항상 강요하려고 했던 현실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현실’의 지평을 확장한다. 그런 지평의 확장을 서양인들은 ‘마술적’이라고 불렀던 것이고, 우리 학계에서는 대부분 가르시아 마르께스를 보르헤스와 제대로 구별하지 않고 환상문학으로 묶어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런 수용의 문제가 있지만, 어쨌든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라틴아메리카 문학전공자의 몫일 것이다.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보르헤스와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작품들이 대부분 번역되었다. 이 두 사람은 20세기 후반의 세계문학을 주도했고 현대문학의 지평을 바꾼 장본인들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고, 이들의 작품은 우리 문학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이제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우리 작가들을 찾아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소개된 라틴아메리카 문학작품들을 살펴보면, 보르헤스와 가르시아 마르께스에 버금가게 루이스 세뿔베다(Luis Sepúlveda)의 작품이 많이 번역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세뿔베다의 작품은 왜 그토록 많이 번역되었고 번역되어야만 한 것일까?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 감춰진 문제는 없을까? 이런 의문은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작품 번역에 어떤 문제점이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어야 바람직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든다.
2. 라틴아메리카 현대문학과 세뿔베다
세뿔베다가 라틴아메리카 현대문학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라틴아메리카 현대소설의 흐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라틴아메리카 현대소설은 ‘붐(Boom) 소설’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오랜 세월 주변부에 머물러 있던 라틴아메리카 소설은 1960~70년대에 들어 갑작스럽게 전세계를 강타하였고 21세기에 이른 지금도 창조적 활력을 보여주는 세계문학의 중요한 거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렇게 ‘붐 소설’은 라틴아메리카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세계문학의 중심에서 문학의 현단계를 보여주는 문학으로 발전했다.
‘붐 소설’의 대표작가로는 아르헨띠나의 보르헤스와 훌리오 꼬르따사르(Julio Cortázar), 멕시코의 후안 룰포(Juan Rulfo)와 까를로스 푸엔떼스(Carlos Fuentes), 뻬루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Mario Vargas Llosa), 꼴롬비아의 가르시아 마르께스 등이 있다. 이들이 바로 ‘환상적 사실주의’나 ‘마술적 사실주의’같은 문학사조를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이 작가들은 현실의 개념과 작가의 임무에 대해 급진적인 성향을 취했다. 그래서 직선적인 시간개념과 인과관계에 집착하는 낡은 사실주의를 배격하고 현실이란 불가사의하며 애매모호하다고 주장하면서, 환상과 신화, 창조적 상상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이들은 전통적인 작중인물과 작가의 권위를 부정하고, 소설의 주제보다는 소설언어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이런 실험기법은 진부한 것으로 전락하였고 그로 인해 위기를 맞게 되었다.
‘붐 소설’은 그들보다 젊은 작가들, 소위 ‘포스트 붐’이라 일컬어지는 그룹의 도전을 받았다. 그들은 대부분 1970년대 라틴아메리카를 휩쓸었던 군부독재에 저항하며 다른 나라로 망명했다가 민주주의가 회복되면서 귀국한 작가들이다. 이런 경험 때문에 ‘포스트 붐’은 강력한 사회비판을 내포한 사실주의로 회귀하며 독자들이 읽기 쉬운 소설을 만들어냈다. 더불어 ‘붐 소설’의 작가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페미니즘, 유대인, 동성애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 같은 주제들을 부각시켰다.
그렇다면 과연 세뿔베다는 어디에 위치할까? 사실 세뿔베다라는 이름은 1980년대 이후의 라틴아메리카 소설에 대한 연구에서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지만 비평가들은 하나같이 세뿔베다를 ‘포스트 붐’작가로 분류한다. 우선 그의 인생역정이 그렇다. 1949년 칠레의 오바예에서 태어난 그는 자유투사이자 환경운동가이다. 1973년 삐노체뜨(Pinochet)가 이끈 군부에 의해 사회주의를 표방한 아옌데(Allende) 정부가 무너지자 그 역시 체포되어 고문받고 수감되지만, 국제사면위원회의 적극적인 개입 덕에 외국으로 망명하여 지금도 스페인에서 살고 있다.
한편 문학적으로도 그는 ‘포스트 붐’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이국적이고 허구성이 강한 마술적 사실주의와 결별하고, 실제 인물들과 무대를 배경으로 삼으면서 ‘현실의 마술’을 제시한다. 그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소녀들이나 초콜릿을 마시고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신부를 등장시키지 않는다. 대신 단순하고 사실적인 필체로 ‘야만적 문명’과 ‘문명화된 야만’의 대립을 통해 무책임하게 자행되는 환경파괴를 고발한다. 이런 이력이나 문학적 특성으로 볼 때 세뿔베다는 분명히 ‘포스트 붐’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3. 공식담론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환경소설
라틴아메리카의 문학연구자들이나 독자들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유럽과 미국의 독자들은 세뿔베다를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작가로 여기고 있다. 이처럼 그를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은 『연애소설 읽는 노인』(Un viejo que leía novelas de amor)이다. 아마존 밀림을 주제로 다룬 기존 작품들이 자연을 대상화하여 착취하는 서구적 세계관에 알게 모르게 젖어 있는 것과 달리, 이 소설은 인간과 자연의 균형과 조화를 강조하면서 앞으로 환경문학이 나아가야 할 관점을 보여준다. 그의 또다른 소설 『지구 끝의 사람들』(Mundo del fin del mundo)도 일본에 의해 남극바다에서 자행되는 불법적인 고래 포획과 일본을 위해 봉사하는 타락한 칠레정부, 그리고 이에 맞서 고독하게 싸우는 어느 노인의 의연한 삶을 그리고 있다.
이렇듯 세뿔베다의 작품들은 주로 환경을 문제삼는데, 라틴아메리카에서 환경의 문제는 매우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역사적 수탈의 결과로 만들어진 라틴아메리카의 특정한 상황과 관련이 있다. 정복 초기부터 강제로 이식된 르네쌍스의 인본주의 이데올로기는 다른 세계관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침묵시키면서 자기들과 다른 인간과 자연자원을 착취했다. 이것은 라틴아메리카 토착문화의 파괴로 이어졌고, 환경약탈을 가속화했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라틴아메리카인들 스스로 이런 서구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1492년 이후 라틴아메리카는 서구와 동일한 약탈양식을 재생해왔다. 그리고 이런 서구사상은 원주민이나 흑인 들을 경시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환경파괴를 만연시켰다.
1980년대 이후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뿌리깊은 서구 인본주의 사상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문학을 구성하려고 시도한다. 이런 글쓰기는 지역들마다 고유한 경험에 바탕을 둔 세계관을 보여주면서 라틴아메리카의 문화적 다양성을 탐험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환경약탈과 관련된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영역도 그중의 하나를 이룬다. 특히 세뿔베다의 『연애소설 읽는 노인』은 라틴아메리카 환경소설의 의미를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세뿔베다가 슈아르족과 살던 시기에 깨달은 밀림의 의미를 전해준다. 주인공 안또니오 호세 볼리바르는 40년간 아마존 밀림에 있는 엘 이딜리오라는 마을의 오두막집에서 살아왔다. 그는 몇년 전 아내가 죽은 뒤로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연애소설을 읽는다. 안또니오는 그곳에서 슈아르족에게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그들의 의식에 참여하면서 그들과 어울려 지낸다. 그런데 어느날 한 미국인이 살쾡이에게 죽임을 당한 채 발견된다. 그러자 엘 이딜리오의 권력층을 대표하는 읍장은 안또니오에게 정글 안내인으로 살쾡이를 찾아낼 것을 지시한다. 안또니오는 사냥에 동참하지만 예전에 백인 사냥꾼이 살쾡이 새끼들을 쏴 죽이고 수놈에게 상처를 입혔기 때문에 암살쾡이가 사람을 잡아먹는 맹수로 돌변하여 복수한 것임을 직감한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살쾡이사냥이 시작되고, 소설은 공식담론의 생산자들과 그 반대편의 슈아르족의 상이한 생각을 동시에 드러낸다. 마침내 안또니오는 암살쾡이를 죽이지만, 그는 못마땅한 듯이 엽총을 강으로 던져버리면서 자기의 승리를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아마존의 처녀성을 유린하는”백인의 비겁함과 경제적 탐욕으로 야기된 모든 것을 저주한다.
이렇게 『연애소설 읽는 노인』은 인간과 암살쾡이의 대결을 통해 인간의 약탈행위가 야생동물을 말살하고 환경을 교란시킬 지경에 이르렀음을 고발하며, 싸움의 승패를 떠나 대지와 대지의 모든 생명체는 소중하다는 진리를 간결하면서도 감동적으로 들려준다. 이런 점은 환경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들이다. 그런데 주인공 안또니오는 ‘야만적 문명’과 ‘문명화된 야만’을 대립시키면서 전자를 비판하지만, 후자를 무조건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서양적 관점과 슈아르족의 지혜를 통합하면서 인간이 우주의 수많은 구성요소 중의 하나라는 것을 깨닫고, 모든 동식물과 인간이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다.
서양의 관점과 슈아르족의 지혜를 동시에 받아들인 주인공처럼, 세뿔베다는 비열하고 타락한 관리들과 자연자원의 약탈을 고발하면서 환경파괴를 부단히 비난하지만, 서양의 가치를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서양문화와 원시문화의 융합을 마구 찬양하지도 않는다. 대신 주인공의 목소리를 통해 원시부족의 지혜와 자연을 존중하는 생각을 서양문명의 합리성과 통합하는 새로운 관점을 창조할 필요성이 있다고 역설하는 데로 나아간다. 그렇게 세뿔베다의 작품은 세상을 구성하는 상이한 요소들이 조화로운 균형을 찾는 것이 시급한 문제임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이런 다문화주의적 사고는 서양중심적이고 권위적이며 체계적인 공식담론에 대한 반발과 슈아르족의 지혜라는 타자성의 인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은 대립적 구조로 전개된다. 우선 세뿔베다는 현실적 요소(치과의사, 읍장, 연애소설)와 허구적 요소(엘 이딜리오, 미쳐버린 암살쾡이)를 밀림이라는 무대를 배경으로 재창조하면서, 그것들을 자기가 상상한 상황 속에서 혼합한다. 그런 창작과정을 통해 읍장과 백인들의 서양적 관점에 의한 ‘비문명화’된 밀림의 개발과, 노인을 통한 ‘타자의 인정’이라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는 다문화적 관점을 형성한다. 이 관점은 밀림이 원주민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조화로운 공간임을 인정하면서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양의 개발적 사고관이 수용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작품은 밀림이라는 타자의 입장을 통해 서양에 의해 규정된 것에 의문을 품으면서 기존 밀림소설의 구조를 해체한다. 라틴아메리카의 기존 밀림소설은 유럽 근대성의 영향을 받아 서양의 정전을 따르는 ‘고급’문화와 그외의 것이 기록된 ‘하급’문화를 나누고 여기서 전자를 지향했다. 다시 말하면, 하위주체인 타자가 제공하는 정보와 지식으로 타자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했던 것이다. 그러나 밀림이라는 주제에 진실로 접근하고자 한다면, 서양과 비서양의 다양한 관점에서 직·간접적으로 밀림을 다룰 필요가 있다. 세뿔베다의 작품들은 바로 이런 필요성을 바탕에 두고 있으며, 이것이 『연애소설 읽는 노인』의 중요한 가치로 부각된다. 이 소설은 대립적 구조를 이용하지만, 서양의 가치를 유지하면서 슈아르족의 지혜를 인정하는 주인공을 통해 두 문화의 조화만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다는 제3의 시각을 제시한다.
한편 이 소설은 기존의 사회가 문화적 기억으로 지니고 있던 밀림의 이미지, 다시 말하면 악과 야만과 혼란, 죽음과 위험과 비문명의 상징으로서의 야생 혹은 자연에 대한 관점을 의문시하기도 한다. 그래서 세뿔베다는 기존의 체계적이고 권위적인 서양담론이 아마존이란 무대에서는 부적절하다고 밝히면서, 서양의 관점이 보편타당하게 모든 곳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여러차례 지적한다. 가령 “그들은 황당한 법조항 때문에 밀림의 빈터에 시체를 버려둘 수 없었다. 시체는 목에서 생식기까지 절개한 후 내장을 모두 꺼내고 소금으로 채워야만 했다. (…) 그러나 이 경우에는 빌어먹을 미국인이었고, 그래서 뱃속에서 창자를 파먹는 구더기들까지 통째로 데려가야만 했다. 그 시체가 배에서 내릴 때면 악취 풍기는 빈 자루밖에 되지 않을 것이었다”라는 대목은 이런 관점을 잘 보여준다.
전통적 서양적 가치의 해체는 과장과 외설을 포함한 패러디를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패러디는 법 앞에서는 미소, 진지함 앞에서는 조롱, 얼굴 앞에서는 가면처럼 세상의 두 가지 태도를 보여주면서, 기존의 대립적 구조가 지닌 중심—주변, 사실—허구의 구도를 해체한다. 그리고 이런 해체는 기존의 공식담론에 대한 저항으로 발전될 뿐만 아니라 인종적·역사적·문학적 기록으로도 이용될 수 있는 현재의 다문화적 산물로 자리잡는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주인공 안또니오가 “너무나 아름다워 인간의 야만을 잊게 해주는 말로 사랑을 이야기하는 소설과 그의 오두막이 있는 엘 이딜리오”를 향해 걷기 시작하는 것은 서양이 야만성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도 지녔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앞으로 환경문학이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원주민문화와 서양문화의 아름다운 결합으로 나아가야 함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4. 세뿔베다 번역과 기획의 문제
최근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의 작품은 대부분 주제와 형식의 다양성을 강조한다. 세뿔베다 역시 아마존을 비롯한 환경문제를 서구의 공식담론에 대한 저항으로 사용하면서 이런 다양성에 일조한다. 특히 『연애소설 읽는 노인』은 기존 밀림소설의 관점과 틀을 해체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평가되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우리말 번역과 세뿔베다 작품들의 국내 출간에서는 몇가지 문제점이 발견된다.
우선 번역의 문제를 살펴보자. 최근 들어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전공자들이 번역을 맡으면서 해당 작품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번역하거나 황당하게 오역하는 문제는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연애소설 읽는 노인』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가령 이 소설의 첫 대목을 살펴보자. 우리말 번역본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늘에는 당나귀 배처럼 불룩한 먹장구름이 무겁게 드리워져 있고, 밀림을 휩싸고 도는 끈끈하고 칙칙한 공기가 금방이라도 들이닥칠 폭풍우를 예고하고 있었다. 이미 우기에 접어든 날씨였다. 사위가 잔뜩 흐린 가운데 어디선가 불어 닥친 사나운 바람이 읍사무소 앞을 장식한 바나나나무를 흔들어대며 땅에 떨어진 잎사귀들을 휩쓸어갔다.
하지만 원문을 번역해보면 이렇다.
하늘은 낮게 드리워져 위협하고 있는 불룩 솟아오른 당나귀 배였다. 후덥지근하고 끈적끈적한 바람이 떨어진 잎사귀들을 휩쓸었고, 읍사무소 앞을 장식하고 있던 발육부진의 바나나나무를 사정없이 흔들어대고 있었다.
이런 지적은 번역이 제2의 창작임을 생각하지 않은, 원문지상주의에 얽매인 의견처럼 보일 수도 있다. 사실 실제 번역의 관점에서 사소한 오역이나 중요하지 않은 단어를 생략하는 것은 전체적인 작품의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더군다나 상업적 관점에서 보면 독자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문체를 선호하는 것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러나 세뿔베다의 작품은 장황한 묘사가 배제되어 복잡하거나 까다롭지 않은, 단순하고 명쾌한 문체가 흥미로운 일화와 접목되면서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원문에 존재하지 않는 수식어를 창조하여 추가하는 이러한 번역은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런 번역이 시작 부분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일관’되게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역의 문제와 더불어 우리말로 번역 출판된 세뿔베다의 작품들은 기획의 문제도 드러낸다. 라틴아메리카 문학계에서 세뿔베다는 매우 특이한 작가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자국에서 인정받은 후 라틴아메리카 대륙을 거쳐 유럽과 미국에서 평가받는 ‘절차’를 밟는 것과 달리, 그는 유럽에서 먼저 『연애소설 읽는 노인』으로 이름을 떨친 후 라틴아메리카와 그의 조국 칠레에 알려졌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세뿔베다는 칠레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유럽에서와 같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정황은 현재 라틴아메리카 문학계에서의 세뿔베다의 위치에 의문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이런 의문은 라틴아메리카의 대형서점을 방문해보면 그가 ‘붐’소설 작가들이나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 비해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더욱 깊어진다. 그러나 어쨌든 세뿔베다는 유럽에서 널리 알려진 덕택에 우리에게도 소개되었다. 이는 『연애소설 읽는 노인』의 첫 한글번역본이 프랑스어판에서 옮겨졌다는 사실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이후 그의 작품은 거의 모두 우리말로 번역되었는데, 『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비롯하여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 『감상적 킬러의 고백』 『귀향』 『지구 끝의 사람들』 『파타고니아 특급열차』 『외면』 『소외』 『핫라인』 등 9종에 이른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 현대문학을 전세계로 파급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 미국에서는 단지 『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비롯한 다섯 작품 정도만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물론 미국의 출판시장을 반드시 우리의 지표로 삼아야 하는 것은 아니며, 그것만을 따른다면 신식민주의 지식의 또다른 예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활발하게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번역했던 미국과는 달리, 이제야 비로소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소개되고 있는 한국에서 세뿔베다의 거의 모든 작품이 번역·출간된 데 비해 라틴아메리카 현대문학의 대표작으로 세계문학사의 한 장을 차지하는 푸엔떼스의 『아르떼미오 끄루스의 죽음』(La muerte de Artemio Cruz), 바르가스 요사의 『색시집』(La casa verde), 꼬르따사르의 『팔방차기놀이』(Rayuela), 기예르모 까브레라 인판떼(Guillermo Cabrera Infante)의 『세 마리의 슬픈 살쾡이』(Tres tristes tigres) 등이 아직까지 제대로 번역되지 않은 현실은 상당히 문제적이다.
우리의 경우가 보여주는 것처럼 옥석을 가리지 않는 ‘싹쓸이’기획·출간은 작품 중심이 아니라 지명도에 의존한 작가 중심의 번역이라는 출판계의 한계를 드러내며, 동시에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추구하는 다양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특정작가만을 과도하게 편식하게 만든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최근에 우리 출판계는 미국과 유럽의 평가에 의존하여 마술적 사실주의나 환상문학 계열의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선별하여, 이런 작품들을 주로 기획·번역하고 있다. 사실 라틴아메리카 문학에는 서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이름을 통해 정치적으로 이용한 마술적 사실주의 작품 못지않게 큰 흐름을 구성하고 있는 증언소설이란 장르가 있는데, 이 장르의 대표작인 미겔 바르네뜨(Miguel Barnet)의 『어느 도망친 노예의 일생』(Biografía de un cimarrón)이나 지오꼰다 베이(Gioconda Belli)의 『내 마음속의 조국』(El país bajo mi piel) 등이 라틴아메리카의 하위주체에 촛점을 맞추면서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 등장한 작가들의 작품 중에도 빼어난 완성도를 자랑하는 것이 많이 있으나 역시 환상문학이나 마술적 사실주의와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국내에서는 배척당하고 있는 것 또한 아쉬운 일이다.
이제 라틴아메리카 문학작품의 번역은 미래지향적인 길을 향해 나아가야 할 때이다. 그것은 우리 시장의 요구에 따른 번역과 더불어 새로운 수요와 지평을 창출하는 번역도 함께 행해질 때 이루어질 수 있다. 여기서 가능한 한 오역을 줄여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또한 라틴아메리카 문학 전공자들이 번역을 담당하고 있는만큼 서구의 논리에 종속되기보다는 균형감각을 가지고 우리 문학에 빛을 비추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작품을 선별하여 번역하고 소개해야 할 것이다. 서구의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따르기보다는, 지금 한국문학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으며,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어떤 식으로 이런 요구에 부응할 수 있을지 비판적 시각에서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지금 라틴아메리카 문학 번역자들이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이다.